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최근

1. 최근 블로그 상에서 바로 글을 써서 올린다. 그랬더니, 글이 엉망이다. 최근 올린 몇 편의 글을 프린트해서 다시 읽어보니, 문장의 호흡은 끊어지고 단어들이 사라지고 불필요한 반복과 매끄럽지 못한 형용어들로 가득했다. 결국 나는 몇 번의 프린트와 펜으로 줄을 긋고 새로 쓰는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 끼인 세대인 셈이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의 끼인 세대. 자판을 두드리며 글을 쓰지만, 읽기는 무조건 종이로만 읽어야 하는. 그래서 최근 올렸던 글을 프린트해서 다시 쓰고 고쳐 새로 올릴 계획이다. 얼마나 좋아질 진 모르겠지만. 2. 헤밍웨이의 를 읽고 있다. 무척 좋다. 번역된 문장들이 가지는 태도가 마음에 드는데, 원문은 얼마나 더 좋을까. 영어 공부를 열심해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번역된 셰익스피..

대학로 그림Grim에서

"글을 쓰지 않아요?"라고 묻는다. 매서운 바람이 어두워진 거리를 배회하던 금요일 밤, 그림Grim에 가 앉았다. 그날 나는 여러 차례 글을 쓰지 않냐는 질문을 받았다. 가끔 내가 글을 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묻지만 대답할 수 없다. 적어도 그것이 해피엔딩은 아닐 것임을 나는, 어렴풋하게 안다. 마치 그 때의 사랑처럼. 창백하게 지쳐가는 왼쪽 귀를 기울여 맥주병에서 투명한 유리잔으로, 그 유리잔이 맥주잔으로 변해가는 풍경을 듣는다. 맥주와 함께 주문한 음악은 오래되고 낡은 까페 안 장식물에 가 닿아 부서지고, 추억은 언어가 되어 내 앞에 앉아, "그녀들은 무엇을 하나요?"라고 묻는다. 그러게. 그녀들은 무엇을 할까. 그리고 그들은 무엇을 할까. 콜드플레이가 왔다는데, 나는 무엇을 하고 ..

벚꽃과 술

몇 개의 글 소재, 혹은 주제를 떠올렸지만, 그럴 여유가 없다. 글을 써서 생계를 유지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대학 졸업하면서부터 시작했지만, 가끔 글도 참 못 쓰고, 지적 성실성도 지적 통찰도 없는 이들이 교수가 되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모습을 보면서, 나에게 그럴 여유가 존재했더라도, 나는 그렇게 되지 못했을 거라, 스스로를 위로한다. 결국 내가 선택하고 내가 행동한다. 공동체는 무너졌고 쓸쓸한 개인만 남아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있다. 지금 한국엔 너무 슬프고 화가 나는 일들이 쉬지 않고 일어나지만, 내 일상에는 변화가 없다. 자본주의가 무섭다는 생각을 서른 초반에 했고 자본주의의 사슬에 매여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는 나를 마흔 초반에 발견했다. 쓸쓸하다. 벚꽃은 어김없이 봄이면 핀다. 벚꽃이 머리 ..

회사 생활, 그리고 글.

일주일에 한 번 운동을 한다. 이마저도 힘들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8시. 저녁을 먹고 아이와 놀다 보면 9시, 10시, ... 이러면 운동하러 가지 못한다. 그리고 잔다. 꿈을 꾼다. 꿈 속에서도 나는 쫓기고. 그러다보면 아침이 오고 곱게 잠들어 있는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힘을 내자고 다짐을 한다. 이렇게 아빠,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 알게 된다. 종종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 놀란다. 이렇게 늙었다니. 그러고 보면 늙는다는 걸 인식하며 세월을 보내지 않는다. 그냥 어느 순간, 늙었구나 하고 인식한다. 그리고 그 때 뿐이다. 나는 아직 클럽에 갈 수 있다고 여기고(간 적도 없지만), 아직 옆을 지나는 여대생에게 말을 걸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말을 건 적도 없지만). 회사 워크샵을 다녀왔지..

리처드 브라우티건

태양은 누군가가 석유를 붓고 성냥으로 불을 붙인 다음, "신문 가져올 동안 좀 들고 있어"하며 내 손에 놓고 가서는 돌아오지 않아 불타고 있는 거대한 50센트 짜리 동전 같았다. (23쪽) 가을은, 마치 육식 식물 속으로 질주해 내려가는 롤러 코스터처럼, 포트 와인과 그 진하고 달콤한 와인을 마셨던,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의 기억에서 오래 전에 사라진 사람들을 데리고 찾아왔다. (39쪽) 나는 그녀와 섹스를 했다. 그것은 막 1분이 되기 전의 영원한 59초와도 같았고, 아주 수줍게 느껴졌다. (52쪽) - 리처드 브라우티건, 중에서 출처: http://www.pasunautre.com/ 리처드 브라우티건을 읽으면 왠지 우울해진다.

