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 898

완벽한 날들, 메리 올리버

완벽한 날들메리 올리버(지음), 민승남(옮김), 마음산책 사 놓은 지 한참 만에 이 책을 읽는다. 몇 번 읽으려고 했으나, 그 때마다 잘 읽히지 않았다. 뭐랄까. 자신의 삶에, 일상에, 지금/여기에 대한 만족과 찬사, 행복과 신비에 대한 온화하고 밝고 서정적인 서술들과 표현들로 가득한 이 책이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던 걸까, 아니면 나는 이런 책 읽기를 두려워하거나 맞지 않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 결국 읽기는 했으나, 역시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깊이 이 책에 빨려들지 못했다. 매혹당하지 못했다. 많은 이들의 찬사와 달리, 나에겐 그저 좋은 산문집이었다. 하긴 이 정도만으로도 나쁘진 않으니까. 하지만 나에게 최고의 산문집은 기싱의 이나 보르헤르트의 같은, 세계와 자..

시그널Signals, 피파 맘그렌

시그널 Signals 피파 맘그렌Pippa Malmgren(지음), 조성숙(옮김), 한빛비즈 가끔 아마존에 들어가 서평을 읽곤 한다. 대단한 찬사를 받은 책이 너무 형편없거나 또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매우 흥미롭게 읽은 책일 경우에 해당한다. 피파 맘그렌의 은 최근에 읽은 책들 중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터라, 일반 독자들의 의견이 궁금했다. 대체로 높은 평점을 주고 있지만, 매우 낮은 평점을 주기로 했다. 이 책 은 'How Everyday Signs Can Help Us Navigate the World's Turbulent Economy'라는 부제가 붙어있다(번역서에서는 '일상의 신호가 알려주는 격변의 세계 경제 항해법'). 하지만 알라딘 리뷰에 실린 것처럼 '정치이야기가 대부분'이라는 생각일 들..

근대의 서사시, 프랑코 모레티

근대의 서사시 Modern Epic프랑코 모레티(지음), 조형준(옮김), 새물결 프랑코 모레티의 이 책, 읽기 쉽지 않다. 그의 말대로 너무 유명하지만, 거의 읽히지 않는(읽기 어려운) 서사 작품들을 두고, '서사시'라는 테마를 통해, 근대가 어떻게 이들 작품 - 세계적 텍스트 속에서 드러나는지, 말 그대로 어떤 특징들을 가지며, 어떤 방식으로 근대사회, 혹은 근대성을 담아내고 있는가를 상당히 방대한 인용과 참고 문헌들, 문학 뿐만 아니라 음악까지 언급하는 탓에 까다로운 독서를 요구한다. , , , , , , , . 이것들은 그저 오래된 책들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역사적 기념물이다. 근대 서구가 자신의 비밀을 찾아 오랫동안 자세히 파고들어온 성스러운 텍스트이다. (18쪽) 하지만 모레티의 의도..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F.스콧 피츠제럴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F. 스콧 피츠제럴드(지음), 박찬원(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두 번째로 읽은 피츠제럴드의 소설이다. 는 그 명성에 비해 내 감상은 다소 실망스러웠고 내 취향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당시 미국을 잘 알 수 있는 소설이라는 점에서 풍속소설의 최고봉이라고 할 만하달까. 이 책은 단편집이다. 다들 익히 알다시피, 피츠제럴드는 생계를 위해 단편을 엄청 쓴 소설가였다. 하지만 탁월한 문학성을 가진 단편은 몇 편 되지 않고 그의 명성에 비해 단편집에 대한 평가는 높지 않다. 현대의 단편작가들, 가령 레이몬드 카버나 엘리스 먼로 등과 비교해서도 피츠제럴드의 단편들은 뛰어나지 않다. 아마 이 점은 피츠제럴드는 잡지에 실리는 단편이 가져야 하는 흥미로움에 집중된 상상력, 그리고 20세..

메소드 스타일Method Style, 에릭 라이언, 에덤 라우리

메소드 스타일 Method Style - 1등 기업과 싸우는 작은 회사의 7가지 집착 에릭 라이언, 애덤 라우리(지음), 구세희(옮김), 한빛비즈, 2013년 브랜드는 내부에서부터 시작된다. 메소드에서는 직원들이 바로 브랜드다. (106쪽) 번역 출판된 지도 벌써 7년이 지났는데, 이 책이 주는 울림은 상당하다. 지금이라도 찾아서 읽어야 되는 책이라고 할까. 특히 디자인 사고(Design Thinking)에 대해선 실제 비즈니스나 제품 기획에 있어서 어떤 방식으로 적용하고 실행할 수 있는가에 대한 탁월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이 책은 멋있는 디자인의 친환경 청소용품을 생산하는 캘리포니아의 별난 기업 메소드Method에 관한 책이다. (5쪽) 그리고 그들의 빠른 성장의 배경이 되는 (전략이 아닌) 집착..

