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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책들의 우주/예술 +80


세계의 박물관 미술관 예술기행 - 유럽편 - 

차문성(지음), 책문(성안당), 2013년 초판/2015년 장정개정판 


좋은 책이다. 비전문가인 저자가 전문가가 되어간 과정이 녹아있다. 성실한 내용과 애정이 담긴 글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박물관학 석사 과정을 마쳤으나,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특히 유럽 주요 도시에서 가기 쉬운 미술관/박물관을 선정해 보여주었다는 점도 이 책이 꽤 실용적임을 증명한다. 


내가 이 책을 읽은 목적은 유럽의 여러 도시에 흩어진 미술관, 박물관에 대한 체계적인 정보를 얻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이 책은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대한 체계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책 제목 그대로 예술기행이다. 런던, 파리, 암스테르담, 프랑크푸르트, 생페테르부르그 등의 도시에 있는 미술관/박물관에 대한 소개와 그 곳에 대한 간단한 느낌이나 감상, 그리고 소장 전시되고 있는 주요 작품들에 대한 짧은 안내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 내 목적은 달성하지 못한 셈이다. 


하지만 매우 부러웠다. 한 달 이상 파리에 체류하면서, 일 드 프랑스와 생-제르맹 거리를 오가며, 갤러리에만 있었던 건 아닌가 후회를 한다. 누구나 다 가는 루브르와 오르세만 간 걸 이제서야 후회하다니. 다시 가게 되면 꽤 오래 머무르며 작품들을 보고 와야 겠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작품들 대부분은 이미 여러 미술 관련 서적에서 본 내용들인 탓에, 빠르게 읽었다. 서양미술의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꽤 도움이 될 내용이었다. 


대부분의 유럽 여행객들이 미술관 관람이 목적이 아닌 만큼, 이 책에서 언급된 도시에 가게 될 경우, 이 책은 꽤 유용할 수 있겠다. 



렘브란트, <예루살렘의 멸망을 탄식하는 예레미야>, 1630,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Rijksmuseum)


구약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그렸다. 렘브란트가 24세라는 젊은 나이에 이런 깊이를 가진 작품을 그렸다는 건 놀랍기만 하다. 아마 그만큼 신앙심이 깊었을 것이다. 예레미야의, 고통을 지긋이 누르며 곤혹스러워하는 얼굴 옆으로 불타는 예루살렘이 보인다. 바로크 특유의 명암법은 화면 전체를 감싼다. 한 쪽은 밝고 한 쪽은 어둡다. 하지만 밝은 쪽은 슬픔으로 가득하고 어둠 속으로는 절망감이 감돈다. 그리고 팔을 괴고 있는 모습 아래로 성경이 보이고 그 밑으로는 바빌론의 왕 느부갓네살로부터 받은 금은보화로 보이는 것들이 놓여져 있다. 전체적으로 사선으로 비스듬하게 기대고 있는 예레미야의 모습을 통해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바로크의 고민이 보인다. 확실하 바로크는 과거를 향하지 않는다. 미래로 열린 양식이다. 한 쪽은 밝고 한 쪽은 어둡다. 그러나 우리 시선은 어두운 쪽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 그래서 저 반짝이는 금속물질의 물건은 참 흥미롭기만 하다. 


이 책에선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을 소개하면서 이 작품을 언급했다. 위 설명은 내가 별도로 작성한 것이라 책 내용과는 다소 다를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두 작품이 눈에 들어왔는데, 마네의 베르트 모리조 초상화와 렘브란트의 위 작품이었다. 마네와 베르트 모리조의 관계에 대해선 다음에 한 번 언급하기로 하자. 혹자는 19세기 미술사 가장 아찔한 로맨스라고도 하니 말이다. 대체로 검증되지 않은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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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디컬 뮤지엄 - 동시대 미술관에서 무엇이 '동시대적'인가? 

클래어 비숍 Claire Bishop (지음), 구정연 외 (옮김), 현실문화 

(저자의  website: http://clairebishopresearch.blogspot.kr/)



지난 가을, 키아프(Korea International Art Fair)를 갔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달은, 차고, 이지러진다>> 전을 관람했다. 이 두 이벤트의 묘한 대비는 무척 흥미로웠고 나에게 고민거리를 던져주었지만, 그 뿐이었다. 키아프만 간 사람들과 국립현대미술관에만 간 사람들 사이의, 두 경향의 현대미술전시가 보여주는 간극이 메워지지 않을 듯 느껴졌다면, 심한 비약일까. 아트페어와 미술관의 전시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여기에서 같은 미술관 공간이라도 비엔날레같은 행사라면, 또 달라진다. 


이를테면 조르조 아감벤은 동시대를 시간적 파열temporal rupture에 근거한 상태로 상정하고, 이렇게 쓰고 있다. 동시대적임contemporariness은 "시차와 시대착오를 통해 시대에 들러붙음으로써 시대와 맺는 관계이다." 그리고 이같은 시기창조나 '시간의 차이'에 의해서만 자신이 사는 시대를 진정하게 응시할 수 있다. 그는 동시대적임을 "시대의 어둠에 시선을 고정하고" "펑크낼 수 밖에 없는 약속시간을 지키는 것"으로 묘사했다. 시대착오는 또한 이 문제와 씨름하는 몇 안 되는 미술사가 중의 한 명인 테리 스미스의 독해에도 스며들어 있다. 그는 동시대를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담론 모두의 반대편에 놓아야 한다고 설득력 있게 주장해 왔는데, 동시대가 이율배반과 비동시성의 특징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즉 전 지구적 통신 시스템의 확산과 소위 시장 논리의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동시적이고 양립할 수 없는 상이한 근대성의 공존, 여전히 진행 중인 사회적 불평등과 차이가 지속하고 있는 현상이 그것이라는 것이다.(30쪽 ~ 31쪽)



클레어 비숍은 동시대 미술이라는 단어에 주목하면서 '동시대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설명한다. 그리고 동시대 미술을 전시하는 공간으로서의 미술관을 이야기하고 그 역할에 주목한다. 


그들은 1퍼센트의 이름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현재 혹은 과거에) 주변화되고 열외로 취급되고 억압받은 구성원들의 관심사와 역사를 대변하고자 한다. [물론] 이 미술관들이 예술을 역사 일반에 예속시킨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보다는 시각생산물의 세계를 동원하여 예술이 역사의 바른 편에 서야 하는 필연성을 이끌어내고자 한다는 것이다. (11쪽) 


그리고 세 개의 미술관을 소개한다. 네덜란드 에이트호번의 반 아베 미술관, 마드리드의 레이나소피아 미술관, 슬로베니아 류블랴나의 메텔코바 동시대 미술관. 


