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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페이스북은 정치 싸움 중이다. 각자 편을 나누어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의 이야기를 퍼다 나른다. 나 또한 그렇게 하고 있다.


나라의 미래를 여는 즐거운 이벤트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기엔 한국의 정치 지형은 너무 형편없고 몇 명의 후보는 누가 봐도 함량미달인데도 불구하고 지지율이 만만치 않다(일부 국민의 정치에 대한 이해나 식견이 한참 모자른다고 볼 수 밖에 업다고 말하는 너무 심한가. 하긴 트럼프도 만만치 않았으니, 여기나 거기나 정치인에게 요구하는 도덕 수준은 형편없구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정치가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지만,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나이가 들수록 정치에 대한 이해나 분석력이나 판단이 희미해지는 듯 싶다.


이럴 때일수록 정치학자나 정치평론가, 전문가들의 의견이 중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특정 후보를 지지해선 안 된다는 건 아니다. 도리어 지지하는 편이 낫다. 나 또한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에 대한 선호를 분명히 밝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객관성을 잃어버리고 편파적인 의견만을 고수할 땐, 해당 후보의 캠프로 들어가는 편이 낫다. 편파적인 객관성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평론가들은 자주 욕을 먹기 마련이지만,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독자들을 설득하거나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자신의 의견을 지킬 때, 비로소 평론가의 명성이 쌓이는 법이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객관성을 잃어버린 채, 자신의 주장만을 나열하곤 끝이었다. 결국 나도 나도 다소 화가 나서 친구 끊어야 했다. 아래는 친구를 끊으면서 짧게 단상을 적어보았다. 아마 정치평론 뿐만 아니라 다른 평론들이 이와 비슷해보이기에 블로그에 옮기고 저장해둔다.


*   *

2017년 5월 6일 저녁에 쓴 메모. 



(어떤 분야이든지 간에)평론가는 (무조건) 편파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객관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편파적일 수 있다. 그 주장(누군가의 눈에 보기에 편견으로 가득 찬 자기주장)은 자신의 신념이며 현재이고 미래이다. 그런데 그것을 툭 던져놓고 그 주장 밑에 무수히 달린 댓글들을 통한 (경제적이지 못한)논쟁 중에 누군가가, "왜 댓글에 답글을 달지 않고"(사람들끼리의 논쟁을 불러일으키는가)라는 문구를 읽고 난 다음 바로 페친을 끊었다.


(다소 이해는 가지만)그 신념 - 보수/진보 구도를 깨기 위해선 새로운 후보가 나와야 된다는 - 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과연 한국이 보수/진보 구도였던가 싶다. 한국은 이때까지 일당 독재 구도였다. 늘 정치적 주도권은 보수우파(내가 볼 때 수구 꼴통이며, 'conservative'라는 단어가 아까운)를 중심으로 한 헤쳐모여 구도였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많은 진보적 인사들이 보수로 배를 갈아탔다. (왜 배를 갈아탔는지도 의문이지만)


고 김대중 대통령은 국가 위기 상황 속에서 당선되었고 고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내내 좌우 막론하지 않고 공격을 받았다(심지어 탄핵을 받고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법적인 심판을 받은 후에도). 심지어 강준만 교수는 마키아벨리즘을 멈춰라고 소리 질렀다(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즉 보수우파는 늘 공격자의 입장에 서 있었으며 기득권과 함께 했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모든 매체에서 고 노무현 대통령을 비난할 수 있는 (무척 합리적인 단어들로 포장된) 무수한 표현들을 만들었다. 조중동 뿐만 아니라 한겨레, 프레시안, 오마이에서도. 그런데 그 표현들이 MB가 들어서자 (참 흥미롭게도) 표현의 빈곤함을 드러냈다. 그 사실이 너무 슬펐지만, 그 누구도 그걸 지적하지 않았다. (아니면 내가 몰랐던가)


정치는 지정학적 구도나 평형의 문제는 아니다. 그건 신념의 문제이며 가치의 문제이다. 그리고 그 신념과 가치에 기반한 미래의 문제다.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래를 담보로 하면 안 된다. 하지만 반대로 미래를 가지기 위해 현재에 대해 모험을 걸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무수한 이들이 보이지 않는 가치를 위해 인생을, 삶을 던지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미래를 위해 온 몸을 던지는 것이다. 이것이 정치인이 가져야 하는 첫번째 미덕이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문과 심 이외엔 없다(아! 얼마나 안타까운가).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하길 "그의 성격이 그의 운명이다."


그녀의 성격을 따라, 그녀의 운명을 따라 대한민국이 침몰했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이럴 때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지식인은 단정한 언어로 명확한 평가를 제시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냉철한 현실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먼 미래를 보는 혜안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이 점에서 헤겔의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 녁에 날아오른다"라는 표현은, 지식인의 슬픈 운명을 이야기한 것이다. 결국 (정치적) 상황 정리가 다 끝난 다음 지식인은 거기에 한 마디 덧붙인다는 뜻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그러면 안된다고 헤겔에 기대어 자신의 이론을 전개한 것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선 끝까지 싸워야 한다. 그리고 그 주장은 늘 그렇듯이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어떤 기반 위에 있어야 한다. 가짜 뉴스가 난무하는 이 세상에.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까닭에, .... 그러나 페친을 끊었다. 평론가는 편파적이어야 하지만, 그 주장이 너무 편파적이어서 끊었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어떤 것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 그래야 평론가다.


그것을 잃어버리는 순간, 평론가가 아닌 지지자일 뿐이다. 아마 그에겐 5천명 중의 한 명이겠지만, 나에겐 내 타임라인의 상당 부분을 차지함으로 의미 깊은 페친이었음을. 내가 정치적인 이유로 페친을 끊는 건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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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인사이트(Economy Insight) 2015년 8월에 실린 윤희웅의 칼럼을 통해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단어를 처음 알았다. 


'기울어진 운동장'은 대한민국 유권자의 정치지형이 어느 한 쪽에 구조적으로 치우쳐 있음을 얘기할 때 인용되는 표현이다. 높은 쪽은 보수세력이고, 낮은 쪽은 진보세력이다. 그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게 되면 낮은 쪽에서 높은 쪽으로 공을 몰고 가서 골을 넣기는 어렵고, 반대로 높은 쪽에서 낮은 쪽으로의 공격은 수월해서 승부는 경기 전에 이미 결정돼 있다는 것이다. 

- 윤희웅, <[선거와 경제] ‘기울어진 운동장’은 구조적인 것일까>중에서, Economy Insight, 2015년 8월호



메모해 둔 노트를 정리하면서 블로그에 옮겨놓는데, 일반적으로 최근의 한국 정치에서기울어진 운동장의 원인으로 보통 아래 3가지를 든다.

 


- 지역구도: 국회의원 의석 수 호남 30석, 영남 67석 

- 세대구도: 진보성향의 젊은 층보다 보수적인 노년층의 인구가 늘고 있다는 것. 

- 미디어환경: 종편의 영향이 크다. 



하지만 이 운동장의 기울기가 완만해지고 있다는 견해도 있고 일부에서는 야당의 경쟁력 약화에 대한 핑계거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기울어진 운동장'은 누구나 공감할 정도로 설득력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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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베르트 바이어Herbert Bayer의 '자화상'이라는 작품(?)이다. 구글에서 찾아보았으나, 구한 것은 아래 책 표지뿐. 


지난 한 달 동안 매일 들고 다니며 조금조금씩 읽은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사진, 인덱스, 현대미술>>의 한 챕터에서 소개된 작품이다. 헤르바이트 바이어의 이 작품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사진 실천의 비약적 발전을 기념하고, 예증하고, 분석해보고자 사흘 동안 열렸던 학술 회의 <말로는 부족할 때>의 프로그램 책자에 실렸다.


뭐랄까, '책 읽기 따위는 잊어라'는 식이랄까. 기이한 자기 반영성으로 사진 실천과 글쓰기, 혹은 텍스트와 사진 간의 기묘한 연관성을 표현한 사진인 셈이다.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이런 컨셉은 자주 있었다고 말하지만, 이 흑백사진이 주는 여운은 꽤 흥미로웠다. 제목이 자화상이라니. 


초기 사진이 가지는 리얼리티와 글이 가지는 리얼리티 사이에서 사진 기술의 획기적인 발달은 몇몇 이들에겐 열광적인 찬탄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하긴 새로운 표현 기술이 나왔을 때는 늘 있는 법이니... 이 점에서 우리는 어떤 특정한 표현 기술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표현 기술의 등장에 대한 인류의 반응을 모아 분석해보는 것이 더 흥미롭지 않을까. (요즘 몇몇 이들은 스마트폰의 등장에 열광하고 있는데, 나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터라, ... ) 


하지만 헤르베르트 바이어의 자화상으로 검색하니, 다른 사진들만 나왔으니... 



헤르베르트 바이어, 자화상, 1937.

(이미지 출처: http://www.barnesandnoble.com/w/herbert-bayer-arthur-allen-cohen/1114577708?ean=9780262022064) 


  


나도 이런 사진을 찍기도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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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벤야민 그리고 소셜 미디어





오늘날 나타나는 것이 프로그래밍된 체험들이다. 사회적 삶은 총체 예술이 된다.
- 노르베르트 볼츠, 『컨트롤된 카오스』 중에서


변화하는 기술 환경과 창작



노년의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가 아이폰의 브러쉬 기능을 통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해외 토픽에 나오는 지금, ICT(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technology)의 발달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어, 매년 새로운 서비스와 기술이 쏟아져 나오고 이를 쫓아 배우고 소비하기도 바쁘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급변하지 않고 아주 천천히 느리게 변화할 뿐이다. 눈에 보이는 여러 문화와 기술 트렌드가 이전 시대와 다르게 빠른 속도로 우리를 스쳐 지나간다고 해서, 19세기 이래로 우리의 일상은 변한 것보다 변하지 않는 것이 더 많다. 이는 예술가의 일상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기술은 새로운 장르를 만들기도 하지만, 예술가의 창작 작업이 급변하는 것이 아니다. 젊은 데이비드 호크니도, 늙은 데이비드 호크니도 그림을 그리고 있을 뿐이다. 붓으로, 아이폰의 브러쉬로.


Three images by David Hockney - a self-portrait, a still life, and a summer dawn?made with the Brushes application on his iPhone, 2009
출처: http://www.nybooks.com/articles/archives/2009/oct/22/david-hockneys-iphone-passion/


새로운 기술에 대한 무분별한 열광은 종종 창작환경에 대한 불필요한 논의를 야기하기도 한다. 원고지로 글을 쓰고 종이책을 내던 작가들이 PC 키보드로 글을 쓰고, 온라인의 전자적 문서(하이퍼텍스트)로 펴내기 시작했을 때, 전 세계적으로 많은 연구들이 있었다. 작업 환경과 결과물의 변화로 문학의 본질까지 건드리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고, 새로운 문학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하지만 십수년이 지난 지금, 그런 연구는 철지난 유행이 되었고, 이제 어떤 기대나 우려도 하지 않는다. 마치 사진 때문에 미술이 죽고, 영화 때문에 소설이 죽을 거라는 호들갑스러움처럼. 그렇다면 최근의 소셜 미디어(Social Media) 열풍은 예술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소설가 박범신은 인터넷 블로그로 소설을 연재하여 출판하였고 이외수는 트위터(Twitter)에 올린 짧은 글들을 모아 책으로 냈다. 1차 출판이 온라인에서 이루어지고, 실시간으로 독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전통적인 방식의 출판은 마치 뒷북치듯 오프라인 서점에 깔리는 것이다.

2008년 뉴욕 브룩클린 미술관에서는 흥미로운 전시를 기획했다. 전시 이름은 「Click! A Crowd-Curated Exhibition」이었다. 전시의 목적은 제임스 서로워키(James Surowiecki)의 책 『대중의 지혜』에서 주장하듯, 일반 대중의 의사 결정이 전문가들의 그것보다 현명하다는 것이 미술에서 가능한가를 알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 전시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일반 대중의 의사 결정을 이끌어 내기 위한 과정에서 소셜 미디어가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먼저 예술가들에게 페이스북(facebook), 플리커(Flickr)와 같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연락하였으며, 전시할 사진 작품들도 온라인으로 받았다. 그리고 웹사이트에 사진 작품들을 전시하였고, 일반인들로 하여금 전시 작품들을 평가하도록 하였다. 모든 전시 활동들이 먼저 온라인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사진 작품들에 대해 일반 대중들이 평가하도록 하였으며, 그 평가를 바탕으로 실제 미술관 전시가 이루어졌다. 즉 ICT의 발달로 인해 예술 창작 환경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 창작 이후의 어떤 과정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뒤샹과 벤야민의 소망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 변기를 「샘」이라 이름붙이고 미술관에 전시했을 때, 그 의도는 분명했다. 당신들, 미술계를 좌지우지하면서 ‘미술은 무엇이다’라고 정의하는 이들이 이야기하는 바, 미술이란 존재하지 않고, 누구나가 원하기만 한다면 미술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이라는 소논문을 통해, 기존 예술 작품이 가지던 종교적, 정치적 아우라가 기술 복제를 통해 사라질 것이고 예술은 대중의 것이 될 것이며, 예술의 정치화를 통해 파시즘에 싸울 수 있다고 믿었고 그것을 주도할 예술 장르로 사진과 영화를 주목했다. 그렇다면 마르셀 뒤샹의 의도는 성공하고 발터 벤야민의 소망은 이루어진 것일까?

뒤샹의 「샘」 원작(?)은 한 번 분실된 후, 새 변기에다 「샘」이라고 적는 해프닝이 있었다. 뒤샹의 의도와는 반대로 뒤샹만이 상점에서 파는 변기를 「샘」이라는 현대 미술 작품으로 만들 수 있게 되었고 뒤샹의 도발적인 ‘레디메이드’는 20세기 이후의 미술을 개념 미술의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리고 발터 벤야민의 소망, ‘아우라’는 사라지고 예술의 정치화를 통해 그가 바라던 어떤 사회는 결국 오지 않았다. 도리어 뛰어난 예술가가 되려면 먼저 시장과 정치를 알아야하고, 예술 권력은 더욱 강화되었으며, 전문가, 아마추어, 일반 대중의 거리를 더욱 멀어졌다. 20세기 중후반까지 현대 예술은 그렇게 움직이고 있었다.

소셜미디어가 만들어가는 예술적 일상

제롬(Jean-Leon Gerome)이나 부게로(William-Adolphe Bouguereau)같은 아카데미 화가들이 보기에 모네(Claude Monet), 피사로(Camille Pissarro)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은 마치 형편없는 아마추어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아마추어들은 현대 미술(Modern Art)을 만들었다. 브레히트(Bertolt Brecht)는 연극 무대가 닫힌 공간이 아니라 열린 공간이 되길 바랐다. 그의 서사극이론은 관객이 무대에 참여하기를 바라는, 개방된 무대를 지향하기 위한 기술이었다. 얼마 전 끝난 국립현대미술관의 「누가 미술관을 두려워하랴 - 박기원」전은 현대 미술이 어떻게 일반 대중의 참여를 바라는가를 드러내는 전시였다. 권위적이고 폐쇄적인 예술의 시대는 가고 평등과 개방을 지향하는 예술가들은 아직도 싸우고 있는 것이다. 마치 뒤샹과 벤야민이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소셜미디어가 바라는 것도 이것이 아닐까. 모두에게 개방되고 모두가 참여하며 공유하는 어떤 것. 이미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등을 운영하며 대중들과 대화하고 있다. 미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블로그에 올려 공유하고, 온라인을 통해 판매까지 하고 있다. 미국시인아카데미에서는 ‘Poem Flow'라는 아이폰 어플리케이션을 만들어, 휴대폰에서 시를 읽고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이런 어플리케이션은 계속 늘어날 것이다. 이미 많은 갤러리와 미술관들은 웹사이트뿐만 아니라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로 자신들의 활동을 알리고 있으며, 미국의 인디아나폴리스 미술관은 아예 소셜미디어 기반의 웹사이트인 ’ArtBabble'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을 정도이다.

소셜미디어의 개방성으로 인해, 일반 개인도 이러한 활동이 가능해졌다. 자신이 찍은 사진이나 직접 그린 그림, 그리고 자작시나 소설을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개하고 공유하며,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가능해졌다. 즉 누구나 원하기만 한다면, 자신의 작품을 온라인으로 전시하고 평가받는 일이 가능해졌다. 19세기 인상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전시장을 가지기 위해 고분 분투했던 것과는 다르게, 이제 예술가가 되고 싶다면 소셜미디어를 활용하면 된다.

소셜미디어의 힘은 전문 예술가와 일반 대중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이는 예술 창작의 기반을 흔드는 일이 아니라, 예술 유통의 기반을 흔들어, 예술가의 존재를 새로 정의내리고 있는 셈이다. 전문 화가가 되기 위해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해야 된다든지, 소설가나 시인이 되기 위해 등단을 해야만 한다는 기존 공식이 무의미해지고 있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기존 예술 권력의 힘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대중과 소통하며 대중과 호흡하는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 소셜미디어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려야하는 것이 현대 예술가의 중요한 활동이 된 셈이다.

2006년 타임지는 ‘세계의 역사는 위대한 인물들의 전기일 뿐’이라는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의 사상이 현대에서는 더 이상의 호소력을 가지지 못한다고 말하며, 올해의 인물로 ‘당신(YOU)'으로 선정했다. 뒤샹이 원했고 벤야민이 의도했던 바, 모든 이들이 예술가가 되고 예술의 유통이 무한 복제와 공유가 가능한 공간이 소셜미디어로 가능하게 된 것이다.



http://www.artbabble.org/ 



* 이 글은 인천문화재단에서 발간하는 저널인 '플랫폼'에 실렸던 글입니다. 2010년 봄에 실렸던 글인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제 블로그에 올립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소셜미디어와 관련된 책 여러 권을 구입했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아 씁쓸했던 기억이 나네요. 뭔가 새로운 시각으로 쓰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제목은 저널에 실린 제목대로 올렸습니다. 원래 제가 적었던 제목이 있었으나, 편집자가 선택한 제목이 좋습니다. 책이든 저널이든 편집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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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애도가 2013.11.10 10:12 신고

    참좋은글이네요...호크니의 아이폰드로잉들은 모순적으로 오히려 공유되지못하게 철통보안하고있다고하더라구요 갤러리측에서..말그대로 원화라는개념이 없으니 판매를위한전략?이라더라구요...참 아이러니한거같아요^^

    • 지하련 2013.11.12 10:26 신고

      ㅎㅎ.. 그러니 벤야민의 예언은 잘못된 거죠. 아우라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아우라가 강화되고 어떻게 하면 아우라를 만들까 고민하고 있으니 말이죠. ㅜㅜ



4월 11일, 나는 르몽드디플로마크 한국판 2009년 9월호를 꺼내 읽었다. 르몽드디플로마크를 매월 사서 읽다 요즘 주춤하는데, 이 월간지는 의외로 '정밀한 읽기'를 요구하는 터라, 번번히 다 읽지 못한 채 다음 호를 사야만 하기 때문이다. 

