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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정치 +55


왕따의 정치학

조기숙(지음), 위즈덤하우스, 2017 



정치학이라는 단어가 있어 정치학 이론서라고 오해하기 쉽다. 더구나 아래 동영상을 보면 꽤 전문적인 정치 이론서라는 면모까지 풍긴다. 하지만 전혀 아니다. 이 책은 팟캐스트 <정봉주의 전국구>에서 나눈 이야기들을 기초로, 조기숙 교수의 개인적인 경험들과 의견(노무현과 문재인에 대한 왕따 현상),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여러 언론사들의 사례들,이해를 돕기 위한 서구 정치사의 변화와 관련된 이론들이 다소 어수선하게 전개되는 대중 정치 서적에 가깝다.  




지식인 중에 이명박과 노무현이 다르지 않다며 '노명박'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꽤 있다. 최근에는 친박과 친문이 패권주의적이라는 점에서 같다며 반문연대를 지지하기도 한다. 이는 매우 위험하고 무책임한 주장이다. 흑백을 구분하지 못하는 반지성적 태도다.

나는 조동문과 한경오가 같다는 말을 절대로 할 생각이 없다. 분명히  이들 언론은 다르다. 하지만 진보언론이 노무현과 문재에게만큼은 가혹했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 이 책을 쓰게 되었다. 

- 325쪽 


저자가 이 책을 쓴 계기는 위 인용문과 같다. 그래서 책 내용 대부분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할애되어 있으며, 상당히 설득력 있다는 점에서 문재인 정부 이전/이후의 여러 진보 언론의 다시 행태를 떠올리게 만든다. 


처음부터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내가 기고하던 고정 칼럼이 노무현에게 유리하면 수정되거나 삭제되거나 이상한 제목이 붙는 일을 겪으면서 언론의 부당함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 12쪽 


책의 서두에서 노무현 정부와 거리를 두었던 조기숙 교수는 자신이 어떻게 친노가 되어갔는지 묵묵히 서술하며, 중후반에는 정동영 의원과의 관계를 이이야기하며 자신이 정치권에 몸 담게 되는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노무현 - 문재인으로 이어지는 야당 정치 지형의 변화를 통해 친노, 친문 프레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일 뿐, 이 책의 대부분은 한겨레, 경향, 오마이뉴스가 어떻게 친노프레임, 친문프레임을 어떻게 확대 재생산하며, 특히 노무현 대통령이나 문재인 후보에게 부정적인 어조로 기사를 내보내는가에 맞춰져 있다. 실제 기사를 사례로 하기 때문에 읽으면 읽을수록 황당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좌우언론은 역대 가장 민주적이었던 노 대통령에게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프레임을 사용해 비판했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제왕적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 90쪽 


 그리고 이렇게 된 이유가 이념의 차이에게 기인한다고 보는 저자는 서구의 구좌파, 신좌파라는 구도를 가지고 와서 설명하는데, 아마 이 책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 될 것이다. 가볍지만 심각한 왕따 이야기들 속에 갑자기 서구 정치사에 대한 학술적 서술이 다소 뜬금없이 진행된다. 


이들 세대의 핵심 가치관을 '탈물질주의 post-materialism'라고 하는데 물질보다는 가치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문화를 연구한 잉글하트Ronald Inglehart 교수는 유럽의 변화를 일컫어 '조용한 혁명 silent revolution'이라고 했다. 

- 171쪽 



잉글하트 교수의 책은 1977년도에 나왔으며 압축적 정치 성장을 겪고 있는 한국 정치에 적용하는 것이 맞는지에 대해선 논의의 여지가 있다. 또한 '조용한 혁명'의 결과가 에마뉘엘 마크롱이며 미국에서는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많은 분량을 차지하진 않지만, 현대 정치학 이론을 바탕으로 한국의 현실 정치를 분석하고자 하는 시도라는 점에서 재미있기는 하나,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 많으며 좀 더 다듬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노무현에게 조금이라도 호의적인 사람은 말할 권리를 잃어버리는 게 한국 사회라는 걸 그 때 분명히 깨달았다. 사실 지금도 내가 팟캐스트를 열심히 하는 이유는 다른 영향력 있는 지면이나 방송에서 발언할 기회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 209쪽 


이 책은 정치학 이론서가 아니다. 이 책의 목적은 한국 현실 정치의 이론화가 아니라, 왜 노무현과 문재인은 좌우언론 따지지 않고 왕따를 당하고 있는가이며,  이 점에서 이 책은 충분한 공감과 설득력을 가진다는 점에서 읽는 이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더구나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난 다음 사라진 단어들을 보라. 친문이나 친노, 그리고 여타 많은 인물들. 이러한 언론들의 변신이 나는 놀랍기만 하다. 


우리 사회의 위기는 늘 지성 리더십이 초래한다고 생각한다. 조선시대에도 유림이 패거리 싸움을 할 때 서민들이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했다. 

- 327쪽 


마지막으로 이 책에 실린 도표 하나 올린다. 그리고 이번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우리모두 기원해보자. 




왕따의 정치학 - 8점
조기숙 지음/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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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페이스북은 정치 싸움 중이다. 각자 편을 나누어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의 이야기를 퍼다 나른다. 나 또한 그렇게 하고 있다.


나라의 미래를 여는 즐거운 이벤트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기엔 한국의 정치 지형은 너무 형편없고 몇 명의 후보는 누가 봐도 함량미달인데도 불구하고 지지율이 만만치 않다(일부 국민의 정치에 대한 이해나 식견이 한참 모자른다고 볼 수 밖에 업다고 말하는 너무 심한가. 하긴 트럼프도 만만치 않았으니, 여기나 거기나 정치인에게 요구하는 도덕 수준은 형편없구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정치가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지만,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나이가 들수록 정치에 대한 이해나 분석력이나 판단이 희미해지는 듯 싶다.


이럴 때일수록 정치학자나 정치평론가, 전문가들의 의견이 중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특정 후보를 지지해선 안 된다는 건 아니다. 도리어 지지하는 편이 낫다. 나 또한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에 대한 선호를 분명히 밝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객관성을 잃어버리고 편파적인 의견만을 고수할 땐, 해당 후보의 캠프로 들어가는 편이 낫다. 편파적인 객관성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평론가들은 자주 욕을 먹기 마련이지만,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독자들을 설득하거나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자신의 의견을 지킬 때, 비로소 평론가의 명성이 쌓이는 법이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객관성을 잃어버린 채, 자신의 주장만을 나열하곤 끝이었다. 결국 나도 나도 다소 화가 나서 친구 끊어야 했다. 아래는 친구를 끊으면서 짧게 단상을 적어보았다. 아마 정치평론 뿐만 아니라 다른 평론들이 이와 비슷해보이기에 블로그에 옮기고 저장해둔다.


*   *

2017년 5월 6일 저녁에 쓴 메모. 



(어떤 분야이든지 간에)평론가는 (무조건) 편파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객관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편파적일 수 있다. 그 주장(누군가의 눈에 보기에 편견으로 가득 찬 자기주장)은 자신의 신념이며 현재이고 미래이다. 그런데 그것을 툭 던져놓고 그 주장 밑에 무수히 달린 댓글들을 통한 (경제적이지 못한)논쟁 중에 누군가가, "왜 댓글에 답글을 달지 않고"(사람들끼리의 논쟁을 불러일으키는가)라는 문구를 읽고 난 다음 바로 페친을 끊었다.


(다소 이해는 가지만)그 신념 - 보수/진보 구도를 깨기 위해선 새로운 후보가 나와야 된다는 - 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과연 한국이 보수/진보 구도였던가 싶다. 한국은 이때까지 일당 독재 구도였다. 늘 정치적 주도권은 보수우파(내가 볼 때 수구 꼴통이며, 'conservative'라는 단어가 아까운)를 중심으로 한 헤쳐모여 구도였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많은 진보적 인사들이 보수로 배를 갈아탔다. (왜 배를 갈아탔는지도 의문이지만)


고 김대중 대통령은 국가 위기 상황 속에서 당선되었고 고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내내 좌우 막론하지 않고 공격을 받았다(심지어 탄핵을 받고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법적인 심판을 받은 후에도). 심지어 강준만 교수는 마키아벨리즘을 멈춰라고 소리 질렀다(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즉 보수우파는 늘 공격자의 입장에 서 있었으며 기득권과 함께 했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모든 매체에서 고 노무현 대통령을 비난할 수 있는 (무척 합리적인 단어들로 포장된) 무수한 표현들을 만들었다. 조중동 뿐만 아니라 한겨레, 프레시안, 오마이에서도. 그런데 그 표현들이 MB가 들어서자 (참 흥미롭게도) 표현의 빈곤함을 드러냈다. 그 사실이 너무 슬펐지만, 그 누구도 그걸 지적하지 않았다. (아니면 내가 몰랐던가)


정치는 지정학적 구도나 평형의 문제는 아니다. 그건 신념의 문제이며 가치의 문제이다. 그리고 그 신념과 가치에 기반한 미래의 문제다.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래를 담보로 하면 안 된다. 하지만 반대로 미래를 가지기 위해 현재에 대해 모험을 걸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무수한 이들이 보이지 않는 가치를 위해 인생을, 삶을 던지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미래를 위해 온 몸을 던지는 것이다. 이것이 정치인이 가져야 하는 첫번째 미덕이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문과 심 이외엔 없다(아! 얼마나 안타까운가).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하길 "그의 성격이 그의 운명이다."


그녀의 성격을 따라, 그녀의 운명을 따라 대한민국이 침몰했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이럴 때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지식인은 단정한 언어로 명확한 평가를 제시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냉철한 현실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먼 미래를 보는 혜안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이 점에서 헤겔의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 녁에 날아오른다"라는 표현은, 지식인의 슬픈 운명을 이야기한 것이다. 결국 (정치적) 상황 정리가 다 끝난 다음 지식인은 거기에 한 마디 덧붙인다는 뜻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그러면 안된다고 헤겔에 기대어 자신의 이론을 전개한 것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선 끝까지 싸워야 한다. 그리고 그 주장은 늘 그렇듯이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어떤 기반 위에 있어야 한다. 가짜 뉴스가 난무하는 이 세상에.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까닭에, .... 그러나 페친을 끊었다. 평론가는 편파적이어야 하지만, 그 주장이 너무 편파적이어서 끊었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어떤 것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 그래야 평론가다.


그것을 잃어버리는 순간, 평론가가 아닌 지지자일 뿐이다. 아마 그에겐 5천명 중의 한 명이겠지만, 나에겐 내 타임라인의 상당 부분을 차지함으로 의미 깊은 페친이었음을. 내가 정치적인 이유로 페친을 끊는 건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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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르몽드 디플로마크 한국어판 4월호를 읽으며 자크 랑시에르의 인터뷰 일부를 옮긴다. 끔찍하고 지독한 분석이지만, 동의하게 되는 건, 실제 이렇게 변했는지도 모를 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글쎄다. 어떻게든 정치에 대한 관심을 놓으면 안 된다. 그냥 선거 때 반짝하고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계속 지켜보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의견을 전달하고 참여해야 한다. (참으로 말은 쉽구나, 쉽지!)   



"대의민주주의라는 용어는 그 자체로 애매모호한 성격 외에도 국민들이 대표자를 선출함으로써 자신들을 표현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의미한다. 그러나 국민은 정치과정에 선행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과정의 결과물이다. 어떤 정치 시스템을 갖추느냐에 따라서 그에 따른 국민이 만들어지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또한 대의제는 사회의 일반적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사회계층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의 관점에서는 계몽된 지주들이 그런 계층이었다. 대의제의 결과로 국민들은 사진들의 합법적 대표자들이 이런 계층 출신일 것으로 여기며, 투표를 통해 이를 정기적으로 재확인한다. 대의제는 전문가들을 위한 제도로 점차 바뀌어갔고, 이들은 자신들과 똑같은 사람들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이 제도는 자체 역설을 생성하게 됐다. 국민들은 전문가들이 자신들을 대표하기보다는, 그들이 자신들을 정말로 그대로 구현하는 화신이 되어주기를 갈망하는 신화적 사고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는 선거 때마다 재현되는, 점차 저질이 되어가는 한 편의 연극과 같다."

- 자크 랑시에르 (* 르몽드디플로마크 한국어판 4월호에서 인용)  



*   * 

몇 해 전에 읽었던 랑시에르 책에 대한 독후감. 

2012/05/13 - [책들의 우주/이론] -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자크 랑시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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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훈의 대담한 경제

박종훈(지음), 21세기북스 


몇 해 전에 나온 책을 이제서야 다 읽는다. 이미 칼럼을 통해 박종훈 기자의 통찰력 있는 글들을 읽었던 터라, 책을 읽는 과정은 마치 복습하는 느낌이었다. 

(칼럼 주소: http://news.kbs.co.kr/news/list.do?mcd=0849#1)


유명세를 치른 책이라,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테고, 읽은 사람들은 다 읽었을 것이다. 정작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들은 내가 아니라 저 쪽에 있는 사람들인데. 


흥미로운 것들은 경제전문기자(실은 박종훈 기자만 말하겠는가!)가 지적하는 사항들과는 정반대로 국가 정책이 수립되고 실행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국가에서 홍보하고 대단한 성과를 내는 것처럼 포장하는 여러(더 많겠지만) 잘못된 정책들에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심지어는 그런 정책들의 잘못을 지적하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다. 지난 대선에 박근혜 대신 문재인을 지지한 이들이 마치 이해할 수 없는 이들에게 포위된 섬처럼 있었듯이. 


아직도 마음의 상처처럼 남아있는 기억 하나가 있는데, 이십 대 중반 어느 공부 모임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일반 대중들은 무식하거나 무관심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된다(?)는 식의 말을 했다가, 그 무슨 시대착오적인 계몽주의라는 핀잔을 들었던 적이 있었다. 나는 그 때 계몽주의가 잘못된 것인가, 왜 시대착오적인가, 한참 생각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고, 실은 지금도 잘 모르겠다.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없는 정도인 사람이 대통령으로 앉혀놓고 바람직한 미래를 고려하지 않은 기획들을 버젓이 경제 정책이네, 교육 정책이네, 문화 정책이네 하면서 수립하여 실행하면서 그것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이들은 모두 좌파나 빨갱이, 종북으로 몰아붙이는 과정을 보면서도, 사람들이 꿈쩍하지 않는 모습에 나는 절망했다, 끔찍했다. 결국 최순실 사태를 통해 사람들은 거리로 나서긴 했지만, 스스로의 지적 능력으로는 그들이 절벽 앞에 서서 떨어질 날만 기다리는 시한부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 카카오톡을 통해 전파되는 가짜 뉴스들을 진짜라고 믿는, 나이든 이들을 보면 아 나이가 든다는 건 지혜스러움과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마리오네트가 되는 과정이구나 하는 생각까지 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그들 앞에서 우리가 그들 스스로 깨치길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사람들은 민주적인 촛불 시위를 보면서 희망을 느꼈을 지 모르지만, 나는 그 촛불 맞은 편에 서서 그것을 반대하는 이들을 보며 불안과 공포, 절망을 끊임없이 느낀다. 이런 점에서 이 책도 마찬가지다.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 이 책은, 그렇다고 절망을 이야기하진 않지만,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이 자리가 얼마나 허술하고 취약하며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가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특히 자칭 '보수'라고 이야기하는 이들(내가 볼 때 시대착오적인 수구라고 여겨지지만)이 만든 구호들과 정책들이 얼마나 위험하고 잘못된 것인가를 지적하고 있다. 목차만 한 번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논조를 알 수 있다. 


경제정책 - 정부는 왜 눈 앞에 닥친 위기도 못 보는가?

기업 - 1등만 살아남는 경제는 왜 위험한가?

부동산 - 집, 살 때인가? 팔 때인가?

세금 - 세금은 군대보다 더 무서운 무기다.

빚 - 이미 당신에게는 2,000만원의 빚이 있다

빈부격차 - 아무리 노력해도 부자가 될 수 없는 이유 

복지 - 복지는 분배가 아닌, 성장의 열쇠다

인구 - 인구 감소가 가져올 최악의 경제 불황

청년 - 21세기 가장 소중하고 강력한 자원, 청년 


이 책은 좌파적이거나 마르크스주의적이지 않다. 정치적 지향으로 따지지만 리버럴하고 중도적이라고 할까. 좌파라든가 빨갱이라는 단어에 대한 명확한 정의도 내리지 못하는 이들이(이는 기자(혹은 기레기)도 마찬가지) 그런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대중들을 호도하고 선동하고 있다.(이것도 일종의 계몽주의가 아닌가?)


노인들에게 지급하는 기초연금에 대해선 환호하면서, 기초가 튼튼하지 못한 복지 정책에 대한 포퓰리즘이라는 지적에 동의하는 이들을 보면 만감이 교차하는 건 어쩔 수 없다. 박종훈 기자는 사회안전망이 한 나라에 끼치는 긍정적 영향에 대해 서술한다. 


이 때문에 촘촘하게 잘 짜인 사회 안전망은 그 혜택을 보는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경제 전체를 불황에서 지키는 중요한 버팀목이 된다. 이 같은 사회안전망의 역할을 바로 '경기 자동안정화 기능Automatic Stabilizer'이라고 한다. 경기 자동안정화 기능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경기 불황이나 호황이 왔을 때 정부가 임의로 재정 지출이나 세율을 변경하지 않더라도 자동으로 작동해 경기 변동 폭을 줄여주기 때문이다. (211쪽) 


이처럼 사회안전망의 경기 부양 효과가 훨씬 강력하지만, 부패한 국가는 인위적인 건설 경기 부양책을 더 선호하기 마련이다. 자동화된 사회 안전망과 달리, 인위적인 경기 부양책에는 힘 있는 정치인들이나 고위 관료들이 쉽게 개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213쪽)


몇 해 전부터 서부 유럽 몇몇 국가에서 논의되거나 시범적으로 실행되는 기본 소득 제도도 이런 사회안전망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지만, 한국은 그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한 이들이 대부분이다. 복지의 차원으로만 접근할 것이 아니라, 나라의 경제 시스템을 보다 안정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경제에 대한 뼈 아픈 지적들로 채워진 이 책은 웹사이트에 게재될 때부터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다양한 채널로 공유되었다. 대기업에 유리하게 설계된 조세 제도(뿐만 아니라 그냥 경제 시스템 자체가 그들을 위해 설계되어 있다)는 이 나라 기업 생태계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지만, 그것을 그 누구도 고치려 하지 않는다. 김종인이 끊임없이 선거 때만 되면 나타나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이유는 정치적으로는 (권위적) 보수주의자이지만, 경제적으로는 상당히 진보적이기 때문이다. 실은 진보적이라는 표현 대신 합리적이라는 표현이 적당할 것이다. 그가 보기에도 현재 경제 시스템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부유층에 유리한 조세 정책은 우리나라를 상속형 경제로 만드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나는 유류세와 담뱃세같은 간접세가 전체 세수의 절반이나 되는 반면, 소득세 비중은 낮기 때문에 조세 정책으로 인한 빈부 격차 완화 효과도 거의 없다. (171쪽) 


낙수효과가 실제로는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일반 대중들을 빼곤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단어가 먹힌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자본주의의 핵심은 결국 공정한 경쟁 시스템에 있다. 아무리 무능력해도 부모 잘 만난 덕에 세금 한 푼 안 내고 부모의 부를 고스란히 물려받을 수 있다면, 누가 치열하게 노력하며 발전을 도모하겠는가? (109쪽) 


한동안 IT에서 '디지털 격차Digital Divide'가 화두였는데,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정보격차Information Divide'도 꽤 심각한 수준이다. 문맹률은 낮지만, 문해력도 상당히 낮다는 점에서 정보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세상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들은 계속 줄어들 것이다. 특히 빠른 온라인화는 제대로 된 정보를 접할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하고 있는 건 아닐까. (참고: 한국인의 문해력은 왜 세계 꼴찌인가? http://ppss.kr/archives/66923


이런 상황에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마 그 시작은 이 절박한 경제 상황에 대한 이해가 되지 않을까. 이 점에서 <<박종훈의 대담한 경제>>는 현재 시점에서 꽤 유용하고 비판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줄 최고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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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한국 사회는 망가졌고 시스템은 과거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무척 당혹스러웠다. 


다행인지 몰라도, 작년 하반기. JTBC의 용감한 보도, 그 이후 이어진 촛불 집회가 있었다. 

