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362

살아있는 산, 낸 셰퍼드

살아있는 산 - 경이의 존재를 감각하는 끝없는 여정낸 셰퍼드(지음), 신소희(옮김), 위즈덤하우스 술자리에 남북 통일의 여러 이유들 중 하나로 '개마고원에서 하루나 이틀 야영(캠핑)하는 것'을 이야기했다. 한반도 면적의 약 20%를 차지하며 평균 해발 고도가 700미터에서 2000미터 사이에 있는 고원지대. 한반도의 지붕이라 불리는 곳. 이 책을 읽으며 '개마고원'을 떠올렸다. 한국도 캐언곰 같은 곳이 있다면 아마 개마고원일 것이라고. 산을 아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이다. 등산 장비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을 20세기 중반에 낸 셰퍼드는 참 잘 다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남자이지 않을까 추정했다. 가끔 여자 이름을 쓰는 남자도 있는 법이니. 하지만 여성 작가였다니. 아래는 책을 읽으..

코르시아 서점의 친구들, 스가 아쓰코

코르시아 서점의 친구들스가 아쓰코(지음), 송태욱(옮김), 문학동네 이것으로 스가 아쓰코의 수필집은 다 읽은 건가. 지금 찾아보니, 문학동네에서만 번역된 줄 알았더니, 그 이후 다른 출판사에서 몇 권이 더 번역되었구나. 스가 아쓰코의 수필이 주는 매력은 분명하다. 그냥 잔잔하다. 읽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때로 이탈리아 문학 이야기도 나오고 일본 이야기도, 이탈리아 친구들 이야기, 카톨릭 좌파와 코르시아 서점 이야기도. 이 책은 이탈리아 친구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가령 이런 시를 쓴 친구이야기도. 나에게는 손이 없네부드럽게 얼굴을 쓰다듬어줄 ... ... 다비드 마리아 투롤도(David Maria Turoldo)의 첫 번째 시집 에 실린 시다. 신부이면서 시인이었던 투롤도. 남편이 죽고 처..

샤이닝, 욘 포세

샤이닝욘 포세(지음), 손화수(옮김), 문학동네 어느새 눈이 앞 차창을 온통 덮어버렸다, 나는 와이퍼를 작동시켰다. 이제 보니 눈은 그쳤고 앞에 보이는 땅은 하얀 눈으로 덮였다, 숲 속 나무가지에는 하얀 눈이 쌓였다. 아름다웠다. 하얀 나무, 하얀 땅. 이제 차 안이 기분 좋게 따뜻해졌다. 하지만 이렇게 차 안에 앉아 있으면 안 된다. 사람을 찾아 나서야 한다. (19쪽) 하얀 눈 속에 갇히면 어떨까. 온통 하얀 세상. 그 하얀 공간 속에서 혼자 고립되어 잠들어갈 때, 어떨까. 이 짧은 소설이 주는 여운은 꽤 단단하고 슬프다. 결국은 가족 뿐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도 가족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상처 입고 있는데 말이다. 세상은 하얗고 서로가 있다는 걸 알지만,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에어리얼, 실비아 플라스

에어리얼실비아 플라스(지음), 진은영(옮김), 엘리   오래 전에 사둔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는 읽다 그만 둔 채 서가에서 먼지만 먹고 있는데, 나는 최근에 실비아 플라스의 유고 시집인 >을 읽었다. 그리고 후회했다. 너무 아파서 힘들었다. 젊었을 때만큼 힘든 건 아니었지만, 그녀의 고통스러움이 언어들 속에서 묻어나와, 시인 테드 휴즈를 미워하게 되었다.  시집에서 세 편을 옮긴다. 최고의 시는 역시 다. 영어로 읽기를 권한다. 문학 작품에 대한 번역은 한 단어 한 단어로 옮겨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덩어리, 영역으로 옮겨지는 것이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시인 진은영의 번역이 상당히 좋긴 하지만.  불모의 여인 텅 비어 있어, 나는 가장 작은 밠소리에도 울린다. 기둥들, 주랑 주랑 현과들, 둥근 천장..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 유디트 샬란스키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유디트 샬란스키(지음), 박경희(옮김), 뮤진트리   기대 이상의 독서였다. 서정적인 서술과 묘사는 마음을 움직였다. 이젠 없는 것들에 대해서 쓴 글들 모음집인 이 책은 수필이면서 픽션이며 다큐멘터리였다. 내가, 혹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세계로 이끌며 기록의 소중함을 알린다. 그러나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상실. 흔적으로 남았거나 아예 사라진 것들에 대해서 저자는 적고 노래한다.   시의 파편들이 끝없는 낭만주의의 약속임을. 아직도 여전히 영향력 있는 현대의 이상理想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시예술은 지금까지도 어떤 문학 장르보다 더 함축적인 공허, 의미를 증폭시키는 여백을 갖고 있다. 구두점들은 단어들과 함께 유령의 팔다리처럼 생겨나 잃어버린 완벽함을 주장한다. 원형은 온전히 갖..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2,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2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지음), 곽광수(옮김), 민음사   Natura deficit, fortuna mutatur, deus omnia cernit. 자연은 우리들을 배반하고, 운명은 변하며, 신은 저 높은 곳에서 이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있다. (155쪽)   조그만 나의 영혼, 방랑하는 어여쁜 영혼이여, 육체를 받아들인 주인이며 반려인 그대여, 그대 이제 그 곳으로 떠나는구나. 창백하고 거칠고 황폐한 그 곳으로. 늘 하던 농담. 장난은 이제 못하리니. 한순간 더 우리 함께 낯익은 강변들과, 아마도 우리가 이젠 다시 보지 못할 사물들을 둘러보자 ... ... 두 눈을 뜬 채 죽음 속으로 들어가도록 노력하자. ... ... (236쪽)  가끔이지만, 지금 죽으면 어떨까 하곤..

