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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엔 더 용감하지, 앤 섹스턴

밤엔 더 용감하지 Braver at night 앤 섹스턴Anne Sexton(지음), 정은귀(옮김), 민음사 앤 섹스턴 시집을 읽었다. 상당히 노골적이었다. 하지만 공격적이지 않았으며 스스로 버티면서 스스로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이었다. 미워하지만 사랑했고 죽고 싶었지만 동시에 살고 싶었다. 그러면서 그러한 자기 내부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었다. 1960년대 미국 여류 시인이 무엇과 싸웠는지 알 수 있다고 할까. 더블 이미지 Double Image (...) 너를 기쁨이라 부를 수 있도록 우리가 너를 조이스라 이름 지은 걸 나는 기억해 강보에 푹 싸인 채 축축하고 이상하게, 너는 내 무거운 가슴에 어색한 손님처럼 왔어. 나는 네가 필요했어. 나는 남자애를 원하지 않았어. 여자아이만을, 이미 사랑받고 있는, ..

내가 사랑한 것들은 나를 울게 한다, 김경민

내가 사랑한 것들은 모두 나를 울게 한다 김경민(지음), 포르체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을 그만 두고 아이를 키우며 글을 쓰는 이의 시선집이다. 아마 자신에게 인상깊었던, 그래서 누군가에게 소개하고 싶었던 시들을 모아, 시마다 짧은 에세이를 붙여 만든 책이다. 시를 읽고 싶은 이들에게, 그러나 시를 어떻게 읽어야할 지 모르는 이들에게 이 책은 참 좋다. 시간적 여유가 없어도 상관없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으면 된다. 마음에 드는 시가 있으면 두 세 번 읽어도 된다. 이런 책은 참 부담없다. 아무렇게 읽어도 된다. 소리를 내어 읽으면 더 좋다. 나는 퇴근 후 집에서 혼자 술 한 잔을 마시고 난 다음 이 책을 꺼내 읽었다. 좋았다. 요즘 시인이 누가 있는지, 그들은 어떤 시를 쓰는지 궁금해 이 책을 읽었는데,..

완벽한 날들, 메리 올리버

완벽한 날들메리 올리버(지음), 민승남(옮김), 마음산책 사 놓은 지 한참 만에 이 책을 읽는다. 몇 번 읽으려고 했으나, 그 때마다 잘 읽히지 않았다. 뭐랄까. 자신의 삶에, 일상에, 지금/여기에 대한 만족과 찬사, 행복과 신비에 대한 온화하고 밝고 서정적인 서술들과 표현들로 가득한 이 책이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던 걸까, 아니면 나는 이런 책 읽기를 두려워하거나 맞지 않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 결국 읽기는 했으나, 역시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깊이 이 책에 빨려들지 못했다. 매혹당하지 못했다. 많은 이들의 찬사와 달리, 나에겐 그저 좋은 산문집이었다. 하긴 이 정도만으로도 나쁘진 않으니까. 하지만 나에게 최고의 산문집은 기싱의 이나 보르헤르트의 같은, 세계와 자..

당신의 자리 - 나무로 자라는 방법, 유희경

당신의 자리 - 나무로 자라는 방법유희경(지음), 아침달 어쩌면 진짜 나무에 대한 이야기일 지도 모른다. 진짜 나무가 사람 되기를 꿈꾸는 이야기, 그래서 흔들, 흔들거리는 시집일 지도. 아니면 나무가 되고 싶다는 사람 이야기일지도. 하지만 그 나무는 외롭지 않아야 한다. 시인은 '나무로 자라는 방법'을 찾지만, 끝내 찾지 못하고, 혹은 찾았지만, 행동하지 않는다. 나무로 자라지 않고 나무로 자라는 꿈만 이야기한다. 문장은 한결같이 하나로 끝나지 않고 두 세 문장으로 이어지다가 마침표 없이, 시는 끝난다. 그것은 당신이기도 하고당신이 아닐 수 없기도 하다당신이 남자와 나무를 알지 못하더라도 그러하다- 중에서 한 문장이 있다, 그 문장을 부정하는 몸짓이 이어진다. 그리고 그건 생각 뿐이다. 행동이나 실천이 ..

낭만적인 자리, 이영주

도서관에서 시집을 꺼내 읽는다. 어느 토요일 오전. 가족 몰래 나온 도서관. 가끔 가서 책을 빌리는 동작도서관 3층. 어색한 시집 읽기다. 한 때 시인을 꿈꾸기도 했지. 그러게. 요즘 시들은 어떤가. 문학상 수상 시집을 꺼내 읽는다. 한 시가 눈에 꽂힌다. 이영주다. 예전에도 이 도서관에서 잡지에 실린 시를 읽고 블로그에 올리기도 했지. 하지만 그녀의 시집을 사진 않았어. 이번엔 사야 하나. 길게 마음 속으로 고민을 한다. 그리고 시를 노트에 옮겨 적는다. 몇 개의 계절이 지난다. 지났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왔고, 나는 출근을 했다. 그리고 밤이 왔다. 시를 블로그에 옮겨적는다. 그러게 이번엔 이영주의 시집을 사야 하나. 이번엔 짧게 고민해야지. ** 낭만적인 자리 그는 소파에 앉아 있다. 길고 아름다..

