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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피티Graffiti에 대한 의견은 다양하다. 우리는 이미 장 미셸 바스키아가 그래피티 아티스트 출신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최근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뱅스키Bansky가 이야기하는 그래피티는 기억해둘만 하다. 지난 달 아트인컬쳐에서는 그래피티, 즉 스트릿 아트에 대한 특집 기사가 있다. 우리의 삶이 시장(Market)과 소비(Consumption)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자유로워지기 위한 시도는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 시도의 아방가르드는 예술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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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피티는 미술의 가장 저급한 형식이 아니다. 한밤에 몸을 숨기며 하는 일이며, 주위 어른에게 거짓말을 하며 행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가능한 가장 정직한 예술형식이다. 거기에는 엘리티즘과 허위의식이 없다. 그것은 한 도시의 최고의 벽에 그려져 전시되지만 누구에게도 입장료를 요구하지 않는다. 벽은 언제나 당신의 작품을 알리는데 최고의 장소였다. 우리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그래피티를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수익을 창출하지 않는 것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의 가치 기준이 오직 돈이라면, 당신의 생각은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그래피티가 사람을 놀라게 하고 그 지역 사회의 타락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래피티는 오직 다음의 3 종류의 사람들에게 위험할 뿐이다. 즉, 정치인들, 광고기획자들, 그리고 그래피티 롸이터들이다. 우리들의 이웃과 주변을 진정으로 훼손하는 사람들은 건물을 가로지르며 덮고 있는 각종의 거대한 구호들을 휘갈겨 쓴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물건들을 사지 않으면 우리의 삶이 불충분하다고 느끼게 만들려 하는 버스 광고들이다. 그들은 모든 가능한 공간과 표면에서부터 당신의 얼굴에 이르기까지 그것들이 자신들의 메시지를 외치길 기대한다. 하지만 결코 당신에게 그것에 대답할 권리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들이 이 싸움을 시작했다. 그렇다. 벽은 그들에게 반격할 수 있는 선택의 무기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세계를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들이 위해 경찰이 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이 세계를 보다 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반달족(그래피티를 하는 사람)’이 된다.”
- Bansky, <<벽과 그림Wall and Piece>>, 서문 중에서(이태호, ‘스트릿 아트, 도시 정글에 피는 꽃들’(Art in Culture, 2008년 7월) 중에서 재인용


Bansky : http://www.banksy.co.uk/ 
(* 위 이미지들은 Bansky의 웹사이트에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 비상업적인 사용이기에 그대로 가지고 왔으나, 문제가 될 것으로 삭제될 것입니다. 위 사이트에서 Bansky의 보다 많은 작품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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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하련

ON KAWARA JUL.23, 2008 - AUG.24, 2008    doART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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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의문이지만, 함부로 물어서는 안 되는 문장이 있다. 특히 반데카르트주의가 횡행하는 현대에서 그 문장은 종종 한 개인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이다.

온 카와라(On Kawara)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시간과 인간 존재에 대해 천착한다는 점에서 로만 오팔카(Roman Opalka)와 비교하였지만, 실은 로만 오팔카보다 더 개념적이고 추상적이다. 로만 오팔카는 회화적 형태에 대한 탐구를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로만 오팔카의 페인팅 작품들은 숫자들의 끝없는 나열들이 극도로 절제된 색채와 형태로, 현대 미니멀리즘 회화의 연장선상에 위치해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온 카와라는 이러한 회화적 전통과는 무관하거나 대립적 관계를 형성한다. 이 점에서 온 카와라는 현대 개념미술에 있어서 특별한 작가로 인정받는다. 그는 자신의 흔적을 지우면서 자신이 있었음을 증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자신의 범위를 넘어, 과거에 존재했던 사람들에 대해서, 앞으로 존재할 사람들에 대해서까지 그 존재들의 증명 방식에 대해 탐구한다. 하지만 시간 앞에 유한한 우리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시간과 싸울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온 카와라에게 있어서 그 싸움의 방식은 우리가 있었던 한 순간의 시간을 그대로 옮겨놓는 방식이 된다.

사간동 두아트서울(doART Seoul)에서 열리고 있는 이번 전시는 한국에 온 카와라가 처음 소개되는 전시이면서 난해하기로 유명한 현대 개념미술이 어떤 것이며, 그 난해함 너머로 우리 현대인들의 존재 본질을 탐구하는 현대 예술의 한 극점과 만날 수 있다.

아래의 글은 두아트서울의 전시 안내문에서 인용한 것으로, 현재 두아트서울에서 전시되는 작품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다.


I WENT
1968년 6월 1일부터 1979년 9월 17일까지 작가가 이동한 경로를 지도 위에 상세히 기록한 작품. 1년이 한 권의 책을 이루어, 총 12권으로 구성된다.

I MET
1968년 5월 10일부터 1979년 9월 17일까지 작가가 만나 대화를 나눈 사람들의 이름을 매일 매일 기록한 작품. 1년이 한 권의 책을 이루어, 총 12권으로 구성된다.

