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232

지난 일요일, 시루SIRU에서의 한 때

와인을 즐겨 마신 지도 벌써 5년이 되어간다. 아주 우연히 와인에 빠졌다. 그 이후 와인 가이드 북만 몇 권을 읽었고, 거의 매주 와인을 마셨다. 와인에 빠지는 것만큼 위험한 짓도 없다. 재정적인 위기가 오기도 했고 보관을 잘못하는 바람에 값비싼 와인을 날려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와인을 알게 된 건 정말 기분 좋은 일이라 생각된다. 지난 일요일에는 몇 명의 사람들과 함께 와인 모임을 가졌다. 일행 중에 사진을 찍던 이가 있어, 사진 몇 장을 올린다. 시루(SIRU)라는 곳에서, 오후 3시에 만났다. 천정 위로 빼곡히 빈 와인병이 쌓여있다. 제법 좋은 인테리어 아이디어다. 생떼밀리옹 그랑 크뤼 1병, 보르도 AOC 1병, 칠레산 쉬라즈 와인 1병. 그 뒤로 보이는 디켄터. 생떼밀리옹 그랑 크뤼는 디켄팅을 ..

모짜르트...

요즘 너무 바쁘다. 이번 주 금요일까지 책 두 권 읽고 리포트를 하나 써야 하고, 모짜르트의 대관미사(KV 317)을 무려 10번은 듣고 가야 한다. 외워오라고 시키지 않은 것만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을 정도니. 내일까진 여름에 있는 아트페어를 위한 몇 개의 원고를 써야 하고, 회사에서 PM을 맡은 다른 프로젝트에 몇 개의 다른 업무가 추가될 듯 하다.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다 보니, 개인적 일엔 무관심해져 버렸다. 그러다가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요즘 내 사는 모습이 딱히 좋아보이지 않아 보인다. 쓸데없는 자기 반성이랄까. 근처에 사는 친구라도 있으면 소주라도 한 잔 하면 딱 좋은 밤이다. 사무실 근처에서 사온, 브랜딩된 원두 커피 향이 좋다. 오디오에 모짜르트의 대관 미사 CD를 올려놓고..

대학 시절

지난 주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가만히 있어도 목 둘레와 어깨가 아프다. 해야 일은 많고 내 마음은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80년대 후반, 성음레코드에서 나온 팻 매쓰니의 레코드를 낡은 파이오니아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작고 네모난 창으로 밀려드는 6월의 축축하고 선선한 바람이 내 피부에 와 닿는 느낌에 아파한다. 잠시 감기에 걸릴 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꼈다. 혼자 있으면서 아픈 것 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 아주 가끔, 이 방 안에서 내가 죽으면, 나는 분명 며칠이 지난 후에 발견될 것이다. 그래서 더 무서운 것일까. 르 끌레지오의 젊은 날에 발표한 소설 '침묵'은 자신이 죽은 후의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김현의 번역을 좋아했는데, 복사해놓은 종이는 잃어버렸고 김화영의 번역본은 어디에 있는지 서재..

우리가 꿈꾸는 여유

(갤러리 아트링크의 정원) 일요일 낮에 안국동, 사간동 갤러리들을 돌아다녔다. 청바지에 가방을 매고, 가방 속엔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철부지 같은 공부의 열정을 증명하듯 몇 권의 책과 노트, 그리고 철 지난 니콘 D70 카메라가 있었다. 수요일 오전, 지난 일요일의 한가로움이 쓸쓸하게 그립다. 회사 건물 1층에 나가, 몇 주만에, 극소량의 나프틸아민, 니켈, 벤젠, 비닐 크롤라이드, 비소, 카드뮴을 먹었다. 그러면서 내 일상을 탓했다. 고상한 척 하지만, 고상하지 않고, 강한 척 하지만 절대로 강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가끔, 사람들이 서로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100%, 한 톨도 남김없이 다 볼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정말 비극적이고 슬픈 곳으로 변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하지만 아..

生의 스산함을 지나

고등학교 때, 나는 일요일마다 경남도립도서관에 갔다. 창원 공단이 즐비하게 늘어선 거리를 지나 아파트 단지들이 시작되는 곳 어딘가에 위치해 있었다. 그 곳에서 탐독했던 책은 헤르만 헤세이거나 오래된 세계문학전집, 혹은 근사한 제목을 가진 수필이었다. 종종 이쁜 소녀가 도서관에 오길 손꼽아 기다리기도 했지만, 기다린다는 것 자체가 철부지 같은 공상이었다. (하긴 아직 그 공상에서 멀리 벗어나 있는 것같지도 않지만) 주말에도 찾는 사람이 없었던 그 도서관의 복도는 어둡고 스산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마 지금은 다른 곳으로 이전하지 않았을까 싶다) 사람들이 찾지 않는 책들 속에선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그 힘으로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고 있었다. 어제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얼마 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금요일이 가지는 어떤 공포

