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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설 연휴가 지난 어느 토요일, 종일 집에 틀어박혀 두 권의 책을 다시 펼쳤다(리뷰를 쓰지 못했기에). 젤딘의 <<인생의 발견>>과 바라트 아난드의 <<콘텐츠의 미래>>. 그리고 한 권의 책, 게오르그 짐멜의 <<렘브란트>>를, 억지로 다 읽었다,고 여기기로 했다. <<인생의 발견>>과 <<콘텐츠의 미래>>를 정리해 블로그에 올렸다. 오랜만에 트래백(trackback)을 해볼까 했더니, 네이버 블로그엔 그런 기능이 아예 없었다. 아난드는 콘텐츠의 미래는 '연결관계connection'에 있다고 했는데... 


아이와 함께 노량진수산시장에 가서 전복과 산낙지를 샀다. 며칠 전부터 전복 스테이크를 먹고 싶다고 해서 주말에 간 것인데, 살아있는 낙지를 보더니, 그것도 먹고 싶다고. 결국 전복과 산낙지를 사와 집에서 산낙지부터 회로 준비했다. 하지만 살아있는 걸 자르려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는 거의 먹지 못했고, 결국 남은 것은 라면에 넣어 먹었다. 


연초부터 일이 많았다. 야근을 밥 먹듯 했고 술자리도 있었다. 어떤 이는 나에게 꿈을 가지기엔 너무 늦은 나이라고 조언했다. 그런데 내 꿈은 사라지지 않는다(사라질 기미마저 없다). 시간만 나면 뭔가를 꿈꾼다. 심지어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은) 새로운 사랑에 대한 꿈까지도. 


이 세상은 위계적 질서의 반영(doctrine of analogy)이라고 플라톤, 그리고 이후의 철학자들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 절정은 플로티누스와 중세 철학자들이다. 지금 그런 소리를 하면 이상하게 쳐다보겠지만, 가끔 그랬으면 하고 바라기도 한다. 그랬으면 나는, 우리는 많은 것을 포기했을 것이며 꿈을 꾸지 않을 것이고 어떤 사소한 가능성 앞에서도 흥분하지 않았을 텐데(어쩌면 근대는 인간에게 터무니없이 많은 것을 요구하는 시대일지도 모른다. 바로크의 꿈이기도 했다. 나, 근대적 자아/주체가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할 수 있으리라는 바로크의 꿈 말이다).


짐멜은 플라톤 철학을 연극적이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저 세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배우들이고. 다른 말로 하지만 이 세상은 하나의 연극무대인 셈이다. 페드로 칼데론 데 라 바르카Pedro Calderon de la Barca는 아예 <<세상이라는 거대한 연극>>이라는 작품을 짓기도 했지만. 이 연극의 극본은 일종의 설계도, 형상(eidos)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연극배우였던 어떤 이가 말하길 자신은 연극무대가 끝났을 때 한없이 슬퍼더라고 ... 연극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직선적 세계관이다. 신은 그 직선의 시작과 끝에 서있고 이를 동시에 바라본다. 그래서 이 세계가 신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리). 


작년 연말에 갔던 강원도 어느 강변 산책가 나무 계단 속에 네 잎을 가진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우연히 보고 사진을 찍었다. 나이가 드니, 사소한 것 하나에 마음이 설렌다. 아니면 마음이 설레고 싶은 것이다. 마음 설렐 일이 너무 드물어진 탓일까. 아, 대학시절땐 길 가던 긴머리 소녀가 고개를 살짝 돌려 미소만 지어주어도 설레었는데(지금은 내 얼굴에 뭐 묻었나 하고 걱정부터 먼저 한다)


올 한 해 가슴 설레는 일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잠시 그런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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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의 미래 The Content Trap 

바라트 아난드(지음), 김인수(옮김), 리더스북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왜냐하면 나는 인터넷이 새로운 라디오라고 생각하니까요" - 닐 영Neil Young 




읽은 지 벌써 반 년은 흘렀고, 출퇴근하는 지하철이나 일상 속에서 가끔, 띄엄띄엄 생기던 토막 시간에 읽은 탓에 정리해놓은 노트도 없다. 그러니 리뷰 쓰기도 살짝 부담스럽다. 


