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30

소세키의 '풀베개'에 누워

산길을 올라가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지(理智)에 치우치면 모가 난다. 감정에 말려들면 낙오하게 된다. 고집을 부리면 외로워진다. 아무튼 인간 세상은 살기 어렵다. 살기 어려운 것이 심해지면, 살기 쉬운 곳으로 옮기고 싶어진다. 어디로 이사를 해도 살기가 쉽지 않다고 깨달았을 때, 시가 생겨나고 그림이 태어난다. 인간 세상을 만든 것은 신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다. 역시 보통 사람이고 이웃끼리 오고 가는 단지 그런 사람이다. 보통 사람이 만든 인간 세상이 살기 어렵다고 해도 옮겨 갈 나라는 없다. 있다고 한다면 사람답지 못한 나라로 갈 수 밖에 없다. 사람답지 못한 나라는 인간 세상보다 더 살기가 어려울 것이다. 옮겨 살 수도 없는 세상이 살기가 어렵다면, 살기 어려운 곳을 어느 정도 편하게 만들어서 짧은..

토요일, 이른 오후의 외출

창 밖으로 불상들이 보였다. 파란색 카디건 안에 숨죽이고 있던 땀이 올라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세요. 차가운 목소리를 가진 커피숍 아가씨가 내 대답을 받아주었다. 한남동이다. 나에게 조금 익숙한 신동빌딩이 있고 그 빌딩 일층엔 언제나 가고 싶은 와인샵이, 그 옆으론 BMW도이치모터스 한남전시장, 그리고 할리데이비슨 코리아가 있었다. 봄이라고들 말하지만, 봄은 중년 사내의 마음 속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겉돌고 있기만 하다. 하긴 어느 해의 봄인들, 지쳐가는 중년을 즐거이 맞이할까. 봄은 화려한 사랑을 꿈꾸는 처녀들과 언제나 승리로 끝나는 모험과 도전만 있다고 믿는 청년들만 반길 뿐이다. 테이블 위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가져다 주었다. 그 사이, 나는 책을 떨어뜨렸다. 고요하던 커피숍 안으로 떨어지는 책..

어느 터널 속에서

주말 내내 출근을 했고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시간을 홍수 난 강물처럼 흘러갔고 바람은 여름을 버리고 가을을 택했다. 끝내 프로젝트 사무실에서 내 허무를 견디지 못하고, 빌딩 근처 커피숍에서 한 시간 정도 책을 읽었다. 토니 주트의 책. 내가 앉은 네모나고 긴 테이블 주위, 둥글거나 네모나거나 가볍거나 무겁거나 따뜻하거나 차겁거나, 모든 테이블에는 다들 연인이 흔들리는 커피잔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아름답게 보이진 않았다. 나는 끝내 사랑을 믿지 못할 나이가 된 것이다. 마르케스라면 노년의 사랑도 가능하다고 말하겠지만, 그건 사랑을 잃어버린 후이거나 사랑을 믿는 경우에만 해당된다. 그러니 사랑을 믿다가 끝내 사랑하지 못한 이에게는 차라리 사랑은 없다고 믿는 편이 살아가는 데 더 용이할 것이다. 마치 ..

카페, 프로젝트 사무실, 쓸쓸한 일요일

1.너무 화창한 일요일, 사무실에 나왔다. 일요일 나가지 않으면 일정대로 일이 되지 않을 것이기에 나갈 수 밖에 없었지만, 애초에 프로젝트 범위나 일정이 잘못된 채 시작되었다. 하긴 대부분의 IT 프로젝트가 이런 식이다. 프로젝트 범위나 일정이 제대로 기획되었더라도 삐걱대기 마련이지. 혼잣말로 투덜거리며, 사무실에 나와 허겁지겁 일을 했다. 오전에 출근해 오후에 나와, 여의도를 걸었다. 집에 들어가긴 아까운 날씨였다. 그렇다고 밖에서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전시를 보러 가긴 너무 늦었고 ... 결국 조용한 카페에 들어가 책이나 읽다 들어가자 마음 먹었다. 거리는 한산했다. 5월 햇살은 따스함을 지나 따가웠다. 봄 무늬 사이로 뜨거운 여름 바람이 불었다. 길거리를 지나는 처녀들의 얼굴엔 미소가 ..

근황

오늘 일정표에는 중기청 창업 지원프로그램인 팁스 사업설명회 참석이 있었다. 하지만 가지 않았다. 나이가 들수록 세상이 만만치 않게 여겨지는 건 그만큼 부족하다는 뜻이다. 2015년도 벌써 15일 지났고 올 한 해의 모습을 그려보지만, 알 수 없다. 나는 올해 진짜 도전과 모험을 하게 될 것이다. 저 멀리 1월 1일의 태양이 떠올랐다. 저 태양처럼 나도 떠오를 수 있기를. 방배동 사무실 근처 가끔 가서 커피를 마시는 '커피프레지턴트' 버스에서 내려 건널목을 지나가려는 순간, 눈에 들어온 낙서. 혹은 그래피티. 오랜만에 후배를 만나 오뎅에 정종을 먹었다. 며칠 전 술에 취해 서재에 앉아 오래, LP를 들었다. 마크 알몬드 베스트앨범. 그리고 산타나의 문플라워 1, 2집. 이걸 LP로 가지고 있는데, ... ..

맥주와 커피

며칠 전. 맥주와 포카칩. 대학 시절, 작디 작은 자취방에서 먹던 기억으로 가족을 다 재우고 난 뒤 먹었는데, 맛이 없었다. 정확히 말해 예전의 맛이 아니었다. 그 사이 입맛이 변했나. 아니면 ... ... 한파주의보 내린 오전. 미팅 전 카페에서 잠시 메모. 쓸쓸한 풍경.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해 걸어가면서 만들 수 없는. 오전에 커피를 많이 마신 탓에, 내리지 않으려 했으나, 끝내 오래된 커피 알갱이로 만든 드립. 이렇게 물만 부으면 되는 커피처럼, 내가 걸어가는 길 위로 누군가에게 도움 되는 어떤 것들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불편한 공포,들.

계절이 사라진 자리에 마음의 불편함만이 자리 잡는다. 건너고 싶지 않은 저 다리의 이름은 시간. 혹은 계절. 내 허약한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확실히 존재하는, 느껴지는, 서늘한 공포. 커피의 향이 사무실 책상 위를 가득 채우지만, 초여름 바람이 열린 창틈으로 들어와선 낚아 채어간다. 향기는 사라지고 어수선한 책상 위 서류더미는 내 마음 같다. 혹은 그대 마음. 해소되지 않은 채 쌓여가는 정신적 모던의 유산들. 불편한 언어들. 그리고 공포. * “내 나이 열아홉 살, 그때 내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은 타자기와 뭉크화집과 카세트 라디오에 연결하여 레코드를 들을 수 있게 하는 턴테이블이었다. 단지, 그것들만이 열아홉 살 때 내가 이 세상으로부터 얻고자 원하는, 전부의 것이었다. 그러나 내 소망은 너무나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