이처럼 역사를 현재 지향적으로 접근하는 일은, 미래를 보는 시선으로 오늘을 이해하게 해주고, 국가적 자부심 또는 헤게모니가 아닌, 창조적인 질문과 문제 제기의 이름으로 말하는 능동적이고 역사적인 행위자로서 미술관을 다시 상상하게 한다. (...) 결과적으로 이 제안은 예술작품과 다큐멘터리 자료, 사본, 복원물을 끊임없이 병치함으로써 오브제를 탈물신화한다. 동시대적인 것은 시대구분이나 담론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역사 시기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 혹은 실천이 된다. (97쪽) 


미술이론 전문서적인 탓에 일반 독자에게 권할 성격의 책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우리는 미술관의 존재와 위상, 그리고 그 가치와 필요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대부분 공적 기금을 통해 운영되는 미술관들은 자주 논란에 휩싸인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이나 서울시립미술관이 그 예가 될 수 있겠다. 그리고 그 반대편의 리움미술관이나 일민미술관, 혹은 아트선재센터 등과 같이 기업들이 후원하는 미술관을 보면, 우리는 많은 것들을 고민해야만 할 것이다. 


실은 지방의 국공립미술관의 상황은 더 열악하다고 해야 한다. 이 점에서 열악하다는 말은 여러 뜻을 포함하고 있는데, 전시 기획도 어려울 뿐더러 막상 오픈하면 관람객들도 많지 않다. 아마 국공립미술관에 대한 예산 삭감 문제는 비단 우리나라 뿐 아니라 많은 서방 국가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점에서 클레어 비숍의 책은 동시대성이라는 관점에서 미술관에 대해 묻고 있지만, 이 질문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의 미술관에 대해 전반적으로 다시 묻게 된다. 


미술관계자에겐 일독을 권한다.  (그런데 현대미술이론 서적은 다 왜 이렇게 단어들을 어렵게 사용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철학책보다 더 어렵다고 느끼는 건 나만 그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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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양음악순례

서경식(지음), 한승동(옮김), 창비 



한국과 일본은 참 멀리 있구나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서경식 교수의 유년시절과 내 유년시절을 비교해 보며, 문화적 토양이 이토록 차이 났을까 싶었다, 일본과 한국이. 


내가 살았던 시골, 혹은 지방 소도시의 유년은, 쓸쓸한 오후의 먼지 묻은 햇살과 수평선이 보이지 않는 바다 풍경이 전부였다. 책 속에서 이야기되었던 윤이상 선생의 통영에서의 유년 시절은 내가 겪었던 유년 시절과도 달랐다. 그가 통영에서 살았던 당시(20세기 중반) 보고 들었을 전통 문화라는 것도 없었고 그렇다고 서양 신식 문화랄 것도 내 유년시절에는 없었다. 전통 문화와 신식 문화 사이에서 길게 획일화된 공교육과 책을 읽으면 안 되는 자율학습과 텔레비전, 라디오, 팝송이 있었다(이것들이 신식문화일지도 모르겠으나). 어쩌면 우리 세대는 진짜 팝 문화를 제대로 경험하고 자라났지만, 그게 과연 좋을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끔 학교 음악 시간에 클래식음악을 듣기도 한 것같으나, 그건 제대로 된 감상이라기보다는 꿈을 잃어가던 음악 선생님의 목소리 끝에 묻은 허전함과 마주하는 것이었다.


나에게 클래식 음악에 대해서 묻는다면, 내가 답할 수 있는 건 얼마 되지 않는다. 대학 시절 재즈 음악을 즐겨 듣다가, 클래식 음악을 듣기 시작한 건 서른 초반이었으니, 시간 상으로 불과 십년 남짓이고 이것도 그저 일년에 몇 장의 음반을 사는 것이 전부였으니, 믿을 수 없다. 지금은 몇몇 작곡가를 알고 그 중 몇몇은 아주 선호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클래식음악은 나와 꽤 멀리 있었던 존재였다. 그러니 뒤늦게 빠져든 이 취미를, 유년 시절부터 접해온 서경식 교수의 유년 시절은 너무 부러웠다. 그리고 지금도 유럽으로 연주회에 갈 수 있다는 여유는, 아마 그들 세대만이 가지는 어떤 것이 아닐까. '시간이 지날수록 나아진다'는 건 그저 과거의 통념일 뿐, 21세기 초에 어울리는 문구는 아니다. 문화의 빈곤과 그 격차는 더 심해지고 있다. 이제 원하는 음악을 유튜브와 같은 온라인 채널을 통해 들을 수 있지만, 접근의 편리함은 그 음악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책을 통해 나는, 무엇보다 윤이상 선생에 대해 알게 되었다. 서경식 교수의 개인적 삶 - 그는 한국 현대 정치로 인한 비극을 고스란히 안고 살아왔다 - 속에서 묻어나오는 고통과 회한, 그리고 그것을 이겨내기 위한 분투가 글 사이로 묻어나왔고 동시에 미래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으면서 세상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는 모습을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두 형, 서승서준식을 구하기 위해 그는 윤이상 선생을 여러 차례 만났지만, 윤이상 선생도 민주화된 고국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먼 타국에서 생을 마감했으니, ... 


<<나의 서양음악순례>>는 서양 음악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순례길일지도 모르겠다. 모차르트, 슈베르트, 말러를 지나 윤이상으로 이어지고 일본인 아내와 한국이 서로 만난다. 아픔은 음악이 되고 어느 새 아픔이 아문 자리만으로도 닥쳐올 불안에 대한 작은 위안이 된다. 책은 가볍지 않지만, 음악은 봄바람처럼 가볍게 날아와 우리 주위를 따뜻하게 비출 것이다. 


내년에는 루이제 린저가 쓴 <<상처입은 용>>을 구해 읽어야겠다. 윤이상 선생의 음악들도 챙겨 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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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클래식 Dear Classic 

김순배(지음), 책읽는수요일




저자는 피아니스트다. 그런데 내가 부끄러웠다. 나는 그녀처럼 쉽고 재미있게 글 쓰는 재주는 없는 것같다. 책을 펼치자마자 금세 빨려들어가, 책 중반을 읽고 있는 나를 보며, 클래식 음악을 이렇게 재미있게 풀어내는 저자가 부러웠다(그녀의 아버지는 김현승 시인이다. 시인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건 아닌지..)


내가 모르는 작곡가들과 그들의 음악, 그리고 내가 알고 있으나, 잘 알지 못했던 이들의 음악에 대해 저자는 부드러운 어조로, 깊이 있는 내용까지 언급하며 독자를 안내한다. (내가 얼마 전에 올린 '모차르트와 살리에르'도 이 책에서 읽은 바를 옮긴 것이다)



1966년 초연된 이 작품은 펜데레츠키 특유의 극단적인 실험기법으로 채워져 있었지만 청중은 강렬한 묘사와 극적인 표현이 주는 크나큰 충격을 체험합니다. 이 수난곡에는 무조성, 톤 클러스터, 음렬주의는 물론 소리 내지르기, 대사처럼 말하기, 중엉대기, 킥킥대기, 쉬쉬하기 등 다소 불온하고 이례적인 지시로 가득합니다. 

- 121쪽 


폴란드 출신의 작곡가인 펜데레츠키의 <성 누가 수난곡>에 대한 설명은, 마치 직접 듣는 것처럼 생생한다. 예전 펜데레츠키의 <히로시마 희생자에게 바치는 애가>는 들었으나, 그 땐 무심코 지나쳤는데 이 책에서 다시 펜데레츠키에 듣게 된다. 