(* 르몽드 디플로마크. 영국의 가디언(Guardian), 미국의 먼트리리뷰(Monthly Review) 등과 함께 대표적인 진보매체들 중의 하나지만, 내 주위에도 이 잡지를 읽는 이는 매우 드물다. 하지만 자신이 진보적 지식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잡지를 사서 읽기를 권한다.)


2009년 9월 르몽드디플로마크, 자크 부브레스의 '지식인들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꼼꼼하게 읽는다. 


"그들(지식인)은 대자본을 상대로는 말을 아끼지만, 사회 밑바닥에서 헤매는 사람들에게는 기꺼이 뭔가를 가르치려고 한다." 


아! 얼마나 정확한 표현인가. 한국도 자크 부브레스의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한데, 한때 진보적이고 현실비판적이었던 지식인들 중 대부분이 이런 식의 지식인이 되어 가고 있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크 부브레스는 이들을 '미디어 지식인'라고 말하며, 그들은 미디어를 통해 대중적 인기를 등에 업은 지식인이 되었고, 여론 형성이나 정치적 파급력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들의 펜과 입은 일반 대중을 향해 있다고 지적한다. 정작 충고와 조언이 필요한 것은 일반 대중이 아니라, 재벌들이나 정치인들, 고위 공무원들인데도 말이다. 


선거는 야당의 패배로 끝나고, 많은 생각에 휩싸였다. 내 주위의 모든 이들은 여당을 지지하지 않았기에 선거 결과는 상당히 의외였다(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야당의 모습이 실망적이라는 사실에는 공감하지만, 여당 지지자들이 이렇게 많으리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자크 부브레스의 지적처럼 지식인의 몰락, 반-지식인으로서의 미디어 지식인의 등장 탓일까.  


선거가 끝나고 대단히 실망적인 결과를 손에 쥐고 난 다음, 나는 서가에서 한 권의 책을 꺼내고, 한 권의 책을 서점에서 구입했다.  





루이 알튀세르의 '아미엥에서의 주장', 그리고 자크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자크 랑시에르는 1965년 루이 알튀세르와 '자본론을 읽다'(Lire le Cpital) 집필에 참가한 후 바로 그와 결별하였고, 1974년 알튀세르의 방법론을 비판하는 '알튀세르의 교훈'(La Lecon d'Althusser)를 발표하기도 하였지만, 4월 11일 총선 이후 이 두 명의 각기 다른 2권의 책은 우리에게 풍부한 관점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루이 알튀세르의 '아미엥에서의 주장'(솔, 1996년 보급판 3판)에는 그의 유명한 논문인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가 포함되어 있다. 그는 이 짧은 글을 통해 '억압적 국가 장치'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를 구분하고 "우리가 알기로는 어떠한 계급도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 위로, 그리고 동시에 그 속에 그들의 헤게모니를 행사하지 않고서는 지속적으로 국가 권력을 보유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가 이야기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는 아래와 같다. 


- 종교 AIE(다양한 교회들의 체계)

- 교육 AIE(공적, 사적인 다양한 '학교들'의 체계)

- 가족 AIE

- 법률 AIE

- 정치 AIE(다양한 정당들을 포함하는 정치적 체계)

- 조합 AIE

- 커뮤니케이션 AIE(잡지, 라디오, 텔레비전 등)

- 문화 AIE(문학, 예술, 스포츠 등) 



'억압적 국가 장치' - 검찰, 군대, 경찰 등 - 과 함께 정치적 지배의 수단으로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마치 현재 한국 사회를 보여주는 듯하지 않은가. 


언젠가 '대중들을 가르쳐야 된다'는, 혹은 이와 비슷한 유형의 말을 했다가 면박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 무슨 시대착오적인 계몽주의냐'며. 


그런데, 잘못된 생각 - 정권에 반대하는 생각을 가진 국민은 범죄자이므로 사찰하여 구속시켜거나 일상을 파괴해야 된다 - 을 가진 정부가 억압적 국가 장치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를 다 가지고 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무엇일까?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이제 대부분의 대중들은, 그들 스스로 무식하지 않다고 여기며, 스스로 비판적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하는 요즘, 그들의 무식하지 않음과 비판적 의식은 실제로는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의 교묘한 호명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경우,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 속에서 대중 스스로 사리분별을 할 수 있다고 여길 때, 그들에게 정확하고 비판적인 현실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방법이란 존재하기라도 하는 걸까? 


자크 랑시에르는 알튀세르와는 다른 방식으로 민주주의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그 자체가 불완전한 것이므로, 이를 완성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통치 불능의 민주주의에 대한 일반적인 불만이나 비판 속에는 결국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민주주의는 통치되어야 할 사회도 아니고, 한 사회의 통치체제도 아니다. 그것은 통치 불가능 자체이며, 이러한 통치 불가능성에서 모든 통치 행위가 그 기초를 찾아야 하는 그런 것이다. 

- 111쪽 



어제까지만 해도 '민주주의는 고결한 것, 전체주의는 무시무시한 것'이 공식적인 담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적 이상주의자들은 앞으로 도래할 실질적 민주주의를 꿈꾸며 전체주의의 공포를 부정하고 있었다. 이제 이 시대는 끝났다고 보아야 한다. 서방의 한 정부는 무력을 통해 민주주의를 수출하고 있는 데 반해, 우리의 지식인들은 '민주적 개인주의'의 불길한 징조와 '평등주의'가 야기하고 있는 사회적 파탄을 공-사 모든 영역에서 발견하고 있다. 그들은 민주주의가 만들어내는 문제들이 사회적 가치를 파괴하고 있으며, 새로운 전체주의를 잉태하면서 인류를 자멸의 길로 이끌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변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원인을 단지 국제화된 자본의 지배에 두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따라서 '민(民)에 의한 통치'가 보여주었던 고대 그리스 시대의 정치 상황을 다시 분석하고 동시에 민주주의, 정치, 공화국, 대의제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파악해 보아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민주주의에 대한 어제의 미지근한 애정과 오늘의 범람하는 증오를 뒤로 하고, 항상 위협받으면서도 역동적인 민주주의의 힘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 프랑스어 원서 표지 뒷면에 실린 글. 



그런데 불완전한 민주주의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날 수 밖에 없는 '민주적 개인주의'의 불길한 징조와 '평등주의'에 대해 한국의 보수적 지식인들과 (스스로를 보수적이라 믿는) 일반 대중들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들 스스로는 '민주주의'를 이야기하지만, 실은 박정희 시대의 개발 독재를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잘 살기만 한다면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다는, 놀라운 형태의 전체주의적 사회 지배를 요청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선거가 끝나고 머리는 복잡해지고 마음은 어지럽기만 하다. 참 슬프다. 이 짧은 글은 내 불길함을 루이 알튀세르와 자크 랑시에르에 기대어 푸념처럼 적은 것이니, ... ...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고작 푸념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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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eesoo 2012.04.14 19:52 신고

    일단. 컴으로 쓰는게 아니라 이야기를 길게 쓸 수는 없고. 그 담으로 나는 진보적 지식인은 아니라는 전제하에. 또 글을 다 읽지 못한 상황에서 댓글을 다는 게 심히 조심스럽지마는.
    선거 끝나고 한겨레에서 경남 구미 등지에서 일하는 20대 노동자들 몇명과 인터뷰한 기사(제목은 열의 아홉은 나꼼수 모를걸요 뭐 이런거였음)를 읽고 느낀 점이 많았습니다. 쉽게 동의할 수 없는 것이 노동자계급에게 충고(?표현이 잘 기억이 안나는데)하고 오히려 지배층이나 대자본에 소리치는 사람들이 많아지지 않았나싶어요. 몇십년전 노동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부브레의 말이 맞는지 모르겠지만서도. 느낌은 갈 수록 지식인이라는 사람들과 노동자는 멀어지고 있달까. 몇십년 동안 지식인은 자기들의 논리만 헤집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분명 예전과 다른 또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으니 과거의 방식은 어닐진대 소통하는 창구가 너무 없는 건 아닌가 싶네요. 인터넷에서는 내가 원하는 정보만 얻을 수 있으니 나만의 생각에 갇히기도 쉬운듯 하고. 그녕 두서없이 첫머리 글 읽다가 답 달아봅니다.

    • 지하련 2012.04.16 12:59 신고

      한국 사회에서는 '지식인'이라는 단어에 대해 새롭게 정의내려야할 듯해요. 4년제 대학을 나왔다고 지식인이라고 할 수도 없고 석사나 박사 학위 가지고 있다고 지식이라고도 할 수 없으니(최근 국회의원 된 이는 학위 논문 베껴서 학위를 받았으니), 도대체 지식인이란 뭘까요? 그리고 바람직한 지식인이란 또 뭘까요? ... 문제는 지식인의 자격이 없는 이들이 지식인처럼 매스미디어에 나온다는 게 큰 일이죠. 그리고 정작 지식인의 역할을 해야 할 이들은 너무 소극적이거나 조용하거나 대중 소통 채널을 가지지 못했으니..

* 이 글은 몇 달 전에 시작되었고 아직 끝나지 않은 글의 일부다. 그 사이 세상은 꽤 변했고 ... 하지만 쓴 글이니.. 끝까지 다 쓰고 올릴 계획이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서두부터 올리고 글이 씌여지는 대로 업데이트를 할 생각이다.   




2011년을 되돌아보며



01. 풍경으로서의 정치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은 한미FTA를 날치기로 통과시키고 난 뒤, 그 누구도 그 행위에 대한 반성 표명 없이 스스로 일신하겠다며, 박근혜 의원을 중심으로 헤쳐모여 하고 있다. ‘비대위’라는 상징적 기구를 통해 일신의 모양새를 만든 후, 친이계와 현 MB정부를 압박하는 듯한 풍경을 연출하지만, 이건 그저 풍경일 뿐이다.

풍경은 소통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을 드러낼 뿐이며, 보는 이들을 향해 풍경 속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보는 이들의 자리로 와서 이야기하는 법은 없다. 언제나 풍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풍경의 일부가 되기를 강요한다. 그건 즉물적 세계다. 인상주의적 세계다. 공감적 세계가 아니다.


귀스타브 카유보트,
 '파리거리, 어느
비오는 날', 1876~1877 
캔버스에 유채, 212.2*276.2cm, 시카고 미술관 
 



지난 몇 년 동안 MB 정부와 여당이 보여준 세계가 바로 이런 즉물적 풍경이었고 그들만의 리그였다. 그 리그 속에선 평범한 농부 옷차림으로 논두렁 사잇길로 자전거를 타는 전직 대통령의 모습은 타자의 세계를 넘어서 미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이해되지도, 이해할 수도 없는 세계였고, 대통령 당선자체부터가 아주 우연적인, 심지어 한국 현대사에선 결코 일어나선 안 될 일이었던 셈이다. 왜냐면 풍경으로서의 정치가 사라진 최초의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그건 마치 질병 같은 것이다. 순결한 어떤 풍경 속으로 들어온 바이러스였다. 대통령이 되면 말을 아끼고 지시만 내려야 되는데, ‘대통령 못해 겠먹다’고 하지 않나, 자신을 지지해준 정당의 국회의원들로부터 탄핵소추를 받는가 하면, 심지어 진보언론으로부터 무시당하던 대통령이었다. 낯선 바이러스와 같은 존재였다.

정치적 리더십의 세계에 전혀 다른 사람이 등장했고, 평범한 우리들은 가까이 갈 수 없는 넓은 호수 위에 한 점 기름이 그 세력을 넓혀가는 꼴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 호수에 속했던 자들과 그 호수에 발을 담글 수 있는 권리를 지닌 자들은 이제 머지 않아 순결하기만 했던 특권적 한국 정치의 호수에 아무나 발을 담글 수 있겠구나 하는 염려가 퍼져나갔고 결국 기름을 걷어내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최초가 탄핵이었고, 그 이후로도 계속 되었고 그가 사라진 이후,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프랑스의 여성학자 뤼스 이리가라이Luce Irigaray는 『너, 나, 우리』를 통해, 여성의 육체를 높이 평가하며 여성성이란 정체 불명의 타자를 받아들이고 그 타자를 하나의 생명체로 만들어 이 세상 밖으로 창조해내는 신비라고 말한다. 이렇게 여성성은 타자를 받아들이는 유연한 체계이며, 우리 모두가 지향해야 되는 가치가 된다.

풍경으로서의 정치가 배타 지향적 세계라면 반-풍경으로서의 정치는 이타 지향적 세계가 된다. 실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정권이 바뀌고 어느 곳에서는 열광적 지지가 이어지고 여러 저널에서의 여론 조사의 지지율이 계속 높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풍경으로서의 정치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다. 잘못된 도구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도구 밖에 없는 세계에선 그 도구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잘못되었다’고 평가하기 위해선 우리에게 비교 대상, 즉 옳은 것이 있어야 했지만, 그것이 없었기 때문이었고, 비교대상이 생기더라도 이미 익숙해진 우리에겐 선택하기 어려운 딜레마와도 같이 다가왔을 테니 말이다.

풍경에 익숙해진다는 건 공포스러운 일이다

이 짧은 글은 작년 한 해를 뒤돌아보기 위해 기획되었다. 혹자에게 이 글 서두의 정치 이야기가 낯설지 모르겠지만, 최근 읽은 제프리 페퍼Jeffrey Pfeffer의 『권력의 지배(Managing with power: Politics and Influence in Organizations) 』은 나로 하여금 바람직한 의미의 권력Power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실은 나는 권력 지향적이지 않다(그래서 혹자들이 보기엔 둔해 보이고 비현실적이거나 마냥 희생적인 케릭터로 보이게 할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반-권력적이다. 수직적인 질서를 싫어하고 수평적이길 원한다. 사각형 회의 테이블을 싫어하고 원형 테이블을 좋아한다. 하지만 전략 실행이 중요하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어떤 정치적 구조 속에선 생명이 걸린 중요한 문제들조차도 논리적 접근, 혹은 옭은 제안이 거절되기 일쑤인 현실 세계에서 권력이란 옳고 바람직한 실행을 가능하게 해주는 어떤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권력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 당연히 ‘인간 중심적’(Human-Centered)여야 한다. 실행 중심적이 아니라!



* 작품 설명.
인류의 지적 구조물을 버리고 순수하게 감각 지각으로 받아들인 세계만 옮겨야 한다는 확신이 서자, 외부세계의 모든 것들이 작품의 대상이 되고, 또한 그 대상의 외면만으로도 어떤 세계를 구성할 수 있게 된다. 그와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 세계란 그 중요성을 점차 상실해간다. 인상주의의 세계다. 인상주의에서는 익명성이 부각되고 도시가 본격적으로 예술 작품의 공간이 되며 삶의 순간성이 전면에 드러나게 된다. 카유보트는 도시 산책자로 거리를 거닐면서 거리의 한 순간을 캔버스에 옮긴다. 그리고 사각의 캔버스로 옮겨진 그 풍경에는 화가의 주관적인 감정이나 지적인 편견이 개입되지 않은 채 그저 물질성만을 강조하고. 이제 외부 세계는 나와 무관한 어떤 세계이며, 나도 그 세계 속에서 익명의 어떤 개인이 된다는 것을 이 작품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마치 포디즘적 세계에서 한 사람이 기계의 부속품처럼 움직이듯, 인상주의적 세계 속에서 개인은 자신의 독특함이나 개성, 독자적 세계관을 상실하고 풍경으로만 존재한다. 그래서 파시즘에서는 과학 기술을 통해 사람을 죽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인상주의적 세계의 귀결인 셈이다. 그리고 풍경으로서의 정치와 대척점에 서 있는 일반 서민의 풍경이 바로 인상주의적 세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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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글을 쓰다 ... 프린트한 종이 더미 사이에 넣어버렸다. 혼자 쓰는 글이라는 마감 같은 있으리 없고, 돈벌이도 아닌 탓에, 쓰다만 개의 , 쓰다만 개의 소설은 계속 짊어진 하루하루 살고 있는 셈이다.

오늘은 사무실에 마르크스의 <<헤겔 법철학 비판>>(강유원 옮김, 이론과실천) 가지고. 어제 들기 전에 서두와 역자 후기를 읽었고, 한동안 가방 속에 머물게 것이다. 니콜라이 하르트만의 <<존재론의 새로운 >> 읽다가 '철학자가 처한 현실' 그것에 대한 사유와 실천의 관계 등에 대해 생각했고, 마르크스의 <<헤겔 법철학 비판>>까지 이어진 것이다.

작년 헤겔의 <<법철학>> 서문을 다시 읽었고, 뭐랄까, 뭔가 답답함을 느꼈다고 할까, ... 그런 기분을 느꼈다.


마르크스는 헤겔이 개념적 파악을 위해 정치적 현실을 논리화해 버렸다고 비판한다. 헤겔에서는 "사유를 정치적 규정들 속에서 구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현전하는 정치적 규정들을 추상적 사유 속으로 사라지게 하는 것이 철학의 임무이다. 사태의 논리가 아니라 논리의 사태가 철학의 계기이다. 논리가 국가를 증명하는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가 논리를 증명하는 봉사하는 것이다." 우리는 마르크스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헤겔의 <<법철학>> 이러한 비판을 받을 만한 것인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 강유원, '옮긴이후기' 중에서



그런데 지적은 철학 전반에 걸쳐 이루어질 있는 아닐까. 하르트만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철학은 존재자에 대한 앎이 없이는 실천적인 과제에도 접근할 없다. (중략) 사실 모든 기술은 자연의 법칙성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토대로 하여 성립한다. 마찬가지로 의술은 생물학적인 지식 위에, 정치술은 역사적 지식 위에 구축된다. 철학에 있어서도 사정은 다를 바가 없다. 다만 대상이 보편적인 , 인간과 인간이 사는 세계 전체를 포괄한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조바심을 누르고 숙고의 길을 찾으며 또한 뒤로 멀찍이 물러서는 또한 서슴지 않는 , 요구 사항이 시급하고 과제가 절박했을 때조차 바로 그렇게 했던 것이 언제나 독일 정신의 강점이었다'
- N. 하르트만, <<존재론의 새로운 >> 중에서



현실에서 뒤로 떨어져 사태를 관망하고 사유하고 반성하는 . 그것이 철학의 길인 셈이다.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세계의 사상으로서의 철학은 현실이 형성과정을 종료하여 확고한 모습을 갖추고 다음에야 비로소 시간 속에 나타난다.(Als der Gedanke der Welt erscheint sie in der Zeit, nachdem die Wirklischkeit ihren Bilduingsprozess vollendet und sich fertig gemacht hat.)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 (die Eule der Minerva beginnt erst mit der einbrechenden Dammerung ihren Flug.)
- 헤겔, <<법철학>> 서문 중에서(임석진 , 한길사)



이제서야 철학과 실천 사이의 묘한 긴장을 마음으로 이해하게 셈이다. 앞의 사태를 두고도 철학자는 사유한다. 그 사태가 끝날 무렵에서야 뭐라고 말하지만, 이미 현실적인 사태는 끝이 나 있을 무렵이고, 정리정돈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때까지 멀리 떨어져 있던 어떤 이가 와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참견을 한다. 현실 속에서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힌 사람들 사이로 들어와선. 그런데 니콜라이 하르트만은 이것이 '독일 정신의 강점'이라고 이야기하며, 그 이전의 헤겔은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앞에서 마르크스는 얼마나 절망했을까. 현실 앞에선 아무 것도 수도 없고 할 생각도 없는 독일 정신을 가지고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실 한 가운데에서 정확한 판단과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실은 현실 한 가운데에서도, 현실의 변두리 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불가능하다는 게 현대 이론의 정설이다. 그러니 현대란 반-이론의 시대이고 합리적인 것들이란 믿을 수 없거나 비현실적인 것이 되었으며, 의사결정이란 끊임없이 미끄러지며 뒤로 유예되는 어떤 것이 되어버렸다. 반-헤겔주의와 반-마르크스주의가 동시에 휩쓴 시대라고 할까. 그러니 이론과 실천이라는 테마도 고리타분한 것이 되어버렸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관찰한다는 것이고 관찰하는 것을 명료하게 하기 위해서 철학자들이 걸어온 길을 되새기는 것이며 끊임없이 성찰하고 반성하여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되지만, 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결론을 향해 달려가는 것 또한 철학이기도 하다.

