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파아란 영혼

소설 +122


<<Axt>>를 가끔 사서 읽는다. 얼마 전에 한 권 샀다고 생각했는데, 작년 겨울에 산 것이었다. 그 사이 시간이 이렇게 흘러가버렸다. 아. 


데이비드 밴David Vann이라는 미국 소설가의 인터뷰가 실렸다. 그의 번역 소설을 보긴 했지만, 읽진 않았다. <<Axt>>라는 잡지가 출간되었을 무렵 자주 사서 읽었으나, 지금은 거의 사지 않는다. 사지 않는 이유는 단순하다. 사놓고 읽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다른 읽을 것들이 너무 밀려있기 때문에. 좋은 잡지이긴 하지만. 


데이비드 밴이라는 소설가와의 인터뷰 중 흥미로운 몇몇 구절을 옮기고 메모해둔다. 흥미로운 관점이다. 풍경 묘사와 가족 이야기. 소설을 쓰는 이들에겐 꽤 유용한 조언이 될 수도 있겠다.  


"나는 소설을 쓸 때 항상 인물과 장소에 집중한다. 인물의 정신은 대체로 풍경 묘사를 통해 그려지는데, 이는 내면의 삶을 발견하는 간접적인 방법이다. 책의 후반에서는 아버지가 주변의 숲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를 통해 아버지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했다. 또한 소설에서 인물은 드라마를 통해, 즉 엄청난 압박에서 벗어날 수 없을 때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말과 행동을 하는지를 통해 드러난다. 우리가 어비지에 대해 아는 것은 대부분 아들과 주고받은 말과 행동을 통해서다." 


"나는 학생들에게 "가족을 제단에 올려놓고 도끼를 휘두르라"라고 말한다. 나는 그리스 비극을 쓰는데 그리스인들은 가족이 우리를 만들고 망가뜨린다는 사실을 2500년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현대의 치유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우리가 어떻게 해서 망가졌는지 이해하지 않고서는 다시 온전해질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해보라. 책은 의식이 없지만 살아있으며 이 책이 무언가를 하려 한다고 말이다. 작가의 첫째 임무는 책이 하려는 일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다. "


"영국과 미국의 문학 시장은 정말이지 전혀 다르다. 영국에서는 주목받는 책의 범위가 넓으며 다양한 주요매체(BBC 프로그램, 여러 신문과 집지, 문학 축제 등)에 서평이 실린다. 미국은 인구가 더 많지만 문학 시장은 더 협소하다. 문학 작품을 다루는 매체는 놀랄 만큼, 부끄러울 만큼 적다. 서평으로 책 판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신문은 오직 하나, <<뉴욕 타임즈>> 뿐이다. <<워싱턴 포스트>>같은 신문에서 내 책을 극찬했는데도 미국 내 판매량에는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애석한 일이다."


"내가 물려받은 유산은 두 가지다. 나는 그리스 비극을 쓰는 신고전주의 작가다. 내가 그리는 인물은 무의식적이고 통제할 수 없는 행동을 하며,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입힌다. 또한 나는 미국의 풍경 묘사 전통에 속해 있다. 외부의 자연 풍경을 묘사하면서 인물의 내면을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기본적으로 풍경을 통해 그리스 희곡을 쓰는 작가다. 풍경 묘사 글쓰기의 모범을 보여주는 최고의 작품으로는 코맥 매카시의 <<핏빛 자오선>>, 애니 프루의 소설, 매릴린 로빈슨, 토니 모리슨, 플래너리 오코너, 캐러신 앤 포터 등이 있다. 하지만 매카시와 프루는 드라마와 비극에서는 죽을 썼다. 오코너는 인물 간의 극적 갈등을 그리는 솜씨가 최고다." 

- <<Axt>>(2017. 11/12)  중에서 





Comment +2


행복한 그림자의 춤 Dance of the happy shades

앨리스 먼로 Alice Munro (지음), 곽명단 (옮김), 문학에디션 뿔, 2010


앨리스 먼로. 작가로 데뷔한 직후의 사진으로 추정된다.



두 번째로 읽은 앨리스 먼로의 단편소설집. 

1968년에 출간된 그녀의 첫 단편집. 

'옮긴이의 말'에서 옮기자면, '여러 해 동안 출판사에서 퇴짜를 맞았다'는 소설집.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녀에게 문학적 명성을 안겨준 책이다.

젊었던 그녀가 쓴 단편들이 모인 책이다.


로이스는 치맛자락을 떨어뜨리고 손바닥으로 내 따귀를 후려쳤다. 나를, 아니 우리 둘을 건져준 따귀였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가 한바탕하고야 말겠다고 내내 벼르고 별렀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 156쪽 


이 짧은 문장만으로 이 소설집, 혹은 이 단편, <태워줘서 고마워 Thanks for the Ride>를 전달하긴 어렵겠지만, 보이지 않는 내일보다 지금, 당장, 오늘 밤을 쓸쓸하게 보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젊음들이 서로의 아픔을 드러내지 않은 채, 보이지 않는 갈등을 해소하는 장면으로는 최고가 아닐까. 


1950~60년대 캐나다의 작은 도시들, 어쩌면 그보다 더 작은 마을들을 배경으로 앨리스 먼로는 누구나 겪게 되는 일들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전에 읽었던 그녀의 단편집에선 우리의 관계에 집중하고 있다면, 이 소설집에선 성장하면서 결국 홀로 부딪히며 극복하게 되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었다. 


어쩌면 먼로의 경험담이 묻어나온 건 아닐까. 그래서 상대적으로 다른 소설집에 비해 더 쓸쓸하고 외롭고 거칠고 황량하다. 누군가의 죽음을, 누군가가 내 곁을 떠나가거나, 그래서 결국 실수하게 되고 후회하고 아파한다. 적당한 착각과 위로가 있기도 하지만, 그것이 거짓임을 아는 까닭에 독자들은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알거나, 알게 될 것이다. 


아니면 누군가는 자신의 옛 기억을 떠올릴 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말인데, 가끔 대도시에서 태어나 대도시에서 살다가 대도시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이들의 감수성이 궁금하기도 하다. 앨리스 먼로의 감수성은 지방 중소 도시의 그것이다. 한 두 명만 건너면 다들 아는 어떤 공간. 그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 결국엔 포기하거나 잊거나 모른 척하거나, 그러면서 인생이 내미는 손을 잡고 살짝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석양을 행복하게 바라본다고나 할까. 결국 아프지만, 아팠지만, 지금 옆에 누군가 있긴 하니까. 앨리스 먼로의 소설이 가진 장점이다. 그래서 다 읽고 난 다음 쓸데없이 우울해지거나 시니컬해지지 않는다. 어쩌면 어느 소설보다 더 산뜻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지도 모른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하면서. 








행복한 그림자의 춤 - 10점
앨리스 먼로 지음, 곽명단 옮김/뿔(웅진)


Comment +0



면도

안토니스 사마라키스 Antonis Samarakis (지음), 최자영(옮김), 신서원, 1997 




전후 그리스 소설이 번역된 것이 드물었던 탓에 1997년에는 꽤 주목받았던 듯싶은데, 지금은 거의 읽히지 않는 듯 싶다. 번역자 또한 소설을 전문적으로 번역하는 이라가 아닌 탓에, 번역된 문장이 매끄럽게 읽히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마라키스를 한국에 소개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찬사를 받아야 할 것이고 사라마키스의 소설은 다소 거친 번역 속에서도 유쾌하고 감동적이며 왜 뒤늦게 이 소설을 읽었을까 하는 후화까지 하게 만든다. 


전후 그리스의 대표적인 현대 소설가. 그러나 그리스는 고대의 그리스가 아니다. 마치 이집트처럼. 서구 문명의 시작이었으나, 20세기 그리스는 격랑의 현대사 중심에서 벗어나오지 못한 채 침몰과 구조를 번갈아 가며 겨우겨우 버티고 서 있다. 그 현대사를 고스란히 겪고 이를 소설로 쓴 안토니스 사라마키스. 그는 20세기 초반 유럽을 비극적으로 물들인 전체주의를 극도로 혐호하며 문학의 가치와 자유의 중요함을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 책 <<면도>>의 초반 몇 편의 단편들보다 후반 단편들 - 정치적 메시지가 분명하고 노골적인 - 이 훨씬 감동적이다. 아마 그의 생애 전반이 전체주의와 독재 정권과의 갈등과 싸움의 연속이어서 그럴 지도 모르리라. 


디미트리스가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묻힌다. 모두들 달려들어 그를 에워쌌다. 그를 가슴으로 껴안는다. 먼저 그의 어머니 엘레니. 너무 꼭 껴앉은 탓에 저고리 단추 하나가 수갑에 끼어 떨어져 나갔다. 그 다음 모두들, 모두 같이, 어떤 이는 안고, 어떤 이는 입맞춤하고, 어떤 이는 말을 건넨다. 

"우리 디미트리스!"

기쁨이 가득한 이런 장면을 나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 환희에 찬 인생.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춤을 춘다. 모두들 무엇 때문에 오늘 저녁 여기 모였는지를 잊어버렸다. 당연히 내가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모두 잊어버렸다. 내 마지막 장례를 위해 이리로 왔다는 것을. 내 아들 디미트리스가 내 것을 훔쳐가 버렸다. 그런데 나도 나 자신을 잊어버린다. 내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모두가 나누는 기쁨에 동참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본다. 육칠 미터 저만치 떨어진 곳. 저 쪽에 서서 그를 쓰다듬고, 웃고, 눈짓으로 가슴으로 말을 건넨다. ... 잘하는 일이다! 나는 괜찮다. 나 에브리피디스는 아무 것도 아니다. 하나의 보잘 것 없는 주검일 뿐. 그러나 저기 저 디미트리스. 내 아들 디미트리스는 삶. 바로 그것이다. 삶의 아름다움이요, 희망이다. 언젠가 우리의 삶이 더 나은 것으로 탈바꿈하고 조금이라도 덜 비인간적이 될 것이라는 희망. 

- 137쪽 ~ 138쪽 


반정부 투쟁을 하다가 잡혀들어간 아들. 그 아들이 수갑을 찬 채 뒤늦게 아버지의 장례식에 온다. 아버지의 관 뚜껑은 닫히지 않았고 사람들은 기다리던 그 젊은이를 반갑게 맞이한다.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슬픔은 사라지고 미래의 희망이 싹튼다. 다시 구치소로 가게 될 터이지만, 디미트리스는 괜찮다. 이미 죽은 아버지는 그 아들을 보며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도 잊은 채 기뻐한다. 그가 삶이며 희망이라며. 짧은 단편의 한 부분이나, 사마라키스의 소설 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어쩌면 안토니스 사라마키스의 삶도, 문학도 그랬는지도 모른다. 전후 그리스 소설가들 중에서 가장 널리 해외에 알려진 작가이기도 한 그는 현대 유럽의 참여 문학이 어떤 것이 알려준다. 실존주의 소설가들이 개인의 고독과 사색에 파묻혀 결국엔 누보로망으로 이어졌으나, 안토니스 사라마키스는 우리가 왜 사는지, 우리의 미래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이름없는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드러낸다. 


그래서 그는 삶의 가치와 죽음에의 거부를 주장한다. 


"아무 가진 것이 없다 해도, 세상 어딘가에는 당신이 조금이라도 덜 불행하게 해주고, 조금이라도 외로움을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 때문에 당신은 존재할 가치가 있으며, 아무도 아무것도 누구도 당신을 부정하지 못한다!"

"당신은 스스로 죽을 권리가 없다! 당신이 조금이라도 덜 불행하게 해주고, 조금이라도 외로움을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있다. 단 한 사람이라 해도 그는 당신을 삶으로 끌어낸다. 삶과 동시에 타인과 관계를 맺게 한다. 단 한 사람이라 해도 그는 당신이 삶의 가치를 확인하고 의지할 곳이다. 이 단 한 사람이야 말로 당신에게 살 가치를 부여하는 탯줄이다. 고통과 진부함, 걱정과 슬픔과 기쁨이 엇갈리는 지금 이 곳의 일상 속에서 말이다. 그렇다. 당신은 죽음을 택할 수가 없다! 죽음을 택할 권리가 없는 것이다! 한 사람과 또 한 사람, 두 사람만 있으면 삶은 의미를 갖는다. 두 사람만 있으면 [죽음을] '거부'할 가치가 있다."

- 안토니스 사마라키스, <<거부>> 중에서 


그리고 대화를 나누며 앞으로 전진해야 하고 문학은 가치있다고 주장한다. 어쩌면 문학의 내부로 침잠해 들어간 현대 문학의 주된 경향에 반발하고 전통적인 견지에서의 문학의 가치를 말한 보기 드문 소설가였던 셈이다. 그는 정치적 투쟁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의 삶을, 고통을, 미래를, 사랑을 이야기한다. 이 소설집의 어느 단편에서는 자살을 결심한 어떤 이가 끝내 자살하지 못하는 에피소드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 이유는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건물 바로 밑 거리를 가득 메운 반 정부 시위대 때문이기도 하고 그 아파트의 이웃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는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고 그 연결은 한 개인의 운명이 그 한 사람의 몫이 아닌 여러 사람들과 연결된 어떤 것임을 사라마키스는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문학은 지고의 위안이다. 인간의 광기와 생존 경쟁의 거칠고 암담한 지평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진부한 일상과 사회생활의 혼선과 갈등 속에서 문학은 오로지 위안을 가져오고 신비로운 환희로 우리에게 용기를 심는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타인과의 사이에 깊디깊은 이해의 다리를 잇는 것이다. 독자듥돠 말이다. 문학은 대화의 시작이다.

가치있는 문학은 독백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독자와의 연결고리다. 문학은 친구가 내미는 손이다. 따라서 응답 없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문학과 예술의 마력은 타신의 손, 독자의 손이 당신 손에 뜨거운 우애로 와닿을 때 나타난다. 문학은 밤의 메이라이며 암속 속에 외침이다. 메이라가 없으면 모든 것은 무의미하며 미완성일 뿐이다. 

- 234쪽 


책 말미에 실린 사라마키스의 자서전은 현대 소설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문학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며, 우리 삶은 어떻게 흘러왔는가를 한 번 돌이켜보게 만드는 글이 될 것이다. 헌책으로는 쉽게 구할 수 있으니, 구해서 읽어보길 권한다. 그리고 새로 출간된 신간으로도 구할 수 있다. 나 또한 사라마키스의 다른 소설들도 읽을 생각이니까. 




안토니스 사라마키스 기념 우표. (현대 그리스 문학에서의 사라마키스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아래 책은 역사 관련 학술서적을 전문적으로 내는 신서원에서 1997년에 전집 형태로 번역 출판된 이후 절판되었다. 그리고 2006년에 다시 <<손톱자국>>이라는 제목으로 그림글자라는 출판사를 통해 두 권으로 다시 출간되었고 지금도 새 책으로 구할 수 있다.  

면도 - 8점
안토니스 사마라키스 지음, 최자영 옮김/신서원



Comment +0




브로크백 마운틴 Close Range: Wyoming Stories 

애니 프루Edna Annie Proulx(지음), 조동섭(옮김), media 2.0,2006년 





잭이 말했다. "이 생각을 해봐. 나도 이번 한 번만 말하겠어. 있지. 우리는 같이 잘 살 수도 있었어, 진짜 좆나게 잘. 에니스, 네가 안 하려고 했어. 그래서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브로크백 마운틴 산 뿐이야. 거기 몽땅 다 있어. 우리가 가진 건 그것 뿐이야. 씹할 그것 뿐이라고.(...)" - 345쪽 


 


소설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브로크백 마운틴>은 앞서 읽었던 거칠고 고통스러우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끝까지도 비명을 지르지 않는 사람들의 군상들과 겹쳐져, 위 문장 쯤에선 눈물이 나올 정도다. 브로크백 마운틴 뿐이라니! 


아마 한국에서 특정 지역을 소재로 애니 프루처럼 소설을 썼다면, 소설이 나오자마자(아니면 대다수가 책 따윈 읽지 않으니 그냥 묻힐려나) 작가에 대한 무수한 인신 공격과 소설에 대한 판매 금지 신청, 소설의 문학성이나 완성도 따윈 이야기할 틈 없이 무참히 공격당하다가 소설가는 끝내 절필 선언까지 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법정까지 끌려가 탈탈 털릴 게 분명하다. 해당 지역 사람들이 소송을 걸거나 고발이 들어오거나 자신의 옳고 강직한 소신과 신념을 드러내기 위해 검사가 수사를 진행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만큼 이 소설집은 처음부터 끝까지 폭력이 난무하고 (대체로) 여성과 장애인은 인간 대접 받지 못하며 끔찍한 방식으로 대상화된다. 심지어 동성애 장면은 너무 노골적이어서 그런 묘사가 있다는 걸 정부 관계자들이 안다면 19금 소설로 포장해 판매하라고 할 것이다. 소설들 속에선 다치는 건 늘 있는 일이고 가난은 벗어날 수 없으며 망해가는 목장이거나 트레일러가 그들의 거주지다. 