I GOT UP
1968년 5월 10일부터 1979년 9월 17일까지 작가가 매일 아침 일어난 시각을 기입한 엽서를 두 명의 지인에게 보낸 엽서를 모은 작품. 1년이 한 권의 책을 이루어, 총 12권으로 구성된다.
I GOT UP은 엽서에 본인의 메시지를 직접 쓰지 않고 고인으로 찍어 보내는 데 의의가 있는데, 이는 최대한 개인적인 궤적을 남기지 않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로 보여진다. 이것은 작가가 다른 작품들의 모든 글을 타이핑으로 입력하며, 또한 일본을 떠난 이후, 세계 공통어라 일컬어지는 ‘에스페란토’어를 사용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ONE MILLION YEARS
1969년에 제작되어 이전 백만년(998031 BC)을 타이핑한 작품과 1993년 이후 백만년(1001980 AD)의 날을 타이핑한 작품. 1969년에 제작된 백만년의 과거편은 “그동안 살다가 죽은 사람들 모두를 위하여”라는 헌사로 시작되며, 1981년 제작된 백만년의 미래편은 “마지막 생존자를 위하여”라는 헌사로 시작된다. 그러나 두 작품 사이에 설정된 12년이 무엇을 뜻하거나 지시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PURE CONSCIOUSNESS
1998년 이후 계속 진행되어오는 프로젝트로, 1997년 1월 1일부터 7일까지 7개의 날짜그림을 세계 각지의 유치원에 설치한 후 어린이들의 일상을 작품과 함께 촬영하는 조그마한 책자로 만들어낸다. 현재까지 총 17개 프로젝트가 진행되었으며 그 도시들은 Sydney, Reykjavik, Abidjan, Shanghai, Leticia, Sisli-Istanbul, Avignon, Lund, Madagascar, Bad Blankenburg, London, Thimphu, Bequia, Toronto, Yusuhara Cho, Inari, New York이다.


8월 24일까지 하는 이번 전시를 놓치지 말기를 바라며, 온 카와라의 한국 전시를 진행한 관계자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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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공지]
- 중간에 인용된 글의 저작권은 '두아트서울'에서 가지고 있습니다.
- 맨 위의 이미지는 두아트서울 홈페이지에서 가지고 왔으며, 저작권은 '두아트서울'에서 가지고 있습니다. 아래 두 이미지는 두아트서울에서 발간한 ‘온 카와라 한국 전시 도록’을 제가 직접 찍어 올린 것입니다.
- 온 카와라 전시 작품은 두아트서울 홈페이지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doartseoul.com/en/exhibitions/introduction.asp?ExhibitionsPK=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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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하련

Korea Art Summer Festival 2008
국내 Art Fair의 새로운 장을 연다


최근 몇 년 간 한국 미술 시장은 보기 드문 성장을 구가하였다. 많은 작가들의 작품들이 거래되었고 예술옥션(Art Auction)회사가 주목의 대상이 되었으며 많은 갤러리들이 국내 시장을 벗어나 베이징, 상하이, 뉴욕 등지로 진출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성장이 한국 미술을 풍성하게 만드는 모든 작가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이는 미술 작품을 구입하려는 일반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이유로 인해, 오는 31일(목)부터 서울 대치동 학여울역 SETEC(서울무역전시컨벤션센터)에서 열리는 ‘2008 코리아 아트 섬머 페스티벌(Korea Art Summer Festival 2008)’이 새삼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올해 첫 발을 내딛는 ‘2008 코리아 아트 섬머 페스티벌’은 한국 미술의 지나친 상업화와 고급화를 멀리하면서 작가와 애호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즐겁게 미술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경제적인 가격으로 좋아하는 작품을 구입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연일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대형 아트페어들은 많은 돈을 남길 수 있는 (요즘 인기 있는 중국작가나 몇몇 유명 외국작가)작품들에게만 집중하고 있다. 미술에 대한 사랑의 순수함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투자와 수익률만이 전부인 아트페어가 되어가고 관람객들에게 이를 유도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한국 미술시장이 성장함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예술가(특히 국내작가)들은 이러한 성장의 물결 속에서 철저하게 소외되고 있는 것이다.

코리아 아트 섬머 페스티벌은 일반인들이 미술작품투자자가 되기 전에 미술애호가(Art Lover)가 되기 바라고 이를 유도하기 위해 준비되었다. 그래서 자본(수익을 목적으로 하는 화랑과 아트페어 주최 측)이 중심이 되는 미술시장이 아닌 예술가가 중심이 되어 미술문화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예술가 중심의 Art Fair’로 기획되었고 미술에 대해 전문적인 식견이 없어도 편안하게 미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수 십 명의 전시 설명자들이 배치하여 관람객들에게 작품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작가들의 참가 비용을 최대한 낮추었으며, 작품이 판매되었을 때의 발생 수익을 모두 작가들이 소유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정책으로 경쟁력 있는 작품 가격을 만들었으며 작품을 관심 있는 관람객들이 상대적으로 경제적인 가격에 구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다.

오는 31일(목)부터 8월 4일(월)까지 열리는 2008 코리아 아트 섬머 페스티벌은 일반 관람객들에게는 미술 감상과 작품 구매가 사치가 아니라, 미술을 사랑하고 아끼는 행위임을 알릴 수 있는 보기 드문 자리가 될 것이다.


Korea Art Summer Festival 2008의 특징
-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참가비
- 천 여 명의 컬렉터와 아트딜러들와의 교류
- 작품판매에 따른 모든 수익이 작가에게 귀속
- 상세한 작품설명과 소개를 위해 행사장 곳곳에 전시설명자(AF Coordinator)를 배치하여 보다 즐거운 전시 관람이 되도록 함. 