아마 이 책의 좋은 점은 현대 작곡가들에게 인색하지 않다는 점이며, 저자의 편애가 들어가 있긴 하나, 몇몇 작품들에 대한 찬사일 것이다. 이런 찬사는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긴 하나, 비전문가인 나에겐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해준다. 


참고: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 '과거와 미래는 공존한다', 객석 2014년 1월 


베토벤 소나타는 일종의 통합 음악입니다. 그 안에는 목소리, 드라마, 심포니, 앙상블 등 모든 조합 가능한 음악적 요소가 진을 치고 있습니다. 

- 173쪽


저자는 베토벤 소나타에 높이 평가하며, 백건우의 연주를 최고로 쳤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베토벤 소나타를 들어야 하는 의무감같은 걸 느꼈다. 아, 그러나 백건우의 베토벤 소나타 전곡 연주집은 이미 품절이고, 중고가격이 어마어마하구나. 



'음악가 자신을 구원하고 마침내 음악 듣는 이들도 구원하는 클래식의 역사는 위로의 역사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라는 책 표지에 실린 메시지는 저자의 의견이겠지만, 나 또한 저 의견에 강력하게 동감한다. 자주 주위 사람들에게 책 읽기가 아닌 음악 듣기를 취미로 추천하는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음악만 집중해서 들었을 때의 위안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잘 알고 있다.  


예전엔 듣고 싶은 클래식 음악이 있어도 바로 듣지 못했다. 클래식 라디오 방송에 신청하거나, 음반 자료실이 있는 도서관에 가 헤드폰을 끼고 듣거나, 아니면 대형 레코드점에서 구입하는 것 밖에.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유튜브만 뒤지면, 웬만한 클래식 음악들은 다 있다. 얼마나 좋은가. 손쉽게 궁금한 음악을 찾아 들을 수 있으니. 그리고 마음만 먹는다면 작은 오디오 하나 사서 PC나 스마트폰에 연결해 보다 좋은 음질로 편하게 클래식 음악을 들을 수도 있으니. 만만치 않은 돈을 지불하며 미니 오디오를 구입해 듣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경제적인 가격의 오디오도 쉽게 구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은 읽기 위한 책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듣기 위한 책이다. 그리고 독자가 적극적으로 찾아 들으려고 할 때, 이 책은 더욱 가치를 발할 것이다. 


나는 지금 이 책에서 언급된 이삭 알베니즈의 <이베리아>를 듣고 있다.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알베니즈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음을 고백하면서. 그리고 메시앙도 이어 들을 것이다. 메시앙에 대해 나는 너무 소홀했다.  


"내 음악은 알 수 없는 향기, 쉴 새 없이 노래하는 새들, 교회 창문 스테인드 글라스의 음악, 다시 말하면 다채롭게 조용하고 보완하는 여러 빛깔, 즉 종교적 무지개"

- 올리비에 메시앙 (57쪽에서 재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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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도 이런 클래식에 대한 음악책도 한번쯤 읽어보고 싶은데 말이죠~ ^^ 막상 또 클래식을 들으면 잠오고 지겨워저셔... ㅋㅋ;;;

    • 피아노 소나타나 현악 협주곡 같은 음악부터 먼저 시작하시면 도움이 됩니다. 어느 정도 귀가 익숙해진 다음(들어도 졸리지 않은 상태 ^^)에는 좋아하는 작곡가가 생길 지도 몰라요. 클래식 음악 책을 읽는 것보다 음악에 익숙해지는 것이 더 좋아요. 실은 더 오래 걸리는 일이긴 하네요. 음악도, 미술도, ... 경험 쌓아 익숙해져야 하는 노고가 있어야 하니. 하지만 그게 익숙해지면 정말 많은 것들을 느끼며 즐겨워할 수 있을 겁니다. ~





그림을 본다는 것 Looking at pictures 

케네스 클라크Kenneth Clark(지음), 엄미정(옮김), 엑스오북스, 2012년 (원저는 1972년에 출판)






나는 그림이 주는 기쁨을 더 많이 더 오랫동안 느낄 수 있으려면 그림에 관해 배워야 한다고 믿는다. - 7쪽 



그림을 즐기기 위해선 배워야 한다고 케네스 클라크는 말한다. 우리가 뭔가 배울 땐, 성적 때문이 아니라 즐기기 위해서이다. 배움을 통해 우리는 세상의 비밀을 조금 더 알게 될 것이고, 과장해서 말하자면 세상은 빛으로 가득 찰 지도 모른다. 아마 중세를 지나 근대를 향해 가던 서유럽인들이 느꼈던 감정이 바로 이랬을 것이다. 배우고 알아가는 과정은 어두운 세계를 환하게 밝히는 것과 같다. 



우선 나는 그림을 하나의 전체로 바라본다. 그림을 보기 시작한 뒤 한참 후에야 나는 비로소 내가 의식하는 대상이 지닌 일반적 인상을 알아차리게 된다. 일반적 인상이란 색조와 부분, 형태와 색채의 관계에 좌우된다. 일반적 인상이 주는 충격은 즉각적이다. (...) 그러므로 최초의 충격 다음에는 그림의 부분 부분을 꼼꼼하게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색채는 조화로운지, 소묘는 대상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렸는지, 세부를 살펴보고 즐기라는 말이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화가가 의도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 8쪽 




하지만 즐기기 위해 배운다는 것이 우리들에게 낯선 건, 그만큼 배운다는 것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아온 탓일 게다. 의외로 미술에 대한 책은 잘 읽히지 않고, 잘 팔리지도 않는다. 갤러리가 많긴 하지만, 일반인들의 방문은 뜸하고, 전시를 열지만, 작품이 팔리지 않고 팔리지 않으니, 작품 가격은 비싸진다. 거기다 위작 논란까지. 그만큼 미술에 대한 진입 장벽은 높기만 하다. 그리고 현대 미술이든 고전 미술이든 다 어렵다고 여긴다. 심지어 현대 미술은 '난해한'이라는 수식어가 그냥 자연스럽게 붙어다닌다.


실은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도 어렵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이 책은 서구에선 중고등학생들이 읽는 책으로 알려져 있는데, 한국에선 대학생들도 어렵다고 하니, 한국 사람들의 책 읽기 수준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밖에.


이런 면에서 이 책도 어려울 지 모르겠다. 하지만 케네스 클라크는 읽는 이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그림을 보는 것의 의미를 새삼 물으며 서양미술의 역사에서 알아두어야만 할 예술가들과 대표작품을 다룬다. 초심자에겐 그림 보는 재미를, 이미 서양미술의 역사에 대해 이해를 갖진 사람들에겐 케네스 클라크만이 알려줄 수 있는 통찰이 흥미로울 것이다. 


책에선 더 많은 예술가들을 다루고 있으나, 여기서는 3명의 작가들에 대한 케네스 클라크의 생각을 옮겨본다. 