한국어, 한국어 공부 - 로스킹 교수

유튜브를 통해 우연히 로스킹 교수의 인터뷰를 보게 되었다. 캐나다에서 한국어와 한국학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의 통찰이 놀라웠다. 정확한 한국어를 사용하며, 한국어 교육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이야기하였다. 특히 정확한 한국어를 쓰기 위해 한국어 구사를 위한 한자공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부분에서는 소름이 돋았다. 우리는 몇 천년 동안 한자를 사용했지만, 그렇다고 중국어를 했던 건 아니다. 로스킹 교수의 의견을 조금 비약하자면, 한국어를 위한 한자가 있고 그 한자를 알아야한다는 것이다. 한자 공부를 한다고 해서 중국어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것.  또한 한국인을 위한 한국어 공부와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공부는 다르다고 말했다. 특히 한국어를 공부하는 동기가 중요한데, 한국 정부는 이를 간과하고 있다고 ..

마지막 외출, 조지수

마지막 외출 - 이미 없는 그와 아직 없는 그녀의조지수(지음), 지혜정원   액자 소설이지만, 그 액자는 단단하지 않고 그 안은 너무 진지했다. 사랑 이야기지만, 과연 사랑이야기일까. 늘 그렇듯 사랑은 기만적이다. 그건 일종의 허위인 탓에, 치명적으로 쾌락적이다. 그런데 진정으로 사랑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 사랑에 빠진 남녀는 처음에는 순수한 마음의 떨림과 흥분으로, 중반 이후부턴 기만적인 믿음과 소유욕으로 가득찬 육체의 쾌락으로 이어지다가 차갑게 식고 천천히 가라앉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과 육체가 예전만 하지 못하다는 생각, 식어버린 마음과 그 가라앉음을 견디지 못해 헤어진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아프고 슬픈 이별로 포장하는 탓에, 세상에는 사랑 노래로 흘러넘친다. 과연 사랑이라는 게 있..

지난 날의 스케치: 버지니아 울프 회고록

지난 날의 스케치 버지니아 울프(지음), 이미애(옮김), 민음사   버지니아 울프의 글을 읽는다. 그녀의 >을, ... 고등학교 때 읽은 후, 산문집 몇 편을 읽었을 뿐이다. 그녀의 소설을 읽어야 겠다는 생각에 다시 시도하고 있지만, 겨우 읽은 게 이 짧은 회고록이다. 회고록이라고 하기엔 너무 짧고 모두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 왜 다 죽는 걸까.   인생이 우리가 계속 채워 가는 그릇이라면, 그렇다면 내 그릇은 의심할 바 없이 이 기억 위에 서 있다. 그것은 잠이 들락 말락 한 상태에서 세인트아이브스의 아이 방 침대에 누워 파도가 하나둘 하나둘 부서지며 해변에 밀려오고 노란 블라인드 뒤에서 하나둘 하나둘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다. 바람이 블라인드를 휘날리며 바닥의 작은 도토리를 끌..

나와 마주하는 시간, 라이너 쿤체

나와 마주하는 시간라이너 쿤체(지음), 전영애, 박세인(옮김), 봄날의 책    오랜만에 쿤체의 시를 읽었다. 실은 잘 모르겠다. 몇 편의 시를 옮겨적긴 했으나, 노(老)시인의 독일어는 한국어로 옮겨져 나에게까지 왔으나, 그 거리는 꽤 멀게 느껴졌다.    나와 마주하는 시간 검은 날개 달고 날아갔다, 빨간 까치밥 열매잎들에게 남은 날들은 헤아려져 있다. 인류는 이메일을 쓰고 나는 말을 찾고 있다, 더는 모르겠다는 말,없다는 것만 알 뿐   아니면 내 문제인가. 나에게 이제 시(詩)는 너무 멀리 있는 건가.    사물들이 말이 되던 때 내 유년의 곡식 밭에서밀은 여전히 밀이고, 호밀은 여전히 호밀이던 때,  추수를 끝낸 빈 밭에서나는 주웠다 어머니와 함께 이삭을 그리고 낱말들을 낱말들은 까끄라기가 짧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