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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서양철학사 History of Philosophy

윌리엄 사하키안William Sahakian(지음), 권순홍(옮김), 문예출판사 





1. 

서로 얽혀있는 것이다.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원불변하는 진리를 찾고 이를 지성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인류의 분투가 필사적으로 이어졌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있는 이 세계가 불완전하고 저기 완전한 세계가 존재하고 이 세계와 저 세계의 관계부터 파악해야 한다. 이것의 역사를. 


철학의 입장이 아닌 예술사의 입장에서 이 곳과 저 곳의 대비는 세계에 대한 비관적 인식의 시작이며, 어떤 절망이, 보이지 않는 슬픔이 이 세계 전반에 물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플라톤적 신비주의가 밀려들 것임을 예감케 한다. 플라톤이 말했던 이데아는 중세의 신으로 변화하고 칸트에게 있어서는 다시 ‘물자체’가 된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인식은 '물자체'에 가 닿지 못한다. 중세의 유명론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바, 보편개념은 이름 뿐이듯, 로크, 버클리, 흄으로 이어지는 영국의 경험론 철학자들은 경험 너머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다고 말하였고 칸트에 이르러, 저 영원불변하는 세계에 대한 관심을 닫아두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이고 옳은 방법이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은 쉽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우리 인간은 위를 향하고 있어서 그런 걸까. 하지만 그것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을 때, 이 세계는 아주 조금 그 쓸쓸한 베일을 벗는다. 그것이 견디기 어려운 슬픔과 포기, 쓸쓸함과 자조, 방관의 자세를 불러올지라도. 



2. 

서양철학사를 읽었다. 십 수 년 전 한창 공부할 때 이후 처음인 듯하다. 그 사이 몇 권의 지성사 책을 읽긴 했으나, 철학사와 지성사는 그 진행 방식이나 언급되는 내용이 매우 상이하다. 철학사는 개별 철학자에 초점을 맞춘다면, 지성사는 지적 세계의 변천에 그 관심을 기울이며 당대의 지적 흐름을 설명한다. 그래서 전자는 철학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는 이들이 읽기 유리하거나 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이 인내를 가지고 읽는 책이 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전자보다 더 폭넓은 주제와 인물을 다루며 좀 더 방대하지만 읽기는 상대적으로 편할 수 있겠다. 내가 이렇게 적고 있긴 하지만, 두 부류의 책을 일반 독자가 소화하긴 어렵긴 매 한가지일 게다. 


윌리엄 사하키안의 <서양철학사>는 다른 철학사와 비교해 다소 평이한 서술로 이루어진다. 딱딱하지 않고 짧은 분량에 철학사의 중요한 쟁점들은 다 거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특징은 19세기 이후의 철학자들에 대한 서술이 책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영미 철학에 대한 비중은 너무 높아서 베르그송에 대한 언급보다 사무엘 알렉산더(Samuel Alexander, 1859-1938)에 대한 설명이 더 길 정도다. 심지어 나는 사무엘 알렉산더라는 철학자를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이것은 이 책의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 될 것이다. 근현대 철학에 대한 여러 시각을 한 눈에 조망해볼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지만, 그것이 영미철학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점에서 편협성을 띄기 때문이다. 



3. 

<서양철학사>라는 제목을 단 책들 중 그 분량이 적은 편에 속하며 단숨에 고대철학에서 중세철학으로, 다시 근대철학으로 넘어가는, 다소 빠른 전개는 독서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중요한 철학자에 대해선 적절한 분량을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어서, 현대 가까이 오기 전까지 저자의 시각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Saint Thomas Aquinas)에 대한 설명은 매우 좋아, 이전에 읽었던 토마스 아퀴나스 개론서보다 더 압축적이면서 그의 철학에 대한 이해를 분명하게 할 수 있었다. 


다만 시중에서 구하기 어려운 책이 된 지 오래되긴 했으나, 재출간을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그 때 구입해서 꼭 읽어보길 바란다. 




(아마존에는 딱 2개의 리뷰가 있는데, 둘다 평점이 다섯개. 그리고 중고 가격은 2.5달러. 그러나 1968년에 출간된 이후 다시 나오지 않은 듯싶다. 하퍼콜린스의 대학교재 시리즈인듯한데, 새로운 책이 나왔고 그 책은 평점이 그다지... )



서양철학사 - 8점
윌리엄 사하키안/문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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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을 바꿔야 할 시기가 지났다. 나를, 우리를 번거롭게 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의 예상보다 빨리 도착해 신경쓰이게 한다. 글자가 흐릿해지는 만큼 새 책이 쌓이고 잠이 줄어드는 만큼 빨리 지치고 상처입는다. 변화는 예고 없이 방문하고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곤 사라지며 흔적을 남긴다. 


처리해야 할 일들이 빠르게 늘어나 거의 매일 노트북을 들고 다닌다. 노트북이 가벼워진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다. 가벼워질수록 이 녀석이 자주 나타난다. 사무실뿐만 아니라, 거리에서, 까페에서, 심지어 집 거실에까지 나타나 나를 괴롭힌다. 메일이 오고 문자가 오고 전화가 온다. 


