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284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카를로 로벨리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The Order of Time 카를로 로벨리(지음), 이중원(옮김), 쌤앤파커스 물리학은 사물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진화하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모든 사물이 각자의 시간 속에서 어떻게 진화하는지, '시간들'이 서로 어떻게 다르게 진화하는지를 설명한다. (26쪽) 결국 우리가 이해하는 바 '시간'이란 없고 그냥 나의 시간, 너의 시간, 지구의 시간, 화성의 시간 등등 질량에 종속된 시간들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과거, 현재, 미래는 그저 착시 현상일 뿐이며, 끔찍한 사실 하나는 이미 미래는 거기 있어야만 한다. 정해진 바대로 시공간들이 나열해있을 뿐인데, 우리는 시간을 오직 현재로만 인식하기 때문에 시공간 전체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들을 카를로 로벨리는 마치 철학서..

스크린의 추방자들, 히토 슈타이얼

스크린의 추방자들 The Wretched of the Screen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지음), 김실비(옮김), 김지훈(감수), 워크룸프레스 1. 책을 사두고선 읽지 않았다. 현대예술에 대한 책이라는 걸 알았지만, 영화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일 거라는 추정과 다소 투박하게 읽혔던 몇몇 문장들로 인해, 그리고 다른 책들과의 우선 순위에서 뒤로 밀려 읽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읽은 한은형의 수필집에서 히토 슈타이얼이라는 흥미로운 예술가의 이름을 발견한다. (2007)라는 작품에 대한 짧은 글 속에서 나는 이 작가를 찾았다. 그런데 이런, 나는 뒤늦게 최근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미술가들 중의 한 명이며, '빈곤한 이미지(poor image)'로 거의 전세계적인 지지를 받고 있음을. 그리고..

사랑, 예술, 정치의 실험, 파리좌안 1940-50, 아녜스 푸아리에

사랑, 예술, 정치의 실험 파리좌안 1940-50 아녜스 푸아리에(지음), 노시내(옮김), 마티 사람은 읽고 싶은 것만 읽고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사람들 대부분 이것저것 고려할 정도로 배려심이 많지도 않고 폭넓은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며, 굳이 그럴 필요까지 느끼지 못한 채 살기 바쁘다(요즘 내 모습이구나). 그래서 이 책은 어떤 이들에게 20세기를 주름 잡았던 파리의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의 숨겨진 모습을 알게 해주는 값진 책이 될 수 있겠지만, 어떤 이들에겐 지식인들의 불건전한 연애 기록으로 읽힐 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나도 예상 밖의 이야기들로 인해 흔들렸으니...) 2차 세계 대전 전후, 점령당한 파리 좌안에서의 일상을 담고 있는 이 책에는 다행히 나치의 군인들에게 살해당하고 아우슈비츠로 끌..

다시, 일본을 생각한다, 서경식

다시, 일본을 생각한다서경식(지음), 한승동(옮김), 나무연필, 2017년 '일장기'라고 불리는 히노마루와 천황을 찬미하는 의례곡인 기미가요는 원래 일본의 공식국기와 국가가 아니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학교를 비롯한 여러 기관의 각종 공식 행사에 쓰였고 1999년 8월 9일 이들이 일본의 국기와 국가로 법제화된다. (14쪽, 각주에서 인용) 일본의 우경화를 먼 나라 이야기라 여겼던 걸까, 아니면 꽤 많은 일본 소설들과 지식인들의 책들을 읽었다고, 그리고 영화나 최근의 일본 여행으로 정치외교 분야의 갈등을 우리가 겪는 일상과는 다른 층위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키하바라 역 앞에서 연설하던 아베 신조 자민당 총재를 에워싸고 일장기를 휘날리며 환호하던 '시민'들이 반중, 협한, 재일 한국..

유연한 사고의 힘, 레너드 믈로디노프

유연한 사고의 힘레너드 믈로디노프(지음), 김정은(옮김), 까치 이 책에 나와 있는 방식대로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선 확신할 수 없지만, 뭔가 돌파구가 필요한 건 사실. 하지만 창의적인 사고(유연한 사고) 이전에 제대로 된 생각부터 하고 있는가(분석적 사고)를 따져 물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분석적 사고조차도 하지 못하는 이들이 너무 많으니까. 책 초반에 언급된 분석적 사고와 유연한 사고에 대한 저자의 정의는 아래와 같다. 분석적 사고 analytical thought : 한 유기체가 사실관계나 근거를 토대로 하나의 생각에서 그와 연관괸 다른 생각으로 옮겨가는 순차적인 접근 방식. 각복에 의한 처리 과정 같은 선형 방식 유연한 사고 elastic thinking : 대체로 무의시적으..

