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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예술의 우주/예술사 +47






http://www.metmuseum.org/collection/metcollects/feature 

http://www.metmuseum.org/collection/objects?pkgids=279&feature=nineteenth-century-exhibition-pistols 



사진 이미지를 확대해서 보면, 그 장식의 정교함에 놀라게 된다. 그런데 이는 장식품이 아니라 실제 권총이다.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 전시 중인데, ~ 왜 요즘에는 이런 물건이 나오지 않는 걸까? 인건비 때문일까. 


하긴 이 권총을 주문하여 가지고 있었던 사람의 재력이 어마어마했을 것이라는 건 상상하고도 남을 일이긴 하지만. 





Roses

Vincent van Gogh (Dutch, 1853–1890)

1890



반 고흐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내 가슴을 후벼파는 듯하다(했다). 그의 정신적 고통, 혼란이 고스란히 페인팅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종종, 반 고흐를 좋아하세요? 얼마나 좋아하세요?라고 묻곤, 아, 반 고흐 시대였다면 '당신은 정신병자예요'라고 말한다. 너무 잔인한가. 하지만 알 건 알아야 하니까.


이것도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 있는 작품이다. 


두 사진 이미지 다 메트로폴리탄미술관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옮겨왔다. 

https://www.facebook.com/met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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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비즘에 대한 세잔의 영향에 대해 자세히 알아본 바가 없었다. 현대미술에 대한 세잔의 영향은 너무 거대하기 때문에, 큐비즘 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현대 미술가들은 세잔의 후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아마 내가 현대 미술에 대한 긴 글을 쓴다면, 뒤샹과 세잔만으로 글의 초반을 장식할 것이다. 뒤샹은 현대 미술을 난장판으로 만든 이라면, 세잔은 현대 미술을 견고하게 만든 이다. 과거와 단절하고 현대 미술이 끊임없는 혁신을 감행하게 된 계기는 뒤샹이고, 현대 미술이 과거의 역사와 단절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어지며 현대 미술 또한 서양 미술사의 한 챕터임을 끊임없이 환기시키에 한 이가 있다면 그가 바로 세잔이 될 것이다. 


그는 현대 문화의 내향성을 최초로 들어내 보이며, 우리 마음 속의 기하학에 주목했다. 고전적 현대, 혹은 모더니즘을 새로운 고전주의라고 불리게 만든 예술가이다. 그리스 고전주의, 르네상스 고전주의가 외부에 존재하는 기하학을 찾았다면, 세잔은 우리가 본질적으로 기하학적임을 드러냈다. 


큐비즘은 세잔의 직접적 영향 속에서 기하학주의를 전면에 드러낸다. 세잔 이후 모더니즘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기하학주의로 예술을 지배한다. 아마 연구자들은 프랑스의 누보 로망이라든가, 전후 실존주의 문학이라 이후의 문학들 속에서도 기하학주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래 피카소와 세잔의 작품을 한 번 비교해보라. 얼마나 닮아 있는지. 

(나에게 여유가 된다면, 이와 비슷한 음악과 문학 작품을 찾아 나열해볼 수 있을 텐데.. 아직 그럴 여유가 없구나.) 



Pablo Picasso, Bread and dish with fruits on the table, 1909, oil on canvas, 164 x 132.5cm, Kunstmuseum, Basel 





Paul Cezanne, Still Life, oil on canvas, 60*73cm, 1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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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루시다는 하나의 광학 장치이며, 카메라 옵스큐라는 일종의 광학 현상을 이야기한다. 원래 이 글은 좀 길고 자세하게 적을 생각이었으나, 그럴 시간이 좀처럼 생기지 않는 터라, 대강 정리해보기로 한다. 


카메라 루시다는 광학자이면서 물리학자, 화학자 였던 윌리엄 하이드 울러스턴(William Hyde Wollaston)이 발명한 광학 장치이다. 일종의 드로잉 보조 도구로, 사진이 발명되기 전까지 무척 활발하게 사용되었던 장치다. 프리즘에 135도 각도의 반사면 두 개를 설치하여 비치는 이미지를 관찰자의 눈에 전달하는 장치였다. 


출처: 위키피디아 


실제로 그림의 초안을 잡거나 디테일한 부분들을 보다 정확하게 잡아내기 위해 자주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것도 일종의 도구인지라, 어느 정도의 연습과 숙련이 필요했다. 아래 사진을 보라. 카메라 루시다를 활용해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를. 이렇게 초안을 잡고 그 위에 보다 정확하고 자세한 드로잉과 페인팅을 한다. 




출처: 위키피디아 



실제 카메라 루시다의 모습이다. 지금도 구할 수 있다. 꽤 정교하게 생기지 않았는가. 




출처: http://perspectiveresources.blogspot.kr/2012/03/how-to-use-camera-lucida.html  



카메라 루시다를 활용할 경우, 위 사진처럼 물체의 정확한 길이나 비례, 위치나 각도를 잡을 수 있다. 이것은 19세기 초에 발명되었고 상당히 많이 통용되었다. 그렇다면 카메라 루시다를 이용한 화가들와 그렇지 않은 화가들의 차이는? 큰 의미 없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지금 사진기를 활용하는 화가와 그렇지 않은 화가를 구분지어 가치판단하려는 것과 동일하다. 위의 사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실제 작품성을 결정짓는 것은 카메라 루시다를 모든 화가들이 사용했다고 해서 진짜 재능은 카메라 루시다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기원전 아리스토텔레스도 언급한 광학적 현상이다. 방을 어둡게 하고 창 틈의 작은 구멍으로 외부에서 빛이 들어오도록 하면, 외부의 상이 거꾸로 벽면에 비치는 현상이다. 바로 아래처럼. 


abelardo morell : ‘camera obscura’ (photography)

The Chrysler Building in Hotel Room, Camera Obscura image

gelatin silver print, 1997 

website : http://www.abelardomorell.net/photography/cameraobsc_01/cameraobsc_01.html 



아, 이걸 사진 작품의 소재로 이용하는 사진가가 있을 줄은 나도 몰랐다. 그런데 이건 카메라 루시다보다 더 사용하기 어려워서 대단한 인내를 요구했음에 분명하다. 아래 이미지를 한 번 보라. 




출처 : http://etc.usf.edu/



아휴, 이걸 어떻게 그리고 있을 것인가. 일반적으로 화가들은 어두운 방 안에 있고 모델이나 그림의 소재가 되는 피사체는 밝은 바깥에 위치하여 아래와 같이 벽면에 비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당연히 벽면에 비치는 피사체는 거꾸로이고. 하지만 초상화라면 얼굴의 윤곽 - 눈, 코, 입, 턱선 등 - 만이라도 스케치해놓으면 작업은 매우 수월해진다. 



출처: http://blog.staedelmuseum.de/verschiedenes/techniken-der-fotografie-die-camera-obscura-teil-210 



그런데 이런 카메라 옵스큐라를 경험할 수 있는 도구는 쉽게 만들 수 있다. (아, 이런 걸 왜 미술 시간에 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했는데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아래는 카메라 옵스큐라를 볼 수 있는 도구를 만드는 법이다. 

출처: http://galleryhip.com/how-to-make-camera-obscura.html 



그리고 이건 실제로 만든 샘플. 



출처: http://galleryhip.com/how-to-make-camera-obscura.html  



카메라 루시다, 카메라 옵스큐라와 미술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데이비드 호크니의 <<명화의 비밀>>을 보면 보다 자세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도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짜 위대한 예술가들은 달랐다는 점이다. 결국 도구는 도구일 뿐이다. 


이 글을 쓰면서 카메라 루시다를 찾아보니, 아마존에서는 몇백불이면 구할 수 있다. 혹시 이런 도구를 통해 드로잉을 한다는 것을 경험해보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한다. 그런데 요즘에는 사진이 더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어서. (참고로, 인상주의 대가 끌로드 모네도 카메라를 들고 다녔다. ) 



LUCY Drawing Tool: Another Camera Lucida from the Makers of LUCID-Art  (아마존으로 연결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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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고전주의



플라톤이 인간 존재를 완전한 세계(존재의 세계)에서 불완전한 세계(생성의 세계)로 추방된 존재라고 말했을 때, 그 속에는 존재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와 생성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를 동시에 극복하고자 하는 플라톤 철학의 의도가 담겨져 있으며 동시에 불완전한 세계에서 완전한 세계로 향해 가고자 하는 그의 열망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 고전주의의 절정기가 막 끝나가는 무렵을 살았던 플라톤 철학은 종종 그리스 고전주의의 철학적 반영으로 이야기되곤 한다. 그것은 그가 이데아를 상정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만, 그보다 ‘완전으로부터 불완전이 나왔으며 이 불완전은 영원히 완전을 향하여 분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플라톤 철학이 가지는 기본적인 태도에서 기인된 것이다. 


플라톤 철학이 그러했듯이 그리스 고전주의 양식은 완전함을 향해간 양식이었다. 즉 끊임없이 변하고 움직여, 완전하지 못한 어떤 대상을 영원히 정지해있으며 완전한 어떤 것으로 만들어내기 위한 양식인 셈이다. 그리고 뮈론의 <원반 던지는 사람>은 이러한 고전주의의 대표적인 작품들 중의 하나이다. 




뮈론, ‘원반 던지는 사람’ 

 



후기 고전주의 



기원전 431년 그리스 아테네의 지도자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죽은 아테네 시민을 기리며 아크로폴리스에 모인 아테네 시민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의 도시가 평범하기만 한 도시는 결코 아닙니다. 어떠한 다른 도시도 우리만큼 많은 정신적 즐거움을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일년 내내 경기와 제사가 있고 우리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또 우리들의 눈을 즐겁게 하는 아름다운 공공 건물이 나날이 늘어 가고 있습니다. … … 우리는 지나침이 없이 미를 사랑하고 비굴함이 없이 지혜를 사랑합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부는 단지 허영을 위한 재료가 결코 아니며 오히려 성취를 위한 한 기회입니다. 우리는 가난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을 진정한 불명예로 여길 따름입니다. … … 단적으로 말씀드려서 우리들의 도시는 하나의 전체로서 그리스에 대한 한 본보기입니다. 모든 구성원의 평등, 정신적 독립성, 다방면의 업적, 육체와 두뇌의 완전한 자립 등올 인해서 우리들의 도시가 산 교육의 장임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그리스 고전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기원전 5세기 무렵에는 아테네와 그 주변에 약 20만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현대와 비교할 것은 못 되지만, 기원후 1600년 경의 아테네가 폐허더미 속에 오두막 몇 채들이 있었던 것에 비한다면, 이 당시 그리스 아테네가 누렸던 물질적 풍요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물질적 풍요가 예술적 만족이나 성취를 가지고 오는가 이다. 예술사에서 끊임없이 등장하게 되는 이 문제에 대한 정해진 답은 없다. 즉 물질적 풍요와 예술적 성취와의 정해진 상관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각 시대마다 어떤 측면에서 비슷한 양식을 보여주지만 때로 전적으로 다른 양식을 보여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 당시, 기원전 5세기와 4세기 경 그리스, 특히 아테네에서는 물질적 풍요가 문화예술적 성취와 학문의 융성을 동시에 수반하였음을 분명한 사실이었다. 저 페리클레스의 연설 속에서 우리는 당시 그리스의 언어가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었음을, 그리고 그리스 아테네 시민들의 자존심과 자부심이 어느 정도 되었는지에 대해서까지 추측할 수 있다. 이렇게 자신만만하던 아테네가 스파르타와의 오랜 전쟁 속에서 한때 지중해를 호령했던 자신감을 잃어버리기 시작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여기에서 비롯되었으며 리십포스와 프락시텔레스의 양식도 이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대체로 딱딱한 느낌을 주던 폴리크레이토스의 조각상에서 리십포스와 프락시스텔레스의 부드럽고 상대적으로 여성적인 느낌을 주는 조각상으로 변하는 것이다. 


즉 개인과 사회(국가)의 균형과 조화가 무너지면서 개인 쪽으로 무게 중심이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예술 작품들은 어떤 이상이나 당위로서의 세계를 반영하지 못하고 개인적인 느낌이나 취향을 반영하기 시작하며, 극단적으로는 사사로운 장식으로까지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 고전주의가 개인주의의 발달에 일정 부분 기반하고 있었지만, 이러한 개인주의는 그 고전주의가 뒤로 후퇴하게 하는 기반이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 철학과 서사양식에서는 냉소주의가 물들기 시작한다)




리시포스의 조각



프락시텔레스의 조각, ‘헤르메스’




헬레니즘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나고 스파르타가 그리스의 패권을 쥐게 되지만, 스파르타에게는 그리스의 도시 국가를 끌고 갈 힘이 없었다. 이 때부터 지중해는 여러 도시 국가들이 지중해의 패권을 쟁탈하기 위한 몇 세기의 혼란기를 보내게 된다. 그리고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하여 헬레니즘이라는, 후대 학자들에 의해 쇠퇴기의 양식이며 바람직하지 못하고 천박한 양식으로 평가 받았던 예술 양식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어떤 남자의 머리’, 델로스에서 출토, 기원전 80년경, 청동, 기원전 80년경, 높이 32.4 cm, 국립 고고학 박물관, 아테네



‘죽어가는 병사’



이제 세계는 분열되기 시작한다. 하나의, 정치경제적이며 학문적, 정신적 중심은 사라졌으며 사람들 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새로운 것들 뿐이다. 이미 위대한 과거는 사라졌고 눈 앞에 보이는 건 혼란스러운 모습들 뿐이다. 걸핏하면 전쟁이 나고 어제까지 만났던 이가 전투에서 죽어버리는 시절이 온 것이다. 그야말로 하루하루를 지탱하기도 힘든 시기인 셈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다양한 민족들이 뒤섞이게 되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기 시작한다. 


헬레니즘 양식은 이질적인 것들의 결합이면서 동시에 극단화된 자연주의적 경향을 띄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하나의 체계가 무너졌지만, 그 체계의 유산은 아직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 체계의 유산 속에서 이질적인 것들은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적 세계 속에서 용납되지 못했던 그 어떤 것들이 새롭게 등장한 것이다. 


하나의 완결된 세계로의 그리스 문화 속으로 다른 이질적인 것들이 들어오기 시작할 때,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 경우에는, 어떤 원리에 의한, 그리고 그것으로 수렴 가능한 자연주의적 양식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눈 보이는 대로 나타낼 수 밖에 없는 자연주의적 양식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헬레니즘 조각들은 표현적이고 동적이며 애절하고 자극적이며 흥분을 자아내게 된다. 




라오콘 군상 




‘사모트라케의 니케’, 기원전 200년경, 대리석, 높이 244 cm, 루브르 박물관




하지만 사람들은 위대한 과거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우리가 예술 작품에 ‘실험적이다’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에는 예술가가 새로운 현상을 담아내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양식적인 변화나 전적으로 다른 표현을 하는 경우이다. 그런 점에서 헬레니즘 예술가들은 실험적이었으며, 그 시도는 라오콘 군상이나 니케 상에는 성공적이었다. 


변해가는 것, 움직이는 것을 어떤 고전적 원리를 통해, 바람직한 어떤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럽고 처절하지만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감의 소산이 아니라 자신감을 잃어가는 와중에 그 자신감을 되찾기 위한, 하지만 끝내 그것을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의 산물이었다. (* 바로크 양식과 유사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를 향해가고 있었던 양식이었다.)



로마의 예술


기원전 700년경의 에트루리아 문명으로부터 로마는 시작된다. 기원전 500년 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석상에서는 당시 그리스에서는 볼 수 없었던 표현력이 돋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기원전 1세기 로마가 지중해 세계를 통일하였을 때에는 이러한 에트루리아 문명보다는 헬레니즘 문명에 속해있었다. 


헬레니즘 양식이 소아시아와 그리스 본토를 중심으로 하였다면 이제 로마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하여 북유럽, 북아프리카까지 포함하는 제국으로 성장하게 되었고 이러한 로마의 예술 양식에는 ‘~주의’ 같은 단어가 붙지 못하게 된다. 즉 로마는 한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가 아니라 여러 다양하고도 이질적인 민족들과 지역들로 이루어진 제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단일한 양식이 지배했다고 보기에는 어렵게 되었으며 또한 로마를 중심으로 하여 몇몇 특징적인 양식들이 나타나지만 그리스 고전주의나 헬레니즘 시대와 비교해서 그 예술성이나 감동은 현저히 떨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양식들은 그리스나 헬레니즘 시대에 가지고 있었던 예술만의 자율성을 상실하였고 감동보다는 즐거움이나 유희의 대상이거나 또는 국가나 가문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공공 미술적 양식으로 전락해버렸다. 초상조각의 무덤덤한 표정은 지도자의 권위, 가부장의 권위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로마의 건축은 로마 사회가 외양적으로는 얼마나 굳건하고 체계적이었던가를 보여주는 양식이었다. 로마의 콜로세움은 아치들로 이루어진 긴 복도와 계단, 몇 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에서 그 당시 세계적으로 가장 큰 건물이었으며 건축공학적으로도 놀라운 걸작이었다.



콜로세움, 72-82년, 로마



판테온



하지만 콜로세움의 건축공학적 기술은 판테온에서는 또다른 기적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판테온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투박하고 무거워 보이는 외양과 달리 내부의 모습은 화려하고 신비적이며 종교적이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외부와 내부의 분리는, 어쩌면 로마 사회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서기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기 전까지 로마에는 다양한 종교들이 범람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종교들은 대체로 내세적이었고 신비주의적 경향을 띄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플로티누스의 철학 사상은 이러한 신비주의적 경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로마인들은 국가의 의무에 충실히 복무했고 가문의 전통에 누가 되지 않으려 행동했으며 물질적인 풍요와 로마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기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풍요와 자부심은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는 신념이나 전통을 기반으로 할 때에만 빛날 수 있지만, 불행하게도 로마는 그렇지 못했다. 그만큼 현실적이었던 것일까. 즉 현실적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개인의 희생을 요구했던 것은 아닐까.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아드>는 이러한 로마 건국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한 개인의 열정과 노력, 희생이 담겨있다. 그리고 그 속에는 그 개인을 바라보는 연민까지 담겨있다. 한 쪽으로는 현실적인 목적을 위해 나아가는 개인을 닮고자 하는 시선이 있으며 한 쪽으로는 그것을 이루기 위한 고통과 희생을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 그리고 로마인들은 공적 세계 속에서는 전자를 취했지만 사적 세계 속에서는 후자를 택했다. 이러한 공적 세계와 사적 세계의 분리는 로마의 사회가 초기 신분 기반의 사회였다가 후기에는 계약 기반 사회로 넘어가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즉 과도한 개인주의는 개인중심주의로 나아가며 그리고 아예 공적 세계는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로마의 회화 양식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프리마포르타의 아우구스투스 황제, 기원전 20년경, 대리석, 높이 203 cm, 바티칸 박물관(로마)



아라비아인 필리푸스 황제, 244-249년, 대리석, 실물크기, 바티칸 박물관. 




아마 폼페이의 유적이 발굴되지 않았다면 로마 시대의 회화 양식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고 지나쳤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냐면 폼페이 유적에서 나온 회화 양식은 이전 시대와는 판이하게 다른 양식으로, 또한 로마의 건축이나 초상조각과도 극히 다른 양식으로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치밀하게 사실적인 표현으로 만들어진, 그래서 딱딱하고 무덤덤해 보이는 조각상과 달리 회화 양식은 몽환적이며 화사하게 꾸며져 있다. 


이러한 조각 양식과 회화 양식의 단절은 앞에서 이야기했던 바 공적 세계와 사적 세계의 분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조각 양식은 공공적인 성격이 강했다면 회화 양식은 집 안에, 개인의 즐거움과 향락을 위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단절에서 우리는 국가의 이상이나 가치, 혹은 가문의 전통(* 로마 시대에는 전적으로 가문적이며 가부장적인 사회였다)과 개인의 이상과 가치가 분리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공적 세계와 사적 세계의 분리와 단절은 사회 속에서의 개인을 고립시켰고 공적 영역의 가치와 의무는 사적 영역 속의 개인을 고통스럽게 하는 그 무엇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이 때 사회는 신분적이고 황제를 중심으로 한 일원화되고 체계적인 것에서 계약적이며 황제를 중심으로 한 세계와 무관한 다른 체계를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즉 개인은 공적 사회와 격리되고 공허해지면서 일회적인 재미나 저 세상에나 있을 법한 환상을 꿈꾸게 되는 것이다. 폼페이 유적에서 발견되는 회화 양식은 이러한 로마 시민들의 세계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폼페이 유적의 벽화 1. 




폼페이 유적의 벽화 2. 




폼페이 유적의 벽화 3, 플로라. 



그리고 이러한 변화 속에서 북방의 이민족들은 끊임없이 침입해 들어왔으며 로마 사회 내부에서는 동방의 여러 신비스러운 종교들이 급속도로 영역을 확장해가고 있었다. 이 때 기독교는 이러한 종교들 중에서, 로마 황제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위험한 종교였다. 그리고 그만큼 강력하고 혁명적인 종교였다. 공적 영역에서 이탈해가는 로마 시민들은 한 쪽으로는 환상을 쫓으면서 공허를 달래고 있었으며 한 쪽으로는 종교에 대한 심취로 정신이 나가 있었던 셈이다. 