돌이켜보건대 책을 다 읽었을 때의 느낌은, 짧게 쓸 수 있는 책을 왜 이리 길게 적었을까 였다. 살짝 중언부언하는 느낌이 있다. 그리고 2016년 10월에 출간된 책이 2017년말경에 번역되었으며(1년이 지난 시점), 내가 사서 읽은 건 2018년 중반이었던 탓에(거의 2년이 지난), 책의 상당 부분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이 꽤 있어, 책 읽는 도중 살짝 산만해지기도 했다.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은 '연결관계Connection'이다. 아예 대놓고 '콘텐츠의 힘을 믿지 말고 연결의 힘을 믿어라'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메시지는 너무 익숙한 것이기도 하다(생태계Ecosystem이나 네트워크Network, 심지어 플랫폼Platform도 이러한 '연결성'에 주목한 단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콘텐츠 자체의 경쟁력이 없다면 연결의 힘이 제대로 작동할까 하는 생각도 가지게 된다. 저자는 콘텐츠 자체의 경쟁력만으로 성공하는 시대는 지났음을 강조하며 그 너머 연결의 힘을 깨닫고 이를 기반으로 콘텐츠 비즈니스를 전개해야 한다고 말한다.  


네트워크 효과의 핵심은 사용자 연결이다. 기술 기업들이 전통적 기업들과 다른 행태를 보이는 듯한 이유도, '공짜' 모델, 빠른 성장, 신속한 시제품화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도 모두 네트워크 효과 때문이다. - 68쪽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인 바라트 아난드는 "우리는 네트워크 외부성으로 기회를 찾는다"라는 빌 게이츠의 말을 인용하며 콘텐츠 비즈니스에 있어서 네트워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한다. 뛰어난 제품이었던 애플의 맥Mac은 시장에서 뒤쳐졌고 MS의 Dos나 Windows는 시장의 승자가 되고, 위키피디아가 브리태니커를 넘어서듯, 콘텐츠 자체가 네트워크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노르웨이의 '십스테드'(언론사) 사례를 이야기하며 뉴스마저도 사용자 연결을 적극 수용하며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있음을. 


콘텐츠 비즈니스에서 디지털 기술이 힘겨운 상대로 느껴지는 이유는 다음의 세 가지 중 하나다. 디지털 제품에 의한 전통 제품의 자기잠식, 신기술 수용을 거부하는 기존 관리자들의 안이함, 디지털 세상에서 콘텐츠 수익 창출의 악화. 그러나 이런 요인들은 힘차게 디지털 여정을 나서려는 기업들에게도, 이전부터 종이책을 출판하던 출판사에게도 그다지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다. 출판사들이 속앓이를 하는 진짜 이유는 고정비 때문이다. - 174쪽 


할인소매업은 기본적으로 고정비 사업이다. 월마트 역시 소요되는 총 비용 중 대략 3분의 2가 매출원가(판매한 상품의 구입원가), 즉 제품 공급업자들에게 나가는 변동비variable costs다. 그리고 나머지가 상점을 짓거나 임대하는 데 필요한 자본적 지출capital expenditure과 창고, 트럭, IT 시스템 운영에 들어가는 비용 등으로 지출되는 고정비다. 흔히들 월마트가 매출원가를 낮춤으로써, 즉 공급업자들에게 단 돈 몇 푼이라도 덜 지불해서 이익을 남기는 줄 알고 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매출원가를 통해 성공을 이어가긴 힘들다. 월마트가 거둔 성공의 비밀은 매우 효율적인 방법으로 고정비를 관리하는 능력에 있다. - 179쪽 