미팅을 끝내고 사무실에 들어가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근처 카페에 들어와 메일을 확인하고 일을 한다. 그렇게 오후에서 저녁이 되었다. 또 야근이었다.


스트라다 로스터스 STRADA ROASTERS




합정역 인근의 커피숍. 높은 천정. 단순한 인테리어. 직사각형의 공간. 낮은 테이블 맞은 편으로는 높은 선반 위에 그 모습을 뽐내는 커피머신들. 그리고 혼자 샵을 지키는 소녀. 커피를 내리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커피 향이 퍼지고. 





무심코 시킨 아메리카노. 그러나 예상을 뛰어넘는 놀라움. 커피는 매우 근사했다. 견고한 아로마. 고소하면서도 깊이 있는 풍미. 끝 여운 속에서, 일부는 부드럽게, 일부는 거칠게 입 안을 휘감아 돌았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여기저기 전화를 받았고 전화를 했고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잠시 내 삶을 생각했고 길게 그동안 내렸던 내 의사결정들을 후회했다.






스트라다 로스터스의 커피에 매료된 나머지, 드립용으로 분쇄한 커피를 사가지고 왔다. 오래된 칼리타 서버, 드리퍼도 작은 것으로 새로 장만하고 드리핑을 했다. 물줄기는 얇게, 속도는 천천히, 그렇게 빙빙, 빙빙, 돌렸다. 그러고 보니, 내 인생도 빙빙 돌아 여기로 온 걸까. 물줄기는 빙빙 돌아 커피와 섞여 근사한 드립 커피가 되는데, 나는 빙빙 돌아, 돌아, 왜 뒤쳐진다는 생각만 드는 걸까.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다시 읽으며 문학과 연극, 예술과 삶에 대해 중얼거렸다. 중얼거림에 대한 결론은 없고 오직 죽음만이 우릴 기다린다. 그렇게 시간은 흐른다. 칼 야스퍼스였던가. 오직 죽어가는 나만 있을 뿐...이라고. 어쩌면 실존이란 바로 저것이다. 죽음을 향해 내달리는 것. 나와 너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 



햄릿: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참혹한 운명의 화살을 맞고 마음 속으로 참아야 하느냐. 아니면 성난 파도처럼 밀려오는 고난과 맞서 용감히 싸워 그것을 물리쳐야 하는냐. 어느 쪽이 더 고귀한 일일까. 남은 것이 오로지 잠자는 일뿐이라면 죽는다는 것은 잠드는 것. 잠들면서 시름을 잊을 수 있다면, 잠들면서 수만 가지 인간의 숙명적인 고통을 잊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심으로 바라는 최상의 것이로다. 죽는 것은 잠드는 것 ...... 아마도 꿈을 꾸겠지. 아, 그것이 괴롭다. 이 세상 온갖 번민으로부터 벗어나 잠 속에서 어떤 꿈을 꿀 것인가 망설여진다. 

- 셰익스피어, <햄릿>, 제 3막 1장 



하지만 다행이다. 작은 것들은 지친 우리를 위로해주고 있으니. 저 커피처럼. 


혹시라도 합정역에 가게 된다면 저 커피숍에 가길 바란다. 최근 몇 해 동안 마신 커피 중 최고였다. 스트라다 로스터스 Strada Roas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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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선생이다

황현산(지음), 난다(문학동네 임프린트)





"낮에 잃은 것을, 밤이여, 돌려다오."

- 괴테, <<파우스트>> 중에서 





다행이다. 이 책이 많이 팔리고 많이 읽힌다는 건 좋은 일이다. 불문학자인 황현산 교수가 그동안 여기저기 기고한 글들을 모은 이 산문 모음집은 출간 후 몇 년간 많은 이들의 밤을 조용히 채웠을 것이다. 


글들은 대체로 짧고 읽기 편하며 담백하다. 실은 이런 글 읽기도 쉽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는 탓에, 이 책의 유명세는 다소 낯설기까지 하다. 사람들은 어떻게 알고 이 책을 읽었던 것일까. 


나같은 독자에게 이 책은 약간 밍밍한 느낌을 준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이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취향의 문제일 뿐, 이 책의 가치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편안하게 권할 수 있는 산문집이다. 



여기서 낮이 이성의 시간이라면, 밤은 상상력의 시간이다. 낮이 사회적 자아의 세계라면 밤은 창조적 자아의 시간이다. 낭만주의 이후의 문학, 특히 시는 이 밤에 거의 모든 것을 걸었다. 시인들은 낮에 빚어진 분열과 상처를 치유하고 봉합해 줄 수 있는 새로운 말이 "어둠의 입"을 통해 전달되리라고 믿었으며, 신화의 오르페우스처럼 밤의 가장 어두운 곳으로 걸어들어가 죽은 것들을 소생시키려 했다.

- 220쪽 




  





밤이 선생이다 - 8점
황현산 지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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