- 위 글은 2004년 초에 쓴 노트입니다. 이 때 서양미술사를 한창 공부하고 있을 때였고, 그 해 말에 작은 서양미술사 책을 공저하기도 했습니다. 책을 내고 난 다음, 미술 관련 책은 거의 팔리지 않고(인문학책보다도 더), 진지한 책은 아예 전공자들조차도 읽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ㅡ_ㅡ;; 미술사는 참 흥미롭고도 진지하며 그 어떤 인문학 분야보다도 통찰력을 전해줄 수 있는 학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직장생활을 하면서 깊이있는 공부를 하기에는 여러모로 힘에 부치긴 하네요.책을내고 난 뒤 미술사 공부를 지속적으로 하여 노트를 계속 업데이트했는데, 언제 다시 책으로 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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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간에 있는 로렌스 공과대학의 컴퓨터 과학자인 Lior Shamir와 Jane Tarakhovsky는 최근 흥미로운 연구를 진행했다. 컴퓨터는 예술을 이해할 수 있는가?(can machines understand art?) 그리고 연구 결과, 가능하다는 것. 


마치 예술사가들이 예술 작품의 연관 관계를 찾고 분석하고 평가하듯이 컴퓨터도 특정 작품의 연결 고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For instance, the computer automatically placed the High Renaissance artists Raphael, Leonardo Da Vinci, and Michelangelo very close to each other. The Baroque painters Vermeer, Rubens and Rembrandt were also clustered together by the algorithm, showing that the computer automatically identified that these painters share similar artistic styles.(예를 들어, 컴퓨터는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인 라파엘, 레오나르도 다빈치 및 미켈란젤로를 자동으로 서로 매우 가깝게 위치시켰다. 바로크 시대의 화가인 베르메르, 루벤스 및 렘브란트도 알고리즘에 의해서 함께 묶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화가들이 유사한 예술적 스타일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컴퓨터가 자동으로 감지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관련 내용은 

http://www.sciencedaily.com/releases/2012/09/120926094546.htm 

- (국문번역기사http://mirian.kisti.re.kr/global/global_v.jsp?cn=GTB2012090501&service_code=03&left_num=2&goobun=C 



그런데 내가 이 기사를 주목하게 된 것은 표현 양식 간의 연관성을 분석하고 카테고라이징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예술적 감동'에 대해서도 이런 식의 분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데 있다. 즉 특정 유형의 사람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작품들을 모을 수 있을 것이며, 어떤 표현 양식은 특정 지역, 특정 연대의 사람들이 감동을 받지 않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감동받지 않는다거나, 아니면 부르디외 식으로 문화자본이나 아비튀스를 바탕으로 사람들을 나누어 이들이 공유한 예술 양식의 특징을 보다 면밀하게 분석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술적 감동마저도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만들어진 작품에 의해 유발되는 시기까지 진전된다면? 그러면 예술가들은 사라지고 예술가 컴퓨터만 남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될 것같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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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생과 바흐만큼 어울리는 짝도 없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한 명은 고전적 바로크 예술가이고 다른 한 명은 바로크 음악의 대가이다. 연주되는 음악 밑으로 깔리는 엄격한 작법은 마치 푸생의 고전적 태도를 엿보게 한다고 할까. 라이프니츠의 기하학 - 바흐의 변주 - 푸생의 고전주의를 연결지어 공부하면 참 재미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럴 기회는 없었다. 


책이나 잡지를 읽으면서 메모하는 습관을 가졌으나, 정리할 시간을 가지지 못한 채, 메모가 여기저기 쌓여 있었다. 그래서 당분간 그 메모들을 정리할까 하는데, 오늘 발견한 것은 칸딘스키와 파울 클레의 이야기다. 


추상표현주의 대가 칸딘스키. 그는 현대적 의미에서의 '회화성'를 극한까지 밀고 나가 색채의 율동(리듬과 운동)으로만 구성된 일련의 작품들을 완성했다. 특히 음악에서 영감을 얻는 그의 작품들은 20세기 초 추상 미술의 아름다움을 화려하게 그려내고 있다. 




Composition IV 

1913년도 작



"색은 영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힘이다. 색은 건반이고, 눈은 망치이며, 영혼은 끈이 달린 피아노다. 예술가는 연주하는 손으로, 하나의 키 또는 다른 키를 두들겨서 영혼을 떨리게 만든다."

- 칸딘스키 





파울 클레, 또한 음악에서 깊은 영감을 얻었고 공공연히 음악과 미술의 연관성, 그리고 회화가 가지는 음악성, 리듬, 선율을 이야기했지만, 사람들이 얼마나 그의 말에 귀 기울였는지는 모르겠다. 도리어 그의 의도와는 관련없이 파울 클레는 종종 색채, 색채 구성이 가지는 기하학적 형태가 더 많이 언급되곤 한다. 


실은 음악만큼 기하학적인 구조물도 없을 텐데 말이다. 중세 시대 내내 미술은 천대 받았지만, 음악은 천상의 구조를 그대로 현실 세계로 옮겨놓은 기하학적 유비로서 인정받았다는 걸 떠올린다면, 우리는 쉽게 파울 클레를 통해 현대 음악을 발견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Red Balloon, 1922, Oil on muslin primed with chalk, 31.8 x 31.1 cm. The Solomon R. Guggenheim Museum, New York



"나는 이 세상에서 이해될 수 없는 존재다. 내가 편안하게 머무는 곳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 사이에 있다. 대개의 경우 창조의 핵심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있지만, 아직 충분하다고 할 만큼은 아니다." 

- 파울 클레 




* 도판 출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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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를 정리하다가 메모 해놓은 것을 옮긴다. 수지 개블릭의 당연한, 하지만 종종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표현에 대한 지적이다. 보스와 초현실주의를 연결짓는 것은 설명의 용이성 탓이지, 실제로 보스가 초현실주의와 관련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오해하기에 이른 것이다. 보스의 작품은 지극히 후기-중세적이고 고딕적이다. 


신의 세계가 가졌던 호소력이 이른 아침의 안개처럼 정오를 향해가면서 사라져갈 때, 그 안개를 못내 아쉬워하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보스의 작품은 먼저 중세말, 근대초의 심리적 방어를 위한 공포적 상상력이 숨겨져 있다. 


우리는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을 경우, 자신의 의지를 강제할 외부의 제어 수단을 바라기 마련이다. 중세 사람들에게 신의 세계란 이 세상의 시작과 끝이었고, 보스는 그 세계가 존재함을 시각적으로 그려냈다. 이 점에서 수지 개블릭의 '종교적 사실주의자'라는 표현은 매우 타당하다.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와 초현실주의를 같이 연결시키는 것이 너무 당연하게 간주되어 와서 그러한 비교를 하는 것은 매우 단순하고 그릇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보스는 동시대 사람들이 괴물에 대하여 갖고 있던 관념을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그의 그림이 없었다면 이 관념은 중세의 '불가사의'로 전해졌을 수도 있다. 오늘날 정의, 원자력, 산업 등과 같은 가장 '최신'이거나 혹은 전통적인 개념과 느낌을 '표현하는' 사회적 사실주의자(social realist)'가 존재하듯이 보스도 '종교적 사실주의자(religious realist)'였다. 
- 수지 개블릭, <<르네 마그리트>>, 14쪽 (천수원 옮김, 시공사) 



The Garden of Earthly Delights, Bosch's most widely known triptych, El Prado Museum 

(출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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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 반 다이크
자화상 
1630년도작, 24.1cm*15.6cm, 에칭 판화 




오래된 작품은 어느새 내 일상과는 너무 많이 멀리 떨어져있다. 녹슬어가는 내 지식은 서재 한 구석에 박힌 강의노트 속에서 박제가 되고, ... 바로크의 초상화가 안토니 반 다이크와 15세기 초의 반 아이크 형제와 헷갈리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음을 이 작은 자화상이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여백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것은 피치 못할 사정이 있거나, 그런 피치 못할 사정을 보는 이들이 이해해 주겠거니 하는 여유로움이 있거나, 한 발 더 나아가 여백을 작품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으로부터 시작하거나 ... 여러 가지 이유를 따져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서양 미술사에서 거친 여백을 드러내거나, 또는 고른 채색의 화면 처리가 사라지는 것은 바로크 시대부터다.  마치 하나의 원리로부터 시작해 예외가 되는 모든 것을 다 잘라내는 듯한 자신만만한 태도를 가졌다고 할까. 마치 '오캄의 면도날'같지 않은가. 

고딕 시대의 유명론이 본격적인 근대적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 영국의 경험론이라면, 그 경험론적 태도가 묻어나는 것은 바로크 시대의 초상화가 될 것이다. 뭐랄까. '인생은 살아봐야 되는 것'이고, '살아봐도 잘 모르는 게 인생'이라는, 그런 느낌의 작품들... 

할 말이 많은 듯하지만, 정작 세상을 살아보면 하고 싶은 말은 나이가 들수록 사라지더라. 그리고 이제서야 말을 할 때가 되었다 싶으면 해질녁이 되고 저 먼 평원 너머로 붉게 물은 하늘이 펼쳐진다. 바로크에서 19세기 후반까지 예술가들과 사상가들은 그런 해질녁 밑에 모여들 뿐, ... ... 실은 나도 그렇게 변해가는 건 아닐까, 요즘 들어 종종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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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 반 다이크 라는 이름을 보니, 입시 때 썼던 물감 이름 중 '반다이크브라운'이라는 이름이 생각나네요. 혹시 그 이름의 주인 일까요? (물감 이름은 램브란트였으니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죠?ㅎㅎ)

    아무튼 아침부터 왠지 알 듯한 이름이 와서 반가움에 냅다 댓글을..ㅎㅎ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 또 놀러오겠습니다~

    • 반 다이크가 만든 브라운 색이 있나보군요~. 아니면 즐겨 사용했던 브라운 색이든가... 유화 물감이 만들어진 것이 르네상스 시기였고, 색의 구분이나 작명은 그 이후에 이루어졌을 겁니다.

      미니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오피스 한 번 놀러간다는 게 영~시간이 나지 않네요. ㅎㅎ.. 수첩 너무 탐나는데..ㅋㅋ

    • 아하! ^^)~
      네에 뭐 그런 구분... 어렵네요.. ㅎㅎ

      그나저나 다시보니 저 위에 반다이크 그림이 너무 멋져서..
      퍼가요~♡ 개인소장을;; ㅎㅎ

      좋은 하루 되시구요~ ^^


화요일 아침 출근길의 빼곡한 지하철 속, 스마트폰을 꺼내 페이스북을 하다가 뉴욕 메트로폴리탄 페이지에 업로드된 가을 작품 하나. 그 작품을 보니, 나는 '가을이구나' 하는 생각보다 '가을이어서 술 생각 난다'거나, '찬 바람이 부니 왠지 쓸쓸해지는 느낌이다'라는... 가을 자체가 아니라 가을이 불러오는 것에 정신이 팔려있었다는 후회가 들었다.

그리고 문득 가을이라는 계절을 생각하게 된다. 


Tosa Mitsuoki(Japan, 1617 - 1691)
Quail under Autumn Flowers
ink and color on silk, 97.8 x 41.6cm, Met Museum
출처: http://www.kurl.kr/ZLyOq1


가을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일까. Tosa Mitsuoki라는 17세기의 일본 화가는 가을 풍경을 가을 국화 아래의 메추라기로 표현했다. 화사하게 핀 국화를 보는 메추라기의 모습이 부드럽고 온화하기만 하다.

17세기 일본에서의 가을이란 저런 모습이었을까. 저 작은 새는 무슨 생각을 하며 국화를 바라보는 것일까. 사람 없는 저 그림 속 풍경이 평화롭기만 하다.



정수영(鄭遂榮, 1743 - 1831, 호 지우재之又齋)
추경산수도
제작연도 미상, 종이에 담채, 101 x 61.5cm,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출처: http://blog.daum.net/inksarang/16877985 


그렇다면 조선의 가을 풍경은 어떠했을까. 혹시나 싶어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웹사이트를 검색해보니,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국내 웹사이트 검색을 통해 구한 작품 이미지이다. 하지만 작품의 도판이 좋지 않다.

작품 도판이 좋지 않은 게 대수로울까.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가, 실제 작품을 보면 되지 않는가. 그리고 네이버에서 정수영에 대해 찾아보았다.


이 《추경산수도(秋景山水圖)》는 작품 연대를 알 수는 없으나 북송(北宋)의 원체화풍(院體畵風)이 가미된 암준(岩?)을 보이고 있어 어느 만큼은 정형상수를 따르고 있다. 형체를 조방대담(粗放大膽)하게 이룬 필치와 온건 침착한 맛을 살린 설채기법(說彩技法)을 신기하게 조화시킨 것은 그의 화풍이 지니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노송(老松)은 가지 끝에 담청(淡靑)으로 설채하고 잡목은 크고 작은 수묵점(水墨點)을 찍어내려 구분 지었다.  - 한국사전연구사 한국미술오천년 (네이버 미술검색)


작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낙엽이 눈에 띄지 않는다. 가을 하면 단풍과 낙엽인데 말이다. 어쩌면 가을 바람에 휘날려 떨어지는 낙엽이 조선 사람들 눈에는 과히 좋게 보이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현재 심사정의 작품.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출처: http://blog.naver.com/jsasm1944/80129366467 


인터넷으로 조선의 가을 풍경을 그린 작품을 찾다보니, 심사정(1707 ~ 1769, 호 현재)의 작품도 눈에 띄었다. 겸재 정선의 제자로, 중국에까지 작품이 알려질 정도였으며, 김홍도와 함께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화가였던 심사정의 '추경산수도'도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추경산수도'와 꼭 닮은 '하경산수도'도 있지 않은가. 가을 풍경과 여름 풍경이 너무 같았다. (두 작품 중 하나는 없거나, 한 작품의 이미지가 다른 작품으로 오인되었거나 한 것일텐데.. 참고할 만한 정보가 없다.)

두 작품 모두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어, 웹사이트에 가보았으나, 검색되지 않았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수준의 웹사이트가 되어야 할텐데..)

하지만 심사정의 다른 작품을 보자.

선유도(船遊圖)
18세기 중엽, 중이에 담채, 27 x 39.5cm, 한국 개인 소장
출처: http://blog.naver.com/chansol21/50040103428


배 타고 노는 모습을 그린 것인데, 소용돌이 치는 물살 위 배 풍경이 너무 한가로워 더욱 매력적인 이 그림은 ... 할 말이 없게 만들었다. 심사정이 왜 대단한지 알 수 있게 만드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보고 있으니, 가을 푸른 하늘 아래 고요히 흘러가는 한강 위로, 돗단배 띄워놓고 술 한 잔 마시고 싶어진다. 사람 그리워지고 술맛이 좋아지는 계절이다. 책 향기가 좋고 언어들 사이의 의미가 쉽게 눈에 들어오는 계절이기도 하다. 가을, 좋은 계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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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의 무대가 되는 멜크 수도원은 9만여권의 장서를 가진 도서관을 가진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976년 레오폴드 1세(남부 오스트리아의 군주)는 지금의 멜크 수도원 자리에 자신의 성을 지었고 그의 후손들은 이 곳에서 지냈으며, 1089년 레오폴드 2세가 베네딕트 수도회에 성을 주었다.(*) 에코의 ‘장미의 이름’의 배경은 바로 이 시대부터 시작된다. 12세기 많은 수도사들이 멜크 수도원에서 성경을 옮겨 적으며, 도서관을 만들게 된 것이다.




현재의 멜크 수도원은 18세기 초 Jakob Prandtauer에 의해 새롭게 지어졌다. 이로 멜크 수도원은 중부 유럽의 대표적인 바로크 건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수도원 건축물의 발달은 종교개혁으로 인한 구교의 위기 의식에 기초하고 있다. 트리엔트 공의회(Council of Trient, 1545 ~ 1563) 이후 많은 수녀회, 수도회가 생겨났으며, 기존 수도회도 개혁을 시도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도는 자연스럽게 수도원 건축물에 대한 투자로 이어졌고 카톨릭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지역의 귀족들과 국왕들은 일반 민중을 중심으로 그 세력을 확장해나가던 개신교에 대응하여 수도원 건축물에 지원을 한 것이다.


멜크 수도원의 아름다움은 이러한 정치적 배경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신앙과 믿음의 상징인 수도원도 정치적, 경제적 상황에서 무관치 못했다는 점은 종교가 역사 속에서 성스러운 신앙 이전에 막강한 정치적 권력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 ‘기증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10세기 이후 세속의 군주들은 자신의 신앙심을 과시하며 일반 민중으로부터의 지지를 구하고 종교 권력으로부터의 인정을 받기 위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부와 권력을 종교에 아낌없이 기부하였다. 중세 후기의 교회 건축물들은 이러한 정치적 배경 속에서 막대한 투자를 바탕으로 지어진 것들이다.


참고 문헌)
프레데렉 다사스, '바로크의 꿈 - 1600 ~ 1750년 사이의 건축', 시공디스커버리
멜크 수도원 홈페이지 http://www.stiftmelk.at/englisch/index.html 
이미지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Melk_Abb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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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갔던 터키 이스탄불(옛날의 비잔티움)의 하기아 소피아 성당 사진을 올린다. 서양사에서 비잔티움은 이방인의 역사다. 그런데 15세기까지 로마 원로원이 있었고 로마 귀족들이 있었던 동로마제국의 비잔티움이 서양에서는 이방인의 역사였다는 건 나에겐 무척 낯선 일이다. 서양사에서 비잔티움은 동로마제국으로만 잠시 언급될 뿐, 자세하게 설명하는 책을 보기란 어렵다.

아마 이 지역의 후손들이 그리스-로마의 후손이 아니라 알라와 마호메트의 후손이 된 탓일까.

현재 남아있는 하기아 소피아 성당은 바로 옆의 블루 모스크에 비한다면 규모가 작고 다소 볼품 없어 보이지만, 이 성당이 지어질 서기 5세기 때에만 하더라도 세계에서 가장 큰 단일 건축물이었으며, 이 당시에 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돔을 설계하고 올릴 수 있는 수학적 지식이나 건축 지식은 없었다.

그래서 한 때 세계사의 불가사의 중의 하나였다.

성당 천정의 황금빛 예수상은 지금 보아도 아름답기만 하고 ...


비잔틴 제국이 무너지고 이후 이슬람 사원이었던 탓에 이슬람 문양이 군데군데 남아있다. 그리고 그 문양 뒤로 동로마 제국의 위대하고 아름다웠던 카톨릭 성당의 모습이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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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fectory with the Last Supper after restoration
1498
Convent of Santa Maria delle Grazie, Milan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
1498
Mixed technique, 460 x 880 cm
Convent of Santa Maria delle Grazie, Milan



종교적인 것들과 무관한 행위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던 시기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14C-16C)였다. 세속화되던 르네상스의 절정기에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지도 모른다.

유럽의 고딕 시대가 종교적 권력과 세속적 권력이 평행선을 달리는 시기라면, 르네상스 시대는 종교적 권력도 세속적 권력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가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문예부흥’이라는 르네상스의 뜻은 과거 역사학자들의 편견이며 실제 르네상스의 본질은 세속화(secularization)에 더 가깝다. 문예가 부흥하는 시기는 12세기 고딕 시대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이를 12세기 르네상스라고 한다).

세속화의 물결 속에서 예술 작품에 표현되어 있는 종교적인 소재나 주제는 세속적 태도를 그럴싸하게 포장해주는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카라바지오의 작품들을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후세에 편집된 다빈치의 <<회화론>>에는 ‘‘회화’는 언어나 문자 이상의 진실함과 정확함을 가지고 자연의 모든 사물을 감각을 통해 표현한다’고 적혀있다. 그에게 감각으로 인식되지 않는 세계는 ‘회화’로 담아낼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유명한 시체 해부도 이러한 근대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에 반해, 미켈란젤로는 감각으로 인식되지 않는 세계를 감각적 세계 속에서 보여주기 위해 말년에는 추상적인 양식을 보여주는데, 이는 그의 과도한 신앙심과 여기에서 비롯된 종교적이며 반-근대적인 태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거의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두 예술가는 확실하게 반대되는 지점에 서 있었던 셈이다.

소설 <다빈치코드>에서 <최후의 만찬>에 예수 옆에 있는 이가 사도 요한(John the Apostle)이 아니라, 마리아 막달레나(Maria Magdalena)라고 하는 모양인데, 이는 소설가의 상상일 뿐이다. 여기에 대한 진위가 논쟁이라니, 좀 우스운 풍경이다. 만약 그가 마리아 막달레나라면, 다빈치의 <세례자 요한 St John the Baptist>도 여성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하긴 그만큼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남성을 여성적으로 그렸다. 그가 결혼도 하지 않았고 남색(男色) 혐의로 소송을 당하기도 했던 걸 보면, 어쩌면 그가 동성애자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래 세례자 요한은 남성적이라기 보다는 너무 여성적이지 않은가. 하긴 19세기의 파리의 데카당(de’cadent)들이 이 여성적인 미소에 매혹당했을 정도이니.



세례자 요한(St John the Baptist)
1513-16
Oil on panel, 69 x 57 cm
Musee du Louvre, Paris





(* '최후의 만찬'에서 '요한'.)
* 예수의 12 제자 중 한 명인 요한과 세례자 요한은 다른 인물이다. 일부러 영문 표기를 명기하였다. 사도 요한(John the Apostle), 세례자 요한(John the Bap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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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ian. The Young Englishman. c.1540-1545. Oil on canvas. Palazzo Pitti, Galleria Palatina, Florence, Italy


이 오래된 초상화는 16세기에 제작된 초상화들 중에 가장 뛰어난 것들 중의 하나에 속하리라. 16세기 베네치아 최고의 예술가였던 티치아노는 눈에 보이는 세계 너머 보이지 않는 영혼의 숨결까지 담아내는 듯 보인다. 르네상스 시기, 일군의 화가들의 붓에서 시작된 위대한 초상화 양식들은 새로운 시대의 한 획을 그으며, 20세기까지 이어진다. 양식의 변용과 혁신을 거듭하면서.