연인들Lovers, 리처드 브라우티건

Lovers - Richard Brautigan I changed her bedroom:raised the ceiling four feet,removed all of her things(and the clutter of her life)painted the walls white, placed a fantastic calm in the room, a silence that almost had a scent,put her in a low brass bedwith white satin covers and I stood there in the doorwaywatching her sleep, curled up,with her face turned away from me. 1969년에 나온 시집 에 실린 시다. 초..

흰밤, 백석

흰밤 옛성城의 돌담에 달이 올랐다묵은 초가지붕에 박이또 하나 달같이 하이얗게 빛난다언젠가 마을에서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매여 죽은 밤도 이러한 밤이었다 - 백석, 1935년 11월, 혼자 술에 취해 거실 탁자에 앉아 시집을 꺼내읽다 왈칵 눈물이 흘렀다. 예상치 못한 눈물에, 내가 왜 이럴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직 감수성이라는 게 살아있었나 하는 안도감을 아주 흐르게 느꼈다. 글쓰기는 형편 없어지고 책읽기도 그냥 습관처럼 변해, 종종 내가 왜,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요즘이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지혜가 생긴 것도 아니고 논리 정연해진 것도, 그렇다고 사람들을 감화시켜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 리더십을 가지게 된 것도 아니다. 도리어 거짓말장이가 되고 불성실해지고 나이가 든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선사..

자살과 노래, 사이드 바호딘 마지로흐

오스네 사이에르스타드의 (권민정 옮김, 아름드리미디어, 2005년)은 책 제목과 달리 아프카니스탄에서의 일상이 얼마나 참혹한가를 보여준다. 그 참혹함 속에서 평온한 일상이 이어지지만, (다들 잘 알다시피) 여성의 삶은 더 참혹해서 자연스럽게 이슬람에 대한 미움 같은 감정이 싹튼다. 그들(일부 이슬람 국가들과 대부분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어리석음, 종교와 경전에 대한 (무자비한) 축어적 해석과 현실적 상황을 무시한 (강압적/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를 통한) 적용이 책 곳곳에서 드러난다. 이 책을 읽기 전, 나는 이슬람 여성에 대한 여러 풍문을 들은 바 있다. 야한 속옷이 잘 팔리며 부르카 밑으로 진한 화장을 하고 집 안에서는 화려한 옷을 입는다고. 이러한 풍문은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선입견을 조장하고 이슬..

충분하다, 쉼보르스카

충분하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Wislawa Szymborska(지음), 최성은(옮김), 문학과지성사, 2016 왜 내가 새삼스럽게 외국 번역 시집을 읽으며 감탄을 연발하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시는 원문으로 읽어야 된다는 생각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한글로 번역된 시의 매력에 빠져든 것은, 아마 언어 너머로도 전해지는 시적 감수성, 또는 해석의 가능성, 그리고 지역과 언어를 관통하며 흐르는 인생과 세계에 대한 태도 같은 것에 감동하고 공감하기 때문이다. 특히 쉼보르스카의 시들은 한글로 옮겨지더라도 그 시적 매력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이는 역자의 노고일 것이기도 하겠지만, 시 자체가 가진 힘을 그만큼 대단한 것일 게다. 내가 잠든 사이에 뭔가를 찾아 헤매는 꿈을 꾸었다,어딘가에 숨겨 놓았거나 잃어버린 뭔가를..

파울 첼란 / 유대화된 독일인들 사이에서, 장 볼락

파울 첼란 / 유대화된 독일인들 사이에서 Paul Celan / unter judaisierten Deutschen 장 볼락Jean Bollack(지음), 윤정민(옮김), 에디투스, 2017 로 잘 알려진 파울 첼란의 연구서가 번역되어 출간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놀라운 일이다. 마흔아홉의 나이에 파리 센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한 시인. 아우슈비츠에서 부모를 잃고 그 자신도 구사일생으로 유대인수용소에서 살아난 사람.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고 말한 아도르노가 그 말을 번복하게 만든 작가. 하지만 시집을 읽지 않는 시대, 한국 시인도 잘 알지 못하는 요즘, 파울 첼란의 시를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이 때, 이 책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감동적이다. 파울 첼란의 시는 쉽지 않다. 하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