고정비 문제는 콘텐츠 비즈니스라는 이 책의 전체 주제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항목이긴 하지만, 디지털의 도전 앞에서 실제 기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이 디지털 환경 변화가 아니라 '고정비'라는 사실에 대한 강조는, 기업, 또는 비즈니스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비즈니스 전략이나 실행 방향이 달라짐을 알려준다. 월마트는 매출원가 대신 고정비 관리를 비즈니스 성공의 핵심 요소로 파악한 것이다. 어차피 매출원가를 통해 수익을 거두기는 어려운 환경으로 시장이 변했으므로.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싸게 물건을 만들어서 비싸게 팔면 된다고 여긴다. 최근 자영업이 최저임금 때문에 어렵다는 신문기사들도 이러한 잘못된 인식에 호소하는 것이다. 최저임금이 문제라면 인력을 줄이면 된다. 하지만 가게를 옮기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인건비를 고정비로 볼 것인가 변동비로 볼 것인가는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이런 측면에서 콘텐츠 비즈니스도 디지털 환경에 대한 대응 이전에 사업 자체에 대한 비판적 조망이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아마존 웹서비스는 아마존이 자사의 서비스를 유지하기 위해 지출할 수 밖에 없는 고정비용 기반으로 새로운 비지니스를 만들어낸 성공사례다. 


이런 획기적인 성공은 클라우드컴퓨팅이 아마존의 핵심 사업이어서가 아니다. 서버 구축에 들어간 고정비를 지렛대로 활용해 고객에게 어느 누구보다 더 빠르고 더 나은 온라인 경험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 181쪽 


음악 산업은 디지털 환경에 대한 부침이 유독 심했던 곳이다. 특히 Mp3 공유(넵스터나 소리바다)는 첨예한 갈등을 불러일으켰고, 많은 디지털 기업들을 천당과 지옥을 오가다가 끝을 맞이하기도 했다. 


CD판매가 감소한 건 사실이다. 무려 80퍼센트 이상 줄었다. 스튜디오의 수익도 감소했다. 급격하게 감소한 곳도 있었다. 그동안 업계의 다른 부분에서 무언가 색다른 상황이 나타났다. CD 수요가 감소하는 만큼 라이브 콘서트의 입장권 가격이 상승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콘서트 수익이 증가한 것이다. (...) 그런데 1990년대 말 파일 공유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콘서트 입장권 가격도 급상승했다. - 228쪽 


하지만 아난드는 지적한다. 디지털 음악 파일 공유가 음악 산업을 위기에 몰아넣지 않았다고. 도리어 음악 산업이 디지털 환경에 맞추어 변화한 것인데, 기존 시장 참여자들이 음악 파일 공유에만 신경 쓰면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보완재complements는 (...) 사용자가 두 가지 제품을 함께 사용하는데서 얻는 가치가 두 제품을 따로따로 사용할 때 얻는 각각의 가치를 더한 것보다 크면 두 제품은 보완재다. 달리 말하자면 2개의 보완재를 함께 팔면 고객은 두 제품을 따로따로 구입할 때보다 더 많은 돈을 지불하고도 구입할 것이라는 뜻이다. - 233쪽 


먼저 CD와 콘서트가 보완재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둘 중 하나의 가격이 하락할수록(따라서 소비량이 늘어난다) 나머지 제품의 수요는 더욱 증가한다. 오랫동안 콘서트는 값싼 보완재 역할을 하며 CD 판매를 밀어올렸다. 하지만 파일 공유가 늘어나고 CD 가격이 떨어지자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그러다가 그들이 라이브 콘서트로 향하게 된 것이다. - 234쪽


음악 산업의 사망 선고는 너무 일렀다. 죽기는커녕 오히려 지난 10년간 음악 산업은 수십억 달러의 가치를 창출해냈다. 단지 가치의 재분배가 일어났을 뿐이다. 음반사에서 음악가로, 소매 판매점에서 기술 제조사로, CD에서 라이브 콘서트로 가치가 옮겨갔다. - 236쪽 



