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23

추억은 술을 마시고

입구는 좁았다. 대형병원 한 쪽 귀퉁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전부였다. 몇 명이 입구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하얀 담배 연기는 지하와 지상 사이를 빙글빙글 오가기만 할 뿐, 저 멀리 날아가지 못했다. 그리곤 금세 희미해졌다. 계단을 내려가자 문 앞에 현금인출기 한 대가 외롭게 서있었다. 죽음이 왔다가 가는 공간 앞의 외로운 ATM. 그 앞에서 사람들은, 나는 현금을 뽑기 위해 서있었다. 작년치 성당 교무금이 두 달 밀려 있어서 그 돈까지 같이 뽑았다. 이젠 현금이 드물어진 시대다. 천천히 걸어나와 복도 테이블 위에 놓여져 있는 조의금 봉투들 사이에서 하나를 꺼내 차가운 현금인출기 속에 있던 만원 짜리 다섯 장을 조심스럽게 넣었다. 조의금 봉투를 전달하며, 조의를 표했다. 누군가의 죽음은, 그 전에 ..

비 내리는 날의 녹턴

이렇게 비 올 땐 쇼팽이구나. 쇼팽의 녹턴만 들으면 왜 고등학교 때 가끔 주말마다 가던 창원 도립 도서관 생각이 나는지 몰라. 노오란 색인표를 뒤져가며 책을 찾기도 하고 빌리기도 하고 혼자 온 나를 사이에 두고 앞서 책을 빌리던 아저씨는 무슨 책을 빌렸나 뒤에 빌린 그 소녀는 무슨 책을 빌렸나 궁금해 했지. 아무 말 없이 서서 물끄러미 창 밖을 보며 아주 잠시 내 미래를 생각했어. 그 옆을 지키던 네모난 색인표를 넣어두던 서랍장과 책들 사이로 지나는 서늘하고 무거운 공기들 사이로 계단이 이어지고 해가 살짝 기울어, 도서관 앞 나무들의 그림자가 길어지기 시작할 때쯤 나들이 나선 여학생들의 깔깔거리던 소리들과 ... 지금도 그 자리에, 그 도립도서관은 그대로 있을려나. 내가 타고 다니던 그 시내버스도 그대로..

스테이지 나인

퇴근길, 우연히 마주친, 새로 생긴 동네 더치 커피 전문점, 스테이지 나인. 그리고 잠깐 동안의 커피 여행. 짧고 굵은 목넘김, 낮고 은은한 향기, 초봄 햇살이 빌딩 사이로 사라지고 그 틈새를 물들이는 어둠. 출렁이는 어두움이 입술에 닿을 때, 살짝 미소를 짓는다. 아, 나는 역시 예가체프구나. 우아하고 깊은 시원함. 시큼함. 쓸쓸함. 허전함. 지난 청춘 깊이 숨겨져 있던, 늙어가는 피부 아래 잠겨있던, 그 기억이 무심한 거리 위로 모습을 드러내며, 함께 다가오는 공포여. 내 삶, 미래의 두려움이여. 쫓기듯 뭉게, 뭉게, 뭉게위로, 위로, 올라가는 내 삶의 진정성이여, 모든 것을 앗아가는 들뜬 모험이여, 얼마 남지 않은 내 영혼의 불꽃을 앗아갔던 사랑이여.

참 미안하고 슬픈 첫 사랑

새벽에 잠 들었는데, 새벽에 눈을 떴다. 마음이 무겁고 복잡한 탓이다. 나이가 들면 사라질 것이라 믿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근심 걱정은 더 많아진다. 내 잘못으로 그런 건지, 아니면 원래 인생이라는 게 이런 건지 모르겠다. 젊을 땐 내 잘못이 아니라 원래 인생이라는 게 이런 것이라 여겼지만,지금은 원래 인생이 이런 게 아니라 내 잘못이라 여기게 되는 건 왜 그런 걸까. 내가 제대로 나이가 들고 있긴 한 건가. 인터넷을 떠돌아다는 영상이 기억나 다시 보게 된다. 사랑이라 ~. 참 미안하고 참 슬프다. 예능프로라 왁자지껄 웃고 떠드는 사이, 지나간 사랑에 대한 후회와 회한으로 살아온 지난 세월 사이로 고백하고 되돌이고 싶은 저 노인의 외침이흰 눈들 사이로 사라진다. 방송 출연진의 탄식이 흘러나오고 ... ...

새벽을 견디는 힘

CANDID 레이블. 지금은 구하지도 못하는 레이블이 될 것이다. 집에 몇 장 있는데, 어디 꽂혀있는지, 나는 알 턱 없고. 결국 손이 가는 건, 역시 잡지 부록으로 나온 BEST COLLECTION이다. 레코드포럼, 매달 나오는 대로 사두었던 잡지, 그 잡지의 부록은 클래식 음반 1장, 재즈 음반 1장. 제법 좋았는데. 유튜브가 좋아질 수록 음반은 팔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구하기 힘들던 시절의 아련함은, 우연히 구하고 싶은 음반을 구했을 때의 기쁨, 그리고 그것을 자랑하고 싶어 아는 이들을 불러모아 맥주 한 잔을 하며 낡은 영국제 앰프와 JBL 스피커로 밤새 음악을 듣던 시절은 마치 없었던 일처럼 느껴진다.