행사 개요
- 명칭: Korea Art Summer Festival 2008 (KASF 2008)
- 일시: 2008년 7월 31일(목) ~ 8월 4일(월)
- 참여작가: 엄선된 200여명의 국내작가 작품 2000여 점 전시
(평면작업 작가:170 명, 입체작업 작가: 60명)
- 장소: SETEC (서울무역전시컨벤션센타) 전관 -서울 대치동 학여울역
- 오픈닝 초대일시: 7월 31일 (목) 오전 11시


Korea Art Summer Festival 2008
주최. ㈜경향전람
주관. ㈜경향전람, ㈜코에듀
후원. SK텔레콤, 페라리/마세라티공식수입원 fmk CORP, 임페리얼 세부 팰리스 리조트, 에이스침대,노블레스미디어인터내셔날, 아트온티브, 구띠에커피, 아트뉴스, 동아TV, 하나은행, BAOK
문의. 02-796-0567  KASF 2008 조직위원회   
www.kasf.co.kr   info@kasf.co.kr


주요 작가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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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중, 빛-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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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배, 꿈꾸는 비비, 장지 위에 채색, 112 x 145.5cm,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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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은, Untitled 6, 장지/청먹, 60x60cm,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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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 김옥진, 명량문소견鳴粱門所見, 화선지/수묵담채, 135x136cm,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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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혜, A rainy day, 91.7 x 61cm, oil on linen,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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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미, 바라보기-나비, mixed media, 146 x 97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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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선상, 목어(木魚), 장지(長紙).토분(土粉).석채(石彩).분채(粉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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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실, Solitude Standing - work no.4, fired clay_ glazed, 168x30cm,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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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하련

살아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내 심장이 뛰고 내 혈관에 따뜻한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일까, 아니면 이성을 만나 열정적인 키스를 나누고 있을 때,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걸까? 그렇다면 살아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의 인생 전체는 일종의 가상이거나 허위일 지도 모른다. 우리의 인생, 그리고 그 인생을 둘러싼 모든 사건들이 시뮬라크르일 지도, 나란 존재하지 않고 나란 누군가의 눈에 비친, 누군가의 생각과 언어에 의해 형성된 어떤 픽션일 지도 모른다. 더 절망적인 사실은 내 것이 아닌 인생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늘 내가 생각했던 것은 어긋나고 내가 한 말은 오해되고 내 글은 무시되고, 내 사랑이 번번히 막다른 골목의 시궁창에 빠지게 될 지라도, 나는 내 인생을, 내 존재를 어떻게 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내가 자살하더라도 나라는 가상의 존재는 세상 어딘가에 남아있다는 것이다. 르 클레지오의 소설의 한 문장 처럼, 내가 죽고 내가 알던 모든 사람들이 죽었을 때야 비로소 무로 될 수 있는 것이다.

도대체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이 가상이든, 허위이든, 살아있는 자는 그 살아있음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 로만 오팔카의 작업이 날 감동시키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그의 행위는 단순하고 명확하다. '나는 살아있다. 나는 여기에 있었고, 여기에서 숫자를 적고 있었다.' 시간에 대한 탐구는 곧바로 자기 존재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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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만 오팔카는 숫자를 캔버스에 적는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국내의 몇몇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얼마 전에는 사간동 학고재에서 전시되기도 한 세계적인 작가이다. '숫자를 적는 행위' 자체로 주목을 받았지만, 실은 단조로운 색채와 병렬적으로 이어져 있는 숫자들의 나열이 가지는 조형적 아름다움도 무시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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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작품과 더불어 그는 자신의 사진을 찍는다. 일련의 사진들은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면서 살아있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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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대한 탐구는 현대 미술의 강박증과도 같아 보인다. 하지만 거대해진 세계 앞에서 한 개인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혹시 지하철 속에서 이 무수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지? '개인주의'가 유행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익명성 속에 자신의 몸을 숨긴 개인일 뿐이다.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결국 우리는 실패할 것이고 그렇게 죽을 것이다. 현대의 비관주의는 자신의 개별적이고 독창적인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즉물적인 방식을 택하도록 강요한다. 그래서 그 속에는 자신의 감정이나 주장, 일상이 드러나지 않고 객관적인 소재를 택해 '그저 (살아)있었음'을 표현하도록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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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에 온 카와라는 로만 오팔카와 비슷한 지점에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의 방식은 더 극단적이고 파괴적이다. 그는 날짜를 적는다. 하나의 캔버스에 0시부터 24시까지, 꼬박 하루동안 하나의 날짜 작품을 완성시킨다. 완성시키지 못할 때는 이를 파기한다. 그리고 그 날의 신문을 아래에 배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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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재미있는 것은 매일 엽서를 보낸다는 것이다. 엽서의 내용은 언제나 정해져 있다. 'I GOT UP AT 11.10 A.M'

