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로마의 테라스, 파스칼 키냐르

지하련 2003. 5. 7.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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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테라스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문학과 지성사



'은밀한 생' 이후 읽는 키냐르의 두 번째 소설이다.

전체가 거의 다 하얗게 보이는 드라이포인트. 빛에 잠식된 난간의 받침살들 뒤로 한 형상이 보인다. 나이 든 남자의 모습이다. 지그시 감은 두 눈, 흰 턱수염, 다리 사이에 들어가 있는 손, 테라스 위, 로마, 황혼녘, 하루 중 제 3의 시간, 저무는 태양의 황금빛 광휘에 휩싸여, 그는 자유로움과 살아있다는 행복에 흠뻑 취해 있다. 포도주의 몽상 사이에.
(78쪽)

기대한 만큼 감동적이지 않고 프랑스 내에서 화제가 되었다는 점이 의아스럽기까지 하다. 역자의 말에 따르면 그가 바로크 시대를 염두에 두고 이 소설을 썼다고 하지만, 그의 소설은 전혀 바로크적이지 않다. 극중 주인공의 판화 속에서 이루어지는 소설이면서, 판화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소설이라는 점에서 기존 액자 소설과는 다른 형태의 액자 소설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즉 형식적인 측면에서 탁월한 액자 소설이라는 평가는 가능하다. 이러한 형식적인 측면을 무리하게 고수하다보니, 스토리는 허술하고 치밀하지 못하다. 띄엄띄엄 흩어진 사건들은 한 곳으로 모이지 못하고 이리저리 흩어진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구석에서 살아가는 법일세. 사랑에 빠진 사람들도 모두 구석에서 살아가지. 책을 읽는 사람도 구석에서 사는 거네. 절망한 자들은 숨을 죽이고, 누구에게 말을 하거나 누구의 말을 듣지도 않으면서, 마치 벽에 그려진 사람처럼 공간에 달라붙어 살아가는 거야.
(7-8쪽)

그런데 우리 인생은? 우리 인생도 허술하고 치밀하지 못하지 않은가. 우리 인생을 수놓는 사건들도 하나로 모이지 못하고 띄엄띄엄 흩어진 채 여기저기로 흩어지지 않는가. 바로크 양식의 이념은 모든 움직임들이, 사건들이 하나로 모인다는 것이다. 그것은 양식의 형태적인 측면에서나 이념적인 측면에서도 동일했다. 근대 기계론은 이러한 바로크 양식의 철학적 반영이다.

바로크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바로크의 이념을 반영하지 않고 현대의, 모더니즘 이후의 이념을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에서 바로크란 별로 중요한 키워드는 아닌 셈이다. 그저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된다는 것뿐. 과거란 가슴 아프지만 부정해야 되는 것이며 우리는 어딘가에서 떠나와 낯선 어딘가에서 죽어갈 것이다. 사랑은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이루어질 수 없는 그 어떤 것이며 예술은 수동적인 의미의 거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