책에 나온 보완재 도표를 옮긴다. 아마 콘텐츠 비즈니스 뿐만 아니라 산업 전 분야에 걸쳐서 다양한 보완재가 있을 것이다. 다만 콘텐츠 비즈니스에 있어서 보완재는 사업 성공의 KSF(Key Success Factor)일 지도. 더 나아가 슈퍼스타 효과까지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수퍼스타의 경제학. (...) 제품 간 '불완전한 대체imperfect substitution'(다른 가수 3명의 앨범보다는 좋아하는 가수 한 명의 앨범을 갖는 것이 좋다)의 특성과 한 제품의 '결합 소비joint consumption'(한 명의 예술가가 수천 명 또는 수백만 명의 청취자에게 동시에 다가갈 수 있다)의 특성이다. (...) 이 두 가지를 합치면 슈퍼스타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 302쪽 



하나 주목할 것은 핵심역량에 기반한 상호 보완성이다. 핵심 역량이라는 단어를 이미 알고 있었고 여러 책들을 통해 접했지만, 나도 오해하고 있었음을 고백해야 겠다. 솔직히 핵심 역량을 제품이나 서비스의 관점에서만 이해하고 있었다. 즉 핵심역량을 완결된 형태, 즉 Product로 이해한 것이다. 


그러다가 1991년 C.K. 프라할라드와 게리 하멜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기업들이 제품의 관점이 아닌 과정 또는 수행 능력의 측면에서 연관성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제안한 것이다. 혼다Honda가 자동차에서 잔디 깎는 기계로 영역을 넓혀간 것은 제품의 연관성 때문이 아닌, 엔진과 동력 전달 장치에 대한 전문성 때문이라는 측면에서 충분히 이해할 만한 확장이었다. 이렇게 다각화를 향한 '핵심 역량core competence' 논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 들었고 많은 기업들이 이 논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 366쪽 


상호 보완을 통한 지속적인 성공 (...) "개별적인 특성과 그 개별적 특성들이 일본의 경제 성공에 어떻게 기여했는지 알려면, 그 시스템을 품은 환경적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 환경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거나 시스템의 상호 보완적인 다른 요소들을 분리한 채 개별적인 특성들을 하나하나씩 보아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간단하지만 강력한 내용이었다. 다시 말해 조직이 하는 선택들은 독립적이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 그 뿐만 아니라 어느 조직에서든 서로 유기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교차 기능 설계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 있다. 밀그롬과 로버츠는 이 개념을 그들의 저서 <<경제, 조직 그리고 관리Economics, Organization and Management>>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 402쪽 ~ 403쪽 


이는 조직 내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상호보완성의 개념은 이후 마이클 포터의 '전략Strategy' 개념에도 반영되었으며, 포터의 제자 얀 리브킨Jan Rivkein은 "전략을 구현하는 결정들이 많고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을 때, 선택의 효율적인 조합을 찾아내는 기업은 세 가지 방향에서 보호받을 수 있다"라고 했다. 


첫째, 연결 관계를 맺은 선택들은 다른 기업들이 성공적인 전략을 찾아내기 더욱 힘들게 만든다. (...) 둘째, 성공을 거둔 회사가 내린 결정들을 하나하나씩 흉내 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 셋째, 서로 연결된 경쟁사의 결정들을 통째로 모방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복잡함에 혼란스러워져 이도저도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406쪽 


이런 이유로 우리가 흔히 하는 벤치마킹 분석Benchmarking Analysis는 실패하게 된다. 그래서 아난드는 사용자(고객)의 맥락Context을 강조한다. 여기에서 시작해 차별화와 경쟁우위를 만들어야 된다고. 