로만 오팔카가 자신의 (시간 위의) 삶을 캔버스와 사진 속으로 넣는다면, 그래서 그 순간만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증명한다면, 온 카와라는 일정 시간 동안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통보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에서 한 인물이 이야기하듯, "천만에! 모두 꾸며낸거야. ... ... 그는 존재하지 않아. 그가 하는 행동도 말도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아. ... ..."라고 하여도 무방할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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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도로 제한된 작업 스타일은 '위태위태한 현대인들의 존재 상실의 위기감'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일 지도 모른다. 실은 우리들은 이미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다. 자신의 개성이나 독창성 따위는 날조된 것에 가깝다. 어쩌면 라크스의 말대로 우리의 생각이나 행동 패턴은 우리의 물적 토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실제 우리와는 무관한 어떤 생각과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그렇다면 과연 나란 무엇이고 살아있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혹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맞부딪혀야 할 상대는 시간(Tim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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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Million Years  
On Kawara, 1999
2 volumes, each 2.012 pgs., leatherbound  
(EDITION/SET: 500 num & 60 num. & sign.)
h: 14.5 x w: 10.5 cm / h: 5.7 x w: 4.1 in  
http://www.artnet.com/artwork/424415142/424301160/one-million-year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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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nardo da Vinci
Mona Lisa
1503 - 1505, Oil on cottonwood, 76.8 x 53 cm, Musee du Louv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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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nardo da Vinci
Mona Lisa (Det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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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vard Munch
Puberty
1895; Oil on canvas, 150 x 110 cm (59 5/8 x 43 1/4 in); Nasjonalgalleriet (National Gallery), Os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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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zio Raffaello
The School of Athens
1509, Fresco, width at the base 770 cm, Stanza della Segnatura, Palazzi Pontifici, Vatican


A.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나 라파엘로의 <아테네학당>을 모르는 이는 없다. 그리고 실제 작품을 보고 놀라워한다. 하지만 이런 가정을 해보자. 미술사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하는 어느 현대인이 난생 처음 <모나리자>나 <아테네학당>을 보았다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리고 이 두 작품과 함께 뭉크의 <사춘기>를 보여준다면. 한 번 이런 상황을 상상해보자.

1. ‘현대인’은 누구인가? 남편과 아이를 회사로, 학교로 보내고 아파트에 홀로 남은 중년의 여성. 또는 밀린 일들을 처리하다가 상사의 눈치를 피해 잠시 건물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는 회사원. 혹은 매번 입사원서에서 떨어지는 20대. 우리에게 ‘현대인’이라는 어떤 모습인가? 우리에게 ‘현대’란 과연 어떤 시대인가? 그것은 좋은 시대인가, 나쁜 시대인가?

2. 현대인은 <모나리자>를 보고, <아테네학당>을 보면서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마찬가지의 이유로 <사춘기>를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다. 도리어 <사춘기>를 싫어할 지도.

3.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들이 있다.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이 있다. 대부분의 뛰어난 현(근)대 작품들은 보는 이를 부담스럽고 고통스럽게 한다. 하지만 위대한 고전 작품은 아니다. 그래서 고전 작품을 위대한 것이고 아프게 하는 현(근)대 작품은 그렇지 않은 것일까?

4. 그렇다면 어느 작품이 우리를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일까? 마음이 흔들리게 하고 가슴을 아프게 하는 감동은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B.
‘고전Classic’이라는 단어는 로마 시민 5계급 중 가장 높은 계급을 의미하는 ‘Classis’에서 유래하였다. 이 단어의 형용사형인 ‘Classicus’는 높은 수준의 작가나 그의 작품을 뜻하였으며 이것이 굳혀져 ‘고전Classic’이 되었다. 그리고 13세기, 14세기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들이 잃어버렸던, 잊고 지냈던 그리스, 로마 문명에 대한 호기심을 키우기 시작한다. ‘르네상스Renaissance’라는 단어가 뜻하는 ‘재탄생’은 바로 그리스, 로마의 재탄생을 의미했다. ‘고전’이라는 단어가 요즘의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때였다. 그래서 그리스적이거나 로마적인 양식을 그 당시의 이탈리아 사람들은 ‘고전적’이라고 표현하였다.

하지만 우리가 예술의 역사에서 ‘고전주의’라고 하였을 때, 그리스 고전 시대, 기원전 4세기 - 5세기의 작품들은 포함되나, 그리스, 로마의 다른 시대의 작품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였을 때의 ‘고전’이라는 단어가 미술사에서는 그 쓰임을 다르다. 높은 작품성을 가지고 있는 오래된 과거의 작품들을 모두 ‘고전’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예술사에서 ‘고전주의’는 구성이나 색채 측면에서의 양식이면서 동시에 정신적 양식(태도)를 의미한다. 그래서 ‘르네상스 고전주의’나 ‘신고전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며, 일부 모더니즘 양식의 작품을 두고 ‘고전적 현대’라고 하는 것이다.

고전주의의 양식적 특징은 낭만주의와의 대비 속에서 선명하게 이해될 수 있다.

C.
모든 고전 작품들은 감동적인가? <모나리자>나 <아테네학당>이 보는 이의 마음을 쥐고 흔드는가? 예술에 대한 지식을 쌓기 전에 예술 작품을 보고 감동받을 수 있는 태도를 먼저 가져야 한다. 가장 좋은 태도는 <모나리자>를 보고 손을 떨면서 감동 받았을 그 당시의 이탈리아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이탈리아 사람이 되지 않는 이상, 이 작품들이 현대인에게 현대의 다른 작품들이 주는 바의 그런 감동을 주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전혀 다른 시대의, 전혀 다른 영혼이 만든 작품이기 때문이다.

고전 작품에 대한 지식, 모나리자 부인이 누구이며, 아테네 학당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안다고 해서 이 두 작품이 숨기고 있는 르네상스 고전주의의 정신적 태도를 알지 못할 것이며, 왜 이 두 작품이 위대한 고전 작품으로 남아있는지를 알지 못할 것이다. 도리어 뭉크의 <사춘기>를 보면서 마음 아파하고 왜, 어떻게 뭉크의 작품이 다 빈치나 라파엘로의 작품과 다른가를 알고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예술 작품에 있어서 ‘변하지 않는 교과서’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그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떤 작품이나 법칙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우리들의 마음이 될 것이다.