초상화 양식의 역사와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아래 초상화를 보자. 이 흥미로운 초상화는 티치아노가 교황 파울루스 3세(재위 1534 - 49)의 손자를 그린 작품이다.



Titian. Portrait of Ranuccio Farnese. 1542. Oil on canvas. The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USA



권세가의 자제라서 그런 걸까. 고종희의 <르네상스의 초상화 또는 인간의 빛과 그늘>에서 한 문장을 인용해본다. "아이의 경력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다. 12세에 기사가 되었고, 베네치아에 거주하면서 어린 나이에 산조반니푸르라리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는가 하면 14세에는 나폴리의 대주교가 되었고, 1년 후인 15세에 추기경에 임명되었다."

황당하기 짝이 없긴 하다. 이 때 교황은 결혼까지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종교 권력이 세속 권력과 한 판 전쟁을 벌이는 시기였던 16세기의 그리스도교는 현대와는 많이 달랐다. (종교, 또는 신앙이라고 하는 것도 일종의 문화적인 양식이므로, 다양한 변화를 겪어 왔다. 따라서 변하지 않는 종교와 신앙이 없다. 무한자의 세계를 유한자가 알 수 없으므로 무한자의 세계란 결국 철부지 같은 유한자들의 입맛에 맞게 편성된 세계에 지나지 않는다. 윌리엄 오캄의 세계가 아직도 호소력을 가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어리석은 신앙인들은 윌리엄 오캄의 극적인 신앙에 대해 그 어떤 감동이나 전율을 느끼지 못하겠지만)

결국 초상화라는 양식은 권력을 가진 자들의 양식으로 시작되었다. 작품의 완성도 후대 사람들은 깊은 감동을 받지만, 정치적인 의도를 가진 프로퍼갠더로서의 기능도 수행하였음을 알게 되었을 때는, 예술 양식의 자율성에 대한 추구라는 것이 지극히 현대적인 태도라는 점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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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어느 문화센터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중적이지 못한 강의였고 다소 어려운 주제를 다루었던 관계로 한 번으로 끝났습니다만, 그 때 정리해놓은 강의 노트가 있습니다. 여러 참고 문헌, 그리고 제가 배웠던 서양미술사를 바탕으로 하였습니다.

 

제 이력이 유별나,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야 제대로 된 인문학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서양미술사는 인문학의 꽃입니다. 철학사(혹은 지성사)와 비슷하게 움직이며, 언어가 아닌 다른 것으로 우리들의 정신적 세계를 보여주며, 그 시대의 보이지 않는 모습까지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서양미술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작품들을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동시의 철학 책이나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제 경우, 16세기 미술사를 제대로 알려주기 위해 마키아벨리, 세르반테스, 세익스피어, 에라스무스, 루터 등을 이야기하지만, 서양미술사를 배우는 학생에게나 이를 가르치는 선생에게나 곤혹스러운 일입니다.

 

인문학의 위기는 우리 시대가 게을러지고 편한 것만을 찾기 때문에 온 것이지, 인문학이 더 이상 필요 없거나 그 가치를 상실하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큰 활자에 예쁜 그림으로 채워진 대중미술서들이 난무하는 요즘, 몇 백 년전의 고리타분한 작품을 앞에 두고, 정치철학자 마키아벨리, 그동안 완역되지도 않았던 세르반테스,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거리는 다 알려져 있으나, 정작 읽어본 이는 드물고, ‘우신예찬의 에라스무스는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 도대체 몇 번이나 들을 수 있을까요? 인문학 전공이라고 하더라도 말이죠. 심지어 인문학 전공으로 대학원을 마치더라도 우신예찬표지도 보지 못하고 석사 학위 논문을 내는 사람들이 수두룩할 텐데 말입니다.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아 생기는 것입니다. 서양미술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형편없는 작품들을 예로 들면서 양식적 설명이나 도상학적 설명만을 주절주절대면서, 정작 그 작품이 왜 형편없는지, 혹은 왜 감동적인지에 대해서 한 마디 설명도 없습니다. 미술 작품은 감상과 감동의 대상이 아니라 분석하고 주석을 다는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술관에 가서 온전히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 따져 묻고 작품 속 어떤 형체를 보면서 그 의미를 궁금해 합니다. 천박한 방식입니다.

 

먼저 전체를 보고 감상하는 훈련부터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훈련은 매우 어렵습니다. 마치 클래식 음악을 듣지 않는 이에게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듣게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얼마나 지루하고 졸리겠습니까. 그러니 선생은 활자 크고 경박스러우면서도 재미 있는 사실들과 일화들로 채워진 다이제스트를 팔아야 학생과 대중에게 인기가 있습니다. 이러면서 천천히 하향평준화가 시작됩니다.

 

작년에 읽은 어느 서양미술사 번역서에는 ‘arete’를 번역할 수 없는 단어라고 하였습니다. 이 번역자는 프랑스에서 역사학까지 전공한 이였습니다. ‘arete’를 번역하지 못한 이라면, 간단하게 말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한 번도 읽지 않았음을 알게 합니다. 역사학 전공자라면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도 읽지 않았습니다. 이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다. 읽었다면 제대로 읽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으로 virtue’으로 번역하는 arete라는 단어는 군주론에서 매우 중요한 단어이기 때문입니다.(한국어로 번역된 군주론에도 이 단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습니다.)  

 

원래 희랍어에서 유래한 arete의 그리스적 사용은 다소 다릅니다. 영어의 virtue처럼 단독으로 사용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변화되는 단어였습니다. 희랍인들에게는 무엇의 arete인가?’ 또는 누구의 arete인가?’라는 표현도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arete는 단독으로 불완전한 단어였습니다. 레슬링 선수들의 arte, 말타는 사람의 arete, 장군의 arete, 노예의 arete가 있으며, 정치적인 arete, 가정적인 arete, 군사적인 arete가 있습니다. arete는 어떤 특정의 일에 있어서의 숙달 도는 능함을 의미했고, 따라서 그와 같은 능함은 종사하는 일에 대한 적절한 이해와 지식에 의존한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단어가 시간이 흘러 여러 사람들에 의해 일반화되어 현대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참조: ‘희랍철학입문’, W.K.C. 거드리 지음, 박종현 옮김, 종로서적)

 

이제는 CEO를 위한 인문학 강좌들도 생겼습니다. 이 얼마나 황당하고 기가 차는 노릇입니다. 심지어 창의적 경영을 위해 인문학 전공자들이 중요해졌다고 해댑니다. 하향평준화도 이런 하향평준화가 없습니다. 그만큼 인문학 전공자들의 수준이 지적으로 무능하고 현실적으로 형편없으며, 인문학 선생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에 대한 반증이 아닐까요? 하긴 프랑스에서 역사학까지 전공하였으며, 전문번역자라는 이가 ‘arete’를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라고 넘어가며, 이를 제대로 교정해줄 출판사 직원도 없는 마당에, 과연 인문학이 제대로 될까요?

 

글이 길어졌습니다. 이젠 주위에 공부하는 이도 드물고 같이 책을 읽을 사람도 없습니다. 매월 말 영업 실적 정리하고 다음 달 마케팅 전략, 영업 계획 세우는 일상 사이로 미술 전시 기획하고 돈과는 무관한 책을 읽습니다. 그러다 보니, 푸념이 길어졌습니다. 매우 사적인 푸념이니, 못 들은 척 하는 배려를 가져주세요.

 

 

이번에 정리할 노트는 근대 미술입니다. 아마 꽤 긴 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글이 그 시작입니다. 제가 그동안 정리해놓은 미술사 강의 노트를 모두 정리해볼 생각입니다. 이런 식으로.

 

 

서양의 15세기, 16세기는 발명과 발견의 시대로 통칭됩니다. ‘콤파스가 발명되었고 동양으로부터 화약이 전파되어 왔으며, ‘종이가 보급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하나가 거대한 역사적 전환을 만들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콤파스의 발명은 장거리 항해를 가능하게 만드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도 이 발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화약으로 뭐가 바뀌었을까요? ‘화약으로 인해 기사 계급이 결정적으로 와해됩니다. 이제 전투의 양상은 무거운 갑옷을 입고 창과 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대포와 총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기사 계급이 필요 없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이 시대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종이야 두말 할 필요 없이 인쇄술의 발달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 시대는 이렇게 변화합니다. 결국 과거가 물러나고 미래가 다가오게 됩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합니다. 종교(구교)의 시대가 물러나고 시민(신교)의 시대가 오게 됩니다. (막스 베버는 한참 후에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를 이야기합니다만, 실은 이 무렵 시작된 어떤 현상을 정리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질문을 해볼까 합니다.

 

진시황은 왜 분서갱유(焚書坑儒)를 했을까요? 우리는 분서갱유라는 단어를 많이 들었습니다만, 이 일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선 잘 모르고 있습니다. 진시황은 중국 최초로 중앙집권에 성공한 이입니다. 그는 많은 부문에서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사상은 너무 자유로웠습니다. 나라의 모든 것들이 황제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만들고 있으나, 사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나라의 혼란은 사상이 자유로운 데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 분서갱유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한 무제는 분서갱유를 거울삼아 사상의 통일을 이루어냅니다. 그것이 공자 사상을 중심으로 한 유학을 나라 사상의 근간으로 삼습니다. 정치적인 이유로 주류 사상과 비주류 사상으로 나누어지게 되는 겁니다.

 

이는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에서 만나 싸우면서, 실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이유로 대립하지만, 겉으로는 과학과 예술, 사상의 문제로 포장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오르다노 브루노는 화형을 당하죠.

 

Ubi materia, ibi geometria. 물질이 있는 곳에 수학도 생겨난다. 이제 본격적으로 수학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중세시대 내내 잊고 있었던 학문입니다. 그 전까지 가치(value)란 질적으로 파악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신을 중심으로 한 위계질서처럼, 가치로 그렇게 유비적(analogical)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대 초기, 가치를 양적으로 파악하기 시작합니다. 즉 계량화된 가치 체계가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르네상스란 바로 이것입니다. 질적 가치 체계에서 양적 가치 체계로의 변화. 르네상스의 이념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이 될 것입니다.

 

질적 가치 체계 속에서 유지되던 것들이 양적 가치 체계로 오면 맥을 추지 못합니다. 이렇게 묻는 편이 간단할 것입니다.

 

나에게 네 사랑을 증명해줘?’라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중세인과 근대인의 태도는 극명하게 다릅니다. 중세인이라면, 보여주지 못하는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삶에서 하나하나씩 소박하게 행위로 보여줄 것입니다. 하지만 근대인이라면 사랑한다는 사실을 계량적으로 나열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몇 번 사랑한다고 말을 했으며, 몇 번 데이트를 하고, 몇 번 같이 식사를 했으며, 몇 번 선물을 하고, 몇 번 성행위를 했는가 표현할 것입니다.

 

이제 세상이 바뀌게 됩니다. 모든 가치를 수로 표현할 수 있다는 믿음이 싹튼 것입니다. 콤파스를 든 신의 모습이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시인이자 화가인 베이컨의 그림을 떠올리면 쉬울 것입니다.) (기하학)으로 이루어진 신이 등장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기하학으로 풀 수 있으니, 이 세상 모든 것에 신이 편재해있다는 믿음으로 달려나갑니다. 이것이 르네상스적 범신론입니다.

 

지오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우리는 일정 불변의 자연법칙 또는 이 법칙 속에서 호흡을 같이 하는 심정으로 가득 차고 경건한 느낌을 통해서만 신을 알아차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먼저 수학적 법칙이 있고 그 법칙 속에서 경건해질 때 신을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는 화형을 당합니다. 이 얼마나 불경스러운 표현입니다. 마치 교회를 무시하고 성직자의 밥벌이를 빼앗기 위해 작정한 듯한 표현이기 때문에, 정치적인 이유로 화형을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직 세상은 교회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경건하고 성실했던 수사가 마르틴 루터가 성경을 통해 신을 만날 수 있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이후로부터 교회는 필요 없는 곳이 되며, 독실한 기도와 성경이 자기 신앙의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종교혁명은 이렇게 시작되었으며, 르네상스적 이념과도 결탁된 것입니다.

(
그렇다면 요즘의 한국 기독교는 과연 마르틴 루터와 칼뱅이 이야기했던 그 기독교가 맞을까요? 안타깝게도 한국의 개신교는 루터와 칼뱅을 버리고 중세적 마인드로 복귀하고 있습니다. 시대는 앞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주, 아주 자연스럽게 뒤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다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이유 탓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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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포스팅한 글이다. 조금 다듬어 다시 올린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미학이나 미술사를 공부하게 되면, 거의 매시간 듣게 되는 단어이지만, 그것을 가슴으로 느끼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간에는 극명한 지적 차이를 드러내게 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고전주의에 대해서 젊은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 첫 머리를 떠올리면 된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런 시대에 있어서 모든 것은 새로우면서도 친숙하며, 또 모험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소유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는 무한히 광대하지만 마치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아늑한데, 왜냐하면 영혼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별들이 발하는 빛과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세계와 자아, 천공의 불빛과 내면의 불꽃은 서로 뚜렷이 구분되지만, 서로에 대해 결코 낯설어지는 법이 없다.


외부-내부가 동일한 원칙와 질서로 움직이는 것. 새로운 방향의 운동이지만, 그 운동의 귀결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 이 세상이 정해진 규칙(수학적 원리)에 의해 움직이고,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는 것. 그리고 그것을 문학과 예술의 기본 원리로 삼고, 자신의 삶 속에서도 동일하게 발현되는 것. 그것이 고전주의다.
 
젊은 날의 루카치는 이상적인 고전주의를 꿈꾸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건 신기루같다는 걸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상주의는 무너지지 않았고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무언가 이 세상에 기여하고 싶었을 테지만, ... 고전주의 시대란 실제론 존재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저 문학과 예술의 어떤 작품들 속에서만 간절히 구현되는 어떤 것일지도.

1800년, 자끄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가 그린 초상화이다. 본질적으로 낭만주의 시대였던 18세기, 19세기의 일부를 고전주의 열풍으로 몰고 간 것은 자끄 루이 다비드라는 걸출한 천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자끄 루이 다비드의 작품들 대부분은 바로크 시대의 고전적 작품들과 비교해 더 낭만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낭만적 고전주의'라는 평가를 한다. (들라크루와가 '고전적 낭만주의'라면)

Madame Recamier
Oil on canvas, 244 x 75 cm
Musee du Louvre, Paris


안정적인 구도. 세밀한 표현. 모든 것들이 인위적으로 조성된 듯한 세트를 연상시킨다. 배경은 무시되며, 오직 인물을 향해서만 집중한다. 모든 것들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이 세계의 법칙이나 원리가 아니라 한 인물에 의해서 평정되는 어떤 고전적 세계이다. 인물의 표정을 볼수록 삶과 그 삶이 놓인 세계를 능히 자신의 의지대로 펼쳐나갈 수 있다고 믿게 되는 세계. 그것이 신고전주의다. 외부 세계를 지배하는 낭만주의는 절대로 내가 있는 이 세계 속으로는 한 발짝도 들어올 수 없다는 신념. 스스로 그 시대의 낭만성을 부정하면서 고전주의를 향하는 양식. 그것이 자끄 루이 다비드의 고전적 양식이었다.

하지만 진정한 고전주의 작품은 자끄 루이 다비드와는 전혀 다른 양식을 취한다. 

RAFFAELLO
The Granduca Madonna
1504, Oil on wood, 84 x 55 cm
Galleria Palatina (Palazzo Pitti), Florence



고전주의 작품들은 안정된 구도 속에서 이미 정해진 질서의 편안함, 아늑함을 표현한다. 마치 종교에서 말하는 신의 품 안처럼. 모든 것은 조화롭고 행복해보인다. 세속의 번민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고 한들, 이 세계 속에서는 금세 사라질 것으로 여겨질 뿐이다.

앞서 보았던 자끄 루이 다비드의 작품 속에서의 인물을 둘러싼 텅빈 배경은 인물의 고전적 태도를 드러내기 위한 극적 대비의 역할을 하지만, 산드로 라파엘로의 작품에서는 배경은 부차적인 문제다. 실은 배경은 중요하지 않다. 감히 성모 마리아라는 존재를 배경과의 대비를 통해 드러내는 그런 불경한 짓은 하지 않았으며, 그럴 생각도 없었을 것이다. 원래 세상은 정해져 있는, 원만하고 편안한 고전적 질서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세계에서 살고 있다면,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High Renaissance라고도 불리는 Renaissance Classicism 시기는 정말로 의문스러운 시기다. 이 당시 이탈리아는 도시 국가들로 조각난 상태이며, 교황청의 힘이 무력해진 틈을 타, 작은 도시 국가들이 상업을 기반으로 자신의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해나갔던 시기이며, 그 독자적인 도시 국가의 세력이, 북유럽의 절대 왕정 초기 국가들에 의해 공격받게 될 시기의 바로 전이었기 때문이다. 종교 혁명이 시작될 것이고, 이제 기존 종교는 급격하게 그 세력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저런 작품을 그려낼 수 있었을까. 공교롭게도 르네상스 고전주의 시대는 라파엘로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던 1500년 경부터 그가 죽은 1520년 무렵으로만 국한된다. 그리고 이 때 다 빈치, 미켈란젤로, 티치아노와 같은 위대한 예술가들에 의해 집중적으로 고전주의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미술사에서는 그 이전 시기는 그냥 초기 르네상스이고 이 이후는 후기 르네상스 또는 매너리즘이라고 부르며, 르네상스 고전주의를 추켜세운다. 

과연 우리는 산드로 라파엘로가 그렸듯, 저런 심적 태도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 앞에 놓여진 모든 문제들은 해결가능한 것일까?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질서정연하게 자신의 신념과 원칙을 지키면서 해결할 수 있을까? 그리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난 뒤 삶의 아늑함을 맛볼 수 있을까? 실은 고전주의 시대라면 문제해결의 과정도 아늑한 삶의 일부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고전주의가 우리에게 말하는 저 목소리는 가능한 것일까?

젊은 날의 미켈란젤로는 첫 번째 피에타를 만들고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을 때, 왜 예수 그리스도보다 그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가 더 젊게 표현했는가, 마치 젊은 처녀의 모습으로, ... 미켈란제로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신의 세계에 속한 성모 마리아에게 나이가 무슨 소용이냐고. 즉 보이지 않는 질서는 감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표현하는 르네상스 고전주의 작품들은 현대의 우리로선 꿈꾸어선 안 될 어떤 신념과 태도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언제나 열망하지만, 끝내 가질 수 없는 어떤 신념과 태도를. 그리고 신고전주의의 천재 예술가 자끄 루이 다비드는 그 신념과 태도를 인간의 의지라면 능히 가질 수 있고 그것을 세상에 내 보일 수 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고전적 질서를 구현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고전주의 작품들이 우리에게 감동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질서에 대한 염원. 필연적 세계, 꽉찬 세계에 대한 파르메니데스적 열망을 그대로 작품으로 표현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를 가지지 못했던, 다비드가 그렇게 아꼈다는 제자 그로는 낭만주의 양식로밖에는 작품을 만들지 못했고 신고전주의를 열었던 세대보다 한 세대가 어린 앵그르의 작품들 대부분은 어색하기 짝이 없으며 앵그르가 실권을 잡았던 아카데미에서 인정을 받았던 부게로 같은 화가들은 신념이나 태도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그저 예쁘기만 한, 그래서 역겨운 작품들만 만들어냈다. 키치 화가라고 이야기할 때 불행하게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부게로를 떠올릴 수 밖에 없다. 성실한 화가였지만, 그 성실함이 현실 세계를 인식함에 대한 태만함을 가려주지 못하는 셈이다.

안트완 장 그로가 그린 나폴레옹이다. 약간 신경질적인 예술가의 모습을 닮은 것같지 않은가.  아마 들라크루아가 그린 쇼팽의 초상과 비교해보면 더욱 재미있을 것같다.

안트완 장 그로의 Napleon Bonaparte on Arcole Bridge




프랑스 낭만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화가인 들라크루아가 그린 쇼팽이다. 그로가 그린 작품에서 나폴레옹의 얼굴 부분만 따로 떼서 들라크루아의 쇼팽 옆에 두면, 형제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아래 그림은 부게로가 그린 '비너스의 탄생'이라는 작품이다. 부게로라든가 제롬과 같은 19세기 아카데미 화가들의 작품은 오르세 미술관 1층 구석에서 만날 수 있다. 그 거대한 작품들을 보고 이 큰 걸 어떻게 그렸나 하는 의문을 안고 미술관 꼭대기의, 아카데미 화가들의 작품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인상주의 작품들을 본다면, 19세기 아카데미 화가들의 작품이 얼마나 형편없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부게로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마치 대단한 미술 작품인 양 소개하고 전파하는 이들을 보면, 제발 그런 짓 좀 안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게 되지만, 우리 시대의 순수 미술은 마치 저 딴 세상처럼 여기는 일반 대중에게 그런 짓도 약간의 도움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주저주저하게 되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부게로의 작품은 고전주의 양식처럼 그렸지만, 고전주의 작품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작품 속에서 우리는 그 어떤 고전적 신념이나 태도, 흔들리지 않는 고전적 질서를 발견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전주의를 가슴으로 느끼기 어려운 것일까. 그래서 부게로나 제롬같은 화가들을 고전주의 화가로 오인하게 되는 것일까. 하긴 잘 알려진 필자들 중에서도 그런 표현을 버젓이 쓰고 있긴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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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전에 적었던 글을 업데이트해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Le fifre (The Fifer)
1866; Oil on canvas, 160 x 98 cm (63 x 38 5/8 in); Musee d'Orsay, Paris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지만, 이 작품이 가지는 미술사적 의의를 아는 이는 드물다. 그것은 회화 공간의 평면화이다. 19세기 후반 인상주의자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펼쳐지게 될 평면화가 마네에게 있어서도 두드러진 특징이었다는 것이다. 즉 환영주의나 눈속임(Trompe l'oeil)로 이름붙여진 어떤 전통이 후퇴하고 색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평면적인 양식이 두드러지는 최초의 작품들 중의 하나이다.