엘 그레코El Greco 



16세기 후반 최고의 작가는 단연코 엘 그레코다. 하지만 그는 수 백년 동안 잊혀져 있던 작가였다. 근대 시대의 매너리즘(마니에리스모) 양식에 대한 경멸은 16세기 후반 작가들의 무시와 천대로 이어졌다. 그리고 20세기 초 엘 그레코는 극적으로 부활한다. 


그럼에도 엘 그레코를 근대 회화의 선구자로 간주했던 1920년대의 비평가들은 옳았다. 첫번째는 엘 그레코가 비사실적인 두 양식, 곧 비잔틴과 마니에리스모 양식을 거치며 화가로서 입지를 다졌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형이상학적 사고 방식을 타고난 덕분에 고전주의적 전통의 주된 전제를 거부한 최초의 유럽화가였기 때문이다. 엘 그레코는 화면의 깊이보다 표면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 151쪽 



엘 그레코,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The Disrobing of Christ)

Oil on canvas, Height: 285 cm (112.2 in). Width: 173 cm (68.1 in). 

1577 ~ 1579, 톨레도 대성당 



표면을 중시했다는 표현과 함께 엘 그레코가 "미켈란젤로는 훌륭하지만 그림 그리는 법을 모른다"라고 말했다는 건 참 흥미롭다. 깊이 대신 표면을 중시할 때, 고전적 원근법적 세계는 흔들린다. 중심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균등해진다. 확고한 질서 대신 흔들리는 마음이 전면에 부상한다. 그래서 엘 그레코의 성상화들이 우리 마음을 울리는 것이다. 십자가 앞에서 흔들리는 마음을 엘 그레코는 알고 있었다. 



장 앙트완 와토Jean-Antoine Watteau





장 앙트완 와토(Jean-Antoine Watteau), 제르생의 간판(The Shop Sign of Gersaint)

Oil on canvas, 163 cm × 308 cm (64 in × 121 in)

1720-1, Charlottenburg Palace, Berlin

이미지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L%27Enseigne_de_Gersaint 



신고전주의가 자크 루이 다비드라는 걸출한 천재가 만든 양식이라고 한다면, 회화에서의 로코코 양식은 장 앙트완 와토의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와토의 이미저리는 그가 처음으로 전시했던 그림부터 유행하기 시작해 향후 100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심지어 와토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 후에 태어난 후배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1732 - 1806)는 여전히 와토의 정원, 말하자면 그의 이미저리를 활용했다. - 127쪽 



와토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우울해진다. 절반은 포기하고, 절반은 포기한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노는 것같다고 할까. 그 애상은 로코코 시대 전반을 물들였다. 한 시대(토지 귀족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부르조아지의 시대)가 오고 있었다. 계몽주의와 로코코는 같은 시대의 양식이다. '제르생의 간판'은 와토가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새삼 느끼게 해줄 것이다. 위키피디아 링크를 타고 들어가면 작품의 디테일을 확인할 수 있다. 




들라크루아 Eugène Delacroix




Eugène Delacroix, The Entry of the Crusaders into Constantinople 

oil on canvas, 81 × 99 cm (31.9 × 39 in)

루브르 박물관 

이미지출처: https://fr.wikipedia.org/wiki/Entr%C3%A9e_des_Crois%C3%A9s_%C3%A0_Constantinople 




오히려 그는 예술은 상상력을 비추어 사건을 재창조하므로 시의 특질을 띤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들라크루아는 아마도 매우 많은 이류화가들을 미혹했던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BC 65 ~ BC 8)의 조언, '시 같은 그림 ut pictura poesis'으로 성공을 거두었던 마지막 유럽 화가였을 것이다. - 93쪽 



H.W. 잰슨(서양미술사가)이었던가, 낭만적 고전주의와 고전적 낭만주의라고. 다비드가 낭만적이고 들라크루아가 고전적이라고. 어쩌면 케네스 클라크의 견해에 힘입어, 들라크루아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마지막 고전주의자일 지도 모르겠다. 낭만주의였으나, 그의 마음은 확고하게 고전적이었다. 그는 작품을 통해 스토리를 전달하였으며, 의미를 담아냈다. 그런 양식으로 그림을 그렸던 위대한 예술의 마지막 장을 장식한다. 그 이후 나온 아카데미 화가들, 제롬이나 부게로 같은 이들은 무식하게(성실하게) 그림만 그린 이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시대가 어떻게 변하는지 몰랐으며, 그 변화를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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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레 다비드 - 수직형 무허가 거주 공동체

Torre David: Informal Vertical Communities

알프레도 브릴렘버그 등 저, 김마림 역, 미메시스






이 책은 토레 다비드(Torre de David(the Tower of David), Centro Financiero Confinanzas)라는, 금융위기로 미완성된 초고층 빌딩이 어떻게 허가받지 않은 사람들의 거주지가 되었고, 이 건물이 공동체의 역할을 수행하고 수행하기 위해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를 기록하고, 어떻게 발전해나갈 수 있는가를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베네주엘라 정부의 입장에서 보자면, 전기나 상하수도 시설도 제대로 완성되지 못한 초고층 건물에 집을 구하기 어려운 저소득층이 몰려 사는 모습은 위험천만한 일임에 분명했다. 그러나 이 수직형 무허가 거주 공동체는 많은 건축가와 예술가들의 영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토레 다비드의 가장 기초가 되는 요소 중의 하나는 무엇보다도 바로 공동체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공통 기반은 거주자들의 종교적인 제휴를 넘어서서 같은 목적을 공유한다는 기반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토레 다비드의 공동체는 보다 진보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 또한 그 공동체가 운영되는 데 있어서 행정적인 실패 등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지속적으로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960년대 번성했던 공공 집단들과 달리, 토레 다비드는 어떤 정권이나 체제 혹은 생활 방식에 대한 반감이나 저항을 바탕으로 생겨난 공동체가 아니다. - 365쪽 











2014년 7월 22일, 베네수엘라 정부는 토레 다비드에 거주하는 이들 중 72%를 이주시켰고 2015년 4월 현재 28%가 남아있었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나머지 이들을 이주시킨다는 계획이었다고 한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Centro_Financiero_Confinanzas)


이 책은 건축학 서적이면서 사진집이고, 공동체 공간에 대한 흥미로운 사례 연구를 담고 있는 인문학 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소 딱딱해 보일지 모르나, 공동체와 공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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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평전

다나카 준(지음), 김정복(옮김), 휴머니스트 






일본인 저자가 쓴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평전이라니! 놀랍기만 했다. 더구나 꼼꼼한 연구서의 면모까지 지닌 이 책은 아비 부르부르크 생애 뿐만 아니라 주요 연구 성과, 그것에 대한 평가, 그리고 '미술사 연구'의 시작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 두서없는 리뷰를 양해해주길 바란다. 다나카 준의 꼼꼼한 서술을 따라 읽기에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겨우 다 읽은 후 쓰는 이 리뷰는 바르부르크의 주된 테마를 언급하는 데 그칠 것이고, 이 소개가 비전공자에겐 다소 재미없고 전문적이라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이 책은 전문 서적이다. 


