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46

세상의 모든 시간, 토마스 기르스트

세상의 모든 시간 - 느리게 사는 지혜에 관하여 토마스 기르스트(지음), 이덕임(옮김), 을유문화사   우연히 방문한 서점에서 산 작은 책. 의외로 재미있고 유용했다. 독후감을 쓰려다 보니, 예전에 읽었던 >의 저자이기도 했다. 글 스타일도 비슷하다. 이 책은 작은 칼럼들을 모아놓은 에세이집이다. 아무 페이지나 열어 읽어도 된다. 문화 칼럼 정도라고 할까. 다양한 작품들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데, 읽을 만하다.  그러고 보니, 뭔가 하나로 모아지진 않는다. 현대 문화/예술에 대한 트렌디한 감각을 알 수 있지만, 거기서 멈춘다. 대단한 통찰을 얻기 위한 책이라기 보다는 카페에 혼자 앉아 바깥 풍경을 보면서 읽기 좋은 책이다. 책의 시작은 상당히 좋지만, 뒤로 갈수록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도 흠이..

마지막 외출, 조지수

마지막 외출 - 이미 없는 그와 아직 없는 그녀의조지수(지음), 지혜정원   액자 소설이지만, 그 액자는 단단하지 않고 그 안은 너무 진지했다. 사랑 이야기지만, 과연 사랑이야기일까. 늘 그렇듯 사랑은 기만적이다. 그건 일종의 허위인 탓에, 치명적으로 쾌락적이다. 그런데 진정으로 사랑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 사랑에 빠진 남녀는 처음에는 순수한 마음의 떨림과 흥분으로, 중반 이후부턴 기만적인 믿음과 소유욕으로 가득찬 육체의 쾌락으로 이어지다가 차갑게 식고 천천히 가라앉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과 육체가 예전만 하지 못하다는 생각, 식어버린 마음과 그 가라앉음을 견디지 못해 헤어진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아프고 슬픈 이별로 포장하는 탓에, 세상에는 사랑 노래로 흘러넘친다. 과연 사랑이라는 게 있..

서사의 위기, 한병철

서사의 위기 한병철(지음), 최지수(옮김), 다산북스   정보, 이야기, 스토리텔링, 서사 등에 대해 논하는 이 책은 빠르게 변화하고 발전하는 현대, 디지털 세계가 숨기고 있는 의미를 묻는다. 실제로는 자기 묘사에 다름이 없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스토리'도 사람들을 끊임없이 고립시키고 있다. 이야기와 달리 스토리는 친밀감도, 궁감도 불러내지 못한다. 이들은 결국 시각적으로 정식된 정보, 짧게 인식된 뒤에 다시 사라져 버리는 정보다. 이들은 이야기하지 않고 광고한다. 주목을 두고 벌이는 경쟁은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한다. (121쪽)  물론 여기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수 있고, 동의하더라도 그래서 뭘,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대체로 한병철의 책들 대부분은 어둡고 우울하다.  다행..

극단의 시대, 하권, 에릭 홉스봄

극단의 시대: 20세기 역사, 하권에릭 홉스봄(지음), 이용우(옮김), 까치  얼마나 세상이 변했는가를 잊고 지내곤 한다. 터무니없는 질문이지만, 15세기 조선 사람이 타임머신을 타고 서울 한 복판으로 온다면 어떻게 될까? 내가 들었던 여러 대답들 중에 '너무 시끄러워서 기절한다'는 의견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실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환경은 인류 역사 상 최초로 경험하는 것들이다. 가끔 제 정신으로 이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도리어 놀랍기까지 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인류의 80퍼센트에게 중세는 1950년대 갑자기 끝났으며, 아마도 더욱 많은 경우, 1960년대에 중세가 끝났다고 느껴졌다. (400쪽)  위 말은, 19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인류의 상당수는 중세부터 살아오던 삶의 방식을 ..

나의 한국현대사, 유시민

나의 한국현대사 1959 - 2020 유시민(지음), 돌베개 이 정도의 수준에서 글을 써야 일반 독자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다. 최근 읽고 있는 에릭 홈스봄의 는 일반 독자를 읽을 수 없다고 여겼다. 고루한 번역부터 너무 많은 사람 이름들과 지명, 사건들은 아무 주석도 없이 그냥 이어진다. 나도 천천히 읽어야 할 수준이니, 일반 독자는 그냥 읽지 말라는 이야기다. 하긴 전문 역사서이니, 그럴 수 있겠지만. 반대로 유시민의 이 책은 너무 조심했다는 흔적이 역력하다. 그래서 쉽게 읽히나, 재미는 없다. 바진의 에서 언급된 아우슈비츠가 조작된 것이라고 말하던 독일 청년의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이젠 한국도 그런 상황이 되었다. 따라서 객관적인 사실 전달과 함께 평가도 함께 이루어져야만 오해가 없다. 하지만 이..