평면적 구성이 서양의 사상사나 예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지만, 매우 흥미롭게도 이 작품은 일본 판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물과 인물을 둘러싼 배경 사이에는 검은 선으로 구획되어져 있다. 특히 신발은 매우 독특하다. 이는 실제 모습을 재현했다기 보다는 회화적 특징을 위해 새롭게 그려진 것으로, 이제 현실의 재현을 희생하고 회화적 효과에만 치중하는 방향 전환이 천천히 진행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아래 두 우키요에 작품을 붙인다. 마네의 '피리 부는 소년'과 한 번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근세 유럽에 문화적으로 끼친 중국과 일본의 영향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다. 특히 북동아시아의 변방 나라로 인식되던 일본은 19세기 후반 이후 유럽 세계에 자신의 위치를 명확하게 각인시킨다. 그리고 그 영향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현대 한국이 고작 IT나 전자제품 등으로 자신을 드러낼 때, 일본은 만화, 소설, 패션 등 문화적인 것으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활동은 이미 19세기부터 이어져온 어떤 활동의 일환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정도다.


http://www.lib.cyut.edu.tw/act/lact/93_library_week/contents3_4.asp 


Yoshitoshi《Heron Maiden》,1889,浮世繪
http://vr.theatre.ntu.edu.tw/fineart/chap10/chap10-0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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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lling Players
1793
Oil on tinplate, 43 x 32 cm
Museo del Prado, Madrid


고야의 작품은 언제나 흥미롭고 격조있지만, 비극적이고 끔찍한 우울과 절망을 가리고 있다. 몇 년 전(2004년 6월), 어딘가에 올렸던 글을 다시 여기에 옮긴다.
 

낭만주의 시대(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최고의 예술가는 "프란시스코 고야"다. 그는 계몽주의가 남긴 혁명의 그림자 속에서 삶의 허무와 거짓된 역사를 뚜렷하게 목격한다. 그는 작품을 통해서 보통의 낭만주의자들이 이야기하곤 하는 사랑이라든가 환상, 또는 매혹의 도피 따윈 다 허위이거나 기만이고, 도리어 그 세계 속에서조차 우리는 삶의 허무나 죽음, 고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그래서 자끄 루이 다비드와 동시대인이면서 다비드가 계몽주의 신념 속에서 자만과 오만의 성을 쌓았다면 고야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계몽주의 세계가 만들어놓은 거짓, 그리고 우리가 끝내는 굴복하고 말 어떤 허무와 싸우고 있었다. 그래서 고야의 세계를 느끼게 될 때 그 이후의 모든 낭만주의자들이 시시해지고 19세기 초반의 낭만주의자들을 다시 보게 된다. (2004년 6월)


내가 스페인 마드리드를 가게 된다면, 아마 그것은 프라도 미술관 때문일 것이다. 여튼 이 짤막한 글을 올리고 난 다음, 아는 분의 긴 리플이 이어졌다. 여기에도 옮긴다. 미뇽님께선 어떻게 사시는지 무척 궁금하다. 건강하게 잘 계신지. 


미뇽 (2004/06/28 13:53)

프랑스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에 비하여 서정성이 부각되고 주제에 있어서 다양화되면서 어떤 것도 주제가 될 수 있었지만 대부분 사랑으로 귀착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서 자기 목소리로 시를 쓸 수 있었겠죠.
그러나 위고를 비롯해서 역사성을 띠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 독특하죠.
그래서 서사시에 대하여 높은 가치를 두었을 것이란 생각이 드네요.
미술에서는 계몽주의와 대비가 되어 낭만주의가 상관관계 속에 놓임으로써 그 특징이 비교되는 것이 일반적인가 봐요. 문학에서 낭만주의는 보통 고전주의와의 대비 속에서 다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라서...

지하련 (
2004/06/28 13:54)

빅토르 위고는 '후기 낭만주의'로 볼 수 있습니다. 진보에 대한 열정이 일어나기 시작하죠. 이 때부터 예술가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 논의가 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좀더 살펴보면 자본주의의 심화로 인한 계급갈등. 도시의 급성장과 농촌의 피폐화. 자본주의 시스템 속으로 편입된 예술가의 지위에 대한 혼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입니다.
19세기 초의 낭만주의는 프랑스 대혁명의 결과물입니다. 그런데 프랑스 대혁명은 18세기 계몽주의의 결과물입니다. 그래서 계몽주의와 낭만주의는 곧바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특히 칸트에게서 두드러지는데, 칸트의 철학은 계몽주의이며 그의 미학은 낭만주의 미학입니다. 다른 관점으로도 파악할 수 있겠지만, 예술사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독일 낭만주의 문학도 마찬가지이구요.


미뇽 (2004/06/29 18:16)

초기 낭만주의가 프랑스 대혁명의 결과물이라는 말은 개인의 해방과 자유라는 측면에서 볼 때 혁명의 이념과 낭만주의의 모토가 같은 뿌리라는 말로 이해되며 그 점은 저도 동감을 해요. 그러나 초기 낭만주의의 경우 이상한 점은 혁명의 결과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는 것 같아요. 적어도 프랑스 낭만주의의 경우에는요.
왜냐하면 혁명기의 격동은 도리어 18세기의 낭만주의 예고자인 루소가 대표적으로 보여 준 새로운 감수성의 맥을 끊어 놓았다고 볼 수 있을 만큼 복고주의가 대두하고 문학의 모든 쟝르에 있어서 옛 형식이 그대로 지배했기 때문이죠. 그리고 나폴레옹의 정권은 신 고전주의의 틀 속에 문학을 가두어 두려고 했으니까요.
이러한 배경 속에서 새로운 감수성의 작가들이 생겨났고, 이들은 차라리 고립적, 예외적 존재들이었다할 수 있었어요. 이들(샤토브리앙, 스탈부인, 콩스탕, 세낭쿠르)을 소위 전기 낭만주의자들로 명명합니다.

지하련님이 위에서 지적하신 대로 고야에게서 초기 낭만주의 자들을 다시 보게 되는 것은 이들 모두가 18세기 이성이 약속해준 듯이 보였던 새로운 사회는 환상에 불과함을 인지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낭만주의는 크게 보수적, 진보적 낭만주의로 나누어지나, 이들의 고통된 점은 현실에 대한 혐오와 고전주의에 해단 반감으로 합결된다는 점에서 볼때, 외적으로는 대혁명의 연장선으로 이해되지만 내적으로는 고전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지하련 (
2004/06/29 18:43)

흠. 제 리플에 오해를 줄 수 있는 부분이 있군요.
19세기 낭만주의가 프랑스 혁명의 결과물이라고 한 것은, 프랑스 혁명의 영향 속에서 낭만주의가 생겼다는 뜻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미뇽의 생각과 별 차이가 없는..)

프랑스 혁명의 귀결은 이성주의가 아니라 감정주의였으며 나폴레옹이라는 독재자의 등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계몽주의가 내세웠던 이성의 결과라는 데에 사태의 심각성이 있었던 거죠. 그래서 낭만주의는 반합리주의, 비이성주의라는 성격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낭만주의는 프랑스 대혁명의 반발이라고 볼 수 있죠. 즉 혁명 실패에 대한 결과인 셈이죠.

제가 프랑스 대혁명이나 계몽주의를 이야기한 것은 19세기 낭만주의를 이해하는 데 있어 두 계기가 무척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학자나 연구자들이 낭만주의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 그 당시 유럽 대륙을 휩쓸었던 혁명의 열기, 그리고 그 혁명이 가져다 준 절망감, 공포, 독재에 대해선 별 이야기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예술가들은 자신의 예술 속에 자신의 성을 쌓고 안주하기 시작합니다. 독일의 경우 사태가 좀더 심각하여 독일이라는 나라에는 아예 혁명이 가능하지도 않는 곳이라 지식인이나 예술가들의 이러한 고립감은 더욱 심각했으며 이것이 독일 이상주의를 만들게 됩니다.
루소의 경우 18세기, 19세기 초반을 지배했던 인물입니다. 이는 루소라는 인물 자체가 서로 모순되는 점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루소에게서는 이성주의적 성격과 비이성주의적 성격을 동시에 파악해낼 수 있습니다. 전자는 프랑스 혁명으로 연결되지만, 후자의 경우 로코코 양식이나 낭만주의 양식으로 연결됩니다. 미뇽님이 생각하시는 바가 맞습니다.

고야의 경우에는 보통의 낭만주의자들이 도피한 곳을 보여주면서 그 곳마저도 현실의 절망이나 비극, 삶의 허무가 사라지지 않음을 보여주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고야는 현대에 와서야 비로소 제대로된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만큼 현대는 절망적인 인식을 하기 시작하는 시대이니깐요.

***
요즘 포스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실은 글을 쓸 시간이 없다. 집중할 시간이 없다. 마음을 가다듬을 시간도 없다. 꽤 절망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예전에 올렸던 글을 새로 올리면서 사소한 위안을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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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예술 양식을 이야기할 때, '환영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위의 그림에서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벽화인데, 꼭 창문인 것처럼 그렸다. 그래서 창 너머로 다른 건물이 있는 듯하다. 그 옆의 그림은 꼭 액자 속에 담겨져 있는 듯 하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있는 것처럼 보인다.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의 세계, 그리고 그 세계 너머의 어떤 다른 세계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

오래 전에 업로드한 이미지다. 폼페이 유적에서 나온 벽화 사진으로, 시중에 나온 서양 미술사 책에는 거의 나오지 않는 로마 시대의 회화 양식에 대해서 알게 해준다. 실제 로마 시대 내내 회화는 실내 벽 장식으로 주로 그려졌다. 북아프리카에서는 나무판에 그려진 초상화들도 있지만, 로마 전역에 유행했기 보다는 지역적인 경향으로만 보아야 할 것이다. 

폼페이에서 발굴된 회화들의 특징 중의 하나는 창문 너머에 어떤 세계가 있는 것처럼 그려졌다는 것이다. 또한 원근법과 단축법이 제대로 구현되어 있으며(그래서 원근법이 르네상스 시대의 발명이라는 평가는 잘못된 것이다), 도리어 뛰어난 화가였던 로마인들의 회화 작품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도리어 낯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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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멋지네요.이거 보니까,이스탄불 여행할 때 곳곳에 눈에 띄었던 로마양식 건축물과 벽화들이 기억나네요.^^

    • 이스탄불에서 만날 수 있는 로마양식은 동로마제국, 미술사에서는 비잔틴 양식이라고 합니다. 로마 양식 + 동방 양식 + 기독교 등이 혼합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




로코코 시대의 성적인 메타포가 가득찬 작품을 어수선한 루브르 미술관 안에서 보았을 때, 대단한 감동이 밀려들진 않았다. 다만 책에서 보던 어떤 작품을 실제 보았다는 것 뿐.

장 밥티스트 그뢰즈는 18세기 시민-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한 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그는 충실히 18세기 로코코적 여성들을 그렸다. 볼은 홍조를 띄고 창백한 피부와 마른 듯한 몸매에 성적인 분위기를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현실적인(정치-경제적인) 고통과 육체적 쾌락을 대비시켰다. 하지만 루브르에서 위 작품을 보고 아무런 배경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그걸 알기란 어려운 일이다. 

소녀는 깨진 항아리 탓에 치마 가득 꽃을 들고 있다. 이 흥미로운 배치로 인해, 이 작품은 노골적인 로코코적 취향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요즘 말로 하자면, 로리타 컴플렉스를 드러내는 듯하다. 하지만 이 작품의 의미는 정반대다. 도리어 소녀의 음탕함을 보여줌으로써, 남성 관람객에게 여성의 정절을 어렸을 때부터 지키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게 된다. 작품의 소재로 등장한 '깨진 항아리'도 이 관점에서 보자면, 자신의 정절을 지키지 못한 여성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 프랑스 로코코 화가들 중, 프랑소와 부쉐, 프라고나르와 같은 화가들은 몰락해가는 귀족의 향락적인 생활(또는 현실 도피적인 세계)를 그렸다면, 장 밥티스트 그뢰즈나 샤르댕 같은 화가들은 시민-부르주아의, 개신교적 도덕률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위 작품도 퇴폐적인 로코코적 취향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시민 계급의 도덕성도 강조하는 작품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현실 속에서 이런 소녀가 저런 포즈로 앞에 서 있다면? 나보코프의 롤리타가 되는 건 요즘 시대에서는 당연한 일일 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아무리 고결한 사랑일 지라도 말이다.




* 위 작품 이미지는 직접 루브르 미술관에서 찍은 사진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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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nardo da Vinci
Mona Lisa
1503 - 1505, Oil on cottonwood, 76.8 x 53 cm, Musee du Louv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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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nardo da Vinci
Mona Lisa (Det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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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vard Munch
Puberty
1895; Oil on canvas, 150 x 110 cm (59 5/8 x 43 1/4 in); Nasjonalgalleriet (National Gallery), Os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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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zio Raffaello
The School of Athens
1509, Fresco, width at the base 770 cm, Stanza della Segnatura, Palazzi Pontifici, Vatican


A.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나 라파엘로의 <아테네학당>을 모르는 이는 없다. 그리고 실제 작품을 보고 놀라워한다. 하지만 이런 가정을 해보자. 미술사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하는 어느 현대인이 난생 처음 <모나리자>나 <아테네학당>을 보았다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리고 이 두 작품과 함께 뭉크의 <사춘기>를 보여준다면. 한 번 이런 상황을 상상해보자.

1. ‘현대인’은 누구인가? 남편과 아이를 회사로, 학교로 보내고 아파트에 홀로 남은 중년의 여성. 또는 밀린 일들을 처리하다가 상사의 눈치를 피해 잠시 건물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는 회사원. 혹은 매번 입사원서에서 떨어지는 20대. 우리에게 ‘현대인’이라는 어떤 모습인가? 우리에게 ‘현대’란 과연 어떤 시대인가? 그것은 좋은 시대인가, 나쁜 시대인가?

2. 현대인은 <모나리자>를 보고, <아테네학당>을 보면서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마찬가지의 이유로 <사춘기>를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다. 도리어 <사춘기>를 싫어할 지도.

3.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들이 있다.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이 있다. 대부분의 뛰어난 현(근)대 작품들은 보는 이를 부담스럽고 고통스럽게 한다. 하지만 위대한 고전 작품은 아니다. 그래서 고전 작품을 위대한 것이고 아프게 하는 현(근)대 작품은 그렇지 않은 것일까?

4. 그렇다면 어느 작품이 우리를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일까? 마음이 흔들리게 하고 가슴을 아프게 하는 감동은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B.
‘고전Classic’이라는 단어는 로마 시민 5계급 중 가장 높은 계급을 의미하는 ‘Classis’에서 유래하였다. 이 단어의 형용사형인 ‘Classicus’는 높은 수준의 작가나 그의 작품을 뜻하였으며 이것이 굳혀져 ‘고전Classic’이 되었다. 그리고 13세기, 14세기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들이 잃어버렸던, 잊고 지냈던 그리스, 로마 문명에 대한 호기심을 키우기 시작한다. ‘르네상스Renaissance’라는 단어가 뜻하는 ‘재탄생’은 바로 그리스, 로마의 재탄생을 의미했다. ‘고전’이라는 단어가 요즘의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때였다. 그래서 그리스적이거나 로마적인 양식을 그 당시의 이탈리아 사람들은 ‘고전적’이라고 표현하였다.

하지만 우리가 예술의 역사에서 ‘고전주의’라고 하였을 때, 그리스 고전 시대, 기원전 4세기 - 5세기의 작품들은 포함되나, 그리스, 로마의 다른 시대의 작품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였을 때의 ‘고전’이라는 단어가 미술사에서는 그 쓰임을 다르다. 높은 작품성을 가지고 있는 오래된 과거의 작품들을 모두 ‘고전’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예술사에서 ‘고전주의’는 구성이나 색채 측면에서의 양식이면서 동시에 정신적 양식(태도)를 의미한다. 그래서 ‘르네상스 고전주의’나 ‘신고전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며, 일부 모더니즘 양식의 작품을 두고 ‘고전적 현대’라고 하는 것이다.

고전주의의 양식적 특징은 낭만주의와의 대비 속에서 선명하게 이해될 수 있다.

C.
모든 고전 작품들은 감동적인가? <모나리자>나 <아테네학당>이 보는 이의 마음을 쥐고 흔드는가? 예술에 대한 지식을 쌓기 전에 예술 작품을 보고 감동받을 수 있는 태도를 먼저 가져야 한다. 가장 좋은 태도는 <모나리자>를 보고 손을 떨면서 감동 받았을 그 당시의 이탈리아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이탈리아 사람이 되지 않는 이상, 이 작품들이 현대인에게 현대의 다른 작품들이 주는 바의 그런 감동을 주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전혀 다른 시대의, 전혀 다른 영혼이 만든 작품이기 때문이다.

고전 작품에 대한 지식, 모나리자 부인이 누구이며, 아테네 학당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안다고 해서 이 두 작품이 숨기고 있는 르네상스 고전주의의 정신적 태도를 알지 못할 것이며, 왜 이 두 작품이 위대한 고전 작품으로 남아있는지를 알지 못할 것이다. 도리어 뭉크의 <사춘기>를 보면서 마음 아파하고 왜, 어떻게 뭉크의 작품이 다 빈치나 라파엘로의 작품과 다른가를 알고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예술 작품에 있어서 ‘변하지 않는 교과서’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그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떤 작품이나 법칙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우리들의 마음이 될 것이다.

예술의 역사를 공부하기 전에 먼저 익혀야 할 것은 현대의 무수한 작품들을 보고 흔들거리는 자신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하우저의 말대로 ‘감동을 주는 한, 그것이 바로 현대 작품’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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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공저로 미술사 책을 낸 적이 있었다. 다시 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먼저 블로그에 초고 노트를 정리해 올릴 계획이다. 2~3년 하다 보면, 책을 낼 수 있는 모양새를 갖출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Introduction to ‘History of Western Art’


1. 예술(Art)이란 무엇인가?
  art(영어), ars(라틴어), techne(희랍어)

  - 예술의 가치는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 ‘예술의 역사’가 예술 이해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2. 다양한 시대의 미술 작품과 우리들의 감동이 가지는 연관관계
  - 우리는 어떤 작품을 고전이라고 말하는가?
  - 과연 미술교과서는 우리를 감동시키는가?

3. 기술과 예술은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 보이는 것(형태)과 보이지 않는 것(정신)
  - 예술의욕(Kunstwollen)

4. 미술사, 미학, 미술비평은 서로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 미술사: 여러 다양한 역사들 중 하나에 대한 역사
  - 미학: 보이지 않는(추상적인/관념적인) 어떤 것에 대한 탐구
  - 미술비평: 전시되고 있는 작품에 대한 언어(meta-language)

5. 플라톤(Platon)과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os) 
  
 - 플라톤: 변하지 않는 세계에 대한 염원. 이분법적 세계관은 비극적이고 슬픈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함.
 
  - 헤라클레이토스: 이 세상은 변화함. 운동을 긍정. 그러나 그는 거만한 귀족주의자.
 
  - 사상(세계관)과 자신의 삶(혹은 예술작품)은 어떤 관계를 맺는가?

6. 고전적 세계관과 낭만적 세계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7. 서양미술사의 시대 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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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책 내시면 꼭 보고 싶습니다. 미술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많은 질문에 대한 답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네요 ^^

    • ㅎㅎ. 저도 쉐아르님의 생각대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미술 뿐만 아니라 인생에 대해서 뭔가 이야기할 수 있는... 뭐, 몇 년 이내로 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 noi 2008.06.19 18:02 신고

    멋진 프로젝트를 시작하시려는 참이군요. 책으로 나오는 그날까지 화이팅입니다. 저는 옆에서 열심히 얻어들으며 배우겠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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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ssandro Magnasco, Sacrilegious Robbery, 1731, Oil on canvas, Quadreria arcivescovile, Milan

이탈리아 로코코 화가인 Alessandro Magnasco의 작품은 어딘가 어둡고 무거우며 침울하고 그로테스크하다. 바로크적이거나 로코코적이기 보다는 매너리즘에 더 가깝다. (내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이런 느낌을 환기시키는 그림을 떠올린다면, 'Stil Life'류의 작품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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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Simeon Chardin, Still Life (The Silver Tureen), 1728,  Metropolitan Museum of Art

둘 다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목적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동일하나, 작품의 스타일은 판이하게 틀리다. 샤르댕의 정물화는 정성스럽게 그렸다는 것이 한 눈에 드러나지만, 마그나스코의 작품은 거친 붓질이 두드러진다. 이는 아래의 'Three Camaldolite Monks at Prayer'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제노바에서 1667년에 태어난 Magnasco는 밀라노와 제노바를 오가며 작품활동을 한다. 다행히 그의 어둡고 그로테스크하며 신비적이기도 하고 낯설기도 한 작품 세계는 소수의 지지자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로코코 시대의 미술이라고 하면, 밝고 화사한 색채, 공기에 떠서 날아다니는 기분이 들 정도의, 마치 현실 세계 바깥의 세계를 향한 듯한 황홀감, 그런 풍부한 색채의 세계 속에서 풍겨나오는 멜랑콜리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로코코 미술도 두 가지 경향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귀족적인 로코코, 다른 하나는 부르조아적 로코코.