인문학의 꽃은 철학이 아니라 역사학이며, 역사학 중에서도 미술사학이 가지는 흥미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감히 말하고 싶지만, 책읽기 좋아하는 직장인이 하기엔 주제 넘는 짓이다. 다만 신화나 종교에 대한 편협한 도상학적 이해만을 바탕으로 미술 작품을 평하는 국내 필자들에게 하나의 도상을 둘러싼 다양한 역사적 배경과 흐름, 그 속에서 벌어지는 정신들의 결투 같은 것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사유공간을 만들어내는 분리 운동과 마술적인 결합 강박은 언어와 도상의 한가운데 양극적인 긴장 상태를 유발한다.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 사이에 펼쳐진 세계를 '유럽'이라고 부른다면, 양극성을 유발하는 언어와 이미지 속에 응결되는 것은 유럽 정신의 무시간적 심층이다. 다시 말하면 유럽이란 이 무시간적인 구조가 강요하는 마신들의 회귀라는 반복운동에 의해 지배받는 시공간이다. (67쪽) 



바르부르크는 '무시간적 심층'이라고 표현한다. 즉 도상들은 시대와 지역을 넘나들며 이동하고 번역되면서 끊임없이 되돌아오고 잔존한다. 그리고 그는 이를 두고 '무시간적'이라고 평한다. 그래서 그에게 르네상스란 고대, 특히 마신적 고대의 부활이었다. 


기들란다요의 초상화를 봉납 밀랍인형과 똑같은 수준에 놓는다는 것은 그것을 이른바 역사인류학적인 시선 아래에서 물신숭배의 측면을 지닌 종교의례의 일부로 파악하려는 것이다. (209쪽) 



Domenico Ghirlandaio (1449-1494) 

Adoration of the Shepherds

1485

Cappella Sassetti(Santa Trinita, Florence)  


그 당시 교회에는 실제 인물과 동일한 밀랍인형이 가득했으며, 일종의 풍습이었으며, '도상마술(圖像魔術)'이 된다. 


"이교적인 미신을 믿는 에트루리아인의 자손인 피렌체인들은 극단적인 형식의 이러한 도상 마술을 발전시켜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세련되게 다듬었다. (...) 여기서 논의하고 있는 '도상 마술'은 자신과 비슷한 밀랍제 인형, 은제 인형을 성스러운 화상의 봉납품으로 바치는 풍습이다. 피렌체의 산티시마 아눈치아타 성당은 권력자나 신분이 높은 이국인에게 실물크기로 자신의 형상을 밀랍인형(봉납물, voti 피렌체 방언으로는 boti)을 생전부터 성당 안에 전시하는 특권을 부여했다."(206쪽 - 207쪽)



기를란다요의 작품이 지니는 과도한 사실성은 이런 밀랍 인형과 같은 역할을 회화가 수행했음을 뜻하기도 한다. '봉납물의 신비한 힘을 믿고 있었던 피렌체인들은 여전히 '원시적'이었으며, 봉납물은 반드시 본인과 확실히 비슷해야 했다'(213쪽) 



Cappella Sassetti(Santa Trinita, Florence)   



바르부르크가 보는 르네상스의 모습이었다. 그는 기독교의 세계로부터 고대가 어떻게 부활하는가를 도상에 대한 연구로 시작한 셈이다. 


바르부르크의 관심은 어디까지나 고대의 부흥과 함께 '훌륭한 유럽인'이 열어놓은 점성술을 비롯한 마술적 행위 속에서 고대 그리스적인 '인간성Humanitat'을 재발견하려는 계몽을 위한 싸움에 있었다' (46쪽) 




Achilles at the court of King Lycomedes. 

Early 3rd century AD. marble

H. 1.08 m (42 ½ in.), W. 2.3 m (90 ½ in.), D. 0.8 m (31 ¼ in.)

출처: commons.wikimedia.org


책에서는 스킬로스 섬의 아킬레스 도판이 실려있으나, 이를 구하지 못한 관계로 다른 아킬레스 도판을 실는다. 위 로마 후기의 부조 작품의 유려한 표현을 감상해보자. 


문제는 어디까지나 시나 부조, 회화에서 조형적으로 처리된 운동의 표현이다. 그들은 그 표현을 위해 종종 고대의 시나 미술 작품을 모방했다. 그들은 고대적인 것으로서 발견하고 강한 관심을 가진 것은 고대 예술에 나타난 격렬하게 움직이는 부속물의 세부적인 형태이다. 고대 예술에 대한 관심 자체가 부속물의 운동에 대한 흥미로 인해서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움직임을 나타내는 부속물이야말로 고대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고대의 부조를 모방한 소묘에는 원작에는 없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그려진 것이다. (161쪽-162쪽)


그리고 아래 보티첼리의 '봄'을 보자. 보티첼레 작품에서 옷의 주름이나 머리 장식이나 스타일 등 부속물에 주목해 보면, ... 


보티첼리가 위치하고 있던 곳은 '고대'를 둘러싼 판타즘과 각성 사이, 15세기 피렌체의 현실에 대한 '개입'과 고대 예술이라는 꿈에 사로잡힌 '방심'의 틈새였다. 그것은 합리적인 '사려 깊은 생각'과 '상상력'에 의한 감정이입이 서로 부대끼는 공존 상태다. 이 '너무나 유약한' 화가에게 현저하게 나타난 '고대'라는 판타즘에 관심이 없었다면, 바르부르크가 박사학위 논문을 보티첼리론으로 썼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175쪽)  



Sandro Botticelli (1445-1510) 

Primavera 

1482, tempera

203 × 314 cm (79.9 × 123.6 in)

출처: commons.wikimedia.org


베버가 바르부르크의 논문에서 읽어낸 것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상업자본주의에 있어서 '경제 형식과 윤리적 생활양식'의 어긋남이었다. 이 모순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직업윤리'에 의해 통합된다. 베버는 모순을 극복한 후, 자본주의적 에토스가 성립하는 메커니즘에 관심을 가진다. 이에 비해서 바르부르크는 상업자본주의라는 경제형식과 기독교적 생활양식의 긴장 관계를 고전 고대와 기독교의 대립 관계로 상징한 다음에, 이것을 조정할 수 있는 방법을 통합불가능한 이 양자의 분열 상태의 한복판에서 찾으려고 한다. (238쪽) 


도상 연구자로서의 바르부르크의 연구 방향은 분명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몇몇 선배들 - 뵐플린, 부르크하르트 등 - 이 존재했지만, 바르부르크의 연구 방식은 거의 최초였다.  그는 서양미술 뿐만 아니라 사진이나 일상 생활에서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무시간적 심층에 속해 있는 '고대 도상들의 이동과 흐름'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이 연구의 최종판은 '도상 아틀라스 - 므네모시네' 기획으로 이어졌다. 