소설을 읽으면서 묘하게 한국과 겹쳐지는 이유는 문학과 현실의 경계는 어디일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특정 실존 인물이나 특정 지역 사람들에 대한 문학적 해석과 재창조는 어떤 것일까. 하긴 이 소설을 읽은 미국 사람들이 와이오밍 관광청에 전화를 해서 브로크백 마운틴이 어디에 있는 거냐며 묻는다고 한다(하긴 나도 브로크백 산이라, 어디 있는 거지 하면서 구글 맵에서 찾았으니). 그런데 실제 존재하지 않는 산이다. 


결국 우리는 꿈을 꿀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잭은 죽고 그의 유언은 브로크백 마운틴에 유골이 뿌려지는 것이었는데. 그 산은 실제론 없다. 


11개의 단편들로 이루어진 이 소설집은 거칠고 황량한, 거대한 자연 앞에서 순응하며 인생과 싸우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진창The Nud Below>에서 다이어몬드는 어머니에거 '아버지가 누구냐'며 따지지만 끝내 알지 못한다. <목마른 사람들People in Hell Just Want a Drink of Water>에서는 끝없는 호기심과 모험, 도전으로 와이오밍 밖으로 나간 라스가 교통사고로 인해 고향으로 돌어와 죽는 이야기다. 실은 너무 끔찍한 이야기라서 적지 않는 편이 좋겠다. 하긴 이 소설집에서 어느 것 하나 끔찍하지 않은 이야기가 어디 있으랴. 


이안 감독의 <브로크백 마운틴>은 보지 않았으며 그저 애니 프루의 소설이 궁금했을 뿐이다. 읽는 내내 불편했고 끔찍했으며 이 소설집을 읽는 한국 독자들이 궁금했다. 이렇게 폭력적인 세계를 너무나도 태연하게 묘사하는 애니 프루에 대해서 어떻게 여길까. 이 소설이 한국어 쓰여져 출판되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더구나 특정 지역, 특정 사람들을 등장시키며 일반화시킨다면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 이런 식의 단상이 꼬리를 물었다. 결국 내 이야기가 아니라 네 이야기라 찬사를 거듭하는 건 아닐까. 트레일러나 목장에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까닭에, 노골적으로 높게 평가하는 건 아닐까. 트레일러나 목장 옆에서 지내는 여자아이이거나 성인 여성이거나 장애인이 아니기 때문에, 새로 번역되어 나온 건 아닐까. 


가끔 한국이 싫어지곤 하는데, 그건 너무 이중적인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렇지 않아 보이는 이들까지 한 패가 되어. 


결국 우리가 기댈 곳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브로크백 마운틴 뿐이다. 이 세상에선 금지된 꿈이, 용납되지 못할 사랑이 시작되고 화려하게 꽃 피우고 소리없이 묻힐, 저 산 뿐이다. 








브로크백 마운틴 - 10점
애니 프루 지음, 조동섭 옮김/Media2.0(미디어 2.0)

내가 읽은 책이다. 절판되어 구할 수 없다. 그래서 읽는다면 아래 책으로.  



브로크백 마운틴 - 10점
애니 프루 지음, 전하림 옮김/f(에프)





애니 프루(1935 ~ )



소설을 다 읽고 난 다음 참고로 읽으면 좋을 기사들. 








Comment +0



칠드런 액트 The Children Act 

이언 매큐언 Iwan McEwan(지음), 민은영(옮김), 한겨레출판



살만 루시디(Salman Rushdie)가 추천한 이언 매큐언의 <칠드런 액트>. 소설을 읽는 내내, 루시디가 추천하는 몇 권의 책 안에 들 정도는 아닌데 하는 생각하지만, 다 읽고 난 다음 그가 왜 이 소설을 왜 추천했는지 알게 된다. 


몇몇 이들은 이 소설을 영국의 아동법 등의 여러 법률에 근거한 법과 종교의 문제로 해석하지만, 그건 잘못된 해석이다. 판사가 나오고 소설의 많은 장면들이 법정이거나 법과 관계된 사람들로, 혹은 종교와 관계된 이야기가 나온다고 해서 이를 법과 종교의 문제, 그 갈등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면, 모든 이들이 탁월한 소설 비평가가 될 것이다. 


결국 읽는 이에 따라 소설에 대한 해석은 달리 되어, 터무니없이 낮게 평가되거나 비상식적으로 높게 평가되기도 한다. 나에게 이 소설은 그간 읽어왔던 소설들 중 최고는 아니었지만, 살만 루시디에게 이 책은 최고의 소설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살만 루시디에게는. 


소설은 두 개의 이야기가 서로 교차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피오나와 잭과의 관계. 피오나와 애덤의 관계. 이 두 관계는 서로 만나지 않지만, 이 소설의 큰 두 축이다. 하나는 성관계가 없는 중년의 판사와 교수 부부 이야기이며, 하나는 신앙으로 인해 수혈을 거부하는 한 소년과 수혈 집행 명령을 내리는 판사 이야기다. 두 이야기는 관계 없는 듯 하지만, 하나의 주제를 공유하고 있다. 이 두 이야기는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과 그 환경 속에서 개인은 어떻게 영향을 받고 어떤 사고를 하고 어떤 행동을 하며 궁극적으로 어떤 자유를 가지는가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던진다.  


소설은 우아한 몸짓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그 속에는 의외로 심각한 주제를 담고 있는 셈이다. 살만 루시디는 이걸 알고 있었다. 그는 우리가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나이를 먹으며 어떻게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는가에 대해 이미 경험했다. 집을 나간 잭이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오고 피오나가 다시 잭을 받아들이게 되듯, 애덤은 수혈을 받게 한 피오나의 결정에 대해 찬사를 하지만, 결국 자신의 의지로 수혈을 거부한다. 이는 수혈 거부에 대한 법적인 기준에 질문이 아니다. 결국 '이것 아니면 저것'(키아케고르)이며, 우리가 종국에는 어떤 행동과 결정을 내리게 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내외적으로 무수한 갈등과 고민, 방황을 하지만, 이렇게 아니면 저렇게 할 수 밖에 없는 현실. 


아마 살먼 루시디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무수한 이슬람 사람들을 떠올렸을 것이며, 자신의 무모한 신앙으로 지하드를 감행하는 이슬람의 젊은이들을 생각했을 것이다. 서방에서 태어났건 동방에서 태어났건 상관없이, 결국에는 그들의 조상이 믿었고 그들 가족이 지키고 있는 그 신앙을 따라, 그 자신 스스로의 종교적 신념과 자유의지로 다시 이슬람 근본주의를 향하는, 일부는 지하드를 벌이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이 소설이었던 셈이다. 아마 루시디는 이 소설 속에서 피오나가 애덤에게 수혈을 명령하는 판결문을 읽으면서 울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 판결문은 동시에 애덤이 결국 수혈을 거부하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법은 최소한의 장치일 뿐이고 결국 우리가 기대게 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의지일 뿐이다. 그것이 이해가능한 것이든 이해불가능한 것이든. 소설은 결국 우리의 무수한 시도들은 애초에 예정되었던 어떤 행동에 대한 변명만 만들어줄 뿐임을 말한다는 점에서 꽤 비극적이며 소설의 시작으로 다시 돌아온다. 피오나와 잭은 같은 집에 사는 부부이고, 애덤은 예정된 대로 수혈을 거부한 채 죽는 것이다. 이 소설을 다 읽은 독자들은 소설을 덮고 무수한 상념에 빠질 것이지만, 그 뿐이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고 여러 사람들의 조언을 듣는다고 해서 우리가 탁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건 아니다. 결국 우리 자신의 문제이며, 우리의 자유 의지가 결정하게 될 것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 고민하기 전에, 조언을 듣기 전에 우리는 이미 이것, 아니면 저것을 할 것임을 알고 있다.  


이언 매큐언의 소설은 이번 처음이었다. 매큐언의 <속죄>를 영어로 읽다가 잠시 쉬고 있는 터라(아직도 영어 소설을 읽어내는 속도가 너무 느려서), <칠드런 액트>가 처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번역이라서 그런가. 번역된 영어권 작가들의 소설을 읽으면 다들 비슷해보이니 말이다(그러니 영어로 읽어야 된다). 


끝으로 조금 길긴 하지만, 피오나가 애덤의 강제 수혈 집행을 명하는 판결문 일부를 옮긴다.


A는 스스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나이에 근접해 있습니다. 종교적 신념을 위해 죽음을 각오한다는 사실은 그 믿음이 얼마나 심오한지 증명합니다. 또한 그의 부모가 끔찍이 사랑하는 자식을 신앙을 위해 희생시킬 각오를 한다는 사실은 여호와의 증인이 고수하는 교리의 힘을 보여줍니다. (...) 

바로 이 힘때문에 저는 멈춰 서게 됩니다. 왜냐하면 A는 17세가 되도록 종교적, 철학적 사고라는 격변하는 영역에서 다른 표본을 접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기독교 종파는 신자들 간의 열린 논쟁이나 반대의견을 장려하는 문화가 아닙니다. 회중의 신자들은 자신들을 '다른 양'이라 부른다는데요. 적절한 명칭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겠습니다. 저는 A의 정신, 견해가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A는 아동기 내내 강력한 하나의 세계관에 단색으로, 중단없이 노출된 채 살아왔고, 그런 배경이 삶의 조건을 좌우하지 않았을 수는 없습니다. 고통스럽고 불필요한 죽음을 감수하는 것. 그리하여 신앙을 위해 순교자가 되는 것이 A의 복지를 도모하는 길은 아닐 것입니다. (... ...) A는 그의 종교로부터, 그리고 자기자신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합니다. 

- 167쪽에 169쪽 



Iwan McEwan(1948 ~ )



칠드런 액트 - 8점
이언 매큐언 지음, 민은영 옮김/한겨레출판

Comment +0



이 되어버린 남자 Das Buch

알폰스 슈바이거르트(지음), 남문희(옮김), 비채, 2001 



원제는 '그 책'이고 내용은 번역본 제목 그대로 책이 되어버린 비블리 씨에 대한 것이다. 정말로 책이 된다. 책이 되어 사람을 공격하기도 하고 서가에 꽂히기도 하며 읽히기도 하고 땅 속에 파묻히기도 한다. 그러나 책이나 독서에 대한 깊은 사색이 묻어나오지 않으며 그저 책이 된 채 떠도는 이야기이다. 독특하기는 하나 깊이 없다. 책은 짧고 금방 읽힌다. 그리고 왜 읽었을까 하고 반문한다. 그래서 책 앞에 인용된 독일 저널들의 찬사는 어색하고 난감하다. 왜냐면 내가 잘못 읽은 게 아닌가, 내 감식안이 형편없는 건 아닌가 하고. 제목은 사람의 시선을 끌지만, 시간 내어 이 책을 읽진 말자. 

(그래서 독일 아마존에서 이 책을 찾아보았으나, 나오지 않는다. alfons schweiggert로 검색하여 목록을 대강 훑었으나....) 




책이 되어버린 남자 - 6점
알폰스 슈바이거르트 지음, 남문희 옮김, 무슨 그림/비채
 


Comment +0




헤밍웨이의 말

헤밍웨이(지음), 권진아(옮김), 마음산책 



헤밍웨이가 너무 유명했던 탓에, 내가 그를 읽은 건 고등학생 때였다. 이것이 세계문학전집의 폐해다. 헤밍웨이의 소설들 - <해는 또 다시 떠오른다>나 <무기여 잘 있거라>-을 고등학생이 읽고 이해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그리고 그 시절 이후 헤밍웨이를 읽지 않았고, 이 사실마저도 이 인터뷰집을 읽으면서 새삼 알게 되었다.


이 책은 헤밍웨이가 말년에 행한 인터뷰들을 소개한다. 뭔가 깊이있는 이야기가 나오기 보다는, '아, 헤밍웨이구나'정도랄까. 그래, '헤밍웨이'.  


"작가는 우물과 비슷해요. 우물이 마르도록 물을 다 퍼내고 다시 차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규칙적인 양을 퍼내는 게 낫습니다."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 지 알고 끝냈을 때는 계속 쓸 수 있습니다. 시작만 할 수 있으면 괜찮아요." 


하지만 글쓰기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고, 글쓰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는 글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나는 헤밍웨이의 대화를 글로 읽는데, ... (그러니, 이 책의 저자는 헤밍웨이가 아니라 인터뷰어로 나와야 한다.) 


"그 때 그 때 달라요. <무기여 잘 있거라>의 결말 마지막 페이지는 서른 아홉 번 다시 쓰고야 만족했죠." 


"하지만 최고의 글은 분명 사랑에 빠져 있을 때 나옵니다. 그게 다 똑같아보인다면 차라리 아무 설명도 안 하렵니다."


"이렇게 말하죠. 글을 잘 쓰는 게 더할 나위 없이 힘들다면 나가서 목을 매야 한다고. 그러고는 무자비하게 난도질 당하고 남은 평생 최대한 잘 쓸 수 있도록 스스로 강제해야 한다고. 적어도 목매는 이야기부터 쓸기 시작하면 되잖아요."


글 쓰는 재능이 없기도 하거니와, 아주 가끔은 소설을 쓰지 않길 잘 했다고 여긴다. 문장과 싸우기엔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체력이 안 된다고 할까. 마루야마 겐지의 단어로 옮기자면, '근육'이 없거나 형편없음을 뒤늦게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헤밍웨이는 서서 글을 쓴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내내 가지고 있는 작업 습관이다. 그는 치수에 맞지 않는 커다란 로퍼를 신은 채 가슴 높이에 놓인 타자기와 독서대를 마주 하고 낡은 레서쿠두 가죽 위에 선다. 새 작품을 시작할 때 헤밍웨이는 늘 독서대에 반투명한 타자용지를 올려놓고 연필로 글을 쓴다.(23쪽)


책은 얇고 재미있다. 서점에서 서서 한 시간이면 다 읽을 수 있다. 헤밍웨이 팬이라면 한 권 집에 소장해두어도 나쁘진 않을 듯. 올해 수십년만에 헤밍웨이의 소설을 다시 읽어야겠다. 아마 예전 내가 읽었던 그 소설은 아닐 것이다. 이제서야 제대로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약간의 위안을 가져본다. 


호텔 암보스문도스 Hotel Ambos Mundos. 551호실에서 헤밍웨이는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의 첫 몇 장을 썼다. 



쿠바 하바나에 있는 플로리디타 바. 헤밍웨이 덕분에 유명해진 바로, 하바나에선 보기 드물게 신용카드 결제가 가능하다. 


책에선 헤밍웨이가 서서 글을 쓴다고 했는데, 막상 찾아보니 이 사진 밖에 없다. 




헤밍웨이의 말 - 8점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권진아 옮김/마음산책


Comment +0


2017년, 책 읽기의 기억




1. 책 읽는 병든, 그러나 고귀한 우리들 



책을 읽는 여인(안지오의 소녀)

이탈리아 안지오Anzio에서 나온 그리스 조각 복제본(대리석)으로 기원전 2세기 제작 추정





책을 읽는다고 당신의 인생이 바뀌지 않는다. 나아지지도 않는다. 쓸데없이 고민만 많아진다. 할 수 있는 건 빨간 신호등일 때 건널목을 건너지 않는 정도이지만, 고민하는 것은 이 세상 전체에 대한 것들이다. 무분별한 생산과 소비로 인해 병들어가는 지구나 갑작스럽게 성장하고 있는 AI(인공지능)에 대한 암울한 전망이라든가 북핵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에 끼인 한반도의 운명 등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고민을 누구에게도 말할 필요도, 말할 사람도 없다. 주제 넘은 염려다. 정작 고민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어린 아이 교육이나 적자를 벗어나지 못한 채 빚만 쌓이는 집안 경제, 또는 직장 문제나 나이가 들수록 위태로워지는 돈벌이. 그러나 이 또한 고민으로만 머물 뿐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현실적인 도움을 전혀 주지 못하는, 종이 위의 글자로만 존재하는 책만 읽는다. 도리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얼마 되지 않는 돈마저 저 책들을 구입하기 위해 사라진다. 결과적으로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데, 왜 나는 책을 읽는 것인가.  




Saint Jerome

Caravaggio (1571-1610) 

Oil on canvas, 112 cm × 157 cm, 1605-1606




"사자가 위장에 탈이 나면 풀을 먹듯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

- 강유원, <<책과 세계>> 중에서




어쩌면 나는 병에 든 것이다. 기원전 안지오의 저 소녀도 병 들고 기원후 4-5세기의 성 히에로니무스도 병든 채 라틴어 성경을 옮긴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저 소녀가, 성 히에로니무스는 병에 걸렸음을 사람들이 알면 안 되었다. 어쩌면 이 병은 전염병일 지도 모른다. 우리 영혼의 파국을 부를 수도 있고 현실적 자각을 방해할 수도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과 다르게 하고 구별짓게 하는 이 병은, 걸린 사람들만 서로 알 수 있어야 한다. 결국 병들었기에 어떻게든 그것을 다른 것으로 포장해야만 한다. 