예술의 역사를 공부하기 전에 먼저 익혀야 할 것은 현대의 무수한 작품들을 보고 흔들거리는 자신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하우저의 말대로 ‘감동을 주는 한, 그것이 바로 현대 작품’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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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하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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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ward Hopper
Summer Interior
1909, Oil on canvas, 24 x 29 inches,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New York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따갑고 건조한 여름 햇살이 방 한 가운데로 내리꽂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몸을 일으켜 세울 정신적 의지는 지난 밤에 사라져버렸다. 꿈일 지도 모른다. 아니면 환상이거나. 만일의 경우 그것은 최악의 현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지나가버린 것들이며 앞으로 오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이다. 너무 가지런한 실내가 도리어 비현실적이다.

뜨거운 여름날 벌어지는 대부분의 일들은 비현실적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 자신에게 오래 전부터 빈혈이 있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잠시 후 세찬 소나기가 달구어진 대지를 식힐 것이라고. 하지만 그녀는 두렵다. 이 순간이 지나는 것이.

교묘하게 환상과 현실 사이에 육체를 걸치고 있는 그녀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딱딱한 유화 물감에 자신의 영혼을 붙이고 환상도 아니고 현실도 아닌 어느 공간 속으로 들어가, 멈추어 버렸다. 어쩌면 시간의 틈새로 들어가, 공간의 틈새로 들어가 영원히 자신을 격리시키는 것이 우리 시대의 가장 바람직한 삶이 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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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하련

오래 전에 공저로 미술사 책을 낸 적이 있었다. 다시 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먼저 블로그에 초고 노트를 정리해 올릴 계획이다. 2~3년 하다 보면, 책을 낼 수 있는 모양새를 갖출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Introduction to ‘History of Western Art’


1. 예술(Art)이란 무엇인가?
  art(영어), ars(라틴어), techne(희랍어)

  - 예술의 가치는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 ‘예술의 역사’가 예술 이해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2. 다양한 시대의 미술 작품과 우리들의 감동이 가지는 연관관계
  - 우리는 어떤 작품을 고전이라고 말하는가?
  - 과연 미술교과서는 우리를 감동시키는가?

3. 기술과 예술은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 보이는 것(형태)과 보이지 않는 것(정신)
  - 예술의욕(Kunstwollen)

4. 미술사, 미학, 미술비평은 서로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 미술사: 여러 다양한 역사들 중 하나에 대한 역사
  - 미학: 보이지 않는(추상적인/관념적인) 어떤 것에 대한 탐구
  - 미술비평: 전시되고 있는 작품에 대한 언어(meta-language)

5. 플라톤(Platon)과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os) 
  
 - 플라톤: 변하지 않는 세계에 대한 염원. 이분법적 세계관은 비극적이고 슬픈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함.
 
  - 헤라클레이토스: 이 세상은 변화함. 운동을 긍정. 그러나 그는 거만한 귀족주의자.
 
  - 사상(세계관)과 자신의 삶(혹은 예술작품)은 어떤 관계를 맺는가?

6. 고전적 세계관과 낭만적 세계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7. 서양미술사의 시대 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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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하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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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ta Kim: On-Air
로댕갤러리


사진이 무엇일까. 그렇다면 사진에 대한 글은 무엇일까. (이 질문은 내가 예술에 대한 글을 쓰지 않는 순간까지 나를 괴롭힐 것이다.)

어느 화창한 봄날, 미래에 대한 불안과 예술에 대한 사랑, 또는 호기심을 데리고 찾아간 로댕갤러리 안에서 나는 (현대)사진이 표현할 수 있는 바의 어느 극점을 발견하였다. 김아타의 이전 작업들, 뮤지엄 프로젝트나 해체 시리즈, 그 외 인물 사진 시리즈를 보았지만 내 시선을 끌지 못했다. 분명 그 때도 그의 작업들은 비평적 지지를 얻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사진 속에서 그의 카메라가 가진 즉물적이며 파괴적인 속성이 싫었다. 나는 좀더 우아한 방식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사진들은 피사체를 즉물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아픈 사진들이었고 필름에 옮겨진 피사체나 그 피사체를 바라보는 관객을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 오직 사진만 존재했고 사진 속의 세계가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사진 속의 사람들은 박제된 동물처럼, 혹은 어떤 인위적 목적에 의해 조장되어진 사물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카메라가 가지는 폭력적 속성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로댕갤러리에서 본 그의 최근 작업들은 놀라웠다. 지금까지도 나는 그의 이전 작업들과 온-에어 시리즈와의 연관관계를 선명하게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이전의 작품들에 대한 내 반감과 온-에어 시리즈에 대한 감탄은 선명한 금을 그으며 내 안에서 서로 대비되었다.

그리고 로댕갤러리의 전시는 끝났고 이 글은 어떻게든 정리해야만 하는 내 습성에 의해 씌어지는 것이지, 김아타 사진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이나 예리한 비평적 접근은 아니다. 도리어 찬사에 가깝다. 정말 온에어 시리즈는 대단했다. 시간과 운동에 대한 본질적인 접근이나 조망이 카메라라는 매체를 통해 아주 탁월하고 아름답게 표현될 수 있다는 사실에 찬탄을 금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 철학이 운동을 부정하고 정지만을 추구했던 것은 운동은 시간의 축에 따라 이루어지며, 그것은 끝내는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어떤 종말, 어떤 불안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점에서 우리의 삶도 그렇다. 플라톤이 영원한 세계를 이야기하였을 때, 그것은 우리 삶에 뿌리 깊이 박혀있는 어떤 불안을 없애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 불안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추동시키는 원동력이었다. (그리스 예술과 철학이 우울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김아타의 온-에어 속에서 시간과 운동은 매력적인 소재이면서 우리의 삶,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의 본질적 구성에 대한 어떤 통찰을 전해주는 듯하다. 그것은 바로 시간과 운동을 넘어서 있는 어떤 공간에 대한 것이다. 그것인 일종의 멸망이고 어떤 폐허이며, 보는 이들에게 무한한 노스탤지어를 자아낸다.