아마 그것마저 없었다면 계속 수렁 속으로 빨려들어갔을 것이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니라 조금의 식견이 있는 이들은 모두 그렇게 여겼을 것이다. 


힘 있다고 믿었던 정치인들은 권력 앞에 무능력했고(공무원, 검사, 기업인들을 모두 한 통속이 되어 부패해졌고) 

평범한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을 때야 비로소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 하고 있는가를 깨달았다.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 언론들은 정신차리지 못했으며, 학교는 무너졌고 그 곳의 실질적인 리더인 교수들은 가장 추악한 면모를 드러냈다.

(청와대 비서관들은 대부분 교수 출신이고 이대 교수들은, 아, 말을 하지 말자) 

그들은 추악한 권력 앞에 고개 숙였으며 청문회장에 나와서까지 거짓말을 했다. 


한국 사회는 겨우겨우 제 정신을 차릴려고 하는 순간, 미국은 너무 솔직하다 못해 예의없고 무분별해 보이는 이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매릴 스트립은, 골든 글로브 수상 소감에서 그 무분별한, 미래의 대통령을 향해 우아하게 공격했다. 


우리 사회는 비판하는 자들에게 냉혹하다. 그래서 비판하는 자들끼리 연대하여 줄 세우기를 한다. 그리고 그것이 계파가 되고 파벌이 된다. 

그 순간 비판에도 경계가 생기고 내부의 감시망이 발동하며 스스로 검열하기 시작한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모든 이들에게 비판의 자유를 허용하자, 모든 이들이 대통령을 욕했다. 

보수, 진보 가릴 것 없이 대통령 욕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 이후, 어딘론가 대통령 욕하는 사람들이 사라졌다. 비판의 자유를 대신 보이지 않는 검열이 시작된 것이다. 

종편이 시작되고 언론인들도 물갈이가 되었다. 


세상이 얼마나 우스운가 하면, 박근혜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불철주야 온 몸을 바쳐가며 노력했던 이들이 

지금은 앞장 서서 박근혜 대통령을 공격하느라 여념 없다는 것이다. 


먼저 자신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반성부터 해야 할 판국에. 


메릴 스트립의 수상 영상을 올린다. 짧지만, 꽤 울림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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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내렸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알 턱도 없었고 알기도 싫었을 것이며 알려는 의지도 없었다. 이미 선 긋기는 시작되었다. 저 땅은 아무리 노력해도 닿지 못하는 곳이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모한 용기에 뒤이어 오는 경제적 고초와 무참한 절망, 패배감이 아니라 빠르고 현명한 포기였다. 그리고 그 포기 대신 내 포기는 종북들과 빨갱이들 때문으로 몰아가면 되었다. 지난 잃어버린 10년 정권으로 인한 것이면 되었다. 헬조선도 경제에 뛰어나지 못한 진보 정권으로 인한 것이다. 어차피 세상은 엎지르진 물이고 뒤짚기엔 너무 강력하다. 그러니 왜 나에게 꿈과 희망을 밀어넣는가! 나에게 필요한 건 한 끼 밥과 자극적인 막장 드라마와 종편 TV에서 틀어대는, 나보다 불쌍하고 처참한 북한 사람들의 실상이다. 


갑자기 추워진 29일 오후 6시가 조금 지난 시간, 청계광장으로 가는 길은 을씨년스러웠다. 사람들의 함성 소리가 몇 블럭 떨어진 곳까지 들렸지만, 행인들은 무심하기만 했다. 죽어가던 역사학자 토니 주트는 '정치는 경제를 이긴다'라고 말했지만(그래서 제대로 된 정치가 선행되어야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고), 그런 발언 따윈 좌파 호사가들이나 좋아할 말이다. 한국에서 보수라고 알려진 이들에겐 토니 주트도 좌파로 읽혔을 것이다. 하긴 제대로 된 보수가 어디 있으려고. 내가 보기엔 조선 시대에 통용될만한 세계관과 천민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흥미로운 결합이 한국 보수주의자들가 아닐까 싶지만. 


얼마 전 알게 된 한국학의 대가인 고(故) 제임스 팔레 교수는 조선을 노예 사회로 규정한다. 그는 문헌(호적부)에 기초하여 등록된 인구의 3~40%가 노비였다는 것이다. 더구나 같은 민족을 노비(노예)로 삼은 나라는 조선 밖에 없다. 그리고 그 조선으로부터 현대 한국은 고작 100여 년이 지났다. 그런 사회가 오백년 이상 지속되었다. 그 사회의 정신이 고작 100년 지난다고 잊혀질까. 


종종 나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들 중의 한 가지는, 참 똑똑하고 입 바른 소리도 잘 하며 뭔가 제대로 살 것같은 사람들이 꼴통 짓을 한다는 것이다. 아마 다들 현 정권의 약점을 시작 초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지만, 그냥 묻어버린 것이다. 나라의 미래 따윈 신경쓰지 않는다. 어차피 한국의 몇몇 기업들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졌으며, IMF 시기를 통해 단련되었다고 믿기 때문일까. 아니면 국민들은 개 돼지들이고 밥만 먹게 해주면 된다고 여기는 것일까. 이제 공중파는 다 잡았고 종편들까지 우리 편이니,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그 어려운 고시 패스했다고, 유수의 국내외 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고, 대단한 전문 지식과 기술을 갖쳤다고 해서 믿어선 안 된다. 그 전에 먼저 그 사람의 생각, 태도, 성품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과연 사람들은 그렇게 할까) 


하긴 이번 사태가 터지지 않았다면, 세상은 아마 그대로였을 것이다. 조선소들은 이미 문을 닫았고 그 곳을 오가던 사람들의 비명소리는 저 파란 지붕을 가진 저택까지 들리지 않을 것이며, 사람들은 측은한 마음으로 파란 지붕의 안주인만 바라봤을 테니까. 세월호 아이들이 바다 속에서 죽어가고, 조선소 사람들이 갑작스레 직장을 잃고 가정이 파괴되어도, 사람을 겨냥해서는 안 되는 물줄기를 사용해 결국 목숨을 잃게 만들어도, 어차피 고작 한 표 밖에 없는 선거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고 결국엔 다 종북과 빨갱이로 수렴될 족속들이니까. 


결국 다 노비들일 뿐이다. 가인 김병로(김종인 민주당 전 비대위 위원장의 조부) 선생은 보수주의자이면서 정권에 반발해 야당 생활을 했지만, 국회의원 선거 때 선거 벽보만 붙이고 선거운동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아래 것들한테 어떻게 표달라고 고개를 숙이냐"는 것.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젠 한 술 더 떠, 모든 콜센터 직원들은 "갑질 해대는 고객"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려 있다. 주인과 노비가 만날 일은 없고 노비는 노비들끼리 서로 갑질하느라 정신없는 나라가 되었다. 세상이 이러니, 어찌 어디 촌구석에서 나고 자란 상고 출신 대통령을 주인으로 인정할 수 있었을까. 그런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했던 사람과 대면한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이 나라의 상층부는 조선 시대 - 일제 시대 - 현대 한국을 거쳐도 변하지 않았다. 감히 어떻게 위로 올라갈 수 있는가.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아야 한다. 노비들끼리 몇 프로 되지 않는 재물을 두고 싸우느라 정신없게 만들면 세상 관리는 편해진다. 그리고 정권에 반발하는 이들에겐 가끔 무서운 경험을 한 두번 시켜주거나, 그들에게도 재물의 안락함을 한 번 맛보게 해주면 그 뿐. 이데올로기 시대는 갔고 똑똑한 젊은이들은 한국을 떠나 외국에서 잘 살 수 있으니, 자 이제 밖으로, 세계로 나가라,고 하면 그 뿐이다. 걸핏하면 나가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니면 사업을 해라, 그리고 망해라, 그러면 네 인생의 실패는 네 탓이니, 국가를 원망하지 말아라. 국가는 이미 이런저런 지원사업으로 결국 실패하게 될 네 사업에 돈을 주지 않았느냐.


글이 두서 없다. 아이를 안고 소리를 질렀지만, 청계광장의 많은 인파와 바로 옆 종로 거리의 행인들의 극명한 대비 속에서 나는 길을 잃었다. 그 사이 이태원에선 할로윈 파티로 즐겁게 보냈을 청춘들을 떠올리면, 글쎄, 우리에게 따뜻한 변화라는 것이 올까. 전투력을 잃어버린 야당 국회위원들과 너무나도 예의바르고 신중한 대선 후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아무 생각없는 대통령을 불쌍한 사람으로, 그녀를 조종한 최 모 여인만을 공격하고, 그 대신 그 둘의 관계를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 조치도 하지 않은 정부 여당, 검찰, 국정원 등에 대해선 아무렇지 않은 듯 길을 걷고 커피를 마시고 단풍 구경을 간다. 마치 느리게 가열되는 냄비 속 개구리처럼 그렇게 이 나라는 무너지고 국민들은 사라지고 대신 영악한 주인들과 바보같은 노비들로 채워진다. 조선 시대처럼. 


한동안 임진왜란 뒤 무능하기만 했던 선조는 왜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었는데, 왕과 사대부들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 상부상조했던 것이다. 왕은 사대부들에게 학문을 배웠고 사대부들은 끊임없이 왕을 가르치려고 들었다. 대부분의 왕들은 사대부들보다 똑똑하지 못했으니까. 왕이 사라진다는 건 사대부들에게 치명적인 일이다. 그들이 가진 권세와 재물은 왕의 대칭구도로 인해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것임을. 


지금도 마찬가지다. 무능한 대통령으로 인해 국회의원들과 감찰 기관들, 행정 각료들은 그들이 가진 힘을 충분히 느끼고 즐기며 부를 축적할 수 있으니까. 서로의 약점을 숨기고 미래란 변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변화할 것같으면 충분히 미디어를 통한 세뇌와 다양한 색깔론과 종북몰이, 그리고 부정적인 수단이 마련되어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미 법률은 촘촘하게 정권에 대드는 이를 잡아가두기에 충분하다. 어차피 노비들은 노비들일 뿐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매질과 약값, 또는 기름진 고기를 주면 그 뿐이다. 그러니 상고 출신 대통령에겐 대들어도 무능한 대통령을 감싸고 그녀를 조정했다고 여기지는 무녀까지 배려하는 것이다. 


그래도 청춘들은 10월의 마지막 일요일 할로윈을 즐기느라 정신없을 테니까. 


어제 청계광장을 가득 매운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왜 사람들이 이것밖에 없지 라는 생각을 했다. 이미 나라란 없고 대통령의 의사결정은 신뢰를 잃었다. 그야말로 위기상태다. 한국은 북과 대치하고 있으며 이런 상황에서 내려오기라도 하면 그냥 끝이다. 그건 북 때문이 아니라 미국은 신속하게 답 없는 한국을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지금이라도 미국은 눈 밖에 나있는 북을 공격하면 그 뿐이다. 딱 1주일이면 충분하다. 일본은 그 상황을 즐길 것이며 중국은 이미 끝난 북의 일부를 가지고 갈 것이다. 사람들은 욕을 하고 비난을 하지만, 말 뿐이다. 헬조선이라고 하면서 헬조선의 연휴를 즐긴다. 나라 걱정한다고 하면서 집 안에서 뉴스만 본다.


변화는 움직이는 자들로 인해 만들어진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최저지지율은 5%대 였다. 지금 대통령의 지지율은 10%가 넘는다. 확실히 노답이다. 내가 이렇게 길게, 두서없는 글을 이유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이다. 우리에게 미래는 짧지만, 아이들의 미래는 길기 때문이다. 이와 똑같이,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이 많은 이들이 이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이 나라가 제대로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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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각 시절에는 직장의 중요성을 잘 몰랐다. 받는 돈이 적거나 없어도 하고 싶은 일은 언제나 있었다. 하지만 결혼을 하자,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했다. 그제서야 경영의 가치나 기업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대체로 경영진의 잘못된 의사 결정의 피해는 불행하게도 회사 구성원들이 진다. 그러나 작은 회사의 경우에는 (약간 달라서) 경영진이 책임지고 아예 집안이 망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기업 경영과 연관된, 잘못된 정치적 관행(뇌물 같은 것들)에 대한 책임은 이상하게도 기업가들만 진다. 정치가나 행정가들은 교묘하게 기업가들의 마음을 움직여 금전적 이익을 취하고, 그러다가 일이 잘못되면 그 책임 대부분은 기업가나 기업, 더 나아가 그 기업이 있는 지역사회가 진다(대우조선처럼).


정치과 기업의 밀착 관계를 끊어야 하고, 정부나 정치가들은 기업가들이 올바른 경영을 할 수 있는 인프라를 제시해주어야 한다,고 교과서에선 말하지만, 한국은 아직 한참 멀었다.


고성장 시대를 살아온 노인네들은 저성장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 상당수는 우연히 사놓은 땅이나 가게로 돈을 벌었다. 특히 서울이나 수도권은 이런 경우가 너무 많다. 그들에게 노년은 행복한 일상의 연속이며 그들이 소유한 부동산의 가격만 떨어지지 않으면 된다(그래서 그들 대부분은 모두, 한결같이 박근혜를 지지했다. 이는 정치적 의견이라든가 나라의 미래, 젊은 세대들의 삶과는 무관한 결정이다).


그러나 절약해서 모은 돈으로 기업체를 차린 사람들 대부분은 망해, 흔적도 없다.(일부는 성공하여 큰 기업체를 일구었을 테지만, 아마 문어발 확장을 하거나 노동자의 삶과는 무관한 경영을 할 것이다) 즉 노동의 댓가는 실패이거나 해고이고, 부동산 투자의 대가는 여유로운 일상과 이익이다(그래서 노인 빈곤층은 부동산을 사지 않았던 노동자이거나(땅에 투자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믿는 이들), 사업을 하다 쫄닥 망한 이거나, 그 외 사회시스템이 커버하지 못했던 어떤 비극을 당했거나 그런 환경 속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다).


잘못된 것인 줄 알지만, 우리 세대 사람들은 결국 실패하거나 해고당할 것이라는 생각에, 돈을 모아 아파트나 빌라를 구입하고 만다. 부동산의 시대가 끝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 앞에서(왜 부동산을 사는가에 대해 원인 분석 없이 맨날 부동산 대책만 낸다. 마치 왜 젊은 부부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가에 대한 원인 분석 없이 출산 대책만 내는 것처럼).


좋은 경영자가 살아남고 승승장구하여 좋은 일자리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나라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지만, ... 쉽지 않고, 쉽지 않을 것이다. 저성장 시대의 우리 삶을 그나마 지탱하게 해줄 것은 좋은 경영자가 아닌 훌륭한 정치가일 테지만, 훌륭한 정치가가 살아남기엔 이 나라는 너무 개판이다. 멍. 멍. 멍.


포스코가 인수하여 망가뜨린 회사에 대한 책임은 포스코가 아니라 그 구성원이 진다. 하긴 경영이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경영 실패의 댓가는 가혹하기만 하다. 그러니, 올바른 정치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혁신은 실패로부터 시작된다고 하지만, 이래저래 실패는 가난한 기업가나 기업체에 다녔던 직장인들이 지고 말기 때문이다.


왜 사업을 했냐고? 왜 그런 회사를 다녔냐고? 평생 직장이 사라진 지금, 왜 노력을 게을리 했냐고? 웃긴 개소리다. 멍. 멍. 멍. 그건 시스템이 잘못되어 모든 실패의 책임을 개인에게 지우기 때문이다. 시스템의 문제이고, 시스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정치다. 경제를 살리는 것도 결국 정치다. 좋은 정치가가 필요한 시대지만, 나이든 이들은 얼마남지 않은 그들의 삶을 걱정할 뿐, 미래 세대들의 삶이나 그들이 살아가야 할 사회를 걱정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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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신문을 구독한 지 몇 달이 되었다. 그 전에는 모바일 포털사이트나  Social Media, 특히 페이스북을 통한 소비가 대부분이었다. 이럴 경우 미디어 편식이 발생한다. 또한 예전이라면 스포츠신문을 읽어야만 볼 수 있는 기사만 읽게 되는 경향이 있었다. 


지금처럼 디지털 매체가 발달하지 않았을 때, 나는 스포츠신문을 읽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디지털을 통해선 그냥 스포츠신문만 읽는 느낌이다. 그만큼 엉망이 되었다. 더구나 제대로 된 기사문을 읽을 일이 줄어든 셈이다. 


다시 종이신문을 읽기 시작하자 여러 모로 장점들이 많아졌다. 다소 느리지만, 깊이있는 칼럼들을 읽게 되었다고 할까. 하지만 디지털 세대의 여론과는 다소 무관해 보인다. 미디어 환경의 변화는 장기적으로 정치적 무관심을 지나 대중 일반의 정치적 이해와 판단능력을 마비시킬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여기 블로그에 대학생들이 많이 들어오는 듯하여, 아래 칼럼 읽기를 권한다. 지금 20대 이하 세대는 정말 힘든 시기를 살아나가야 한다. 그런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장기적 관점에서의 정치를 바라보고 적극적으로 정부 정책 방향에 대해 관여해야 하는데, ... 너무 걱정스럽다. 


송호근 칼럼 - 한국 청년 잔혹사 (중앙일보) 

http://news.joins.com/article/20419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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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학생 2016.08.31 22:59 신고

    종이신문에 관해서 과제를 쓰려하는 학생입니다만, 2026년에는 한국에서 종이신문을 보기 힘들꺼라는 통계도 있길래 여기에 질문드려봅니다.
    종이신문이 없어질꺼라고 보시나요? 안없어진다면 그 이유가 뭘까요?
    종이신문이 살아남는 방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궁금한게 워낙많은데 질문드려봅니다 ㅎㅎ;

    • 너무 어려운 질문입니다. 심지어 학자들이나 전문가들까지도 서로 논쟁을 벌이고 있는 주제예요. 그걸 덜컥, 저에게 물어보시면.. ㅜㅜ.

      아마 관련 자료를 찾으면 너무 많이 나올 겁니다. 하지만 어떤 주제는 너무 많은 자료 때문에 힘들고, 어떤 주제는 자료가 너무 적기 때문에 힘들죠. 그런데 이런 경우는 공부를 하던지, 직장 생활을 하던지, 반드시 겪게 되는 문제예요.

      몇 가지의 키워드를 가지고 검색해서 관련 자료를 찾아 읽어보세요. 그럼 나름대로의 해답을 구하실 수 있을 겁니다.

      riss.kr 이라는 웹사이트에서는 학위논문들을 검색할 수 있으니, 이와 관련된 석사나 박사학위 논문을 읽을 수 있을 겁니다. 해당 주제에 대한 논문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종이판을 내던 뉴스위크지는 아예 종이 주간지를 없애버렸습니다. 뉴욕타임즈의 경우, 디지털화에 대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가 인수한 위싱턴 포스트에 밀리는 인상을 주고 있죠. 영국의 가디언지도 디지털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한국의 중앙일보도 여기에 속한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국 모노클 같은 잡지는 종이잡지로 수지타산을 맞추고 있어요. 국내에는 B 매거진이 대표적인 경우죠. 뭐, 신문은 아니지만요.

      너무 어려운 질문은 너무 쉽게 하셨습니다. 그런 질문은 마치 '왜 살아야 하나요?'와 비슷한 류입니다. 다만 '왜 살아야 하나요?'라는 질문에 무한한 답이 있어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지만, '종이신문에 대한 질문'의 답은 몇 가지로 정해져 있고 여기에 대한 답은 자료를 찾아 읽어보시면 쉽게 구하실 수 있을 겁니다. ~ 그럼.






리오데자네이루의 어느 아파트 위에 설치된 높이뛰기 선수의 모습. 전형적인 프로퍼간다(propaganda)이지만, 보는 이의 시선을 잡아끄는 건 작품 자체가 가지는 완성도 때문일 게다. 프랑스 예술가인 JR은 이미 이 분야에선 세계적인 명성을 지녔다.  


올해 봄, 그의 장기인 눈속임으로 파리 루브르 박물관을 이렇게 만들었다. 루브르 광장 앞 피라미드에 아래와 같이 작업한 것이다. 그의 의도는 분명했다. 1989년 미국인 건축가 I.M.페이에 의해 만들어진 투명 피라미드는 17세기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축된 루브르 궁와 묘한 대비를 이루면서 근대와 대비되는 현대의 정신을 보여준다고 할까. JR는 이 투명 피라미드를 살짝 지우면서, 다시 이 유리와 철로 이루어진 피라미드에 담긴 어떤 태도를 되새기길 원하는 것이다. 