일방통행로, 사유이미지 -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사유이미지 발터 벤야민 지음, 김영옥/윤미애/최성만 옮김, 도서출판 길 우리에게 필요한 시간이란, 5분, 10분, 5분, 이런 식으로 조각난 것이 아니라, 1시간, 2시간, 혹은 하루나 이틀 이상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시간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 사치스러운 일상이 되어버린 2013년 가을, 내가 집어든 책은 도서출판 길에서 나온 ‘발터 벤야민 선집 1권 - 일방통행로, 사유이미지’이다.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내 조각난 시간 틈 속으로 들어와 사뿐히 내려앉은 벤야민의 글들은 번뜩이는 통찰이 어떻게 짧은 글들로 조각나 고딕 교회의 모자이크화처럼 구성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결국 발터 벤야민은 20세기의 전반기를 살았다고 하기에는 너무 급진적이었다. 그것은 그의 인식..

독자의 태도

일년 반 정도 모 통신사의 사보 편집장 했는데, 유명하다는 몇몇 필자들의 형편없는 원고를 보고 혀를 내두른 적이 있었다. 결국엔 일반 독자에게 어필해야 된다는 것이니, 나에겐 요원한 일이다. 제대로 된 글을 읽으려면, 그만큼 독자도 준비해야 된다. 바둑판을 읽을 수 없으면서 바둑을 두겠다고 하는 것이나, 글의 품격을 알지도 못하면서 글을 읽으려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크로스: 정재승 + 진중권

크로스 : 정재승 + 진중권 - 정재승, 진중권 지음/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몇 개의 새로운 정보와 몇 권의 참고 서적을 노트했다. 하지만 이 책은 그 당시의 트렌디한 소재들을 대상으로, 전반적으로 쉽게 씌여진 글들의 모음이고 지금 읽기에는 벌써 몇 년이 지나 식상함마저 풍기는 책이 되었다. 이미 두 저자 모두 대중적 글쓰기로는 유명한 이들이고 그들의 재치나 박학다식은 다 아는 이야기니, 책의 내용에 대해서 읽지 않아도 대강 예상할 수 있다. 이 책은 한겨레 21에 실렸던 칼럼들을 모은 것-검색하면 관련 칼럼을 인터넷으로 볼 수 있다-으로, 제시된 소재나 주제에 대해 자신의 전공분야나 관점에 맞추어 쓴 짧은 글들로 이루어져 있다. 심각한 주제 의식이 있다기 보다는 쉽고 대중적인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어느 토요일의 일상

이번 경우는 이렇게 씌어 있었어도 괜찮았을 지 모르겠다. "나는 여러분 속의 한 사람, 한 알의 씨앗이다. 여러분 중 한 사람인 것이다. ... ... 빛나고 ... ... 진동하고 ... ... 작열하는 씨악이다......" 어느 날 나는 국립도서관에 있었는데, 쉰 안팎의 토끼털 모자를 쓴 부인이 내가 있던 책상 앞으로 다가와선 다음과 같이 말하며 쭈뼛쭈뼛 손을 내밀었다. - 르 끌레지오, '사랑하는 대지' 중에서 낡고 오래된 책을 꺼내 기억하는 몇 문장을 되새겨본다. 그리고 이 일상도 거대한 지구의 운동 앞에서 그 어떤 가치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지난 토요일의 일상을 오늘에서야 정리할 수 있었다. 회사에서의 일이 갑자기 많아졌고 이를 헤쳐나가기가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몸에 이상이 왔다...

연극과 기억, 안치운

연극과 기억 - 안치운 지음/을유문화사 안치운의 ‘연극과 기억’(을유문화사, 2007)을 읽었다. 그가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까지 여러 지면에 쓴 연극평을 모은 책이다. 그런데 이 책, 여간 읽기 불편한 것이 아니다. 텍스트의 문제다. 텍스트와 무대 사이에는 건너갈 수 없는 거대한 심연이 놓여있다. 하지만 그의 글은 심연을 가로질러가 무대를 집어삼키며 앞으로 나아간다. 글은 살아남기 위한 표현이되 노력이다. 비평가의 글은 살아남기 위한 열정의 소산이 아니던가. 공연을 재현하는 비평은 공연의 표현이다. 삶이 삶의 표현이듯이. 비평 없이도 연극은 가능하지만, 연극 없이 비평은 불가능하다. 연극을 가능하게 하는 비평이야말로 비평을 미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비평의 꿈이다. 그렇지만 비평이란 글은 결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