다소 두서 없이 옮기면서 책 소개를 해보았다. 책이 상당히 두껍긴 하지만, 읽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는다. 다양한 사례들이 등장하지만, 등장하는 기업들은 많지 않다. 어쩌면 콘텐츠 비즈니스로 성공하는 기업이 드물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만큼 막대한 투자가 수반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굳이 읽어야 되는 필독서 목록에 이 책이 올라가야 하나 하는 의구심마저 들기도 한다. 막상 따지고 보면, 나쁜 책은 아니지만, 책 두께에 비한다면 실제 기업에 종사하는 우리들에게 실천적인 조언을 준다고 보기엔 살짝 아쉬운 점이 많기 때문이다.  너도나도 높은 평점을 주고 있기에 낮은 평점을 매긴다. <<콘텐츠의 미래>>라는 역서 제목이 나에게 주었던 기대만큼은 아니었다. 





콘텐츠의 미래 - 6점
바라트 아난드 지음, 김인수 옮김/리더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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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이 바람 될 때 When Breath Becomes 

폴 칼라니티(지음), 이종인(옮김), 흐름출판 





You that seek what life is in death,

Now find it air that once was breath.

New names unknown, old names gone:

Till time end bodies, but souls none.

Reader! then make time, while you be,

But steps to your eternity

- Baron Brooke Fulke Greville, "Caelica 83" 


죽음 속에서 삶이 무엇인지 찾으려 하는 자는 

그것이 한때 숨결이었던 바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 

새로운 이름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고

오래된 이름은 이미 사라졌다.

세월은 육신을 쓰러뜨리지만, 영혼은 죽지 않는다.

독자여! 생전에 서둘러

영원으로 발길을 들여놓으라. 

- 브루크 풀크 그레빌 남작, <카엘리카 소네트 83번> 




책 읽으며 눈물을 글썽이고 말았다. 그리고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죽어가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던 의사에게 닥친 죽음의 선고는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도.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시한부 암 선고를 받았던 때도 떠올랐다. 그것이 어머니와 우리 가족에게 긴 터널같은 것임을 그 땐 미처 몰랐다. 아무도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았고 암과의 싸움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의사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될 것이라 여겼지만, 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우리의 의료시스템과 의사들에 대해 생각했다. 


이 책은 신경외과의사였던 폴 칼라니티가 죽어가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의사와 죽음에 대해 쓴 책이다. 어떤 이들은 이 책을 자서전쯤으로 여길지 모르겠지만, 그러기엔  폴 칼라니티는 자신의 인생보다는 그 인생을 가능하게 했던 자신의 생각, 태도, 그리고 가족과 우정, 그가 경험했던 의사들에 대해 진실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책을 다 읽을 때쯤 왜 이런 사람은 이렇게 일찍 죽는 것일까 하고 반문하게 될 것이다. 그 정도로 감동적이며 울림이 큰 책이다.  



"자, 클레어." 외과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보이는 것처럼 정말 안 좋은가요? 아이의 어머니가 불쑥 끼어들며 말했다. "암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아는 건, 그리고 물론 당신도 잘 알겠지만, 당신의 삶이 이제 막, 아니, 이미 변했다는 겁니다. 앞으로 기나긴 싸움이 될 거예요. 남편 분도 잘 들으세요. 서로를 위해 자기 자리를 잘 지켜줘야겠지만 필요할 대는 꼭 충분히 쉬어야 합니다. 이런 큰 병을 만나면 가족은 하나로 똘똘 뭉치거나 분열하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되죠.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서로를 위해 각자의 자리를 잘 지켜야 해요. 아이 아버지나 어머니가 침대 곁에서 밤을 세우거나 하루종일 병원에 있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아시겠죠?" 

- 93쪽 ~ 94쪽 



칼라니티가 신경외과를 전공으로 선택하기 직전 본 풍경. 그리고 그는 신경외과를 선택한다. 스탠포드 대학원에서 리처드 로티(우리가 알고 있는 그 로티Rorty!) 교수에게서 영문학 석사를 마친 후, 그는 의과대학원으로 가 의사가 된다. 



진지한 생물학적 철학을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의학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도덕적인 명상은 도덕적인 행동에 비하면 보잘 것 없었다. 

- 66쪽 



의학을 배우고 의사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지만,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제프 말이야. 자살했대."

"뭐?"