회화가 추구하는 평면성이 시간을 무시하고 공간성만을 추구하는 어떤 것이라면, 김아타의 카메라는 시간을 받아들이면서도 변하지 않는 어떤 공간성을 추구하고 그것일 발견해낸다는 점에서 놀랍기만 할 뿐이었다. 올해 상반기 보았던 여러 전시들 중에서 최고의 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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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하련

불멸의 화가 반 고흐
07. 11. 24 - 08. 3. 16, 서울시립미술관


사람들의 눈에 나는 무엇이냐? 없는 사람이거나 특이하고 함께 살 수 없는 사람이다. 삶의 목표도 없고 이룰 수도 없는 사람, 한 마디로 형편없는 사람이지. 좋다, 그것이 사실이라 할 지라도 나는 그 특이하고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의 정신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내 작품을 통해 보여주겠다.
- 반 고흐(1882년 7월 21일)

*    * 

미술관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늘 ‘반가움’보다는 ‘신기함’을 먼저 느끼는 건 쓸데없는, 나의 과민한 반응일까. 혹은 반 고흐의 작품이 우리를 감동시킨다는 사실보다 2008년 우리 주변에 있을 또 다른 반 고흐를 떠올리게 되는 건 무슨 까닭일까.

보통의 사람들이 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전시를 보러 가고 그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건 너무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늘 가슴 한 켠이 아리는 것은 순수한 미술 애호가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무분별한 대중주의만 늘어나는 것 같아서다.

한 쪽에서는 상품성 있는 전시만을 기획하고, 과감하게 홍보 마케팅에 투자하고, 비싼 입장료와 대기업 후원으로 이루어진 전시는 줄을 서야만 들어갈 수 있고, 또 다른 한 쪽에서는 작품성, 예술성보다는 돈이 되는 화가의, 돈이 되는 작품인가 아닌가부터 먼저 살피고, 돈이 된다 싶으면, 먼저 사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하긴 자본주의 사회이니, 전시나 작품 구매 모두 돈이 되어야만 움직일 수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이걸 당연하다고 적는 나는 얼마나 타락한 것인가!).

하지만 다른 한 모퉁이에서는 몇 년 아껴가며 모은 돈으로 개인전을 열어, 작품 한 두 점 팔기 어려운 가난한 화가들도 있다. 또는 아예 그림 그리기 포기하고 돈 버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한국의 세잔, 한국의 반 고흐가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너무 공상적이고 터무니없게도, 보통의 사람들이 반 고흐의 작품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그가 쓸쓸하게 자살하던 그 순간, 유럽의 그 누구도 반 고흐가 이렇게까지 유명해지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유명해지자 마자, 반 고흐는 신화가 되었고 전설이 되었다. 그것이 현실을 더욱 비참하고 슬프게 만든다.

나는 사람들이 이미 유명해져 버린 예술가나 이미 돈이 되는 작품에만 열을 올리지 말고, 순수하게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하는 소원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엔 반 고흐의 아이리스는 너무 처절하고 슬프고 아름답기만 하다. 저 화사한 색채의 율동 속에서 숨겨진 절망감이란! 하긴 세상이 원래부터 이렇게 생겨먹은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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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하련
밤낮이 거꾸로 되었다기 보다는, 매우 불규칙해졌다. 가령 어제는 밤 10시에 자서 새벽 3시에 깨어나지만, 오늘은 새벽 4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오전 늦게까지 잠자리에 못 일어난다는 식이다. 일이 밀렸고 스트레스는 쌓여간다. 운동을 꾸준히 하기로 마음 먹었지만, 어떻게 될 지 두고 볼 일이다.

사무실에서 노트북을 가지고 왔다. 택배를 받을 것도 있고 출퇴근 시간을 아껴보자는 생각에서 였다. 하지만 의외로 집에서 시간 관리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북마크된 여러 웹사이트를 돌아다니다가, 에드워드 호퍼 전시 소개 페이지와 마주하게 된다. 미국적 경험(American Experience)의 재료와 구조(grain and texture, 적절한 번역어가 생각나지 않는다.)라는 표현이 마음에 든다. 그런데 에드워드 호퍼가 그렸던, 그 20세기 초반의 미국적 경험은 이제 전 세계적 경험으로 바뀌어져 있다.

고독 속에서 자기를 바라보는 것. 그건 너무 잔인한 일이다.
그런데 우린 모두 지금 그러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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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ward Hopper. Nighthawks, 1942. Friends of American Art Collection.

