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 7

발견의 시대, 이언 골딘, 크리스 쿠타나

발견의 시대 Age of Discovery 이언 골딘, 크리스 쿠타나(지음), 김지연(옮김), 21세기북스 "현 시대는 신르네상스다. 폭발하는 천재성과 번성하는 위험성이 대립하는 시대다." 나는 자주 현대를, 로마가 흔들리기 시작하던 헬레니즘 시대와 비교했다. 헬레니즘은 로마 시대의 정점이면서 동시에 그림자가 깃드는 시기다. 팍스 로마나의 시대이지만, 그 평화 사이로 새로운 이민족들이 끊임없이 들어오고 문화와 종교가 뒤섞이고 더 이상 확장하기엔 한계에 이르는 어떤 제국으로 변해간다. 그리고 그 다음은 (다들 알고 있듯이) 로마 말기, 혹은 중세 초기가 시작된다. 문명의 노을이 깃드는 시기다. 르네상스와 비교한 적은 거의 없다. 살짝 현대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할 순 있으나, 엄밀히 말해 순수한 르네상스는 ..

초격차, 권오현

초격차 권오현(지음), 김상근(정리), 쌤앤파커스 한때 어떤 이의 업무 능력이나 스킬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지금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이와 비슷하게 기업에 있어 전략이나 비즈니스 모델도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있다고 여기는데, 그것은 바로 태도, 혹은 그 태도가 지향하는 가치나 비전이다. 무엇을 만드느냐가 아니라 왜 그것을 만들고 왜 살아가며,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질문이다. 전자의 경우 Follower의 입장에서도 가능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Follower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책은 삼성전자 종합기술원 원장이며 2012년부터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있었던 권호현 원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연세대 김상근 교수가..

추억은 술을 마시고

입구는 좁았다. 대형병원 한 쪽 귀퉁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전부였다. 몇 명이 입구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하얀 담배 연기는 지하와 지상 사이를 빙글빙글 오가기만 할 뿐, 저 멀리 날아가지 못했다. 그리곤 금세 희미해졌다. 계단을 내려가자 문 앞에 현금인출기 한 대가 외롭게 서있었다. 죽음이 왔다가 가는 공간 앞의 외로운 ATM. 그 앞에서 사람들은, 나는 현금을 뽑기 위해 서있었다. 작년치 성당 교무금이 두 달 밀려 있어서 그 돈까지 같이 뽑았다. 이젠 현금이 드물어진 시대다. 천천히 걸어나와 복도 테이블 위에 놓여져 있는 조의금 봉투들 사이에서 하나를 꺼내 차가운 현금인출기 속에 있던 만원 짜리 다섯 장을 조심스럽게 넣었다. 조의금 봉투를 전달하며, 조의를 표했다. 누군가의 죽음은, 그 전에 ..

라틴어수업, 한동일

라틴어수업한동일(지음), 흐름출판 집에 있던 '라틴어-영어 사전'을 최근 버렸다. 이십여년 전 구한 사전이었다. 그 때만 해도 한글로 된 라틴어 교재는 거의 없었고 라틴-한국어 사전은 꿈도 꿀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나마 책을 읽으며 라틴어를 확인하는 용도로라도 필요하겠다 싶어 영국 옥스포드대학 출판사에 나온 작은 사전을 교보문고 외서 코너에서 구했다. 원서 강독을 하면서 자주 그 사전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인문학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 지 십 수년이 지났고 더 이상 집 서가에 책을 꽂을 공간이 없어, 읽은 책들, 그래서 앞으로 더 이상 읽지 않을 책들을 버리는 중, 빛 바래고 낡은 그 사전도 함께 버렸다. 그리고 몇 달 후, 이라는, 이 책을 읽었다. , 큰 기대를 하지 않았고 딱 그 정도인 수필..

화양연화 In the Mood for Love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사라져가는 시간의 여울 사이로 떠오르는 한줌 알갱이들. 정체모를. 아름다운 시절들은 다들 노랫말 속으로 잠기고 고통은 리듬으로 남아 바람 속에 실리기도 하고 햇살에 숨기도 하는데, 하나의 계절이 가면 어김없이 하나의 계절이 오고 계절풍이 불고 나무들은 빛깔을 잃어버리기 시작하는데, 조수의 리듬에 영혼을 밀어넣고 흔들흔들, 노래를 부른다. *** 위 글은 2002년 10월 27일에 쓴 것이네. 그 사이 화양연화 OST는 줄기차게 들었는데, 이 영화를 다시 보지 않은 건 상당히 지난 듯싶어. 상당히 쓸쓸할 듯 싶은 이 봄, 이 영화를 다시 봐야지. (다시 보면 어떨까. 살짝, 아주 살짝 ... )

뒤샹 딕셔너리, 토마스 기르스트

뒤샹 딕셔너리 토마스 기르스트(지음), 주은정(옮김), 디자인하우스 지난 주 마르셀 뒤샹 전에 대한 리뷰를 올리면서 잠시 참고했던 책이었다. 말 그대로 '뒤샹 사전'이다. 마르셀 뒤샹(또는 현대 미술 이론)에 관심 있는 이들에겐 무척 유용하지만, 그저 현대 미술에 대해 일반적 이해만 가진 이들에겐 다소 쓸모가 떨어지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뒤샹을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키워드가 등장하지만, 이와 연관된 도판 이미지는 없다는 점은 일반 독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요소가 거의 없음을 드러낸다고 할까. 하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 뒤샹에 대한 여러 가지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으니, 사전의 유용성이 없진 않았다. 어쩌면 탁월할 지도 모른다. 뒤샹과 연관된 대부분의 키워드들을 담고 있을 테니, 뒤샹에 대해 알..

마르셀 뒤샹 展, 국립현대미술관

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 2018. 12. 22 - 2019. 4. 7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마르셀 뒤샹만큼 현대미술에서 중요한 작가는 없다(있다고 한다면 세잔 정도). 그는 인상주의 이후 추상을 향해가던 현대미술을 캔버스 바깥을 향한 실험과 개념의 아수라장으로 만든 장본인. 뒤샹 이후 모든 것은, 그것이 사물이든 개념이든 상관없이 예술이 되었고(될 수 있고), 동시에 예술이 아닌(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도 실은 앤디 워홀이 아닌 뒤샹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노년의 뒤샹은 젊은 엔디 워홀을 무척 좋아했다). 레디메이드란 숨겨진 미적 가치의 재발견처럼 보이지만, 실은 '예술작품'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의문을 표시하는 일종의 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