결국 남는 건 나이고, 내 삶이고, 내 사유뿐이다. 그것이 시뮬라크르로 남든 간에. 그래서 이제서야 철학책이 제대로 읽히는 것일까. 

 


* 위에서 언급된 책들 
헤겔 법철학 비판
칼 마르크스 저/강유원

법철학
G.W.F 헤겔 저/임석진

니콜라이 하르트만 저, 존재론의 새로운 길, 손동현 역, 서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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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을 해보면 어떨까. 과연 이 세상은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걸까? 그리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 인간은 맨 먼저 무엇을 할까?

새로운 것을 알게 되면 우리 인간은 그 새로운 것에 대해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설명한다. 그러다가 그 설명하기에서 막히면 새로운 단어와 표현을 만들어 붙인다. 즉 이 세상은 우리의 언어와 같이 보이고 표현되고 구성되어 있다. 이 세계는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을 위시한 현대 철학자들의 생각이다.)
 
그런데 정말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우리가 보고 경험한 세계를 언어로 표현하고 옮긴다. 딱 우리가 알고 있는 언어만큼만 옮긴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는 없는 세계이다. 종종 있지만, 표현하지 못하는 세계가 있다. 가령 누군가가 오백년 전에 '아파트'와 같은 주거 시설을 생각했을 수 있다. 그 때는 '아파트'라는 단어가 없었으므로, 아마 그런 사람이 있다면 자신의 생각을 그림으로 그리고 이에 설명을 붙였을 것이다. 한 마디로 표현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표현할 수 있는 세계였던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단어나 개념, 표현의 창시는 주로 예술가의 몫이다. 그들의 주도로 이 세상은 풍성해지고 다채로워진다. 또는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다. 우리에게는 푸른 색도 있고 푸르딩딩한 색도, 푸르스름한 색도 있지만, 이런 단어가 없는 나라에서는 없는 색이다. 이와 반대로 그 나라에는 있지만, 우리 나라에는 없는 것이 있다.
 
하나의 언어를 안다는 것은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 나라 말에서 다른 말로의 완벽한 번역이란 존재할 수 없다. 다른 언어를 사용하기에 다른 문화를, 다른 삶의 태도를, 다른 가치관을 가진다. 그리고 다르게 세상을 보고 살아간다. 심지어 동물 울음소리도 다르게 듣고 다르게 표현하지 않는가.

각각의 언어마다 그 언어에 대응하는 하나의 세계가 있다. 그리고 그 세계 속에는 다른 나라와 겹치지 않는 특별한 영역이 존재한다. 그 영역은 우리 인류가 확장할 수 있었던 세계 인식의 한 극점을 이루고 있다. 사용하고 있는 언어만큼만 세계를 바라보고 그렇게 살아간다. 

고유한 언어의 중요성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사라지는 언어를 보존해야 하고 그 언어를 계속 사용하고, 뛰어난 예술가들이 나와서 그 언어로 새롭고 창조적인 언어적 구조물을 만들어내야 한다. 

하지만 세상은 단일 언어로 향해 가는 듯 싶다. 그러면서 우리 인류는 전체적으로 한 발 한 발 뒤로 퇴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이 순간에서 우리는 한 때 알고 만지고 느낄 수 있던, 경험했던 어떤 세계를, 어떤 영역을 잃어버리고 있다. 

딸기님의 <기후 변화로 언어가 사라진다>는 그 단편적인 예에 불과하지만, 그런 예는 역사적으로 무수하게 많았다. 이에 도움이 될 만한 책으로는 <언어의 죽음>이 있다. 이 외에 언어의 생성, 소멸에 대한 책들은 여러 권 나와있다.


언어의 죽음
데이비드 크리스털 저/권루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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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딸기21 2011.08.18 10:56 신고

    언어의 죽음 쌓아두고 못 보고 있어요... ㅠ.ㅠ
    <사라져가는 목소리들>인가, 그 책도 아주 좋아요.

    • 지하련 2011.08.18 17:07 신고

      <사라져가는 목소리들>도 한 번 찾아봐야겠군요. 저도 쌓여있는 책들.. ㅜㅜ.. ...

      <사라져가는 목소리들>은 이미 절판되었네요. 쩝... 거참, 절판된 책 reprint하는 서비스나 ebook 재판매 서비스가 필요할 때입니다.


빠른 독서(讀書)와 느린 독서



반복과 속도

혹시 ‘포드주의(Fordism)’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지? 미국의 자동차왕 헨리 포드가 자신의 자동차 공장에 적용한 노동 체계를 뜻하는 단어로, 컨베이어벨트 양 옆으로 노동자를 배치하고 생산 과정을 분업화시켜, 각 노동자가 동일한 업무만을 반복하여 해당 업무 처리 속도를 극대화시키는 방식을 뜻한다. 그 당시 한 대의 자동차를 생산하려면, 한 곳에서 모든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헨리 포드가 이를 혁신한 것이다. 경영의 관점에서는 ‘혁신’(innovation)이지만,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노동자의 비인격화’를 초래하는 결과를 가지고 왔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즈’는 이와 관련된 영화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자동차에 대해선 딱 한 부분(또는 몇 부분)만 전문적으로 알 뿐, 나머지 부분에 대해선 거의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반복된 작업은 결과적으로 빠른 속도를 낸다는 것이다. 이는 독서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하지만 빠른 속도만이 목적이 되어선 안 된다.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닥치는 대로 읽는다. 내 책 읽기의 시작은 소설이었으나, 지금은 책이라는 건 다 읽는다고 볼 수 있다. 내가 정기적으로 읽는 잡지만 봐도 그렇다. 르몽드 디플로마크 한글판(월간), 동아비즈니스리뷰(반월간), 미술잡지(월간 - 월간미술, 아트인컬쳐, 미술세계 중 택일), 주간지 한 종, 그 외 계간지 두서너 종을 읽는다. 일간 신문은 다 읽는 것이니, 빼둔다. 여기에다 이메일 뉴스레터도 읽으니, 일주일에 읽는 페이지수로만 보자면 족히 백 페이지를 넘긴다. 여기에 일 주일에 책도 한 권 이상 읽으니, 일주일에 오백 페이지를 넘길 것이다. (책도 잡지와 비슷하여, 책의 형태를 지닌 것이라면 무조건 손을 댄다.)

하지만 나는 직장인이고 퇴근 후에는 약속 있는 날이 많으므로, 책을 읽을 수 있는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하다.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읽을 수 있는가 궁금해 한다.

책 읽기의 방법

대학시절 내가 책 읽는 방법은 단순했다. 무슨 책이든 책 옆에 무조건 빈 노트를 두고 읽었다. 그리고 책을 읽다가, 잡지를 읽다가, 신문을 읽다가 기억해두어야 할 단어나 문장이 나오면 어김없이 적었다. 그리고 다 읽고 난 다음에는 반드시 리뷰(감상문)를 썼다. 방식이 이러니, 일반적인 독서보다 2배 이상 느렸다.

내 책 읽기의 시작은 2배 이상 느린 독서였다. 실은 지금 나에게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이렇게 책을 읽고 싶다. 이미 경험적으로 나는 빠른 독서는 좋은 책 읽기가 아님을 안다. 속독(速讀)은 좋은 책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대표적인 방법이다. 혹시 이 글을 읽는 이들 중에 학부모가 있다면, 절대로 아이에게 ‘속독법’을 가르치지 말기를. 단어 하나하나와 한 문장, 한 문장의 의미를 되새기는 느리고 신중한 독서가 깊은 생각, 좋은 글의 시작이다.

내가 책을 옆에 두고 살아온 지도 20년이 넘었다. 고등학교 시절 공부는 뒷전이었고 책이나 잡지 읽는 것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이는 대학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제 자주 책을 읽다가 이미 읽었던 단어나 문장이 종종 만나게 된다. 익숙해진 것이다. 요즘같이 가로쓰기에, 큰 활자에, 심지어 사진이나 그림이 들어가는 베스트셀러 실용서 같은 것은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책은 이런 책이 아니다. 반대로 나에게 긴 시간을 요구하며, 문장을 기억하길 강요하고, 한 페이지를 함부로 넘기지 못하게 만드는 책이다. 대표적인 것이 ‘교과서’라고 불리는 개론서들이다. 만일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빠른 독서를 원한다면, 먼저 개론서(두툼한 책)를 느리게 읽기를 바란다.

개론서와 잡지

어느 특정 분야의 책을 빨리 읽기를 원한다면, 먼저 읽기 어려운 책을 집어 들고 오랜 시간 동안 읽어야 한다. 옆에 노트까지 해가며. 이를 통해 특정한 단어나 문구, 또한 문장이나 표현에 익숙해져야 한다. 아마 한 권을 읽는데, 몇 주나 몇 달이 걸릴 수 있다. 하지만 이 과정을 거친 후, 이 분야에 대한 다른 책을 읽을 때는 이전보다 빠른 속도로 책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독서가 반복되면 될수록 책 읽기의 속도는 빨라진다. 아는 부분이 나올 때는 띄어 넘고 읽을 수도 있게 된다.

잡지 읽기도 권한다. 손쉽게 단편적인 정보를 얻기에는 전문 잡지만한 것도 없다. 이 점에서 한국은 매우 열악한 잡지 환경을 가지고 있다. 잡지의 종류도 얼마 되지 않고 그 잡지의 수준도 낮기 일쑤다. 잡지 읽기를 권하는 이유는 단편적인 정보를 축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축적된 정보들은 책을 읽을 때, 책의 흥미를 높일 수 있다. 종종 아는 정보를 만나게 해주며, 몰입도를 높여주는 효과를 가져다 준다. 또한 새로운 정보를 빨리 접하게 해준다. 요즘 같은 인터넷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책 읽기의 양이 아니라 책 읽기의 질이 핵심

내가 싫어하는 책 중의 하나가 장정일의 ‘독서읽기’이다. 나는 일 권만 읽고 이후는 읽지 않았으나, 내 기억으로는 그 이후 여러 권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싫어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어떤 책을 읽었고 어떤 책이 좋았다거나 나빴다 정도만 반복적으로 나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떤 책이 자신의 세계관이나 일상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혹은 변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책의 가치나 영향력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그는 다독가이기는 하지만, 그는 마치 잡지 읽듯이 책을 읽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 책이 가진 진정한 가치나 내용을 알기 전에 장정일은 다른 책을 읽고 있었다. 그리고 책을 얼마나 많이, 빨리 읽는가를 자랑하는 듯 읽혔다.

종종 나는 이런 비유를 든다. 십 만 권의 책을 읽은 사람보다 백 권의 책을 읽은 사람이 더 깊고 명징한 사유와 언어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문제는 십 만 권의 책과 백 권의 책이 서로 다른 종류이며, 서로 다른 책 읽기를 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빠른 책 읽기로, 건성건성 읽는다면, 그 책의 진가를 알지 못할 것이고, 아무리 많은 책을 읽더라도 그 책들이 한결같이 쉽게 읽히는 대중 소설이나 실용서라면 책을 읽는 동안 즐거울 지 모르나, 자신의 삶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빠른 책 읽기(速讀)란 없다

공병호의 책 읽기는 책 좋아하는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유명하다. 빠른 책 읽기란 없다고 적긴 했지만, 정보 취득이 목적인 독서일 경우엔 가능할 것이다. 이는 필요한 정보만 읽고 나머지는 버리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 방식도 두툼한 책들을 읽은 사람에게 권할 수 있는 것이다. 책이라곤 읽어본 적 없는 사람이 어느 날 문득 이제 책을 읽기는 해야겠는데, 시간이 없으니 실용적인 독서를 해야겠다고 필요한 곳만 읽고선 책 다 읽었다고 버린다면, 황당하다고 할 수 밖에.

힘들어도 느리게 읽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작은 활자에, 두툼한 책을 읽어야 된다. 그림 하나 없는 책부터 읽어야 된다. 이렇게 읽지 않고 빠른 책 읽기로 넘어간다면, 책이란 없고 깊이 있는 생각이나 통찰은 기대할 수 없다. 하긴 가벼움이 넘쳐나는 시대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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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HP 2009.10.11 13:41 신고

    잘 읽었습니다.

  2. 夢想家나뎅 2009.10.11 14:29 신고

    티스토리 메인에서 보고 클릭했는데... 생각보다 좋은 문장이 가득하여 읽고 나니 뿌듯하네요.
    잘 읽고 갑니다..^^

    • 지하련 2009.10.11 18:03 신고

      좋은 문장이라뇨. ^^; 평범합니다.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3. 교복파는총각 2009.10.11 14:42 신고

    잘 읽었습니다.
    책읽기는 정도가 없는것 같아요.
    정독을 하자니 시간을 잃고 속독을 하자니 내용을 잃고..
    편안한 주말 오후되시길..

    • 지하련 2009.10.11 18:04 신고

      좋은 책을 느리게 읽는 문화가 필요한 것같아요. 쫓기는 듯하게 살아가는 요즘에는 특히...

  4. 빌리 2009.10.15 13:27 신고

    뒤늦게 책읽기가 하나의 예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지하련 2009.10.18 11:44 신고

      좋은 책을 고르고, 그 책을 어떻게 읽는가가 중요한 것같아요. ^^ 감사합니다.

  5. 최지우 2009.10.31 01:25 신고

    좋은글 감사합니다^^
    덕분에 영혼이 많이 살찔것 같으네요~
    종종 들르겠습니다..

    • 지하련 2009.11.01 11:30 신고

      감사합니다. ^^ 날씨가 많이 추워진다고 하네요. 현대적 삶에선 영혼보다 먼저 육체적 건강이 먼저인 것같아요. ㅎㅎ.. 감기 조심요.

  6. sarlim 2009.11.22 19:50 신고

    학생시절 가장 싫어했던 책이 '현대소설 100선' 이런식으로 몇백권의 책을 한권에 zip(ㅋ) 해놓은 책이었죠. 허겁지겁 먹어치우다 보니, 여기저기 체한 사람, 헛배부른 사람, 설X하는 사람 등 많이 보이는거 같습니다. 어느새 저도 허겁지겁 쫓기고 있던건 아닌가.. 생각하게 되네요..

    • 지하련 2009.11.23 21:08 신고

      자본주의 세계가 '속도'를 너무 강조하다 보니, '속도'가 중요하지 않은 부분까지 '속도'가 지배하는 듯 합니다. 특히 압축 성장을 한 한국의 경우에는 너무 심하고요. 그런데 공부와 독서에도 이것이 강요되고 있는 듯합니다. 실은 느리고 깊게 책 읽는 여유, 정말 좋거든요. ^^

  7. egoing 2009.11.24 18:05 신고

    잘 봤습니다. 난독증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군요 :)

    • 지하련 2009.11.25 12:59 신고

      천천히 뭔가를 즐기는 문화가 사라지고 있는 것같아 안타깝습니다. 특히 물질적 환경이 그것을 더 심화시키는 것같고요.
      감사합니다. ^^

  8. 콩세알 2009.12.14 09:52 신고

    잘 읽었구요. 글 좀 퍼가겠습니다. 그냥 독서토론회 모임에서 같이 읽어보려구요. 출처는 밝히겠습니다.

  9. 빌리 2010.07.06 15:05 신고

    님의 글 덕분에 다시 용기를 얻어 이기적 유전자 읽었습니다.'
    여기서 읽었다고 함은 글자인 상태로 처음부터 끝까지 눈으로 봤다는 뜻이죠 ㅎㅎ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 같지만 그래도 내 손바닥에 가까스로 남아 언뜻 보면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같은 유리 조각이 몇개 남았습니다.

    • 지하련 2010.07.09 09:37 신고

      쉬운 책들을 여러 권 읽는 것보다 좋은 책을 여러 번 읽는 것이 좋습니다. ^^ 리처드 도킨스 류의 책을 좋아하시면 관련 책을 여러 권 읽고 난 다음 다시 읽으면 훨씬 더 잘 읽힐 겁니다. 저도 수년 전에 읽다가 포기한 책을 다시 읽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잘 읽히거든요. 나이와 경험에 따라 책에 씌여진 언어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폭도 달라는 듯합니다. : )


기업 문화예술 투자 환경 조성을 위한 세미나
2009년 3월 13일 금요일
국회 도서관 강당




지난 13일 금요일, 국회 도서관에 다녀왔다. '기업 문화 예술 투자 환경 조성을 위한 세미나'라는 제법 거창한 주제의 세미나에 참석했다. 다양한 참석자들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는 기회였다. 주로 내가 하는 분야에만  신경을 써다보니, 좀 넓은 시야에서 문화예술 정책이나 인프라에 대해서 고민할 일이 적었는데, 이 세미나로 인해 다소 넓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런 류의 세미나들은 언제나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과연 투자할 수 있는 (순수)예술 분야가 있는가'이다. 불행하게도 (천박한) 자본주의 아래에서 투자라는 행위는 분명한 ROI(Return on Invest)가 나와야 하는 행위다.  그렇지 않다면, 그냥 도와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과격한 의견이긴 하지만) 차라리 "그냥 멋지게 한 판 도와주세요!"라고 말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이런 측면에서 몇 해 전부터 유행하는 '문화마케팅'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반감을 가지고 있다. 안타깝게도 '문화마케팅'을 이야기하는 이들의 '문화'에는 비-상업적이거나 반-상업적인 목적의 연극, 미술, 퍼포먼스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리고 가난한 연극인들의 소규모 연극이거나 전시장 구하지 못하는 예술가의 작품은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더구나 예술가나 작품이 강한 정치성을 띠거나 반-기업적 정서를 가진다면, 이건 '문화마케팅'의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문화마케팅'이라는 단어 대신, 그냥 '문화를 활용한 기업(비즈니스) 마케팅'이라고 정직하게 말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연합뉴스 편집위원이 강일중의 의견만이 내 생각과 비슷했다. 그는 기초 예술 분야가 취약하지, 상업성을 추구하는 문화 예술 장르는 제외해야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책 입안자나 정치인들은 늘 성공 케이스를 찾고, 그 성공의 척도란, 수익성이거나 대중의 인지도와 비례하기 때문에, 늘 기초 순수 예술은 뒷전일 경우가 많다.