에드워드 호퍼(1882-1967), 소설가 존 업다이트가 묘사하기를, "정적이 흐르고, 고요하며, 금욕적이면서 빛나고, 고전적인" 예술의 창조자인 그는 가장 오랫동안 이어지며 대중에게 인기있는 20세기 미국 화가들 중의 한 명이다. 무척이나 비밀스러웠던 이 중요한 예술가, 호퍼는 고독과 자기 반성(introspection)을 자신의 작품의 중요 주제로 만들었으며, 미국적 경험의 재료와 구조의 한 부분으로 찬미했다.  (전시 소개 중에서 번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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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ice at Night, 1940
Oil on canvas
56.4 x 63.8 cm
Walker Art Center, Minneapol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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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p Suey, 1929
Oil on canvas
81.3 x 96.5 cm
Collection of Barney A. Ebsworth


출처: http://www.artic.edu/a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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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하련


'위작' 문제는 전 세계적으로 꽤 골치 아픈 사건이다. 얼마 전 고양 아람누리 미술관에서 열린 '모딜리아니와 잔느의 행복하고 슬픈 사랑'전의 잔느 에뷔테른(Jeanne He’buterne)의 작품이 이번 사건의 주인공이다. 미술사가이면서 모딜리아니 전문가인 Christian Parisot는 잔느 에뷔테른의 작품을 위작했다는 혐의로 프랑스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잔느 에뷔테른은 생전에 작품을 팔지 못한 것으로 여겨지며, 현재 그녀의 작품 대부분은 조카의 아들인 Mr. Prunet에게 상속되었다. 2000년도에 그는 잔느 에뷔테른의 첫 대형 전시인 'Modigliani and His Circle'을 위해 60 점의 드로잉을 빌려주었다. 이 전시의 큐레이터가 바로 Christian Parisot였다.

그 이후 Christian Parisot가 2002년 스페인에서 기획한 순회전에 Mr. Prunet이 작품 대여를 하지 않고, 이 일로 이 두 사람의 사이가 틀어진다. 그리고 Christian Parisot이 기획한 순회전은 계속 진행되다가, 세르비아 전시 때 Mr. Prunet가 잔느 에뷔테른 작품이 위작이라고 고소함으로써 중단된다.

결국 잔느 에뷔테른 작품을 대부분 상속받은 Mr. Prunet가 작품을 대여해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Christian Parisot이 기획한 전시가 계속되었고, 사람들에게 잔느의 작품들이 계속 보여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법부에서 선임한 전문가 Gilles Perrault는, 이번 위작은 크게 두 그룹으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베니스 전시 때 공개되었던 작품들의 카피이고, 나머지는 '페스티쉬'(pastiche)라고 밝혔다. 재판 문서에서 그는 드로잉 작품은 손으로 그려졌으나, 잔느의 솜씨가 아니며, 페스티쉬 작품들은 잔느 에뷔테른 뿐만 아니라 모딜리아니, 브랑쿠시, 카라(Carra), 피카소에게서까지 조합해 제작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Christian Parisot은 The Art Newspaper에게, "잔느가 그러한 스케치를 만들었던 때는 그녀가 15, 16, 또는 17살 정도 되었을 무렵이었으며, 이 때 그녀가 잘 알고 있는 화가들의 작품을 모방하는 것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 사건도 결국 법정에서 가려질 테지만, 잔느 에뷔테른의 작품에 대한 위작 소송은 꽤 흥미로운 일이다.

<관련 기사>  
Modigliani scholar faces trial for fraud
Christian Parisot is accused of faking drawings by the artist’s lover Jeanne Hebuter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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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하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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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inging Butler by Jack Vettriano


잭 베트리아노, 꽤 흥미로운 화가이다. 간단하게 잭 베트리아노를 정리해 보았다.

* * *
 

한 남자가 있다. 1951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그는, 16살 무렵 더 이상 학업을 지속시킬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고, 이후 광산에 들어가 기술자로 일하게 된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고, 그가 21살이 되던 날, 곱게 포장된 생일선물 하나를 여자친구로부터 받는다. 그것은 작은 수채물감 한 세트. 이후 혼자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던 그는 마흔이 다 되었을 무렵, 폭발적인 인기로 영국 미술계에 등장한다.

현재 그는 살아있는 미술가들 중에서 가장 수입이 많은 몇 명 중의 한 명이 되었다. 그의 작품을 소장한 이들 중에는 잭 니콜슨(영화배우), 알렉스 퍼거슨(축구감독), 마돈나(가수) 등이 있으며, 그의 대표작인 ‘The Singing Butler’는 13억 원에 가까운 금액에 팔리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대중적인 인기와는 반대로, 미술 비평가들은 그를 예외적인 인물로 취급하며 높은 평가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미술 비평계의 차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 세계에서 가장 대중적인 화가로 인정받고 있다.

잭 베트리나노의 작품은 오래된 영화의 한 장면처럼, 흐릿하지만 강렬한 인상으로 보는 이들의 시선을 바로 당기며, 한 때 열정을 불태웠던, 아름다운 사랑의 흔적을 더듬는 듯, 애잔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극적인 색채의 대비와 인물들의 동적인 움직임이 녹아있는 그의 작품은 평범한 이들과의 시선을 맞춘 채, 미술이 가져다 줄 수 있는 평온한 위로를 건넨다. 

* * *

잭 베트리아노의 작품을 한정적으로 캔버스에 프린팅한 작품을 가지고 있어서, 얼마 전까지 은행에서 전시했다. 위 글은 전시할 때의 설명문이다. 꽤 낯간지런 글을 적어 좀 쑥스럽긴 하지만.

잭 베트리아노는 대단한 예술성을 가지고 있거나, 실험적이거나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지도 않는다. 잭 베트리아노는 '딱 그만큼'인 화가이다. 나는 이 점이 굉장히 마음에 든다. 그는 대중화가이다. 그는 시장에서 팔리는 화가이고, 그의 작품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포스터를 계속 찍어낸다. 캔버스에 프린팅된 작품은 멀리서 보면 원화처럼 보일 정도다.