아주 오랜 세월동안 그들은, 우리들은 병든 것을 숨기기 위해, 도리어 병 든 것이 아니라 당신들과 다른, 훨씬 우월하며 고귀하다고 여기게 하려고 고대로부터 책 읽기를 포장해 온 것은 아닐까. 그래서 플라톤은 책을 읽는 우리들와 다른 그들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 




이 사람들은, 지혜와 선의의 경험이 전혀 없이, 잔치와 또한 그와 유사한 즐거움에만 항상 익숙하고, 낮은 수준의 교양 교육을 받은 사람들로, 일생을 그런 식으로 방황하며 살았다. 그들은 진리를 찾아 하늘을 바라본 적이 없고, 더 높은 진리를 향하여 비상한 적도 없으며, 어떤 순수하고 지속적인 즐거움을 맛본 젓도 없다. 가축의 무리들이 그러하듯이, 그들은 항상 허리를 굽혀 눈을 땅 바닥과 먹을 곳에 고정하고, 먹고 살찌고 성 관계를 맺어 새끼를 낳으며, 이들 즐거움에 대하여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을 보였다. 그들으 무쇠와 같은 뿔과 발굽으로 서로 차고 받았고, 그들의 욕망이 채워지지 않으면 서로 죽이기까지 하였다. 

- 플라톤, <<국가>>, 9장 중에서 




2. 위태로운 프란체스카의 독서 



Francesca da Rimini

William Dyce  (1806-1864) 

Oil on canvas, 218 cm  × 182.8cm, 1837

National Gallery of Scotland




프란체스카는 자신들의 운명을 예고하는 시구를 읽다가 만다. 책을 읽는 프란체스카의 얼굴 위로 파올로의 얼굴이 겹쳐지고, 이 둘은 불륜의 사랑을 나눈다. 프란체스카는 파올로의 형과 결혼을 약속했으나, 사랑에 빠지는 건 파올로였다. 파올로도 마찬가지여서, 이 둘의 운명은 결국 비극으로 끝나고 죽어서도 끝없는 세속의 비난을 견뎌야만 한다. 


중간에 멈춘 프란체스카의 독서 위로 비극적인 사랑이 놓이고, 고통스러운 사랑의 밤은 지나고, 죽음의 아침만이 남았을 뿐이지만, 그녀의 책 읽기는 끝나지 않는다. 



나는 행복을 찾아 모든 곳을 헤맸지만, 결국 어느 한 구석에서 책을 읽다 행복을 발견했다.

-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 ~ 1471) 



그러나 이제 그 행복한 구석은 없다. 사랑하는 연인도 없다. 우리는 행복을 발견하기 전에 이제 네트워크의 부름을 받을 것이다. 아니면 책을 읽다가 네트워크로 들어가 검색하게 될 지도 모른다. 


진정한 행복은 관계 속에서가 아니라 고독 속에 존재한다. 말씀으로 시작된 이 세계는 반복적으로 책으로 돌아가고 자주 책 밖으로 나온다. 이야기가 되거나 문장 되거나 단어가 된다.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는 끝없이 변주되어 나오는 최초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네트워크로 수렴되고 디지털화된 기호가 되고 시뮬라크르가 된다. 그리고 물질적 세계에서 사라진다. 



3. 책벌레는 되지 말자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읽지만, 나는 읽기 위해서 산다. 

- 로건 피어설 스미스(Logan Pearsall Smith, 1865 - 1946)



나도 읽기 위해서 사는 것일까. 이에 우리의 친구이자 눈 먼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주었던 알베르토 망구엘(Alberto Manguel)은, 그래도 책벌레가 되지 말자고 말한다. (어쩌면 그도, 나도 이미 책벌레일지도 모르는데) 



책벌레라는 개념은 좀목(Thysanura)에 속하는 곤충에서 유래하는데, 이 곤충은 종이와 잉크로 구성된 책을 실제로 먹어치우는 벌레로 일찍이 알렉산드리아 시대부터 "도서관의 청소부"로 악명을 떨쳤다. 책벌레란 독서를 통해 지혜를 얻지 못하고, 마치 좀벌레가 책을 먹어 치우듯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 사람을 말한다. 이런 독자들은 생쥐나 시궁쥐라고 조롱받기도 하는데, 그들에게 책과 인생은 영혼을 살찍우는 자양분이 아니라 헛된 욕심을 채우는 사료(飼料)에 불과하다. 

- 알베로트 망구엘, <<은유가 된 독자>> 중에서 



책벌레에 관한 한 올해 읽은 최고의 표현은 아래와 같다. 



나는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이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 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 

- 보후밀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 중에서 




그리고 탐욕스럽게 책을 읽었으나,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채 결국 죽는다. 책 한 줄 읽지 않은 듯한 여인 만차의 운명과 대비되어 이 소설의 주인공은 비극적인 고독 속에서 시뮬라크르가 된 위안으로 끝난다. 그러니 책은 책일 뿐이고 세상은 언제나 거기 있을 뿐이다. 니체가 그토록 싫어했던 플라톤이 최초로 제안한 개념, 바로 저 세상(이데아계)이 있다는 것, 그것만이 책벌레의 유일한 희망일 지도 모른다. 



4. 2017년, 기억할 만한 독서의 흔적


4.1. 마이클 더다의 고전 읽기의 즐거움


2017년이 지나고 2018년이 시작되었다. 작년 한 해 약 50권 여 권의 책을 읽거나 읽는 중이다. 많은 책을 사기도 했으나, 그만큼 도서관에서 빌려 읽기도 했다. 사기 애매하거나 미처 몰랐던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그렇게 읽은 책들 중 일부는 결국 구입하기도 하는데, <<마이클 더다의 고전 읽기의 즐거움>>(을유문화사)은 두고 두고 읽을 만한 책이다. 서평집으로 머물기엔 아쉬운, 책에 대한 사랑 고백과도 같다. 클리프턴 패디먼/존 S.메이저의 <<평생독서계획>>(연암서가)에서 소개되지 않은 고전들을 소개하면서, 많은 작가들이 한글로 소개되지 않은, 소개될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은 점은 이 책의 가치를 더한다. 혼자 비밀스럽게 몇 명의 작가들을 알고 읽을 수 있을 테니까. 가령 조지 매러디스(George Meredith, 1828 - 1909)나 C.P.카바피(C. P. Cavafy, 1863 - 1933)은 절대 한글로 번역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 


(* 클리프턴 패디먼/존 S.메이저의 <<평생독서계획The Lifetime Reading Plan>>은 우리가 평생 동안 읽었으면 하는 고전들에 대한 소개서이다. <<길가메시 서사시>>부터 시작하여 현대의 소설까지 이어지는 이 책은 우리가 뭔가 읽어야겠다라고 생각할 때 추천할 만한 가장 좋은 책들 중의 한 권이다. 마이클 더다도 이 책에 대한 찬사로부터 시작하여 책을 쓴다.)


그러나 이러한 즐거움은 세상 일과 무관하다. 도리어 뭔가 물질적 기여를 할 시간에 나는, 우리는 마이클 더다의 책을 읽는다. 그렇게 2017년 오십여 권의 책을 읽었다. 


4.2. 쉼보르스카와 다니카와 슌타로 


2017년 최고의 저자는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와 다니카와 슌타로였다. 이 두 명의 시인은 왜 아직도 시인이 있어야 하고, 시가 읽히며, 시가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가는 보여주었다. 더 나아가 위대한 시인들은 옮겨진 언어의 종류에 상관없이 성공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4.3. 하우저와 조중걸


예술 관련 서적을 많이 읽은 해이기도 하다. 아놀드 하우저(아르놀트 하우저, Anold Hauser, 1892 - 1978)의 <<예술과 소외>>(김진욱 옮김, 종로서적)는 마니에리슴(매너리즘) 연구 서적으로, 1981년에 번역되었다는 사실이 놀라운 책이다. 특히 이 책에 소개된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그 당시 뿐만 아니라 지금에도 책으로는 그 도판을 구하기 어려운 16세기 후반기 마니에리슴 예술가이며, 지금도 서양미술사를 공부하는 이들 상당수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시대의 작가들이라는 점에서, 번역자에게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조중걸의 <<근대 예술 - 형이상학적 해명>> 1권, 2권(지혜정원)은 서양 예술사가 이렇게 씌여질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더구나 한글로! 활자가 크다고 만만하게 볼 수 없고 도리어 그 사유와 해석의 흔적을 따라가기만으로도 벅차다. 특히 매너리즘 미술에 대한 소개나 19세기 후반 미술에 대한 설명은 압도적이라고 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다. 곰브리치나 잰슨의 서양미술사와 조중걸의 책을 비교해 보면 단번에 알 수 있다. 전자는 '양식사로서의 서양미술사'로 전 세계 많은 이들이 읽은 베스트셀러라면, 조중걸의 이 책들은 왜 예술이 존재하며, 지금/여기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며, 그래서 왜 끝내 감동받게 되는가를 알게 한다. 그래서 조중걸의 책을 읽고 난 다음, 독자들은 다른 서양 예술 관련 책들이 한없이 시시해지는 경험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 


(* 조중걸의 서양예술사는 전 5권으로, 나는 아직 <<고대 예술>>과 <<중세 예술>>을 읽지 않은 상태이다. 모두 '지혜정원'이라는 출판사에 출간되었다. 그리고 작년 그는 놀라운 책 한 권을 출간했는데, <<비트겐슈타인 논고 해제>>(북핀)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논고Tractatus>>를 읽고 소개한 책인데, 일부 인터넷서점들의 독자 평만 봐도 이 책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 아마 한국에서 비트겐슈타인 연구로 대학에서 겉멋 부리는 이들 대부분이 움찔했을 것이며, 아마 일부는 이 책을 읽어내지도 못할 것이다. 나 또한 사두었을 뿐,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4.4. 세상을 이해하는 세 가지 방법 


군터 뒤크의 <<호황 VS 불황>>(원더박스)은 읽는 내내 경제시스템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다. 팀 하포드의 <<메시>>(위즈덤하우스)는 우리의 통념을 산산히 깨고 어지럽고 지저분하며 혼란스러운 환경이 어떻게 창의성을 폭발시키며 문제를 해결하는가에 대한 놀라운 사례들을 알려주었다. 마이클 셔머의 <<믿음의 탄생>>은 종교, 혹은 신앙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우리 인간이 어떻게 신앙을 갖게 되는가를 과학적으로 분석한다.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 이 책은 약간 불편할 수도 있으나, 결국 종교나 신앙도 우리 인간 문명 속에 들어와 있으며, 우리 생명, 삶, 역사와 함께 흘러왔음을 인정할 때 이 책이 가진 본연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책은 과격하지만, 충분히 읽을 만한 책이다. 



4.5. 시몬 베유와 강유원


시몬 베유의 <<중력과 은총>>(이제이북스)는 놀라운 책이다. 카톨릭 신자로서 시몬 베유는 하느님과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다. 그런데 이 책이 씌여진 시기가 세계 대전 중의 유럽이라는 점에서, 가끔 일요일 성당 안의 고요한 평화-그러나 무수한 심적 갈등과 고난, 회개와 반성으로 뒤범벅된 신자들이 몰려든-를 떠올리게 한다. 강유원의 <<숨은 신을 찾아서>>(라티오)도 신앙 고백서이다. 시몬 베유는 이미 있는 신앙을 어떻게 이해하고 생각하는가에 방점이 찍힌다면, 강유원의 이 책은 그야말로 진짜 신앙 고백서이다. 그는 그리스-로마의 체계 안에서 사도 바울이 어떤 철학을 가지고 왔으며, 이후 신앙 고백자들이 어떻게 신앙을 받아들이는가를 설명한다. 그리고 딱딱한 방식이지만, 정직하고 곧게 자신의 신앙을 드러낸다. 몇몇 카톨릭 신부들이 이 책을 추천하였으며, 너무나도 이성적인 철학 안에서 자신의 신앙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에게 추천할 만하다나 또한 성당을 다니기 시작한 지 1년이 넘은 터라, 강유원의 이 책은 한 편으로는 너무 슬프게 읽힌 책이기도 하다. 



4.6.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그리고 단테


기시 마사히코의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은 사회학자들이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아파하는가를 알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러 에피소드는 너무 낯익지만, 낯 뜨겁기도 하다. 일종의 관찰이면서 해석이며, 이러한 기록들이 모여 세상을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실천적 기초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아우어바흐의 <<단테>>는 문학 이론서는 이렇게 씌여져야함을 보여준다. 이미 <<미메시스>>(민음사)를 통해 국내에는 오래 전부터 그 명성을 가지고 있었던 아우어바흐는, 정작 나에겐 낯선 이였다. <<미메시스>> 상권을 읽다 말았으니. 2018년에는 아우어바흐의, 읽다만 책들을 읽기로 한다. 



4.7. 예술이 되는 순간, 그리고 


필립 드 몬테벨로/마틴 게이퍼드의 <<예술이 되는 순간>>은 우리가 왜 예술을 사랑하는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책이다. 서점에서는 이 책을 열어볼 수 없도록 비닐포장되어 책 내용을 엿볼 수 없지만, 그냥 구입하면 된다. 그리고 책벌레가 아닌 예술에 미친 이들이 어떻게 그 속에서 살아가는가를 알게 해준다.  



Fragment of a Queen's Face

New Kingdom, Amarna Period, 1353-1336 B.C.

Yellow jasper

h. 13 cm (5 1/8 in); w. 12.5 cm (4 15/16 in); d. 12.5 cm (4 15/16 in)

Metropolitan Museum (https://www.metmuseum.org/art/collection/search/544514) 



"당신이 두상의 윗부분을 발견한다고 해서" 필립은 계속해서 말했다. "내가 감격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나는 여기 남아 있는 조각의 완벽성에 매료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미술사에서 말하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눈이 보고 있는 것에 대한 경탄에서 즐거움을 얻습니다. 이것은 강렬한 즐거움입니다. 마치 당신이 좋아해서 영화로는 보고 싶지 않은 책과 같습니다. 당신은 이미 특정한 방식으로 남자나 여자 주인공의 얼굴을 마음속에 그려보았을 것입니다. 이 노란색 벽옥 입술의 경우, 나는 사실 사라진 부분을 한번도 상상해보지 않았습니다." 

- 필립 드 몬테벨로/마틴 게이퍼드, <<예술이 되는 순간>> 중에서 



하지만 많은 이들이 어떤 이론적 배경이나 지식으로 무장하여 예술 작품을 감상해야 된다고 믿는다. 그것은 착각일 뿐이다. 굳이 현대 미술 이론이나 미술사에 대한 지식 없이도 작품은 감상이 가능하고 가능해야만 한다. 다만 이론/지식이 늘어날 수록 작품 감상의 이해와 폭이 넓어지며, 그 감동도 달라질 것인데, 이는 그 사람이 얼마나 다양하고 많은 좋은 작품들을 감상하였는가와도 밀접한 연관관계를 맺는다. 이 점에서 Dana Arnold의 <<Art History - A Very Short Introduction>>(Oxford, 2004)는 짧지만, 꽤 유용하고 적절한 지점을 잘 알려준다. 



This kind of visual material can have an autonomous existence - we can enjoy looking at it for its own sake, independent of any knowledge of its context, although of course viewers from different time periods or cultures may see the same object in contrasting ways. 

- Dana Arnold, <<Art History>> 중에서 



4.8. 읽은 책들의 목록 


아래 2017년 한 해 읽은 책들의 목록을 올린다. 일부는 2016년부터 읽어온 책들도 있고, 일부는 아직 끝내지 못한 책들도 있다. 어느 책들은 블로그에서 서평을 올렸으나, 어느 책들은 서평을 올리지 못했으며, 서평을 엄두조차 내지 못할 책들도 있다. 책 제목 앞에서 * 표시를 한 것은 동작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이다. 2018년 올해에는 서재에서 먼지를 먹고 있는 책들 위주로 읽기로 해본다. 2017년에는 과학 책을 거의 읽지 않았으니, 올해 많이 읽는 것으로. 


일년에 읽는 책의 수보다 사는 수가 더 많다. 내 인생에 기적이 생겨, 진정한 책벌레가 될 수 있는 환경이 되길, 터무니 없게 꿈꾸어 본다. 