이런 작품만 있는 건 아니다. 아래 작품은 리오의 어느 슬럼가에 그려진 벽화들이다. 



28 Millimeters, Women Are Heroes

Action dans la Favela Morro da Providência, Favela de Jour, Rio de Janeiro, Brésil, 2008

(출처: http://www.jr-art.net/)



예술 작품이 이 정도 규모가 되기 위해선 다양한 측면에서의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지역 주민의 지원은 그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최근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정체불명의 꽃, 나무, 물고기 등 벽화만 그려대는 한국의 모습과 대비를 이룬다고 할까.


JR의 작업은 공공미술이라기 보다는 개인 예술가의 거리 미술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지만, 어차피 지원금을 받아 진행하는 공공미술이라면, 좀 더 제대로 접근해서 근사한 작품으로 만들면 안 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참고로 위 작품이 그려진 리오데자네이루의 파베라스(Favelas) 지역은 리오에서 가장 유명한 슬럼가 중 하나다. 이 지역에 '여성들은 영웅들이다'라는 공공미술은! 



출처: http://www.thisiscolossal.com/2016/08/jr-installs-giant-athletes-interacting-with-the-city-of-rio/ 



이번 리오 올림픽을 위해 그가 만든 작품도 정치적 예술(프로퍼간다)의 전형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실제 리오데자네이루에 가서 저 높이뛰기 선수를 본다면, 얼마나 대단할까. 역동적인 모습이 자아내는 스펙터클은. 



* JR 홈페이지 : http://www.jr-ar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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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기사를 접했다. 그 기사 제목은 <클린턴 외교 핵심 캠벨 “한국군에 전작권 전환 반대”>이다. 일견 당연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미 민주당 인사에서 나왔다는 것에서 내가 순진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까지 미쳤다. 이미 '주한 미군 문제'라든가 '세계 경찰국가로서의 미국'에 대해선 이상돈 교수의 <<공부하는 보수>>라는 책에서 잠시 엿본 바 있었지만, 나는 두 개의 미국-공화당 정권의 미국과 민주당 정권의 미국-이 있다면, 이 둘이 확연히 다를 것이라는 건 내 일방적인 견해였다. 적어도 미국 내부의 문제에 대해선 서로 다를 수 있겠으나, 미국 외부의 문제에 대해선 그들은 하나의 목소리를 가지고 이거나 서로 다른 척 할 뿐이다. 이에 짧게 내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좀 비관적이긴 하지만. 


* * 


상식적인 미국 정치인이나 행정가이라면 당연히 미국의 국익을 우선시할 것이고, 한반도에서 만일 전쟁이 발발한다면, 한국 정부가 전시 작전권을 가지는 것에 반대할 것이다. 또한 주한 미군이 철수하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하고. 다만 트럼프와 같이 주한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미국 내 보수주의자들이 있다. 하지만 이들의 의도는 주한 미군 철수가 미국의 국익에 반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나, 미국 내부의 문제를 우선시하고 있을 뿐이며, 운이 좋을 경우에는 한국의 방위비 분담액을 더 받아낼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다 아는 사실일테지만) 그들이 전시 작전권 양도나 주한 미군 철수에 대해 반대하는 이유는 그만큼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는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여러모로 정치적 쓸모가 많은 땅이고 한국도 그런 나라다. 지극히 상식적인 애국주의자들인 그들은 한국이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자주적인 발언권이나 행동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의 눈에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얼마나 보기 싫었겠는가. 참여정부의 딜레마는 적절한 수준에서의 그 전 정권과는 다른, 주권국가 한국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발언이나 행동을 해야겠지만, 이 발언이나 행동이 미국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당돌을 넘어 황당해 보였을까. 이런저런 고려 속에서 한국군 파병과 같은 일들을 도모했지만, 당장 눈 앞의 것들에만 신경 쓰는 국내 진보(?) 언론과 인사들은 무조건 반대만 하고 있었다,는 걸 지금은 알까. (알겠지만 후회하진 않을 게다, 아마.)


만일 전쟁이 나면, 한국은 버리는 패다. 시간을 벌 수 있고 전 세계 여론에 호소하기 아주 좋은 나라다. 인구 밀도가 매우 높으며 사상자 수는 그 이전 전쟁들과는 비교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경제 시설들이 파괴될 것이고, 심지어 원자력 발전소들까지 있으니, 그 파급효과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니 전쟁 나면 이 땅은 그냥 사람이 살지 못하는 땅이 된다.


그리고 전쟁을 수행하는 입장에선 한국은 그냥 버리고 일본에서 다음 일을 도모하면 된다. 한국이 전쟁터가 된 상황 속에서 앞으로의 정치적 협상을 진행하면 그 뿐이다. 최악의 경우를 가정한 것이지만, 언제나 최악을 가정하고 모든 정치나 행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미국의 입장에서 일본은 얼마나 좋은 친구인가. 적어도 한국보다 일본이 더 믿을 만한 친구다. 역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또한 일본 스스로도 중국과 한국보다는 미국과 친구가 되는 편이 낫다고 믿는다. 그들은 아시아 지향적이 아니라 탈 아시아를 원한다. 동시에 아시아의 맹주가 되고 싶어하지만, 역사적으로도 경제, 정치적으로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러니 그들은 아시아를 넘어서 아시아 속으로 들어오고 싶어한다.


더 불행한 일은 한국의 보수적인 정치가들, 행정가들과 군인들도 전시 작전권을 회수하는 것에 대해, 주한미군이 철수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그들은 그들의 정체와 실력이 탄로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전쟁을 수행할 능력도, 전쟁을 책임질 능력도, 전쟁을 책임질 생각도 없다. 어차피 분단국가 한국은 유엔 사령부 밑에 전쟁이 일시 중단된 상태이니, 전쟁에 대해선 유엔이 책임질 일이라고 여긴다. 유엔사무총장이 한국인인 것과도 아무 관련 없다. 어차피 유엔사무총장은 얼굴 마담이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독자적인 전쟁 수행 능력이 없기 때문에 독자적인 전쟁 수행 능력을 키우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 군대는 유엔 사령부 아래에서 미군 주도로 수립된 전쟁 작전 아래에서 움직이는 것으로 수십 년 동안 훈련해왔다. 이게 전시 작전권을 가지고 온다고 해서 바로 될 것이라 믿을 만큼 순진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니 전시 작전권 환수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다. 전쟁 수행 능력이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걸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인적, 물적 투자를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으니, 사서 고생하지 말자는 것이다.


더구나 독자적인 전쟁 수행 능력은 미국도 원하지 않는 일이다. 그 동안 정치적으로 약점을 가진 정권들은 미국의 요구대로 독자적인 수행 능력을 가지지 않았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미군이 가진 핵무기만으로 한국군의 독자적인 전쟁 수행 능력 따윈 필요 없으니까. 박정희 대통령 시절 핵무기 개발에 욕심을 낸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냥 한 번에 이런저런 고민을 다 해결해줄 수 있는 녀석이니까.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실패하지 않았는가. 그 이후 한국 정부는 독자 전쟁 수행 능력을 키우기 보다는 낙후된 산업 시설이나 경제를 살리는 것이 정치적으로 더 중요한 사안이 되었다. 독자적인 전쟁 수행 능력은 원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고(미군의 반대로), 그리고 하루 아침에 이루어질 일도 아니니, 다른 것에 집중하는 것이 나은 일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다. 전시 작전권에 대해선 정권이 여러 번 바뀌고 나서야 검토된다. 우리가 귀가 닳도록 들었던 ‘자주 국방’이라는 것이 말로만 아니라 실제로 가능한가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 듣기 좋은 ‘자주 국방’을 하기 위해 군대는 정말 많은 부분이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하고 싶을까? 거의 모든 걸 바꾸어야 하는데, 그냥 그대로 놔두어도 아무 문제가 없는데. 미군이 있는 상황에서는 기본적으로 전쟁 억지력이 생기고 미군이 시키는 대로만 해도 전쟁에서 이걸 것이 뻔한데.


자주 국방을 위한 독자 전쟁 수행 능력을 가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물적, 인적 투자를 해야 하는데. 그리고 한창 투자가 진행 중인 상태에서 만일 주한 미군이 철수한다면, 그리고 전쟁이 나면? 말로는 자주국방을 외치지만, 실제로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자주국방엔 별 관심이 없다. 도리어 자주국방 대신 미군의 영향권 안에 있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믿는다. (사드 배치 결정은 이러한 배경 아래 결정된 것에 다름 아니다) 


사드를 배치하겠다는 기사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반대하고(아니면 관심에 없거나) 주변국가들까지 나서서 반대하는 상황에서도 그 고집을 꺾지 못하는 이유는 미군의 영향권 아래 계속 머무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한국의 국익에 부합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단기적으론 그럴 지도 모른다. 이 단기적 고려가 중장기적 관점에서 한국이라는 나라, 한국이라는 나라가 걸어온 반만년의 역사와는 어떤 관련을 맺고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에 대한 고려는 아예 없다. 하긴 그런 생각을 했다면 저런 결정도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한국 정부나 군대는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확실하게 한 나라를 책임지고 이끌 생각이 전혀 없다. 아예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여길 지도 모른다. 실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도리어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여길지도 모른다. 적어도 군사적인 측면에서 말이다. 어차피 자주 국방이 안 되고 앞으로 하지 않을 것라면, 그들의 입장에서 '사드 배치'는 실보단 득이 많은 수다. 그러니 마다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그리고 미국한테 밉보여서 뭐 좋은 게 있다고. (과연 그러할까? 중국의 경제 제재, 러시아의 군사적 조치들은 미국을 위험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을 위험하게 할 것이다. 앞으로 하나 두 개 어떻게 실현되는가를 가슴 아프지만, 지켜볼 수 밖에)


나는 이 상황 속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정치인, 행정가, 군인들, 그리고 이들로 이루어진 정치집단을 지지하는 한국 국민들이 이해되지 않는다. 그들은 한국을 책임지지도, 이끌지도 않을 작정으로 한국의 정치와 경제의 주도권을 쥐고, 군대를 통솔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들을 이해하고 지지하고 동정까지 한다. (아마 다음 선거에서도 가면을 갈아끼운 골통 보수주의자들에게 투표할 것이다. 그는 그녀와 다르다면서.)


변화보다는 안정이 낫다. 못 살더라도 안정적이고 일관되게 못 살면 미래는 예측가능해진다. 신분제와 노예제가 수천 년 이상 지속된 것도 여기에서 연유한다. 서민들은 이렇게 여기게 되었으며, 상류층도 안정된 체제가 좋다. 분단 상태도 그냥 이대로 지속되는 것이 좋다. 개성 공단이 작살나더라도 상관없다. 분단 체제가 지속되고 이러한 불안정하긴 하나 일시적 균형 상태를 계속 지속시키는 편이 다른 것들보다 낫다. 그리고 밝혀지지 않은 과거사 따윈 그냥 덮인 채로 있는 게 낫다. 이미 일은 벌어져 끝났으니까.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관심도 없거나 관심이 멀어지도록 만들면 된다. 잘못된 일도 덮으면 그 뿐이다. 가끔 마음에 들지 않은 이들이 있으면 교육 차원에서 한 번, 정해진 각본대로 밝히면 된다. 하나 두 개 각본 없이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하면 기득권 전체가 위험해진다. 정말 위험해진다.


그러니 얼마나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 정부 인사들이 미웠을까. 그들은 적극적으로 분단 체제 해소와 보다 나은 상태의 국가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실제적인 일들을 단행했으니까. 과거사도 다시 짚었고 뭔가 잘못된 것이 있으면 바로 잡으려고 했으니까. 그리고 그걸 한 번 경험한 사람들은 알게 될 테니, 그걸 어떻게든 막아야 된다. 그리고 막아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막아야 되니까, 종편 방송 만들고 언론부터 잡고 이젠 국정 교과서까지 가는 것이다. 다 예측 가능한 시나리오다. 어렵게 기득권이 된 이들(소위 개천에서 난 용)에겐 감투를 주면서 괜히 휩쓸리지 말라고 단도리를 한다.


그리고 계속 이 상태로 지속되면 아무 문제 없다. 모든 것들은 예측 가능해진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은 계속 가난하고 힘 없을 것이며, 부유하고 힘있는 이들은 앞으로 계속 부유하고 힘있을 것이다. 가끔 딴 짓 하는 이들만 가끔 본보기로 잡으면 된다. 정치란 이런 것이고 국가 경영이란 것도 이런 것이다.


어차피 대다수의 국민들은 이런 것에 관심도 없다. 먹고 살기 바쁜데, 이런 것 따윈 사회에서 도움도 안 되는 괜한 이상주의자들에게서나 나올 법한 것이니, ‘쟤들은 원래 저래’로 몰고 가면 된다. 그러면 잠시 동요하던 국민들도, 아, 원래 저런 애들이었구나 하고 거리를 두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세월호사건에서 보듯, 그렇게 거리를 두게 된다. 


이만큼 온 것도 기적이니, 이제 안정된 일상, 안정된 사회, 안정된 국가를 만들자고 말한다. 더구나 민주화까지 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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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이 끝나자, 본격적으로 ‘경제’ 이야기가 나오고 조선산업과 해운산업을 중심으로 구조조정이 기정사실화되는 분위기다. IMF 이후 구조조정에 대한 저항이 사라지기 시작하다가, 이명박 정권 이후에는 구조조정은 기업/산업의 일종의 문화가 된 듯싶다. ‘위기’라는 단어가 나오기만 하면 ‘구조조정’, ‘대량해고’, ‘대량실업’이 나온다.(1)


그리고 은연 중에 주류언론에서는 ‘정치’의 문제를 ‘경제’의 문제로 옮겨버린다. 


최근 ‘한국 조선업의 위기’를 보도하는 기사들을 보면 분노를 금할 수 없다. 조선업이 위기에 빠진 것은 경영 상의 잘못된 의사 결정, 안일한 경영 관리, 정부의 산업/기업 리스크 관리 부재, 장기적 산업 전망 부재 등 이것저것 뒤섞인 것이다. 솔직히 경험이 없지만 고부가가치 영역(해양플랜트)으로 도전하는 것에 대해서는 공감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이미 몇 해 전에 올해와 같은 상황이 올 것이라 예측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대응도 없었다. 


이미 구조조정은 기정사실화되었다.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만 남았다. 그런데 너무 선정적이다. 이제는 자살, 강도 같은 제목을 단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게 언론인가 싶다.


구조조정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언론들은 몇 개의 기업이 문을 닫고 몇 명이 대량 해고되었다는 식의 기사를 쏟아낼 것이다. 하지만 그 기사들을 채운 문장 속의 비극에 대해선 입을 다문다. 얼마나 많은 작은 회사들의 사장들이, 얼마나 많은 집들의 아빠들이, 얼마나 많은 집들의 엄마들이 고통 속에 보내야 하는지에 대해선 말이 없다. 


이젠 구조조정으로 인한 작은 회사의 폐업이나 노동자들의 대량 해고는 당연한 일이 된 것인가? 


그래, 당연한 일이라고 치자. 그렇다면 그 다음은? 개성공단에 입주해있던 기업들이 줄줄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자살 시도까지 하고 있지만, 그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미 비극은 시작되었고 어차피 그들의 문제라고 여기는 것일까? 그렇듯 조선소의 문제도 그런 것일까? 


언론들은 ‘어떻게 구조조정했다’고 말하지, 구조조정 속에서 회사를 잃어버린 작은 회사의 사장이나, 직장을 잃어버린 가장과 그 가정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 이 무슨 또 다른 비극이란 말인가. 이젠 모두가 통째로 쓰레기가 되고자 작심한 듯 보인다. 


이제 경기 불황은 일상이 되었고(어떤 이유로 불황의 일상화가 시작되었는지 이야기하지 않고), 일상이 된 경기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직장이 없는 사람들을 자영업자, 혹은 개인사업자화시키고(창업 독려로), 경쟁력을 상실한 기업들은 구조조정을 하면서, 능력 없는 개인들은 도태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이 초래하게 될 국가적, 지역적, 사회적 비극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상처를 어떻게 회복하고 극복해야 하는지, 그것에 대한 계획은 있는지에 대해서 그 누구도 고민하지 않는다. 마치 전쟁 같다. 누가 쏘았는지 모르는 총탄에 맞아 반신불구가 되더라도, 그저 시절 탓으로 돌리고 마는. 전쟁의 비극이 한국에서 불황이라는 이유로 자행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혹시 이것이 잘못된 귀결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가? 국가 산업의 근간을 이루었던 조선산업의 위기는 충분히 예측되었다. 하지만 그냥 방관했다. 그리고 단란했던 소시민들에게 그 책임을 묻고 있다. 


이 나라는 참 이상하다. 책임질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평범한 시민들이 자리 잡는다. 언론도 책임 지지 않고 정부도, 기업 리더들도 책임지지 않는다. 언론은 구조조정이 본격화되면, 몇 명이 잘렸는지 자세하게 이야기해줄 것이다. 정부는 기업 리더들 탓으로, 전세계적인 경기 불황 탓으로 돌릴 것이다. 기업 리더들은 그냥 자리에서 물러나면 그만이다. 어차피 자신들은 전략적 경영을 한 것이니. 낙하산 인사들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갈 것이고, 그들이 져야 할 책임은 월급 없인 생계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분산될 것이다.


우리는 이제 기업 구조조정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한국은 제대로 된 구조조정을 하고 있는가를. 장기적으로 모든 이들이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구조조정을 하고 있는지, 그런 방법은 없는지를 고민하고 하나하나 실천해야 한다.(2)



* *


(1) 이번 구조조정은 민심을 의식한 보수 정권이 구조조정 타이밍을 놓친 것이 주요 원인들 중 하나다. 그리고 이들 기업 리더들에 낙하산 인사들이 상당하다는 사실을 국민들은 알고 있을까. 


(2) 구조조정이 필요한 시점이 되기 전에 이를 예측하고 선제적 대응을 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하긴 이건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다. 이번 산업 위기 사태는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정치 문제다.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다면 상황이 이 정도로 심각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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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인사이트(Economy Insight) 2015년 8월에 실린 윤희웅의 칼럼을 통해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단어를 처음 알았다. 


'기울어진 운동장'은 대한민국 유권자의 정치지형이 어느 한 쪽에 구조적으로 치우쳐 있음을 얘기할 때 인용되는 표현이다. 높은 쪽은 보수세력이고, 낮은 쪽은 진보세력이다. 그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게 되면 낮은 쪽에서 높은 쪽으로 공을 몰고 가서 골을 넣기는 어렵고, 반대로 높은 쪽에서 낮은 쪽으로의 공격은 수월해서 승부는 경기 전에 이미 결정돼 있다는 것이다. 

- 윤희웅, <[선거와 경제] ‘기울어진 운동장’은 구조적인 것일까>중에서, Economy Insight, 2015년 8월호



메모해 둔 노트를 정리하면서 블로그에 옮겨놓는데, 일반적으로 최근의 한국 정치에서기울어진 운동장의 원인으로 보통 아래 3가지를 든다.

 


- 지역구도: 국회의원 의석 수 호남 30석, 영남 67석 

- 세대구도: 진보성향의 젊은 층보다 보수적인 노년층의 인구가 늘고 있다는 것. 

- 미디어환경: 종편의 영향이 크다. 



하지만 이 운동장의 기울기가 완만해지고 있다는 견해도 있고 일부에서는 야당의 경쟁력 약화에 대한 핑계거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기울어진 운동장'은 누구나 공감할 정도로 설득력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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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바빠서 - 이것도 핑계일 지 모르겠지만 -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다 보니, 책읽기, 글쓰기가 형편 없어졌다. 며칠 사이로 좋은 인터뷰 기사를 읽었는데, 시사하는 바가 컸다. 다음에 링크를 달아 블로그에 올려야겠다. 페이스북을 하다보니, 정리되지 않은 단상을 올리고 그것으로 끝을 내는 경우가 많아졌다. 글의 길이가 짧아지고 깊이는 얕아졌다. 여튼 그런 단상들 중 일부를 아래와 같이 옮긴다. 여유가 된다면 관련된 책들도 몇 권 읽고 길게 정리하고 싶지만, ... 늘 생각에만 머물 뿐이다. 