그러니 앞에서 말한 것처럼, '멋지게 한 판 도와주세요!'가 낫지 않을까?

이 점에서 기초 순수 예술에 대한 기업 관계자나 정치인들의 인식 부족이 심각해 보인다. 하지만 이 인식 부족은 일반 대중의 인식 부족과 비례한다. 국립 오페라 합창단의 해고 문제는 아무런 여론의 호응도 받지 못한다. 도대체 이 나라에 클래식 음악을 듣는 이가 몇 명 쯤 될 것 같은가? 도리어 가진 자들의 취미라고 홀대받는 건 아닐까? 

사회 전반적으로 기초 순수 예술에 대한 인식과 저변이 탄탄해져야 한다. 발제를 맡은 오픈옥션의 이금룡 회장의 말은, 매우 당연한 표현이지만, 우리가 곧잘 잊어버리는 것이다.

"하드웨어는 돈만 있으면 언제든 가능하지만, 소프트웨어는 돈이 있어도 안 되는 것이다. 이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투자해야만 성공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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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의 '숲'



문명화된 숲


어렸을 때, 나는 언제나 마을 뒷산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했다. 채 열 살도 되지 않았을 무렵의, 내 호기심을 자극하던 뒷산 너머에 있을 그 무언가, 미지의 세계. 거대한 바다가 있거나 반짝이는 조명으로 찬란한 대도시이거나, 아니면 내가 세계 최초로 발견하게 되는 외계인 마을이거나. 그리고 결국 나는 뒷산에 오르고 만다. 오전 일찍 집을 나선 나는 마을 뒤로 나있는 오솔길을 따라 숲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내 키에 적당한 길이로 나무 가지를 꺾어 지팡이로 사용하면서. 그렇게 몇 시간을 올라갔을까. 산 정상은 보이지 않고 좁은 길 흔적마저도 사라진 채, 이름을 알 수 없는 산새들 소리만 들리고, 눈앞에는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찬 숲 속으로 가느다랗게 내려앉은 햇빛뿐. 이 때쯤 되면 나를 지배하던 호기심은 어디론가 뒷걸음쳐 그 모습을 숨기고, 숲 속은 별안간 두렵고 무서운 어떤 것으로 변신을 시도한다. 올라가던 걸음을 멈추고 나는 뒤로 돌아 마을로 내려가기로 마음먹지만, 어느 방향에서 올라온 것인지 기억은 나지 않고 등 뒤 공포의 크기는 시간이 갈수록, 아래로 내려가면 갈수록 더 커져만 간다. 산 정상으로부터 물들어가는 어둠이 산 아래까지 스며들었을 무렵, 겨우겨우 마을이 보이는 언덕에 도착하게 되고 눈앞에 보이는 마을 불빛을 보며 안도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안전한 문명의 불빛이었다.

무섭고 두려운 공포의 자연과 안전하고 아늑한 문명의 대비를 최초로 경험한 나는, 나이가 들어서도 산행을 하더라도 등산로가 아닌 다른 곳으로는 가지 않게 되었다. 어렸을 때의 이 사소한 경험은, 실은 오래된 ‘안전한 문명과 야만적 자연의 대비'다. 가령 중세 유럽의 ‘숲’은 ‘가상적 혹은 현실적인 위협과 위험으로 가득했다.' 밤에 늑대로 변신하는 도깨비들이 출현하였고, 야수와 반야만인이 살고 있었다. 그 곳은 ‘장원과 장원, 지방과 지방 사이의 변경 지대였으며, 특히 전혀 사람이 없는 곳이었다. 그러한 가공할 만한 어둠으로부터 굶주린 늑대들이며 산적들이며 약탈적인 기사들이 갑자기 출현하였던 곳'이었다. 그러므로 ‘서양 중세에 있어서 모든 진보는 가시덤불과 소관목, 또는 만일 불가피하거나 기술과 장비가 허용된다면, 거목과 처녀림, 페르스발의 ‘황량한 숲’, 단테의 작품에 등장하는 ‘침침한 숲’에 대한 개간과 투쟁과 승리의 결과이다'. (자크 르 고프, <<서양중세문명>>, 유희수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2년, pp. 155~158 참조)

자크 르 고프가 언급하는 바의 그 ‘진보’는 12세기 고딕(Gothic)을 꽃피우게 하였으며, 근대의 정신(Modernity)이 되었다. 이제 숲, 혹은 자연은 인간이 개척해야 되는, 개척할 수 있는 어떤 것이 되었다. 이후 급격하게 발전하게 되는 자연과학은 이러한 정신적 태도에서 기인한다. 야만적 자연은 그 모습을 감추는 듯했다. 저 밝게 빛나는 이성의 빛 앞에서 자연은 아무런 힘 없는 배경으로 자리 잡는다. 네덜란드 바로크 예술가들에게 있어서 자연은 문명화된 자연이다. 인간의 힘 앞에서 그 본래의 원초성, 야만성을 잃어버린다.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의 문명 앞에서 나약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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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더르트 호버마
<데펜터의 풍경>
목판에 유채, 53.3*71.7cm, 1662년~1663년경
네덜란드 마우리츠하위스 왕립미술관.


숭고한 어떤 세계

하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이성의 빛으로 포섭될 수 있을까. 한 때 그런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시대가 있었으니, 그 시대가 바로 바로크 시대였다. 뉴튼과 데카르트를 위시하여 바흐와 렘브란트로 이어진 그 시대에 인간은 신의 진리를 알아챌 수 있는, 우주에서 유일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 유일한 존재의 역사는 신의 진리를 알아도 시간 속에 놓여진 운명 앞에서는 한없이 나약하다는 사실을 말없이 증명하고 있었다. 계몽주의 시대를 살다간 칸트는 ‘우리는 결코 물 자체(Ding an sich)가 무엇인지를 경험할 수 없고, 사물이 우리들에게 현상하는 대로만 사물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다시금 문명과 자연의 대비를 우리에게 다시 상기시킨다.


높이 솟아 방금이라도 내려앉을 듯한 험한 절벽, 번개와 우뢰를 품고 유유히 다가오는 하늘 높이 피어오른 먹구름 온통 파괴력을 자랑하는 화산, 황폐를 남기고 지나가는 태풍, 파도가 치솟는 끝없는 대양, 힘차게 흘러내리는 높은 폭포와 같은 것들은 우리들의 저항하는 능력을 그러한 것들이 가지는 위력과 비교해서보잘 것 없이 작은 것으로 만들고 만다. 그러나 우리가 안전한 곳에 있기만 한다면, 그 광경은 두려우면 두려울수록 더욱 우리의 마음을 끄는 것이 될 뿐이다.
- 칸트, <<판단력비판>>, 이석윤 역, 박영사, 1996년 중판, p.128


칸트에게 있어서 이러한 자연은 숭고한 것이다. 그에게 숭고미는 문명의 빛이 닿지 않는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숭고한 자연은 19세기 낭만주의자들을 매혹시킨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는 이러한 숭고한 자연을 그대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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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떡갈나무 숲의 대수도원 묘지>
캔버스에 유화, 110.4*171cm, 1809년경
베를린 국립 미술관.


낭만주의자들에게 자연은 지친 우리 영혼을 쉬게 해주는 안식처를 넘어 기독교의 신을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신적인 존재로까지 부상하게 된다. 19세기 낭만주의자들의 자연에 대한 태도는 정통 기독교에 대한 가장 막강한 대안이요 유행이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범유럽적 경향이었으며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자연에 대한 숭배가 종교적인 것으로 변모하기 시작하자, 숭고한 자연의 모습은 몇몇 낭만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소박하고 친근하며 애잔한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하였다. 19세기 후반 영국 라파엘 전파와 프랑스 인상주의자들이 바라보는 자연의 풍경은 후대 미술사가들의 극단적인 평가만큼이나 흥미로운 것이었다. 존 에버릿 밀레이의 <오필리아>는 숲 속 개울물 위를 떠내려간다. 그녀의 얼굴은 당혹스런 슬픔으로 가득 차 있고 그녀의 주검 주위로 버드나무와 데이지꽃, 장미와 제비꽃 등 낭만주의자들을 매혹시켰을 꽃의 상징들로 장식되어있다. 이제 숲 속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 흘러가는 곳으로 변한 것이다. 여기에 비해 인상주의자들에게 숲은 너무 건조하고 딱딱하며 지나치게 쓸쓸한 어떤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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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에버렛 밀레이
<오필리아>
캔버스에 유화, 76.2*111.8cm, 1851년경
런던 테이트갤러리.



(*월간 <숲> 8월호에 실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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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정원이 된 숲
내 몸 어디에서도 고된 노동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틈 날 때마다 그 흔적을 지우고, 또 지우고, 지우려고 애쓰며 살아가는 탓이다. 자줏빛 뿔테 안경을 끼고 한 손에는 낡은 수필집을 든 채, 매일매일 전투 같은 일상을 보내는 직장인으로써가 아니라 책 읽기와 산책으로 소일하는 한가로운 룸펜처럼 보이게 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 여기 이 세상과는 무관하게 살아간다고 웅변하고 싶은 것이다. 현실을 떠나 꿈 속 세계로. 내가 원했지만, 절대로 실현되지 않았던 어떤 것이 눈앞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세계로.

Fete Galante. 우아한 축제. 그 곳이 현실인지, 꿈인지 알 턱이 없지만, 아름다운 무희가 춤을 추고 한순간도 술잔은 비는 법이 없으며, 새가 사랑을 노래하고, 얇은 바람이 시샘하듯 내 머리칼 위를 머무르며 즐거움을 훼방 놓으려 할 때, 어김없이 사랑하는 이의 입술이 내 입술로 와 닿는 그런 세계. 18세기 로코코의 귀족들은 거칠고 힘든 현실을 떠나 솜사탕 같은 가벼운 달콤함으로, 봄바람 같은 부드러움으로 가득 찬 꿈결 같은 세계로 향한다. 이 때 숲 속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사랑의 공간이 되고, 그 곳에서 우리는 영원한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잠시 고된 현실의 삶은 잠시 잊고 눈앞에 펼쳐진 꿈결 같은 즐거움에 빠지자. 그녀의 사랑스러운 고백을 들으며, 나는 그녀의 허리로 손을 가져가며 살짝 그녀를 끌어당긴다. 달빛이 투명한 호수의 물결 위로 미끄러지듯 그녀의 몸이 내게로 향해오고 숲 속은 현실 속에서 빠져나와 정신적, 육체적 즐거움을 수놓으며 깊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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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tes Venitiennes>
Antoine Watteau, 1718-19년
캔버스에 오일, 56 x 46 cm
National Gallery of Scotland, Edinburgh

로코코 양식의 위대한 예술가 장 안트완 와토의 세계이자, 상승하는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서서히 몰락해가는 귀족의 세계다. 그리고 달콤하고 화려한 색채로 충만한 이 세계는 부드럽고 느린 걸음으로 1789년의 불타는 파리를 향해 천천히 걸어간다. 그래서 Fete Galante는 겉으로는 우아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현실 속에서 자리 잡지 못한, 인정받지 못한, 세상 사람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한 채, 자신의 시대와는 멀어지는 토지 귀족들의 불편함이, 비겁함이, 그리고 끝내 몰락해버릴 한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 숨어있다. 물질적 풍요로움과 대비되어 나타나는 정신의 박약함은 숲 속을 현실과 멀리 떨어진 꿈 속 세계로 변화시키고 절대 버림받는 일 따위는 없는 사랑의 정원으로 만든다. 하지만 꿈은 현실 앞에서 언제나 부서지고 사랑은 끝내 산산조각 나고 만다. 그 때 숲은 쓸쓸한 도시가 되고 떠나가는 연인의 뒷모습이 되고 지금은 되돌릴 수 없는, 감미로운 과거의 순간이 된다. Fete Galante를 지배하는 것은 이런 애상이다. 그것이 거짓인줄 알면서도 현실의 아픔에 고개 돌리고 금방 꺼져버리고 말 꿈 속 사랑을 향해가는 감미로운 슬픔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와토의 작품 대부분이 우리에게 가라앉은 우울함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때론 꿈속으로

사방엔 산들이 벽처럼 늘어섰고 구름과 안개는 가렸다가는 피어오르는데 멀고 가까운 곳이 모두 복숭아나무로 햇살에 얼비치어 노을인 양 자욱했다. 또 대나무 숲 속에 띠풀집이 있는데 사립문은 반쯤 닫혀 있고 흙섬돌은 이미 무너졌으며 닭이며 개, 소와 말 따위도 없었다. 앞 냇가에는 조각배가 있었지만 물결을 따라 흔들거릴 뿐이어서 그 정경의 쓸쓸함이 마치 신선이 사는 곳 같았다.
- 안평대군의 ‘몽유도원기(夢遊桃源記)’ 중에서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57쪽에서 재인용)


끝내 유배지에서 그 생을 다하는 안평대군(安平大君). 수상한 세상을 보며 자신을 아끼던 안평대군과의 사이를 끊어 그 생을 유지했던 안견(安堅). 이 둘을 떠올릴 때면, 그림과 무관한 세상살이를 되새기게 된다. 하지만 꿈 속, 복사꽃 흩날리는 꿈 속 세상에 걸어 들어간 안평대군은 수상한 세월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요하고 향기로운 꿈 속 풍경에 넋을 잃은 채, 살아 움직이는 것들이 사라진 그 곳에 서서 ‘그 정경의 쓸쓸함이 마치 신선이 사는 곳 같았다’고 읊조린다. 그는 무슨 이유로 쓸쓸함에서 신선(神仙)을 떠올린 것일까. 그리고 <몽유도원도>가 그려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형 수양대군은 어린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당대 제일의 서예가요, 시, 문, 서, 화, 악에 능했던 동생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낸다. 서른여섯의 나이로 안평대군은 유배지 강화에서 쓸쓸히 죽고 ‘두견새 소리 그치고 조각달은 밝은데 피를 뿌린 듯 골짜기의 봄꽃만 붉다’던 어린 단종도 강원도 영월에서 끝내 죽임을 당하고 만다.

하루하루 힘들게 견디는 현대의 직장인이 밥벌이의 흔적을 끝내 지우지 못하는 것처럼, 안평대군은 현실에서의 쓸쓸함을 꿈 속 세상에까지 가지고 들어간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꿈 속 쓸쓸함을 보며, 그 쓸쓸함을 받아들였을 때, 신선이 될 수 있음을 우회적으로 밝힌 것은 아닐까. 하지만 쓸쓸한 현실을 받아들이기엔 우리는 너무 연약하고, 세상은 거칠기만 하다. 그럴 때, 18세기 프랑스의 귀족들이 꿈꾸고 와토가 그렸던, 안평대군이 꿈꾸고 안견이 그렸던, 숲 속에 숨겨져 있는 이상향을 떠올려보자. 그러면 잠시나마 삶이 가벼워지지 않을까. 아니 가벼워질 거라고 믿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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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도원도>
안견, 1447년, 비단에 수묵 담채, 38.6 x 106.2cm, 일본 천리대학교 도서관 소장



글. 김용섭
(현재 직장인으로, <삶은 늘 우리를 배반한다>(미토)라는 예술사 책의 공저자이다.)

(* 월간 <숲> 7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오랜만에 미술과 관련된 원고 청탁을 받아 기쁜 마음으로 썼습니다. 하지만 필력은 예전만 못한 듯하네요. ㅡㅡ; 저자 약력은 편집진에 의해 수정되었습니다. 현재 저를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당한 문장이라 생각하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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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편의 영화를 노트북으로 보았다. 영화를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극장에도 거의 가지 않는 내가 영화를 보는 채널은 온라인이다. ‘에라곤’과 ‘우주전쟁’ 내가 본 두 편의 영화다. 이 두 편은 영화의 완성도에서나 극적 요소의 사용, 스토리의 박진감 등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에라곤’은 형편없는 영화이며, ‘우주전쟁’은 잘 만들어진 영화이다. 아주 가끔 영화를 보면서 왜 감독이나 시나리오작가들은 스토리를 왜 이렇게 구성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들은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전달하면서 자신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구체화시키는 방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에라곤’과 ‘우주전쟁’을 보고 난 뒤, 나는 그들을 위해 상식적이며 기본 사항에 해당되는 몇 가지 사실을 적어볼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이는 나를 위한 것일 수도 있다.

1. 관객에게 대사를 통해 상황을 설명하지 마라.
- ‘에라곤’은 대사를 통해 상황을 너무 자주 설명한다. 영화는 소설이나 희곡이 아니다. 왜 카메라로 찍어서 스크린으로 왜 보여주는가? 관객에게 대사로 상황을 설명하거나 이해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대사 없이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우주전쟁’에서도 이런 장면이 있었다. 주인공 일행이 있었던 집 위로 여객기가 추락한 장면에서. 이런 장면은 관객의 흥미를 반감시킨다. 이런 설명을 굳이 사용하고 싶다면, 그것은 다음에 일어나 거대한 사건의 암시가 되어야할 것이며 관객이 다음 사건을 궁금하게 만드는 역할을 수행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냥 보여만 줘라. 관객은 바보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든 상황을 일일이 대사로 설명받기 원할 정도로 적극적이지도 않다.

2. 속도감
- 매 시퀀스마다 사건이 있어야 한다. 잠시라도 쉬면 안 된다. 1시간 반, 2시간은 너무 짧은 시간이다. 주인공이 걸어가는 장면도 최소화해야 된다. 그런 장면들은 낭비다. 걷는 영화는 빔 벤더스의 ‘파리, 텍사트’가 유명하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걷는다’는 행위는 예술적 통찰을 담고 있다. 이런 식으로 영화의 주제와 밀접한 경우가 아니라면 굳이 걷는 장면을 보여줄 필요가 있을까. 영화 상영 시간은 언제나 짧다.

3. 명확한 주제의식, 또는 목적의식
- 영화를 통해서 무엇을 관객에게 심어줄 것인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구체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에라곤’은 관객에게 무엇을 심어주려고 한 것일까? 사랑? 우정? 관객은 난폭하게 생긴 서양의 용이 여성의 목소리를 가졌다는 사실에 경악한 것이 전부다. 하지만 ‘우주전쟁’에서는 명확하다. 영화의 힘은 여기에서 나온다. 가령 ‘반지의 제왕’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몸집이 제일 작고 싸움도 제일 못하는 호빗족이 세계를 구한다는 것. 이는 외형적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눈으로 들어나지 않은 마음가짐, 신념, 정신이 중요하다는 것을 극적으로 드러내며, 이런 이유로 이 영화는 종종 심리극의 형태를 띠기도 한다.