금요일, 5시에 일어났다. 아직 어두울 거라는 내 예상과 달리 도시는 환해 있었다. 2주 정도 청소를 하지 못한 탓에, 한 명, 옐로우빛깔 사내가 푸른 곰팡이처럼 서식하는 작은 빌라에는, 온통, 낡은 먼지들과, 이리저리 나뒹구는 시디들과, 이미 그 존재의 위력을 잃어버린 LP들, 읽다만 하이데거, 여러 권의 미술 잡지와 도록들로 채워져 있었다. 마치 형이상학적 대기의 밀림 같이 느껴졌다. 지난 계절 벽에 걸어놓은, 철 지난 겨울 옷을 아무렇게나 걸치고, 사각형으로 구획지어진 밀림 속에서, 한 달, 두 달 밀린 여러 고지서들을 한 쪽에다 밀어제치곤, 브람스와 슈베르트를 들었다. 이른 아침, 낮게 깔리는 음악 소리를 들으며, 향이 진한 커피를 마셨다. 육체는 그간 쌓인 피로를 못 견뎌했으며, 정신은 얇게 흐..

사진 몇 장

점심 식사를 했다. 사무실 근처에서의 점심 식사는 대체로 무의미하거나 우울하거나 쓸쓸하다. 하루 종일 기획서를 쓰고 프로젝트를 관리하고 고객이나 파트너에게 전화를 걸어 업무를 협의한다. 어젠 신사동에 있는 어느 갤러리에 들렸다. 그 갤러리의 일을 좀 도와달라고 한다. 회사 일에, 아트페어 준비에, 이젠 갤러리 일까지 해야 하는 건가. 흥미가 있지만,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진 몇 장을 올린다. 멀리 여행이라도 떠나고 싶지만, 100%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오직 일요일 오전이 전부다. 마지막 연애도 오래 전에 1년을 지났고 이젠 2년을 향해 달려간다. 일상을 꽉 짜여져 바쁘게 움직이다보니, 가끔은 치명적인 우울에 빠지기도 한다. 이 지상에서 살아온 시간이 늘어나는 것과 비..

바쁜 주말

15일 스승의 날이라, 아트페어 준비 행사를 끝내자 마자 바로 수서까지 내려갔다. 수서에서 새벽까지 있다가 홍대로 넘어와, 맥주 한 잔을 더 하고 집으로 왔다. 토요일엔 오랜만에 오후까지 잠을 잤다. 그리고 밤에 다시 간단하게 맥주와 와인을 마셨다. 오늘, 일요일 아침에는 일찍 가평에 있는 쁘띠 프랑스엘 다녀왔다. 너무 먼 거리인지라, 아침 9시 반에 출발했으나, 그 곳에서 일을 보고 넘어오니 오후 4시 가까이 되었다. DSLR 카메라를 들고 갔으나, 사진을 찍을 여유는 없었다. 저녁에 잠시 잠을 잤다가, 밤 9시에 일어나 라면 하나를 끓여먹곤 지저분한 내 방을 보면서 투덜거렸다. 뉴욕타임즈에 실린 미네르바 기사를 프린트해서 몇 구절 읽었다. http://www.nytimes.com/2009/05/16/..

환상 버리기

종종 살아가다 보면, 죽고 싶을 때가 있다. 예상치 못한 결과 앞에서 좌절할 수도 있고, 곤혹스런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을 만드는 건 외부적인 요인 보다는 자기 자신이 만드는 경우가 더 많더라. 오늘 오후 일은 손에 잡히지 않고 휴대폰 전화는 계속 오고 몇 가지의 일을 동시에 신경 써야만 했다. 멀티태스킹의 환상을 버린지 오래,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충실히 하려고 하고 있다. 대기가 투명할 땐, 서재 정리하면 참 좋은데 말이다. 대체로 오래된 고정 관념이나 습관, 그리고 환상을 버리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일민미술관 안에서 밖을 찍은 풍경.

현실 정치, 장자연, 그리고 나

요즘 한국을 살아가면서, 왜 이렇게 낯설고 힘들까 곰곰히 따져보았더니, 92학번인 나는 사회생활을 IMF 때 시작해 DJ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거쳐왔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시절에도 현실 정치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피부에 와닿는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이론적인 수준이었고 현실 정치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런데 막상 사회 생활을 해보니, 견고하고 철저한 자본주의 시스템에 혀를 내두르게 되었고 마르크스주의를 새로 바라보게 되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대학 시절, 데모 하지 않는다고 다른 친구들을 왕따시키고 공격하던 이들 대부분은 지금 너무 평범하게 변해버려, 너무 낯설고 도리어 화가 나기도 한다.) 그렇다고 내가 좌파라는 건 아니다. 나는 확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