*  *  


정치에 대한 글을 적었다. 야당의 모습을 보면서 한심해서 적은 글이다. 몇 주 전에 적은 글이라 시의성이 떨어진다. 얼마 전 원내대표가 된 이종걸 의원은 한순간 언론에서 자신이 사라졌다고 했다. 그건 (너무 불행하고 슬펐던) 장자연 사건으로 모 신문사 대표를 공격하자 그 신문사에서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하면서 시작되었다고. 그 이후 자신의 기사는 그 어느 신문사에서도 보도되지 않았다고.


언론에서 다루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누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특히 정치인들에게 언론은 중요하다. 하지만 언론을 믿을 수 없다. 언론 기사들을 분석해 문재인 의원과 김무성 의원에 대한 우호적/부정적 기사를 나열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이와 똑같이 여당과 야당도. 


사람들은 언론을 믿는다. 나같은 사람이 기본적으로 언론을 믿지 않고 아주 비판적으로 접근하지만, .... 이런 식의 태도를 가진 사람이 한국 사회에 극히 희박하다는 사실을 심정적으로 동의하게 되자, 절망적으로 변했다. ㅜ_ㅜ 


아래 글을 페이스북에 올린 글 전문이다. 

 

*    * 


정당 정치 시스템이라는 게 있을 지 모르지만,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의 경쟁력은 10:1인 듯 싶다. 새누리당은 일 잘 하는 사람도 많고 컨셉도 잘 잡는다. 전략도 잘 세운다. 확실히 목적 지향적이다. 다만 그 목적이 국민 대다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 혹은 소수의 이들만을 위한다는 점. 보수를 표방하지만 전혀 보수스럽지 못하다는 점.\

 

새정치민주연합은 당나라 군대같다. 다양한 계파들이 존재하고 이들 간의 불협화음이 끊임없이 나온다. 끊임없이 친노가 공격 대상이 된다. 결국 대통령 탄핵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되나. 열린우리당까지 가야 되나. 결국 형식적으로는 뭉쳤으나, 나머지 부분에선 뭉치지 못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들에게는 시스템이라는 게 없다. 일 잘하는 젊은이들을 끌어당길 동력도 없고 새로운 컨셉도 제시하지 못한다. 더구나 너무 오만하다. 비난할 줄만 알지, 문제 해결에 대해선 빵점이다. 여당과 동의하면 비난하고 동의하지 않으면 결정내리지 못한다고 내부에서 비판한다. 문재인 대표가 오만한 게 아니라, 정부와 여당이 최악의 행정과 정치를 하고 있으니, 무조건 이긴다고 믿고 있는 정치인들로만 모여 있고, 이런 정치인들의 모임의 대표가 문재인이니, 그도 오만한 사람이 된다. 


결국 차기 대선주자 1위를 공격해 끊임없이 끌어내리기를 하고 있다. 정말 한심한 정당이다. 내가 보기엔 새정치민주연합에 있는 그 어떤 이보다 문재인의 살아온 행적이 나아보인다. 중도를 표방하지만, 보수스럽고 종종 과격한 발언까지 나온다는 점에서 정치적 컨셉을 찾기 어렵다. 부산의 모 의원은 과격 보수처럼 여겨진다. 결국 권한을 얻고 돈만 벌면 된다는 식이다. 늘 국민을 위하는 척하지만, 실은 말 뿐이다. 말이라도 해야, 능력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은 능력 있지만 국민을 위해 쓰지 않고 새정치민주연합은 국민을 위한다고 하지만 능력이 없다. 더 큰 일은 새누리당은 끊임없이 젊은이들이 끌어당기지만(이준석이나 손수조), 새정치민주연합은 아직도 동교동계 이야기가 나온다. 헐~ 도대체 이들의 평균 나이는 몇 살인가?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대선 승리를 위해, 대선주자를 중심으로 헤쳐 모여야 된다. 강력한 리더십과 정당 시스템을 마련해야 된다. 결국 키는 문재인 대표일텐데, 그는 신중하나 결단력이 없고 쓸모없는 말을 하진 않으나, 모든 이들이 원하는 정치적 제스추어에는 약하다. 그리고 옆에서 코칭해줄 만한 능력자도 새정치민주연합에는 없거나, 아니면 도리어 너무 많은 것이다.


*  *  


정치적 제스추어에 있어선 이재명 성남시장이 단연코 최고다. 그의 정치적 감각은 탁월하다. 야당에 이런 감각을 가진 이가 2-3명만 더 있어도 기대해 보겠건만. 박원순 서울시장과 이재명 성남 시장을 비교해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정치 바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열심히 투표하지만, 실제 제대로 된 정치가 이루어질 때 그 정치의 실질적 혜택을 보게 될 이들은 투표를 하지 않는다. 젊은 층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세계는 조각나고 조각난 세계들은 서로의 세계에 무관심해질 것이기에. 


*  * 

인문학자들의 무책임함은 그들 특유의 비현실성에서 기인한다. 그래서 그들은 최신이론의 수입자 혹은 해석자로만 있을 뿐 지금 여기 우리들의 문제에 대해서 한 마디도 못하거나 할 생각이 없거나 하더라도 형편없는 글로 비난의 대상이 된다. 


한때 탈정치화를 이야기하던 일군의 학자들이 있었다. 탈정치화가 불러올 현실적 파장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이 학문수입상으로서의 입장만 고수했다. 그들은 그 때도 대학교수이고 지금도 대학교수다. 그 때 나도 그런 류의 논문과 책들을 읽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자리에서 앞으로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하더라. 그 이후 대단한 연구서가 나온 것도 아니고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학자가 생긴 것도 아니다. 그들은 지금도 학문 수입상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다. 그리고 학생들을 닥달하고 자신의 무식함을 최신 수입 이론으로 가린다. 그들은 젊음 옆에 서서 젊음을 갉아먹는다. 그리고 인문학을 죽인다. 죽어가는 인문학은 인문학의 문제가 아니라 인문학 교수들의 문제이고 그들이 가르치는 학생들의 문제다. 인문학은 우리에게 닥힌 삶의 문제이지, 이론의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알지도, 알 필요도 없다. 


최근에는 언론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언론인들은 생계를 핑계로 무책임한 기사들을 쓰고 있다. 이 사회를 나락으로 빠뜨리는 이들이 언론이 되고 있다. 한 때 나락에 빠진 한국 사회를 제대로 굴러가게 하기 위해 언론인들이 발 벗고 나선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반대가 되었으니 ... .... 


실은 모든 이들이 월급을 핑계로 사소하지만 거대하게 무책임한 일들을 저지르고 있다. 그게 모여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대표적으로 무책임한 투표 탓에 우리는 한국 사회가 전형적인 후진국적 사건사고에 휩쓸리는 모습을 보고 있다. 


무언가에 대해 책임 지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해 알아야 한다. 알아야 그것이 잘못되었을 때 대처할 수 있다. 즉 모르니 대처할 수 없고, 그러니 책임지지 않으려 한다. 그 파장이 큰 것일수록 리더가 책임을 져야 한다. 하물며 작은 회사의 팀장이 지는 책임, 대표가 지는 책임의 무게도 가볍지 않은데, 한국은 큰 조직의 리더가 될수록 무책임해지고 무식해진다. 이것이 한국의 미래를 갉아먹고 있다. 



요즘 한국 사회도 이렇고 나도 이렇구나.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기분... 언제쯤 끝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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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주도권싸움 2015.06.05 09:11 신고

    모 주도권싸움이죠. 서로간의 앙금이 있는 상태에서도 정권교체를 위해 뭉친거라서...
    문재인은 대권을 잡을수 있는 두번의 기회를 날려버린거죠. 당대표를 박지원에게 양보안한것
    선거에 진후 바로 사퇴안한것 두가지를 모두 거부하고 호남여론이 나빠진다는걸 예측못했다면 정말 정치력이 없다는 증거고 예측하고도 그리했다면 대권보다는 친노의공천이중요하다고 생각한거죠
    현재 문재인 지지율은 계속 하락중이고 끝났다고 봐요
    이재명 안철수 박원순 반기문 손학규정도가 대권후보인데 총선은 망할게 확실시 돼고 일말의 희망이 있는게 대권인데 정말 희박하네요
    어차피 이리된거 차라리 분당하는것도 야권쪽에서는 나쁘지 않다고 봐요. 정책연대나 대권연대만 하면돼지 굳이 같은 당에서 니꺼니 내꺼니 싸울 필요가 없죠

    • 정치력 부재가 큰 일인 듯합니다. 정치력이 부족하면 서로 대화를 해서 풀어나가는 지혜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도 없고요. 저도 차라리 분당해라는 쪽으로 기울더군요. ~..댓글 감사합니다.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Downsizing Democracy 

매튜 A. 크렌슨, 벤저민 긴스버그(지음), 서복경(옮김), 후마니타스 


 




 





1. 정치의 중요성 


몇 년전부터 정치에 대해서 좀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 일상의 상당 부분이 정치, 정치적 활동, 현실 정치 - 누가 국회의원이 되고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 - 등으로 인해 좋아지거나 나빠진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인들과 그들이 만드는 모습으로 인해 나라의 운명이 바뀌기도 한다. 


그만큼 중요하고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이가 들수록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심지어 술자리에 정치 이야기를 꺼내면, 일행 중 한두명은 싫어한다. 더구나 정치 이야기를 하다가 싸우기라도 하게 되면 괜히 꺼냈다는 기분과 함께 술자리마저 가지지 못하는 외톨이가 될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일까. 일상에서의 정치란 서로 다른 입장에 서서 이야기하고 서로의 다름은 인정하고 타협점을 찾아나가는 여러 활동들이라 여기는데 말이다. 알게 모르게 우리들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자리에서조차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정치인들을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으며, 정당에 대한 비난이나 공격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의 세계가 있었고 우리의 세계가 있었다. (1) 


상황이 이렇게 변하자, 도리어 나는 정치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불현듯 정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제대로 보고 이해할 수 있는 가이드가 필요했고 몇 권의 책을 샀다. 하지만 쉽진 않았다. 책 읽을 시간이 없었고 나 스스로도 둔해졌다. 그러다가 올해 봄,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구입한 지 2년 만이다.



2. 한국의 민주주의, 그리고 현재


현대 한국에서 '정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는 강제된 것이다. 외침(外侵)에 의해 조선 왕조가 무너졌고 그 이후 식민지 시대를 거쳐, 미군정이 지나고 미국의 영향력 아래,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정치 체제가 도입되었다. 그리고 정치적 모략과 술수, 암살 등을 거쳐 초대 대통령이, 그 이후 다양한 군사적 활동에 기반한 대통령들이 취임하고 바뀌었다. 불행하게도 진짜 민주주의 - 국민들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 는 없었고 대통령들과 그의 무리들이 나라를 통치했다. 


소수의 사람들이 주장하고 다수의 대중들이 동의하듯, 이 통치에는 일견 장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건 100점 만점에 50점짜리다. 경제를 어느 정도 발전시켰으나, 정치 체제를 발전시킬 기회를 잃어버렸다. 심지어 그 경제마저도 재벌 중심으로 만들어놓은 탓에, 재벌 기업 1-2개가 무너지면 나라가 휘청거릴 판이다. 그리고 그 재벌 기업들 때문에 많은 중소기업들이 성장하지 못하고 하청기업에 머물러 있는 현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경제를 성장시켰다고? 수십 년 전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었으나, 겨우 이 정도 밖에 못 온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현재 우리는 뒤쳐지고 있다. 분명 그 때 우리는 성숙한 민주주의와 탄탄한 경제 시스템을 만들 수 있는 어떤 기회를 가지고 있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그 때 우리가 너무 가난하고 너무 낙후되어 있었던 탓에,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높은 경제 성장율을 기록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그리곤 그 때의 놀라운 경제 성장이 몇 명 소수의 작품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그렇게 성장했던 경제가 무너지고 있는 건 어쩌란 말인가? 그렇게 성장했던 경제 시스템이 잘못되었다는 반성은 하지 못하는 걸까? 경제적 불평등은 심해졌고 곧 인구 절벽이 시작될 것이다. 이제 젊은 세대를 위한 미래 따윈 없다. 경제 활동을 통해 창출한 부는 모두 자산 거품을 지탱하기 위해 소모된다. 즉 집값을 버티기 위해 사용된다는 말이다. 집값이 떨어지면 아예 집이 없는 젊은 세대들은 아무런 피해도 없다. 어차피 지금도 힘든데, 집값이 떨어진다고 더 힘들어질까.  


미래를 위한다면 집값은 버려야 하지만, 이 말을 했다가는 절대로 국회의원이 되지 못하고 대통령이 되지 못한다. 



3.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Downsizing Democracy  


이 책은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정치학 서적이다. 일종의 분석서이고 연구서적이다. 정치적 견해가 담겨 있다기 보다는 정치 제도, 정치적 활동의  변화가 현재 미국 민주주의를 악화시켰는가에 대한 연구와 분석이 대부분이다. 사회학적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할 듯 싶다. 


그런데 문제는 미국민주주의 상황이 한국의 상황과 너무 유사하다는 데 있다. 2004년도에 미국에서 출판된 책인데, 2015년 한국 사회에 적용할 수 있을 정도라면 ... 


가령, 왜 정치엘리트들은 대중들과 소통하지 않고 다양한 이익단체들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리더들과만 소통하게 되었는가, 교육 수준이 높아질수록 도리어 정치에 대한 관심이나 참여율은 더 떨어지는가, 왜 가난의 문제를 더 심각해지고 해결 불능 상태로 치닫고 있는가 등 현실 정치의 다양한 문제점들이 어떤 계기로 생겼고 악화되어 가는가를 냉정하게 분석하고 있다. 너무 냉정해서 아주 비관적으로 읽히기까지 한다. 



4.  고객Customer이 되어버린 시민Citizen



최근 수십 년 동안 평범한 미국인들은 시민에서 '고객customer'이라고 불리는 존재로 변해왔다. 

- 9쪽 



책 서두에 등장하는 이 문장은 현재 정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시민이라고 하면 선거에서 투표권을 행사하며 현실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면, 고객은 행정가나 정치인들의 다양한 서비스를 받으며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여기에 대해 콜센터에 전화를 걸어 서비스 개선을 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애초의 기획은 많은 시민들에게 현실 정치 참여의 기회를 폭넓게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야기할 수 있는 다양한 채널이 생긴다면 시민들의 의견을 보다 폭넓게 듣고 수용할 수 있으며 정책이나 정당의 정치적 활동에 반영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미국 민주주의 성숙과 다양한 민주적 제도의 신설과 운영은 미국인들을 시민에서 고객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저자들은 이러한 상황 변화를 면밀히 추적하며 기술하고 분석한다. 



5. 탈물질주의, 그리고 가난 


요즘 진보적인, 혹은 진보적인 척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다양한 공익 활동이나 자선 활동을 하며 환경 운동이나 인권 운동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는 미국 자유주의자들도 마찬가지다. 저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미국 주류 자유주의 최근 경향은 ‘탈물질주의’다. 이것은 정부의 정책결정자들을 인도하는 강력한 공적 이념과 짝을 이루는 민간의 이념이다. 탈물질주의는 특수 이익의 지저분한 난투극을 초월한 양, 허공에 붕 뜬 채로 삶의 질을 강화하는 데 시선을 둔다. 이때 많은 경우 경제적인 사안은 고려되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고래와 야생동물 보호, 여성의 선택권 보장, 자존감의 형성, 에너지 보존, 정치 자금 제도 개혁에는 찬성하고, 에이즈에 대한 사회적 편견, 근본주의적 불관용, 해양굴착, 동성애자 배척, 총기 사용 규제 완화 로비에는 반대한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 지지자들은 저마다 나름의 고상한 명분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명분들은 대부분 ‘고상하다’. 하지만 그것은 풍족한 사람들의 명분이다. 

- 414쪽 



약간 이상하지 않은가? 이 상황은 한국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얼마 전 '동성애 행사'가 논란이 되었다. 그리고 인권 문제도 나왔다. 환경 문제도 걸핏하면 등장하고 이주노동자 인권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그런데, .... 



탈물질주의는 가난을 비껴간 시민들의 신념이다. (…) 중도좌파가 공공정책을 통해 만들어낼 수 있는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혜택에 관심을 갖지 않을 때, 이들은 궁핍한 환경에서 살아가며 침묵하는 시민들(빈곤층 뿐만 아니라, 제조업이 쇠락하고 고등학교 졸업장이 더 이상 경제적 자립을 보장하지 않는 경제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는 노동계급 가정들)과도 멀어졌다. 

- 415쪽



진짜 한국을 절망적으로 만들고 있는 건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이다. 중소기업을 다니는 월급쟁이가 성실하게 돈을 모아 서울 시내 아파트를 살 수 있을까? 이제 절대 사지 못한다. 당연히 빚을 내면 살 수 있다. 그리고 빚에 짖눌려 살다가 죽을 것이다. 부모가 빚이 있으니, 대학생이 된 자녀들은 학자금 대출을 받는다. 그 자녀들도 직장을 구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시작부터 갚지 못하는 빚을 안고 사회 생활을 시작한다. 


그런데 인권? 환경? 성적 취향의 자유?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우리는 진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까먹고 있다. 그건 우리 코 앞에 닥친 가난의 문제다. 죽으라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는 가난한 자들의 시대가 이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이다. (2) 


이 가난의 문제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우습게도 그걸 해결할 수 있는 건 거의 유일하게 정치다.  



6. 국가와 국민, 혹은 시스템과 개인 



“국가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묻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라”



국가에게 묻지 말고 스스로 국가를 위해라고? 이게 가능한 소리인가? 아마 10년 전이라면 충분히 호소력 있었던 말이었을 것이다. 5년 전이라도 약간의 호소력은 가졌을 것이다. 100조원이 넘는 돈을 자원 외교랍시고 날려버렸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가령 100조원으로 신혼부부들을 위한 아파트나 연립 주택을 지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 얼마나 씁쓸한 유머인가? 이 나라 국민들은 화가 나지도 않나? 100조원이면 천 만명에 천 만원씩 줄 수 있는 돈이다. 백만명이라면 일 억원씩. 그 돈을 공중분해시켰다) 


그런데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라고? 이제 그 누구도 국가를 앞세워 우리에게 호소하지 못하게 되었다. 세월호 이후 국가는 우리와 무관한 존재가 되었다. 국가를 위하라고? 이젠 예비군 훈련 가서도 죽는 판인데... 국가를 위하라니.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은 무슨 생각으로 저 말을 한 것일까? 제대로 된 민주주의에서는 정말 강력한 호소력을 가진 저 말이, 엉망이 된 민주주의에서는 그 어떤 호소력도 가지지 못한 채, 그저 비아냥거림의 대상이 될 뿐이다. 


국가와 시민의 관계는 공생의 관계다. 국가는 시민에게 군사력과 세금을 거두어 들이고 시민은 국가로부터 안전과 다양한 공공서비스를 보장 받는다. 국가는 시민에게서 다양한 재화를 받기 위해 공공 서비스를 확대하고 투자한다. 예전에는 정치적 모임이나 정당 차원에서 지원해주던 것을 개개인의 차원으로까지 낮추어 제공하기 시작했다. 



개인민주주의는 집단적 공격으로만 돌파할 수 있었던 정치의 장벽을 낮춘다. 정보의 자유, 정보공개법, 공청회 의무화, 입법 예고제와 공개 설명회 규정, 위원회 등의 ‘시민’ 대표 할당제, 공공기관의 ‘전화상담서비스’,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복지 서비스 등 이 모든 것과 기타 정책들은 시민들이 혼자서 정치를 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외견 상 시민 친화적으로 보이는 개인민주주의의 이런 장치들이 갖는 주된 효과는 미국에서 시민의 역할을 위축시켰다는 점이다. 

- 43쪽 



쉽게 말해 국가가 제공해주는 서비스에 불만이 있다면, 예전에는 지역구 사무실을 찾거나 다양한 모임을 통해 정치적 발언이나 행동을 했지만,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 처리한다. 심지어 지역구 사무실, 다양한 모임을 통해 처리되지 않는 민원이 있다면, 청와대 신문고에 올려야 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니.... 이제 이 사회의 잘못된 점을 개선하기 위해 정당 활동을 할 필요가 없다. 필요없다고 여기게 만들었다. 미국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시민들은 스스로 시민의 역할을 버리고 고객의 태도로 여러 공공 서비스에 대한 불만을 콜센터를 통해 접수한다. 의도치 않은 결과이긴 하지만. 