대학로 그림Grim에서

"글을 쓰지 않아요?"라고 묻는다. 매서운 바람이 어두워진 거리를 배회하던 금요일 밤, 그림Grim에 가 앉았다. 그날 나는 여러 차례 글을 쓰지 않냐는 질문을 받았다. 가끔 내가 글을 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묻지만 대답할 수 없다. 적어도 그것이 해피엔딩은 아닐 것임을 나는, 어렴풋하게 안다. 마치 그 때의 사랑처럼. 창백하게 지쳐가는 왼쪽 귀를 기울여 맥주병에서 투명한 유리잔으로, 그 유리잔이 맥주잔으로 변해가는 풍경을 듣는다. 맥주와 함께 주문한 음악은 오래되고 낡은 까페 안 장식물에 가 닿아 부서지고, 추억은 언어가 되어 내 앞에 앉아, "그녀들은 무엇을 하나요?"라고 묻는다. 그러게. 그녀들은 무엇을 할까. 그리고 그들은 무엇을 할까. 콜드플레이가 왔다는데, 나는 무엇을 하고 ..

어느 봄 속의 여름, 창원

여름을 특정짓는 것이 짙은 녹음과 뜨거운 열기라면, 이미 여름은 왔다. 그렇다면 사랑을 특정짓는 것은 무엇일까, 혹은 이별?, 아니면, 나는? 세월은 너무 흘렀다. 나만 제외하고 모든 이들이 다 아는 사실 하나, 내가 나이 들었다,는 것. 평일 창원엘 갔다. 연휴나 명절이 아닌 날 내려간 건, 거의 이십년 만인가. 지방 중소 도시에선 쉽게 마주할 수 있는 풍경도 서울에선 참 낯선 풍경임을 새삼 느꼈다. 그만큼 서울 생활이 익숙해진 건가, 아니면 지친 건가. 올해 초 새로 생긴 경상대학교 병원 앞에 이런 하천이 있었다. 조금만 가꾸면 사람들이 다닐 수 있을 것같은데, 여기 사람들은 별 관심 없을 것이다. 여기저기 공원이다 보니. 핸드폰 카메라로 찍은 몇 장의 창원 풍경이다. 버스를 타고 이동했는데, 지난 ..

어떤 습작의 시작, 혹은 버려진 추억.

십수년 전만 해도, 소설가가 되리라는 꿈을 꾸곤 했는데, 지금은 놓은 지 오래다. 얼마 전 아는 형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잘 나가는 소설가들의 인세 이야기를 듣고선(뭐, 한국에서 몇 명 되지도 않지만), 약간 부러웠던 건 사실이다. 아니, 매우 부러웠다. 한편으론 다행이다. 소설가가 되지 않은 것이. 적어도 이제서야 인생의, 아주 작은 일부를 안 것 같으니 말이다. 아마 그 땐 다 거짓말이거나, 짐작, 혹은 추정이거나 과도한 감정 과잉 상태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문득 습작을 하던 글이 눈에 띄어 옮긴다. 이것도 거의 십오년 전 글이군. 그 사이 한 두 편 더 스케치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술만 마셨다. 어떤 소설이 아래와 같이, 이렇게 시작했다. 그리고 제대로 끝내지 못했다. 역시 글은 ..

마이클 잭슨, We are the world

마이클 잭슨의 동영상이다. 자막판도 있는데, 이는 페이스북에서만 확인했고 youtube에서는 찾지 못했다. 스튜디오에서 녹음하는 모습인데, ... 세월이 흐른다는 걸 이 동영상을 보면서 느끼는 걸 보면, 나도 꽤 나이를 먹었다. 미국의 팝스타들이 모여 'We are the world'를 노래하기 전에 영국의 팝스타들이 먼저 Band Aid라는 이름으로 모여서 음반을 냈다. 집에 LP가 있는데, ... 어디에 있는지.. 찾기 어려운 지경이니. 이 음악들을 들으면서 추억에 잠긴다면, 당신도 나이 든 것이다. (일요일 밤에 술 마신 지도 정말 오래 되었구나. !! )

어떤 술은 참 오래된 벗.

어떤 술은 참 오래된 벗.에라주리즈 에스테이트 까베르네쇼비뇽. 이 가격대(1만원 ~ 2만원 사이)에서 가장 탁월한 밸런스를 보여준다고 할까. 가벼운 듯 하면서도 까쇼 특유의 향이 물씬 풍기는 와인. 이 와인을 즐겨 마신 지도 벌써 10년. 그 사이는 나는 이 와인을 참 많은 사람들과 마셨구나. 아직 만나는 사람도 있고 연락이 끊어진 이도 있고. ... 흐린 하늘의 춘천을, 사용하지도 않을 우산을 챙겨들고 갔다 돌아온 토요일 저녁, ... 한없이 슬픈 OST를 들으며 ... 참 오랜만에 혼자 술을 마신다. 오마르 카이얌도 이랬을까. 인생은 뭔지 모르지만, 술 맛은 알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