4. 주인공의 변화
- 극 초반의 주인공(또는 인물들 간의 관계)과 극 후반의 주인공과는 다른 사람이어야 한다. 사건을 경험한다는 것은 자신을 둘러싼 어떤 상황이 변한다는 것을 뜻하며, 이를 통해 주인공은 변해야만 한다. 그것이 성장이든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시종 일관 동일한 컨셉을 유지하는 주인공도 있다. 가령 ‘다이하드’에서의 존 맥크레인같은 인물.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을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이 바뀐다. 인물이 변하든지 관계가 변하든지, 무조건 변해야만 된다. 그리고 이 변화는 영화의 주제나 목적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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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적인 공간 ‘온라인’에서의 개인적 글쓰기




 
새로운 ‘사적’ 공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내가 속해 있는 커뮤니티나 블로그(blog)가 있는 웹사이트에 로그인을 반복한다. 인터넷 메신저는 늘 로그인 상태를 유지하며 메일 프로그램은 수시로 열어 살펴본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오프라인에 있으면서 동시에 온라인에서도 존재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런 낯설고 기묘한 상태가 언제부터 익숙해지고 심지어는 온라인에 내 존재가 없으면 불안해지기까지 한 상황이 시작된 것일까.
 
 고백하건대, 그건 십 여 년 전 내가 피씨 통신을 시작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물리적 실체 없는 공간 속에서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매우 가까웠던 몇 명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는 그 곳을 친숙하고 익숙한 공간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온라인 공간이 오프라인 공간을 대체하거나 오프라인 공간을 변혁시킬 새로운 공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나를 이해해주고 나의 말에 귀 기울여 주는 몇 명의 이들을 만났고 만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이 오프라인 공간보다 훨씬 높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고 있다. 하지만 어느 학자는 이러한 가능성을 바탕으로 온라인 공간이 열린 공간을 지향하기 보다는 닫힌 공간을 만들기 쉽다고 지적한다. 자신과 비슷한 취미, 지적인 경향, 정치 성향에 따라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시작하며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채널들이 비슷한 경향의 사람들만을 모아 하나의 커뮤니티(네트워크)를 형성하여 결국에는 닫힌 공간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닫힌 공간이 훨씬 안정적이며 안락하고 사적인 친밀감 내지 유대감으로 가득차있는, 늘 일상에 쫓기는 오프라인 공간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공간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가 쉽게 생각하듯 아무나 접근할 수 있는 열려있는 온라인 공간이라기보다는 실은 닫혀있고 비밀스러운 공간인 것은 않을까. 아마 우리는 온라인 속이 사적이고 친밀하며 비밀스러운 공간이 되기를 은연중에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늘 익명의 타자들로 둘러싸여 있고 도구적 합리성에 의해 모든 가치가 계량화된 현대 사회 속에서 새로운 사적 공간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꼭 18세기 로코코 시대의 예술가들이 꿈의 안락함으로 가득 찬 사적인 공간 속으로 들어갔듯이.
 
 
 진실과 거짓의 문제
 
 진실이라고 믿어지는 모든 것이 실은 거짓이고 거짓이라고 믿어지는 것들이 진실이라고 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그래서 슬플까? 아니면 안타까울까? 그러나 실제로는 이러한 부정적인 반응보다는 기쁘고 행복하다는 반응을 보일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현실의 세계가 아닌 내가 바라는 어떤 거짓으로 이루어진 세계. 내가 사랑하지만, 날 사랑하지 않는 그녀가 날 사랑해주는 세계. 경제적 능력이라곤 제로에 가까운 내가 풍부한 경제적 능력으로 남의 부러움을 받을 수 있는 어떤 세계. 현실 세계의 진실들이 거짓으로 되고 내가 바라는 모든 것들, 현실 세계에서는 거짓인 것들이 진실이 되는 것.
 
 영화 ‘매트릭스’(Matrix)는 이러한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다분히 교훈적으로 안락한 거짓 대신 힘든 진실을 택하는 등장인물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실은 관객의 입장에선 시온의 세계가 진실인지, 매트릭스의 세계가 진실인지 알지 못한다. 나누어져 있는 이 두 세계 모두 진실일 수도 있고 두 세계 모두 거짓일 수 있다. 도리어 객관적인 세계란 존재하지 않고 한 개인이 어떤 세계를 진실로 선택하느냐에 대한 ’실존적 결단‘을 요구하는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영화는 두 세계를 긍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시뮬라시옹』(Simulation)은 영화 ‘매트릭스’가 그러하듯 ‘진실은 무엇인가’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적 태도의 한 형태를 보여준다. 그에게 과거 진실이었던 것은 이제 아무런 의미 없는 것으로 인식되며 진실을 복사한 형태, 또는 그것을 변형한 형태들이 진실을 압도하여 결국에는 현재의 우리가 가짜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진실이 되는 어떤 세계가 될 것이라고 공언한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가 현대에 와서 때 아닌 주목을 받는 이유는 우리가 희망하는 어떤 거짓이 진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알게 모르게 끊임없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영화 ‘매트릭스’나 장 보드리야르의 포스트모던 이론이 새롭거나 낯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힘들고 버거울 때마다 우리를 사로잡았던 꿈과 환상에 대한 요구가 현대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에 불과한 셈이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것이 거짓이었으면’하고 되뇌이는가. 실은 우리는 종종, 혹은 자주 진짜인 모든 것들이 가짜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가장 손쉽게 이룰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온라인 공간이다. 나는 채팅하면서 나이를 속일 수 있고 내 소유의 대형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는 전문직 종사자라고 속일 수도 있으며 최근 심각한 실연의 상처를 겪어 누군가의 애정 어린 위로를 구한다는 글을 온라인 공간 어딘가에 남겨 누군가의 위로를 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 현실 세계에서는 쉽게 감행하기 힘든 종류의 행동을 온라인에서는 상대적으로 쉽게 할 수 있다. 익명의 공간 속에서 낯선 이의 대화가, 낯선 이의 게시물이 진실인지 알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며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믿게 되는 과정이 논리적인 과정이기 보다는 직관적인 느낌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현실 세계에서 종종 겪게 되는 차별적인 대우나 비슷한 종류의 불쾌감을 해소하기 위해, 또는 그러한 일을 온라인 공간에서 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꾸며내는 것은 언제든지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온라인 공간 속에서 업데이트 되는 내용들을 모두 진실이라고 믿을 수 있겠는가. 도리어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믿는 것이 어쩌면 더 속 편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
 
 보들레르(Baudelaire)는 19세기 파리 거리 한 복판을 거닐면서 고독한 산책자(fl?neur)의 이미지를 발견하고는 경악하고 흥분했다. “새가 공장에서 날아가고 물고기가 물 속에서 노는 것처럼 그의 활동 영역은 대중이다. 그의 정열, 그리고 그의 직업은 대중과 한 몸이 되는 것이다. 완벽한 산책자, 정열적인 관찰자에게 있어서 숫자와 물결치는 것, 움직임, 그리고 사라지는 것과 무한 속에서 자신이 거주할 집을 세우는 것은 커다란 기쁨이다. 자신의 집 밖에 있으면서 어디서든지 자신의 집처럼 느끼는 것, 세계를 바라보고 세계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세계로부터 숨어있는 것, (… …) 관찰자는 도처에서 자신의 익명을 즐기는 왕자이다.”1) 그리고 “현대성이란 일시적인 것, 순간적인 것, 우연한 것으로 예술의 반을 이루고 나머지 반은 영원한 것, 불변의 것이다.”2)라고 말한다. 19세기 중엽의 보들레르는 익명의 대중들에 둘러싸인 한 개인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하면서 열광하고 있지만, 실은 그 거리 속에서 나를 아는 이라곤 한 명도 없는, 그리고 내가 아는 이도 한 명도 없는, 나를 제외한, 심지어 나까지도 포함한 거리의, 도시의 모든 것이 풍경인 어떤 비극적인 세계를 발견했던 것이다. 21세기 서울의 종로나 명동에 우두커니 서있을 때, 우리가 종종 ‘나는 혼자구나’라는 쓸쓸함이나 외로움 같은 것을 느낄 때, 19세기의 보들레르는 이 느낌을 새롭다고 느끼며 흥분하고 열광했던 것이다.
 
 리차드 세네트(Richard Sennet)은 『공적 인간의 몰락』(The Fall of Public Man)에서 이러한 보들레르의 경험을 사회학적으로 예리하게 분석해낸다. 그는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변화, 그리고 공적 공간이 과거의 위상과 권위를 잃어버리자 사적 공간 속으로 거침없이 빨려 들어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그려낸다. 보들레르에게 19세기 파리의 거리는 새로움으로 가득 차 있는 공간이었지만, 20세기와 21세기의 개인에게 대도시의 거리란 외롭고 쓸쓸한 곳이다.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거나 두 공간을 지배하는 질서가 비슷했던 시대는 근대(17세기) 이전이었다. 17세기 이전에도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갈등이나 분열이 나타났던 시기-대표적으로는 로마 후기-가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갈등이나 분열을 사라졌다.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질서가 비슷할 경우, 한 개인의 사적인 삶과 공적인 삶은 특별한 갈등도 일으키지 않는다. 한 개인의 꿈은 그 시대나 그 나라가 원하는 꿈과 비슷하거나 그 공간 속에서 용인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일 가능성이 높고 한 가족, 가문의 단위가 확대된 것이 한 나라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근대 이후의 세계는 틀리다. 이를 본격적인 탈주술화의 과정이라고 파악할 수 있다. 중세의 세계관이 뒤로 물러나고 계량적인 세계관이 지배적인 시대가 된다. 이 때 수학적으로 증명되지 못하는 중세적인 것들은 그 위력을 서서히 잃어나가고 가치를 상실한다. 아마 근대 초기에 살았던 지식인들은 이 낯선 변화에 대해 열광하고 흥분하였을 것이다. 비범한 재능을 타고 났지만, 사생아로 태어나 그 누구에게서도 인정받지 못하던 어떤 개인이 근대 이후의 계량적 세계관과 도구적 이성의 지배를 받는 공적 공간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을 때, 그것은 일종의 새로운 유토피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한 가족, 한 가문 내에서 통용되던 전통적인 질서가 공적 공간 속에서 통용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경우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시장(Market)이다. 시장 속에서의 모든 것들은 계량화되어 거래된다. 근대 이전의 추상적인 가치들이 근대 이후에는 계량화되어 언급될 수 있다는 신념이 급속도로 확대된다. 이것이 바로 서양 인문학에서의 ‘근대’(Modern)이다. 근대 초기에 이러한 태도는 혁명적인 분위기까지 자아내었으며 17세기의 바로크적 자신감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갈수록 시장에 참여하는 개인들은 능동적 참여자이기 보다는 수동적 참여자라는 사실이 분명해지고 시장의 질서는 개인들의 바람과는 무관하게 움직이는 경우가 빈번해진다. 시장의 경우에서처럼 계량화된 가치들이 통용되는 근대의 공적 공간은 개인들의 삶을 힘들게 하는 종류의 것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급기야는 “19세기 자본주의가 준 치명적인 쇼크로 인해 자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승자도 패자도 이해하지 못하는 경제 질서의 충격으로부터 가능한 어떤 방법이라도 써서라도 자신을 보호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공생활의 질서를 만들어내고 다스리려던 의지는 점차적으로 무너져갔으며, 사람들은 공생활의 질서로부터 자신을 은폐하는 데 더욱 관심을 쏟았다. 가정은 이러한 보호막의 하나가 되었다. 19세기를 통하여 가정은 특수한 사적 생활 영역의 중심으로서의 성격을 점점 잃어갔으며 대신 공생활 영역보다 높은 도덕적 가치를 지닌 독자적인 세계로서의 이상적인 도피처로 점점 인식되어져 갔다.”3)
 
 19세기에 본격화된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갈등은 20세기에 들어서는 더욱 분명한 형태로 나타났다. 기업이나 관공서에서 흔히 대할 수 있는 ‘공과 사를 나누어 생각하려는 태도’도 20세기에 들어서서 분명해진 태도이다. 하지만 사적 공간에서의 실수가 공적 공간으로 일어질 수 있거나 이와 반대되는 경우도 발생한다는 점에서 공과 사를 나눈다는 것이 얼마나 난해한 것인가를 우리는 이미 경험을 통해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오래 전 루소(J.J. Rousseau)가 “가족이라는 사회도 결국은 약속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것이다”라고 하였을 때4), 근대 초기 지식인들을 사로잡았던 공적 공간에 대한 이해를 사적 공간까지로 확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몇 세기가 지난 지금 개인들은 공적 공간과는 무관하고 비밀스러운 사적 공간을 만들려고 애쓰고 있다.
 
 공적 공간 속에서의 개인들의 삶이란 꼭 무대에서의 배우처럼, 일정한 역할과 책임을 부여받은 채 살아가게 된다. 우리가 아무런 질문도 던지지 않은 채 화장을 하고 옷을 차려입고 나가듯이 공적 공간 속에서 우리는 배우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러한 사람들 속에서 보들레르는 산책자의 존재를 발견해내며 열광하지만, 이 열광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보들레르 이후의 예술가들은 산책자로서의 자기 존재를 분명히 하지만, 외부 세계를 거저 관찰할 뿐, 더 이상 의미나 가치를 구하지 않는다. 외부 세계란 감각 지각에 비친 영상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님을 분명히 한다. 그래서 인상주의자들의 작품 속에서 한 그루의 나무나 깔끔하게 차려입은 연인이나 동일한 지위를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가 바로 익명의 존재들로 가득 차 있는 공적 공간이다. 이러한 때에 제임스 앙소르(James Ensor)는 보다 직접적인 형태로 공적 공간 속의 개인들의 삶을 드러내는데, 「가면 있는 자화상」에서 예술가의 얼굴만 보이고 나머지 인물들은 가면을 쓴 형태로 표현하여 공적 공간 속에서의 개인들이란 배우들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이는 예술가인 자신만은 진실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혀지지만, 그의 전반적인 작품 세계는 이러한 의지의 표현보다는 우리의 삶이 가면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절망적 세계 인식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앙소르처럼 대부분 현대 예술가들은 외부 세계 속에서 더 이상 삶의 가치나 의미를 구할 수 없다는 니힐리즘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가 20세기 추상 예술을 낳은 추동력으로 작용하였다.
 
 나는 누구인가?
 
 현대의 예술가들이 심각할 정도의 주관주의로 방향을 틀었을 때, 외부 세계가 아닌 자신의 내면 세계로 침잠해 들어갔다고 해서,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갈등이 봉합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 갈등은 심해지고 공적 공간의 영역은 더욱 확장되었다. 아침 7시에 집에서 나가 저녁 9시에 들어오는 평범한 회사원의 삶은 그 공간의 확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예이다. 20세기 전반기의 많은 예술가들이 경고하였던 종류의 삶이 20세기 후반에 일반적인 삶의 형태로 굳어진 것이다. 공적 공간을 지배하는 계량적 가치의 태도, 즉 도구적 이성의 위력은 이제 사적 공간마저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개인적 삶이란 아무런 존재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나의, 나에게만 고유한 어떤 종류의 인생이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나만 가지고 있는 고유한 가치, 절대로 수로 표기될 수 없는 가치를 공적 공간 속에서의 사람들은 이해해줄 수 있을까. 사적 공간에 있는 사람들마저 공적 공간에서 통용되는 가치 기준으로 이해하고 판단하려고 했을 때, 한 사소한 개인이 갈 곳이라곤 아무 곳도 없다.
 
 루이지 피란델로는『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이라는 소설 속에서 ‘모스카르다’라는 인물을 통해 현대 세계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묻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보여준다. 어느 날 ‘모스카르다’는 자신의 신체 일부분에 대한 질문을 시작한다.? 너무 사소해서 소설은 희극적인 분위기 속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그 질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 자신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의문으로까지 이어지고 결국은 주인공 ‘모스카르다’는 비극적 파국을 맞이한다. 왜냐면 그는 하나의 단일한 존재라기보다는 소설의 제목처럼 ‘십만 명인 어떤 사람’이었기 때문이고 결국 그는 그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자 할수록 미궁 속으로 빨려 들어갔기 때문이다. 아마 17세기의 데카르트(Descartes)라면 어처구니 없어했을 이 소설은 현대인들에게 데카르트의 세계가 얼마나 소력이 없는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될 것이다. 도대체 ‘생각하는 나’의 확실성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셰리 터클은 온라인 공간 속의 삶을 연구하면서 한 개인의 정체성은 하나이기 보다는 다수에 가깝다고 말한다. “정체성이란 ‘다양한 역할들의 집합’이라는 관념이 일반화됐다. 역할들은 서로 섞이고 짝을 이룬다. 때로는 역할별로 터져 나오는 다양한 요구 사항을 조정할 필요가 생기곤 한다. 이런 새로운 정체성 경험을 이론화하기 위해 여러 분야의 사회학자, 심리학자들이 나서고 있다. 로버트 제이 립튼은 ‘다중 역할’이라는 개념을 썼고, 케네스 저건은 ‘포화상태의 자아’라는 말로 설명했다. 에밀리 마틴은 ‘유여한 자아의 개념이야말로 각종 유기체와 개인, 조직이 가져야 할 현대적 덕목’이라는 주장을 폈다.”5) 그리고 그녀는 다분히 포스트모더니즘의 입장에서 단일한 특성을 이루는 것보다 다양한 특성이 서로 공존하는 정체성을 긍정한다. 아마 그녀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현상이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며 그러한 현상을 적절하게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이론들이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역사 속에서 단일한 자아 정체성을 가져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라고 말하는 편이 타당할 듯싶다. 우리는 이미 공적 공간, 사적 공간 가릴 것 없이 우리의 삶 속에서 서로 다른 여러 역할들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가령 한 아이의 아버지이면서 한 여자의 남자친구, 그리고 어느 부부의 아들이면서 회사에서는 영업 사원, 이런 식으로 이미 삶 속에서 한 개인의 역할은 여러 개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 역할마다 그가 보여주어야 하는 행동 양식도 틀리다. 온라인 공간 속의 정체성의 문제란, 실은 이미 온라인 바깥 세계에서도 일어나는 문제이다. 아니 온라인 공간 속에서의 논의되는 정체성의 문제보다 오프라인 공간 속에서의 정체성 문제가 더 중요하고 비중 있게 다루어져야하지 않을까. 온라인 공간 속에서의 정체성 혼란은 그 온라인 공간을 벗어났을 경우에는 대체로 잊혀지기 일쑤이지만, 오프라인 공간 속에서의 정체성 혼란은 우리의 직접적인 삶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온라인에서 누구이고 오프라인에서는 누구인가.
 