애초에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위해 만든 것이지만, 도리어 정치적 무관심을 만들고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킨다. ‘정치적인 것이 개인적인 것으로 변형된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당을 지지하지도 정당 사무실을 나가 정치인을 만나지도, 사람들을 모아 시위를 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대다수의 문제들은 해결할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와 비슷하게 ‘정치엘리트들도 유권자를 동원하지 않고도 자신의 정책 목표를 달성할 방법을 찾았다’. 


이제 높은 투표율은 꿈과 같은 이야기가 되고 있다. 정치인들은 이제 그걸 원하지 않고, 높은 투표율 없이도 그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정치를 능수능란하게 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리고 고객이 된 시민들도 이제 투표하지 않는다. 투표의 효과는 거의 없고 민원 게시판의 효과는 직접적이다. 그 효과가 더 큰 것은 소송이 될 것이다.


국가와 국민은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고 시스템은 시스템 자체의 문제를 개인에게 떠넘기고 있다. 가난은 개인이 성실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지, 시스템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취업도 마찬가지고 결혼도 연애도 다 개인의 잘못 때문이다. 과연 그런가? 정말 그렇다고 믿고 있는가? 



7. 상상된 유권자와 여론조사 


시민이 사라지고 모두 고객이 된 지금, 시민, 즉 유권자는 상상되고 있다. 정치인들은 유권자를 향해 호소하고 여론은 투표권이 있는 시민들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1970년대 ‘새로운 정치’에서, 그런 상상된 유권자 집단들은 공익단체라는 형태로 현실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실제 공익단체에 대한 대중의 참여는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이 단체들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선거에서 대중을 동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행정기관을 접촉하고 소송을 제기하는 방식을 활용한다. (…)

모든 사람의 이익을 대표한다는 명분 아래 공익단체는 특정한 누구와도 거리를 두었다. 그 결과 한정된 유권자 집단을 동원하지 않고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을 찾아야 했다. 

- 148쪽 ~ 149쪽 



공공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시민 집단을 상상적으로 구성한 것, 이것이 바로 공익단체다. 이제 실제 유권자들이 모여 집단적으로 정치적 발언을 하는 경우 극히 드문 이벤트가 되었다. 대신 여러 단체에 속한 소수 인원들이 피켓을 들고 시위할 뿐이다. 


상상된 유권자라는 관념은 여론 조사로 옮겨가면 상황은 심각해진다. 


2억 5천만 미국인의 의견을 반영했다는 설문조사는 겨우 무작위로 추출된 응답자 2~3천명의 인터뷰 결과일 뿐이다. 나머지는 통계적으로 또는 ‘가상적으로’ 대표된다. 그들은 인터뷰의 불편함조차 견딜 필요가 없는 것이다. 

- 190쪽 



수학적으로 옳을 진 모르지만, 수학은 수학일 뿐, 우연이 지배하는 현실은 아니다. 그런데 그것이 현실이라며, 여론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정책을 수립하고 정치적 의사결정을 한다. 이게 과연 옳은 것일까? 



통계학자들은 여론 조사를 ‘참견하는 측정 obtrusive measure’이라고 부른다. 여론조사는 단순히,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의 연속성과 변화를 측정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여론조사는 개인의 의견을 모으는 방식을 정의한다. 예컨대 여론조사에서는 더 많은 정보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의견 간에 비중의 차이가 없다. 또한 여론 조사자들은 여론이 판단해야 할 주제를 선택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설문 조사로 기록되는 데이터는 ‘순수한’ 여론이 아니라, 여론을 가진 사람과 여론조사자의 상호작용이다. 설문조사가 여론을 측정하는 동시에 여론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 189쪽 ~ 190쪽 



여론조사는 시민의 입장에서 정치 지도자들이 들어주기 원하는 바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엘리트들이 시민의 의견 가운데 듣고 싶은 것을 말해준다. 그 결과, 여론조사는 여론을 공표하는 것이 아니라 여론을 설득하는 과정의 한 단계로 자리잡는다. 여론조사는 여론 관리를 위한 도구인 것이다. 

- 195쪽 



여론조사를 통해 너무도 신중하게 걸러진 이런 가상 시민들의 견해에는, 한때 여론을 중요한 정치적 현상으로 만들었던 특징들이 빠져 있다. 강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은 더 많은 수의 무관심한 사람들 속에 묻혀 버린다. 집단과 집단성은 개체화되고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약화된다. 마침내 시민은 고객의 지위에 걸맞게, 의뢰자의 설득에 따라 자신의 견해를 수정할 수 있도록 설계된 여론 조사의 대상이 된다. 정치적 변방에 갇힌 이들 가상의 시민은 참여하도록 초대받지 못한 채 정치투쟁을 그저 구경만 할 수 있을 뿐이다. 

- 198쪽 



어느새 우리들은 우리들의 정치적 견해를 여론 조사에 기대어 생각하고 판단내리고 있다. 여론조사기관들은 경쟁적으로 다양한 여론 조사 활동을 하고 이를 보도 자료로 배포한다. 연예 가십 기사들과 경쟁하는 정치부 기자들은 보다 자극적인 여론 조사 결과를 기대하고 이를 부풀어 보도한다. 이제 상식적이고 건강한 정치적 견해가 만들어질 수 있는 환경 자체부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8. 민주주의와 한국 사회 


이 책의 상당 부분은 개인적 차원으로 내려앉은 민주주의와 '정치동원political mobiliztion'에 대해 할애하고 있다. 즉 개인민주주의로 인해 기존 정치 활동의 모습은 사라지고 건강한 민주주의 대신 정치 엘리트들과 이익단체 위주로 정치가 흘러간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들로 인해 '왜 미국 민주주의가 나빠졌는가'를 이야기한다. 



이 책은 '물질적 필요가 너무 중요하고 절실해서 탈물질주의를 향유할 능력이 없는, 정당이 보내는 우편 목록에조차 이름이 올라 있지 않고, 투표하지 않아도 굳이 관심 가져 주는 이가 없으며, 자신의 이익을 대표한다는 이익집단으로부터 초대받지 못하고, 자신의 이익을 대표해 진행되는 집단소송의 원고 명단에도 이름이 올라 있지 않으며, 그저 여론조사로 대표되는 가상적 시민virtual citizen으로만 존재하는 사람들'의 민주주의에 관한 이야기다. 또 '공동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나라를 위해 뭔가 해야 할 것 같은 애국적 열정을 간직하고 있고, 이따금씩 역사에 나타나는 '열정의 순간'을 함께 하지만, 곧 부모이자 생활인으로서의 책임 사이에서 타협할 수밖에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민주주의에 관한 이야기다. 

- 역자 후기, 443쪽 



민주주의에 대한 책이지만,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극히 일부일 것이고 민주주의나 정치에 대해서 고민하는 이들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다들 먹고 사는 문제가 먼저라고 여긴다. 하지만 먹고 사는 문제가 어려워진 것은 한국 정치 상황이, 한국의 민주주의가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걸 모르고, 그걸 아는 이들은 이미 지쳐있고, 알려고 하는 이들에겐 끊임없이 그건 거짓말이라고 세뇌시킨다. 


그러니, 가상적 시민으로만 존재하는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는 자신들 탓으로 여길 것이다. 비만이 나쁜 환경으로 인해 벌어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의지력 박약으로 몰고 가듯, 한국 사회는 사회 자체의 문제점으로 인해 고통받는 개인의 문제를, 그 개인의 불성실함, 그 개인의 잘못된 판단 탓으로 몰고 간다. 



* * 

글을 적고 보니, 이 책에 대한 소개인지, 현재 한국에 대한 불만을 적은 것인지 모르겠다. 며칠 전에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써서 올렸는데, 너무 두서가 없어 다시 적었다. 그러나 수정해 적은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레지스 드브레가 어느 인터뷰에선가, 테니스 선수처럼 매일 글쓰기를 해야 된다고 했는데, 날 두고 하는 소리같다. 일이 많아 요즘 글을 거의 쓰지 못했다. 그랬더니 서평 하나 쓰는 것도 이렇게 어렵게 여겨져서야 ... 큰 일이다. (어쩌면 내 스스로 정리가 덜 상태여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이 책, 정말 좋으니, 다들 사서 읽기를 바란다. 





미주. 

(1) 한때 모든 것이 지금은 고인이 된 전직 대통령 탓이라고 하던 이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씁쓸하기만 하다. 2015년의 한국은 위에서부터 아래에까지 무책임함으로 똘똘 뭉쳐있다. 


(2) 첫 리뷰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과 강남 좌파에 대해서 언급했으나, 지웠다.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 10점
매튜 A. 크렌슨 & 벤저민 긴스버그 지음, 서복경 옮김/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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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였나, 아니면 그 이전이었나. 정치가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이 커다는 사실을 알고 난 다음부터 제대로 된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아직도 시작하지 못했다. 마음 속의 분노와 절망은 너무 커져 폭발하기 직전이다. 오늘 광화문을 지나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는 듯 사는 내가 미워졌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고 이젠 치료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는 건 아닌가 싶다. 조 단위로 해먹은 전직 대통령을 불러 조사하지도 못하고 빠르게 성장하는 인도네시아에서, 일본과 중국이 그간의 갈등을 끊고 악수하는 자리에 한국 대통령은 없고 도리어 고산병을 극복하며 열정적으로 남미 외교를 하고 있다는 기사는, 대놓고 국민들을 무시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정부와 여당을 지지하고 한때 자신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던 정치인이었던 기업인이 억울해하며 자살을 해도, 그 지지는 쉽사리 누그러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도대체 이런 나라에 미래가 있기라도 한 걸까. 


* *  


세상사에 무지하고 관심 없는 백성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할 성군 따윈 없다. 아니 그런 성군이 있다 한들 그 성군 앞에 놓인 길은 가시밭길일 테니, 그가 성공할 가능성은 전무하다. 그러니 백성들이 알아서 세상사를 알아야 한다.


하지만 지금 한국은 무지한 백성들로 가득 차 있는 듯하여 안타깝기만 하다. 티브이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진짜라 믿고, 듣기 좋은 거짓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 누군가를 향한 유언비어를 그대로 믿고 잘못된 소문이 진짜인 양 그대로 따라 하기 일쑤다.


동네 곳곳에 도서관이 생기고 인터넷으로 원하는 정보를 찾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백성들은 도리어 더 무지해지고 있다.


모든 시대, 모든 국가에서 벌어졌듯이, 그 나라 백성들 수준에 맞추어 그 나라 정치도 이루어지는 법이다. 전제군주정에는 그 정치체제에 맞는 백성들이 있고 민주주의에는 민주주의에 맞는 백성들이 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은 마치 전제군주정을 보는 듯하다. 이에 일부 사람들은 황당해하고 일부 사람들은 거리로 나서기도 하지만, 대다수는 수수방관이다. 수수방관하면서 TV를 보며, 아무 일 없는 척한다. 당연히 그들이 보는 TV 채널은 고정되어 있다.

 

내가 살아가면서 내일이 어제보다 나아질 것이라고 확신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어제보다 못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은 퇴보 중이다. 더 큰 문제는 퇴보하고 있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관심 없다는 것이다. 


문제를 안다고 해서,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걸까? 문제는 경제가 아니라, 정치다. 한국 사회는 정치적 문제가 경제의 발목을 잡을 만큼 체계적으로 변했다. 1970년대가 아니라 2010년대다. 연일 국가부채, 가계부채 이야기가 나오지만, 정부는 어떻게든 돈을 빌려가서라도 경기 부양을 할 태세다. 의도적으로라도 자산 인플레이션을 만들고 싶을 게다. 집값 오르면 부자가 된 양, 돈을 많이 쓰지 않을까 내심 기대를 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디에 서 있고 왜 세상이 갈수록 야박해지고 일상이 힘들어지고 있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고, 이젠 던지지도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미 우리는 세상사의 무지함으로 인한 반쯤 노예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이 노예들은 자신들의 처지와 무관하게 언젠간 배탈 나게 할 음식을 내어놓으면 좋아라 하고, 배탈나지 않는 법 같은 걸 이야기하면 화를 내고 ‘너 이상한 생각을 하는 놈이구나’라며 인신공격을 해댄다. 

 

이제 우리의 적은 저들이 아니라 우리들 속의 무지다. 스스로 무지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채널이 고정된 TV를 보면서 세상을 잘못 읽고 바라본다. 그리고 스스로 무지하지 않다고 확신하는 이들은 스스로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이 나라에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흥분하고 열을 내지만, 미래는 정해져 있고 위로 올라가는 계단은 사라졌다. 


왜 사라졌냐고? 그건 제대로 된 정치 지도자를 선택할 눈도, 안목도 가지지 못한 우리들 탓이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폐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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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맘이 아파요…
    우리가 꿈꾸면서 싸워 성취한 세상이
    이런 모습이어선 안되겠단 생각이
    참 많이 드는 요즘이에요

    • 가끔 제가 알던 한국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니면 제가 한국을 너무 몰랐던 것이기도 하고요. ㅜㅜ


공부하는 보수, 

이상돈(지음), 책세상 





서평집이다. 두껍다. 색인까지 포함하면 700페이지가 넘는다. 하지만 쉽게 읽힌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문제는 '보수'라는 단어인데, 이제는 그 단어가 조금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 생각할 때, 이명박 정권은 보수를 표방하고 들어선 첫 정권이었지만 독단적인 궁정 운영과 부패, 비리 의혹으로 얼룩져 실패한 정권이었다. 박근혜 정권은 그런 오점을 청산하고 태어난 합리적인 보수정부이기를 기대했건만, 지금까지의 결과로 봐서는 더 이상 기대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한 보수정권은 부패했고, 또 다른 보수정권은 무능이라는 평가를 받을 것이라 생각하니 허무하다. 

- 11쪽 ~ 12쪽  

 

그래서 이 책은 현 정권과 이전 보수 정권에 대한 반성이 담겨 있어야 할 텐데,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이명박 정권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고 박근혜 정권 하의 정책에 대한 언급은 가끔 보이긴 하나, 직접적이지 않다. 아마 이런저런 이해 관계 속에서 공격적인 발언은 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공격적인 비난 뒤에 올 여러 불이익을 감수할 자신이 없었던 듯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책은 그냥 서평집이다. 그것도 보수주의자들이 쓴 원서를 읽고 쓴 서평집(대부분 번역되지 않았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나는 우파다'라고 했더니 내 주위의 진보좌파들이 크게 웃었다. 그러니 다들 나를 진보로 볼 수 있을 텐데(나는 늘 좌파로 보여지는 것에 대해 이상하게 여기지만), 보수주의 저자들 일색인 이 책에 대한 문제적이고 비판적 읽기는 쉽지 않다. 실은 한국에는 보수라고 불릴 만한 이들이 있다면 도리어 '종북좌파'로 불리는 이들이 서구에서 바라보는 바, 보수에 가깝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에서 '보수'라고 하면 새정치민주연합 정도가 될 것이고(중도 좌파가 아니라), 새누리당은 보수정당이라기보다는 뭐랄까, 보수로 포장한 1950년대 정당같다는 느낌. 


저자들은 보수주의란 '중용과 전통, 그리고 합리성을 존중하며, 기존의 문화시스템 안에서 사회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생각'이라고 정의한다. 보수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진화적 변화를 추구하며,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정부 정책을 의심한다. 

- 230쪽 (Edwin Feulnet, Doug Wilson, <<Getting America Right: The True Conservative Values Our Nation Needs Today>>(Crown Forum, 2006)에 대한 서평, '올바른 보수정책이 필요하다' 중에서) 



하긴 이 책에서 소개하는 많은 책들과 저자들도 미국 공화당과 보수 정권들에 대해 공격하고 심지어 진정한 의미로 보수정당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할 정도이니까, 한국에서 보수정당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우스운 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책은 읽을 만한가? 솔직히 나는 지난 1주일 동안 이 책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아마 내 주위의 진보주의자들이 읽으면 화들짝 놀랄 만한 내용도 많다. 가령 피터 스와이저Peter Schweizer의 <<내가 말한 대로 해: 진보의 위선적 모습 Do As I Say (Not As I Do): Profiles in Liberal Hypocrisy>>에 대한 리뷰 일부를 옮겨보자. 


진보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가난한 사람과 소수인종과 여성을 진정으로 생각하는 정의로운 집단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보수주의자들이 탐욕스럽고 환경을 파괴하며 비윤리적이라고 비난한다. 

- 333쪽 


 한국에서도 그런가? 잘 모르겠다(여기엔 내 개인적 경험까지 포함되어 있다). 일반적인 경우 위의 인용문처럼이겠지만, 한국 사회에선 일종의 희망 사항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미국은 자본가와 군대가 움직이는 '불량배 국가'이고 이스라엘은 '중동의 악'이라고 비난해서 명성을 얻은 MIT 명예교수 놈 촘스키는 전 세계 진보좌파에게 영웅과 같은 인물이다. 그러나 촘스키는 40년 동안 국방부가 MIT에 지원한 암호 개발 프로젝트로 연구비를 받아왔다. 촘스키는 자기가 자본주의의 희생자인 가난한 민중을 대변한다고 주장해왔지만 사실 그 자신은 매우 영악한 자본주의자다. 강연료와 인세 수입으로 인해 그는 소득이 전체 미국민의 상위 2퍼센트 안에 들 정도로 부자이다. 그는 보스턴 근교 레싱턴이라는 부자 동네의 85만 달러가 넘는 호화 주택에 살고 있으며, 케이프코드에 별장도 갖고 있다. 촘스키는 흑인과 여성이 차별을 당하고 있다고 평생토록 주장해왔지만 정작 자신의 연구 스태프로는 백인 남성만 고용했다. 그는 9.11 태러 후 강연 요청이 많아지자 9,000달러 받던 1회 강연료를 1만 2,000달러로 올렸고, 변호사를 고용해서 자기가 낼 세금을 줄이기에 여념이 없었다고 한다. 

- 334쪽 


내용이 선정적이어서 아마존에 뒤져보니, 표지도 선정적이다. 촘스키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진보주의자들에 대한 실생활을 까고 있다. 리뷰 평점은 나쁘지 않고 2006년 상반기에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기도 했다. 어쩌면 우리도 그렇지만, 미국인들도 진보주의자들(미국에선 liberals)에 이상하게 높은 절약정신과 도덕율을 요구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마존 리뷰를 보니, '부자 리버럴이 보수주의자들보다 훨씬 낫다'며 이 책에 대해 별 하나를 주는 이도 있었다. (그런데 왜 이 책은 번역되지 않는 걸까? 하긴 내 생각엔 자칭 한국에서 보수주의자라고 하는 이들은 책을 거의 읽지 않거나 다들 영어로만 책을 읽어서 그런 듯 싶다)



- 피터 스와이저의 책 표지. 유명한 사람들이 표지로 등장하고 있지 않은가! 



저자는 미국의 급진 세력을 대표하는 이들이 평등, 정의, 소비자 보호, 환경보호, 여성 해방 등을 내걸었지만 정작 자신들의 사생활에서는 철저하게 개인적 이익을 챙긴 위선자들이라면서, 이제 이들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무현 정부 시절, 이와 비슷한 논지의 이야기를 어느 보수신문이 종종 게재했고,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 정치인들도 비슷한 주장을 편 적이 있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 이후, 적어도 보수 쪽에서는 그런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보수 쪽 사람들의 윤리 수준이 더 낮기 때문이다. 

- 337쪽 



아, 박근혜 정권은 아예 이야기조차 하지 않는 저 센스.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일들이 너무 많이 벌어졌으니 말이다(그러면서 보수 정권 어떠니, 종북 좌파 이야기를 해대는 이들을 보면, 할 말이 없어진다).


이 책에 소개되는 책들 대부분은 보수주의적 입장에서 서서 미국과 세계 정세, 미국 정치, 이슬람, 유럽, 금융 위기를 바라보고 있다. 정말 흥미롭게도 그런 책들 일색이다. 이상돈 교수가 선호하는 저자들도 눈에 보이고 책들 중에서는 서로 비슷한 논지에서 중복되는 주장을 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읽는 중간 가끔 같은 내용이 반복되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서 소개되는 책들 대부분이 번역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국 지식인 사회에 국제 정세나 보수주의자들의 세계와는 참 먼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창설 당시 51개였던 유엔 회원국은 1993년 무려 184개국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184개국 중 민주국가라고 할 수 있는 회원국은 75개국 뿐이니, 유엔에 속한 다수의 국가가 독재국가인 셈이다. 