마신적 고대의 부활은 그동안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감정이입적인 이미지 기억이 지닌 어떤 양극적인 기능에 의해 생긴다. 우리는 파우스트 시대에 살고 있다. 거기서 근대의 과학자들은 - 마술적 실천과 우주론적 수학 사이에서 - 자기와 대상과의 사이에 '진지한 생각'의 '사유 공간'을 획득하려고 노력했다. 아테네는 확실히 다시 알렉산드리아에서 재탈환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 아비 바르부르크, 1920년 (65쪽) 




- 일본 원서.  



- 아비 바르부르크 




Aby Warburg, Mnemosyne Atlas, Panel 79 (“The Eucharist”), 1929



"시간의 거울에 비친 '고대'를 재현한 이미지의 다양함은 각 시대의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인 선택경향을 보여주며, 그것에 의해서 소망이 형성되고 이상을 설정하는 집합적인 영혼이 세상에 명백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한 영혼은 구체화로부터 추상화로, 또는 그 반대로 향하는 주기적 왕복운동으로 인간이 절제Sophrosyne를 추구하며 벌여야 하는 싸움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309쪽) 



"고대풍의 역동적인 형태는 최대의 긴장상태에서 전승되는 것인데, 그것을 모방하고 흉내(상기)내는 자의 수동적 또는 능동적 에너지와의 관계에서 무극화된다. 시대와 접촉하고 나서야 비로소 양극화가 형성된다. 이것은 본래의, 고대에 있어 의미의 근본적인 역전(전도)에 이르는 것일 수도 있다." (309쪽) 


1929년 1월 19일 로마에서 므네모시네의 일부를 이루는 도상들로 바르부르크는 '기를란다요 공방에 있어서 고대 로마'를 테마로 강연을 했다. 아마 그의 논문이나 글보다 그의 강연은 수 배는 더 흥미진진하고 놀라웠을 것이다. 실제 도상을 앞에 두고 이루어지는 강의는 다양한 이미지들이 서로 얽히고 교차되면서 몇 가지의 주제나 이야기로 순식간에 수렴되기 때문이다. '맨 앞자리에 앉아서 바르부르크에게 개인 지도를 받듯이 강연을 들었던 케네스 클라크는 그 체험이 자신의 인생을 바꿨다고 회상한다.'(314쪽) 



점성술 그림과 정념정형은 고대의 재생을 경유한 변화의 기록이며, 바르부르크는 평생동안 탐구한 이 두 가지 테마를 도상 아틀라스의 계획으로 집대성하고자 한 것이다. (310쪽) 


*  *


한 때 미술사학자가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가진 바 있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보자면, 아비 바르부르크는 평생 아마추어(*) 연구자였다. 다만 그의 집안이, 그의 형제들이 세계적인 은행을 가진 유대인 가문이었고, 그는 형제들에게 재정적으로 의존했다는 점에서 그의 연구는 어려움이 없이 이루어졌고, 한동안 정신병으로 고생했지만. 한국에서의 아마추어 연구자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하긴 요즘 같은 시기에, 국내든 해외든 석사나 박사로 미술사학을 전공하는 것은 스스로 백수가 되겠어요 라고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어버렸으니. 


바르부르크가 연구하고 수집했던 책들이 있었던 도서관은 현재 바르부르크 연구소가 되었다.  


이 책은 전문 연구서이며 평전이다. 다만 르네상스 미술이나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이 책은 흥미로울 수 있다. 일반 독자가 읽기에는 꽤 난이도 있을 지 모르는 책이니, 선뜻 추천하기 어렵다. 다만 이 정도의 평전이 일본 연구자에 의해, 일본어로 씌여졌다는 점에서 일본 인문학의 수준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새삼 부러움을 금할 수 없다. 



* 혹시 '아마추어'라는 단어에 대해 오해가 있을까 덧붙인다. 여기에서 아마추어라는 단어를 쓴 것은 그가 학교에 적을 두지 않고 자유로운 연구활동을 했다는 데에 강조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다시 읽어보니, 아마추어가 자칫 바르부르크의 학문 세계를 낮게 평가하는 듯 하기도 하다. 하지만 바르부르크는 서양미술사에 있어 도상학적 연구의 시초를 닦았으며 이후 그의 영향을 받은 일군의 미술사학자들을 바르부르크 학파라고도 한다. 여기에는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 작슬(Fritz Saxl), 빈트(E.Wind) 등이 있다.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바르부르크 연구소의 네 번째 소장을 지냈던 이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에른스트 곰브리치였다. 다소 비약하자면, 20세기 거의 대부분의 미술사학자들이 아비 바르부르크의 직, 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학교에 적을 두지 않고 자유로운 연구 활동을 할 수 있었던 아비 바르부르크와 달리 한국에서의 상황은 여의치 않아 보인다. 실은 이를 드러내고 싶어서 나는 의도적으로 '아마추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 지도 모르겠다. 특히 인문학의 경우는 그 상황이 더 열악해지는 듯 싶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프로라는 의식으로 인한 지적 불성실함보다는 아마추어적인 지적 열망이 더 필요한 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 뭐, 해답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 ㅡ_ㅡ;; 





- 곰브리치가 쓴 아비 바르부르크 평전. 


* 바르부르크 연구소 : http://warburg.sas.ac.uk/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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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가 요새.... 지하련님 추천 서적 읽다가 그지가 될판이긴한데 ㅋㅋㅋ 이 책도 땡기네여

  • 라보엠 2015.07.29 20:39 신고

    일본인 학자의 시각으로 본 바르부르크의 생애도 궁금하군요. 제가 지내는 곳에선 이 책을 구하기가 쉽지 않으니 먼저 곰브리치가 쓴 책을 찾아봐야겠습니다.

    • 저자는 곰브리치가 쓴 평전이 지니는 약점을 이야기하며 그 부분부터 서술해 내갑니다. 그래서 두 권 다 읽으면 좋을 듯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난 다음 므네모시네 관련 책들을 찾아보았습니다. 일본에선 므네모시네 전시를 했더라고요. 이런 걸 보면 일본이라는 나라의 저력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곰브리치의 평전을 위시리스트에 올려놓았으나, 언제 읽게 될지.. ㅎㅎ



나의 조선미술 순례 
서경식(지음), 최재혁(옮김), 반비 




현대 미술을 전공하는 친구가 있다면, 그/그녀와 이야기하는 게 어려울까? 그렇지 않을 게다. 그렇다면 그/그녀가 만들고 보여주는 미술 작품은? 정녕 모른다면 친구에게 물어보면 될 것이고, 바로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동시대 미술(우리에겐 현대미술)을 보고 감상하지 못한다면, 그건 미술에 대한 전문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하고 우리 시대에 대한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즉 자신을 돌보지 못하고 주위를 돌아볼 겨를 조차 없이 무언가에 쫓겨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이 옳은지에 대한 확신은 없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자주 전시장을 찾고 자기 자신에 대해 보다 솔직해지고(심지어 자신의 아픔, 상처와 대면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는 여유를 가진다면, 현대 미술은 감상하기 어려운 분야가 아니라는 점을 알려주고 싶다. 마치 이 책의 저자, 서경식 교수처럼. 그는 태생적 아픔으로부터 두 형의 구속 등 그의 인생 자체가 바로 한반도의 비극을 고스란히 담고 있지만, 그는 이로부터 도망치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이 그의 미술 순례 시리즈의 시작점이었을 지도. 