 자기 진실성(authenticity)
 
 나에게 다양한 정체성이 있다고 좋은 일일까. 도리어 나는 단일한 정체성을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닐까. 그 어느 누가 보아도 나를 동일한 성격을 가진 존재로 파악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까. 가족 내의 내 모습과 직장 내에서의 내 모습이 판이하게 다를 때, 과연 나는 누구일까. 이러한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갈등은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갈등과 겹쳐져 사적 공간 속의 자아 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보다 적극적인 형태로 내가 나라고 믿는 어떤 것들을 지키려고 노력하며 그러한 내가 속해 있는 공간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자 한다. 도구적 이성의 태도로 재단되지 않으며 공적 공간과는 무관한 어떤 사적인 공간 속에서 나의 정체성을 일관되게 유지시키려는 노력을 경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적인 공간은 일반적으로 이해되던 가족이나 친구의 관계를 지나 더욱 폐쇄적인 형태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공적 공간의 질서가 사적 공간까지 침범할 때, 공적 공간의 역할이 더욱 강화될수록 개인의 사적 공간은 더욱 비밀스러워지고 폐쇄적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20세기 후반 라이오넬 트릴링(Lionel Trilling)은 『성실성과 진실성』(Sincerity and Authenticity)를 통해, 성실성은 사적 생활 속에서 느끼진 것을 공적 생활 속에 노출시키는 것을 의미하고 확실성이란 한 인간이 자기 자신을 느끼려는 시도를 타인에게 직접적으로 밝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생각을 통해 현대인은 끊임없는 자기 노출(Self-disclosure)이 믿음과 진실의 보편적인 척도라고 생각하게 되며 언제나 자기 자신임을 확인하기 위해서 자기 노출을 감행하게 된다. 즉 현대인들은 다양한 정체성의 집합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입장 대신 사람들은 늘 단일한 형태의 ‘자기 자신’이고자 하며 이를 위해 자기 노출의 행위를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자신에게 진실해라’라는 트릴링의 견해는 20세기 후반 이후의 지배적인 윤리적 경향이 되었다. 꼭 호수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감동하는 나르시스처럼, 이질적인 다양한 것들의 복합체로서의 자아가 아닌 온전히 하나의 자아를 꿈꾸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꿈은 끊임없는 자기 노출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트릴링의 견해대로 온라인 공간 속에서의 자기 노출은 이러한 자기 진실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한 개인의 필사적인 노력이다. 공적 공간 속에서의 다양한 역할을 떠나, 도리어 그 역할 수행의 이면에 숨겨진 자신의 생각을 드러냄으로서 온전한 자아로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공적 공간 속에서 위축당하고 있는 사적 공간의 영역을 온라인 공간으로 이동하게 되는 계기를 만든다. 개인적인 일상, 비밀스러운 생각까지 노출시킴으로써 개인들은 사적 공간을 지키고 자기 자신에게도 진실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향은 온라인 속에서만 진실한 모습을 드러내며 그 이외의 공간 속에서는 가면을 쓴 채 살아가게 한다든지, 또는 도리어 온라인 공간 속에서마저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들어내게 된다.
 
 알랭 로브그리예(Alain Robbe-Grillet)의 소설 『질투』는 삶에서 상처 입은 한 개인이 어떻게 소설 속에서 사라지는가를 양식적으로 표현해낸다. 알랭 로브그리예는 소설 속에서 말하는 주인공 화자를 지워버리고 문장을 구성해낸다. 그래서 보여지는 것만 있고 생각되어지는 것만 있을 뿐, 그 속에 화자는 없다. 이러한 알랭 로브그리예의 소설이라면, 온라인 공간 속에서도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라’는 트릴링의 격언은 실현되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 왜냐면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라’는 것은 자기 자신의 실패, 잘못, 무능력까지도 가져가라는 이야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온라인에서의 개인적 글쓰기
 
 한 달 동안 우리가 어느 누군가와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몇 시간쯤 될까. 온라인 공간이 현대인에게 줄 수 있는 혜택 중에 이것도 포함될 수 있지 않을까. 낯선 누군가에게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건네는 것.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다. 비밀스럽고 개인적인 온라인 공간을 마련했다고 해서 영원히 비밀스럽고 개인적인 공간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의 미니홈피나 블로그에서의 사적인 글쓰기는 확장된 공적 공간 속에서 지친 현대인들의 적극적인 ‘자기 노출’이면서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고자 하는 열망의 반영이다. 분열된 자아를 하나로 끼워맞추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삶 속에서 여러 개로 나누어진 역할들 중에서 그 중 하나를 선택하려는 실존적 노력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러한 열망과 노력이 치열할수록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내가 온라인에서 알게 된 어떤 이는 블로그를 통해 알게 된 어떤 사람이 그녀의 직업, 사는 곳, 나이, 모든 것을 속였다는 것에 분노했고 도리어 그녀가 자신의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에 슬퍼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도 온라인 세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너무 상심한 탓일까. 누군가가 나를 알아주면 좋을 텐데, 나의 진심을 알아주었으면 좋을 텐데 하고 바라지만, 알아준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를 알아주기 바라듯이 타인도 나에게 그러한 몸짓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곳이 바로 이 세상이고 그 중에서 온라인 속이기 때문이다. 18세기 유럽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세계가 이해받지 못하자, 대저택의 침실로, 욕실로, 또는 저 꿈 속 세계로 도망쳤다. 이것이 로코코의 세계다. 나를 알아주지 못하자, 나를 알아주는 어떤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 그 속에 숨어버리는 것이다.
 
 종종 우리는 내가 오해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오해를 막기 위해 남을 속이기 위한 양식적인 행동과 말투와 적절한 자기 노출을 병행한다. 가끔 직장 생활에서만 나를 알던 어떤 이에게 내 홈페이지나 내 블로그를 보여주면 놀라곤 한다. 적절한 공적 공간 속에서의 역할 수행과 적절한 자기 노출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들을 통해 한 개인이 자기 자신에게 진실해지고 사적 공간 속에만 머물러있지 않고 공적 공간 속에서도 잘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해선 아무런 확신도 할 수 없다. 나의 경우엔 공적 공간 속에서 내 밥벌이를 해야 한다는 생존에의 요구와 그러면서도 나 자신에게 진실하고자 하는 열망이 뒤죽박죽되어 있는 상황일 뿐이다. 적어도 내가 경험해본 바, 그마나 효과가 있는 방법이었다. 이게 결론이라면 너무 허망하지만,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갈등을 봉합할 힘이 우리에게 없고 도구적 이성을 능가할 힘도, 생각하는 내가 누구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알지 못하고 죽으리라는 것만 알 뿐, 내 감각지각에 비추어진 외부 세계가 진짜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다. 고작 내 자신에나마 진실하고자 노력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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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라인에서의 개인적 글쓰기를 위한 가이드
 
 난데없이 ‘가이드’가 튀어나와 어색할 지도 모르겠다. 온라인 공간 속에서 개인적 글쓰기를 하고 싶은 이들을 위해 도움을 주고자 하는 이 잡지 편집진들의 의견을 존중하였고 온라인 공간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개인적 글쓰기가 자신의 심리 상태나 공적인 삶을 수행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확신에서 이다.
 
 1. 글쓰기를 위한 준비
 개인적인 글을 쓰기 위해 개인정보를 노출시켜야만 한다는 건 다소 불합리해보이지만,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 갈등은 온라인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즉 웹사이트 회원 가입을 해야 한다. 그리고 악의적인 누군가에 의해 개인 정보가 노출될 가능성은 언제든지 존재한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온라인에서 개인적인 글쓰기를 할 수 있는 곳으로는 대부분의 포탈 사이트와 커뮤니티 사이트, 블로그 사이트에서 가능하다. 이러한 사이트가 아닌 다른 곳에서 개인적인 글쓰기를 하고 싶다면, 포탈 사이트의 개인 홈페이지 서비스를 이용하거나 따로 개인 홈페이지를 개설하는 것이 좋다. 여기에서 구체적인 리스트를 제시하지는 않겠다. 왜냐면 지금 설명하고 있는 부분들은 검색 사이트에서 찾아보면 쉽게 구할 수 있는 정보들이다.
 
 2. 개인적 글쓰기 시작
 
 글쓰기에 대해서 공포를 느낄 필요는 없다. 글짓기 시간에 영 점을 받았다고 해서, 글이라곤 쓴 본 적이 없다고 해서 이 폭력적인 시대 속에서 글쓰기가 자기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아니지만, 그나마 성공적인 방법이라는 점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여기에 대해서는 지금 내가 온라인 공간 속에서 글을 쓰는 두 세 가지의 방법을 설명하는 편이 나으리라 생각된다. 곧바로 자신의 온라인 공간을 개인적 생각이나 관심사들로 채울 수 있을 것이다.
 
 2.1. 감정적인 일기 쓰기
 
 모 커뮤니티 사이트 미니홈피의 모든 게시판을 폐쇄하고 다이어리 기능만 남겨두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100자 이내의 일기를 종종 남긴다. 가령 이런 식이다. ‘피곤했다. 그래서 맥주를 마셨다. 그러나 슬퍼졌다.’ 이렇게 하루의 특정한 시간대에 내가 움직인 행동들만 모아 서술해보는 것이다. ‘OO역에 갔다. K를 만났다. 그와 두 시간 동안 쓸데없는 종류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집에 왔다. 잠을 잤다’는 식이다. 그런데 이 문장의 마지막에 ‘꿈 속에서 K를 만나 두들겨 팼다’라든가 ‘악몽을 꾸었다’라는 문장을 하나 더 첨가하면 더욱 좋겠다.?
 
 길게 적는 건 좋지 않다. 길게 적으려고 노력할수록 글쓰기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길게 적으려고 할 경우, 온라인 공간 속에서의 개인적 글쓰기의 재미를 느껴보지도 못한 채 포기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짧게 줄이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 시시콜콜한 모든 이야기를 적으려고 하지 말고 특징적인 몇 개의 행동들만 문장으로 옮기면 된다. 그 뿐이다.
 ?
 2.2. 디지털 사진을 올리면서 글쓰기
 디지털 카메라와 핸드폰 카메라로 인해 사진을 찍고 온라인에 올리는 것이 매우 쉬워졌다. 나는 사진을 올리면서 사진 밑에 몇 문장을 붙인다. 어디서 찍은 사진임을 알리는 구체적인 설명보다는 개인적인 생각을 적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작년 여름 사무실에서 저녁 늦게 찍은 사진을 올리면서 ‘외롭다’는 표현을 함께 올렸다. 그러자 사진이 외로운 사진이 되어버렸다.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설명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차라리 그 때 기분을 몇 문장으로 적어 올리는 게 낫다. 이쁜 여자 연애인 스틸 사진을 올리고 ‘그녀는 왜 이렇게 못 생겼을까’라고 한 줄 달아놓으면 별 뜻 없이 쓰인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의미심장한 분위기를 풍기게 된다.
 
 2.3. 특정 소재를 통한 글쓰기
 
 친구들과 함께 간 술집, 소개로 만난 이성, 오랜만에 읽은 책, 또는 선물 받은 음반에 대한 글을 적는 경우가 있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길게 적는 건 육체 건강에도, 정신 건강에도 좋지 않다. 되도록이면 짧게 적는 것이 좋다. 이런 경우는 있을 것이다. 가령 1분 동안 겪은 일을 적었는데, 원고지 분량으로 스무 장이 넘고 한 시간 동안 겪은 일인데, 원고지 한 장을 넘기지 않는 경우가 있다. 어떤 소재나 어떤 사연마다 그것에 어울리는 길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또 이 길이는 사람마다 틀리다. 억지로 이 길이를 조정하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이는 글쓰기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짓이다. 아무렇게나 적어도 상관없다. 단지 느낀 것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
 
 책일 경우에는 마음에 드는 문장을 그대로 옮기는 것도 좋다. 어떤 이의 경우에는 수십 개의 문장을 올리기도 하는데, 네 다섯 개만 올리면 된다. 한 번도 독후감을 제대로 써보지 않은 사람에게 독후감을 쓰는 건 고역 중의 고역이다. 차라리 재미있는 책을 읽고 그 책 속의 문장 몇 개를 적어 올리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익숙해지면 옮긴 문장 밑에 자신의 의견을 한 줄 정도로 정리하면 된다. 다른 소재의 경우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3. 여행을 떠나기
 
 컴퓨터 인터넷 브라우저 즐겨찾기에는 개인 폴더가 있고 이 속에서 개인홈페이지, 블로그 리스트를 따로 관리한다. 여행 떠나기란 다른 사람들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이의 홈페이지나 블로그를 방문해 타인의 세계를 훔쳐보는 것이다. 잘 찾아보면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공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다는 것은 타인에게도 진실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행을 떠나는 것은 자기 자신과 타인을 동시에 알아가는 과정인 셈이다.
 
 또한 블로그에는 트랙백(Trackback) 기능이 있어 타인의 블로그에 올려진 글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릴 수도 있다. 여행을 떠나 만난 어떤 이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능이다.
 
 이런 식으로 사소하지만, 천천히 온라인 공간 속에서 개인적인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다. 나 또한 그렇게 시작하였다. 살아가다가 적절할 때에 개인적 글쓰기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주석.

1) 보들레르, 「현대적 삶의 화가」, 박기현 옮김, 계간『세계의 문학』2002년 봄, 민음사 pp.31-32
2) 위의 책, p.35
3) 리차드 세네트, 『The Fall of Public Man』(번역제목: <현대의 침몰>), 김영일 옮김, 일월서각, p.41
4) 장 자끄 루소, 『사회계약론』,이태일(외) 옮김, 범우사, p.16
5) 셰리 터클, 『스크린 위의 삶』, 최유식 옮김, 민음사, pp.271-272
 
 

* 이 글은 무크지 '북페뎀'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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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종 최근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 경향의 작품을 보면서 경탄해 하는 이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이들은 정교하게 제작된 Painting을 곧잘 사진과 비교해가며 대단하다는 표현을 금하지 못합니다. 아직까지도 Painting에 ‘발전’이라는 것이 존재하며 그것은 사진에서 보여지는 바의 ‘사실적(realistic)’인, 그 어떤 것을 향해가는 것이라고 믿는 이들이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인상주의의 등장이 사진술의 등장과 발달 때문이라고 이해하는 이들이 많은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 때 리글이 말하는 바의 ‘예술의욕’을 다시 한 번 되새길 필요성이 생기게 됩니다.


예술의 역사 속에서 ‘진보와 퇴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피카소가 비슷하게 말한 바 있듯이 ‘그 시대는 그 시대에 맞는 표현양식을 찾기 마련’입니다. 리글이 미술사 저술에 있어서 현대적인 기틀이 마련하였고 이후 대부분의 미술사가들이 리글의 영향권 안에 놓이게 되는 이유는 ‘사건의 주체를 인간으로 보지만 더 이상 역사의 흘러가는 목표를 파악하지 않으며 단 그 흐름의 법칙성만을 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인류의 역사가 어떤 목적점을 향해간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단지 역사의 흐름에 대한 법칙을 발견하려고 노력하였으며, 동시에 의미에 대한 문제가 오직 미술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오늘날까지 미술사 저술의 모범으로 인정 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리글이 말하는 바 ‘예술의욕’은 무엇일까요? 실은 리글은 그의 여러 저서 속에서 ‘예술의욕’을 확실하게 정의 내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의 <>(* 영어번역본 제목)에서 인용해보겠습니다.(* 참고했던 미술사 서적(<<미술사학의 이해>>(헤르만 바우어 지음, 홍진경 옮김, 시공사)의 번역이 리글이 쓴 저서의 내용과 차이가 있어 제가 다시 번역해보았습니다만 엉망이군요. 그래도 참고한 서적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보다는 많이 이해할 수 있는 듯하여 옮깁니다.)


“그러한 모든 인간의 의욕(Wollen)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 만족을 향해 있다(말에 대한 가장 폭넓은 감각 속에서 인간 존재가 외적으로, 내적으로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관계를 맺는 것처럼). 창조적인 예술의욕(Kunstwollen)은 인간과 인간의 감각을 통해 인지하게 되는 대상 사이의 관계를 정리한다(regulate).; 이것은 우리가 항상 사물로부터 형태와 색채를 받아들이는 방식이다(꼭 우리가 시작품 속에서 예술의욕(Kunstwollen)을 통해 그것을 시각화시키듯이). 그럼에도 인간은 (수동적으로) 그의 감각을 통해 한정적으로 인지하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능동적으로) 욕구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인간의 내적 추동력(국가, 장소, 시대에 의해 변해질 수 있는)에 따라 쉽게 인지되어진 세계를 해석하기를 원한다. 이러한 의욕(Wollen)의 성격은 (용어에 대한 폭넓은 감각 속에서) 주어진 시대(Weltanschauung)에서의 세계에 대한 개념(conception)이 무엇이라고 불려지는가에 따라, 즉 종교, 철학, 과학 뿐만 아니라 보통 지배하는 것이라고 말해지는 하나 이상의 어떤 형태들, 정부, 법률 등에 의해 항상 결정되어진다.”

- Alois Riegl, 중에서(<* The Art of Art History : A Critical Anthology> ed. Donald Preziosi, Oxford University Press, p.174)


이러한 예술 의욕으로부터 한 시대를 특징짓는 양식이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양식의 변화에는 ‘진보와 퇴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즉 이집트의 예술 양식에서 그들이 자연주의적 표현 방식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또는 비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리글 이후 뛰어난 미술사가들 한 명으로 인정 받고 있는 한스 제들마이어의 경우에는 리글을 부정적으로 해석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정신사로서의 미술사(Kunstgeschichte als Geistesgeschichte)’라는 개념은 알로이 리글에게 해당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막스 드보르작과 한스 제들마이어에게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신사로서의 미술사’라는 개념을 사용한 제들마이어는 알로이 리글의 ‘예술의욕’의 한계를 아래와 같이 정리합니다. 그리고 아래의 주장은 대체로 긍정적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1. 미술은 다른 것으로부터 파생될 수도 또 대체될 수도 없는 인간의 자율적인 표현수단이라는 이론. 실제 리글은 미술을 일종의 ‘수반현상(Epiphanomen)’이라 파악하고 있다.