- 447쪽 


아무런 기능도 수행하지 못하는 유엔을 비난하는 책이라든가(부패했던 코피 아난에서 반기문 총장으로 바뀐 지금도 상황이 별반 나아진 듯 싶진 않지만), 세계 정치 구도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책을 소개할 때면 무능하기만 한 한국을 보며 한숨만 나온다. 


파키스탄 대도시에서는 중국 사업가들을 자주 볼 수 있다. 터키와 중국도 급속하게 가까워지고 있다. 에르도안 총리는 중국을 방문했고, 시진핑 중국 주석은 터키를 방문했다. 중국이 터키에 원전과 항국를 건설하기로 하는 등 두 나라의 경제 협력은 공고해지고 있다. 중국과 이란과의 관계도 깊어가고 있다. 중국은 이란이 수출하는 에너지의 최대 수입국이며, 이란은 중국에 에너지를 가장 많이 공급하는 나라이다. 

- 513쪽 



중국은 머지않은 미래에 미국을 능가할 것이고 러시아는 냉전 시대 만큼은 아니라더라도 서유럽과 미국을 긴장시킬 수 있는 파워를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은 강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중국이나 러시아에 지지 않으려고 할 것이며, 미국으로선 이런 일본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우방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미군은 국가 방위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에 유럽, 일본, 한국 등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을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460쪽 



미군 철수는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이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미국 합리적 보수주의자들의 목소리다. 즉 공화당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나오고 민주당에서도 나오는 이야기다. 밖에서 쓸데없이 돈 쓰지 말고 국내 재정 적자나 줄이고 나라 살림이나 잘해라는 것이 미국 내 지식인들의 바람이라고 할까. 자연스럽게 군비 축소가 이야기될 것이고 주한 미군 감축이나 철수는 미국이 먼저 통보할 것이다. 전시작전권 문제는 국가를 먼저 생각하는 보수주의자라면 당연히 가지고 와야 하는 것인데, 이를 반대하는 게 한국의 자칭 보수주의자들이다. 그 중의 예비역 장성 한 명은 군사 기밀을 미국 회사에 돈을 받고 팔아넘겼으니..., 황당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리고 미국이 강력하게 주한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걸까? 아마 주한미군 주둔비용 전체를 한국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할 지도 모른다. 우리가 믿는 바 보수정권이라고 했던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미 미국 내에선 세계 여기저기서 치른 전쟁에 대한 저항이 심각하고 세계 곳곳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철수는 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조지 W. 부시는 성급하고도 오만한 전쟁을 벌여서 미국의 국력을 손상시켰고, 오바마는 뒷수습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다음 대통령에게 정권을 물려줄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이 대외 관계에서 소극적으로 돌아선다면 이 세상 많은 곳이 보다 불안해지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이 세계를 책임지는 '자비로운 제국Benevolent Empire' 행세를 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하지만 너무나 분명한 것은 더 이상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 아니라는 점이다. 

- 519쪽 



그리고 이 책의 상당 부분은 이슬람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실은 미국이나 유럽에서 가장 민감한 문제가 바로 이슬람극단주의자들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소개하는 많은 책들은 이슬람극단주의 뿐만 아니라 이슬람이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미국의 정책 실패와 함께 미디어 전쟁에서 미국과 이스라엘, 유대인은 졌고 이슬람이 이겼다고 진단한다. 더 나아가 서유럽 내 이슬람 인구의 증가로 인해 가까운 미래에 유럽 전체가 이슬람 지역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또한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다양성, 다원주의, 종교적 자유와 관용을 미덕으로 지키는 진보주의자들의 탓이다. 왜냐면 미국과 유럽의 진보주의자들이 믿는 이러한 미덕이 무슬림에겐 미덕이 아니며, 도리어 미국과 유럽 내에 무슬림 인구가 늘어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또한 흥미롭게도 반유대주의가 서구 진보주의자들에게 넓게 퍼지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이 또한 이슬람 세계에 대한 관용을 핑계로 그들의 말을 그대로 믿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말한다. 이미 여러 차례 반복된 이슬람극단주의자들의 테러로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지만, 유럽 정치인들과 진보주의자들 때문에 무슬림 인구는 서유럽을 장악하고 있으며, 서유럽인들이 믿는 바 그 가치는 조만간 사라질 것이라고.


책이 두껍다 보니, 서평도 길어지는데(실은 짧게 쓸 수 있으나, 시간이 많이 걸리는 탓에 ㅡ_ㅡ;), 그냥 한 번 읽어볼 만하다는 수준에서 마무리할까 한다(아마 손에 들면 놓지 못할 것이다. 자칭 진보주의자들에게 강력 추천한다). 실은 보수주의자들의 책이 거의 번역되지 않았다는 점이 다소 놀랍고(반대로 서구 진보적 지식인들의 책은 곧잘 번역되는 것과는 반대로), 한국에서 제대로 된 보수주의가 자리잡지 못한 것이 어쩌면 현대 한국 사회의 비극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니 이상돈 교수를 야당에서 영입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 것이다(실은 야당이 서구적 의미에서의 보수주의 정당에 가깝지만,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은 중도 좌파 정당이라고 오해하고 있으니). 마지막으로 한 문단만 옮긴다. 


우즈는 하이에크가 '호황과 버블 폭발'을 반복하는 경제 사이클의 근본 원인은 중앙 은행에 있다고 설파한 것이 정확한 분석이라고 말한다. 1930년대 대공황 시절, 하이에크는 이자율을 낮춰서 경기 침체를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하이에크는 침체Recession, 또는 공황Depression은 잘못된 투자 때문에 생긴 부작용을 교정하는 과정이며, 이를 통해 경제가 제 모습을 바로 찾는 것인데, 이자율을 낮추면 종국적으로 닥쳐올 붕괴Collapse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 뿐이라고 오래 전에 지적했다. 

- 611쪽 



최악의 경제상황을 연출하고 있는 한국은 몇몇 글로벌 기업에 의지한지 꽤 되었다. 지난 정권부터 유독 심해졌는데,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너도나도 욕을 해댔던 노무현 정부가 그나마 살만했고 이명박 정권 이후는 엉망이 되었는데도 말이다. 더 큰 일은 지금 정부에서 경기 활성화 정책으로 내놓는 것들이 원조 보수주의자라고 평가되는 하이에크가 반대한 정책들이라는 점이다. 정녕 보수 정권인가 싶다. 진보 정권은 더더욱 아닌데 말이다. 


아마 다음 정권은 정말 잃어버린 10년을 되살리기 위해서 고군분투할 것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되살려놓으면, 그제서야 제대로 된 입과 펜을 가지게 된 언론들이 나서서 공격을 해대며 기자라는 자존심으로 펜을 들었다며 으쓱거릴 게다. 그리고 너도나도 비난을 하는 통에 국민들도 함께 욕을 해댈 것이고, 그들이 지금 어떻게 살았는가는 몇 년 후엔 다 잊어버릴 것이다. 이것이 한국 국민들의 잠재력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다음 정권도 계속 소위 말하는 보수 정권(미국의 관점에선 전혀 보수가 아닌)이 잡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 야당은 무조건 다음 대선 때에는 야당이 된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웃긴 짓이다. 그들은 지금 우리 국민들의 잠재력을 오판하고 있다. 화려하게 가짜 보수 정권이 부활하게 될 지도 모른다. 우리의 잠재력은 대단하다. 다들 지금 일동 침묵하고 있지 않은가. .... (아, 나는 정치 블로거가 아니야)


실은 한국은 정말 위험한 기로에 서 있는데, 한국의 자칭 보수주의자들과 자칭 진보주의자들은 정말 상황을 오판하고 있으며 한국의 미래를 진정 걱정하지 않는 듯 보이니, ... 거참, 내가 나라 걱정을 할 판인가. 이제 다시 40대 중반에 실업자 대열에 합류한 판국에. ㅡ_ㅡ;; 






공부하는 보수 - 8점
이상돈 지음/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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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엥에서의 주장 Positions(1964~1975)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지음), 김동수(옮김), 솔, 1991 








정치는 나를 열광시켰으며 나는 공산주의 투사가 되려고 노력했다. 철학 속에서 나의 흥미를 끌었던 것은 유물론과 그 비판적 기능, 즉 과학적인 지식의 편에 서며, 이데올로기적인 '지식'의 모든 신비화에 대항하는 기능, 그리고 신화들과 거짓말들의 단지 도덕적인 포고에 대항하여 그것에 대해 합리적이고 격렬하게 비판하는 기능이었다. - 44쪽 



* *


솔직히 말해, 이 글은 어색하다. 1991년 양장본으로 번역 초판이 나왔고 1996년 보급판 3쇄까지 나왔다. 보급판 3쇄, 내가 읽은 책이다. 내가 알기로 그 당시 보통 2,000부를 출판하였으니, 지금과 비교하여 많이 팔렸고 많이 읽혔다. 그러다가 순식간에 알튀세르가 사라졌다.


그 많던 독자들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내 앞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이야기하던 친구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을 강제하던 선후배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아직도 그 강제의 폭력성을 떠올릴 때면 그들이 저항하던 폭력적 사회와 그들의, 갓 들어온 신입생들과 소위 운동권에 대해 관심이 없던 동료 학생들을 향한 폭력성은 닮아있음을, 그리고 결국 그들이 이 사회를 이렇게 엉망으로 만든 공범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맑스의 전(全)이론, 다시 말해 맑스에 의해 확립된 과학(역사적 유물론)과 맑스에 의해 열린 철학(변증법적 유물론)은 계급 투쟁을 그 중심과 핵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계급 투쟁은 맑스-레닌주의적 노동운동의 정치적 실천에서뿐만 아니라, 이론에 있어서, 그리고 맑스주의적 과학과 철학에 있어 '결정적인 고리'다. - 69쪽 



이십여 년 전에도 읽었을 위 문장을 다시 읽으니, 참 멀리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계급 투쟁은 계급 의식부터 생겨야 하는데, 솔직히 계급 의식을 만들기조차 버거운 상황이 되었다. 아니 부르조아 - 프롤레타리아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구분은 이미 호소력을 잃은지 오래다. 그래서 알튀세르는 용감하게 프로이트와 라깡을 마르크스 안으로 끌어들였는지도 모르겠구나. 



왜 철학은 단어들을 두고 서로 싸우는가? 계급투쟁의 현실은, 단어들에 의해 '표현되는' '사고들'에 의해 '표현된다.' 과학적, 철학적 추론 속에서 단어들(개념,범주들)은 인식의 '도구'들이다. 그러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철학적 투쟁 속에서 단어들은 또한 무기이고 폭탄이며 진통제이고 독약이다. 모든 계급투쟁은 때때로 한 단어의 편에 서서 다른 단어에 대항하는 투쟁 속에서 요약될 수 있다. - 54쪽 



알튀세르의 이런 면 - 이론적 실천 - 으로 인해, 그의 제자였던 랑시에르(Jacques Ranciere)는 단호하게 알튀세르의 이론을 거부한다(알튀세르의 제자들로는 에티엔 발리바르, 피에르 마슈레이, 자끄 랑시에르 등이 있다).



자크 랑시에르는 오늘 다루는 세 명의 철학자들 중 알튀세르에 대해 가장 비판적이며, 그 스스로 고백하듯이 알튀세르의 입장에 대한 거부에서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전개해나갔다. 랑시에르에게 있어 알튀세르 입장의 문제점은 정치적 행위자들이 실천하는 것은 결국 "그들 자신은 사유하거나 사유할 수 없"는 진리라는 측면에서 그것은 '엘리트주의'라는 것이었다. 정치적 행위자들로서 대중들의 능력을 불신하고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입장은 '사유하는 지식인 집단'과 '사유하지 못하고 생산하는 대중 집단'의 선 긋기라는 것이다. 부르주아적인 것과 프롤레타리아적인 것의 구분, 말할 자격이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격리, 교육 받는 자와 가르치는 자의 분리에 대한 저항에서 랑시에르는 '출발'한 것이다. 

- 박기순, <'정치'의 가능성에 대해 새롭고 다르게 사유하다> 중에서 

출처: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09261 



하지만 이 작은 책, 짧은 논문들의 모음집인 이 책이 읽혀야 한다면, 그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라는 논문 때문이다. 아마 철학 전공자보다 영화나 미디어 전공자들이 더 많이 읽었을 이 논문은 앞으로도 계속 읽힐, 꽤 시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알튀세르는 이 짧은 논문을 통해, '생산 관계들, 즉 자본주의적 착취관계들의 재생산'을 위해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이 기여한다고 주장한다.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 국가가 허용하는 폭력에 의해 기능하는 억압적 국가 장치 - 군대, 경찰 등 - 과 달리 '이데올로기에 의해' 기능하며, 종교(다양한 교회들의 체계), 교육(공적, 사적인 다양한 '학교들'의 체계), 가족, 법률, 정치(다양한 정당들을 포함하는 정치적 체계), 조합, 커뮤니케이션(잡지, 라디오, TV 등), 문화(문학, 예술, 스포츠 등)에 걸쳐 있다고 말한다(실은 그냥 이 사회 전체라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결국 기존 체제는 억압적 국가 장치로 관리되면서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로 끊임없이 재생산되어 유지된다. 여기에는 '개인들을 주체로서 호명하는 과정'이 포함되는데, 이는 '완전히 혼자서 활동'하도록 하면서 '종속에 의해서, 종속을 위해서만' 존재하도록 만들기 위함이다. 거칠게 설명하자면, 각각의 개인들이 자유로운 주체임을 알게 되는 것은 개인들의 자발적인 각성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호명에 의해서이고 이 호명은 보다 거대한 주체(신이거나 국가이거나)에 의해서다. 즉 누군가를 불러줌으로써 개인을 자유로운 주체로 올리고 그 주체에게 지배 이데올로기를 심는다.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의 확산을 통해 기존 생산관계는 확대, 재생산된다. 어쩌면 이러한 확대, 재생산 구조에 저항하고 해체하는 것을 알튀세르는 이론적 실천으로 여겼는지도. 





그 외의 논문들, <프로이트와 라깡>, <혁명의 무기로서의 철학>, <자본론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맑스주의와 계급투쟁>, <아미엥에서의 주장> 등도 읽을 만하다. 하지만 이런 책에 관심 있는 독자가 얼마나 될까 싶고, 이 책은 이제 시중에서 구하기도 어려우니, 다시 번역되어 나오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을 듯 싶다.


그리고 이 책이 얼마나 호소력이 있을 지도 의문스럽다. 동시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현대적 해석이나 접근이 아니라, 그냥 정치 일반에 대한 지극히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이해를 돕는 책이면 충분해 보인다. 그 정도로 나라가 엉망이 되었으니까. 그냥 보수주의자가 보기에도 지금은 이상한 시대다. 보수라는 단어까지 부끄러운 시대가 되었으니, 마르크스주의는 그냥 신기루다. 


문제는 '보수'라는 단어인데, 이제는 그 단어가 조금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 생각할 때, 이명박 정권은 보수를 표방하고 들어선 첫 정권이었지만 독단적인 국정 운영과 부패, 비리 의혹으로 얼룩져 실패한 정권이었다. 박근혜 정권은 그런 오점을 청산하고 태어난 합리적인 보수정부이기를 기대했건만, 지금까지의 결과로 봐서는 더 이상 기대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한 정권은 부패했고, 또 다른 보수정권은 무능이라는 평가를 받을 것이라 생각하니 허무하다. 

- 이상돈, <<공부하는 보수>>, 책세상, 12쪽 



거참, 이런 시대에 알튀세르라니! 나는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아래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의 영문 번역이다. 관심있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 연구를 위한 노트 (영문 번역)



* 알튀세르에 대한 비판은 랑시에르를 통해서도 가능하지만, E.P.톰슨은 아예 책까지 냈다.<<이론의 빈곤>>(책세상, 2013). 알튀세르에 대해 조금 웹 서핑을 해보다가 찾았다. 직장인이다 보니, 이런 책이 나오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건 그렇고, 요즘 주머니 사정도 좋지 않은데, ... ㅡ_ㅡ;; 




아미엥에서의 주장 - 10점
루이 알튀세르 지음/솔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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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거친 호소력으로 정치적, 역사적 메시지를 던지는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 


그는 1955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 아파르타이트(Apartheid)에 반대한 백인 변호사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백인 사회에도 섞이지 못하고, 흑인 사회에서도 섞이지 못하는 경계에서 시작한 셈이다. 


그는 경계의 자유(혹은 고독, 혼란) 속에서 눈 앞에 보이는 현실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짓누르는 근대 유럽의 세계관에 대해 본격적인 저항을 한다. 


"자신을 하나의 완성되고 균일한 한 구성체, 자아로 인정하는 서양적 논리는 만들어진 환상임을 표현하고 싶었다." - 윌리엄 켄트리지

(출처: http://www.gaeksuk.com/atl/view.asp?a_id=563)


작년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소개된 윌리엄 캔트리지의 <Felix in Exile>이라는 애니메이션이다.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 <추방된 펠릭스Felix in Exile>



일반적인 애니메이션과 다르게 거칠고 어색하며 둔탁한 느낌을 주는 켄트리지의 애니메이션. 이 낯선 느낌은 제작 방식의 특수함에서 기인한다. 그는 수십 장의 소묘만을 가지고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여 애니메이션을 완성한다. 즉 지울 수 없는 어떤 흔적에 집중하고 이를 역사적 차원으로 끌어올려 질문을 던진다. 이런 그의 거친 스타일을 두고 어떤 이들은 케테 콜비츠와 비교하기도 한다. 


"침식과 무성함, 그리고 붕귀 등의 자연 현상으로 인해서 자연풍경이 변형되고,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 변형된 모습들은 점점 사라져 버린다. 이러한 과정은 지난 날의 일을 잊어버리는 망각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날에 일어난 일의 의미를 되새기고 잊혀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기록, 교육, 미술관, 노래, 그 외의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야만 한다." 

- 윌리엄 켄트리지 (출처: blog.daum.net/iw_sunny/3721689



실은 내가 윌리엄 켄트리지에 대해 이렇게 포스팅을 하게 된 이유는 아래 작품 때문이다. 얼마 전 읽은 미술 잡지에 실린 이 작품 <시간의 거부The Refusal of Time>에 대한 리뷰만으로는 이 작품이 어떤 것인지 감이 오지 않았고, 이 작품을 찾아보았는데, 아!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 시간의 거부(The Refusal of Time) 



2012년 카셀도큐멘타에서 전시되었던 이 작품은 실제 전시장의 느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이 영상만으로도 켄트리지 작품이 가지고 있는 압도적인 기운이 전해오는 듯했다. (2012년 카셀도큐멘타 당시 최고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지금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으며, 올해 초에는 일본 쿄토에서 전시되었다. 아, 한국에는 전시될 수 있을까.)


각자의 하늘에 있는 태양이 머리 꼭대기에 위치할 때가 바로 우리가 정오라고 부르는 시간이다. 우리는 하늘의 별들로부터 시간 관념을 빌려 왔으며, 그것을 개개인의 신체 속에 있는 기관의 리듬에 맞추어 인지했다. 심장과 폐와 맥박은 인간을 일종의 숨 쉬는 시계(몸-시간)로 만든다. 

- 윌리엄 켄트리지, <시간의 거부> 도록 중에서. 