제프는 중서부의 한 병원에서 외과 특별 연구원 생활을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우리 둘 다 정신없이 바빠서 연락을 하지 못했다. 나는 제프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를 떠올리려고 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뭔가 복잡한 문제가 있었나봐. 게다가 담당 환자도 사망했고. 어젯밤에 건물 옥상에 올라가서 뛰어내렸대. 그 이상은 나도 몰라."

- 141쪽 



결국 삶과 죽음의 문제이며, 의사들은 그것에 너무 깊숙하게 개입해 있는 존재였다. 가끔 의사들을 볼 때, 환자를 기계적으로 대하는 건 아닐까 의심을 품기도 하지만, 칼라니티는 그렇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향해 속수무책으로 살아간다. 죽음은 당신에게도, 주변 사람에게도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제프와 나는 몇 년 동안 죽음에 능동적으로 관여하고, 마치 천사와 씨름한 야고보처럼 죽음과 씨름하는 훈련을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삶의 의미와 대면하려 했다. 우리는 사람의 생사가 걸린 일을 책임져야 하는 힘겨운 멍에를 졌다. 우리 환자의 삶과 정체성은 우리 손에 달렸을지 몰라도, 늘 승리하는 건 죽음이다. 설혹 당신이 완벽하더라도 세상은 그렇지 않다.

이에 대처하는 비법은 상황이 불리하여 패배가 확실하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의 판단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환자를 위해 끝까지 싸우는 것이다. 

- 142쪽 ~ 143쪽 



그런 칼라니티가 암 선고를 받고 죽어가며, 자신의 담당 의사와 이야기하고 그러면서 죽음을 준비해 나가는 모습은 놀라움을 전해준다. 결국 이 책은 어느 지점에서 멈추고 그의 아내 루시 칼라니티의 에필로그로 이어진다. 



2015년 3월 9일 월요일, 폴은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병원 침대에서 숨을 거두었다. 8개월 전 우리 딸 케이디가 태어난 분만 병동에서 200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누군가는 케이디가 태어나고 폴이 숨을 거둔 그 사이에 동네 바비큐 식당에서 우리 식구를 보았을 것이다. 그곳에서 검은 머리에 긴 속눈썹을 가진 아기가 유모차에 탄 채 졸고 있는 동안, 맥주 한 잔을 나눠 마시고 갈비를 뜯으며 서로에게 미소 짓던 우리 부부를 본 사람은 폴이 앞으로 살 날이 1년도 채 남지 않았다는 걸, 또 우리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 237쪽 ~ 238쪽 


 



강력하게 이 책을 추천한다. 이종인 선생의 번역은 늘 그렇듯 믿을 만하다. 



칼라니티는 이 책의 서시로 영국 시인 그레빌 남작(1554 ~ 1628)의 시 <카엘리카>를 인용하고 있는데, 그레빌 남자이라고 하면 곤고한 인간의 생존 조건을 노래한 시인으로 유명하다. 남작은 인간이 하나의 법률(정신) 아래 태어났으나, 다른 법률(육체)에 매인 존재이며, 허영 속에서 태어났으나 허영을 금지당한 존재이며, 병든 상태로 창조되었으나 건강하게 살아갈 것을 명령받은 모순적 존재라고 설파했다. 이 말처럼 폴 칼라니티를 잘 설명해주는 말이 따로 있을까? 뇌의 기능을 그처럼 진지하게 연구했으나, 결국에는 뇌가 암에 의해 파괴되었고, 인생의 의미를 그토록 알아내려 했으나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뒤에 남겨놓고 혼자 떠나가야 했으며, "죽음을 뒤쫓아 붙잡고, 그 정체를 드러낸 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똑바로 마주보기 위해" 애쓰다가 결국 죽음에 붙들리고 말았으니 말이다. 

- 280쪽, <옮긴이의 말> 중에서 



그레빌 남작의 영문시집을 사서 읽어볼까 한다. 쉽진 않겠지만. 





숨결이 바람 될 때 - 10점
폴 칼라니티 지음, 이종인 옮김/흐름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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