소설 

<<황산>>, 아멜리 노통브(지음), 문학세계사  

<<백설공주>>, 도널드 바셀미(지음), 책세상 

<<위대한 개츠비>>, 스코트 피츠제럴드(지음), 정현종(옮김), 문예출판사 

<<얼음의 책>>, 한유주(지음), 문학과지성사, 2009년

<<맥베스>>, 셰익스피어(지음),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년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지음), 다산책방 

<<햄릿>>, 셰익스피어(지음), 펭귄클래식코리아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지음), 이창실(옮김), 문학동네, 2016년

<<타네씨, 농담하지 마세요>>, 장-폴 뒤부아(지음), 김민정(옮김), 밝은세상



시집

<<강의 백일몽>>, 가르시아 로르카(지음), 민음사 

* <<충분하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지음), 문학동네 

* <<사과에 대한 고집>>, 다니카와 슌타로(지음), 요시카와 나기(옮김), 비채 



에세이 / 비평 / 역사

* <<약간의 거리를 둔다>>, 소노 아야코(지음), 책읽는고양이, 2016년

<<유감이다>>, 조지수(지음), 지혜정원, 2016년

*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이 나를 강하게 만든다>>, 알렉상드르 졸리앙(지음), 책읽는수요일, 2013년 

* <<밤이 선생이다>>, 황현산(지음), 난다, 2013년 

<<보들레르의 수첩>>, 샤를 보들레르(지음), 이건수(옮김), 문학과 지성사

* <<은유가 된 독자 - 여행자, 은둔자, 책벌레>>, 알베르토 망구엘(지음), 양병찬(옮김), 행성비, 2017년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기시 마사히코(지음), 이마, 2016년 

<<숨은 신을 찾아서>>, 강유원(지음), 라티오 

<<마이클 더다의 고전 읽기의 즐거움>>, 마이클 더다(지음), 이종인(옮김), 을유문화사, 2009년

* <<우리는 모두 식인종이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지음), 강주헌(옮김), 아르테 

* <<파울 첼란/유대화된 독일인 사이에서>>, 장 볼락(지음), 윤정민(옮김), 에디투스 

<<셰익스피어의 시대>>, 프랭크 커모드(지음), 을유문화사, 2005년 

<<유혹에 대하여>>, 장 보드리야르(지음), 배영달(옮김), 백의

<<중력과 은총>>, 시몬 베유(지음), 윤진(옮김), 이제이북스

<<촘스키, 끝없는 도전>>, 로버트 바스키(지음), 그린비, 1999년

<<단테>>, 에리히 아우어바흐(지음), 연암서가, 2014년 

<<고대 중국에 빠져 한국사를 바라보다>>, 심재훈(지음), 푸른역사

* <<세계사라는 참을 수 없는 농담>>,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지음), 이상희(옮김), 추수밭, 2017년 



경제 / 경영 / 정치 / 과학

<<미래의 소비자들>>, 마틴 레이먼드(지음), 에코비즈, 2006년 

* <<선대인의 빅픽처>>, 선대인(지음), 웅진지식하우스, 2015년

<<소비의 미래>>, 다비트 보스하르트(지음), 생각의 나무, 2001년 

* <<2017 한국이 열광할 세계트렌드>>, KOTRA(지음), 알키, 2016년 

* <<박종훈의 대담한 경제>>, 박종훈(지음), 21세기북스, 2015년 

<<준비된 자가 성공한다>>, 데이비드 알렌(지음), 청림출판, 2005년 

* <<좋은 제품이란 무엇인가>>, 제임스 L. 애덤스(지음), 김고명(옮김), 파이카, 2012년 

<<호황 VS 불황>>, 군터 뒤크(지음), 안성철(옮김), 원더박스, 2017년 

* <<메시>>, 팀 하포드(지음), 위즈덤하우스, 2016년

* <<왕따의 정치학>>, 조기숙(지음), 위즈덤하우스, 2016년 

<<믿음의 탄생>>, 마이클 셔머(지음), 김소희(옮김), 지식갤러리, 2012년 



철학 / 예술 

<<서양철학사>>, 윌리엄 사하키안(지음), 권순홍(옮김), 문예출판사

<<미학입문>>, H.오스본(지음), 박우사, 1994년 

<<비정형 : 사용자안내서>>, 이브-알랭 부아, 로잘린드 E. 크라우스, 미진사, 2013년 

<<근대예술 - 형이상학적 해명 1권>>, 조중걸(지음), 지혜정원, 2014년 

<<근대예술 - 형이상학적 해명 2권>>, 조중걸(지음), 지혜정원, 2014년 

<<예술과 소외>>, 아놀드 하우저(지음), 종로서적, 1981년

<<Art History - A Very Short Introduction>>, Dana Arnold(지음), Oxford University Press, 2004년  

<<예술 사회>>, 조지 디키(지음), 김혜련(옮김), 문학과지성사, 1998년

* <<보이지 않는 용>>, 데이브 하키(지음), 마음산책, 2011년 

<<회화 - 한 눈에 보는 흥미로운 미술의 역사>>, 폴커 게하르트(지음), 이수영(옮김), 예경, 2005년 

<<예술이 되는 순간>>, 필립 드 몬테벨로, 마틴 케이퍼드(지음), 디자인하우스, 2015년 

* <<세계의 박물관 미술관 예술기행 - 유럽편>>, 차문성(지음), 책문, 2015년 

* <<래디컬 뮤지엄>>, 클레어 비숍(지음), 현실문화 




5. 나는 왜 책을 읽는가 


일견 단순해보이지만, 쉽지 않은 질문이다. 책 읽기를 권하지만, 정작 책 읽는 사람은 드물어지는 시대다. 한없이 가벼워지며, 깊이가 사라지는 시대다. 이런 시대에 책을 들고 읽는 건 낯설다. 나에게 왜 책을 읽느냐고 물으면, '그저 습관일 뿐'이라고 말한다. 한 때 통찰력 있게 세상을 바라본다는 착각을 가지고 했으나, 막상 중년이 되고 보니, 부질 없더라. 다만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조용히 책 읽는 습관 만큼 좋은 것도 없으니, 권할 만 하다. 책을 두고 대화를 나눌 수도 있고 아주 가끔 실천적인 지침을 가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책과 세상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책을 많이 읽으면 뭔가 바꿀 수 있다는 환상을 버리자. 그저 사소하지만 조용하고 깊은 독서만이 거칠고 혼란스러운 이 시대에 작은 위안이 될 수 있음을, 그 정도로 만족하기로 하자. 



(며칠 전에 올렸다가 다시 다듬어서 올린다. 가독성이 너무 떨어지기도 했고 ... 다들 2018년에는 좋은 일들만 있기를!)




Comment +0





타네씨, 농담하지 마세요

장-폴 뒤부아(Jean-Paul Dubois) 지음, 김민정 옮김, 밝은세상, 2006년 





"공사판에서 일하는 작자들, 죄다 미치광이들이라오. 조심해야 해요. 진짜 미치광이들이니까. 40년째 공사판을 돌아다니고 있지만, 지금도 그 작자들하곤 어울릴 맘이 나질 않아요. 개중에서도 제일 심한 미치광이들이 바로 수도배관공들이라오. 난 아예 계약도 하지 않아요. 그 작자들하고 같은 시간대에 작업을 해야 한다면."

- 176쪽 




한편으론 답답하고 한편으론 흥미롭고, 때로는 화가 나기도 하고 주인공 타네씨는 참 운도 없다는 생각을 하며 읽는 소설이다. 등기우편으로 날아온 삼촌의 유산인 오래된 저택을 상속받으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웅장하고 근사한 저택을 상속받은 타네씨. 그러나 그가 기억하던 저택은 어릴 적 모습이었을 뿐이다. 



어쨋든 삼촌네 집에 올 때마다 난 그 어마어마한 크기에 놀라 입을 딱 벌리곤 했다. 드높은 천장, 기나긴 복도, 넓디넓은 벽. 이제는 집 전체가 세월의 무게에 짓눌릴 듯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다. 기왓장도 그 경사를 따라 내려앉은 듯했다. 벽면의 타일은 썩은 이처럼 덜렁거렸고, 바닥의 나무쪽은 곰팡이들에게 서서히 점령당하고 있었다. 하긴 사람이 살지 않은 지 십오 년이나 되었으니, 칠이 벗겨져나간 벽하며 우툴두툴 일어난 천장하며 오랜 세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한마디로 곰팡이들의 천국이자 폐허였다. 

- 13쪽 



그리고 이 소설은 이 낡은 저택을 개조하고 보수하려는 타네씨와 그가 만나는 공사판 사람들과의 흥미로운 일화들로 구성되어 있다. 짧고 금방 읽히지만, 우리는 때로 타네씨가 처한 그 곤경에 빠져 안절부절 못해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면서 이렇게 황당한 사람들이 있다는 걸, 새삼 알게 된다. 이 인물들이 보여주는 흥미로운 장면들은 마치 짧은 희극을 보는 듯하다. 



세 번째로 읽게 된 장-폴 뒤부아의 소설. 그러나 최고는 역시, <<프랑스적인 삶>>이였다. 그 이후 <<이성적인 화해>>도 읽었으나, 그 전의 감동을 느끼기엔 부족했고, 이번에 읽은 이 소설, <<타네씨, 농담하지 마세요>>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소품에 가까웠다. 


장-폴 뒤부아 팬이라면 읽어도 나쁘지 않을 듯하지만, 그를 처음 읽는다면, <<프랑스적인 삶>>을 추천한다. (현재 절판인 관계로 중고로 구입하든지,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중고로 구입하기를 추천한다. 소장해도 좋을 소설이다.) 




  



Jean-Paul Dubois



* 아래 장-폴 뒤부아의 다른 소설들을 읽고 쓴 리뷰다. 



2008/02/01 - [책들의 우주/문학] - 프랑스적인 삶, 장 폴 뒤부아


2015/11/05 - [책들의 우주/문학] - 이성적인 화해, 장-폴 뒤부아




타네 씨, 농담하지 마세요 - 8점
장폴 뒤부아 지음, 김민정 옮김/밝은세상

Comment +0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Bohumil Hrabal(지음), 이창실(옮김), 문학동네, 2016 



서평 쓰기도 꽤 많은 시간이 걸린다. 간단하게 감상을 적기도 하지만, 혹시 나중에 읽었던 책에 대한 내용을 찾을 때를 대비해 자료 정리의 측면도 있다 보니, 다소 길고 인용이 많아졌다. 결국 책 읽는 속도를 서평 쓰는 속도가 따라가지 못해, 읽었으나 리뷰를 올리지 못한 책들이 열 권을 넘겼다. 시간이 나면 정리해 올리려고 하고 있으나, 쉽지 않고 쫓기다보니 서평의 질도 예전만 못하다. 


보후밀 흐라발(1914 - 1997). 체코 최고의 소설가이지만, 국내에는 뒤늦게 소개되었다(아니 전세계적으로도 그렇지 않을까). 체코 소설가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이가 밀란 쿤데라이고, 토니 주트(Tony Judt, 1948 ~ 2010)는 <<20세기를 생각한다>>에서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 1929 ~ )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다른 유명한 반체제 문인인 소설가 밀란 쿤데라에게도, 이유는 다르지만, 똑같은 논법을 적용할 수 있다. 나의 체코인 친구들 중에는 쿤데라가 서방에서 큰 인기를 끄는 데 심히 분개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묻는다. 왜 다른 체코 작가들의 작품은 (체코 독자들이 더 좋아하는 경우가 더 많은데도) 국경 너머에서 읽히지 않는가? 

- <<20세기를 생각한다>>, 토니 주트 &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303쪽(조행복 옮김, 열린책들) 


순응주의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진부한 것으로 이기심이나 통찰력 부족에서 비롯한다. 공산주의 체제 막바지의 순응주의가 그것이다. 다른 하나는 쿤데라의 무희들, 즉 1940년대와 1950년대의 믿는 자들이 지닌 순응주의이다. 당신도 알다시피, 세상에 등을 돌리고 서로의 얼굴 밖에 보지 못하지만 모든 것을 보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 위의 책, 310


밀란 쿤데라 이후 처음 읽는 체코 작가 보후밀 흐라발. 밀란 쿤데라가 프랑스 파리에서 창작 활동을 하는 동안, 보후밀 흐라발은 체코를 떠나지 않고 체코어로 글을 썼으며 그의 소설 대부분이 금서가 되었으며 무수하게 많은 직업을 전전하며 창작활동을 이어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방 언론은 그를 두고 '체코 소설의 슬픈 왕'이라고 일컫는지도 모르겠다. 하긴 이 책도 한없이 슬프긴 마찬가지지만.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스토리다. (... ...) 나는 맑은 샘물과 고인 물이 가득한 항아리에서 조금만 몸을 기울여도 근사한 생각의 물줄기가 흘러나온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는 이제 어느 것이 내 생각이고 어느 것이 책에서 읽은 건지도 명확히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 9쪽 


작중 화자는 폐지 더미 속에서 그 폐지를 압축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폐지로 넘어오는 무수한 책들, 고전들, 심지어 고전 회화들까지 보면서 지식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나는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이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 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 

- 10쪽 


하지만 이 소설은 작중 화자의, 우연히 얻게 된 지적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도리어 자신의 일상과는 아무 상관없고 인정 받지도 못하는 지적 능력와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채 밀리는 기술. 대화라곤 폐지 압축 공장에서의 대화나 만차나 집시 여인과의 대화가 전부인 이 소설은, 거의 모든 문장들이 주인공의 독백이나 생각으로 채워진 채로, 주인공의 시선으로 외부 세계를 바라보며 주인공 자신과는 무관한 세상과 그 속에서의 보이지 않는 갈등과 슬픔, 비극을 드러낸다. 


결국엔 실패하게 될 주인공을 앞에 두고 그 실패를 목격하게 될 우리 독자는 잔인하기만 하다. 결국 우리의 삶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스스로 '한탸'(주인공의 이름)를 보면서 슬퍼하며 공감하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는 우리 뜻대로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뒤늦게 돌이켜보면서 그렇지 않았다는 걸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이 점에서 한탸 또한, 우연히 얻게 된 지식으로 ....


책들에 둘러싸인 나는 책에서 쉴새없이 표징을 구했으나 하늘로부터 단 한 줄의 메시지도 받지 못한 채 오히려 책들이 단합해 내게 맞섰는데 말이다. 반면 책을 혐오한 만차는 영원토록 그녀에게 예정된 운명대로 글쓰기에 영감을 불어넣는 여인이 되어 있었고, 심지어 돌로 된 날개로 퍼덕이며 비상했다. 깊은 밤 환히 불밝혀진 왕성(王城)의 두 창문처럼 부드러운 빛을 발하는 날개였다.

- 104쪽 


만차와의 에피소드는 무척 흥미로웠지만, 결국 그렇게 될 것임을 예감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나 또한 탐욕스럽게 책을 읽으나, 그것이 내 생계와는 무관함을 뒤늦게 깨닫고 있으니. 


나는 새로운 삶에 절대로 적응할 수 없을 것이다. 코페르니쿠스가 지구가 더는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걸 밝혀내자 대거 자살을 감행한 그 모든 수도사들처럼 

- 106쪽 


이 소설은 짧지만 강렬하고, 책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책에 대한 찬사가 아니라 그것의 무능력함, 필요없음, 결국엔 죽음으로 끝나는 비극에 대해 이야기하고, 결국 세상은 진지한 이들의 편에 서지 않을 것임을 차분히 드러낸다. 


하긴 그건 이 소설을 읽지 않아도 다 알고 있는 사실 아닐까. 




Bohumil Hrabal, 1914 - 1997 






너무 시끄러운 고독 - 10점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문학동네

Comment +0



밤이 선생이다

황현산(지음), 난다(문학동네 임프린트)





"낮에 잃은 것을, 밤이여, 돌려다오."

- 괴테, <<파우스트>> 중에서 





다행이다. 이 책이 많이 팔리고 많이 읽힌다는 건 좋은 일이다. 불문학자인 황현산 교수가 그동안 여기저기 기고한 글들을 모은 이 산문 모음집은 출간 후 몇 년간 많은 이들의 밤을 조용히 채웠을 것이다. 


글들은 대체로 짧고 읽기 편하며 담백하다. 실은 이런 글 읽기도 쉽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는 탓에, 이 책의 유명세는 다소 낯설기까지 하다. 사람들은 어떻게 알고 이 책을 읽었던 것일까. 


나같은 독자에게 이 책은 약간 밍밍한 느낌을 준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이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취향의 문제일 뿐, 이 책의 가치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편안하게 권할 수 있는 산문집이다. 



여기서 낮이 이성의 시간이라면, 밤은 상상력의 시간이다. 낮이 사회적 자아의 세계라면 밤은 창조적 자아의 시간이다. 낭만주의 이후의 문학, 특히 시는 이 밤에 거의 모든 것을 걸었다. 시인들은 낮에 빚어진 분열과 상처를 치유하고 봉합해 줄 수 있는 새로운 말이 "어둠의 입"을 통해 전달되리라고 믿었으며, 신화의 오르페우스처럼 밤의 가장 어두운 곳으로 걸어들어가 죽은 것들을 소생시키려 했다.