2. 천부적인 재능, 어느 개인, 혹은 예술가가 제1차적인 주체라고 하는 관찰. 이와 같은 관찰로 리글은 자신의 집단적 의욕이라는 것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인간의 본성과 이성이 통일성과 불변성을 지니고 있다는 가정. 왜냐하면 인간정신은 사실 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4. 미술가는 항상 그대로 남아있는 자연을 꾸며진 것으로 모방하거나 양식화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제들마이어에게 현대미술(Modern Art)는 ‘타락한 예술 작품’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움베르토 에코는 ‘코키토 인터룹투스(Cogito interruptus)’라는 표현을 써가며 조목조목 따집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제들마이어가 그렇게 주장했던 이유는 미술사에 대한 생각이 남달랐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그는 ‘정신사로서의 미술사’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특정 시대의 미술을 유전학적으로 해석함에 있어서 신과의 관계에서 출발한다고 본다. 따라서 정신사로서의 미술사는 구체적으로 보자면 종교사로서의 미술사로 이해될 수 있다. 정신사로서의 미술사에 놓인 핵심은 ‘숭배사로서의 미술사(Kunstgeschichte als Kultgeschichte)’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신에 대한 관계가 진지해질 때 숭배의 표현이 생기기 때문이다. … ‘정신사로서의 미술사’의 초기 과정에 놓인 특성은 그 방법론이 바로 완성되고 있는 단계에서 멈춘 것이다. ‘정신사로서의 미술사’가 내놓으려 했던 것은 ‘세계관(Weltanshauung)’의 역사로 본 미술사였다. 세계관의 개념은 학문사의 과정에서 일종의 유행어가 되어버렸는데, 이는 그 개념이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지녔기 때문에 아무 것에나 쉽게 적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사로서의 미술사에서 세계관이라는 개념의 비중이 확대되자 그 개념은 곧 종교적 특성 혹은 ‘종교적 사상’의 역사에 주로 적용되기 시작했다.”

- H. Sedlmayr, “Kunstgeschichte als Geistesgeschichte”(1949) (* 헤르만 바우어, <<미술사학의 이해 Kunst-Historik>>, p.125에서 재인용)


이런 식으로 제들마이어는 ‘정신’이 놓였던 자리에 ‘신’을 대체시키기 시작하면서 그의 미술사는 미술신학의 자리로 옮겨가게 됩니다. 이러한 제들마이어가 보기에 현대미술이 제대로 평가 받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원래 그의 스승 막스 드보르작에게 있어서의 미술사는 절대성을 향한 인간의 정신적 발전이라기 보다는 부르크하르트의 문화사적인 관념론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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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또는 현대적 삶



모든 것은 지나쳐간다. 그리고 아무도 그것을 붙잡을 수는 없다. 우리들은 그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 무라카미 하루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다시 말해서, 개인주의의 어두운 면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로의 초점 이동에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의 삶은 [높낮이 없이] 덤덤하게 되고 협소해진다. 우리의 삶은 갈수록 의미를 상실하게 되고 우리는 타인의 삶이나 사회에 대해 점점 무관심해진다.
- 찰스 테일러, <불안한 현대 사회>





1. 하루키 신드롬

아직도 하루키 신드롬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직까지 하루키는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있으니 말이다. 꽤 오래 전엔 매우 시끄러웠다. 여기저기 저널에서, 문학잡지에서, 글을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 하루키를 표절했다느니, 패러디했다느니 하는 등의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렸고 서로 그 영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참 표피적인 반응들이었다. 왜 우리 세대는 이 일본 소설가에게 열광하는가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팔려나가는 그의 대중적 인기를 폄하하려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이 글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적 완성도나 문학사적 위상을 논하는 것은 아니다. 하루 종일 소모적인 업무에 시달리다 퇴근 후 잠시 시간을 내어 새로 나온 하루키의 소설과 오래 전에 읽고 서가 구석에서 먼지를 먹고 있었던 소설들을 다시 꺼내어 오래 전 독서의 기억을 더듬으며 이 글을 쓰는 샐러리맨이 하루키의 문학적 완성도나 문학사적 위상을 논하는 글을 쓴다면, 그건 하루키 식으로 말해서 투 아웃 만루 상황에 보란 듯이 볼을 던져 타자의 머리를 맞추는 투수와 비슷한 처지가 될 것임에 분명해 보인다.

나에게 있어 무라카미 하루키는 끊임없이 맥주 생각을 나게 하는 몇 안 되는 소설가이다. 이러한 반응은 일종의 공감 같은 것이라 생각된다. 하루키를 읽으면 맥주 생각이 나고 혼자 음악을 들으며 캔 맥주를 마시다보면 우울해지고 까닭 없이 슬퍼진다. 이것이 하루키가 가진 매력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하루키가 가진 한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글은 이 한계를 중심으로 전개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글을 쓰는 이가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명확한 해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하루키를 읽으면서 맥주를 마시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도 혼자. 책 읽다 말고 음악 들으며 맥주를 마시는 것이 아니겠는가.



2. ‘나’의 세계

하루키의 소설은 다들 ‘나’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이는 일본의 사소설 경향에 영향받은 탓이기도 하지만, 공교롭게도 현대의 개인주의를 바탕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나’는 나에 대해서 자세히 말하지도 않고 자세히 아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즉 나는 ‘나’에 대한 공감이나 변호를 하지 않으며 자세하게 ‘나’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무덤덤하게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그런 시선으로 나의 주위를 보여준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1969년 8월 15일부터 이듬해 4월 3일까지, 나는 358회 강의에 출석했고, 54회의 섹스를 했으며, 6,921개피의 담배를 피웠다.
-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중에서

위 문장은 하루키의 주인공들이 바라보는 세계에 대한 특징을 매우 잘 드러낸다. 문학의 전통적 경향에서는 하나의 인물, 하나의 사건에 대한 구체성의 확보는 치밀한 심리 묘사나 상황 묘사로 이루어졌지만, 하루키에게 있어서는 단순한 숫자의 나열이거나 상표들의 제시로 이어진다.

하루키 소설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개인주의는 현대인들의 정신적 태도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러한 개인주의적 태도는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이 아니라, 그래서 자기 자신에 대한 치밀한 묘사나 자기 방어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슬픈 상대주의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외부 세계와 타인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구할 수 없다는 태도는 동시에 나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그래서 하루키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극적인 형태로 ‘나’에 대한 탐구를 시도하지만, 이는 구체적인 세계를 부정하고 환상(관념) 속의 세계 속에 머물러버리는 자폐적 세계를 긍정하는, 극단적인 니힐니즘을 보여주게 된다.



3. 도시적 삶의 양태

스마트하게 작은 번역사무소를 친구와 경영하거나 원고를 쓰고, 명예도, 돈도, 그리고 사회적인 신분도 탐하지 않는, 특별히 무엇인가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 그날 궁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생활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맥주를 마시고, 배가 고프면 빵 가게에 가든지, 적당히 자기 손으로 요리해서 배를 채우고, 때때로 여자와 자고, ... 어쩌면 우아하게까지 보이는 것이 하루키 소설의 라이프 스타일이다.
- <하루키 문학수첩>(문학사상사) 중에서

이러한 라이프 스타일은 도시에 살아가는 이라면 한번쯤 생각해 보았던 삶은 아닐까. 적당하게 쓸쓸하게, 적당하게 자신의 욕구를 채우며, 적당하게 자유를 누리는 삶. 그래서 하루키의 소설 속에서 현대 도시에서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 ‘돈’이 심각하게 다루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돈’마저도 이러한 라이프 스타일 속으로 빨려들어, 살아갈 수 있을 정도의 돈은 쉽게 벌 수 있는 인물이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개인이 등장한다. 어차피 쓸쓸할 것이라면, 어차피 욕구를 채울 것이라면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책임이나 의무 따윈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다. 어디선가에서 던져진 세계이고 그 세계를 벗어날 수 없는 한 개인은 그 세계를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적극적인 형태가 아니라 소극적인 형태로. 이 소극적인 태도를 우아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 하루키는 다양한 문화적 기호들을 등장시킨다. 그러나 얼마만큼 견딜 수 있을까. 끝내 마주하게 되는 건 거대한 세상 속에서 혼자, 스스로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한 개인, 자기 자신일 테니 말이다.



4. 환상 속으로 들어가다

소극적인 태도로만 지탱하기에 이 세계는 무척 견고하고 폭력적이다. 니힐리즘이란 이 세계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태도가 아니라 이 세계에서 도피하기 위한 태도이다. 하루키의 소설 속에서 등장하게 되는 환상적인 사건이나 환상적인 세계-현실 세계와 대비되어 나타나는-는 현실 세계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아니라 도피하기 위해 등장한 것처럼 보인다.

무라카미 문학의 특징은, 사회에 대해서, 혹은 개인 생활의 가장 가까운 환경에 대해서조차도 일체 ‘능동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사회적 관습에서 비롯되는 환경으로부터의 영향엔 저항하지 않고, 마치 배경 음악을 듣는 것처럼 순순히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며, 자신의 파괴된 내적인 몽상의 세계를 짜내는, 그것이 그의 방법입니다.
- 오에 겐자부로, <하루키 문학수첩>(문학사상사) 중에서

하지만 소극적인 태도로 현실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알게 된 소설 속의 주인공은 어떤 적극적인 태도를 마련하기 위해 환상을 등장시킨다는 점에서, 하루키는 자신의 소설이 가진 약점을 분명히 알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환상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 하루키는 여기에 대해 두 가지 태도를 보여준다. 하나는 완벽한 니힐리즘이며 하나는 어정쩡한 현실 세계로의 복귀이다. 전자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이며 후자는 <해변의 카프카>이다.

<해변의 카프카>의 어린 주인공은 자신의 삶이 가진 문제점을 풀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해답은 여행 도중에 꾸게 되는 꿈이거나 마주치는 환상 세계 속에서 이다. 그리고 그가 현실 세계로 돌아오게 되는 것도 환상 세계 속에서 만난 한 여자 때문이다.

<해변의 카프카>가 지닌 한계는 여기에 있다. 하루키의 소설이 가진 소극적인 현실 인식이나 삶의 태도는, 그의 초기 소설 속에서는 현실 부정으로 이어졌다면 최근의 소설 속에서는 과거의 어떤 인물, 혹은 추억에 의해 적극적인 태도로의 전환을 꾀한다는 점이다. 이는 명확한 현실 인식이나 이해에 기반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은 여전히 모르는 상태로 놓여져 있으며 혼자 살아가는 쓸쓸한 인생은 그대로이면서, 그 세계를 살아가게 하는 건 추억이나 기억의 힘이 되는 셈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타인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듯이 우리 스스로에게도 소원해지고 그렇게 고독이 남고 쓸쓸함이 남고 삶의 무의미만 허공에 가득할 때, 하루키의 주인공은 맥주 한 잔을 마시고 여행을 떠나거나 누군가를 만나 방황을 한다. 그리고 방황 속에서 환상 속으로 말려들어가고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깨닫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삶의 의미란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고 그저 살아가야 할지 않을까 따위의 소극적인 것들이다.



5. 그러나, 삶 속의 우리

하루키의 소설은 재미있다. 그러나 이 재미는 하루키의 문장이 가진 재미이기도 하겠지만, 하루키 식으로 우리의 인생이나 우리가 속한 세계에 대해 Cool해지지 못하는 우리들의 불만을 가려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언제나 진행형으로 남아있고 소극적인 태도를 가진 자아가 획득하게 되는 것은 인생의 의미 따위가 아니라 무의미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변명 정도이다.

그렇다면 별 다른 답이 존재하는가? 하루키의 소설이 가진 한계는 현대 문명이 가진 한계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래 별 수 없군’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의미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만큼 슬프고 끔찍한 일도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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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이론 넘어서기
- 서사구조와 그 한계



1.
몇 년전 '내가 네 엄마로 보이니?'라는 말로 듣는 사람을 갑자기 소름 돋게 만든 이야기가 있었다. 승강기 안에서 들리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과 엄마로 변신한 귀신의 아찔한 대화. 하지만 이 이야기를 그저 그런 공포담으로 받아넘기기엔 어딘가 꺼림칙한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어머니마저 믿을 수 없는 존재로 변해버렸다는 사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어느 순간 우리들의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 대신 귀신을 등장시키는 이 공포이야기는 '가정'에 대해 가지고 있던 전통적인 믿음이나 가치가 상실되었고, '부모들'에 대한 아이들의 숨겨진 의식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이 안쓰러운 이야기 속에서 요즘의 우리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고 믿을 수도 없음을, 그리고 그렇게 행동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을 따지고 보자면 이것은 근대 개인주의(Individualism)의 잘못된 귀결이기도 하다. 한 개인의 생각이나 가치관, 또는 자유를 소중히 생각한 나머지 타인의 그것들에 대해서, 혹은 이 세상에 대해서 소홀해지고 그 틈 속에서 개개인들은 '아무도 날 이해하지 못해'라고 중얼거리며 '고독감'에 휩싸인 채 힘겨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음모이론'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탄생한 대중문화의 서사구조의 한 양식에 불과하다. 눈 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믿지 못하고 그 너머에 무언가가 있다고 여기는, 그렇지만 합리적인 연구나 사유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상상'을 통해서만 그것을 향해 가는 서사구조.


하지만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성급하게 말한다면, 혹은 90년대 후반 하나의 유행에 불과한 것이라고 치부한다면 이 음모이론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할 것임에 분명하다. 실제 이러한 '음모이론'은 그렇게 낯선 것이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을 믿지 못하는 이들은 예로부터 있어왔고, 특히 근대(Modern)라는 이 시대는 그러한 이들에 의해 발전을 거듭해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갑자기 '음모이론'이 세간에 등장한 것일까?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 속에서도 '음모'는 있었을 것이고 중세의 상업도시와 카톨릭교회 사이에서도 있었을, 계속 끊임없이 반복되어온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음모이론'이 나올 만한 시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 많았건만, 특히 한국이라면 7-80년대가 그 시기로 적당함에도 불구하고, 하필이면 지금 '뜬금없이' 등장한 것에는 어떤 이유가 숨겨져 있는 것일까?

2.
데카르트는 우리가 이 세상을 인식할 때 '절대적인 확실성' 위에 서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방법적 회의'로 자신의 사유를 전개시킨다. 모든 인식들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리고 결국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이라는 유명한 말로 '의심하는 나의 확실성'을 말한다. 이로부터 '진정한 의미의 근대'는 시작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데카르트가 '확실한(명석 판명한) 인식'을 위해 자신의 감각과 그 감각으로 인식하는 외부세계를 먼저 부정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여기에서 '확실하다'는 것은 '진실하다'는 것의 동어반복이다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는 먼저 외부세계를 부정하고 난 다음 자기자신마저 부정하려고 했지만 '의심하는 나'의 존재는 부정하지 못했고 이 지점에 서서 다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유방식은 이후 전개되는 모든 '근대적 사유'의 기본을 형성하게 되며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또한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원근법(perspective)'이란 데카르트적 사유가 어떤 구조로 되어있는가를 가장 잘 보여주는 표현양식의 하나이다. 하나의 소실점은 '의심하는 나'의 시선을 보여주며 주위의 배경은 그 '나'가 세상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표시해준다. 그리고 우리들은 사물을 배열할 때 '원근법'적으로 위치시키며 또한 그것이 편하고 자연스럽게 여긴다.

실제로 이것은 데카르트 이전 르네상스 고전주의-알베르티, 브루넬레스키, 다 빈치, 미켈란젤로 등-에서 시작되었지만, 철학사에서는 데카르트에 와서 비로소 그 빛을 발휘하게 된다. 문학에서는 라신느, 꼬르네이유의 고전주의 연극에서, 그리고 이후 근대 소설에서의 프로타고니스트(protagonist: 주인공, 제1배우)와 안타고니스트(antagonist: 제2배우)의 대립과 반목, 갈등에서 하나의 중심-프로타고니스트이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실제의, 의심하고 생각하는 나-로 향하는 구조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데카르트주의도 20세기 후반 본격적으로 비판되기 시작한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란 반데카르트주의의 현대적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원근법적 구축물들을 거부하면서 우리들의 인생이란 기하학적이지도, 인과율적이지도, 필연적이지도 않고 오직 '우연'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믿는 사유양식이다. 그래서 전통적인 소설의 정의인 '필연적 허구'는 현대 소설에 와서는 '전적인 공상'이거나 '우연적 허구', 혹은 '서사 그 자체를 파괴하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알랭 로브-그리예나 미셸 뷔토르의 '누보로망'이나 마르께스나 푸엔테스의 '마술적 리얼리즘', 보르헤스의 소설들이 속한다. 이제 데카르트의 믿음은 그간 우리를 속여왔고 진실은 '필연'이 아니라 '우연'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제아무리 우리들의 삶을 기하학적이며 인과율적으로, 그래서 필연적 인생을 살려고 하더라도 그렇게 되지 않고 그렇게 될 수도 없음을 몸 속 깊이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근대적 서사양식은 무너지고 포스트모던 서사양식이 부상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우연' 속에 위치하게 될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조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는데, 그것의 대중 문화적 반영이 '음모이론'이다. 그렇다면 실제 음모이론은 대중문화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3.
토니 스콧 감독의 블럭버스터 『Enemy of the State』의 시작은 지극히 사소하고 지극히 우연적인 계기에서 비롯된다. 통신감청법안을 반대하는 한 국회의원이 보안국 요원에 의해 암살 당하는 장면이 철새를 연구하는 대니얼의 카메라 속에 녹화가 되고 그 사실을 보안국에서 알게 된다는 상황설정에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그리고 변호사 딘은 단지 속옷 가게에서 친구 대니얼을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영문 없이 쫓기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누구에게 쫓기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쫓는 방법이 예사롭지 않고 얼마 뒤 자신의 몸은 온통 도청장치 투성이였고 그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누군가에게 노출당하고, 심지어 자신의 신용카드마저 사용정지를 되고 심지어 그가 최근 누구와 친하게 지내며 과거에는 무엇을 했는가하는 행적까지도 알아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에게 비밀이란 없고 순식간에 그는 '국가의 적'이 되어 쫓기기 시작한다. 이렇듯 현대의 국가 안에서 한 사람의 비밀이나 행동의 자유란 누군가의 감시 아래서만 허용되는 셈이다. 국가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의 과거 경력뿐만 아니라 현재의 여자친구, 신용카드의 비밀번호, 자주 가는 술집까지도 알아낼 수 있다. 이것이 대중매체에서 그렇게 떠들어대는 '정보화시대'의 실체인 셈이다. 인터넷으로 물건을 살 때에도 '비밀번호'나 '신상정보' 누출에 주의해야하고 집의 전화로는 중요한 대화를 함부로 할 수 없다. 올 국회에서 '도청', '감청'에 대해서 논란이 되고 있는 모습에서 『Enemy of the State』가 영화 속 허구로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보통의 국회의원이 네다섯 개의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사실에서 평범한 우리들에게는 권력 앞에서 우리들의 비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을 재확인시켜줄 뿐이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음모 이론'의 서사구조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는가를 대강 알 수 있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개인이 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곤경'에 빠지게 된다. 쫓기기도 하고 신용카드가 정지 당하며 하던 일이 계속 실패하게 된다. 그리고 나중에 알고 보니 거대권력기관의 음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서사구조는 매우 상투적인 것이다. 가령 질 미무니 감독의 프랑스 영화 『라빠르망L'Appartement』은 이러한 '음모이론'의 서사 구조가 애정 영화에서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적절하게 보여준다. 막스와 리자 사이에 끼여든 외로운 사랑의 소유자 알리스는 이 삼각관계에서 '음모'를 꾸미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녀는 의도적으로 막스에게 접근하고 그의 사랑을 유도해내지만, 무모한 사랑의 집착은 이 영화의 결말을 비극으로 이끈다. 리자는 죽고 알리스는 사랑에 실패하게 되며 막스는 자신의 사랑을 고작 추억으로만 간직할 수밖에 없다. 이 영화에서 리자는 앞에서 언급한 서사구조에서의 곤경에 빠지기만 하는 한 개인의 역할을 수행하며 알리스는 한 개인을 계속 곤경에 빠뜨리는 거대권력기관의 역할을 수행한다.

