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177

지고 말 것을,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고 말 것을가와바타 야스나리(지음), 박혜성(옮김), 문학동네 야스나리의 소설을 읽었다. 초기 단편들을 모은 >. 꽤나 뒤늦은 독서다. 그의 >은 읽지 않았다. 오에 겐자부로의 대표작들 대부분 이십대에 다 읽은 것과 달리, 야스나리의 소설에는 손이 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손에 쥐고 읽었다. 대체로 일본 소설가들의 작품에는 뭔가 쓸쓸함이 느껴진다. 한국 소설가들이 만드는 쓸쓸함과는 결이 전혀 다르다. 한국 작품들에게 느껴지는 쓸쓸함은, 한 때의 쓸쓸함같다고 할까. 지금은 쓸쓸하지만, 이 쓸쓸함으로 이 모든 것이 물들지 않아, 나는 지금 쓸쓸함 속에 있지만, 이 쓸쓸함 속에서 패배하지는 않을꺼야 라는 식이라면, 일본 작품들에선 인물과 쓸쓸함은 하나가 되어 어떤 배경이 된다고 할까. 자신을 드러..

나주에 대하여, 김화진

나주에 대하여김화진(지음), 문학동네 '나주'가 그 '나주'라 생각했다. 주인공이 그 곳에 가서 겪는, 일종의 여행기 같은. 전라남도 나주시. 하지만 이 단편의 나주는 사람이름이었다. 그것도 죽은 남자친구의 전 애인 이름. 1. 소설을 쓸 때, 작중 인물들의 이름은 어떻게 짓는 걸까. 나는 이게 귀찮고 고민스러워서, '그'나 '그녀', 혹은 'K'나 'P'로 자주 했다. 수십년 전 습작을 몇 편 쓰지도 않았지만. 이 소설집에 나오는 이름들이 특별하진 않았다. '영은'이나 '은영'같은 이름은 너무 평이하지 않나 하고 여겼다. 도리어 '김화진'이라는 이름이 더 소설스럽다고 할까. 예전에 알던 어느 소설가의 장편 소설에는 이름만 바뀐 실제 인물들이 나와서, 그 실제 인물들과 그 소설가를 비난하는 술자리에 ..

미켈란젤리와 잭 케루악

1.한동안 미친듯이 들었던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 한참만에 꺼내 듣는다. 한껏 마음이 부풀어오른다. 너무 혼란스러운 세상. 이틀 만에 레오 14세 교황님이 선출되었다. 다행이다. 지금 전 세계를 보라. 제대로 된 정치가가 어디 있는지. 종교 지도자라도 제대로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할 판이다. 여기 이 땅도 새로운 지도자가 나올 것이니. 그나마 오늘 우리를 위로해주는 건 한 잔의 술과 임윤찬, 살아있는 몇 명의 작가들과... 대부분 이미 죽은 예술가들 뿐이다. 그리고 지금 미켈란젤리의 오래된 피아노 소리... 2.술 이야기로 시작하는 보기 드문 소설. 심지어 잭 케루악은 과음으로 죽었다. 진정 비트문학! 이 책을 읽고 "On The Road"를 읽어야지. 하지만 술은 멀리. ... 그러나 술들의 유..

샤이닝, 욘 포세

샤이닝욘 포세(지음), 손화수(옮김), 문학동네 어느새 눈이 앞 차창을 온통 덮어버렸다, 나는 와이퍼를 작동시켰다. 이제 보니 눈은 그쳤고 앞에 보이는 땅은 하얀 눈으로 덮였다, 숲 속 나무가지에는 하얀 눈이 쌓였다. 아름다웠다. 하얀 나무, 하얀 땅. 이제 차 안이 기분 좋게 따뜻해졌다. 하지만 이렇게 차 안에 앉아 있으면 안 된다. 사람을 찾아 나서야 한다. (19쪽) 하얀 눈 속에 갇히면 어떨까. 온통 하얀 세상. 그 하얀 공간 속에서 혼자 고립되어 잠들어갈 때, 어떨까. 이 짧은 소설이 주는 여운은 꽤 단단하고 슬프다. 결국은 가족 뿐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도 가족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상처 입고 있는데 말이다. 세상은 하얗고 서로가 있다는 걸 알지만,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2,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2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지음), 곽광수(옮김), 민음사   Natura deficit, fortuna mutatur, deus omnia cernit. 자연은 우리들을 배반하고, 운명은 변하며, 신은 저 높은 곳에서 이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있다. (155쪽)   조그만 나의 영혼, 방랑하는 어여쁜 영혼이여, 육체를 받아들인 주인이며 반려인 그대여, 그대 이제 그 곳으로 떠나는구나. 창백하고 거칠고 황폐한 그 곳으로. 늘 하던 농담. 장난은 이제 못하리니. 한순간 더 우리 함께 낯익은 강변들과, 아마도 우리가 이젠 다시 보지 못할 사물들을 둘러보자 ... ... 두 눈을 뜬 채 죽음 속으로 들어가도록 노력하자. ... ... (236쪽)  가끔이지만, 지금 죽으면 어떨까 하곤..