- 220쪽 




  





밤이 선생이다 - 8점
황현산 지음/난다

Comment +0


위대한 개츠비 

F.스콧 피츠제럴드(지음), 정현종(옮김), 문예출판사 



전반적으로 잘 읽히지 않는다. 자주 등장하는 '올드 스포트old sport'는 '친구'(소설가 김영하의 번역), 또는 '형씨'(김욱동 교수의 번역)로 옮길 수 있지만, 이 번역본에서는 그냥 '올드 스포트'로 옮긴다. 읽으면서 왜 다수의 사람에게 이 명칭이 있는지 의아스러웠다. 영문을 병기하지 않았기에 찾아보지 않는 이상 알 턱이 없다. old sport는 이보게, 자네 정도로 옮길 수 있는 표현으로 good sport도 동일한 말이다. 일부 의견으로는 1970년대에 번역되어 일어중역본이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정현종 시인의 명성과 달리 이 책은 읽지 않는 편이 좋을 듯 싶다. 다행이 이 번역서는 절판되었으며, 이 소설의 유명세로 인해 번역서는 충분히 많다(솔직히 이 책을 찾아보니, 이렇게 번역서가 많은 소설도 처음 보는 듯 하다).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20세기 전반기 최고의 미국 소설들 중의 하나다. 아마 풍속 소설로는 최고일 것이다. 하지만 개츠비, 그의 아름다운 사랑과 불운한 운명은 피츠제럴드의 감미롭고도 우울한 시선에 가두워져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젊은이들이다. 결혼한 부부라도 아이가 없으며, 이혼을 한 적도 없는, 그렇다고 가난에 고통스러워하거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술을 자주 마시고 취하며 비틀거리며 대화를 나눈다. 


그 모습은 아름답지 않으나, 그 사건들이 지난 후 회고하는 문장들은 감미롭고 우울하며 비극적이다. 질풍노도의 청춘을 지나고 그 청춘은 아팠지만 아름다웠노라 하는 식이랄까. 


그저 혼자만의 사랑일 뿐이다. 혼자 사랑하고 혼자 그 사랑을 위해 분투하다가 혼자 그 사랑 때문에 죽는다. 어쩌면 어떤 종류의 남자들에게 사랑이라는 건 자신의 생애 전체를 날려버릴 수 있는 죄악일 지도 모른다. 




위대한 개츠비 - 6점
F.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정현종 옮김/문예출판사

Comment +0


백설공주

도널드 바셀미(지음), 김상률(옮김), 책세상 



이 번역 소설을 다시 영어로 옮긴다면 어떻게 될까? 어느 정도까지는 비슷할까, 아니면 전혀 다른 소설이 될까? 바셀미의 고도로 양식화되어 있는 미니멀리즘 소설을 한글로 옮기는 작업은 쉽지 않을 테지만, 너무 성의 없이 옮겼다는 건 바셀미의 소설을 기다려온 나에겐 상당히 불쾌하게 여겨졌다. 실제 원작에서는 문장은 짧고 단순하며 표현은 매우 절제되어 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이 번역본에서는 늘어지며 중언부언하면서 양식 자체가 무너져 버렸다. 그러니 이 번역서를 읽고 바셀미를 읽었다고 하지 말기를. 


도널드 바셀미는 20세기 후반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가 중의 한 명으로,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미니멀리즘 소설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이제서야 소개된다는 것이 뒤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리처드 브라우티건을 읽는 독자가 거의 없듯, 도널드 바셀미도 한국에선 그와 비슷해 보인다. 언어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이 번역본은 너무 형편없어서 반드시 영어로 읽어보길 권할 뿐이다. 


찾아보니, 아예 원문과 대조하여 번역서의 표현과 비교하여 새로 번역한 블로그가 있어 링크를 달아둔다. 거의 모든 페이지에서 최선의 번역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http://blog.aladin.co.kr/710357193/8795032 

http://blog.aladin.co.kr/710357193/8797048 

(위 블로그에 가면 <<백설공주>>의 번역에 대해선 여러 개의 글을 확인할 수 있다)


아래 평점은 한글 번역본을 읽고 바셀미가 어떠니 평가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은 것이다. 바셀미의 <<백설공주>>가 형편없음이 아니라. 



* 위 번역 비교 블로그 포스팅이 비공개로 바뀌었네요. 아무래도 시간날 때 번역문과 원문 비교를 틈날 때마다 올리는 것으로...  (2018/4/30 updated) 


백설공주 - 4점
도널드 바셀미 지음, 김상률 옮김/책세상



Comment +0



황산 Acide sulfurique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문학세계사 (2006년 초판 1쇄) 



작년 이맘때쯤 프랑스에서 아멜리 노통브(Amelie Nothomb)의 신작 <<황산>>이 발표되었을 때, 프랑스 비평계는 뜨거운 논란에 휩싸였다. 한쪽에선 "스캔들!", "졸작!"을 외치며 "매년 신작을 내놓지 않아도 되니 힘겨우면 좀 쉬라"고 비아냥거리는 동안, 다른 쪽에서는 "비판을 위한 비판은 그만!" "프랑스에서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 많은 책을 팔면 으레 미움을 사게 되어있다.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반박했다.

논쟁이 격렬해지자 서평 전문잡지 <<리르>>는 비판과 옹호의 글을 나란히 게재하기도 했다. 그 사이, 책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 205쪽, 옮긴이의 말 중에서


사놓고 읽지 않다가, 오늘 우연히 들고 읽었다. 두 시간 정도 들고 읽었으니, 매우 짧은 소설이고 쉽게 읽힌다. 2006년에 번역된 소설이 아직도 팔리고 있으니, 아멜리 노통브의 팬은 한국에도 꽤 많은 셈이다. 


하지만 (그 유명한)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을 이제서야 읽었다는 것 이외에 이 소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건 없다. 소설을 너무 쉽게 썼다는 것. 굳이 사서 읽을 필요 없는 소설이다. "매년 신작을 내놓지 않아도 되니 힘겨우면 좀 쉬라"라는 평가에 절대적으로 공감한다. 감동적이지도 재미있지도 않다. 비상식적이고 우화라고 하기엔 너무 허술하다. 이걸 소설이라고 내놓았다니, 너무 잘 나간다고 막 출판한 느낌이다. 사서 읽지 마시라. 후회한다. 



Ame'lie Nothomb (1966~ ) - 위키를 보면 알겠지만, 실제로 거의 매년 1권 이상의 소설을 내고 있다!! 





황산 - 4점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문학세계사


Comment +0




얼음의 책

한유주(지음), 문학과지성사 




문장은 대체로 짧다. 그렇다고 긴 문장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문장들의 호흡은 한결같이 짧고 반복적이며, 작가 한효주의 숨소리가 문장들에 어김없이 들어가거나 들어갈 것으로 계획되었던 '있다'와 '없다' 사이 어디쯤 자리잡고 앉아있었. 그 숨소리에 귀기울이며 나는 이 소설집을 읽는다. 그리고 읽었다. 계절과 계절 사이를 지나, 작년을 지나 올해 봄까지. 


그 사이 아이는 자라나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고, 자기 주장을 펼쳤고, 어른들의 말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이 들고 늙어가는 우리들은 서로를 배려하며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다. 아이가 상처 입으며 우리 속으로 들어오는 동안, 나는, 늙어가는 우리들은 우리 밖으로 나가 혼자 웅크리고 말을 잃어버린다. 그렇게 아름답게 수다스럽던 청춘이 사라지고, 그 청춘 옆에서 조용히 젊은 영혼을 어루만지던 책도, 언어도 얼어 간다. 그가 내 곁을 떠나고 그녀 주변을 맴돌던 그 화사한 미소도 사라진다. 


변화란, 어쩌면 과거의 상실이고 다시 오지 않을 사랑의 증거다. 아마 작가 한효주는 얼어버린 마음을, 잃어버린 단어, 혹은 어떤 대명사를, 따스함을 찾아 떠난 여행길에서 스스로 움츠리고 가라앉고 조용해지며 팔을 내리고 손을 굳게 쥐고 입을 닫게 되는 자신을 발견한 것일지도 모른다. 


침묵을 견딜 수 없어질 때쯤 해가 완전히 졌다. 실내등이 켜져 있었지만, 매우 어두웠다. - 206쪽  


결국 침묵 바깥으로 나갈 일이 없다. 변화 앞에서 침묵은 그녀의, 나의 유일한 무기였고 그 무기가 잘못되었음을 깨닫는 건, 언제나 황혼 녘이다. 작가의 숨소리에서 주저하며 강요된 억제의 불편함이 느껴지는 건 나 뿐일까. 때론 글쓰기보단 우는 것이, 잔뜻 술에 취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그래서 나이 들고 보니, 글쓰기가 내 일상에서 저 멀리 달아나, 도망가, 내 곁으로 오지 않을 거리로 밀려나있긴 했지만. 


문장이 딱딱해지고 건조해지고 반복되며 있음과 없음에 매달리게 된다. 실험적 글쓰기가 아니라, 침묵 밖으로 나가기 위한 싸움이고 이미 일어난 변화에 저항하기 위한 일종의 전략이다. 얼지 않기 위한 필사적 노력이다. 그렇게 작가는 나이가 들고, 변하고, 나도 이미 죽은 날이 더 가까운 나이가 되었다. 변화, 참 싫다. 그렇게 얼어가는 건 더 싫다. 



얼음의 책 - 8점
한유주 지음/문학과지성사




Comment +0



Arthur Golden의 <<Memoirs of a Geisha>>(Vintage)를 읽다가 옮겨적는다. 회상으로 넘어가는 부분이 인상적이다(영어로 읽어서 그럴 지도 모르겠다). 



Long before midnight, Pumpkin and the two elderly maids were sound asleep on their futons only a meter or so away on the wood floor of the entrance hall; but I had to go on kneeling there, struggling to stay awake until sometimes as late as two o'clock in the morning. Granny's room was nearby, and sh slept with her light on and her door opened a crack. The bar of light that fell across my empty futon made me think of a day, not long before Satsu and I were taken away from our village, when I'd peered into the back room of our house to see my mother asleep there. My father had draped fishing nets across the paper screens to darken the room, but it looked so gloomy I decided to open one of the windows; and when I did, a strip of bright sunlight fell across my mother's futon and showed her hand so pale and bony. To see the yellow light streaming from Granny's room onto my futon......I had to wonder if my mother was still alive. We were so much alike, I felt sure I would have known if she'd died; but of course. I'd had no sign one way or the other. 

- p.76 ~ p.77 







Comment +0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The Sense of An Ending 

줄리언 반스(지음), 최세희(옮김), 다산책방



나는 우리 모두가 이러저러하게 상처받게 마련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80쪽) 



살아가면서 과거를 끄집어내는 일이 얼마나 될까. 삶은 고통스러워지고, 사랑은 이미 떠났으며, 매일매일 반복되는 무의미한 일상 속에서 이 세상은 한때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빛깔을 잃어버렸음을. 감미로운 허위만이 우리 곁에 남아 우리 겉을 향기롭게 감싸며 근사하게 보이게 만들지만, 그것은 언젠간 밝혀질 시한부 비밀같은 것. 그럴 때 그 과거는, 어쩌면 우리의 현재를 만들어낸 고통의 근원일까, 아니면 도망가고 싶은 이 세상 밖 어떤 곳일까. 


"토니, 이제 당신은 혼자야."라고 이혼한 아내 마거릿은 전화 속에서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아내의 목소리가 전화 속에서 사라져 버리지만, 토니는 별 반응이 없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 자신이나 아내 마거릿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마치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 듯, 자신의 인생도 그런 궤적을 그리며 평범하며, 이혼했으나 세상에서 가장 잘 자신을 알고 있는 마거릿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 믿는다, 혹은 착각한다, '우리 부부'라는 단어 속에서.  


늙어버린 토니 앞에 갑자기 등장한 과거는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다. 그저 과거일 뿐이며, 토니 밖에서, 사악한 질투심에 무너졌던 토니의 영향력 아래에서 어떤 우연이 만들어졌을 뿐, 토니는 토니이고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마치 다른 우주에 존재하는, 서로 만날 수 없는 행성들처럼. 


인간은 생의 종말을 향해 간다. 아니다, 생 자체가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 그 생에서 가능한 모든 변화의 닫힘을 향해, 우리는 기나긴 휴지기를 부여받게 된다. 질문을 던질 시간적 여유를. 그 밖에 내가 잘못한 것은 무엇이었나? (255쪽) 


과거 속에서 젊은 베로니카는 토니를 버렸고, 에이드리언은 그의 친구 토니를 버린 베로니카와 사랑을 나눈다. 그래서 뭘? 에이드리언은 질투심으로 눈이 먼 토니의 사악한 언어 앞에서 무너졌을까. 아니면 ... 


1부는 젊은 토니를, 2부는 늙은 토니가 화자로 나온다. 그리고 2부는 베로니카의 어머니 사라 포드 부인의 유언장과 자살한 에이드리언의 일기가 실마리가 되어, 토니의 기억을 새로 만들며, 인생의, 사소하지만 비극적인 우연에 대해 이야기한다.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이야기는 쉴새 없이 우리의 마음을 때리지만, 결말을 짐작하긴 쉽지 않다.  


1부의 토니와 2부의 토니는 서로 경쟁하며 결말을 향해간다. 결국 과거는 편집되고 윤색되고 변경된다. 과거는 현재에서만 해석 가능한 어떤 이야기일 뿐, 과거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존재한다면 그건 아무 의미도 없다. 서랍에 깊숙이 숨겨져 있는 어둠 속의 사진과 같은 것. 


의미는 해석되지 않는다. 이 소설은 갑자기 등장한 과거의 숨겨진 이야기를 끝에 가서 드러내지만, 그리고 그 이야기를 향해 모든 것들이 구성되어 있지만, 에이드리언의 자살을 설명하지 못한다. 실은 에이드리언의 자살이 도리어 살아남은 토니의 이기적인 평범함을 설명하게 되는 기묘한 이야기 구조는 도리어 악의적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지독히 냉소적이다. 


우리는 타인에게 관심없는 토니들이고 늘 혼자였고 앞으로도 혼자일 토니다. 사랑마저도 자기를 합리화해야 하는 것이고 그 사랑을 잃어버렸을 때조차 자신의 문제가 아닌 그/그녀의 문제로 환원시킨다. 이래저래 상처 받기 마련이라고 여기지만, 상처마저 자신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온 것이라 믿는다, 이러저러하게. 


마거릿마저 토니를 향해 '당신은 혼자야'라고 말했을 때,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늙은 베로니카가 '아직도 전혀 감을 못 잡는구나, 그렇지? 넌 늘 그랬어,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그러니 그냥 포기하고 살지그래'라며 토니를 질책했을 때조차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소설이 끝날 때까지. 


거기엔 축적이 있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 혼란이 있다. 거래한 혼란이 있다.(255쪽) 


소설은 이 마지막 문장으로 끝나지만, 책임은 혼란 속에서 사라져버리고 사람들은 저 마다의 상처를 가진 채 홀로 서 있을 것임을 예감하게 한다. 시간은 한 개인의 삶에 무신경하고 나는 사랑하는 너에게 관심이 있으나, 끝내 너를 알지 못할 것이다. 너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신비이니, 나는 너를 알려고 하지 않을 것이며 알려고 하는 모든 시도는 실패로 끝날 것이다. 에이드리언만이 과거 속에서 현재를 예감하고 미래에 절망했을 뿐이다. 토니의 내일에 대해 상상하지 말자. 그는 적당히 비관적으로 변할 테지만, 그렇다고 그의 삶이 급격한 변화를 겪거나 아픔을 겪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이 점에선 베로니카의 견해가 옳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고 혼자였던 어떤 이가 갑자기 우리가 되지 못한다. '우리 부부'라는 단어만큼 어색한 표현도 없을 텐데, 토니는 ... 그래서 나는 참 악의적이다라고 적는 것이다. 


할아버지 토니는 20대 토니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베로니카를 향해서도, 에이드리언을 향해서도, 마거릿을 향해서도. 결국 혼자인 토니는, 혼자 거리를 걸으면서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이었나' 스스로에게 묻겠지만, 금방 잊고 말 것이다. 





* 2017년 영화로도 만들어질 예정이다. 

The Sense of an Ending : http://www.imdb.com/title/tt4827986/ 



 



Comment +0


강상중과 함께 읽는 나쓰메 소세키 

강상중(지음), 김수희(옮김), AK 



강상중 교수의 책이 계속 번역되어 소개된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그의 책은 그 존재만으로도 한국과 일본을 잇는 가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한국이름을 쓰는 재일한국인으로, 그리고 일본지식인으로 살아가는 그는, 한국과 일본 너머 어떤 곳을 지향하는 듯하다. 적어도 강상중을 읽는 일본인 독자나 한국인 독자는 서로 대화를 나눌 정도의 식견을 가졌을 것이다. (손정의도 이와 비슷하고 그는 이미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을 넘어 세계인이 되었으니까)


이 책은 강상중 교수가 읽은 나쓰메 소세키에 대한 안내서이다. 나쓰메 소세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본 소설가다. 무라카미 하루키, 마루야마 겐지, 오에 겐자부로를 지나 나쓰메 소세키로. 그 중에서도 나쓰메 소세키는 단연코 최고다. 이는 그가 일본소설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20세기 초반에 이미 20세기 전체를 물들이게 될 어떤 근대성을 포착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강상중 교수는 <<살아야하는 이유>>(송태욱 옮김, 사계절출판사)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강상중 교수는 이 책에서 가볍고 부드럽게 그가 읽은 나쓰메 소세키를, 그리고 소세키의 소설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게 소세키의 생애와 주요 소설들에 대해 스케치를 하며 소개하고 있다.