만프레드 프랑크, <<현대의 조건>> 읽기 1

1. 2002년에 한글로 번역 출간된 만프레드 프랑크(Manfred Frank, 1945 ~ )의 (최신한 옮김, 책세상)을 읽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반 이 책을 구해 몇 번 읽으려고 도전했지만, 쉽게 읽히지 않았다. 그런데 올해 다시 시도했는데, 어, 읽을 수 있다. 더구나 이해가 된다. 너무 뒤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그대로 다시 현대/근대에 대한 정리를 할 겸, 책을 읽어 가면서 블로그에 요약, 또는 정리를 해서 공유하려고 한다. 2. 튀빙겐 대학 교수로 소개되는 만프레드 프랑크는 문예 이론과 철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초기 낭만주의에 대한 연구서인 (무한한 접근)은 전후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서적으로 인정 받을 정도다(이건 영어로도 번역되지 않았다). 2000년대 전후..

앙리 마티스, 앉아있는 분홍빛 누드 Pink Nude Seated

늘 그렇지만, 앙리 마티스는 언제나 옳다. 가끔 모더니즘을 낭만주의로 오해하곤 하는데, 절정기의 모더니즘은 확실히 고전주의적이다. 앙리 마티스의 부드러운 선과 감미로운 색채는 우리로 하여금 심리적 안정과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 준다. 마치 그가 마지막으로 공을 드렸던 로자리오 성당을 떠올리게 만드는 평안함이다. 현대적이며 고전적인 감성은 이전 고전주의가 사용했던 환영주의가 아니라 기하학적 추상을 불러들이며 현대 문명을 반영한다. 기하학적 진보를, 상대성 이론을, 양자역학을. 과거와의 단절을 이야기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꿈과 미래를 노래한다. 이런 점에서 20세기 후반의 팝아트와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현대 과학은 급격하게 낭만주의로 기운다. 토마스 쿤의 도 확실한 낭만주의적 텍스트인 셈이다. 여기에서 딱딱하..

불안

휴가를 내어도 마음은 불안했다. 전화가 무서웠다. 예전엔 이 정도까지 아니었다. 현대인 대부분은 이럴까. 아마 대부분 이럴 것이다. 불확실성은 우리의 불안을 증폭시킨다. 강조되는 불확실성. 연역법의 시대가 지나고 귀납법의 시대가 되었다. 합리론은 폐기되고 경험론이 주류가 되었다. 하지만 경험론이 강조하는 불확실성은 인간 이성의 오만함을 경고하지만, 현대 자본주의는 그 오만함을 지탱하기 위해 합리적 이성(?)이 결정 가능한 세계를 제한하고 이 안에서의 합리적 결정을 위한 다양한 이론들을 등장시킨다. 그러면서 한 쪽에서는 현대 사회의 복잡성을 강조하며 그 복잡성 위로 수학을 이야기한다. 아무 것도 결정되지 않았고 결정할 수 없다는 경험론의 시대에 복잡성을 강조하며 이를 해결하고 결정할 수 있다고 밀어붙인다...

슈타이얼, 바르트, 손택

유럽도 전개되는 양상이 비슷했다. 연로한 롤랑 바르트는 전통적인 지식인과 작가는 멸종하고 대부분이 대학교에 자리를 잡은 새로운 종이 그들을 대체하고 있다며 입버릇처럼 불평하곤 했다. 손택도 이런 묘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손택은 1980년 인터뷰에서 시대에 역행해 작가이자 지식인으로서 보편적인 역할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목적이라고 공표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 다니엘 슈라이버, , 글항아리, 288쪽 러셀 저코비(자코비)의 에서도 언급된 내용이다. 롤랑 바르트나 손택, 그리고 저코비가 이야기할 때의 그 지식인과 대학 교수는 일치하지 않는다. 신문기자를 지식인이라고 하지 않듯이(한국에서는 경멸적으로 '기레기'라고 쓰고 '쓰레기'로 해석한다) 대학교수도 지식인이 아니다. 저코비의 책을 읽으..

술병이 있는 자화상, 뭉크

턱 밑까지 더위가 올라와 얼굴을 천천히 물들인다. 피곤한 피부 위로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저주의 언어들, 혹은 절망, 아니면 실패자의 체념 같은 것. 발터 벤야민이었던가. 우리가 희망을 얻는 것은 과거의 불행했던 사람들로부터라고. , 저 작품을 보고 있으면, 저 작품을 그린 예술가는 참 불행하게 살다갔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에드바르트 뭉크(노르웨이, 1863-1944). 하지만 의외로 평안한 노년을 보냈다. 몇 번의 사랑이 실패로 돌아가긴 했으나, 낙담하지 않고 평생 혼자 지내며 작품활동을 하며 보냈다. 그리고 후기에 그렸던 작품들 대부분을 기증하여 뭉크 미술관이 만들어졌다. 우리에게 알려진 널리 그의 작품들을 보자면, 참 불안하고 슬프고 절망적이긴 하지만 뭉크는 다행히도 그 젊은 날의 불안, 격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