그의 작품은 키치가 아니라 대중 예술이다. 어쩌면 이것도 일종의 '현대적 정직함'의 표현이 아닐까. 솔직히 잭 베트리아노의 작품을 계속 보고 있으면, 너무 재미있다.

미투(
http://me2day.net) 친구 pink-lotus님께서 이 작품을 선호하셔서 아래와 같이 사무실에 있는 잭 베트리아노의 작품을 찍어 올린다. (* 한정 수량으로 제작된 캔버스 프린팅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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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하련

화사한 색채들의 모험
- 김보선의 ‘꽃’에 대하여




김용섭(yongsup.kim@yahoo.com)
A&B Gallery - 한불문화교류협회 ‘내-안에’ 전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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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예술가들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추상화에 대한 자연스런 욕구는 눈에 보이는 세계 이면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본질이나 실체에 대한 깊은 호기심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는 눈에 비친 세계가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초기 모더니스트들이 눈이라는 감각기관에 비친 외부 세계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는 시도들이 감각지각에 비친 구체적인 외부 세계의 추상적이고 반-감각적인 본질을 향해갔다는 점은 모더니즘이 가지는 여러 아이러니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후 현대 미술을 수놓고 있는 추상 미술들은 우리가 보고 만지고 경험하는 외부 세계의 보이지 않는 본질을 끊임없이 묻고 탐구한 결과들이다. 김보선의 ‘꽃’ 연작들은 이러한 연장 선상에 위치한다.

‘꽃’에 매혹된 현대 예술가들은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꽃’을 성적인 메타포로 표현한다. 이 작가들은 사랑의 소리를 속삭이지 못하는, 사랑의 몸짓을 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피었다가 지는 과정을 반복하는 꽃의 농염한 색채와 형태를 시각적으로, 감각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그 속에 인간이라는 동물의 순수한 성애를 반영한다. 생식기로서의 꽃은 인간의 손길을 통해, 자신의 내밀한 모습을 노출시킨다. 종종 우리는 이런 작품 앞에서 얼굴이 화끈거림을 느끼곤 한다. 이러한 표현 속에서 식물의 일부로서의 ‘꽃’은 식물의 ‘생식기’로서의 매혹을 드러내며, 급격하게 동물화된다.

하지만 김보선의 ‘꽃’은 성적인 메타포도 아니고 ‘생식기적 특성’에 주목하지도 않는다. 아예 이를 추구하지 않는다. 도리어 만개한 꽃이 가지는 농염한 색채와 형태를 캔버스 여기저기에 흩트려 놓는다. 꼭 사랑을 추구하려는 꽃의 뜨거운 열정을 숨기려는 훼방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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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다소 실험적인 표현을 통해 생식기로서의 꽃이 아닌 그
이전의, 더 본질적인 꽃의 형태, 그 형태 속에 포함된 색채와 운동성을 드러낸다. 생식기로서의, 성적인 메타포로서의 꽃이 아니라, 꽃이 가진 형태, 또는 조형적 특성, 그리고 색채, 그 색채가 시간, 공간 속에서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꽃이 가지는 조형적 특성을 분석하고, 다시 재조합하고, 다시 분석하는 과정을 통해 작가 고유의 꽃이 탄생한다. 눈 앞에 존재하는 꽃의 이면에 숨겨진 생명체의 일부가 이 세계 속에서 존재하는 다양한 방식을 보여 주기 위해, 그래서 김보선의 꽃은 다채로운 색으로 여기저기 흩어지고 움직이며 한 자리에 머물러 누군가를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캔버스 안 여기저기를 오가며 꽃 스스로 자신의 본질을 찾아 헤매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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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정해져 있는 삶 따윈 없다. 실존주의적 회의감이 깊게 물들어 있는 상대주의 시대 한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 삶의 목적이 무엇이며, 우리 삶의 이정표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방황만을 거듭할 뿐이다. 우리가 탐구를 깊이 하면 할수록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우리가 모르고 있는 세계의 거대함뿐이다.

이는 예술 탐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꽃은 생식기의 기능을 수행하고 싶어하지 않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혹은 우리가 그 기능이나 존재 의미를 알지 못하는, 진한 색채들의 얇은 이파리들의 공생 관계일 수도 있다. 혹은 줄기로부터 뻗어 나와, 그 식물 내부에서부터 탈출하려는 몇몇 세포들의 반란일 수도 있다.

작가는 꽃으로 하여금, 사람들이 바라는 바의 어떤 꽃의 이미지를 버리게 한다. 김보선의 꽃은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꽃이 아니다. 작가는 꽃으로 하여금 전혀 다른, 새로운 생명체로 보이게끔 만든다. 붓이 아닌 나이프로 작업한 작가의 의도는 여기에 숨어 있다. 굵고 강렬한 터치는 이제 막 모험을 시작하는 하나의 세포가 움직이는 듯한 모습과 닮아있다. 캔버스 속의 꽃은 여러 색채의 파편들로 분열해, 사람들 앞에 서서 모험을 바라며, 세상을 향해 운동하려는 어떤 몸짓을 보여준다.

그 꽃의 몸짓 앞에서 사람들은 사소하고 작은 감정적 혼란을 경험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것은 꽃이 가진 화사한 색채들의 모험이 낯설고 도발적으로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