우리가 로코코 화가로 알고 있는 샤르댕이나 그뢰즈는 후자에 속하는 예술가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로코코의 화풍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귀족적 삶의 모습을 그리기 보다는 부르조아 시민의 모습, 그들의 가치관, 종교관을 대변하는 작품을 그린다. 그 중에서 영국의 윌리엄 호가스는 부르조아의 편에서 작품을 그린 대표적인 화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Magnasco의 경우에는 이러한 로코코 미술과는 다소 거리를 두고 있다. 위의 'Sacrilegious Robbery'은 교회를 약탈하는 도적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Magnasco가 이런 주제의 작품을 그린 것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그리고 이 작품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알려져 있지 않다.

로마시대 이후 이탈리아가 통일 국가를 형성하게 되는 건 19세기에 들어서부터다. 그 이전 시기는 크고 작은 전쟁과 혼란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약간의 도움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오래 전부터 귀족와 시민, 구교와 신교, 국가와 종교의 갈등은 드러나기 시작하였으나(카를링조 르네상스부터), 본격적으로 드러나게는 되는 것은 르네상스 시기부터이다.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로마 교황와 지방 군주와의 경쟁이 두드러졌다. 이탈리아와 인접한 스페인, 프랑스, 독일/오스트리아가 군주 국가로 자리잡은 것과 비교해 이탈리아의 혼란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특히 로마에 교황청이 있는 이탈리아는 이러한 갈등이 더욱 두드러졌다고 볼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Alessandro Magnasco, Three Camaldolite Monks at Prayer, 1713-14, Oil on canvas,
Rijksmuseum, Amsterdam

Camaldolese는 베네딕토 수도회의 한 일파로 알려져 있다(자세한 정보는
http://www.reference.com/search?r=13&q=Camaldolese). 이 작품에서 수도사의 경건하고 성스러운 모습보다는 고통스럽게 기도하는 모습이 보인다. 바로크를 지나 다시 매너리즘을 향한 듯한 작품 스타일에서 관람자는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다. 위의 작품은 교회를 약탈하는 도둑의 무리를, 아래의 작품은 신을 향해 기도하고 있지만,  애처로움만을 환기시킬 뿐이다.

바로크 시대는 절대 권력의 시대였으며, 심정적으로는 매우 안정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파스칼과 같은 불안한 영혼이 있기도 하였으나, 불안한 영혼마저도 안식을 기댈 어떤 곳이 존재했다. 하지만 로코코 시대로 오면 달라진다. 이제 불안한 영혼이 안식을 취할 곳이 없어진다. 로코코의 화사한 세계 밑에는 마그나스코의 작품과 같은 어떤 세계가 숨어있다. 로코코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유미주의적 해답이나 정치적 해답을 찾았으나, 마그나스코의 경우에는 이미 호소력을 잃어버린 종교에서 그 답을 찾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또는 지나가버린 과거를 떠올리면서, 현재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보는 이들에게 강력한 도덕적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다만 그렇게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가 즐겨 그렸던 것들 중에는 '폐허'도 있었다. 그의 작품들을 더 보고 싶다면, 아래 주소를 방문해보길 바란다.
http://www.wga.hu/frames-e.html?/html/m/magnasco/index.html 

위키피디아에서 Magnasco 항목을 확인할 수 있다.
http://en.wikipedia.org/wiki/Alessandro_Magna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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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i 2008.01.04 23:34 신고

    그림 맘에 와닿습니다.. 단정하고 발랄한 그림보단 항상 처절하고 거칠고 비틀린 그림이 좋으니 역시 제 성격이 삐뚤어진 건가 의심하게 됩니다요. 삶을 아름답게 비추려는 시도는 일단 먼저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 되니 원.-_-; (참, 지극히 지엽적인거 하나.. 이탈리아 사람이니 '마냐스코'가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영어발음으론 마그나스코가 되겠지만요.^^)

    • 로코코 미술에 대해 이야기해야 될 때가 있었는데, 그 때 흥미롭게 본 화가예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로코코 미술과는 사뭇 달라, 기억해두고 있다가 최근 메모들을 정리하다가 한 번 정리해봤어요. : )
      '마냐스코'라고 발음해야 되는 군요. 이탈리아어는 알파벳 그대로 읽으면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
      '처절하고 거칠고 비틀린 그림'의 대표는 '반 고흐'죠. 반 고흐만큼 처절하고 거칠고 비틀린 그림을 그린 사람도 드물답니다. 우리 시대 대부분의 사람들이 반 고흐를 좋아하니까, 다들 그렇겠죠. ㅎㅎ


커피를 한 잔 마시고 갑자기 찾아든 가을에 적응하지 못하는 내 육체와 영혼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진정시키란 구름이 가뜩 끼어있는 서울 하늘에서 별빛을 발견하는 것처럼 어려운 종류의 일이었다. 갑작스런 계절의 변화는 자주 격렬한 심리적 불안과 섬세하고 민감한 우울을 동반한다. 이럴 때 기댈 수 있는 초월적 실체, 또는 존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시대는 니체와 프로이드로부터도 너무 멀리 떨어져 나왔다. ‘신은 죽었다’고 말했을 때의 니체만큼 신을 갈구했던 이도 없었을 것이다. 프로이드는 아예 영혼의 신비를 없애버렸으며, 젊은 루카치는 심리학의 발달을 비난했다. 하지만 ‘종교는 아편’이라며 공격했던 마르크스는 종종 나에게 그만큼 종교적인 사람도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들게끔 한다.

하지만 종교와 함께 살면서 신에 대해 무한한 신뢰와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초월적 세계와 현세 사이의 거리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눈만 감으면 천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그런 세계. 그런데 과연 그런 세계는 존재했던 것일까. 종종 우리가 중세에 대해서 그런 느낌을 받았지만(19세기 초의 낭만주의자들은 이를 열정적으로 믿었다), 현대의 많은 중세 연구는 그런 느낌의 허황됨을 보여주고 말았다.

세속의 세계에 살면서 초월적 세계에 대한 염원은 인류에게 문명이라는 것이 생기는 시대부터 현재에까지 지속된, 우리 문명의 본질적인 태도 중의 하나다. 그것은 세상과 마주하면서 느끼는 끝없는 불안과 공포에 대한 강력한 방패다. 그리고 그 방패의 결정체는 종교인 셈이다. 그 속에 있으면 죽음도 두렵지 않았다. 기독교의 역사가 끝없이 이어지는 순교의 역사라는 점을 보면,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순교는 서양 미술의 단골 소재이기도 했다. 그것은 신앙심의 표본이며 절정이고 인간이 신성에 가장 가까이 가는 순간이었다. 많은 예술가들이 순교의 순간을 그렸고 그 순간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귀도 레니(Guido Reni, 1575 ~ 1643)는 순교의 순간을 창백한 우아함으로 그려낸다. 조용하고 진지하게, 하지만 캔버스 바깥 어딘가를 향해 뜬 두 눈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보이지 않은 신을 향해 갈구하는 눈빛은 귀도 레니의 작품에 빠뜨릴 수 없는 지점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19세기의 저명한 미술평론가 존 러스킨은 그를 경멸하고 비난했다. 18세기 사람들이 귀도 레니에 열광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하긴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낭만주의는 때로 너무 기형적이었다. 1575년 볼로냐에서 태어난 귀도 레니는 9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20살 때는 카라치의 화실에 나갔고, 안니발 카라치(Annibale Carracci)가 세상을 떴을 때 그 화실의 수장이 되었다. 그에게 스물 중반의 로마 여행이 그의 예술 세계를 결정지은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주로 종교적이거나 신화적인 소재/주제에 많은 노력과 열정을 기울였으며, 고전적인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우아하고 현대적인 화풍을 보여주었다.

성 세바스찬은 로마 황제 근위대 장교로, 그 당시 기독교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며 도리어 많은 이들을 개종시키기까지 했다. 그리고 결국 로마 황제에게 들키고 나무에 묶인 채로 화살을 맞았다. 하지만 한 순교자의 아내가 죽어가던 세바스찬을 다시 살려내어, 그는 다시 황제가 행하고 있던 기독교 박해의 부당함을 알리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는 그를 잡아, 로마 원형 경기장에서 채찍질로 그를 죽인다. 죽은 후 그는 한 부인의 꿈에 나타나, 자신을 찾아 지금의 성 세바스티아누스 성당 자리 근처의 지하 묘지에 매장해달라고 부탁하였다고 한다. 이후 680년경 로마에 페스트가 창궐하자, 사람들은 세바스찬의 유해를 모시고 장렬한 행렬을 거행하여, 페스트가 사라졌다고 한다. 이 때부터 성 세바스찬은 페스트에 대한 수호성인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하지만 성 세바스찬을 둘러싼 이런 이야기를 귀도 레니의 작품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화살을 맞고 그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도리어 그의 작품이 가진 어떤 메시지를 반감시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화살이 깊숙하게 꽂힌 성 세바스찬의 육체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롭다. 도리어 화살은 육체의 아름다움을 대비를 통해 그 부각시키는 듯하다. 아름다운 남성의 육체는 어떤 관점에서 보자면 동성애적 분위기를 환기시키기까지 한다. 귀도 레니의 붓 끝에서 순교의 순간은 죽음과 무관한 어떤 아름다움으로 다시 태어난다. 매끈하고 우아한 성 세바스찬의 육체는 바로크 예술가들이 가지고 있던 육체에 대한 인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위를 향해 있는 시선은 신을 향한 갈구가 표현되어 있다. 초월적 세계에 대한 염원을 귀도 레니는 이러한 시선을 통해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염원으로 그칠 뿐, 우리가 이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건강하고 아름다운 육체를 가진 남성 앞에서 깊숙이 박힌 화살마저 무력하다는 것뿐일 지도 모른다. 기독교에서 소재를 가지고 왔으나, 귀도 레니의 세계 속에서는 종교에 대한 열정은 꺼져가는 불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꺼져가고 있음을 느낀 귀도 레니는 저 갈구하는 듯한 눈빛으로, 그 시대에 다시 신의 영광이 도래하길 염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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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세바스찬(St. Sebastian)
Oil on canvas, 146 x 113 cm
Genoa, Palazzo Rosso
1615-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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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세바스찬(St. Sebastian)
Oil on canvas,170  x 133 cm
Prado Museum, Madrid
1630년대 초반

 
* 얼마 전에 관람했던 비엔나미술사박물관 전시에서의 '참회하는 베드로'에서도 귀도 레니 특유의 표현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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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주의와 낭만주의


고전주의란 나와 세계, 이상과 현실이 서로 어긋나지 않으며 내가 원하는 바, 내가 행동하는 바 모든 것이 인과율적 결과로 나타난다고 믿는 세계관이다. 이에 반해 낭만주의란 나와 세계, 이상과 현실이 서로 어긋나 분열되기 시작하고 내가 원하는 바, 내가 행동하는 바와 무관하게, 심지어 반대의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을 때, 그 앞에 서서 절망하는 세계관이다. 그러므로 낭만주의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해선 고전주의가 우리에게 무엇이며 어떤 것을 가져다 주었는가를 먼저 알아야만 한다.


고전주의적 세계관이 개인에게, 예술가에게 무엇을 던져주었는가를 알지 못한다면 낭만주의의 세계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분열적 세계 인식, 절망과 슬픔으로 뒤범벅이 된 표현, 종종 병적으로 보이는 도피적 양식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얼치기 낭만주의자들은 아름다운 사랑의 낭만 따위나 읊어대는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에게 있어 사랑이란 잡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의 환상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즉 현실에서 자신이 원하는 바, 그 어떤 사랑을 구할 수 없다는 상황 인식을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고전주의가 생에 대한 확신을 기반하고 있다면 낭만주의는 그 확신이 무너지는 시기의 양식이다. 그러고 보면 고전주의 시기는 언제나 선행하는 무질서를 전제로 하고 있으며 동시에 고전주의가 끝나면 곧바로 무질서가 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르네상스 고전주의가 아주 짧은 시기, 그 절정기의 작품들을 보여주고 난 다음 매너리즘 양식이라고 하는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작품들이 나타난다. 우습게도 이러한 작품들을 그린 화가들 중에 절정기 르네상스의 위대한 예술가인 미켈란젤로와 티치아노도 포함된다.


매너리즘(Mannerism, Mnierismo)의 시대


우리가 이탈리아 르네상스라고 이야기할 때 대체로 종교개혁 이전의 이탈리아를 뜻한다. 그러므로 이탈리아 르네상스라고 이야기했을 때, 13세기의 초기 르네상스부터 16세기 매너리즘까지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16세기 중반 이후부터 이탈리아는 그 당시까지 누려오던 어떤 주도권을 잃어버리기 시작한다. 예술 작품들의 성격, 또는 양식의 변화가 정치경제적 환경의 변화에 전적인 영향을 받아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기에는 예외적인 경우가 예술의 역사 속에서 빈번하기 때문에 함부로 주장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매너리즘 시기의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선 이 당시 유럽의 격변을 이해해야만 한다. 초기 르네상스와 르네상스 고전주의가 눈에 보이는 세계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면 매너리즘은 이 확신과 자신감에서 후퇴하고 도피하는 양식이며 이는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전 유럽적인 상황이었다. 그래서 매너리즘 속에는 마키아벨리(Machiavelli, 1469~1527), 에라스무스(Erasmus, 1469~1536), 세르반테스(Cervantes, 1547~1616), 라블레(Rabelais, 1483~1553), 셰익스피어(Shakespeare, 1564~1616)가 포함된다. 어쩌면 폰토르모(Pontormo, 1494~1557), 파르미지아노(Parmigianino, 1503~1540),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 틴토레토(Tintoretto, 1518~1594), 브론지노(Bronzino, 1503~1572), 첼리니(Cellini, 1500~1571) 등과 같은 매너리즘 예술가들을 이해하기 위해 최초의 근대 소설이라고 일컫어지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Don Quixote)나 셰익스피어의 햄릿(Hamlet)을 읽는 것이 도움이 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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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eus
Benvenuto Cellini
Bronze, 1545-54
Loggia dei Lanzi, Florence



매너리즘 양식의 정신적 배경



아마 역사 속에서 매너리즘적 태도를 드러낸 시기가 있다면 로마 말기와 20세기 이후의 현대일 것이다. 아마 로마의 위대한 황제들 중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121~180)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학문을 좋아했으며 플라톤을 존경하였던 이 황제는 황제가 되고 난 다음의 인생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보였다. 그에게는 분명 어떤 정치 철학이나 로마 제국의 미래에 대한 구상이 있었을 지 모르지만, 불행하게도 그가 살았던 세계는 그의 그런 이상을 받아줄 수 없었다. 즉 이상과 현실의 분열이 극명하게 드러났던 시기였던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16세기, 진지하고 성실하며 때로 그 현명함으로 명성을 떨쳤던 이들은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절망하고 슬퍼하였다. 에라스무스는 이 시기의 대표적인 학자이면서 그가 남긴 <우신예찬>(愚神禮讚, Encomium Moriae)은 전형적인 매너리즘 작품에 속한다. 그는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종교 개혁 속에서 그 개혁이 가지고 있는 어떤 광신적 태도와 그것이 가져올 비극에 대해서 예리하게 지적하고 이에 대해 응수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의 현실은 너무 거대해서 현자의 명성을 가지고 있었던 에라스무스마저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명성을 가지고 있지도 못했던 예술가들은 어떠했을까.


가끔 자기 환상을 가지게 된다. 가령 '지금은 보잘 것 없는 월급을 받는 회사원이지만, 나중에 사업을 해서 성공할 수 있을 꺼야. 그래서 지금의 나는 미래의 성공한 나를 만드는 계단이야'라고 말이다. 하지만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고전주의자들의 세계 속에서 이러한 생각은 어떤 자신감과 확신에 근거하였고 이를 밀어 부쳤다. 하지만 매너리즘의 세계 속에서 이러한 생각은 보기 싫은 현실을 잊기 위해 미래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즉 감당하기 힘든 현실 속에서 하루하루의 생을 지탱하기 위해 자기 환상을 만들어낸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그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슬픈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다.


십대나 이십대, 또는 더 나이든 이들이 대중 스타에 대해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이들을 따라다니는 것은 이러한 자기 환상, 내지 자기 기만적 의식에 근거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에게 있어 미남 영화배우나 미녀 가수와 찍은 한 장의 사진만으로도 한동안 자기 인생의 의미를 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고전주의자들이라면 확고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자신의 진지한 사고, 성실한 행동이 자기 인생의 의미를 구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면 현대에서는 대중 스타와 찍은 한 장의 사진만으로도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즉 내일이 오늘보다 못할 수도 있다는 인식은 매너리즘 시대마다 공통적으로 상황인식이었다.


고딕 시대에 신과 인간의 분열이 시작되었다면 르네상스 시대에는 인간 속에서 신적인 것을 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르네상스 고전주의에서 그 믿음을 실현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매너리즘에서는 '인간 속에서 신적인 것을 구할 수 없구나'는 인식이 시작된다. 눈 앞에 보이는 현실 세계는 너무 혼란스럽고 불투명하기 때문이었다.


'분열'이 낭만주의의 핵심 단어라면 '자기 기만'은 매너리즘 시기의 핵심단어이다. 그리고 이것은 곧바로 자기 분열, 내지 자아 분열로 연결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현실 세계 속에서는 '마키아벨리즘'으로 보여진다.



현실 정치(Realpolitik)의 시대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세상을 저렇게도 아름답게 볼 수 있구나'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이 있다. 동시에 '아냐, 조금만 눈을 더 크게 뜨고 바라봐. 그럼 세상이 아름답다는 걸 알 수 있을 꺼야'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똑같은 시대의 사람들이고 똑같은 정신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즉 불투명하고 혼란스러운 현실을 보기 위해 어떤 이데올로기, 즉 관념적 허상을 끊임없이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현실에 대한 비극적 인식이 비극적 인식으로만 귀결된다면 그 속에는 죽음만 있을 뿐, 그 이상의 것은 없다. 그 속에서는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비극적 인식이 있으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눈에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움직임이 있으며 끊임없이 갈등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 때 우리가 바라보고 읽어내는 이 세계가 관념적 허상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한 부류를 만나게 되고 이 세계의 관념적 허상을 공고히 하고 세계는 아름다워 라고 말하고 행동하는 한 부류를 만나게 된다. 전자가 매너리즘 시기의 예술가들이라면 후자는 매너리즘 시기의 현실 정치가들과 이들을 옹호했던 지지자들이었다. 그리고 전자의 부류들은 끊임없이 후자의 부류들이 가진 허위와 기만을 폭로하려 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君主論, II Principe)은 16세기 현실정치의 세계를 그대로 반영한 작품이다. 이제 고귀한 이상 같은 것은 없다. 신은 이미 사라졌고 눈 앞에는 현실만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현실 속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그 방법을 자연과학적 태도로 기술해 나가기 시작한다. 이제 악덕도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 더러운 모략과 비열한 술수도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되었다. 마키아벨리의 세계가 매너리즘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는 자신이 속한 세계를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그 세계가 가진 부도덕성과 허위를 폭로하는 것이다. 그래서 후대의 몇몇 학자들은 '전도(顚倒)된 이상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매너리즘 예술가들과 양식적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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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ta Rondanini
Michelangelo
Marble, height: 195 cm, 1552-64
Castello Sforzesco, Milan



우리는 과연 원근법적으로 세계를 파악할 수 있을까. 그래서 멀리 있는 것이나 가까이 있는 것이나, 또는 중앙에 있는 것이나 가에 있는 것이나 상관없이 모든 것에 대해 존재 의의를 부여할 수 있고 이를 일관된 어떤 원리로 담아낼 수 있을까.