새로운 충견들, 세르주 알리미

새로운 충견들 Les nouveaux chiens de garde 세르주 알리미Serge Halimi (지음), 김영모(옮김), 동문선, 2005년(1997년) “우리는 철학자의 가면에 인정된 존경이 결과적으로 은행가의 권력에만 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영원히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폴 니장, 중에서 ‘1932년 폴 니장은 ‘자기 시대의 부도덕한 시사 문제’에 대한 자신의 참여를 위대한 개념 더미 아래로 숨기기를 좋아하는 철학자들을 고발하기 위해 이라는 에세이를 썼다(11쪽).’ 약 60여년 후인 1997년 세르주 알리미는 권력과 자본주의를 위한 매끈한 이미지를 제공하며 공모를 일삼는 기자들, 저널리스트들을 비판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그리고 2020년 기자라는 정식 명칭 대신 ‘기레기’라는 혐오스러운 ..

아감벤과 코로나

코로나로 인해 각국 정부는 다양한 제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 한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이동을 막고 마스크를 의무화하며 대면 예배를 금지하기도 한다. 심지어 미국의 경우, 대면 예배를 하는 목사를 체포하기까지 한다(왜 태극기부대 목사님들은 성조기를 들고 나오는 걸까?). 그런데 이러한 제한 조치에 대해 미국이나 유럽 일부에서는 강한 반발이 있기도 하다.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실은 누군가의 건강, 심지어 목숨까지 직결된 전염병 문제인데, '자유'를 들고 나오는 것이 낯설기도 하고, 그만큼 서구에서는 자유가 상당히 중요한 의미인가 하고 다시 묻게 된다. 그리고 조르조 아감벤의 강한 반발을 알게 된 후, 우리가 이해하는 것 이상으로 '자유'를 중요하게 여기며 국가 권력에 의한 자유의 제한을 심각..

불협화음과 문학

프랑코 모레티Franco Moretti의 (조형준 옮김, 새물결)을 읽다가 '불협화음'에 대한 인용들이 있어서 메모해둔다. 불협화음은 하나의 음조가 다른 음조로 넘어갈 때 중간에 끼어드는 음들을 통해 최초로 나타나는데, 나는 그러한 옮아감은 포르타멘토, 즉 도약을 부드럽게 하려는 욕망, 도약음들을 아름다운 선율로 결합시키려는 욕망에서, 이 경우에는 음계의 음정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욕망이 다른 욕망, 즉 좀더 불협화음을 이루는 배음(倍音)들도 함께 이용하려는 욕망과 일치하는 것은 아마 운이 좋은 경우라 할 수 있는데, 그러한 역사적 진화가 정말 종종 일어나기도 한다. - 쇤베르크, 중에서 (바그너의 음악에서) 모든 에너지는 불협화음 쪽에 모아진다. 이에 비해 개별적인 (음악에서 불협화음에서..

팬데믹 패닉, 슬라보예 지젝

팬데믹 패닉슬라보예 지젝(지음), 강우성(옮김), 북하우스 매번 읽는 책들이 출판된 지 한참 지난 책들이라, 이번에는 상당히 시사적인 책을 읽고 싶었다. 뭔가 시대에 뒤쳐지는 느낌이 있었다고 할까. 세상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닌데, 관심 없는 구닥다리가 되는 듯 싶었다. 그래서 구입한 책이다. 책은 얇고 쉽게 읽힌다. 다만 현 시절에 대한 탁월한 통찰력이 있는가에 대해선 고민해볼 여지가 있다. 대단한 찬사를 거듭할 책은 아니다. 도리어 지젝이 인용한 브뤼노 라투르의 견해에 더 이끌렸다. 바이러스의 확산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식습관 같은 인간의 문화적 선택, 경제와 세계무역, 복잡한 국제관계 네트워크, 공포와 공황 상태의 이데올로기적 메커니즘 같은 변수들을 고려해야 한다. 이 연관성을 제대로 파악하기 ..

예상 밖의 전복의 서, 에드몽 자베스

예상 밖의 전복의 서 (Le petit livre de la subversion hors de soupcon)에드몽 자베스Edmond Jabes(지음), 최성웅(옮김), 읻다 글은 무엇이고 책은 어떤 존재일까. 그것의 시작은 어디이며 그 끝은 언제일까. 이 형이상학적 질문은 우리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끌어당기지만, 우리는 금세 그 힘으로부터 도망쳐 나온다. 어쩌면 포기일지도, 혹은 도망이거나, 실질적인 결론 없는 무의미에 대한 경악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드몽 자베스에게서 이 질문들은 글쓰기의 원천이며 삶의 의지이며 우리를 매혹시키는 향기다. 작품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우리가 죽게 되는 미완 속에 우리를 내버려둔다. 우리에게 남은 공백은, 무언가를 쏟아야 할 곳이 아닌 견뎌야 하는 곳이다. 그곳에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