서경식은 미술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공감을 가지고 있으나, 전문적인 식견으로 파고 들어 분석하는 이가 아니다. 그리고 그걸 원하지도 않는다. 그는 현대 미술 작가들과의 대화를 바탕으로 그들의 작업과 작품에 대해 소개하면서도 어렵거나 지루하지 않고 도리어 감동적이고 내가 우리 미술에 대해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구나 하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미술에 대한 이야기는 감동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마음을 울리는 작품 앞에서, 그 작품과 그 작품을 만든 작가와의 이야기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감동은 커녕, 위선과 위악으로 가득찬 작품 도판을 책에 실고 갖가지 이론을 들이미는 책들을 보면서, 나는 '예술 작품의 감동 앞에선 그 어떤 이론도 무용지물인데'라고 중얼거리곤 한다.(아, 이 중얼거림이란!) 

이 책에서도 다소 어려운 단어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가령 윤석남에 대한 챕터에서 길게 '페미니즘' 관련 이야기가 나온다든지 ..., 하지만 페미니즘은 그저 시류처럼 흘러 지나가고 여성 작가로서의 윤석남에 대하여, 윤석남이 만드는 작품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그것을 보다 풍성하게 해주는 곁다리 이야기였을 뿐이다. 

현재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신경호, 정연두, 윤석남, 미희, 홍성담, 송현숙, 그리고 월북작가 이쾌대, 조선 시대의 신윤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이 책은 쉽게 읽히나 가볍지 않고, 진지하고 심각하지만 울거나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다. 마치 그런 일들이 있었나 할 정도로 담담하게 서술되고 있다. 아마 그건 이 책의 저자도 이미 굴곡진 한국 현대사의 피해자였으며,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작가들이 바로 그런 현대를 살아온 이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이미 여러 예술 서적으로 탁월한 에세이스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서경식의 신작 <<나의 조선미술 순례>>도 기대를 벗어나지 않는다. 도리어 작가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서 더 좋았다. 2015년, 이 책으로 시작해도 나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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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인상적인 부분을 짧게 메모해보았다. 이 책의 제목에 대해 그는 '한국'이라는 단어 대신 '조선'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한국'은 그 범위가 작아 자기 같은 재일한국인이나 미희와 같은 해외입양아 등 우리 민족 전체를 보여주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단어라 생각했으며, 동시에 '조선'이라는 단어 속에는 우리 근현대사의 아픔이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신경호, 넋이라도 있고 없고: 초혼 1980, 1980 


집에서 그렸을 거예요. 광주항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그렸던 그림이죠. 광주 상황이 끝나고 나니까 거지와 넝마주이, 구두닦이가 하나도 안 보이는 거예요. 그 기간에 다 사라져버렸죠. 그들은 대부분 고아였거든요. 찾거나 신고하는 사람도 없었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그들이 언젠가는 광주로 돌아올 텐데 하는 마음으로 그렸던 그림입니다. - 신경호 (63쪽) 



**


정연두는 피사체가 되는 일반 시민들과 대화를 나누고 커뮤니케이션을 하면서 작품을 만든다. (84쪽) 

정연두, 상록타워 Evergreen Tower55×80×32,  사진, 2001



정연두, 상록타워 Evergreen Tower55×80×32, 사진, 2001



예술가는 사회적인 리더도, 세상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려운 사람들을 이끌어주는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관찰자에 가까운 존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다기보다 예술 자체가 하나의 좋은 매개체가 되는 것 같아요. 이해하기 힘들어도 "아아, 이건 예술이니까, 아트 프로젝트니까 ... ..." 라면서 관대히 봐주시는 것 같습니다. - 정연두(85쪽

**

신윤복, 미인도, 114.2cm * 45.7cm, 비단에 채색, 간송미술관 



바로 이런 인상이다. 나 역시 '미인도'에서 같은 인상을 받았다. 남성이 지닌 시선의 폭력에 갇혀 긴장하는 모습도 없고, 거꾸로 거기에 아양 떨며 자신을 상품화하려는 생각도 없이, 정녕 '자연체'인 것이다. 한 마디로 '미인도'의 여성은 '기호'가 아니다. 자신을 그리고 있는 화가가 동성인 여성이거나, 혹은 어쩌면 자기 자신이기에 가능한 자연스러움을 보여준다. (282쪽) 

**

최근 디아스포라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다고 생각되지만, 저는 단지 외국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디아스포라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디아스포라가 된 배경에는 어떤 식으로든 강제성이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경제건, 전쟁이건, 혹은 입양 제도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억지로 갈라지고 헤어진 경험이 바로 디아스포라의 체험이라고 생각합니다. - 미희(325쪽) 


**


홍성담, 욕조: 어머니 고향의 푸른 바다가 보여요, 1999 



섬에서 자란 인간이라서 제게 물은 생산의 이미지입니다. (중략) 힘들 때마다 고향의 푸른 바다를 떠올리면 힘이 났습니다. 

그런데 남산에 있는 안기부 지하실에서 그 생산과 생명의 물, 생업으로서의 물, 나의 희망으로서의 물이 하필이면 나를 고문하는 도구가 될 줄 어떻게 예상했겠습니까? 안기부 놈들이 이른바 나를 물과 맞서게 했고, 결국 그 물에게 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날조한 대로 저는 북한에도 두 번이나 왕래한 간첩이 되어버린 거죠. 

감옥에서 나왔지만 그 후로는 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되살아나서 완전히 폐인처럼 살았습니다. 밥을 먹고 나서도 물을 마실 수 없었습니다. 

물에 대한 공포를 계속 껴안고 살아갈 것인가? 세계를 이루는 원초적 개념 중 하나인 물에 공포를 가진 채로 살아간다면 앞으로 내가 어떻게 예술가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고민 끝에 물과 정면대결하자고 생각했어요. - 홍성담 (333쪽)







나의 조선미술 순례 - 10점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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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을 찾아서 - 현대미술의 시작

이우환(지음), 김혜신(옮김), 학고재





번역자인 김혜신 교수에 따르면, 이 책에 실린 이우환의 글들은 주로 1960년대 말 쓰여졌다고 한다. 60년대 말에 출간된 이 책을 2000년에 일본에서 재 출간하였고, 2011년에 한국의 학고재에서 한글로 번역, 출판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 당시 이 책은 일본 미술계의 ‘태풍이면서 바이블’이었다. 


우리는 이우환이 세계적인 예술가의 반열에 올라섰음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그가 탁월한 미술 비평가이자 이론가이며 일본 현대 미술에서도 그 위상이 대단한다는 사실은 일반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일본어로 글을 쓰는 시인이자 산문가이며, 그의 일부 글은 일본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인정 받고 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이우환은 일본에서 먼저 유명해졌고 그 다음 파리를 중심으로 한 서유럽에서, 그런 다음 한국 미술계에 소개되었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믿을까?)