(이정연, '시간의 블랙홀 - 윌리엄 켄트리지' 중에서 재인용, 아트인컬쳐 2014년 7월호) 



거창하게 시작된 글이 아닌지라, 간단한 노트 수준에서 끝낼 예정이지만, 윌리엄 켄트리지에 대한 관심을 앞으로도 지속될 것같다. 거의 모든 장르 - 페인팅, 드로잉, 오페라 무대, 조각, 설치, 애니메이션까지 그의 작업 범위 속에 넣은 윌리엄 켄트리지는 현대 예술이란 장르를 뛰어넘어 모든 장르를 한 곳에 몰아놓은 일종의 용광로 같은 것임을,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시각으로, 어떤 메시지를, 어떤 형식으로 담아낼 것인가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William Kentridge - Shadow Procession

Shanghai Biennale 2000



* 윌리엄 켄트리지 : http://en.wikipedia.org/wiki/William_Kentridge 



2010년 MoMA에서 윌리엄 켄트리지 전시가 열렸는데, 이에 대한 안내 동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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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도에 번역 출판된 윌리엄 S. 버로우즈의 소설론을 구했다. 소설을 쓰지 못하니, 소설론만 읽는다. 세상은 바라지 않는 소설 같이 흘러가기만 하고, 평범한 우리들의 하늘이라고 스스로 믿는 그들과 그들의 나팔수들은 한 줌 희망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우리들에게, 그래서 니네들은 미개하고 어리석다며, 그래도 세상은 변하지 않을꺼야라는 패배주의를 은연 중에 심어놓으며, 진실은 조작되었고 할 수 있는 바 최선을 다했다며 강변하고 있다. 


생각해보니, 거리 데모를 나간 적이 그다지 많지 않은데, 이번에는 나갈 생각이다. 세상은 바꾸는 건 깨어있는 시민이지, 그들이 아니다. 우리들에게 상처 입히고 우리들을 왜소하게 만들며 우리들에게 패배감을 안겨주며, 변하지 않는 세상의 질서를 강요하는 그들 앞에서 세상은 변하고 변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정치적이나, 정치적 발언이나 행동을 거의 하지 않은 나로 하여금 어떤 실천적 행위를 하게 만들 정도 이 나라는 완전히 엉망이 되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했던 그들 - 입으로는 시민을 위한다는 - 에게 기대조차 하지 않겠다. 어차피 그들이 아닌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이고 우리들이 만들어가야 하는 세상이니, 우리들이 나서야 하는 거다. 


   

토요일 오전, 사무실 노트북을 가지고 와, 일을 하며 오랜 만에 블로그에 글을 남긴다. 요요마의 첼로는 언제나 마음의 작은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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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가 사라진 세계 Every Nation For Itself

이언 브레머(지음), 박세연(옮김), 다산북스 




Ian Bremmer



바로 이것이 G제로의 도전 과제다. 충돌을 사전에 예방하고, 세계 경제를 발전시키고, 지구의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장기적인 협약과 투자 정책을 실행에 옮기고,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공공 건강에 대한 위협에 대처하고, 다양한 위기들을 슬기롭게 넘겨야 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기꺼이 총대를 메고 타협안을 강제할 능력과 의지를 지닌 리더가 필요하다. 분명한 사실은, 오늘날 많은 국가들이 국제적인 공동체들의 움직임을 ‘막을’ 수 있는 힘은 충분히 확보하고 있지만, 그 누구도 현재의 상황을 ‘개선’해나갈 정치적, 경제적 힘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운전대를 잡으려 하지 않는다. 

- 30쪽



굳이 구분하자면 ‘국제 정치’에 대한 책이랄까. 우리에게 ‘국제 정치’라고 하면, 우리 일상과는 참 멀리 떨어진 이야기라 여기기 쉽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갈수록 전 세계가 처해 있는 상황이 만만치 않고 이를 해결하기는 더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또한 국제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일이 한국이라는 나라에겐 매우 중요하며, 우리 일상과도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음을 알게 된다. 


G제로 세계. 이언 브레머와 루니엘 루비니가 <포린 어페어>에서 처음 언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럽은 유로존을 지켜내기에 급급하다. 일본은 국내의 정치경제적으로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힘겹다. 국제적으로 힘든 문제들을 해결할 시간, 자원, 정치적 역량을 가진 국가들이 없다. 반면 브라질, 중국, 인도와 같은 신흥강국의 직접적인 개입 없이는 국가들간 경쟁에 대한 신뢰할 만한 해답도 없다. 이 신흥강국들은 자국의 발전에 관심이 많지만, 국외의 문제에는 무관심하다.”


“우리는 현재 'G-제로 세계'에 살고 있는데, 국제문제를 풀어갈 정치경제적 능력이나 의지가 있는 단 하나의 국가 혹은 단일 경제블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국제 거시경제적 협력이나, 금융 규제 개혁, 무역 정책, 기후 변화와 같이 무척이나 중요한 국제적 사안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국가간 갈등은 심화될 수밖에 없다. 세계 경제를 해결할 새로운 해법은 요원하기에, 이러한 상황에서 기업들은 현금을 비축하면서 현재의 정치경제적 불확실성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기업들 중 상당수가 이러한 기다림이 길어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 출처: 위키피디아 재인용 / 원출처: Roubini, Nouriel, and Bremmer, Ian. "A G-Zero World", Foreign Affairs, March/April 2011



G 제로 세계의 대안으로 G2 세계(미국과 중국)가 이야기 -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 하버드대 교수)은 차이메리카(Chimerica)라는 단어까지 사용하지만 - 되고 있지만, 이언 브레머는 미국이 글로벌을 리드하기엔 많은 문제들을 극복해야 하고 중국은 그들 스스로 아직 역량 부족이라고 이야기한다며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말한다. 



“중국은 아직 사회주의 초기 단계에 있으며, 여전히 개발도상국입니다. 이것이 중국의 실제 상황이고, 솔직한 모습입니다.”

- 원자바오 (2010년 9월 UN총회 연설)


2010년, 중국은 일본을 제치고 세계 두 번째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1인당 국민소득을 기준으로 보면, (...) 7519달러로 전 세계 94위이며, 리투아니아의 절반이자 포르투칼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 49쪽



그리고 그는 <세계 경제 질서를 변화시킬 5가지 시나리오>라는 챕터에서 ‘G2: 미국과 중국의 공조체제’, ‘조화: G20이 제대로 굴러가는 세상’, ‘냉전2.0: 혹은 그보다 더 무시무시한’, ‘분열: 지역별로 나누어진 세계’, ‘시나리오X: G서브제로 등의 5가지 시나리오’ 중에서 ‘냉전2.0’이 ‘G2: 미국과 중국의 공조체제’보다 더 현실적인 시나리오라고 이야기하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가 그의 동료 누리엘 루비니Nouriel Roubini - 닥터 둠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시장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유명한 뉴욕대 교수 - 보다 낙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측면에서 이 책도 일종의 묵시록처럼 읽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책은 리더가 사라진 ‘G제로’ 시대를 따라가면서 국가 간, 대륙 간에 놓인 여러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고 있는가를 설명하고 그것의 어려움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래서 식량, 기후, 지역 분쟁, 미국/중국/유럽/일본/러시아/인도 등 주요 나라의 정세와 서로의 이해관계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으며, 각 나라마다 그들이 생존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과 모색을 수행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이 책은 국제 정세에 대해 이해가 없었던 독자에겐 매우 유용한 입문서이자, 탁월한 식견을 제시해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국제 정치에 대한 책이라고 해서 읽기 어려운 학술 서적도 아니고 그렇다고 읽기 쉬운 수필도 아니라는 점에서, 저자는 적절한 수준에서 독자들에게 깊은 이해와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책은 에세이와 같아야 한다. 에세이는 논평과 같아야 한다. 논평은 블로그 포스팅과 같아야 한다. 블로그 포스팅은 트윗과 같아야 한다. 그리고 트윗은 여태껏 한 번도 트윗되지 않은 새로운 글이어야 한다.

- 331쪽




리더가 사라진 세계

이언 브레머저 | 박세연역 | 다산북스 | 2014.02.25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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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zarodream.tistory.com/212



소득세와 부가가치세는 각각 9%와 7.4%가 오른 반면, 법인세는 0.1%가 올랐다. 소득세는 개인이 얻는 이득에 매기는 세금이고 부가가치세는 시장에서 팔리는 모든 재화에 다 붙는 세금이다. 부가가치세가 늘어나면 물가가 뛰고 소득세야 늘어나봤자 개인에게 좋을리 하나 없다. 


그리고 법인세는, 나도 작은 회사의 경영에 조금은 관여하는 터라고 하지만, 이건 좀 ... 하긴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의 세금은 얼마 되지도 않을 것이다. 큰 기업들과 비교해본다면. 



출처: http://zarodream.tistory.com/212 



뉴스타파에 나온 이 이미지들과 함께 아래 이미지를 겹쳐 읽으면 ... 




출처: http://eroun.net/22305 




...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알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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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성전자나 현대차가 망하면 나라가 망하는 줄 알죠.
    대기업들 법인세나 규제 높이자고 하면 빨갱이 소리를 듣고...

    • 그러게 말이죠. ㅡ_ㅡ;;; 이러는 와중에 도리어 몇몇 기업들에 대한 의존도가 더 심해지고 있는 듯하여 더 걱정입니다.

  • 나그네 2014.08.09 13:58 신고

    좋은 내용 잘봤습니다.
    이 글만 비공개적으로 담아갑니다

    • 저도 다시 읽게 되네요. 시간이 흐르면 나아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요즘이 너무 화가 나고 제 스스로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거의 모든 것의 경제학

김동조(지음), 북돋움 



경제학 책을 읽었지만, 경제학의 생리에 대해 파악하진 못한 듯 싶다. 이 점에서 이 책은 매우 유용하다. 저자는 금융 회사에서 종사하는 트레이더이지만, 그가 쓴 글은 경제학의 관점에서 시사적이며 흥미롭기만 하다. 



경제학은 '사물의 응당 그래야만 하는 면'보다는 '현상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느냐'에 더 주목한다.

- 8쪽 


확실히 기준이 있다는 건 다양한 현상과 사건 앞에서 동일한 논조로 설명 가능하다. 이 책은 그런 관점에서 일관되게 서술되어 있다. 



여전히 공부(인적 자본에 대한 투자)를 통해 사회적 지위를 끌어올리는 것은 가능하며, 공부는 다른 방법이 지닌 불확실성에 비해서 무척이나 분명하고 불확실성이 적은 성공 방법이다. 

- 161쪽 



특히 평등과 분배, 일자리, 결혼, 자녀 교육, 성공 등 우리가 민감해하는 여러 소재와 주제들에 대해 짧지만 예리한 관찰력과 분석으로 비판적인 논조를 잃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의 편견과는 달리 배우자를 선택할 자유가 주어지는 근대사회에서 일부다처제는 대부분의 남자에게 불리하고 대부분의 여자에게 유리한 제도다. 반대로, 일처다부제는 남성 배우자의 수요를 증가시켜 대부분의 남자에게 유리한 제도다. 

- 74쪽 



그래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그러려니하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분석하여 그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이야기한다. 책은 민감한 정치적 소재에 대해서는 정치적 편향성 대신 경제학적 분석, 혹은 경제학자의 인용으로 채운다. 설득력 있는 문장들은 독자를 더욱 흥미진진하게 만든다. 



이러한 도금시대를 종식시킨 것은 1930년대의 대공황이었다. 대공황 이전부터 좀 더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결정적 전환점은 대공황이었다. 

(...) 평등화는 시장의 힘에 의한 점진적 반응이 아니라 정치적 힘의 균형이 급작스럽게 변화한 데서 기인한 것. 

- 36쪽 ~ 37쪽 



일독을 권한다. 국내 저자가 쓴 흥미로운 경제 실용서라고 할까. 


* * 



아래의 인용은 늦은 나이에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 기억해둘만한 내용이라 옮겨둔다.  



레빗에 의하면 대체로 여덟가지 요인이 성적과 높은 양의 상관 관계를 보였다. 부모의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부모의 사회 경제적 지위가 높을수록, 엄마가 첫 아이를 출산한 나이가 30살 이상일수록, 아이의 부모가 영어를 쓸수록(미국의 경우), 부모가 PTA(학부모회) 활동을 할수록, 집에 책이 많을수록 성적이 좋았다. 다음 두 가지 요인은 높은 음의 상관 관계를 보였다. 아이의 출생 당시 몸무게가 덜 나갈수록, 입양된 아이일수록 성적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몇 가지 요소는 의미 있는 상관 관계를 보이지 않았다. 가족 구성원이 온전한 것, 최근에 주변 환경이 좋은 곳으로 이사한 것, 엄마가 유치원에 다니기 전까지 아이를 직접 기른 것, 부모가 아이를 박물관에 자주 데려간 것, 아이를 정기적으로 체벌한 것, 부모가 거의 날마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준 것, 아이가 TV를 많이 보는 것은 성적과 강한 상관 관계를 보이지 않았다.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알아차렸겠지만, 아이의 성적에 영향을 주는 요인은 대부분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를 묘사하고 있고, 영향을 주지 않는 요인은 부모가 아이에게 해주는 일을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부모로서 '무엇을 하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다시 강조하지만,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점이다. 

- 스티븐 레빗, <<괴짜 경제학>>


레빗의 말이 잔인하게 들리는 이유는 아이를 생각해 부모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는 데 있다. 

- 166쪽에서 167쪽 





거의 모든 것의 경제학

김동조저 | 북돋움 | 2012.10.02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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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맞네요, 레빗의 말이 잔인하게 들리는 건 이미 아이를 낳고 나서는 바꿀 수 있는 게 거의 없다는 의미라서겠죠. 미국의 통계지만 우리나라도 별반 다를 것 같지는 않고, 곧 부모가 되어야 할 입장에서 참 정신이 번뜩 드는 부분이네요.

    수요와 공급의 기준으로 결혼을 보는 것도 재밌네요. 그런 관점에서는 오히려 일처다부제일수록 선택 과정에서는 남자가 더 우위에 설 수 있다는 게ㅎㅎ

    • 경제학의 관점에서 설득력있게 풀어내는 저자의 솜씨가 흥미롭습니다. 김동조씨의 블로그는 http://seoul.blogspot.kr/ 입니다. ㅎㅎ 댓글 감사합니다. 이 책 읽고 난 다음, 저도 자녀 교육 책을 사서 읽어볼까 해요. 쉽지 않은 문제예요. 교육. ㅡ_ㅡ;;



카(E.H.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전통적인 관점에서 지극히 보수적인 역사관을 가지고 서술된 책이다. 보수주의적 역사책이라고 할까. 이 반대에 서있는 학자가 마르크 블로크(Marc Bloch)다. 카가 보이지 않은 어떤 거대한 흐름을 믿었다면, 마르크 블로크는 '실제 사람들의 흔적과 작은 역사(사건)들'에 주목했다.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불온서적으로 했다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학생들로 하여금 역사를 공부하지 말라고 한 것이나 동일하다. 그것이 보수주의적이든, 자유주의적이든, 사회주의적이든. 그리고 우리는 지금 역사 공부를 하지 말라는 나라에 살고 있다. 교학사 교과서 사태도 이와 동일한 선상에 놓여져 있다. 우리는 그릇된 생각을 가진 몇 명이 나라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을 참으로 태평하게 바라보는 다수의 언론 종사자들과 익명의 대중들 속에서 힘겨워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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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시간 Tiempo de Silencio 

루이스 마르틴 산토스Luis Martine-Santos(지음), 박채연(옮김), 책세상 



스페인 원서. 주인공 페드로는 실험쥐를 통해 암을 연구한다. 실은 페드로가 현실 세계 속의 실험쥐였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먼저 이 책을 번역한 박채연 교수(서울디지털대학교)의 노고에 대해 감사를 보낸다. 그녀의 번역이 정확한지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이 소설을 번역하겠다는 생각, 그리고 번역을 했고 출판까지 이룬 것에 대해 독자로서 찬사를 보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현대 스페인 소설의 기원’이라는 찬사를 받는 소설이지만, 실은 한국 독자에게 동시대 스페인 소설가는 낯설기만 하다. 소설은 현대적 서술 기법들이 망라되었으며, 게으른 독자를 쉽게 무시하고(그런 독자라면 이 소설을 읽지도 않겠지만), 종종 문장 하나는 너무 길어져 독자의 집중을 요하기까지 하니(아니 번역된 소설이 이래서야!), 이런 소설을 읽는 독자는 드물 것이다.


하지만 바라건대, 이 소설은 반드시 읽혀야 한다. 산토스의 ‘침묵의 시간’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시사점을 가진다. 


첫째는 소설 기법의 측면에서 현대 소설이 가져야 하는 여러 가지 미덕을 한 눈에 보여준다고 할까. 산토스 스스로도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는 하지만, 실은 ‘의식의 흐름’ 뿐만 아니다. 서술의 강약이 적절하게 조절되어 있어, 어느 경우에는 장황하다 싶을 정도의 서술과 묘사가 이어지는가 하면, 어느 문장들은 짧게 끊어지며 소설 속 인물의 심리를 드러낸다. 자주 화자가 바뀌지만, 어색하지 않고 독자는 인물들의 심리를 자신의 마음처럼 읽고 지나가며 사건이 아닌 실재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듯한 기분을 들게 한다. 


두 번째 시사점은 서사적 측면에서의 시사점이다. 루이스 마르틴 산토스는 여러 번의 투옥 경험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현실 참여적인 작가였고, 이 소설 또한 대놓고 박제화된 지식인-주인공 페드로-에 대한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며, 그의 현실적 무능함을 극대화시킨다. 결국 아무런 것도 성취하지 못하는 주인공을 통해 현대 스페인이 처한 현실을 보여주며 지식인 사회의 변화를 역설한다고 할까. 페드로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으나, 그는 너무 현실 세계를 쉽게 보았고,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였으나, 그 행동이 잘못 되었을 경우를 고려하지 않는 유아적인 태도, 그리고 심지어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가려고만 하는 그의 행위들은, 눈 앞에서 벌어지는 비합리적이고 폭력적인 현실을 모른 체 하고 그것에 대해 그 어떤 개입이나 참여를 하지 않고 용기 없고 무책임한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렇게 볼 때, 이 소설은 형식적 측면에서도 전위적이며, 서사적 측면에서도 전위적인 셈이다. 



1986년 스페인에서 영화로도 제작되기도 했다.




그러나 소설은 참 슬프다. 페드로는 암 연구를 하는 젊은 의학 연구자일 뿐이다. 그가 우연히 휘말린 어떤 사건은 그의 인생을 정반대로 이끈다. 그의 의지와는 무관한 외부 세계는 그와 적대적이었으나, 심지어 그는 그가 외부 세계와 적대적인 관계에 놓여있다는 사실마저도 모른다. 너무 선량해서 어리석고 무능하며 심지어 자신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여자까지도 잃어버린다. 그래서 문장은 종종 감상적으로 변하기도 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추악한 현실에 대한 냉정한 인식과 그것에 대한 적절한 행동을 취하지 못하는 인물에 대한 동정과 비아냥거림이 숨겨져 있다. 어쩌면 산토스 스스로는 자신이 버리고 싶은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켰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번 겨울, 진짜 소설에 도전해보고 싶다면, 이 소설을 추천한다. 적어도 현대 소설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 순 있을 테니까 말이다. 






침묵의시간

루이스마르틴산토스저 | 박채연역 | 책세상 | 2005.12.15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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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도 어수선하고 내 일상도 어수선하다. 예전같으면, 독서나 음악 듣기 - 아니면 새벽까지 이어지는 술자리 - 로 마음을 추스렸을 텐데, 요즘은 그것마저도 어렵다. 이 나라 마저도 어수선하니, '어수선'은 2010년대 전반기의 테마일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서울대 송호근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현재 한국 사회가 처한 현실이 1900년대 대한제국이 패망하기 직전의 상황과 거의 동형 구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의 내외적 상황과 지금의 내외적 상황이 100여 년의 차이는 있지만 본질에서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거죠."  (관련 기사)


아마 후대의 역사가들은 1900년대와 2000년대 초반을 '정치적 혼란기'로 정의내릴 것이다. 그런데 실은 우리는 해답을 알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러나 그것을 해야 할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그 해답을 모르는 모양이다. 그러니 나라가 이 모양이겠지. 


그리고 이 일은 이 작은 반도에서는 드물지 않게 일어났던 일이었다. 이 나라의 지도자들은 지나간 과거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가진다. 


오늘 아침 다산연구소 칼럼 레터는 참 읽을만 했다.

(예전에는 꼬박꼬박 다산연구소 칼럼을 읽었는지, 읽지 못한 지 꽤 되는 듯하여 마음이 아팠다. 왜 이렇게 바쁘게 살아야 하는 건지, 정성을 다해 바쁘게 살면서도 늘 힘든 건지.)