새벽 5시, 빛의 슬픈 영역 속으로

나이가 들수록 변해간다. 몸이 변해가는 걸 적응하기 위해 내 영혼을 얼마나 많은 것들과 싸우고 있는 걸까. 문득 다시, 올해 글을 쓸까 생각했다. 수십년만에 만난 대학동기들에게 이 나이에 한 번 등단해보자, 하고 취기에 이야기했다. 누군가가 나에게 글을 잘 썼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세상에는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내가 글을 쓰지 않게 된 건, 누군가의 삶을, 그것이 허구라 할 지라도 과연 나에게 그럴 권리가 있는가 끊임없이 되물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삶을, 그 고통과 번민의 삶을 나는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가, 과연 그것은 가능한가 물었다. 가령,  *    *  그녀는 그에게 환하게 웃으며 아침을 차려 주었다. 그는 그 전날도 술을 마시고 들어왔다..

마지막 외출, 조지수

마지막 외출 - 이미 없는 그와 아직 없는 그녀의조지수(지음), 지혜정원   액자 소설이지만, 그 액자는 단단하지 않고 그 안은 너무 진지했다. 사랑 이야기지만, 과연 사랑이야기일까. 늘 그렇듯 사랑은 기만적이다. 그건 일종의 허위인 탓에, 치명적으로 쾌락적이다. 그런데 진정으로 사랑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 사랑에 빠진 남녀는 처음에는 순수한 마음의 떨림과 흥분으로, 중반 이후부턴 기만적인 믿음과 소유욕으로 가득찬 육체의 쾌락으로 이어지다가 차갑게 식고 천천히 가라앉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과 육체가 예전만 하지 못하다는 생각, 식어버린 마음과 그 가라앉음을 견디지 못해 헤어진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아프고 슬픈 이별로 포장하는 탓에, 세상에는 사랑 노래로 흘러넘친다. 과연 사랑이라는 게 있..

재개발, 혹은 다시 출발

소설가 한강에 대해선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하자. 노벨문학상은 의외였다. 그녀는 상대적으로 젊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정황 상 적절한 선택일 수도 있다. 동아시아 여성 작가이면서 한국이라는 분단국가,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환경 속에서의 문학 등. 그러고 보면 노벨문학상을 받을 만한 작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많다. 나도 참 오랜만에 소설쓰기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나는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순수 문학에의 열망이 피어오르게 할 수 있을까. 참 흥미롭고 아름답고 신비로운 풍경이다.  너무 빠르고 굳이 몰라도 될 정보들까지 들려오는(혹은 읽거나 보게 되는) 요즘, 나는 자주 길을 잃어버린다. 어떻게 살아야 될 지 잘 모르겠다. 이건 중학교를 다니는 내 아이도 마찬가지..

마르그리트 뒤라스

"만약 우리가 글을 쓰고 싶다면 그건 절망에 빠져 있기 때문이죠. 만약 우리 스스로 중요한 모순을 잊어버린다면, 또 끊임없이 이 모순 속에서 살지 않는다면 결코 작가가 될 수 없어요. 한낱 이야기꾼은 될 수 있을 겁니다. 모순이 없다면 아무것도 없어요. 안이함에서 오는 역겨움만 있을 뿐이지요." - 마르그리트 뒤라스 (* 알랭 비르통들레의 > 중에서)

아침 그리고 저녁, 욘 포세

아침 그리고 저녁욘 포세(지음), 박경희(옮김), 문학동네   > 이후 두 번째로 읽는 욘 포세의 소설이다. 비슷한 느낌이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고 삶과 죽음이 교차한다. 그리고 페테르는 성냥갑을 집어 건넨다. 그리고 요한네스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두 사람은, 요한네스와 페테르는, 나란히 앉아 담배를 비우며 바다 저멀리 서쪽을 바라본다 그리고 요한네스는 생각한다, 돌멩이 두 개가 페테르의 몸을 그냥 통과해 날아가다니 몹시 이상한 일이군, 아니 그런 일은 불가능하지 않나, 그냥 착시현상이겠지, 그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는 걸, 요한네스는 생각한다, 페테르에게 그의 몸을 만져봐도 되냐고 물어봐야 하려나, 그럴 수는 없어, 페테르가 그를 어떻게 생각할까, 아니지 그렇게까지는 못하지, 페테르에게 몸을 만져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