르네상스 고전주의 시기의 위대한 예술가였던 미켈란젤로는 말년에는 의문스러운 일련의 작품들을 만든다. <최후의 심판>이라는 벽화가 그러했고 저 <론다니니의 피에타>도 그러했다. 그래서 저 작품을 미완성된 작품이라고 추정하기도 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이들 중에서도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완성이라기 보다는 미켈란젤로의 생각대로 만든 것이며 도리어 이제서야 그 자신만의 정직한 시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의심 많고 소문에 휩싸인 신비로운 천재이면서 끊임없이 내적 불안과 신을 향한 정열으로 고통스러워 했던 미켈란젤로는, 현대의 우리들이 가지는 천재에 대한 이미지를 그대로 그러낸 예술가였다. 아마 이러한 미켈란젤로에 버금가는 이가 있다면 유일하게 모차르트(Mozart, 1756~1791)일 것이다. 그래서 미켈란젤로는 생애 내내 매너리즘적 세계 속에서 살아가면서 젊었을 때는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확고한 신념과 열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세계에 대 경험이 쌓여갈수록 그냥 그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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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Judgment
Michelangelo
Fresco, 1370 x 1220 cm, 1537-41
Cappella Sistina, Vatican



'진실'이라는 단어만큼 이 시기의 예술가들에게 호소력 있는 것도 없었을 것이다. 이제 아름다움은 진부한 주제가 되었다. 아름답지 않더라도 모양새가 기괴하더라도 색채가 이상하더라도 그것이 바라보는 바 진실한 것이라면 그것은 감동적이고 호소력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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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onna dal Collo Lungo (Madonna with Long Neck)
Parmigianino (1503~1540)
Oil on panel, 216 x 132 cm, 1534-40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바로크(Baroque) 시기 이후의 화가들과 학자들이 경멸했던 양식이 바로 매너리즘이었고 이 같은 작품들이었다. 이제 세계는 이상해졌다. 신체의 비례는 이상해졌고 표정은 공허하며 색채는 몽환적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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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itation
Jacopo Pontormo
Oil on wood, 202 x 156 cm, 1528-29
San Michele, Carmignano (Florence)



폰토르모의 저 그림 속에서의 표정만큼 공허한 표정도 드물 것이다. 저들이 응시하는 곳은 과연 어디일까. 자 이제 자연 세계에 구하는 기하학적인 원리는 무너지고 우리의 관념, 또는 정신 속에서 어떤 원리, 어떤 이상을 구하는 시기로 들어선 것이다. '자의적 양식'이란 이럴 때 사용될 수 있다. 경험적이고 객관적 세계에 대한 바램이 어긋나자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세계를 우리들의 정신 속에서 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만은 도리어 슬프고 우울하며 끝없이 비극적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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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ast Supper
Tintoretto
Oil on canvas, 365 x 568 cm, 1592-94
S. Giorgio Maggiore, Venice



틴토레토의 의도는 다분히 '자연과학'적이다. 그가 생각하게 최후의 만찬은 이러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 자리는 우아하지도 고귀하지도 않을 것이다. 실내는 좀 어두웠을 것이고 사람들의 옷차림새는 남루했을 것이며 음식들은 여기저기 나뒹굴고 심지어 불결하기까지 했을 것이라고. 현실을 현실 그대로 파악한다는 자연과학적 태도가 도리어 매너리즘적 세계를 그러내는 것이다. 즉 매너리즘의 예술가들은 르네상스 고전주의의 태도가 진실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말년의 티치아노도 매너리즘적 양식을 보여준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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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laying of Marsyas
Tiziano
Oil on canvas, 212 x 207 cm, 1575-76
State Museum, Kromeriz


아마 매너리즘 예술가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가 있다면 바로 엘 그레코일 것이다. 엘 그레코에게도 오면 매너리즘의 양식이 그 절정기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귀족 양식으로서 매너리즘은 그 세계를 극복하고 현실에 기반하고 있으면서 그것을 넘어서 다분히 감정적이면서도 끊임없이 상상력을 자극하는 양식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엘 그레코의 작품에서의 이상한 공간감이나 불균형, 비현실적인 분위기는 도리어 실제 현실을 극복하게 하는 어떤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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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ieta (The Lamentation of Christ)
El Greco
Tempera on panel. 29 x 20 cm, 1571-76
Philadelphia Museum of Art, Philadelph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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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isrobing of Christ
El Greco
Oil on canvas, 165 x 99 cm, 1583-84
Alte Pinakothek, Munich



대중문화적 매너리즘 예술



자기 기만과 허위만큼 매너리즘 예술가를 괴롭혔던 것도 없다. 이 속에서 몇 매너리즘 예술가들은 매우 불행했다. 미켈란젤로의 말년이 그러했던 것처럼 빠르미지아노나 폰토르모가 그러했다. 그리고 몇몇은 귀족의 후원을 받지 않으면서도 위대한 작품들을 남겼으며, 예술의 자율성은 고스란히 예술가 개인 속으로 수렴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는 현실정치의 시기였으며 고귀한 정신이나 선한 마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시기였다. 루터의 종교 개혁이 뭔가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권력에 눈이 먼 루터는 독일의 평민들을 거부하였고 권력을 가진 실세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시기였다. 그래서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예술가들이 있었고 이제 예술은 오직 유흥을 위해서만 제작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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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nus, Cupide and the Time (Allegory of Lust)
Agnolo Bronzino
Oil on wood, 147 x 117 cm, 1540-45
National Gallery, London



많은 책에서 이 작품의 속 뜻이 무엇인가 분석하고 있다. 중앙의 비너스와 그 옆의 큐피드는 근친상간적 소재라는 것에 시작하는 이런 분석에 대해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이 무척 많을 것이다. 실은 파르미지아노의 <긴 목의 마리아>도 그런 분석이 가능하다. 파르미지아노는 심각할 정도로 연금술에 미쳐있었고 그것을 배경으로 그 작품을 분석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이들 화가들은 이런 분석이 가능할 정도로 작품 속에서 이러한 소재나 주제를 공공연히 사용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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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er
Giuseppe Arcimboldo (1527~1593)
Oil on canvas, 76 x 63,5 cm, 1573
Musee du Louvre, Paris



아킴볼도의 작품으로 오면 그 도를 지나쳐 매너리즘적 허위 속에서 뒹굴뒹굴거리는 양식과 마주하게 된다. 즉 이제 예술은 고귀한 이상이나 감동, 한 시대에 대한 통찰과는 무관하게 속된 재미나 자신이 봉사하고 있는 귀족이 좋아하는 것만으로 그려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꼭 하이틴로맨스 소설이 세계에서 가장 감동적인 문학작품이 되는 어떤 이들이 있는 것처럼 이 시기에도 그런 예술작품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현실에 안주한다는 것은 이런 뜻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 세계를 하나의 원리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비극적 상황 인식은 도리어 하루하루의 변명을 만들어내고 하루하루의 변명 속에서 사소한 재미나 쾌락에 가치를 부여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마 대중문화, 또는 키치(kitsch)라고 하는 것의 기원을 구한다면 매너리즘 시기의 예술 작품에서 구해야만 할 것이다. 매너리즘을 도피적 양식이라고 했을 때 이 속에는 이러한 의미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바라보기 싫은 현실을 잊기 위해 환상을 만들어내는 양식 말이다. 정직한 매너리즘 예술가들은 그 환상과 싸우기도 했지만, 종종 그 환상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예술가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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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0.02 01:44

    비밀댓글입니다

    • 특별하게 참고한 책은 없습니다. 한창 책을 쓰고 공부하던 때라 수업 노트, 스터디 노트 등이 전부입니다.(참고문헌을 적는다면 엄청 많을 지도 모르겠네요) ^^;; 다만 한글로 구할 수 있는 책 중, 매너리즘에 대한 연구서로는 아놀드 하우저의 <<예술과 소외>>라는 책이 있습니다만, 지금은 헌책으로도 구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 외 16세기 지성사나 문화사 책이 도움이 될 것같네요. (또는 지성사나 문화사의 16세기 부분) .. : )

  • 2014.10.13 17:47

    비밀댓글입니다

  • 2014.10.13 18:36

    비밀댓글입니다

* 2004년에 작성하였던 글입니다. 로코로 예술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크와 로코코

바로크 양식은 카톨릭과 귀족을 위한 양식이었다. 바로크의 웅장하고 거대한 양식은 카톨릭과 귀족을 위한 것이지 개신교와 시민계급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네덜란드의 화가들의 작품은 상대적으로 소박한 느낌을 풍긴다. 그러나 이도 자기 과시적이며 은근히 귀족과 경쟁하는 구도로 발전한 양식이라는 점에서 카톨릭적이며 궁정적 바로크와 동일한 예술 의욕(kunstwollen)을 가진다. 즉 바로크는 귀족과 돈 많은 시민계급을 위한 양식이었다. 그리고 17세기 네덜란드는 당시 유럽의 패권국가였다. 이런 점에서 로코코는 분명 바로크와는 다른 성격을 가진다.

대체로 로코코는 귀족의 양식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데카르트적 시각이 지속된다는 점에서 바로크의 후기 양식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전적으로 18세기라는, 17세기와는 사뭇 다른 시대의 산물이다. 그것은 귀족의 시대가 아닌 부르주아 계급이 지배하는 시대의 산물이며 더 이상 기독교가 그간 누려오던 호소력을 잃어버리는 시대의 양식이며 그래서 17세기 바로크 양식이 가지고 있었던 장엄하고 격정적인 느낌을 잃어버리고 우아하고 친근한 느낌으로 변화하게 된다. 그래서 바로크 화가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격정적이며 진지했던 양식은 티에폴로처럼 가볍고 우아하며 밝은 색채로 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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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Investiture of Herold as Duke of Franconia
Giambattista Tiepolo, 1751
Fresco, 400 x 500 cm Imperial Hall of the Residenz, Wurzburg



티에폴로의 운동감은 바로크의 연속이지만, 그 공간과 색채는 로코코 양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더구나 그가 공간을 구성할 때, 그 공간이 아름다운 꿈 속처럼 화려하고 자극적일 때, 그래서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일 때, 이는 프랑스 로코코 화가들인 와토나 프라고나르와 공유했던 그런 양식이었다. 이런 이유로 바로크와의 연속을 강조할 때 로코코는 후기 바로크 양식으로 이해되며 로코코만의 특징을 강조할 때는 바로크와는 개별적인 양식으로 이해된다. 그렇기 때문에 로코코 양식을 이해하기 위해선 17세기와 다른 18세기만의 독자적인 성격을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성이라는 이름의 빛

시기적으로 로코코는 루이 15세의 통치기간인 1715년부터 1774년과 겹친다. 이 시기는 유럽의 역사에서 무척 흥미로운 시기이다. 루소의 시대이면서 와토의 시대이기도 한 이 시대는 태양왕 루이 14세의 절대왕정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시기이며 귀족과 시민계급의 갈등이 본격화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기독교가 이전의 호소력을 상실하기 시작하는 시기이며 17세기의 근대적 세계관이 일반 대중에게까지 확대되는 시기이다.

즉, 이성의 발명은 17세기의 소산이지만, 이성의 적용과 확장은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몫이었다. 그리고 그 귀결은 프랑스 대혁명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이성의 적용과 확장은 바로크부터 이어져온 자신감의 연속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등장하는 시민-부르주아의 자신감이었다. 아니 근대를 추동하였던 인과율적이며 기계론적인 이 정신이 드디어 시민-부르주아 계급이라는 정당한 주인을 만난 셈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진전과 정치적 상황 변화가 긴밀하게 연결되어있으며 이러한 변화가 지역적 특성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무혈 혁명으로 정치 개혁을 지속하였던 영국에서는 전통적인 지배계급인 토지귀족이 자연스럽게 상업과 산업에 종사하였지만, 프랑스에서는 토지귀족이 몰락하고 도시의 자본가들이 등장하는 변혁기를 거치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등장했던 로코코 양식은 유럽 대륙에서는 몰락하는 귀족 양식이었고 영국에서는 농업에서 상업, 산업으로 옮겨간 귀족의 양식이 되었다. 이러한 로코코 양식의 철학적 반영은 장 자끄 루소이다. 그리고 이 계몽주의 사상가의 영향력은 로코코에서 시작해서 신고전주의를 거쳐 낭만주의까지 이어진다. 그만큼 루소의 사상이 여러 갈래로 펼쳐져 있으며 한 부분에서는 미래에 대한 낙관적 시각이 있다면 한 부분에서는 미래에 대한 암울한 시각이 존재하는 것이다. 낭만주의적 양식으로서 로코코 양식은 유미주의적이며 16세기 매너리즘 화가들이 그랬듯이 도피적이며 몽환적이다. 그리고 루소의 생각처럼 '문명적 인간이란 하나의 퇴화 현상이고 문명화의 전 역사란 인간운명의 배반'이라는 생각을 로코코의 예술가들이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모짜르트의 종교적 주제를 다룬 음악들이 한결같이 종교와는 무관한 어떤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종교가 그 호소력을 잃어가며 왕과 귀족의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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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lgrimage to Cythera
Antoine Watteau, 1717
Oil on canvas,129 x 194 cm
Charlottenburg Palace, Berlin

그래서 와토의 저 작품 속에서의 귀족들은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는 듯이 보이는 것일까. 그것도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 행복과 쾌락을 쥘 수 있는 이상향으로.

상업자본주의에서의 산업자본주의로

근대(Modern)란, '자본가들의 생산에 의해 제어되는 시공간'을 의미한다. 17세기는 근대의 기계론 체계가 만들어졌다면 18세기는 이 체계가 사회 전반에 뿌리내리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자본주의 형태도 변화시키는데, 17세기가 식민지 경제에 의존하여 원격지 무역을 중심으로 운영되던 상업자본주의라면, 그래서 수요자가 항상 공급자의 상황에 따라 영향을 받았던 자본주의였다면, 18세기는 이러한 영향을 극복하기 위해 수요자와 공급자를 일치시킬 수 있는, 산업 시설에 기반을 둔 산업자본주의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변화는 바로크 시대의 사람들이 가졌던 풍요로운 자신감을 계급적 갈등으로 변모시킨다. 그리고 갈등은 토지 귀족과 시민계급 간의 갈등으로 표면화된다. 즉 18세기의 미국독립전쟁이나 프랑스 대혁명은 독자적인 정치 혁명이 아니라 산업혁명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영국에서는 이러한 갈등이 표면화되지 않고 도리어 버크의 보수주의가 등장하게 되는 건, 미국이라는 원격지를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산업혁명과 무혈정치혁명으로 통해 기존의 토지 귀족들이 자연스럽게 산업자본주의의 지배계급으로 이행되었기 때문이고 군주와 의회와 공존하는 정치 시스템을 잘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국의 특수성이 영국의 보수주의를 가져왔고 동시에 대륙의 우울하고 슬픈 로코코 양식 대신 소박하며 가볍고 산뜻한 느낌의 로코코 양식을 가져오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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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 and Mrs. Andrews
Thomas Gainsborough, 1750
Oil on canvas
National Gallery at 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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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dy Sunderlin
Sir Joshua Reynolds, 1786
Oil on canvas, 236 x 145 cm
Staatliche Museen, Berlin


토마스 게인즈버러와 조슈아 레이놀즈는 그 당시 영국 로코코의 대표적인 두 화가였으며 중세 이후 최초로 등장한 영국 화파를 형성하였다. 그만큼 영국인들의 자신감이 묻어 나오는 것일까. 이들이 그렸던 인물들의 표정에서 그 당시 자본주의를 선도하고 있었던 영국인들의 자부심이 보이는 듯하다. 이러한 자부심은 낭만주의 시대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몇몇 예술사가들은 로코코, 신고전주의, 낭만주의를 거치는 동안 영국 예술사들의 정신은 공통적인 기반 위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공통적인 기반이란, 사유 재산을 옹호하기 위한 경험론 철학과 보수주의이며 산업혁명과 귀족-부르주아 계급이었다. 그리고 낭만주의 후기에 가서는 이러한 기반은 위선적이며 기만적인 양식으로 향한다.

사적인 공간의 부각

18세기에 두드러진 현상 중의 하나가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의 구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르네상스 이후로 지속되어 온 개인주의의 심화에서 부분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런 표현보다는 합리적이며 기계론적인 자본주의의 심화에서 기인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그리고 이러한 구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분리로, 단절로 이어지며 프랑스 대혁명 이후 본격화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시장이라는 공간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대의 어느 사회학자가 지적하듯이 18세기 도시의 시장은 중세 후기나 르네상스 시대의 시장과 같지 않았다. 드디어 자유경쟁시장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의 시장처럼 화폐에 의해 움직이며 서로의 관심을 끌기 위해 서로 경쟁하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화폐경제가 본격화되기 시작하는 18세기 공적 삶의 패턴이 합리화되면 될수록 공적 사회의 비인격화는 가속되는 것이다.

이때 두드러지는 것이 사적 삶, 사적인 공간의 부각이다. 즉 근대 기계론이 공적인 삶을 지배하게 될 때, 공적인 삶이 비인격화될 때, 도리어 개인이 속해있던 가족, 또는 집안의 삶이 부각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각은 귀족과 시민계급에게서 다르게 나타난다. 그래서 귀족의 개인적인 관심사에 대한 몰두와 시민계급의 몰두는 양식적으로는 동일한 형태로 나타나지만, 귀족의 경우 자신들의 시대가 몰락하고 있다는 것을 애써 외면하려고 했던 것이며 시민계급의 경우에는 자신의 도덕과 생활이 귀족의 그것보다 낫다는 주의주장으로 표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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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oilet of Venus
Francois Boucher, 1751
Oil on canvas, 108,3 x 85,1 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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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wn Odalisk
Francois Boucher,1745
Oil on canvas
Musee du Louvre, Paris

사적인 공간 속에서 두드러지는 것이 감정적인 친근함이며 이를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우아한 에로티시즘이었다. 그래서 로코코 예술에서의 여성은 어머니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연인으로서의 여성이며 섹스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프랑소와 부셰의 우아한 색채와 내밀한 느낌의 인물들은 이런 로코코 예술에서의 여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으며 이러한 여성이 존재하는 곳은 몰락하는 귀족이 소유하고 있었던 대저택 깊숙한 곳의 침실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요즘의 우리가 어디 먼 관광지에 놀러가서 밤 늦게 유흥을 즐기고 잠들었다가, 커튼이 쳐져 있는 침실에서 화창한 일요일 오전 감미로운 새소리와 따사로운 햇살에 잠을 깨었을 때 느낄 수 있는 종류의 어떤 감정이었다. 이렇듯 귀족을 위해 그림을 그리던 몇몇 로코코 예술가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작품은 자신들의 시대가 저물어가는 세상의 번잡하고 혼란스러운 것들을 잊고 감미롭고 달콤한 한 순간을 잡아내기 위한 것이며 그것을 향해 더욱 몰두하는 쾌락적이며 감각적인 것에 호소하는 양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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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roken Jug
Jean-Baptiste Greuze, 1785
Oil on canvas, 110 x 85 cm
Musee du Louvre,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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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Village Betrothal
Jean-Baptiste Greuze, 1761
Oil on canvas, 91.4 x 118.1 cm
Musee du Louvre, Paris

하지만 그뢰즈에게 있어 이러한 에로티시즘은 다른 방식으로 보여진다. 계몽주의적이며 부르주아 시민계급의 이데올로기에 공감하고 있었던 그뢰즈에게 있어 로코코의 에로티시즘은 부르주아 계급들의 도덕적 위상과 검소함을 반영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그뢰즈의 여성은 에로틱하지만, 사치스럽지 않고, 유혹하지만 그것을 노골화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여성은 일을 하고 있거나 도시의 여느 시민 계급의 가정 속에 위치해 있는다. 이러한 그뢰즈의 특징으로 인해 몇몇 예술사가들은 그를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분류하지만, 양식상 그는 로코코에 속하며 단지 계몽주의의 영향권 속에서 로코코 양식으로 부르주아 계급을 대변했을 뿐이다.

18세기의, 그리고 로코코 시대의 이러한 사적 공간의 부각은 건축의 안과 밖에 사치스러운 장식미로 반영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종종 우리가 로코코라는 단어를 보게 되면 바로 회화나 음악을 떠올리지 않고 가구나 실내 장식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건물의 장엄하고 거대한 바로크적 외형이 중요해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건물 안이, 방 안의 장식이나 가구가 중요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실내 장식이 건물의 외관까지 장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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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otel de Soubise a Paris (1735-1740)


유미주의

로코코 예술가들 중에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화가인 장 안트완 와또는 생애 대부분을 비극적으로 보냈다는 점에서, 몰락하는 한 시대를, 그리고 그 시대가 꿈 속으로 도망치고 있다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시대의 위대한 예술가들과 비슷한 위치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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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tes Venitiennes
Antoine Watteau, 1718-19
Oil on canvas, 56 x 46 cm
National Gallery of Scotland, Edinbur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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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zzetin
Antoine Watteau, 1717-19
Oil on canvas, 55,2 x 43,2 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페뜨 갈랑뜨(fete galante, 우아한 연회)라는 단어는 장 안트완 와토에게서 유래하며 로코코 예술이 이야기할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단어이다. 그리고 이 단어는 이후 랑크레와 같은 화가에게 이어져, 하나의 독립적인 미술 경향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와토와 이후 화가들과의 본질적인 차이점은 화려하고 흥겨운 연회 속에서 비극적 결말을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화사하고 우아한 색채와 율동을 가진 와토의 작품들 속에서 인물들의 얼굴 표정, 그들이 바라보는 배경,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감싸는 것이 몰락하는 한 시대를 예감하는 멜랑콜리, 즉 우울함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시대가 어떤 시대로 넘어갈 때, 전 시대를 지배하고 있던 가치나 세계관이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한다고 직감할 때, 그래서 그것을 잊기 위해 쾌락의 꿈 속으로 도망치기 시작할 때, 나타나는 우울함인 셈이다. 이러한 우울함이 음악으로 옮겨갈 때 모짜르트의 음악이 나오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로코코 양식은 본질적으로 유미주의 양식들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이 세계의 모든 것은 예술적이고 감각적인 쾌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태도의 반영이며 객관적 세계의 존재 유/무는 오직 가상적 세계에 달려있다는 절망적 세계 인식의 예술의 반영이었던 셈이다.

그리하여 로코코 시대의 예술가들은 현실 대신 꿈을, 공적 공간 대신 사적 공간을, 모험보다는 안주를, 순간적인 쾌락에 자신을 내맡기게 된다. 그리고 로코코 시대를 살았던 귀족들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영국에서는 급격한 보수주의로, 대륙에서는 비참한 몰락을 맞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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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wing
Jean-Honore Fragonard, 1767
Oil on canvas, 81 x 64 cm
Wallace Collection, London


부르주아의 시대

부르주아의 시대임을 알 수 있는 것은 네덜란드의 시민적 바로크 화가들에게서도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이는 네덜란드의 특수성에서 기인한 것이었고 전유럽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오면 이 상황은 전유럽적인 상황이 되며 귀족과 시민계급간의 갈등이 본격화된다. 귀족이 이러한 갈등을 애써 외면하면서, 또는 갈등을 느낄 수 조차 없이 자신들의 내밀한 사적인 꿈과 쾌락의 공간 속으로 물러났다면 도리어 시민계급은 자신들의 도덕적 가치의 우위를 공공연히 내세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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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turn from the Market
Jean-Baptiste-Simeon Chardin, 1739
Oil on canvas
Musee du Louvre,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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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ean Diet" with Cooking Utensils
Jean-Baptiste-Simeon Chardin, 1731
Oil on canvas, 33 x 41 cm
Musee du Louvre, Paris

사르댕의 정물은 바로크의 바니타스 정물화의 연장이면서 보다 직접적으로 도덕적 가치를 부각시킨다. 즉 바로크의 정물은 시민계급에게만 해당되는 어떤 도덕을 내세우지 않았다면 샤르댕의 정물은 부르주아의 세계의 가치가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샤르댕은 그뢰즈와 같은 위치에 놓이며 프랑스 대혁명을 예감케 하는 화가이다.