하이브리드 시대의 문학, 김성곤

하이브리드 시대의 문학 김성곤(지음),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09년 예전에 사두었던 책이다. 책 제목에서 풍기듯 새로운 문학 흐름에 대해 알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게 만드나, 그런 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십 년 가까이 서가에 꽂혀만 있었던 책이다. 그 사이 한 두 번 읽어볼까 했지만, 쉽게 손이 가지 않았고 최근에서야 다시 꺼내 읽고 간단하게 리뷰를 쓴다. 실은 리뷰를 쓸만한 내용도 많지 않다. 탁월한 통찰이 있다기 보다는 미국 문학을 중심으로 현대 문학의 흐름을 소개하는 책에 가깝기 때문이다. 전 세계 문학이나 수준높은 문학 이론을 다루는 것도 아니어서, 어느 정도 제반 지식을 가진 이들에게 선뜻 이 책을 권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학부생들에게 권하기엔 너무 일반론에 가까워서, 영문학 전공자 외에..

에디톨로지 - 창조는 편집이다, 김정운

에디톨로지 - 창조는 편집이다 김정운(지음), 21세기북스 TV에 나온 김정운 교수를 보고 다소 가벼워 보인다는 인상을 받았다. 성실한 학자의 이미지보다는 대중적인 지식인에 가까워 보였다. 다소 부정적인. 그러나 이 책을 다 읽은 지금,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그 때나 지금이나 가볍다는 인상에는 변화가 없지만, 그 전에는 부정적인 의미였다면, 지금은 원래 가볍고 유쾌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성실한 학자의 진지함 같은 것과는 무관한 원래 그런 사람이었던 셈이다. 이는 이 책 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저자의 고민이 깊게 묻어나오고 꽤 성실하게 저술되었기 때문이다. 별 기대하지 않고 읽었다가 꽤 길게 메모를 하였다. 이 책의 결론은 분명하다. 편집이 중요하다는 것. 이제 편집된 지식이 중요해진다..

<사라진, 버려진, 남겨진>, 구정은

사라진, 버려진, 남겨진 구정은(지음), 후마니타스 사라지고 버려지고 남겨진 것들에 대해서만 씌여진 책이다. 호수가 말라가고 대지가 바다에 잠기고, 플라스틱과 비닐이, 먹지도 않은 음식물이 버려져 폐허처럼 쌓여갈 때, 그 옆에선 국적없는 아이들이 태어난다. 다 우리 탓이다. 이 시대의 문명, 도시, 자본주의로 인해 사라지고 버려지고 남겨져, 저기 저 곳에 갇힌 채 사람들은 가난과 분쟁, 폭력과 억압, 그리고 독재자 밑에서 신음하고 고통받다가 고대 문명의 폐허 속으로, 혹은 현대의 부유하는 쓰레기들과 함께 잊혀질 것이다. 출처: https://www.travel-in-portugal.com/beaches/praia-do-barril.htm 포르투칼의 타비라섬은 바닷가 모래 밭에 녹슨 닻 수백 개가 꽂혀 있..

발견의 시대, 이언 골딘, 크리스 쿠타나

발견의 시대 Age of Discovery 이언 골딘, 크리스 쿠타나(지음), 김지연(옮김), 21세기북스 "현 시대는 신르네상스다. 폭발하는 천재성과 번성하는 위험성이 대립하는 시대다." 나는 자주 현대를, 로마가 흔들리기 시작하던 헬레니즘 시대와 비교했다. 헬레니즘은 로마 시대의 정점이면서 동시에 그림자가 깃드는 시기다. 팍스 로마나의 시대이지만, 그 평화 사이로 새로운 이민족들이 끊임없이 들어오고 문화와 종교가 뒤섞이고 더 이상 확장하기엔 한계에 이르는 어떤 제국으로 변해간다. 그리고 그 다음은 (다들 알고 있듯이) 로마 말기, 혹은 중세 초기가 시작된다. 문명의 노을이 깃드는 시기다. 르네상스와 비교한 적은 거의 없다. 살짝 현대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할 순 있으나, 엄밀히 말해 순수한 르네상스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