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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의 우울

생을 휘감고 도는 불안이 내 방안에 가득했다. 그것들을 밀어내기 위한 나의 사투는 애처로울 정도였으나, 결국 역부족이었다. 거친 입술이 얇게 떨렸다. 한 겨울밤의 적막. 견디는 것도 능력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과연 이렇게 견디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야누스와 같은 동시성은 가끔 사람을 극한으로 몰아부치기도 한다. 까뮈를 읽었다. 밀란 쿤데라를 읽었다. 김기림과 염상섭을 읽었다. 실은 거짓말이다. 까뮈를 읽었지만, 밀란 쿤데라는 읽다가 말았지만, 김기림과 염상섭은 사놓기만 했다. 윤동주의 서시를 외우고 있었는데, 이제 첫 구절 마저도 버벅인다는 걸 깨달았다. 불안함에 대한 각성. 커피 한 잔과 담배로 늦겨울, 쓸쓸한 추위를 견디고 있다. 말없는 금붕어 세 마리는 가끔씩 물 위..

남겨진 술 한 잔의 쓸쓸함

무슨 다른 생각을 하자. 눈을 감자 숨쉬듯 흐르는 몇 줄기 긴 선이 떠오른다. 사구에서 움직이는 바람 무늬다. 반나절을 줄곧 보고 있었으니, 망막에 각인되고 말았다. 그 모래의 흐름이 과거, 번영했던 도시와 대제국마저 멸망시키고 삼켜버린 적이 있다. 로마 제국의, 사브라타였던가…… 그리고, 주성(酒聖) 오마르 카이얌이 노래한, 뭐라고 하는 마을도...… 거기에는 옷가게가 있었고 정육점이 있었고 잡화점이 있었고, 그런 건물들 사이로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 길이 그물망처럼 얽혀 있었고, 그 길을 하나 바꾸려면 관청을 둘러싸고 몇 년에 걸친 투쟁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느 누구 하나, 그 부동을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역사 깊은 마을…… 그러나 그런 모든 것들도 직경 1/8mm의 유동하는 모래의 법칙을..

좌표를 찾아 떠도는 향유고래

아무런 좌표 없이 떠도는 편이 더 낫았을 텐데, 나는 뭔가 좌표를 찾고 싶어 했다. 하지만 끝내 좌표를 찾지 못했다. 결국 찾지 못한 좌표 탓만 하는 나를 만나게 되었다.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너무 끔찍해서 견딜 수 없었다. 좌표를 찾아 떠도는 향유고래. 한때 찬란하게 민감했던 내 청춘의 감각이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다. 지금의 나는 사라져가는 그 감각을 뒤에서 물끄러미 바라만 볼 뿐이다.

캐비닛, 김언수

캐비닛 - 김언수 지음/문학동네 , 김언수(지음), 문학동네, 2006 쉽게, 아주 짧은 시간에, 힘을 거의 들이지 않고 다 읽을 수 있었다. 전반적으로 잘 읽히고 종종 흥미 있는 이야기가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신기하고 낯선 스토리였지만,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의 스토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단지 이러한 스토리로 소설을 쓸 생각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확실히 나라면, 이런 소설을 쓰지도, 쓸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책 뒤에 실린 심사평의 일부는 동의할 수 있었고 일부는 동의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몇몇 이들의 높은 평가과 찬사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솔직히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평가들이 많았고, (심각하게)스스로 내가 이상한 독자나 평자가 아..

화사한 색채들의 모험 - 김보선의 ‘꽃’에 대하여

화사한 색채들의 모험 - 김보선의 ‘꽃’에 대하여 김용섭(yongsup.kim@yahoo.com) A&B Gallery - 한불문화교류협회 ‘내-안에’ 전시 기획 현대 예술가들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추상화에 대한 자연스런 욕구는 눈에 보이는 세계 이면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본질이나 실체에 대한 깊은 호기심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는 눈에 비친 세계가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초기 모더니스트들이 눈이라는 감각기관에 비친 외부 세계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는 시도들이 감각지각에 비친 구체적인 외부 세계의 추상적이고 반-감각적인 본질을 향해갔다는 점은 모더니즘이 가지는 여러 아이러니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후 현대 미술을 수놓고 있는 추상 미술들은 우리가 보고 만지고 경험하는 외부 세계의 보이지 ..