영국에서도 이러한 태도를 가진 예술가가 있었는데, 그는 윌리엄 호가스였다. 윌리엄 호가스는 부르주아의 계급의 도덕, 동시에 산업자본주의 사회의 도덕을 고스란히 작품으로 남겼다. 그는 일련의 도덕극 시리즈를 만들었고 당시 부르조아 시민 계급의 도덕에 위배되는 행동들에 대해서 비판적 시각을 감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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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Election Entertainment
William Hogarth, 1754
Oil on canvas, 100 x 127 cm
Sir John Soane's Museum, 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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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을 내기 전 정리한 노트입니다. 몇 년이 지났는데, 이 때 이후 열심히 공부하질 못했네요.


자본주의의 시대

예술 작품을 이야기하는 데, 뜬금없이 '자본주의의 시대'라는 소제목이 의아스러울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시대'라는 문구만큼 적절한 것을 찾지 못했다. 19세기 초 낭만주의자들이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 멀리 도망치길 원했다면, 그래서 어떤 환상이나 몽상적 세계를 꿈꾸었다면, 19세기 중반의 낭만주의자들은 현실과 싸워 세계의 진보를 이루려고 했다. 이것이 발자크의 세계관이다. 다시 세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 그것은 과학기술의 진보를 믿는 부르주아의 세계관이기도 하다. 산업혁명의 물결이 전 유럽을 휩쓸고 지나가던 시기의 부르주아의 세계관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심화로 인해 19세기 중반 이후 농촌에서의 삶이란 불가능했고 모두 도시로 나오기 시작했다. 빈부 격차는 매우 심각한 수준으로 변해갔으며 이 때 마르크스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라는 구호를 외치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 세계의 격변이 준비되고 있는 동안 예술은 도리어 퇴폐적이며 시대착오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낭만주의 양식인 라파엘 전파나 프랑스의 아카데미 화가들은 이러한 시대착오적 예술 양식을 그대로 드러내어 주고 있다. 도시가 삶의 중심이 되고 계급 갈등이 심화되는 시기에 혁명의 어두운 기억 속을 헤매고 있는 낭만주의 양식과 아카데미 미술은 적절하게 19세기 중반 이후의 유럽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등장한 쿠르베의 작품은 당시 미술에 큰 충격을 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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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Burial at Ornans
Gustave Courbet
1849-50; Oil on canvas, 314 x 663 cm (10" 3 1/2" x 21' 9"); Musee d'Orsay, Paris


"나는 천사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천사를 그릴 수 없다"라는 쿠르베의 말은 그의 태도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 그릴 수 있다는 신념으로 카라바지오가 보여주었던 바의 그 바로크적 자연주의를 다시 한 번 보여준다. 그는 이러한 신념을 '사실주의(realism)'-다소 그 정의가 애매한-이라고 적었다. '오를레앙의 장례'는 쿠르베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그림은 다소 어둡고 분위기는 침울하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린다는 태도'는 당시 유럽의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이들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제 세계는 낭만주의적 색채를 잃어버리고 우리가 살고 있던 현대적 감수성으로 넘어오게 된다. 그것의 귀결이 허무주의이더라도 그것이 등장했을 19세기 중반에는 하나의 혁명이었고 진보였다.


허위와의 전쟁

우리는 진실에 얼마나 많은 관심이 있을까? 글쎄, 나는 여기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다. 좀 과격하게 말하자면 모든 진실은 자기자신의 변명이나 합리화를 위해서 존재할 뿐, 실제 있는 그대로의 진실에는 아무런 관심에도 없었다. 이러한 태도는 19세기 중후반 대도시에 살아가던 부르주아의 일반적인 태도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기에 그들을 위해서 좋은 것이 '진실'로 여겨지고 있었다. 윌리엄 부게로 같은 아카데미 미술가들이나 라파엘 전파 같은 미술가들은 이러한 진실을 위해 자신들의 노력을 바쳤다. 그들에게는 칼 마르크스나 찰스 다윈이 이야기한 세계 인식의 극적인 변화를 인식할 여유도 인식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종종 요즘을 살아가는 우리가 더 큰 변혁기에 놓여있지 않나 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20세기, 21세기는 19세기의 연속일 뿐이다. 19세기적 삶의 방식이 그대로 21세기 초까지 이어진다. 아직까지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계급갈등이 유효하며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아직까지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교과서에 싣는 문제를 가지고 종교계가 반발하는 일이 종종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니 19세기 이 두 명의 학자가 말한 바 진실이 당시 사회의 근간부터 흔들어놓았음을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마르크스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물질적 기반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우리의 의식은 계급적 상황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간의 계급 구분이 뚜렷해지고 계급적 자각이 시작된다. 하지만 동시에 '물질적 기반에서 그 어느 것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그의 유물론적 태도는 당시 진보적인 지식인과 예술가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러한 유물론적 태도는 자신들의 계급적 한계를 뚜렷하게 성찰하게 만들었고 동시에 자신들의 허위 의식을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이런 점에서 찰스 다윈은 마르크스의 영향력보다 더 큰 영향력을 미쳤다. 그의 생각,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환경에 적응한 강한 종만이 진화하여 살아남는다는 진화론은 모든 이론에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진화의 개념은 근대 기계론과 합쳐져 '진화론적 진보주의'로 변화한다. 그리고 낭만주의 시대부터 그 힘을 뚜렷하게 잃어가던 기독교의 세계를 일거에 날려버린다. 즉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라는 생각을 없애고 인간도 진화의 산물이며 인간의 조상은 원숭이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나 찰스 다윈의 세계는 진보적인 지식인의 세계이지, 일반 대중의 세계는 아니다. 그것이 아무리 진실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지라도 삶에 안정적이고 물질적 기여를 할 때에만 채용되는 것이다. 그래서 19세기의 세계는 거친 정쟁(政爭)의 세계이며 끊임없는 허위와의 전쟁을 수행하던 세계였다. 이 때 마네는 <풀밭 위의 점심식사>로 부르주아 세계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드디어 부르주아 계급의 허위 의식과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자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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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Dejeuner sur L'Herbe
Edouard Manet, 1863
Oil on canvas
214 x 269 cm (84 1/4 x 106 1/4")
Musee d'Orsay, Paris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마네의 의도는 그가 바라보는 세상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데에 있었다. 그에게는 가치 판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 존재하는 세계를 어떻게 그대로 보여줄 것인가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쿠르베의 그것이면서 인상주의자들의 그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불경스럽고 지저분한 작품으로 인식되었다. 왜냐면 비도덕적인 주제를 담고 있기 때문에, 기존의 가치로는 수용하기 힘든 주제이기 때문에. 그것은 예술은 도덕적 이념이나 가치를 재현해야 된다는, 그래서 실제 일어나는 일이 아닌 일어나야만 할 일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어떤 이념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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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fifre (The Fifer)
Edouard Manet, 1866
Oil on canvas, 160 x 98 cm (63 x 38 5/8 in); Mus? d'Orsay, Paris


이러한 마네의 태도는 위의 작품으로 이어진다. 그는 이 작품에서 인상주의적인 평면화의 경향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원근법으로 대표되던 르네상스 이후의 환영주의이나 눈속임(Trompe de l'oeil) 경향이 뚜렷하게 후퇴하고 색채로만 이루어진 평면적인 양식이 두드러지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당시 유행하던 일본 판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인물과 인물을 둘러싼 배경 사이에는 검은 선으로 구획되어 있다. 특히 신발의 처리는 매우 독특하다. 이는 실제 모습을 재현했다기 보다는 회화적 특징을 위해 새롭게 그려진 것으로, 이제 현실의 재현을 희생하고 회화적 효과에만 치중하는 방향 전환이 천천히 진행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제 회화는 원근법주의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평면화이며 탈가치화이고 반원근법주의이다. 드디어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esse est percipi'를 그대로 실현하기 시작한다.

예술 의욕과 기술

인상주의는 기존의 모든 예술 양식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예술을 이끈다. 그리고 현대 미술의 추상과 기하학주의가 바로 이 인상주의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현대 미술을 이야기하기 위해선 언제나 인상주의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사진과 인상주의의 관계는, 흔히들 사진과 경쟁하기 위해, 또는 사진을 극복하기 위해 인상주의 양식이 등장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하자면, 예술 의욕(kunstwollen)와 기술(technique)과의 관계이다. 예술에 있어 어떤 기술이나 기법은 예술 의욕에 의해 채용되는 것이지, 새로운 기술이나 기법의 등장이 예술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이렇게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사회 전반적인 어떤 변화가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양식을 요청하게 되는 것이고 이러한 예술 의욕의 변화로 인해 새로운 기법이나 기술이 채택되는 것이라고.

그런 점에서 보자면 사진과 인상주의는 동일한 예술 의욕을 가진다. 둘 다 모든 사물을 풍경화시키는 양식이며 도시적 양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자는 환영주의에 기반하고 있다면, 그래서 현대로 올수록 이러한 환영주의를 극복하려는 사진가들의 노력이 집중되는데, 후자는 그 시작부터 환영주의를 극복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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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pression, soleil levant (Impression, Sunrise)
Claud Monet, 1873
Oil on canvas, 48 x 63 cm (19 x 24 3/8"); Musee Marmottan, Paris

모네의 의도는 분명하다. 그의 기본 가정은 '자연은 변화한다'이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것은 '변화의 한 순간'일 뿐이다. 그 순간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적인 것이며 전적으로 자신의 감각 지각을 통해 들어오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그것을 그대로 캔버스로 옮길 뿐이다. 이렇게 인상주의는 시작한다.


인상주의: 반원근법주의

존재의 세계에서 생성의 세계로, 원근법주의에서 반원근법주의로, 일원론에서 다원론으로, 중심화에서 탈중심화로, 탈가치화로, 그리하여 감각지각에만 의존한 어떤 평면주의로. 인상주의가 예술의 세계에 끼친 영향은 그 이전 세계와는 전적으로 다른 방향의 제시였고 예술의 역사에서 가장 큰 전환이었고 혁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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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cathedrale de Rouen, le portail, temps gris (Rouen Cathedral, the West Portal, Dull Weather) dated 1894, painted 1892 ; Oil on canvas, 100 x 65 cm (39 3/8 x 25 5/8 in); Musee d'Orsay, Paris


인상주의 예술가들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이가 바로 모네이다. 모네는 일련의 연작을 통해 시시각각 변하는 대상을 포착하려는 노력을 보인다. 루앵 대성당 시리즈도 그러한 연작물들 중의 하나이다. 색들로만 이루어진 이 작품을 뚜렷하게 보려면 약간 거리를 두면 해결된다. 그러니깐 멀어질수록 대상은 뚜렷해지고 명확해진다. 시지각에 충실한 작품들이 보이는 경향이다. 하지만 작품은 평면화되어 있고 캔버스의 중앙이나 가장자리나 똑 같은 색들의 연속처럼 보인다.

연속되어 흘러가는 색채는 르누와르에게서도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그래서 인물마저도, 뚜렷하고 확고한 이념을 주장하던 양식에서 풍경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풍경화가 호소력이 있게 다가온 것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누군가의 내면 세계를 알 수는 없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것을 꿈꾸는지, 그러나 우리는 그 누군가를 재현할 수는 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이 때 모든 인물들은 풍경 속에 파묻혀 하나의 풍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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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Terrace
Renoir, 1881
Oil on canvas
39 1/2 x 31 7/8" (100.5 x 81 cm)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인물이 하나의 풍경이 된 상황은 결과적으로 20세기의 예술 양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인간주의나 반지성주의로 이어진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이제 풍경화가 예술 장르에서 뚜렷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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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ance Examination,
Edgar Degas,
pastel, Denver Art Museum.

드가는 이러한 풍경 속에서도 운동에 매혹된 화가이다. 그래서 그가 발레를 대상을 그렸을 때에는 움직이는 대상을 움직이지 않는 선과 색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고전주의적 요구에 충실하였다. 이런 이유로 드가를 인상주의 예술가들 중에서도 '데생화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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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e de Paris, temps de pluie; Intersection de la Rue de Turin et de la Rue de Moscou
Gustav Gailleboote, 1877; Paris: A Rainy Day depicts an area of the Batignolles quarter.
Oil on canvas, 212.2 x 276.2 cm (83 1/2 x 108 3/4");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part of the Charles H and Mary F.s. Worcester Fund

인상주의는 현대 도시의 양식이다. 도시 문명이 가져다 준 여러 문화를 그대로 옮기는 양식인 셈이다. 이에 많은 예술가들이 동조하였고 이러한 이념을 전파시켰다. 카보유트의 작품은 도시의 한 모습을 그대로 옮긴다. 하지만 모든 인물은 풍경이 되었고 보들레르가 말한 바 있는 '산책자(Flaneur)'나 '현대성은 지나가는 것, 일시적인 것, 우연적인 것으로서 이것이 예술의 절반이며, 또 다른 예술의 절반은 바로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이다. 과거의 모든 예술가에게는 현대성이 있었으며, 이전 시대에도 유지되었던 아름다운 그림의 대부분을 보면 거기에 서술된 것은 바로 그 시대적 의상을 입고 있다'라고 이야기했을 때, 바로 인상주의 예술을 지칭하는 것이 된다.


세잔의 모더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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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t Sainte-Victoire Seen from Les Lauves
1904-06 ; Oil on canvas, 66 x 81.5 cm (26 x 32 1/8 in); Private collection, Switzerland; Venturi no. 802


인상주의 초기부터 세잔은 참여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인상주의와는 다른 방향으로 자신의 양식을 발전시킨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움직이는 것들의 규칙이었고 기하학이었다. 그는 인상주의에 충실하면서도 변화하지 않는 어떤 것을 찾아낸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생 빅투와르 산 연작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는 감각 지각에 의해 인식되는 것들,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 속에서 어떤 확신을 구하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그의 양식은 입체감이 두드러지는 기하학주의로 흐른다. 이러한 그의 방향은 20세기 초의 현대 미술을 결정짓는다. 추상미술은 세잔 이후에 본격화된다.

하지만 이러한 세잔의 작업은 현실 속에서, 삶 속에서 어떤 확신을 구할 수 없다는 절박한 인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있다. 인상주의자들이 인물을 풍경 속에 가두었을 땐 인간에 대한 혐오가 밑에 깔려있는 것이라면, 세잔이 자연 풍경 속에서 기하학을 발견해내는 것은 적대적 세계라는 신석기 시대에 나타난 바 있는 기하학주의의 반복인 셈이다. 그리하여 신석기 시대 이후로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기하학과 추상의 세계가 20세기 예술을 물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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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잔에 대해 잘 보았습니다.
    입체파의 그림처럼 풍경이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는 입체일테니까...
    더 사실적인 것일텐데 낯설군요..

    (세잔의 그림을 보면서 이런 말이 성립하는지도 의심스럽네요)

    • 세잔의 고전적 화풍은 이전의 고전적 화풍과는 본질적으로 틀립니다. '내면의 고전주의'라고 할까요. 우리 마음 속의 고전주의적 기반(기하학적인 원천)을 찾아갑니다. 이는 20세기 초반의 고전적 모더니스트들에 의해서 끊임없이 실험된 것이기도 합니다. 의식의 흐름이라든가, 말레비치의 절대주의나 피카소의 입체파나 칸딘스키같은 추상표현주의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나타납니다. 단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겠죠.

      '입체'라는 단어보다 '기하학적'라는 단어가 세잔에게 더 어울릴 지도 모르겠네요. 세잔의 문제의식은 세계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는 기하학적 요소로 환원될 수 있다고 보았으니깐요. 삼각형, 사각형 같은.

  • (잘 읽었습니다. 구체적인 표현은 아니지만 가슴에는 와 닫네요.
    세잔느의 경지라고 할까요.기학학적 표현말이에요. 그것을 이해 못해서 오히려 낯설게 느껴진다는 말이었습니다.)

    입체가 기하학적 요소에 포함되기 때문에 입체라는 표현이 부족하다는 것은 알겠는데 기하학적 요소에서 사각형은 넣고 원기둥과 같은 입체를 제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네요. 세잔느를 큐비즘, 입체파로 분류하는 것도 보았으니까요.

* 2004년에 작성된 글입니다. 지금 읽어보니, 내용이 다소 빈약하네요.


로마네스크 예술 양식 시기의 도시

Romanesque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고대 로마의 세계에 대한 염원을 밑바탕에 깔고 진행된 것이 로마네스크 예술이다. 카롤링조 르네상스의 기운이 지속되어 꽃을 피운 양식인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양식 상의 변화는 중세 장원 경제가 원숙해졌으며 중세 도시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한 것과도 무관치 않다. 생 세르냉 교회는 그 이전 시기에 서로마 지역에 건설된 어떤 중세 교회보다 크고 웅장하다. 그만큼 많은 건설자재에 대한 교역이 가능해졌으며 많은 인부들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는 점을 뜻한다.


이러한 물질적인 기반의 확충, 또는 세속적 삶의 윤택함은 중세 도시들의 발달을 가져온다. 이제 세속세계에 그 뿌리를 내린 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고딕 예술 양식의 배경


양식 상 로마네스크와 고딕은 그 유사함으로 인해 같은 기반에서 진행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그렇게 이해하지만 이는 그릇된 이해이다. 즉 우리는 로마네스크 예술을 현대적(modern) 양식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고딕 예술은 최초의 현대적 양식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현대 예술 속에서도 고딕 예술적인 분위기를 발견할 수 있다. 문제는 이를 이해하기 위한 다른 이야기를 해야 된다는 점에 있다.


확실히 플라톤의 철학은 종교적인 분위기가 풍긴다. 인간은 이데아 세계에서 추방된 존재이며 이데아 세계를 염원하지만 닿을 수 없다는 것만큼 기독교적인 테마가 어디에 있었을까. 아우구스티누스의 교부철학은 중세 예술 전반을 물들이는 정신적 기반임에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12세기에 들어서면 달라지기 시작한다. 플라톤의 철학이 그 호소력을 잃어버리기 시작하며 아리스토텔레스가 호소력 있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바탕으로 스콜라철학을, 그의 <<신학대전>>을 완성하지만, 상대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반종교적이며 심지어 세속적이고 이교도적이었다. 그리고 이때 유명론이 종교적이며 지적인 세계를 흔든다. 즉 보편적인 개념은 실상은 텅 빈 것이고 개별만이 있을 뿐이라는 생각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배격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제 경험적 세계가 중요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는 고딕 예술 양식을 설명하기 위해 생 드니 성당이나 사르트르 성당, 또는 밀라노의 두오모 성당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아벨라르두스라는 종교적 삶을 실천하려는 수도사이면서 동시에 엘로이즈를 사랑하는, 그래서 밤에 혼자 앉아 그녀를 향해 연애편지를 쓰는 유명론 학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즉 종교적 삶과 세속적 삶이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러한 갈등은 스콜라 철학에서 나타나는 이중적 진리관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하나는 신적인 진리관이며 하나는 세속적이며 경험적인 진리관이다. 하나는 계시된 것이며 하나는 하나하나 경험을 통해 터득해나가는 것이다. 하나는 무한자의 세계이며 하나는 유한자의 세계이다. 그리고 고딕 예술 양식은 이러한 두 개의 진리 위에서 하나의 양식으로 통합하려는 열망 속에서 꽃피는 예술 양식인 셈이다.


고딕 예술 양식의 성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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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ilique Saint-Denis(생 드니 성당)
West facade. Added by Abbot Suger. About 1136-40.
(Photo by Yasuhiko Nishiga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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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terior: North view. (Photo by Taji Takahiro)


예술 양식들 중에서 분명하게 그 시작 년도를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양식이 고딕 예술 양식인데, 최초의 고딕 성당이 바로 생 드니 성당이었다. 이후 샤르트르 성당에서 화려한 고딕 양식의 전형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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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
샤르트르 성당


늑골궁륭과 공중 부벽은 고딕 성당의 수직성을 가능케 한 건축기술이었다. 그러나 건축기술이 있었기 때문에 고딕 성당의 첨탑이 이루진 것이 아니라 높이 세우려는 고딕 시대 사람들의 열망, 즉 예술 의욕(Kunstwollen)이 그 기술을 선택한 것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에서는 하나의 세계관이 지배하고 있었다면 고딕 양식에서는 두 개의 세계관이 서로 만나고 있다. 하지만 이 만남은 조화로운 만남이 아니라 어딘가 이상하고 분열적이며 서로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갈등 때문이었을까. 고딕 성당의 부조는 천천히 밖으로 튀어나와 건물에 분리된 듯하고 조각처럼 보인다. 즉 경험적 세계를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성당을 구성하고 있는 하나하나의 것들에 기울이는 관심이 확연히 높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심의 증대는 예술 양식에 있어서 자연주의와 개인주의의 심화와 그 궤를 같이 한다.