사회는 어쩌면 미치광이들이 모여 있는 곳인지도 모르겠다. 미치광이들이 모여 맹렬히 싸우고 서로 으르렁거리고 욕을 퍼붓고 빼앗고, 그 전체가 집단적으로 세포처럼 무너졌다가 다시 솟아나고 솟아났다가 다시 무너지며 살아가는 곳을 사회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 중에서 다소 이치를 알고 분별이 있는 놈은 오히려 방해가 되니 정신병원을 만들어 가둬둔 채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자는 보통 시민이고 병원 밖에서 날뛰고 있는 자가 오히려 미치광이다. 미치광이도 고립되어 있으면 미치광이 취급을 받지만 단체가 되어 세력이 생기면 정상적인 인간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심한 미치광이가 돈과 권력을 남용하여 대다수 경미한 미치광이들에게 난동을 부리게 하고, 자신은 사람들로부터 훌륭한 사내라는 말을 듣는 예가 적지 않다. 

- <<나는 고양이로서이다>> 중에서 


어쩌면 반-시대적이며 지식인 중심적인 소세키의 소설을 부담스러워할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 좋을 것이다. 나 또한, 아직 <<나는 고양이로서이다>>를 읽지 않았지만, 소세키 소설이 가진 태도를 이 책을 통해 보다 명확하게 알게 되었고 할까. 


그리고 몰랐던 사실 하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에 대해 나쓰메 소세키는 소설 속에서 매우 냉정하고 객관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동시대와의 거리 두기가 소세키 소설이 시대를 넘어 감동과 울림을 가지게 된 계기가 아닐까. (1,000엔 지폐에 원래 이토 히로부미가 인쇄되었는데, 주변국의 반발로 나쓰메 소세키로 바뀌었다는 사실은 이에 비추어 무척 흥미로운 일이기도 하다) 


솔직히 나야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에 대해 열광하지만, 일부 독자들에게 소세키는 다소 어렵게 느껴진다는 사실을 역자 후기를 통해 처음 알았다. 어쩌면 일종의 교과서 소설에 대한 반감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점에서도 이 책은 나쓰메 소세키에 대한 재미있고 유용한 지침서가 될 것이다. 그리고 강상중 교수는 더 깊이 들어가지 않고 딱 그 수준에 맞추어 서술해내간다. 



* 최근 현암사에서 나쓰메 소세키 전집이 나오고 있다. 아래와 같은 장정으로. 강력하게 추천한다. 나는 이 시리즈가 나오기 전에 번역된 소설들 다수를 구입한 상태지만. 






Comment +0




그로 깔랭 - 내 생의 동반자 이야기.

에밀 아자르 지음. 지정숙 옮김.

동문선.

 

 

 

외롭지 않아? 그냥 고백하는 게 어때. 외롭고 쓸쓸하다고. 늘 누군가를 원하고 있다고. 실은 난 뱀을 키우고 있지 않았어. 그건 나야. 나의 다른 모습. 길고 매끈하지만,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내 모습이었어.

 

드레퓌스양을 사랑하고 있지만, 드레퓌스양에겐 말하지 않았어. 난 그녀의 눈빛만 봐도 그녀가 날 사랑하고 있다는 걸 느껴. 그래, 그녀와 난 엘리베이터에서만 이야기를 했을 뿐이지. 한 두 마디. 그 뿐이긴 하지만, 난 알 수 있어. 그리고 창녀로 만나긴 했지만, 우리는 서로에 대해 많은 부분을 공유할 수 있었지.

 

그로 깔랭을 동물원으로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삶이 바뀐 건 아니야. 외롭고 쓸쓸하다는 걸 숨기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을 뿐. 그리고 보면 그로 깔랭을 키우면서 난 날 숨기고 있었던 셈이군. 내 외로움을, 내 사랑을, 내 의도를, 내 진심을, ...

 

------------

 

참 슬픈 소설이다. 말을 하지 못하는 뱀 - 그로 깔랭을 키우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지만, 실은 뱀이 이 소설의 중심 주제는 아니다. 에밀 아자르가 이야기하고 싶은 바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교감을 나누는 삶이 파리라는 도시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선택하는 곳은 창녀집이다. 그 곳에서 이 주인공은 그가 사랑하는 드레퓌스양과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이 하룻밤 이후 그는 그로 깔랭과 떨어질 수 있게 된다.

 

그 정도로 거대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건 힘든 일일까. 그 정도로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얻지 못하는 것일까. 에밀 아자르, 로맹 가리가 왜 권총 자살로 자신의 인생을 끝내었는지 알 수 있을 것같다. 이 책 가득한 유머는 실은 '나 너무 외롭고 쓸쓸해'의 동어반복이며 주인공이 키우는 그로 깔랭이라는 이름의 뱀 또한 실은 주인공의 숨겨진 '반영물'이다. 즉 '꾸쟁(주인공이름) = 그로 깔랭', '인간 = 뱀'의 등식이 성립한다.

 

유쾌한 유머를 가장하고는 소설은 나에게 결정타를 날리며 끝을 맺는다. 

 

"빠리 같은 커다란 도시 속에서 사람들은 결코 허전함을 느낄 걱정이 없다."

 

----

 

(서울에서도 마찬가지지. 결코 허전함을 느낄 걱정이 없어. 이미 온 몸 가득 허전함 속에 파묻혀 있으니, 허전함을 알기나 하겠어. 로맹 가리... 나도 권총 자살로 마감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군.)

 

 

--- 


위 리뷰를 쓴 지도 10년이 넘었다. 다시 읽으니, 에밀 아자르, 혹은 로맹 가리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그가 사랑했던 진 세버그가 떠오른다. 그의 소설은 유머 속에서도 숨길 수 없는 비극을 담아낸다. 벗어날 수 없는 어떤 비극성을 포착한다. 서울에서도 사람들은 결코 허전함을 느낄 걱정이 없다. 늘 무언가를 해야 하고 쫓김을 당하고 불안해한다. 대도시에서의 일상인 걸까, 아니면 현대인의 운명일까. 그런데 이 책은 다시 나오지 않나? 로맹 가리의 책들이 다시 출판되던데 말이다. 


- 로맹 가리, 혹은 에밀 아자르. 


Comment +0




현기증. 감정들 Schwindel. Gefühle

W.G.제발트(Sebald) 지음, 배수아 옮김, 문학동네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 우연히 일어난 피부 접촉은 늘 그랬듯이 무게도 중력도 없는 어떤 것, 실제라기보다는 허상과도 같은, 그래서 한없이 투명한 사물처럼 나를 관통해가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95쪽) 



'벨, 또는 사랑에 대한 기묘한 사실', '외국에서', 'K박사의 리바 온천 여행', '귀향'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단편소설집일까, 아니면 장편소설일까. 아니면 이 구분이 그냥 무의미한 걸까. 장편소설이 아니라 단편소설집이라고 하기엔 4개의 이야기는 하나의 주제의식을 공유하는데, 그건 여행(에의 기록/기억)이다. 서로 다른 인물들의, 서로 다른 도시로의, 서로 다른 시기 속에서의, 하지만 동일한 테마를 가진 여행의 기록(기억), 이 소설이 장편소설이 되는 이유이면서 제발트가 가지는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떠나는 것, 낯선 곳(혹은 잊혀졌던 곳)에서 머무는 것, 그 곳에서 자고 걷고 만나고 이야기하며 얇고 사소한 감정의 변화를 깊숙하게 느끼는 것, 그리고 기억해내는 것, 기록하는 것, ... 소설은 이렇게 구성되어 흘러간다. 하지만 우리가 익히 아는 그런 여행(의 기록)이 아니다. 


밖으로 나오는 길에 흰 염주비둘기 한 쌍을 지켜보았다. 비둘기들은 여러 번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날개짓 몇 번으로 나무 꼭대기 높은 가지로 위로 급격하게 떠올랐다가, 짧고도 영원하게 느껴지는 순간 동안 고요히 창공에 머문 다음 다시 앞으로 쏟아질 듯한 자세로 하강하며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나지막한 구르륵 소리를 냈고, 그 중 몇 그루는 이 백 년 이상 그 자리에 서 있었을 것이 분명한 키프로스 나무들 주변에서 날개를 고정시킨 채 커다란 원을 그리며 빙빙 돌았다. (70쪽) 


나로선 이 여행들(의 기록)을 따라가기엔 참 힘들었다. 서술은 빽빽하고 무거우며, 한 번 표현된 감정은 곧바로 사물이 되어 아래로 가라앉는다. 독자의 시선은 무거워진 분위기를 따라 아주 느리고 천천히 움직인다. 한참을 읽었다 싶지만, 고작 몇 페이지를 지났을 뿐이고 그와는 반대로 시간은 참 빨리 흐른다. 


감정을 서정적으로 이야기하는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도리어 딱딱하고 즉물적이다. 독자는 제발트의 서술을 따라가지만, 그 곳으로 감정이입되어 들어가지 않는다, 못한다.  


어쩌면 이것도 늙어간다는 징표일까,  아니면 제발트식 여행(의 기록)이란 그런 걸까. 낯선 나와 마주하거나 잊고 있던 나를, 혹은 내가 무심코 흘려보냈던 기억들을 새삼스레 되새기면서, 끊임없이 뒷걸음질치면서 타자화, 사물화하는 걸까. 여행을 하면서 나를 찾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나를 지워나가는 걸까, 그리고 스스로 수수께끼가 되는 걸까. 


그는 특히,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일이 내 안에서 저절로 설명되고, 그럼에도 그 일들이 더욱 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수수께끼처럼 변해간다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199쪽)


우리는 외부를 끝내 알 수 없다. 실은 내부도 알 수 없다. 내 마음은 텅 비었고 영혼의 존재를 알 수 없기에 믿을 수도 없다. 신념은 조각났고 소설은 의미 찾기를 그만 두었다. 고작 보여줄 뿐이다. 그것도 자세하고 정확하게. 감정마저도 객관적으로. 


제발트의 문장이 갖는 독일어의 밀도는, 역자로서의 경험이 참으로 빈약하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생각하기에, 문학 텍스트 중에서도 가장 치밀한 종류이며 그것이 갖고 있는 텍스처texture의 성질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252쪽) 


배수아의 의견대로, 너무 빽빽하고 무거워서 따라가기 버거울 정도다. 하지만 그녀의 '제발디언'은, 글쎄다. '제발디언'이라는 단어는 매우 사적인 호감을 드러내는 표현일 뿐, 일반 독자가 읽기엔 어렵고 재미없고 문장에 너무 많은 힘을 쓰고 있다고 할까. 마치 야니스 크세나키스(iannis xenakis)의 음악을 듣는 기분이랄까. 하긴 나도 크세나키스의 음악을 좋아하지만... 


소설 중간에 등장하는 피사넬로 작품은 아래와 같다. 고딕 양식의 성 아나스타시아 성당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다. 15세기 초반에 그려진 초기 르네상스 작품이다. 그나저나 이 작품의 일부를 소설에 등장시킬 생각을 하다니... 


St. George Liberating the Princess of Trebizond

Pisanello (1395 - 1455), fresco, 223 × 620 cm (87.8 × 244.1 in)

from 1436 until 1438

Church of Saint Anastasia (독일어 - Pellegrini-Kapelle)  


과감하게 읽으라는 권유는 하지 못하겠다. 다만 제발트가 살아있었다면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올라갔을 것이며, 노벨문학상을 받았거나 그만한 명성을 누렸을 것이라는 것이다. 


사족이긴 하지만 가끔 한국 문학판에 대해 아쉬운 건 번역된(혹은 번역되지 않더라도) 동시대 외국 문학이 어떻게 한국 작가들과 작품 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에 대해서 너무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설가 배수아의 초기 작품들을 읽고 나는 얼마나 실망했던가. 그 이후 그녀의 작품을 읽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오에 겐자부로가 십 수년 전 하루키를 비난했지만, 지금은 인정한다고 말했듯이, 그녀의 최근 작들이 궁금해진다. 적어도 제발트를 읽고 흔들렸다면 말이다. 



영어 번역판 표지



* 제발트의 다른 소설. 

2016/05/07 - [책들의 우주/문학] - 아우스터리츠Austerlitz, W.G.제발트Sebald





Comment +0





책상은 책상이다

페터 빅셀(지음), 이용숙(옮김), 예담 



뭐라고 해야 하나, 이런 경우를. 채 30분도 되기 전에 다 읽은 이 소설집. 뭔가 생각하기도 전에 금방 끝나버리는 소설. 그리고 누구나 조금의 관심만 있다면 한 번쯤은 생각하게 되는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진 짧은 소설들. 하지만 페터 빅셀은 이 소설들을 썼고,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에피소드라고 하기엔 지금 여기에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주인공들의 또다른 공통점은 대부분 나이가 많은 남자라는 사실이다. 정서적으로 유연한 여성들에 비해 남자들은 실제로 나이가 들어가면서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사회와 소통이 점점 어려워지는 경우가 더 흔하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젊은 작가 빅셀이 고집 세고 편협한 이런 노인들을 더 없이 따뜻하고 이해가 충만한 시선으로 그려냈다는 점이다. 지구가 둥근지 확인하려고 떠난 노인을 날마다 기다리는 작가, 또 요도크 밖에 아무 것도 모르는 할아버지를 애정으로 감싸는 작가의 태도는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세상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려는 작가적 사명감의 표현이다. - 옮긴이의 말 중에서, 101쪽


고집 세고 편협한 이런 노인들을 만난다면 우리들은 과연 어떻게 할까? 따뜻하고 이해가 충만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아니면 고집 세고 편협한 젊은이들을 만난다면? 과연?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사회와의 소통이 어려워진다면, 그건 그/그녀의 문제인가, 사회의 문제인가,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원래부터 그렇게 생겨먹은 문제인가. 


작가적 사명감은 이미 일어난 문제를 감싸 안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의 근원을 파고들어야 하는 건 아닐까? 페터 빅셀의 한계는 여기에 존재한다. 따뜻하고 감성적인 동화적 시선으로 현대의 문제를 바라보고 어물쩡 넘어가려는 것이다. 


다시 묻자. 당신 앞에 어버이연합의 할아버지가 자신의 고집을 내세우면서 싸우려고 든다면? 엄마부대 봉사단의 할머니가 나타나 편협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논리로 세월호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또는 일베에 빠져 당신의 의견에 대해 사사건건 반박하며 과격한 논리로 공격을 일삼는다면? 


이 소설은 이 지점에서 무너져내린다. 아마 많은 이들이 이 소설을 읽고 자신의 잘못, 소외되고 편협한 사고와 언어를 가지게 된 이들에 대해 무정하게 대했다는 것을 후회하고 반성한다면, 그건 잘한 일일까? 


글쎄다. 내가 읽은 이 소설집은 좀 형편없다. 많은 사람들이 읽고 감동했다지만. 





Comment +0



풀베개

나쓰메 소세키(지음), 오석윤(옮김), 책세상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풀베개>>의 놀랍고 아름다운 시작은, 어쩌면 이 소설의 시작과 끝을 동시에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소설은 독자가 읽게 되는 첫 문장들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어쩌면 '하이쿠 소설'이라는 후대의 평가도 우호적인 것일지도. 



 산길을 올라가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지(理智)에 치우치면 모가 난다. 감정에 말려들면 낙오하게 된다. 고집을 부리면 외로워진다. 아무튼 인간 세상은 살기 어렵다. 

 살기 어려운 것이 심해지면, 살기 쉬운 곳으로 옮기고 싶어진다. 어디로 이사를 해도 살기가 쉽지 않다고 깨달았을 때, 시가 생겨나고 그림이 태어난다. 

 인간 세상을 만든 것은 신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다. 역시 보통 사람이고 이웃끼리 오고 가는 단지 그런 사람이다. 보통 사람이 만든 인간 세상이 살기 어렵다고 해도 옮겨 갈 나라는 없다. 있다고 한다면 사람답지 못한 나라로 갈 수 밖에 없다. 사람답지 못한 나라는 인간 세상보다 더 살기가 어려울 것이다. 

 옮겨 살 수도 없는 세상이 살기가 어렵다면, 살기 어려운 곳을 어느 정도 편하게 만들어서 짧은 생명을, 한 동안만이라도 살기 좋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시인이라는 천직이 생기고, 화가라는 사명이 내려진다. 예술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인간 세상을 느긋하게 만들고, 사람의 마음을 풍성하게 해주는 까닭에 소중하다. 

 살기 어려운 세상에서 살기 어렵게 하는 번뇌를 뽑아내고, 고마운 세계를 직접 묘사해내는 것이 시고 그림이다. 혹은 음악이고 조각이다. 자세히 말한다면 묘사해내지 않아도 좋다. 그저 직접 보기만 하면 거기에서 시도 생기고, 노래도 샘솟는다. 착상을 종이에 옮기지 않아도 보옥이나 금속이 부딪쳐서 나는 소리는 가슴속에 일어난다. 