하이엔드 오디오 기업들의 마케팅 전략

1. 쉐아르님의 포스트를 보고 몇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특히 윌슨 오디오의 마케팅 전략은 다른 기업이 따라 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생각을 정리하면서 윌슨 오디오(다른 하이엔드 오디오 기업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의 예외적인 사례를 통해 마케팅의 기본을 다시 정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본으로 돌아가서 생각하고 접근하는 것, 이는 비단 기업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2. 최근 오디오 시장은 Digital Music의 급속한 발달과 변화로 인해 시장의 구도가 많이 변하였다. 최근에는 iPod와 같은 MP3 플레이어와 호환되는 오디오 기기들도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AV(Audio-Visual) 오디오 시장의 확장은 기존 하이파이(Hi-fi) 오디오 메이커에게 새로운 ..

파블로 카잘스, 바흐, 흐린 일요일 아침

Pablo Casals- The 6 Cello Suites - 바흐 (J. S. Bach) 작곡, 파블로 카잘스 (Pablo Casals) 연주/굿인터내셔널(* 현재 절판된 상태임) [수입] Pablo Casals - J.S.Bach / Cello Suites - 파블로 카잘스 (Pablo Casals) 연주/이엠아이(EMI)(* 현재 구할 수 있는 음반이나, 가지고 있지 않음) 파블로 카잘스, 바흐, 흐린 일요일 아침 거친 호흡을 연신 해대며, 겨우 담배 한 개피를 피웠을 뿐이었다. 잠시 나의 삶은 살아가면서 종종 마주하게 되는, 아주 현실적인 절망 한가운데 있었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창 틈으로 늦겨울의 한기가 아침 햇살 속으로 밀려들었다. 그 사이, 굵고 낮은 첼로 소리가 내 마음의 낮은 물가를 ..

프랑스적인 삶, 장 폴 뒤부아

프랑스적인 삶 - 장폴 뒤부아 지음, 함유선 옮김/밝은세상 프랑스적인 삶 Une Vie Francaise 장 폴 뒤부아(Jean-Paul Dubois) 지음, 함유선 옮김, 밝은 세상 1. 한 치 앞 미래를 보이지 못한다. 그저 예측할 뿐이다. 과거시제 형 소설이 가지는 매력은 여기에 있다. 과거를 돌아보면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보여준다. 그러한 소설은 미래에 대한 숨겨진 공포를, 아찔함을, 내일을 향해 발을 내밀기가 무섭다고 독자를 향해 중얼거리는 양식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내일의 삶을, 고통스럽고 미련한 희망을 이야기하는 양식이다. 90년대 이후, 한국의 과거 시제 형 문학(후일담 소설/시)은 과거의 파란만장한 열정과 시행 착오에 대해서 끊임없이 합리화하려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그것에 ..

수 코우(Sue Coe), 또는 정치적 예술(Political Arts)

Rape, Bedford (horizontal) Woman Walks Into Bar & Is Raped on Pooltable by 4 Men While 20 Watch, 1984. photo-etching / Rives 9 3/4 x 11" 우연찮게 수 코우(Sue Coe)의 작품을 보게 되었다. 영화 으로 잘 알려진 ‘베드포드(Bedford) 성폭행 사건’을 그린 작품이었다. 작은 이미지 만으로도 끔찍해서 보기 힘들 정도인데, 실제로 보게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생각만 해도 오싹해졌다. (미주 1) 종종 우리는 끔찍한 성폭행 사건을 접하게 된다. 예를 들자면 ‘밀양 여중생 성폭행 사건’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그냥 뉴스 기사로만 접했을 뿐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 사건은 ‘현실’이지만, 미디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