그러나 고딕 성당은 어딘가 경련적이며 표현주의적이다. 로마네스크 양식과 비교해 확실하게 세련되어졌고 자연스러워졌지만, 어딘가 이상하다. 두오모 성당은 최근까지 건설이 진행된 성당이다. 아니 계속 건설을 진행시킬 수 있는 성당이다. 실제 대부분의 고딕 성당은 계속 확장시킬 수 있는 양식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하나하나 모든 것이 중요해지고 가치 있게 변하게 되었다.


회화 양식에서도 풍경이 등장하게 된다. 경험적 세계의 중요성은 이런 식으로 천천히 예술 양식 속에 반영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곧장 15세기의 얀 반 아이크의 치밀한 관찰주의로 연결된다. 즉 하나하나 모든 것들이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하나 세밀하게 표현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고딕과 르네상스를 급격한 단절로 이해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고딕과 르네상스는 하나의 흐름 속에 놓이는 예술 양식인 셈이다.



분열적 세계의 도래


아벨라르두스가 종교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세속의 사랑을 소중하게 여겼듯이 이제 신은 멀리 있게 되고 세속의 세계가, 경험적 세계가 사람들 앞에 놓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경험적 세계관의 등장은 도리어 사람들은 혼란에 빠뜨리고 삶에 대한 공포를 느끼게 만들었던 건 아니었을까.


가령 어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신의 뜻이었는데, 오늘 문득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에서는 신의 뜻이 아닌 것들도 있다고 깨닫게 될 때, 그러나 그 뜻이 무슨 의미인지, 어떤 논리를 기반하고 있는지 알지 못할 때, 어제 세상은 신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해명되었지만 오늘 신의 이름으로도 해명되지 않는 그 어떤 것이 나타나게 될 때,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하루 아침에 신이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게 될 때, 거의 천 년 가까이 바로 옆에 있었던 어떤 세계가 사라지려고 할 때, 도리어 그 세계에 대한 염원을 더욱 강화하게 된다. 이런 측면에서 단테의 <신곡>은 확실히 고딕 예술 양식이다.


멀어져 가는 신의 세계를 애타게 부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험적 세계를 신적 질서 속으로 포섭하기 위한 열망은 세상에 대한 신비주의적 태도로 나타난다. 즉 모든 것 하나하나에 신의 흔적이 남아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철학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 기반해 있는 것이지만, 사랑에 빠진 남녀가 사랑의 흔적들 - 편지, 사진, 극장티켓 등 - 을 모아 그들의 사랑을 기록하여 사랑을 증명해내듯이 고딕 예술 양식 또한 하나하나 장식에 집착하면서 신을 향한 그들의 신앙을 증명해내는 듯하다. 우리는 이 때 신이 사라지는 시대, 어쩌면 그들은 신이 없음을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신을 부르짖을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고딕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적이며 경련적인 태도는 현대에까지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나타난다.


이렇게 신이 사라지자, 경험적 세계의 중요성이 부각되자, 세계는 급격하게 세속화된다. 그리고 이러한 세속화는 바로 르네상스의 기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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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늘 우리를 배반한다>를 쓰기 전에 적어놓은 노트입니다. 바로크 예술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1. 바로크: 근대성Modernity의 시작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를 어떤 세계일까? 그러나 이 물음에 대한 명확한 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꼭 이 물음은 '나는 누구인가?'라든가 '살아가는 것이란 무엇인가?' 따위의 물음과 유사한 것이다. 그래서 정확하게 맞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떤 특징을 부각시켜서 말하거나 아예 이 물음에 대한 답에는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너무 거대한 질문이라 실제 우리의 삶과는 무관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 본다면 상황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지금 이 세계에 대해서 자주 듣게 되는 단어들, 신자유주의, 개인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과 같은 것의 근원을 거슬러올라가다 보면 17세기 서구사회와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 17세기와 2004년과의 관계를 알기 위해,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와 같은 철학자가 구상하였고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 1598-1680), 카라바지오(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 비발디(Antonio Vivaldi, 1678-1741)와 같은 예술가들이 재현하였던 그 당시의 세계와의 관계를 알기 위해서 한적한 일요일 오후에 자동차를 타고 도시를 가로지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자동차를 타고 도로를 달리다 보면 몇 가지의 규칙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신호등이라는 교통시스템만 지키면 도로가 연결되어있는 원하는 목적지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이동 속에서 자동차 안과 밖은 명확하게 구분된 공간이라는 점. 밖이 아무리 춥더라도 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근대 최초의 기획들은 기계론이다. 인과율적 체계의 다른 말이기도 하며 근대 자본주의가 그 기틀을 명확히 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드디어 시계가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는 공간으로 진입한 것이다. 이제 세계는 기계론적 관점에서 시간과의 싸움에 몰입하기 시작한다. 이 때 미래는 그 의미를 가지기 시작한다.

하나의 질서가 있다. 그 질서는 신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신의 질서와 자연과학의 질서가 등가적 관계를 이루게 되고 이 사이를 예술가가 자리잡게 된다. 이것이 르네상스적 세계관이자 미학관이다. 그러나 르네상스적 세계관은 얼마 뒤 매너리즘적 세계관에게 자리를 내어주게 되는데, 우리들의 삶이나 현실은 신적이지도, 자연과학적이지도 않다는 인식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매너리즘에서는 나와 너, 이상과 현실, 어제와 오늘이 분열하게 된다. 고딕적 분열의 연장선상에 놓이면서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종종 겪게 되는 분열을 이미 매너리즘 시대의 예술가들은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이 분열은 바로크 시대에서 극적으로 해소된다. 그리고 그 해소의 방법은 생각하는 나를 중심으로, 이상 대신 현실을, 어제 대신 오늘, 그리고 내일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오늘날 우리가 이야기하는 근대성(Modernity)는 이 시대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인간적인 것이 가장 우선시되는 세계. 인간들이 만든 규칙이 신의 규칙과 똑 같은 위상과 가치를 지니게 되는 세계. 유한한 세계 속에서 무한한 가치를 가질 수 있는 세계. 아니 무한한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믿고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 세계. 이제 무한한 세계에 대한 탐구는 끝이 나고 유한한 세계에 대한 탐구가 시작된다. 드디어 세속적이며 경험적인 세계가 승리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바로크에 들어서 고딕적 분열 양상은 인간적이며 유한한 세계를 중심으로 해소되기 시작한다. 그것이 완전한 해소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살아가면서 별 불편함 없이 살아갈 수 있을 정도의 해소로도 바로크 예술가들은 만족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인간적이며 유한한 세계를 긍정하는 시대였다.

바로크는 절대왕정의 시대이면서 과학혁명의 시기요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의 시대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들의 시대이면서 우리들의 약점들이 무수한 장점들로 가려져있던 시대이기도 하다. 이 시대의 예술가들에는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 1567-1643), 바흐, 헨델(George Frederick Handel, 1685-1759), 카라바지오, 베르니니, 벨라스케즈(Diego Rodriguez de Silva Velazquez, 1599-1660),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 렘브란트, 베르미르(Jan Vermeer, 1632-1675), 푸생, 끌로드 로렌(Claude Lorrain, 1600-1682)이 속하며 셰익스피어의 몇몇 작품들과 라신느(Jean-Baptiste Racine, 1639-1699), 꼬르네이유(Pierre Corneille, 1606-1684), 몰리에르(Moliere, 1622-1673) 등의 프랑스의 극작가들, 그리고 존 밀턴(John Milton, 1608-1674), 존 던(John Donne, 1572-1631)이 여기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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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ne Descartes
Frans HALS, c. 1649
Oil on panel, 19 x 14 cm
Statens Museum for Kunst, Copenhagen


2. 무한한 우주 속의 유한한 인간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가 먼저 이야기했지만, 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1642)에 와서 비로소 논쟁거리가 된 '지동설'은 인간이,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변방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 당시 천문학의 발전은 이 우주에는 끝이 없으며 끝 없는 우주에서 인간은 그저 티끌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천동설의 세계 속에서 인간은 신(무한자)과 가까이 있었으며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었고 그것은 신으로부터 물려받은 인간의 가치를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동설의 세계 속에서 지구는 우주의 변방이며 인간은 신(무한자)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것이었다. 즉 드디어 인간은 신과 무관한 어떤 존재, 심지어 신에게서 버림받은 존재로 떨어지게 된다. 이는 파스칼에게서 두드러지며 바로크 양식의 어두운 그림자에 해당된다. 하지만 뉴턴(Isaac Newton, 1642-1727)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해내며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는 신대륙을 발견하고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나'의 확실성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서 티끌 같고 언젠가 죽어야만 하는 인간의 불안은 이 현실 세계 속에서 뭔가를 할 수 있고 알아낼 수 있다는 자신과 자만으로 변모한다. 이것은 정치 세계 속에서 나타나는데, 서구에서는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전제군주제가 확고하게 뿌리내리기 되었다는 점이다. 태양왕 루이 14세의 신화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 세계의 안정을 바탕으로 상업이 발달하였으며 많은 것을 포기한 구교와 경제적으로 적절한 지위를 부여 받은 개신교 사이의 분쟁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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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rait of Louis XIV
Hyacinthe Rigaud, 1701
Oil on canvas, 279 x 190 cm
Musee du Louvre, Paris



바로크의 세계는 유한한 인간이지만, 그 인간에 대한 무한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진행된 양식이다. 그래서 바로크의 회화 속에서는 '진리를 잡기 위해서 운동하는 나' 즉, 데카르트적 자아가 있으며 그 운동이 모아지는 빛나는 중심으로 삶의 격정, 활력이 흘러나온다. 드디어 어둠 속에 묻어두었던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적 세계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만물은 유전한다. 한 번 담근 강물에 두 번 다시 담글 수 없다. 그러나 바로크 시대를 살았던 이들은 한 번 담그는 그 강물 속에서 강물의 본질을 잡아낼 수도 있으리라는 신념을 가진다.


3. 정지에서 운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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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barkation of St Paula Romana at Ostia
Claude Lorrain, 1637-39
Oil on canvas, 211 x 145 cm
Museo del Prado, Madrid



움직이는 모든 것을 하나로 모아낼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는 것이 고전주의이다. 그것은 기하학적이며 무한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다. 변하는 모든 것이 변하지 않는 어떤 것으로 모아진다. 그래서 이 세계 속에서는 운동이나 생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크는 반대로 운동이나 생성 속에서 어떤 진리를 찾아낼 수 있다고 자신들의 생각을 전개시킨다.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다. 나는 지금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경험적 세계 속에서 나는 내 가치를 만들어나갈 것이다. 드디어 진리를 향한 삶의 성실성이 요구되기 시작한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것의 포기는 경험적 세계 속에 있는 유한한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바뀌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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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Matthew and the Angel
Caravaggio, 1602
Oil on canvas, 232 x 183 cm
Formerly Kaiser-Friedrich-Museum, Berlin
(* 현재는 소실되어 없으며 그 당시 불경하다는 비난을 받았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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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Inspiration of Saint Matthew
Caravaggio, 1602
Oil on canvas, 292 x 186 cm
Contarelli Chapel, San Luigi dei Francesi, Rome



하나는 교회로부터 거절당했으며 지금은 사라진 작품이고 하나는 교회에 걸렸고 아직까지 남아있는 작품이다. 카라바지오만큼 바로크 시대에 걸맞은 예술가도 드물 것이다. 그는 난봉꾼에 일자 무식에 매일 사고만 치는 건달이었지만, 그는 예술가였다. 드디어 지적 교양을 가진 예술가에서 지적 교양 없이도 예술 작품을 남기는 예술가의 시대로 변해온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적 영감을 중요시하는 일군의 예술가들은 바로 한 발짝이다.

르네상스 시대부터 시작된 자연과학적 태도는 신의 질서를 자연 속에서 파악할 수 있다는 신념에서 시작되었지만, 예술의 세계 속에서는 그 반대의 결과를 가지고 오게 된다. 매너리즘 예술가인 틴토레토의 <<최후의 만찬>>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모든 것을 하나하나 분석하는 이 태도는 실제 있었던 그것을 그대로 표현해내는 것으로 변화하였으며 바로크에 이르는 그 절정을 이룬다. 그래서 카라바지오의 세계에서 성 마태와 천사는 한 쌍의 연인처럼 붙어있는 것이다. 신의 진리를 알려고 노력하는 고독한 성인과 그 고독을 위로해주는 천사로 말이다. 하지만 카라바지오의 세계는 교회로부터도 거부당했고 그 당시의 일반 대중으로부터도 거부당했다. 아마 21세기에서도 카라바지오의 작품이 불경하다고 여기는 기독교도가 있을 것이니, 17세기 때의 기독교도라면 그 거부는 당연한 것이었으리라.


4. 경험적 세계 속으로

우리 앞에서 지금 두 개의 세계가 놓여있다. 하나는 기하학적이며 영원불멸하며 경건하고 신성한 신의 세계이며 하나는 경험적이며 유한하고 언젠가는 죽게 될 인간의 세속적 세계가 놓여있다. 하나는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의 세계이며 하나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세계이다. 하나는 정지된 공간의 세계이며 하나는 끊임없이 변화는 시간의 세계이다. 그리고 바로크는 전자보다는 후자에게 그 가치를 두는 양식이다.

베르니니에게 신과의 교감은 인간적인 그 어떤 것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즉 경험해보지 않은 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도리어 그의 경험이 신과의 교감과 비슷한 유형이었을 것이라고 믿게 되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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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cstasy of Saint Therese
Bernini, 1647-52
Marble Cappella Cornaro, Santa Maria della Vittoria, Rome
 


더 이상 인간적인 것은 수치이거나 불경한 것이 아니다. 도리어 인간적인 것이야말로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이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그것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 한 치의 주저함이나 물러남 없이 자신의 모습이 왜소해지고 얼굴에 주름살이 늘어나는 모습을 그대로 화폭에 옮긴다는 것. 이제서야 인간적인 것이 그 나름의 가치를 인정 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데카르트의 세계이면서 우리가 이야기하는 모더니티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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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f-Portrait
Rembrandt, 1627
Oil on wood, 23,5 x 17 cm
Staatliche Museen, Kas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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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f-Portrait
Rembrandt, 1668-69
Oil on canvas, 82,5 x 65 cm
Wallraf-Richartz Museum, Cologne
 



어쩌면 예수도 늙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북유럽 르네상스의 대가인 뒤러가 자신의 초상화에서 자신의 모습을 마치 예수처럼 그렸듯이 렘브란트는 그도 늙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이제 드디어 변화한다는 것이 가치를 가지기 시작한다. 변화는 운동이며 생성의 세계, 경험적 세계를 뜻한다. 그것은 현실이면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죽는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바로크 예술가들에게 이것은 훈장과도 같았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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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의 파사드
프란체스코 보로미니(Francesco Borromini, 1599-1667), 로마
 

건축에 도입된 유려한 곡선은 직선적인 느낌을 강조하던 이전의 건축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건축 속에서 도입된 이러한 운동감은 조각에서는 더욱 두드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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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ollo and Daphne
Bernini, 1622-25
Marble, height 243 cm
Galleria Borghese, Rome
 


조각에서 극적인 장면을 만들어내라고 한다면 베르니니만큼 잘 구현했을 만한 조각가도 없었을 것이다. 사랑에 빠진 아폴론과 이 사랑을 거부하는 다프네가 올리브 나무로 변해가는 순간을 표현한 이 조각에서 바로크 시대의 사랑을, 바로크적 비극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된다. 이제 드디어 언젠가는 헤어질 수 없는 사랑이 누군가의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사랑이 되는 것이다. 세속의 사랑이 주제가 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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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ady at the Virginals with a Gentleman
Vermeer, 1662-65
Oil on canvas, 73,3 x 64,5 cm
Buckingham Palace, London
 


한 여인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그 옆에 한 남자가 서서 그 음악 소리를 듣고 있다. 그는 가만히 서서 그녀가 연주하는 음악 속에 빠져있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녀에게서 그 사랑을 거절당하지 않을까. 이건 이 작품에 대한 추측이긴 하지만, 이제 세속의 사랑, 불경하면서 비도덕적인 사랑도 예술 작품의 소재나 주제가 되기 시작하였으며 종교적인 그림을 그려지는 작업실에서 동시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5. 두 개의 바로크들


매너리즘이 전유럽적 양식이었다면, 바로크는 그 지역마다 각기 다른 형태로 발전한 양식이다. 그래서 바로크는 양식 상으로는 지역에 따라 매우 이질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한 전시실에 나란히 푸생의 'Et in Arcadia Ego, 루벤스의 Raising of the Cross, 베르미르의 Woman Holding a Balance가 걸려있다면, 이 세 작품이 같은 시대의 양식이라고 설명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푸생은 확실히 고전적이다. 어떤 이는 푸생의 작품들을 두고 '바로크 고전주의'라고 말하기도 한다. 유한한 세계 속에서의 진리를 찾아낼 수 있다는, 그래서 끊임없이 운동하는 바로크적 신념은 진리를 찾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는 점에서 고전적이며 푸생은 소묘를 중요하게 생각하였으며 자신의 작품이 기하학적이길 원했다는 점에서 당시의 다른 화가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고전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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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 in Arcadia Ego
Poussin, 1637-39
Oil on canvas, 185 x 121 cm
Musee du Louvre, Paris
 

하지만 바로크는 고전주의가 될 수 없는 시대였다. 바로크의 예술가들이 잡으려고 노력했던 바 진리는 시간과 변화를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하학적이며 영원불변하는 진리관과는 다른 것이었다. Et in Arcadia Ego, 아르카디아 속에서도 나는 있다는 말은 우리가 꿈꾸는 이상향 속에서도 죽음은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깐 이상향 속에서도 시간이 흐르고 그래서 우리는 늙어 죽는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 작품 속에서 나오는 여인을 크로노스(시간의 여신)이라고 해석한다.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는 말은 죽음을 막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라는 말이기 보다는 언젠가는 죽을 것임을 알고 살아있는 동안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라는 것을 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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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ill-Life
Pieter Claesz, 1633
Oil on oakwood, 38 x 53 cm
Staatliche Kunstsammlungen, Kassel
 

푸생이 소묘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면 이에 비해 루벤스는 색채를 중요하게 여겼던 것같다. 이는 이후에 푸생주의와 루벤스주의의 대립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더욱 격정적이며 회화 속에서 바로크적 운동이 어떤 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격정적인 색채감은 와토나 부셰, 프라고나르 등의 로코코 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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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sing of the Cross
Rubens, 1610
Oil on panel, 460 x 340 cm (centre panel), 460 x 150 cm (wings)
O.-L. Vrouwekathedraal, Antwerp
 

루벤스가 궁정적 바로크의 대표적인 화가라면 렘브란트와 베르미르는 시민적 바로크의 대표적인 화가들이다. 특히 베르미르는 수수한 색채 속의 개신교적이며 시민적인 바로크를 보여준다. 네덜란드에서 유행했던 이러한 양식의 바로크는 개신교적 성격과 초기 자본주의 세계 속에서의 예술 양식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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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man Holding a Balance
Vermeer, 1662-63
Oil on canvas, 42,5 x 38 cm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네덜란드의 시민계급들이 좋아했던 것은 풍경화였다. 이러한 풍경화는 끌로드 로렌의 풍경화와는 틀리다. 이러한 풍경화 양식의 차이는 이탈리아와 네덜란드를 비교해보면서 확연히 드러난다. 이탈리아, 특히 베네치아의 풍경화는 화려하면서도 인상주의적 면모를 보여주지만, 네덜란드는 정적이면서 소박한다. 이러한 소박함은 인간적인 것에 대한 겸손으로 이어져 여러 바로크 정물화에서는 유한한 인간임을 인식하고 현실 세계에 보다 충실히 복무하라는 도덕적 메시지를 담게 된다. 또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사치품들을 정물화의 소재로 이용함으로써 동시에 현실 세계에서 축적한 부를 자랑하는 기회로 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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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dscape with a View of Haarlem
Ruisdael, 1670-75
Oil on canvas, 52 x 65 cm
Staatliche Museen, Ber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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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ecenas Presenting the Liberal Arts to Emperor Augustus
Giovanni Battista Tiepolo
1696-1770
Oil on canvas, 69.5*89 cm

http://www.hermitagemuseum.org/html_En/03/hm3_3_1h.html


이탈리아의 Francesco Algarotti 백작의 주문에 의해 그려진 이 작품은 Heinrich von Bruhl 백작을 기리기 위해 제작되었다. 이 작품 속에서 로마의 귀족이며 시인과 예술가를 보호하는데 앞장섰던 Maecenas가 Augustus 앞에서 자유학예(Liberal Arts)를 웅변하고 있다. 작품 가운데 있는 세 명의 여인은 각기 Painting, Sculpture, Architecture를 뜻한다.

러시아 상트 페테스부르크에 있는 The State Hermitage Museum에 보관되어 있는 이 작품으로 제작년도는 표시되어있지 않다. 좀 큰 이미지가 있다면 작품의 색상이나 스타일에 대해 자세히 볼 수 있을 텐데. 이럴 땐 정말 작품을 실제로 봐야하는데.

러시아에 있는 유명한 미술관, 박물관 정보를 정리해야겠다. 일정을 잡아 러시아 여행을 준비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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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ill-Life of Flowers, 1734
Oil on panel, 81*61cm
Private collection



Jan van Huysum의 작품이다. 시든 꽃은 보이지 않고 활짝, 금방이라도 꽃 향기가 그림 속에서 풍겨나올 듯한 생동감으로 가득차 있는 그림이다. 그러니 이런 작품을 두고 생의 허무를 노래하고 있다고 하면 어딘가 이상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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