- 7쪽~ 8쪽



하지만 소세키는 우리를,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나는 소설 속의 '나미 氏'와 같은 이를 그리워하고 있는 지도 모르고, 작중화자처럼 그런 여행을 꿈꾸고 있는 지도 모른다. 나에게 이 소설은 부러움의 대상인 셈이다. 


그래서 소설은 전쟁 중인 현실과 멀리 떨어져, 딴 세상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는, 아주 자주 딴 세상을 꿈꾼다. 그건 유토피아가 아니다. 그저 지금 여기를 벗어나 잠시 쉴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남 몰래 연애도 하고, 사랑도 하고, 경제적 불안이나 세상사의 갈등이나 불협화음에서 벗어나, 어떤 사색의 풍요로움 속에 빠지고 싶은 게다. 


이 소설은, 바로 이 사색의 풍요로움으로 넘쳐나며, 나미 氏의 가느다란 아름다움에 취해 있다. 소세키의 소설들 대부분이 현실 속에서 갈등하며 흔들리는 자아의 심리를 보여준다면, 이 <<풀베개>>는 그 갈등과 흔들림에서 한 발짝 옆으로 벗어나 꿈 속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소설 끝에서 나미 氏의 이혼한 남편이 등장하고 전쟁터로 나가는 규이치를 배웅해주는 장면에서, 주인공 화자가 그림 한 장면을 포착해내는 순간, 결국 예술의 창작은 꿈에서 벗어나 현실의 슬픔 속에서 나온다는 걸 이야기할 땐, 여행의 끝은 언제나 집으로 돌아오는 것임을 비극적으로 깨닫게 된다. 



나미 씨는 우두커니 떠나가는 기차를 보내고 있다. 그녀가 우두커니 서 있는 동안에, 이상하게도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애련이 얼굴 가득히 떠 있다. 

"그거야! 그거야! 그게 나오면 그림이 됩니다."

나는 나미 씨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속삭였다. 내 가슴 속의 화면은, 뜻하지 않았던 바로 이 순간에 이루어졌다. 

- 190쪽 



Comment +0



민음사에서 내던 <<세계의 문학>>이 지난 겨울호로 '발행을 중단'했다, 혹은 폐간했다. 문학 잡지의 사소한 발행 중단이라고 하기엔 <<세계의 문학>>이라는 잡지가 가졌던 위상이나 내가 즐겨보던 잡지엿던 터라,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 내가 대학을 입학하고 난 다음, 처음 샀던 문학잡지이기도 했던 <<세계의 문학>>. 그 해 박일문이 '하루키 패러디'라는 지적을 받으면서 <오늘의 작가상>을 받았고, 나는 <<세계의 문학>>에 실린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읽었다.


 



<<창작과 비평>>이나 <<문학과 사회>>와 달리, 좀 더 문학주의적이라고 할까, 이론주의적이라고 할까. 그 때 내가 받았던 인상은 그랬다. 그동안 많은 여러 문학 잡지들이 발행을 중단했다. <<문학정신>>, <<외국문학>>, <<상상>> 등등. 세상이 변하면 문학도 변하고, 문학잡지도 변해야 한다. 가끔 들리는 공공 도서관에 비치된 문학잡지들을 보며, 누가 저 잡지들을 읽을까 언제나 궁금하다. 결국 학생이나 관계자, 또는 나같은 이들이 읽을테지만. (나 같은 이들이라, ... 적고 보니, 참 쓸쓸하다는 생각이...)  


그래서 마지막 호를 샀다. 산 지 벌써 몇 달이 지났건만, 아직도 읽지 못한 채, 이 글이나 적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들 중의 하나가 바로 소셜 미디어와 사람들 간의 소통 증가다. 사람들은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등과 같은 소셜 미디어같은 것들의 등장과 활성화로 사람들이 자주 대화하고 소통이 늘어났다고 여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반대다. 


우리는 대화하면서 서로를 알아간다. 서로 얼마나 닮았는가를, 서로 얼마나 다른가를. 그러나 소셜미디어의 발달은 서로의 공통 관심사를 향해 갈 뿐, 서로의 다른 점을 부각시키지 않는다. 다른 점들이 부각되는 순간, 우리는 서로를 차단한다. 페이스북 알고리즘은 비슷한 사람들을 서로 끌어당기고 결국 우리는 비슷한 끼리끼리 모여 섬을 이룬다. 


그렇게 문학도, 문학잡지도 섬이 된 것이 아닐까. 한 때 문학은 서로 만나지 못하고 대화할 기회 조차 없었던 이들을 이어주던 다리가 되었다면, 지금은 스스로 고립되어가는 섬이 되고 있다. 


<<세계의 문학>>이 발행을 중단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문학의 존재나 위상이 예전만 못하고 잡지도 그러했기 때문은 아닐까. 이제 문학은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해 가야하는 건 아닐까. 


소설가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을 보면서 그녀의 수상보다 저들은 번역문학도 자신들의 문학 속으로 끌어당기는구나하며 부러웠다. 우리에게는 번역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나 비평 따윈 없다. 그리고 한국의 문학이 그것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가에 대해 돌아보지도 않는다.


제발트의 소설을 읽고 난 다음, 다큐멘터리에 대해 생각했다. 그 스스로 다큐라고 이야기했으니까. 그러다가 진짜 다큐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문학은 타자를 받아들이며 성장해간다. 아니, 예술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무너뜨리고 낯선 것을 받아들이면서 앞으로 나간다. <<세계의 문학>> 마지막 호 편집자 서문에 알레시예비치에 대한 이야기가 실린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세계에 대한 나의 비전, 즉 내 귀가 어떻게 삶을 듣고 또 내 눈이 어떻게 삶을 보는가를 전달하는 데 가장 잘 맞는 장르를 계속 찾아왔다. 이것도 해 보고 저것도 해 본 후 결국 나는 인간의 목소리가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장르를 선택했다. 실제의 사람들은 내 책 속에서 전쟁이나 체르노빌 재난, 그리고 거대 제국의 몰락 등 시대의 중요한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 나라의 역사, 그들 공통의 역사에 대해 구술로써 기록하면서 동시에 그들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말로 옮기고 있다. 오늘날처럼 사람과 세계가 매우 다면적이고 다양해진 상황에서 예술 속 다큐멘트는 점점 흥미로워지는 것에 반해, 그와 같은 예술은 종종 무기력해졌다. 다큐멘트는 그것이 원래의 상태를 포착하고 간직할 때의 리얼리티에 가깝게 우리를 데려다준다. 그 다큐멘트 자료들로 20년간 작업을 하고 그것으로 다섯 권의 책을 쓰고 난 후, 나는 예술이 사람들에 관해 많은 것을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고 선언한다. 

- 영원한 인간을 찾아서 A Search for Eternal Man, 알렉시예비치. 

(http://alexievich.info/indexEN.html)



내가 형식의 문제나 작법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까 늘 고민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알레시예비치는 운이 좋았다고 할 수 밖에. 



나는 전쟁이 아니라 전쟁터의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전쟁의 역사가 아니라 감정의 역사를 쓴다. 나는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역사가다.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시간 속에 살고 구체적인 사건을 겪는 구체적인 사람을 연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영원한 인간을 들여다보아야만 한다. 영원의 떨림을. 사람의 내면에 항상 존재하는 그것을.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박은정 역, 사람이 전쟁보다 귀하다. 중에서 .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이 의미있는 문학인가 판단하기 위해 범주와 장르를 따르는 것은 좋은 문학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즉 그 목소리와 내용으로, 그 영혼과 긴박함으로, 그 진실과 그리고 무엇보다 지혜로서 우리의 세계와 존재에 대한 이해와 경험을 확장하는 글쓰기로써 삶과 죽음에 반응하는 것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필립 구레비치Philip Gourevitch, 논픽션은 노벨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Nonfiction deserves a Nobel, <<Newyorker>> 2014. 10. 9 



<<세계의 문학>> 창간호다. 1976년에 태어난 이들도 이젠 40대인가. 그만큼 세월이 흘렀고 세상이 변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변할까 생각하니, 아찔하기만 하다. 하지만 아직 우리는 호메로스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음을, 플라톤이 저 이데아의 세계를 이야기했던 그 비극적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글이 두서없고 뜬금없다. 문학이라, ... 참 오랜만에 생각해보게 된다.  



출처: http://myungworry.khan.kr/513 






Comment +0




아우스터리츠 Austerlitz 

W.G.제발트(지음), 안미현(옮김), 을유문화사 




병상에 누워, 안경을 쓰지도 못한 채,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를 읽었다. 병상에서의 소설 읽기란, 묘한 느낌을 준다. 일상을 벗어난 공간 속에서, 현실은 적당한 거리를 둔 채 떨어져있고, 허구와 사실은 서로 혼재되어 혼란스럽게 한다. 시간마저 겹쳐 흐르며 외부는 모호해진다. 어쩌면 현대 소설이란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마치 <<아우스터리츠>>처럼.  


제발트는 소설 중간중간 사진들이 인용하는데,  마치 '이 소설은 허구가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이다'라고 말하는 듯 보였다. 허구와 사실 사이를 오가며, 소설은 대화의 인용으로 이루어진다. 문장의 호흡은 길고 묘사는 서정적이면서 치밀하고, 등장인물들의 마음은 한결같이 슬프기만 하다. 과거는 추억이 되지 못하고 스스로도 모르고 있었던 내 마음의 상처를, 가족의 상처를, 현대의 비극을 다시 꺼내어 보듬고 어루만진다. 대화는 자주 끊어지지만, 기억은 이어지고 소설은 챕터도 없이 그냥 하나다. 시간은 끊김 없고 끊어져 있던 기억들도 그것 안에서 하나로 이어져있듯, 소설은 허구와 사실을 이어 하나로 만든다.


아직도 2차 대전의 상처를 드러내며, 정면으로 응시하며 나아가는 <<아우스터리츠>>를 보며, 요즘 한국 문학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낀다. 미국의 이창래도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정작 한국 작가들만 무관심한 듯 싶기도 하고...


<<아우스터리츠>>의 명성은 이 작품을 향하고 있는 문제 의식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소설 작법에서부터 전혀 다른 글쓰기를 보여주며, 현대 소설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있다. 그 스스로 '다큐멘터리 픽션'(1)이라고 이야기하듯, 이 소설은 사건 중심이라기 보다는 사실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몇 개의 중요한 사실들과 이를 연결하여 소설의 중심 뼈대(내러티브)를 만들고 그 뼈대는 다시 사진들, (건축)공간에 대한 서술, 인물들에 대한 탐구와 인터뷰 등으로 형체를 이룬다. 


그런데 이 작법은 소설 감상에 그 어떤 영향을 주지 않으며, 도리어 전쟁에의 상처, 가족의 비극, 그리고 쓸쓸한 회상 속으로 빨려들게 하며, 작품에 대한 몰입도를 높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소설적 완성도를 지닌다.

 


Bigsby(*) suggests that it was out of frustration with the strictures of academic publication that Sebald turned to creative writing (a vague and ungainly term that, by default, winds up being the most accurate generic description of his work). "He'd originally taught German literature," says Bigsby, "and had published the kind of books that academics do. But he got increasingly frustrated, and began to write in what he called an 'elliptical' way, breaching the supposed boundaries between fast and fiction - not what you're supposed to do as an academic." Sebald himself sometimes described his work as "documentary fiction," which goes some way toward capturing its integration of apparently irreconcilable elements. 


제발트는 학술 서적들의 심한 비난들에 대한 불만으로 문학창작(자연스레, 그의 작품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포괄적인 설명이 될 수 있는, 다소 모호하고 어색한 단어인)의 길로 들었다고 빅스비는 말한다. "그는 원래 독일 문학을 가르쳤어요"라고 빅스비는 말하며, "그는 학교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면 으레  하듯 몇 종의 책들을 출판했죠. 그러나 그의 불만은 계속 늘어났으며, 그가 말하는 '생략된(elliptical) 방식'으로이미 가정되어 있던 사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제발트에게 대학 연구자처럼 하라고 제시되어져 있던 기존 방식이 아니라." 제발트는 그 스스로 그의 작품을 종종 명백하게 양립할 수 없는 요소들의 결합을 포착하기 위한 어떤 방식들을 향해 가는,  "다큐멘터리 픽션"이라고 표현했다. 


- Why You Should Read W. G. Sebald BY MARK O’CONNELL 

THE NEW YORKER, DECEMBER 14, 2011

http://www.newyorker.com/books/page-turner/why-you-should-read-w-g-sebald  


Christopher Bigsby(1941~): 소설가, 비평가, 제발트가 있었던 University of East Anglia의 Colleague. 



'Elliptical'라는 단어에 대한 번역어를 좀 더 고민해봐야겠지만, 예전에도 한 번 언급했듯이 현대 소설, 아니 현대 예술가들은 스스로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에 대한 작법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해롤드 블룸은 이를 '시적 영향에의 불안'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우리 시대는 새로운 방식, 일종의 혁신을 추구해야만 하는 지점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W.G.제발트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여기에 성공하고 있다.  


-- 



(1) 제발트가 스스로 '다큐멘터리 픽션'이라고 이야기했으나, 그는 노벨문학상을 받기 전에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그리고 2015년 실제로 다큐멘터리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벨라루스의 논픽션 작가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제발트의 문학과 알렉시예비치의 작품은 확연히 다르지만, 제발트를 읽으면서 알렉시예비치를 떠올렸다. 번역된 제발트의 책들을 몇 권 더 챙겨 읽고 자세한 리뷰를 적어볼 생각이다. 그만큼 중요한 작가이기도 하다.알렉시예비치도 읽을 예정이니, 서로 비교해볼까 한다. 



W.G.제발트(Winfried Georg Sebald), 1944 -2001 






* 현대 예술가라면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종종 어떤 이들은 자신의 예술론을 책으로 내기도 한다. 이는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칸딘스키가 그랬고 미셸 빅토르, 로브-그리예, 오에 겐자부로, 심지어 이우환도 자신만의 예술론을 모아 책을 냈다. 아래 책은 미셸 뷔토르의 소설론이다. 소설 쓰기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2014/02/10 - [책들의 우주/이론] - 새로운 소설을 찾아서, 미셸 뷔토르 






Comment +0



 산길을 올라가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지(理智)에 치우치면 모가 난다. 감정에 말려들면 낙오하게 된다. 고집을 부리면 외로워진다. 아무튼 인간 세상은 살기 어렵다. 

 살기 어려운 것이 심해지면, 살기 쉬운 곳으로 옮기고 싶어진다. 어디로 이사를 해도 살기가 쉽지 않다고 깨달았을 때, 시가 생겨나고 그림이 태어난다. 

 인간 세상을 만든 것은 신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다. 역시 보통 사람이고 이웃끼리 오고 가는 단지 그런 사람이다. 보통 사람이 만든 인간 세상이 살기 어렵다고 해도 옮겨 갈 나라는 없다. 있다고 한다면 사람답지 못한 나라로 갈 수 밖에 없다. 사람답지 못한 나라는 인간 세상보다 더 살기가 어려울 것이다. 

 옮겨 살 수도 없는 세상이 살기가 어렵다면, 살기 어려운 곳을 어느 정도 편하게 만들어서 짧은 생명을, 한 동안만이라도 살기 좋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시인이라는 천직이 생기고, 화가라는 사명이 내려진다. 예술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인간 세상을 느긋하게 만들고, 사람의 마음을 풍성하게 해주는 까닭에 소중하다. 

 살기 어려운 세상에서 살기 어렵게 하는 번뇌를 뽑아내고, 고마운 세계를 직접 묘사해내는 것이 시고 그림이다. 혹은 음악이고 조각이다. 자세히 말한다면 묘사해내지 않아도 좋다. 그저 직접 보기만 하면 거기에서 시도 생기고, 노래도 샘솟는다. 착상을 종이에 옮기지 않아도 보옥이나 금속이 부딪쳐서 나는 소리는 가슴속에 일어난다. 

- 나쓰메 소세키, <<풀베개>>, 7쪽~ 8쪽(오석윤 옮김, 책세상)



나쓰메 소세키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소설의 첫 문장들을 이렇게 구성했을까. 나는 몇 주째 이 문장들을 지나 앞으로 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그네슘 부족인지 왼쪽 눈 부근 근육들이 파르르 떨리기를 반복하고, 잇몸은 수시로 붓는다. 어깨가 결리고 입안은 헐었다. 내일에 대한 불안 때문일까, 아니면, ... 


현암사에서 나오는 나쓰메 소세키 전집을 장만하고 싶으나, 그의 소설을 읽을 시간마저 없는 이에게 전집은 사치라는 생각에 ... ... 


비 오는 대체공휴일, 사무실에 나와 일을 했다, 하지만 일은 손에 잡히지 않고, ... ... 