4.
하지만 이 두 영화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거대권력기관의 유/무이고 또한 음모이론의 서사구조가 다른 서사구조들과 구분되는 유일한 차이점 또한 바로 이것이다. 모든 서사들은 실제 현실의 반영임으로 해서 그 서사의 무게 또한 실제 현실의 무게와 비례한다. 그러므로 다른 서사구조들 보다 '거대권력'이 들어가는 음모이론의 서사구조에 힘이 실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하지만 『Enemy of the State』에서 보여지는 힘없는 한 개인과 거대권력기관, 혹은 약자와 강자와 같은 이런 서사 구조는 실제 역사를 통해 부단히 반복되어온 테마이다.

고대 로마의 황제들이 기독교를 박해했을 때, 그것은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음모'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 기존 체제가 잘못된 체제였을까? 여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놀라운 사실 하나는 로마의 현명한 왕들이 초기 기독교 박해에 앞장섰다는 것이다. 서기 161년에 로마 황제가 되어 지금까지 읽히고 있는 『명상록』을 남겼고 이성을 숭상했으며 학식과 교양이 풍부한, 로마의 현명한 황제들 중의 한 명으로 역사에 남아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황제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는 그 당시 가장 유명했던 기독교학자였던 저스트 마틴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을 죽었다. 그렇다면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어떤 이유를 이들을 죽였던 것일까? 지나친 판단일지도 모르나 전체적인 역사의 측면에서 보자면 아우렐리우스는 기독교가 어떤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이미 파악했다고 보는 편이 정당할 것이다. 즉 중세 천 년 동안을, 그리고 근대에까지 종교재판으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그런 종교의 힘이 로마를 집어삼킬 것임을 로마의 몇몇 황제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도들이야 '유일신신앙'만을 주장했을 뿐이지만, 그 주장은 주술적이고 혼성문화적인 로마의 헬레니즘과는 반대되는 것이었고 기존의 문화 체제를 거부하는 반체제 행위였던 것이다.

간단하게 우리는 이러한 행위를 현재 특별한 주술적 의미도 없는 '단군상'을 몇몇 철없는 기독교인들이 훼손하는 것에서 고대 로마인들이 기독교도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에 대해 얼마 정도의 추측은 가능할 것이다. 지금의 단군상을 고대 로마로 비유하자면 '만신전'에 모셔둔 여러 신들 중의 하나였을 테니깐. 이러한 역사적 사실 속에서 그 당시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러한 박해는 요즘의 우리들이 말하는 '음모이론'이였을 테지만 지극히 평범한 로마 시민들의 입장에서는 상황은 정반대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역사적 사실에서 고대 로마의 체제와 기독교도들과 관계에서 설정되는 음모이론의 구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음모이론과는 상황이 틀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면 기독교도들이 원하는 것이 종교적 자유였지만 그들이 종교적 자유를 얻는 것과 동시에 다른 이교도들은 종교적 자유를 박탈해 버렸기 때문이다. 역사적 진실은 그들의 '유일신 신앙'이 아니라 '종교적 자유'이며 천 년 넘게 유럽인들은 그 자유를 박탈당한 채 살았다.


5.
이미 결론이 나있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음모이론'의 유무를 따진다는 것은 매우 가치 없는 작업일 수도 있다. 즉 역사는 언제나 동일한 테마를 반복해왔고 기존의 체제를 새로운 체제를 거부하며 시기하고 어떻게든 자신들의 체제를 지키려고 노력했고 지금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가령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경우에서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했기 때문에 종교재판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으나 정확히 말해서 그 사실은 부분적으로는 거짓말이다. 왜냐면 이미 그 종교재판에 임했던 카톨릭 주교들도 지동설이 사실임을 깨닫고 있었거나 전적으로 거짓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지동설이 사실이 아니라 프톨레마이오스의 학설(천동설)이 사실이라고 생각했다면 이미 코페르니쿠스와 싸워야만 했다. 그렇다면 왜 코페르니쿠스로부터 70년이 지난 후 갈릴레이는 종교재판을 받아야만 했을까? 우리들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듯이 그가 지동설을 주장했다는 것은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다. 문제는 '우주라는 이 거대한 책은 ‥‥‥ 수학의 언어로 저술되었고 그 알파벳은 삼각형, 원, 여타의 기하학적 수식으로서, 그것들 없이는 우주의 단 하나의 단어도 인간에게 이해될 수 없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알지 못한 채 어두운 미로를 배회하고 있다'(『The Assayer』, 1623)라고 말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흔히 말하는 '근대적 방식'으로 이 세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한 최초의 인물들 중의 한 명이었고 그 방식은 종교가 중심에 있던 시대의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상업 시대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에 위기의식을 느낀 카톨릭교회는 그를 종교재판에 세웠고 지동설이 진실임이 명확한 상황 속에서 교황과 주교들은 갈릴레이에게 거짓을 강요했던 것이다. 오직 자신들이 믿는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 여기에서 우리들의 알고 있는 '음모이론'의 구도는 명확하게 맞아떨어진다. 거대권력기관인 '종교집단'과 한 개인인 '갈릴레이'의 갈등. 하지만 우리가 현재 대중매체에서 볼 수 있는 음모이론과 달리 여기에서는 역사가 갈릴레이 손을 들어주었다는 사실을 후세의 우리들은 알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을 명확하게 말하자면 이 사실은 음모이론이 아닌 분명한 역사적 사실의 하나라는 것이다. 이것을 '음모이론'이라고 주장한다면 음모이론은 너무 많아 일일이 따질 수 조차 없어진다. 이러한 일들은 지금 우리 주위에서 너무나도 많이 일어나고 있다. 7-80년대에 한국에서 사회운동을 하다 투옥된 사람들 전부가 이러한 음모이론의 구도 속에 위치하며 잘못된 판결이나 오해로 누명을 뒤집어쓰는 사람들도 모두 이러한 음모이론의 희생자들인 셈이다. 그렇다면 음모이론이란 하나의 이론이라기 보다는 그저 하나의 명칭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진실의 편에 속해있지만, 외면 당하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무마하기 위한. 혹은 진실을 숨기기 위한 거대 권력의 간계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6.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모이론'이 지금 대중들에게 호소력을 갖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그 이유는 세계는 너무 거대화되었고 이 세계 속에서 한 개인은 고작 기계의 부속품에 불과하다는 절망감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길을 걷다 보면 과연 이렇게 많은 이들이 어디에서 걸어나온 것일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개인들마다 그들 나름대로의 삶이 있을 것이고 그들 나름의 가치관이나 행동방식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까지 미친다. 하지만 그 순간 그것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반문하면서 우리들은 눈 앞에 닥친 일상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아는 사람이 몇 명쯤 될까? 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대부분 그 날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고 다시 스쳐지나가더라도 기억에 남아있지 않을 그런 사람들이다. 이 익명성 속에 우리들 자신도 포함된다.

요즘 젊은이들이 '스타병'에 걸리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어떻게든 자신을 널리 알려 익명성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무의식적 갈구. 하지만 그것은 가능할까? 현대인들은 천천히 고립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죽더라도 내 죽음에 신경을 써주는 이들이라곤 '가족'이거나 심지어 '가족'마저도 신경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그 공포이야기는 여기에 해당된다. 이렇듯 한 개인의 죽음은 너무나 사소해서 전체의 입장에서 보자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셈이다. 커다란 회사에서 몇 명이 정리해고를 당한다고 해서 그 회사가 망하지 않듯이 몇 명의 개인이 사고로 죽거나 자살을 하더라도 이 사회 전체가 충격에 휩싸이거나 슬픔에 잠기지 않는다. 사회는 끊임없이 한 개인에게 강요하지만 사회는 그 개인의 인생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한때 데카르트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확실성의 기초로 삼은 '생각하는 나'는 이제 회사에서 쫓겨나고 가족에게서 버림받으며 이 세상과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거나 이런 경우를 당하기 싫으면 이 세계가, 이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맞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얼마 전 '나는 은행만을 위해서 일한 결과 너무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라는 짤막한 유언을 남기고 자살한 30대 가장(家長)의 모습에서 우리들과 관계없는 한 타인의 모습 대신 우리들의 쓸쓸한 자화상만을 확인할 뿐이다. 그리고 이때 음모이론은 90년대 후반의 자연스러운 대중문화의 한 양식으로 우리들 옆에 자리잡게 된다.


7.
우리의 인생이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지 않을 때 우리의 미래를 위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나가는 것뿐이다. 하지만 음모이론은 눈에 보이는 것을 믿지 않는, 그 속에 어떤 음모가 있을 것이라는 의문을 품지만 그 곳에서 정지한다. 이 거대한 세상 속의 한 평범한 개인이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파악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자기가 왜 이런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해서조차 모를 경우가 허다할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 자신의 진실이란 없고 이 거대한 세계 속에 살아남기 위해 껍데기로서만 살아가는 자신만을 발견할 뿐이다. 그리고 음모이론 속에서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을 이 세계의 희생양으로 설정하고 눈 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우리들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대한 권력의 음모라면 최소한 '어쩔 수 없다'라는 포기라도 할 수 있으리라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 발 더 나가 아예 '외계인의 음모'라면 상황은 매우 수월해질 것이다. 그리고는 그러한 음모이론을 다룬 영화를 보며 한 사소한 개인의 영웅적 행위를 보면서 대리만족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절망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음모이론의 서사 구조의 본질을 이룬다. 즉 그것의 시작은 현실 속의 한 우연적 사건이지만 그것을 메워나가는 것은 전적으로 '상상'에 의하는, 전형적인 포스트모던 서사의 한 양식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음모이론이란 거대권력기관의 음모로 희생당하는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것들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영화나 소설 속에서나 그것이 '음모'였다는 것이 결론 날 뿐 지금의 우리들이 겪고 있는 현실 속에서 그것을 알 수 없다. 그래서 현실 속에서의 음모이론은 하나의 현상이나 사건에 대해 그것의 뒤에는 끔찍하고 가공할 만한 음모가 들어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진실이거나 검증가능한 것은 아니다. 왜냐면 현대인들의 고독하고 처량하며 껍데기 인생을 위한 위안일 뿐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누군가가 우리들 침실을 엿볼 수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막겠는가? 법이 한 개인의 완벽한 방패막이 되어 주리라고 믿는 이가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우리들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음모'이며 음모 한 가운데 우리들은 서있다 하더라도 음모이론은 우리들의 곤궁한 삶의 변명을 제공해주며 한순간의 위안이 될 뿐, 그것의 해결책은 아닌 것이다.

모든 포스트모던 서사 양식이 비난받는 지점은 바로 이 지점이다. 현실/가상의 경계를 흐려놓고서 현실의 문제를 가상의 범위(상상의 공간) 안으로 들고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중 문화의 대표적인 서사양식인 영화는 이것을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심지어 친절한 이웃이 악당으로 등장하는 영화에서 우리는 이제 이 세상에서 믿을 사람이라곤 오직 자신 밖에 없다는 사실을 씁쓸하게 확인할 뿐이다. '음모이론'은 늘 충격적이고 돌발적인 서사를 동반한다. 의외의 곳에서 어떤 사건의 진실이 숨어있다는 식의 설정은 믿을 곳이 사라져가는 현대인들이 어떤 상황으로 몰려가고 있는가를 적절하게 보여주고 있지만, 그래서 어떻게 해야하는가에 대해 아무런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것이 원하는 것이라곤 오직 돈을 보기 위해서 더욱 잔인하고 충격적인 영상이나 서사를 만들어낼 뿐이다. 만약 이 세상에 진실이 있다면, 천박한 상업주의와 대중문화들은 우리들에게 '진실'을 보지 못하게 하면서 오직 한 순간의 재미와 쾌락, 달콤한 위안만을 선사할 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것들은 우리들의 처지가 더욱 힘들어져 병적으로 그것에 빠지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왜냐면 우리들이 용기 없고 무력하다는 사실을 그 속에서 잠시라도 잊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대중문화를 향유하면서 우리들은 지금 우리들의 인생이 우리가 진정 원하던 인생이 아니라는 사실, 서로에 대해 무관심해지고 있다는 사실, 심지어 사랑마저도 믿지 못하는 상황을 잠시나마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음모이론의 서사 구조 속에서 '자기 반성'이란 등장하기 않고 오직 자기를 둘러싼 세계의 그 누군가를 향해 있는 것이다.

8.
마르셀 뒤샹이 '변기'를 대중들에게 보여주었을 때, 그가 원한 것은 '과연 미술이란 있는 것인가?'라고 한 번쯤 대중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그래서 기존의 통념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가를 알아주었으면 하고 원했다. 하지만 아무도 예상하지 않은 일이지만 그는 그 작품으로 인해 일약 미술계의 스타가 되었다. 음모이론이 한 번쯤 눈 여겨 볼 가치가 있다면 우리들이 어떤 처지에 놓여있는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뿐이다. 이 세상의 진실을 위해 싸우는 이들이 '음모이론의 신봉자들'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정확히 아는 사람들이듯이 우리는 왜 우리들이 음모이론들 속에 파묻혀 있는지를 우리들 스스로에게 한 번쯤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뒤샹이 '변기'를 보여주면서 그 당시의 대중에게 원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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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d 2012.03.26 20:28 신고

    와시발 14년된글이네

    • 지하련 2012.03.26 21:29 신고

      벌써 14년이 되었나요? ㅡ_ㅡ;; 여튼, 과한 표현은.. ㅋ

21세기의 예술은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 것인가하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그리고 대부분 나의 입에서 정보화시대에 걸맞게 '새로운 테크놀러지에 의한 색다른 예술양식이 되지 않을까요'하는 대답을 기대하지만,기대에 어긋나게도 테크놀러지는 언제나 예술의 일부를 이루어왔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사진과 인상주의 미술과의 관계에서도 사진때문에 인상주의가 등장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언제부터 우리에게 '테크놀러지'에 대한 기대가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그리스 고전 시대에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운명(moria)을 저주하며 스스로 눈을 버릴 때의 그 고통이 사라진 것이 아니며, '안티고네'가 공동체와 개인의 자유에 대해서 깊은 성찰을 보여주었을 때의 그 성찰은 아직도 유효한 것이다.


기원전 만 여년에 그려진 라스코 동굴의 벽화가 아직까지 감동적인 이유는 그것이 예술사 최초의 '자연주의'양식이며 19세기 인상주의 미술의 진정한 선조라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전등을 켜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깊은 동굴에서, 그 어둠과 싸우며 감각에 충실하고 화려한 색채를 보여주었다는 데에 있다. 이 '싸운다'는 것의 의미. 현대 예술에서 '아방가르드(avant-garde)'라는 단어가 등장한 이유는 예술의 역사가 운명과 싸우고 현실과 싸우고 세계 속에서 우리 인간의 진실을 가르쳐주고 있기 위한 노력의 역사임을 현대 예술가들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늘 새로운 기술은 우리의 시선을 잡아당기지만,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그 기술이 아니라 그 기술이 표현하고 있는 우리의 삶인 것이다.


앞으로 예술이 어떤 모습으로 진행될 것인가는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만 정직하게 살펴본다면 그 대답을 구할 수 있다. 경박한 영상들이 범람하고 스타는 제조되며 정치는 언제나 거짓말을 하기 때문에 아예 정치에 무관심해져 버리며 자신의 개성이라는 것도 자기만의 고유한 것이 아니라 온통 소비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뿐인 시대. 그리고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소비된 물품들로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려는 시대.


최근 '몸학'이나 'body politics' 등의 반데카르트주의는 자기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알고자 하는 인간의 소박한 소망이 표현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현대 예술에 있어서도 주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얼마 전의 베이컨이 '일그러진 신체'를 통해 표현하고자한 바는 '육체'란 삶을 냉정하게 꾸려나가게 하는 차가운 이성에 적대적인 것, 그래서 버려야만 하는 흉칙한 것이다. 이것이 모더니즘 예술에서의 '육체'에 대한 생각이다. 하지만 반-모던적인 뒤샹의 <주어진Etant donn s>는 우리의 '이성'이 얼마나 기만적인가를 보여준다. 이브 클라인은 여러 '해프닝'들을 통해 우리 육체를 보다 직접적이고 대담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 또한 우리 육체의 움직임을 사각의 캔버스에 담아낸다. 그리고 그 속에는 차가운 이성의 계산 대신 뜨거운 육체의 분수같이 쏟아오르는 열정이 있다.


하지만 인상주의자들이 전적으로 감각으로 외부의 사물을 바라볼 때 캔버스 위에서 일어나는 일이 '탈가치화', '탈중심화'이듯이 현대 예술이 보여주는 '육체'에 대한 집착은 서로 공유하고 싶어도 공유할 수 없는, 모나드(monad)처럼 각각 독립된 '육체'로만 존재하는 비극을 가져오게 된다. 그래서 하나의 공통된 의견이 존재하지 않고 개개의 독립된 의견들이 서로 충돌하는 양식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현대 예술이 예술의 역사상 가장 다양하고 화려한 양식을 보여주는 것은 하나의 규범이자 신념으로서 '고전주의'이 가장 확실하게 무너진 시대이기 때문이다. '물신숭배(fetishism)'에 대한 경고를 아직까지도 듣고 있지만, 누가 여기에 관심을 기울일 것인가? 지금 세계는 '신자유주의'의 도도한 승리의 깃발 아래 있으며 돈은 우리의 생명을 바쳐서라도 쟁취해야만 하는 그 무엇으로 된 지금, 누가 진정으로 한 개체의 진실에 대해 신경을 써주겠는가?


최근의 '몸(육체)'에 대한 관심이 뜬금없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러한 우리 삶의 진실과 허위에 대한 고민이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들에게 가장 진실한 '육체'를 부른 것이다. 그리고 이 행위의 끝은 허위적인 '사랑' 대신 진실한 '섹스'를, 구역질나는 '공동체적 가치'보다는 진실한 '개인적 가치'를, '절대적 진리'가 아닌 '상대적 진리'로 곧장 달려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다음 세기의 예술 양식이 어떤 모습일까는 답이 나올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는 없다. 번개와 천둥소리에 겁을 먹던 시대가 있었고, 하루 아침에 고전 시대의 문명을 잃어버린 암흑의 시대가 있었으니, 새로운 야만의 시대가 등장한다고 해서 인류의 역사, 예술의 역사에 있어서 낯선 것은 아닌 셈이다.

- 1999년에 중앙대 대학원 신문에 기고한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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