 


[이야기] 오랑캐를 따르는 자



강명관 교수 (부산대) 




담헌의 중국인 친구


  1766년 담헌 홍대용은 북경에서 엄성·반정균·육비 세 사람의 중국 지식인과 사귄다. 2월 한 달 동안 6차례의 만남을 통해 네 사람은 국경을 초월한 우정을 쌓았다. 서로 형과 동생이 되기로 결정했으니 한 때의 객기가 아니었다. 그 만남이 조선사회에 끼친 영향력도 적지 않았다. 담헌이 연 길을 따라 이후 유금, 박제가, 이덕무, 박지원 등 이른바 연암그룹이 이내 북경 땅을 밟았다. 그중 박제가는 4회에 걸쳐 중국 땅을 밟은 최고의 중국통이 되었다. 박제가가 구축한 인맥 위에서 추사 김정희가 청의 석학 완원?옹방강을 만났으니, 1766년 담헌과 엄성 등의 우정은 조선 후기 문화사에서 그 의미가 실로 크다 하겠다. 하지만 파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담헌은 중국인들이 자신을 알아주는 것이 너무나 기뻤고, 귀국 후 그들과 나눈 필담이며 편지를 정리해 주변의 친지들에게 보여주었다. 대부분 부러워해 마지않았다. 하지만 담헌의 우정을 고깝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외국인끼리 우정을 나눈 것은 고전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라면서 비난하기도 하였다. 이런저런 부러움과 비난이 퍼져 나가다가 마침내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담헌이 북경으로 떠날 때 잘 다녀오라고 글까지 지어주었던 김종후가 작심하고 담헌을 비난했던 것이다.


비난을 받다


  담헌에게 그 말을 전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 결국, 담헌과 김종후 사이에 편지가 오갔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김종후는 엄성 등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비난했다. 한인(漢人)으로서 명(明)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더러운 오랑캐 청의 조정에 벼슬을 하려고 하는 인물과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 사람들은 오랑캐와 진배없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과 사귄 담헌 역시 비판받아 마땅하다. 결코 자랑할 일이 아니다. 김종후의 말을 압축하면 담헌 역시 ‘오랑캐를 따르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담헌은 명이 망한 지 벌써 오래이므로 모든 한인에게 벼슬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며, 또 그들과 대화를 나누어 본 결과 그들 역시 명을 깊이 생각하고 있으며, 청의 지배를 무조건 긍정하고 있지는 않았다고 되받았다. 논쟁은 승자 없이 대충 마무리되었다.


  김종후는 왜 담헌을 비난했을까? 그는 논쟁의 말미에서 담헌이 강희제의 정치를 높이 평가한 것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고 말한다. 이것이 김종후의 속내였다. 강희·옹정·건륭에 이르는 1세기 반 동안 청 제국, 곧 중국은 절정기를 누리고 있었다. 제국의 안정과 번영은 객관적인 사실이었다. 하지만 춘추대의(春秋大義)와 대명의리(對明義理)를 굳게 믿는 조선의 양반 나으리들은 그것을 대놓고 말할 수 없었다. 담헌은 그 금기를 범했던 것이다. 웃기는 것은, 춘추대의, 대명의리를 주장한 사람들이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좋은 벼슬은 다했고, 북경 구경도 도맡아 했으며, 북경에서 수입되는 사치품을 즐겨 사용했다는 것이다. 김종후만 해도 자기 동생 김종수가 우의정을 지낸 청풍 김씨 벌족(閥族)이 아니던가.


오랑캐를 따르는 자


  말이 났으니 말이지 춘추대의니, 대명의리니 하는 거창한 명분이 현실에서 구체화된 적이 없었다. 청에 대들거나 병력을 기르고 무기를 만들고 군량을 비축하는 일은 할 수 없었고, 하지도 않았다. 청을 오랑캐니 뭐니 하면서 업신여기고 증오했지만, 명을 위해 복수는 꿈도 꾸지 않았던 것이다. 춘추대의, 대명의리는 마음에 안 드는 반대파를 때려잡는 구실일 뿐이었다. 특히 세상이 불평등하고 모순이 많다면서 바꾸자고 하는 사람을 위협하거나 제거하는 데는 그저 그만이었다. 선진화된 중국을 배워 상공업을 발달시키자고 제안했던 박제가를 당벽(唐癖), 곧 ‘중국에 미친 인간’이라고 비난하고, 청의 연호를 썼다 하여 연암의 『열하일기』를 ‘호로지고(胡虜之藁)’ 곧 오랑캐의 글이라고 비판했던 것도 다 거기서 나온 작태였던 것이다. 다산을 귀양 보낸 것도 이들이었다.


  요즘도 그렇다. 정부에서 하는 일, 여당에서 하는 일을 비판하면, 무조건 이상한 어휘를 갖다 붙인다. 번역하자면, ‘오랑캐를 따르는 자’란 비난이다. 우습다. 18세기의 일을 21세기에 다시 보다니!



다산연구소 칼럼 레터는 제법 좋다. 받아 읽기 시작한 지 몇 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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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서가에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을 보았다. 여기서 '보았다'는 그 책의 존재를 확인했다는 의미이지, 그 책을 다시 읽었다는 건 아니다. 반가웠다. 대학 시절 한 번 읽었고, 직장을 다니면서 또 한 번 읽었다. 이번 가을 다시 읽고 싶은 책이다. 루쉰(노신)의 마음도 요즘 내 마음 같았을까. 대학시절 '아큐정전'을 읽었으면, 그 짧은 소설이 가진 거대한 힘 앞에서 나는 절대 이런 소설은 쓰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동시에 우리 시대는 루쉰의 시대가 아니므로, 그런 소설을 쓸 생각도 하지 않겠다고 여겼다. 


하지만 세상은 돌고 도는 법. 우리 시대가 다시 이렇게 어두워지리라 누가 생각했을까. 잘못된 것일지라도 과거는 흐릿해지며 아름다워지기 마련이고, 그 과거 화려했던 이들은 다시 한 번 누군가에겐 끔찍했고 비합리적이었으며 심지어 절망적으로 죽음을 불렀던 그 때 그 시절을 다시 불러들이고 있다. 그리고 말없고 무관심하고 심지어 자신의 일로 닥칠 어떤 일에 대해서도 지금 당장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며 손사레를 치는 대중은 오직 돈벌이에만 혈안이 된 요즘, 루쉰(노신)은 다시 읽을 만한 작가가 되는 셈이다. 





*** 

2005년 1월 15일 메모한 글. 



노신의 여러 글들을 모아 옮긴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이욱연 편역, 도서출판 창)를 읽었다. 노신의 글들을 벗 삼아 세상을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 시절 중문학을 전공하신 백원담 교수에게 강의를 들은 이후, 노신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다가 최근 홍대 앞 헌책방에서 이 책이 눈에 띄어 구입하여 읽게 되었는데, 대학 때나 지금이나 역시 거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현실을 끌어안고 앞으로 나가는 이다. 페어플레이도 그만한 상대에게나 어울리는 것이지, 그렇지 않은 상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추근(秋槿: 중화민국의 여성혁명가)여사가 바로 밀고로 죽었다. 혁명 후 잠시 <여걸>이라고 불리더니, 지금은 입에 올리는 사람도 거의 없다. 혁명이 일어나고, 그녀의 고향에 도독(都督: 군사 책임자)이 부임했는데, 그녀의 동지인 왕금발(王金發)이란 사람이었다. 그는 그녀를 살해한 주모자를 체포하고, 밀고 서류를 수집?조사하여 복수를 하려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그 주모자를 석방하였다. 듣자니, 이미 민국이 된 마당에 구원(舊怨)을 새삼스레 다시 들춰내 무엇하겠느냐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2차 혁명이 실패한 뒤, 그 왕금발은 원세개의 앞잡이에게 총살을 당하였다. 여기에 힘을 도운 자는 바로 그가 석방해주었던 사람, 추근을 살해한 그 주모자였다.

그 자는 천수를 누리다 죽었다. 그러나 그 곳에 여전히 출몰하고 있는 자들 역시 그와 같은 부류의 인간들이다.

-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중에서, 143쪽


혹자는 문학은 궁할 때 탄생한다고도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오히려 궁할 때는 문학이 탄생하지 못합니다. 제가 북경에 있을 때만 해도 곤궁해지면 사방으로 돈 구하러 다니느라 글이라곤 한 자도 쓸 수 없었습니다. 월급을 받게 된 다음에야 책상에 앉아 글도 쓸 수 있었습니다. 바쁠 때 역시 문학은 나오지 않습니다. 짐을 진 사람은 짐을 내리고서야 글을 쓸 수 있고, 인력거꾼은 인력거를 놓고서야 글을 쓸 수 있습니다.

- <혁명시대의 문학>중에서, 213쪽


여기서 조금만 말하고자 합니다. 첫째, 생계를 도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생계를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말아야 합니다. 요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 공산당의 특기라고 떠드는 자들이 있는데, 이것은 큰 착오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이것을 실행하고 있으면서도 단지 입 밖에 내지 않을 뿐입니다. 둘째, 애인을 위로해 주십시오. 그런 것은 혁명으로의 길과는 정반대라는 게 세상의 여론인 듯하나, 이는 개의할 바가 못 됩니다.

- <미래를 지나치게 밝게 본 잘못>중에서, 176쪽


                                       *                                         *

 

노신을 읽고 느낀 바를 조금 적어보려다가 그만 둔다. 차라리 노신의 산문집을 한 번 더 읽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족을 먹여살리지 못하는 소설가를 이웃과 그의 주변 사람들은 쉬지 않고 욕을 해대다가 어떻게 운 좋게 그 소설가가 베스트셀러라도 만들면 '그러게 그럴 줄 알았어'하면서 칭찬해대는 게 사람들이니. 그러면 그 소설가가 대단한 걸까? 나는 그를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나는 확실하게 고전주의자이다. 먹여살려야 할 가족이 있다면 그는 돈을 벌어야한다. 어떻게든. 예술은 그 다음 문제다.

 

사람들은 다 빈치의 <모나리자>가 위대하다고들 말한다. 그렇다면 어느 독재자가 한 사람을 죽일까, 아니면 <모나리자>를 태울까 할 때, 전자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지 <모나리자>를 선택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다.

 

나이가 들고 보니, 만 년 전 세상이나 지금 세상이나 크게 변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죽게 될 것을 조금씩만 양보하고 배려하면서 산다면 이 세상은 분명 좋은 세상이 될 터인데.

 

희망을 만드는 것은 현실의 고통 때문이지, 미래에 대한 낙관 때문이 아니다. 애초부터 미래란 없어도 무방한 종류의 것이었다.



아침 꽃 저녁에 줍다 - 루쉰문고 6

루쉰저 | 김하림역 | 그린비 | 2011.07.10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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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에 올라온 사진을 옮긴다. 어제 아침 CNN에 올라온 기사라고 한다. 하지만 대다수의 한국 언론, TV에서는 다루어지지 않는다. 날이 멀다하고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에 대해 시국선언을 하고 있지만, 침묵하고 있다. 


언론과 관련된 교과서에는 '비판 기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현재 한국은 그런 언론을 찾기 어렵다. 


이 나라의 미래는 이렇게 어두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의 화살은 지금 침묵하는 언론들에게, 그 침묵을 강요하는 정부와 여당으로, 그 옆 무능력하기 이를 데 없는 야당에게까지 돌려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런 정치적 지형에 대해 알 생각도, 알아도 침묵하는 국민들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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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의 생각 - 8점
안철수 지음, 제정임 엮음/김영사




안철수의 생각
안철수(지음), 제정임(엮음), 김영사 




게으르게 읽었다. 책의 내용은 대부분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의견 표명들이었다. 이야기하는 주제나 소재에 대해 상세한 부분들(원인과 정책 방향 등)까지 언급하였다면, 이런 형태의 책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실은 그렇게 접근했다면, 이렇게 팔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인터뷰 형태의, 적당한 수준에서 합리적인 문제 접근과 해결 방향 정도를 표명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매우 안전적인 방법을 택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정치인을 택할 때는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로 선택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나는 한국 정치를 둘러싼 국민들의 태도에 대해 매우 비관적이다. 

정치인 안철수에 대해 관심 없는 사람들은 그의 생각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사람들은 정치인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궁금하지 않다. 사람들은 이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면서 정치인들에게 소신이나 세계관, 국가관 따위를 묻지 않는다. 나아가 사람들은 정치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다고 생각한다.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저 방송 뉴스나 신문에 나오는 짧은 언급을 흘려듣는 수준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무관심으로 인해 이 나라의 미래가 어두워져가고 있음에 대해 결국 책임지지 않을 것이며, 방관할 것이고 변명할 것이다. 그들의 무책임한 행위로 인해 젊은 세대의 고통이 늘어날 것이지만, 그들은 그것을 젊은 세대들 탓으로 돌릴 것이다. 자신이 지내온 과거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이 책은 참 슬프다. 깊이 있는 내용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어느 정도 식견을 가진 이라면 아무나 말할 수 있는 수준의 내용이었다. 그렇다고 더 깊이 있는 이야기가 이 책에서 전개되기를 바란다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다. 왜냐면 독자들 대부분은 그것에 관심 없기 때문이다. 세상을 보고 읽는 눈이 더욱 비관적으로 변해간다는 사실은 참 슬픈 일이고, 안철수의 진지한 고민이 이 나라에 호소력 있게 다가가기엔 우리들은 아주 기본적 것들부터 되어 있지 않다. 가령, 타인의 말에 귀 기울여 듣기, 배려하기, 서로를 이해하면서 토론하기, 서로 같은 목적지를 향해간다는 동반자적 태도... 뭐, 이런 식으로 나열하면 끝도 없겠지. 

정치인 안철수에게 관심 있는 독자에게 이 책은 매우 중요한 책이다. 또는 거의 책을 읽지 않는 독자로서,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점들을 한 번 일람하고 싶다면, 이 책은 제법 괜찮은 지침서가 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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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래도 전 다음세대에게 조심스럽게 희망을 걸어 보네요. 예전보다는 우리의 힘으로 사회를 조금이나마 바꿀수 있다는 생각이 제 주변에도 퍼지고 있다는걸 느끼고 있거든요. 뭐 다 시간이 지나면 사회가 차근차근 성숙해 지겠죠 ㅎㅎ

    •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제 주위도 이젠 기성세대가 되어, 꿈보다는 현실에, 미래보다는 현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습을 보이고 저 또한 그렇게 변해가고 있음을 느끼는 요즘입니다.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꿈에 자극받고 미래를 향해 달려갈 수 있는 열정이 필요한데 말이죠.~ ^^


앞으로 자주 최저 기온을 갱신하는 날들이 이어질 것이다. 출근길, 여러번 구두 바닥이 미끌,미끌거렸다. 그러나 미끄러져 넘어지는 사람을 보지 못했고 나 또한 미끄러지지 않았다. 내 바람이, 미래가, 우리들의 마음이 미끄러져 끝없이 유예되는 것과는 반대로, 내 낡은 구두 밑은 의외로 눈이 녹아 언 길 위를 잘 버텨주었다. 


잦은 술자리, 업무 스트레스로 인해 건강이 안 좋아졌다. 안 좋아지는 것만큼 세상도 안 좋아지고 개인 경제 상황도 안 좋아졌다. 말 그대로 올 한 해는 최악이다. 다행히 심심풀이 삼아 온 온라인 토정비결에선 내년 운이 좋다고 하니, 그걸 믿어볼까나. (이렇게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행운(저 세상의 논리와 질서)에 기대게 된다)


아주 오래 전 서양미술사 강의를 할 때, 이집트 미술을 설명하면서 '과연 파라오 밑의 국민들이 행복했을까요? 아니면 불행했을까?'라고 묻곤 했다. 나는 '당연히 불행했어요'라고 대답할 것이라 여기며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행복했을 수도 있다'고 답할 지 모르겠다. 그리고 실제로도 불행하지 않았고 행복했다고 믿는 편이 낫고 타당하다. 이는 '합리적이고 성실하며, 세상 분위기가 그의 편인 군주 밑의 신분제 사회가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과도 연결된다. 그만큼 이집트 사회는 변화가 없었고 흔들리지 않는 질서가 있었다. 몇 천년 동안 예측가능한 시기가 계속 되었다. 변화말로 사람들의 불안을 야기하는 어떤 것이다.  


사상의 자유라든가 발언/표현의 자유는 전적으로 근대(modern)의 산물이다. 어떤 위계질서를 버리고 극적인 변화와 새로운 질서 속에서 선택한 것이 개인의 자유이고 개인에 대한 (계량적) 믿음이다. 하지만 현대, 지금/여기에 이르기까지도 동시대 모든 사람에게 그런 근대적 의식을 바란다는 건 무리였다. 과연 누가 그들에게 근대적 의식을 강요하는가! 


근대적 의식은 변화를 긍정하고 변화 속에서 진정으로 나은 가치를 찾을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한다. 그 대신 불안을, 두려움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내일을 택한다. 초기 근대 예술가들 - 말년의 미켈란젤로, 폰토르모, 파르미지아니노 등 - 이 보여준 불안, 두려움, 막연한 공포는 여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기교적으로 능수능란하고 강렬한 자신감으로 가득차 있던 바로크 예술가들 - 몬테베르디, 바흐, 비발디, 푸생, 렘브란트, 베르니니 등 - 에 의해 이 불안은 극복되고, 데카르트, 라이프니츠는 합리적 세계관 속에서, 버클리와 흄은 경험적 세계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확신 - 진리가 없어도 잘 살아갈 수 있다 - 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근대적 의식은 오래 가지 않고, 20세기 후반 논의되기 시작한, 반-근대적이라 일컫어지는 '포스트-모던'(post-modern)은 근대의 가려져 있던 불안, 두려움, 공포를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한다. 그렇다면 한국은 포스트모던 사회인가? 그래서 전 근대적인 시기(후기 조선에 가까웠던 시기)에 대한 향수로 목 말라 하는 것일까? 


글쎄다. 잘 모르겠다. 우리에게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룰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고, 1인당 국민소득 1천불에서 1만불로 가는 것과 1만불에서 2만불, 3만불 가는 것과는 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서로 다른 의견을 공유하고 나은 대답을 찾기 위해선 시끄러운 의견 조정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민주주의, 자유주의, 다원주의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역설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관심을 가져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엔 이미지로서의 정치가 답이고, 매스미디어에 의해 사람들의 의식은 조장될 수 있고, 비판적 시각을 키울 수 있는 책 같은 건 살아 있는 동안 1권도 읽지 않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마당에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미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글은 두서 없고 생각은 미끄러지기만 한다. 이런 주절거림은 결국 나를 위한 것이다. 내 패배감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올 한 해, 나는 패배했다. 근대의 반성적 자기 의식은 외부를 향하지 않는다. 의식의 지향성이란 이것이다. <매트릭스>의 니오가 선택한 알약도 바로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알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현상학자들은 그러한 알약의 시작이 어디인지 묻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현상학적 접근이다. 


척 맨지오니의 'Consuelo's Love Theme'을 듣는다. 안소니 퀸이 주연을 한 '산체스의 아이들' OST 앨범. ... 두툼한 LP를 꺼내어 듣고 싶지만, 지금은 사무실, 점심 시간을 이용해 적는 이 짧은 글. ... 결국 나는 근대인(homo modus)임으로 '내일의 나'를 향해 가겠지만, ... 16세기 사람들이 느꼈을, 그 불안함을 떨치지 못하는 건 어떤 이유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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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어 PC로 옮기니,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요즘 내 신세같다고 할까. 일은 밀려드는데, 바로 실적으로 연결되는 것도 아니고, 최선을 다한 제안은 긍정적인 담당자 손을 떠나 위에서 보기 좋게 떨어진다.


또다시 나는 경영을 배운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딱 맞다. 아직 배운다는 건 좋지 않은데, ... 이 말은 죽을 때까지 할 것같으니 걱정이다. 


올해 독서 계획 중에 '정치철학' 책을 읽자는 것이 있었는데, 바쁜 일상 속에 흐지부지 되었다. 블로그에서 정치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편인데, 대선을 앞두고 한 번 올릴 예정이다. 설마 선거법 위반으로 걸려들어가는 건 아니겠지. 




요즘 주로 활동하는 곳은 구로디지털단지다. 이 곳은 좀 삭막한 느낌이다. 





사무실이 있는 빌딩 맞은 편 건물이다. 폰으로 볼 땐 봐줄만 했는데, PC로 옮겨서 보니 아니었고 보정도 하고 수정해도 별 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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