Comment +0





지도와 영토(La Carte Et Le Territoire)

미셸 우엘벡(지음), 장소미(옮김), 문학동네 





매우 선명하다. 이 소설을 읽은 지 네다섯달이 지났지만, 소설 속의 인물들도 선명하고 사건도, 내용도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놀란다. 소설을 읽으면서, 현대미술에 대해 이렇게 박식할 수 있다니, 감탄을 했다. 소설을 쓸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하며 책장을 넘겼지만, 문장, 인물, 사건의 선명함을 너머 어떤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오진 않았다. 도리어 씁쓸하기만 할 뿐. 



친구들도 이미 모두 죽고 어떤 의미로는 이미 과거에 속하게 된, 실질적으로 삶이 끝나버린 노인의 감정을, 형제나 친구처럼, 곧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리라는 약속처럼 죽음을 대하는 노인의 음산하고 담담한 감정을 프란츠 리스트가 말년에 작곡한 실내악 소품들보다 더 잘 표현한 음악은 아마 없으리라. <수호천사에게 올리는 기도>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자슬랭은 젊은 시절을, 학생 시절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 351쪽 



지금 독자는 그 자신과 어떤 연관도 없는 이야기를 읽는다. 고작 책값, 조금의 시간, 그리고 감정의 동요나 사소한 몰입 정도만 가지고. 그런데 미셸 우엘벡도 그렇게 소설을 적는 듯하다. 너무 차갑다고 할까. 마치 얼음처럼. 아무런 가치 평가도 없다. 심지어 주장마저도 없다. 제드나 우엘벡, 혹은 자슬랭의 입을 통해 나오는 이야기, 그 속에서 작가는 어떤 주장이나 가치판단을 내리는 듯 싶지만, 이마저도 차갑기만 하여 호소력을 지닌 주장이라기 보다는 무미건조한 기사처럼 읽힌다. 


결국 건조하고 차가운 대기와도 같은 문장과 서술로 인해 소설은 선명하고 직선들로만 연결되는 구조물을 만들어내지만, 그 그림자는 없다. 모든 등장인물은 정해진 방향으로 움직이거나 이미 움직인 후라, 그 어떤 후회나 반성도 하지 않는 듯 보인다. 최대한 감정이 억제된 인물들로만, 아니 미셸 우엘벡은 의도적으로 즉물적인 서술을 하고 있다. 그리고 무의미한 스틸사진들이 병렬적으로 구성되다가 하나로 합쳐지지만, 그건 제드의 죽음이다. 그것도 담담하게 서술될 뿐이다. 


어떤 이는 현대 미술의 뒷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평할 지 모르겠으나, 과연 그럴까.  '노인의 음산하고 담담한 감정', 아마 이 소설 <<지도와 영토>>를 지배하는 감정일 게다. 



  



그리고 그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는 순간, 펑펑 울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 * 


서평을 다 적고 다시 업데이트를 하다 보니, 문득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떠오른다. 묘한 동질감이 있다고 할까. 





Comment +2

  • 이 저자라면... '복종'이란 책을 썼던 저자 아닌가요... 이슬람 문화를 무조건 나쁜 것으로 폄하해서 소설에 기술해서 논란이 되었던...

    • 말 많은 작가예요. "우엘벡이 누구인가? 1958년생, 보수적 정치성향에 극단주의자, 쓰는 글마다 센세이션을 몰고 다니는 도발적 싸움꾼. 프랑스 태생이지만 테러위협 때문에 현재 아일랜드에 거주 중."(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139) 시인 이장욱은 이렇게 적고 있네요. ~ 하지만 논란만큼 매우 중요한 소설가이기도 합니다. ~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조너선 사프란 포어(지음), 송은주(옮김), 민음사 




결국은 울고 말았다. 소설 끄트머리에 가서, 오스카와 엄마가 아빠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비극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지금 당장이라도, TV 방송 뉴스 채널로 가보라. 모든 뉴스들이 현대판 비극들로 도배되어 있다. 뉴스 앵커나 기자들은 자신들과는 무관한 일인양, 무미건조한 어조와 '이건 진짜야'라는 눈빛으로 또박또박 분명한 목소리로 말한다. 


하지만 오스카는 아빠를 찾아나선다.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아빠를. 



첫 번째 메시지. 화요일 오전 8시 52분. 누구 있니? 여보세요? 아빠다. 있으면 받으렴. 방금 사무실에도 전화했는데 아무도 받지 않는구나. 잘 듣거라, 일이 좀 생겼어. 난 괜찮다. 꼼짝 말고 소방수가 올 때까지 기다리래. 아무 일 없을 거다. 상황을 좀 더 알게 되면 다시 전화하마. 그냥 아빠는 괜찮으니 걱정 말라고 전화했어. 곧 다시 걸게. 


아빠로부터 네 개의 메시지가 더 와 있었다. 9시 12분, 9시 31분, 9시 46분, 10시 4분에. 나는 그것들을 듣고 또 들었다. 무엇을 해야할 지, 아니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어떤 기분이 들어야 할지 미처 알 겨를도 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10시 22분 27초였다. 

발신자 번호를 봤다. 아빠였다. 

- 35쪽 ~ 36쪽



소설은 어수선하고 수다스럽고 유쾌하기까지 하다. 아홉살 꼬마 오스카에겐 모든 것들이 호기심의 대상이자, 그리움의 대상이다. 사진들이 나오고 문장들마저 조각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소설 작법으로 비극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하고 빙빙 둘러가는 과정을 반영하다. 그래서 독자들은 빙빙 둘러, 오스카를 따라가며 9월 11일을 아주 천천히 떠올리며, 그 사건 한 복판에 있었던 어느 가족의 슬픈 이야기를 소설 결말부에 가서야 비로소 마주한다. 


소설에 대한 형식적 파괴, 또는 실험적인 변화가 작품 속 깊숙히 들어가 어우러져 있다. 그래서 스토리와 형식은 하나의 형태를 지니며, 이 소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 원하지 않던 비극과 그 비극을 극복하기 위한 가족의 노력을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Comment +0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The Reluctant Fundamentalist 

모신 하미드(지음), 왕은철(옮김), 민음사 




대화체로 이루어진 소설은 종종 군더더기가 있기 마련인데, 이 소설은 깔끔하다. 이야기하는 사람만 있고 듣는 이는 이야기하는 사람의 대화 속에 등장할 뿐이다. 정치적 논란을 불러올 이야기를 매끄럽게 소화시켰다는 점에서 격찬을 받을 만하다. 


하지만 아직 한국은 전 세계 테러 분위기에서 한 발 비켜서 있다. 몇 번의 피해가 있었지만, 이는 전도 지상주의와 경쟁적이고 배타적 신앙심으로 무장한 이들로 인한 것으로 인해, 이슬람 문명에 대해 우리들의 반감은 적다. 


(특정 종교의 경우에는 이슬람 뿐만 아니라 모든 타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므로, 이 종교의 문제라고 보는 편이... ) 


이 소설은 파키스탄인의 대화로만 구성된다. 미국과 파키스탄을 오가며 서로를 이야기하는 목소리 속에 고뇌가 묻어나오지만, 동시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느낌이랄까. 말을 하지만 행동은 없다. 어쩌면 소설의 형식 속에서 두 문명 사이에 끼인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 것일까. 사랑도 없고 문학도 없고 떠돌 뿐이다. 모든 일들은 그저 지나간 일들이고 회상될 뿐이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 아무도 모른다. 


과격한 이슬람 무장단체의 테러가 일상화되어 버린 미국와 북유럽에서 이 소설이 보여주었던 충격은 상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역자인 왕은철 교수는 '나의 번역문이 하미드의 세련된 산문을 우리말로 제대로 살려 냈는지 우려되긴 하지만, 그래도 불편한 주제를 흥미롭게 풀어낸 용감한 소설을 소개할 수 있어서 기쁘다'고 역자 후기를 마무리 짓는다. 세련된 산문이라, ... 아마 이 소설에 쏟아진 무수한 찬사는 뛰어난 문장도 한 몫 했을 텐데, 이를 느끼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듯 싶다. 대화체라서 더욱 그럴 듯 싶기도 하고, ... 영어로도 한 번 읽어봐야겠다. 








Comment +0





자화상

에두아르 르베 Edouard Leve 지음, 정영문 옮김, 은행나무 




소설일까? 그냥 일기일까? 자서전일까? 에세이일까? 예술 형식에 대한 구분이 호소력을 가지지 못하는 시대에, 장르를 적는 건 무의미하다. 책 표지에 적힌 '장편소설'이라는 단어가 부적절해보인다. 


이 책의 서술, 그것이 진실인지, 허위인지 에두아르 르베를 제외한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심지어 에두아르 르베는 이 짤막한 글 속에서 자신이 여든 다섯 살에 죽을 것임을 예감하지만, 마흔 둘의 나이로 자살하니, 이 책 자체로 일종의 부조리일지도 모른다. 실은 내 일상이, 내 인생이, 이 세상이, 이 우주가 다 부조리하고 무의미하지만, 우리는 죽을 힘을 다해 그걸 부정하고 있지. 


이미 죽은 자의 자화상.  


서로 연관성 없는 문장들은 병렬적으로 나열되며 대기가 되고 구름이 되고 자화상의 하늘이 된다. 하지만 그 속에서 그 어떤 의미도 구할 수 없다. 개별 문장들은 일종의 취미판단일 뿐, 가치판단은 아니다. 단지 자신의 선호를 나타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더욱 개별적인 산문이 되고 유명론(Nominalism)적 가치를 지닌다,고 볼 수 있을 지도. 


짧지만, 읽기 어렵다. 어떤 문장은 흥미롭지만, 어떤 문장은 재미없다. 취향이 특이하지 않고 세계 비판적이지도 않다. 그저 보여줄 뿐이다. 어쩌면 일종의 유서이거나 기록일지도 모른다. 


형식적으로 무척 흥미롭지만, 문학적으로 대단하다고 보긴 어렵다,고 적지만, 자신없다. 실은 이런 식의 작법으로 글을 쓰고 싶어졌다. 일종의 시리즈물이 나오면 어떨까. 예술가들이 돌아가면서 르베 식의 자화상을 쓰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이면, 정말 가치있는 무의미의 축제가 될 지도. 



*    * 


에두아르 르베는 사진작가다. 그의 사진 몇 장을 찾아 올려본다. 소설 <<자화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진 모르겠다. 


 

Reconstitutions by Edouard Leve 





몇 장의 작품들을 찾았으나, 많진 않다. 포르노그라피 연작들이 눈에 띈다. 



Sans titre (de la serie Rugby)

edouard leve




에두아르 르베. 어느 프랑스 저널에 실린 르베의 사진 전시 기사에 실린 사진이다. 기자는 왜 이 사진을 실었을까. 소설과 달리 꽤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르베. 나도 강인해지고 싶다. 인상만으로도. 






Comment +0





나는 고故 마티아 파스칼이오 Il fu Mattia Pascal 
루이지 피란델로Luigi Pirandello(지음), 이윤희(옮김), 문학과지성사


"예, 그럴 겁니다! 백작은 이른 아침, 정확히 8시 반에 일어났다. ... ... 백작 부인은 목 둘레에 화려한 레이스가 달린 라일락 꽃무늬 드레스를 차려입었다. ... ... 테레지나는 몹시 배가 고팠다. ... ... 루크레지아는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었다. ... ... 오, 세상에!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있습니까? 우리는 한줄기 태양광선을 채찍 삼아 쉼 없이 회전하는 보이지 않는 팽이 위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 연유도 모른 채, 결코 목적지에 도달하지도 못하면서, 우리에게 때로는 더위를 때로는 추위를 선사하고, 혹은 쉰 번쯤 혹은 예순 번쯤 회전한 후에는 죽음을 - 대개는 어리석은 짓만 범했다는 아쉬움과 함께 - 선사하기 위해 그저 그렇게 돌고 도는 데에 재미 붙인 양 미친 듯이 회전하는 모래 알갱이 위에 우리가 놓여 있는 것 아닐까요? 신부님, 코페르니쿠스가, 바로 코페르니스쿠스가 휴머니티를 더는 회복할 수 없을 만치 파괴시켰습니다. 우리가 이룬 그 모든 잘난 발명과 발견들로 인해, 어느덧 우리 자신이 무한히 작은 존재라는 새로운 개념에 서서히 젖어 들었어요. 그러고는 스스로를 우주 속의 보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자각하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들 개개인의 불행뿐 아니라 인류의 총체적인 불행에까지요. 우리들의 이야기는 이제 한낱 버러지들의 이야기에 불과해요. 앤틸리스 제도의 작은 재난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별거 아닙니다. 그 폴란드 참사회원의 주장대로, 아무런 목적 없이, 돌고 도는 데 진력이 난 가엾은 지구가 다소 인내심을 잃고 급기야 제 몸의 무수한 출구 중 한 곳에서 불꽃을 좀 뿜어내고 말았지요. 대체 무엇이 그토록 지구를 분노케 했을까요? 아마도 그것은 지금보다 더 한심한 적이 없었던 인간들의 우매함일지도 모릅니다. 그만두죠. 햇볕에 그을린 무수한 버러지들. 그래도 우린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   * 

우리는 자주 지금 내 이름, 내 일상, 내 가족을 벗어나(버리고), 새로운 이름, 새 일상, 새로운 사랑을 꿈꾸곤 한다. 우연한 기회에 마티아 파스칼은 죽음으로 포장되고 새로운 이름을 얻는다. 이 소설은 두 개의 인생 사이에서 꿈 꾸듯 대화하고 우울해하며 불안한 사랑을 나누는 어떤 인물을 그린다. 

8쪽의 년도, 1083년이 아니라 1803년이라는 오타만 아니었다면 이 독서는 산뜻하게 시작되었을 것이다. 시대적 배경이 19세기에서 바로 11세기 중세로 넘어가는 이 사태에 대해 출판사 쪽에서는 아무 회신도 없었다. 루이지 피란델로는 그 세계적 명성, 문학적 가치, 놀랍도록 슬프고 우울한 웃음을 선사하지만, 국내에선 현대 희곡작가 정도로만 알려진 듯하다. 


이 소설을 지난 가을에 다 읽었으나, 이제서야 블로그에 올린다. 이 짧은 서평 쓰는 것도 힘에 겨울 정도로 요즘 내 일상은 피폐해져 있다. '시간이 해결해준다'라는 말이 가진 비극성은, 뭐랄까, 종말론적이랄까. 모든 일들을 마무리되면 피란델로에 대한 긴 글을 적어봐야겠다. 






나는 고故 마티아 파스칼이오 - 8점
루이지 피란델로 지음, 이윤희 옮김/문학과지성사


Comment +0

보르헤스 씨의 정원

일러스트: 메테오 페리코니 보르헤스 씨의 정원 부에노스 아이레스, 레꼴레타 인근의 어느 집에는 이중의 특권을 가진 창문이 있다. 그 창문에서는 한 눈에 하늘이 들어오고, 이웃한.....

보이지 않는 용, 데이브 하키

보이지 않는 용 The Invisible Dragon: Essays on Beauty 데이브 하키(지음), 박대정(옮김), 마음산책, 2011년 몇 번 읽다가 만 책이다. 구.....

2017년, 책 읽기의 기억

2017년, 책 읽기의 기억 1. 책 읽는 병든, 그러나 고귀한 우리들 책을 읽는 여인(안지오의 소녀) 이탈리아 안지오Anzio에서 나온 그리스 조각 복제본(대리석)으로 기원.....

보들레르의 수첩, 보들레르

보들레르의 수첩 샤를 보들레르(지음), 이건수(옮김), 문학과지성사, 2011년 1846년 산문과 1863년 산문이 함께 실려있고 죽은 후 나온 수첩까지 실린 이 책은 기억해.....

메시Messy, 팀 하포드

메시Messy - 혼돈에서 탄생하는 극적인 결과 팀 하포드(지음), 윤영삼(옮김), 위즈덤하우스 이 책은 확실히 기존 통념을 깨뜨린다. Messy라는 제목 그대로, 무질서와 혼.....

단테:세속을 노래한 시인, 에리히 아우어바흐

단테 - 세속을 노래한 시인 에리히 아우어바흐(Erich Auerbach) 지음,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좋은 책이다. 간결한 문장으로 핵심을 찌른다. 이종인 선생의 번역도 .....

칠드런 액트, 이언 매큐언

칠드런 액트 The Children Act 이언 매큐언 Iwan McEwan(지음), 민은영(옮김), 한겨레출판 살만 루시디(Salman Rushdie)가 추천한 이언 매큐언.....

맑스주의와 형식, 프레드릭 제임슨

변증법적 문학이론의 전개 (개정판: 맑스주의와 형식, 원제: Marxism and Form) 프레드릭 제임슨 Fredric Jameson (지음), 여홍상, 김영희(옮김), .....

이사와 근황
현대 사진과 레디메이드
현대 사진과 레디메이드
현대 사진과 레디메이드
현대 사진과 레디메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