1960년대 말 이우환은 현상학에서 바라보는 바, 서양 근대 철학의 흐름 속에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예술 시각을 이 책을 통해, 그리고 모노하(もの派)라는 미술 운동을 통해 드러낸다. 이 책은 일본 모노하 운동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으며, 미술 이론가 이우환을 제대로 알린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0여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그 탄탄함과 생생함이 가시질 않는데, 60년대 말, 70년대 초 메를로 퐁티, 마르틴 하이데거, 장 폴 사르트르, 그리고 니시다 기타로를 인용하며 일본 현대 미술이 나아가야 할 바를 제시하였을 때, 얼마나 많은 동시대 일본인들은 그를 질투했을까는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더구나 1960년대 말의 이우환만큼 탁월한 식견으로 뛰어난 글을 쓰는 미술 비평가, 혹은 이론가를 한국에서 만나지 못했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원래 테이블이나 의자, 풍경 자체는 아무런 시각적인 원근법도 가지지 않는 세계이다. 실재는 인간의 가치 조정 없이 스스로의 거리를 가지고 자유로운 모습을 보이는 세계인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이 쪽이 중심이 되어 저 쪽을 보고 싶은 대로 규정하는 표상 관념에 의해 시야의 세계를 원근법의 화신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110쪽) 



그는 서구의 모더니즘 미술을 부정한다. 그는 근대 철학은 실제 세계와는 무관한, 우리 관념의 표상을 상정하고 그 표상을 그대로 투영시킨다고 말한다. 즉 외부 세계는 우리의 관념으로 해석, 투영된 것이지, 실제 존재하는 바 외부 세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그의 생각이 아니라 20세기 현상학자들, 특히 메를로 퐁티가 지적하는 바이며, 그 외 많은 사상가들이 지적해온 바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메를로 퐁티에서 출발해 니시다 기타로에 이른다. 



우리의 신체라고 생각되는 것이 이미 모순적 자기 동일로서 행위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행위하는 것이 보고 있는 것이며, 보는 것이 행위하는 것이다. 신체의 움직임은 이미 표현 행위인 것이다. … … 행위하는 것과 보는 것이 결합하는 곳에 신체가 있다. 행위적-직관적으로 사물이 보이는 곳에 신체가 있는 것이다. 

- 니시다 기타로, <인간의 존재> 중에서(227쪽 재인용) 



… … 예술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예술가의 온전한 신체라고 해도 좋다. 

- 니시다 기타로, <무의 자각적 한정> 중에서(228쪽 재인용) 



관계항2007



우리가 1990년대 초반 포스트모더니즘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서 서구 근대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면, 이우환은 이미 1960년대 근대 철학, 근대성(Modernity)의 한계성을 이야기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예술적 방향이나 실천을 고민하고 있었던 셈이다. (하긴 그 전에는 한국의 암울한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그럴 여유도 없었겠지만, 그런데 지금은 뭐지?)


그가 집중하고 있는 현재의 작품 활동은 이런 그의 고민이 고스란히 투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인 동시에 공간이며, 공간인 동시에 시간인 지점이 열리는 순간, 시간은 동시성의 장소로서 만남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그런 순간은 오는 시간도 가는 시간도 아니고, 바로 지금 여기의 안과 밖이 상호매개되는 열린 만남의 세계라는 점에서, 비대상적 차원인 것이다. (231쪽)



이런 측면에서 그는 상당히 관념적인 작가이며 일반 대중에게는 매우 어렵게 다가온다. 특히 그가 지향하는 미니멀한 표현 방식과 20세기 후반 서구 미술계를 주도했던 미니멀리즘과는 전적으로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언제나 나는 니시다가 말한 ‘절대모순적 자기 동일’을 비동일성의 지평으로 삼아, ‘무의 장소’를 관계성의 표현을 통한 무한한 울림-여백으로 전개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려 한다. 

(… …)

예술의 과제는 인간이 더욱 직접적인 세계로 해방될 수 있는 만남의 ‘장소’를 어떻게 열어 제시할 것인가 하는 데 있다. 그것은 어떻게 현실을 표현의 상태성으로부터 그것의 현재화로 이끌어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242쪽) 



딱딱한 미술 이론서인 관계로 일반 독자에게 추천할 만한 책은 아니다. 그렇다고 미술 전공자에게 추천하기에도 이 책은 솔직히 말해 어렵다. 실은 '어렵다'라고 하는 것이 다소 무안하게 여겨질 정도다. 1960년대 말 쓰여져, 그 당시 일본 미술계의 무수한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던 책을 두고 '어렵다'라고 말하는 내가 부끄럽다. 아직까지 한국 문화, 예술계의 지적 토양은 1960년대 말 일본 근처에도 가지 못한 것이다. 


굳이 이 책의 단점을 이야기하자면, 근대 철학을 이야기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다소 거칠게 나누고 있었다. 서양 근대 철학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드러나지 않고 한 쪽 방향으로 다 몰아넣고 있다는 느낌 말이다. 실은 그의 목적, 원근법적인 서양 근대 미술을 넘어서 새로운 예술적 실천을 도모하기 위함이지만. 하긴 이 책은 전문 철학 서적은 아니니... 


미술 이론 전공자이거나 비평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권한다. 그리고 이우환의 작품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이우환의 작품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탁월한 가이드북이 될 것이다. 






만남을 찾아서 - 10점
이우환 지음, 김혜신 옮김/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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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연극론 
<원제: Theatre et son Double(연극과 그 이중)> 
앙토넹 아르토 Antonin Artaud 지음, 박형섭 옮김, 현대미학사 



이젠 1년에 연극 한 편 보기 어려워졌다. 연극이 아직 살아있다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한 때 연극 밖에 없었던 시대가 있었다. 소설이 등장하기 수십 세기 전, 영화는 상상하지 못했던 시대, 오직 서사시만이 구전으로 떠돌아 다닐 때, 그 때에도 연극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연극은 우리의 일상과 얼마나 거리가 먼가(아니면 우리 모두가 배우가 된 것일까? 나를 속이고 가족을 속이고 타인을 속이고 세상을 속이는, 가면을 쓴 배우가 된 것일까? 그래서 연극, 진실에 다가가고자 하는 연극을 볼 수 없는 처지에 놓인 것은 아닐까?). 

앙토넹 아르토(1896 - 1948). 프랑스의 시인이자 극작가, 연출가, 연극이론가였다. 하지만 그는 연극 연출에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그가 죽은 후에야 연극 이론으로 유명해졌다. 그리고 그의 연극이론을 한 단어로 옮기자면, '잔혹극'(Theatre of Cruelty)라고 할 수 있다. 아래 연극 동영상을 잠시 보자. 


(* '미성년자 관람 불가'입니다. 다소 자극적이고 불쾌한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아르토가 쓴(혹은 연출했던) 작품인지 찾아보았으나,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잔혹극(Theatre of Cruelty)가 이럴 것이라고 생각됩니다만, 너무 자극적이긴 하네요.)



위 연극에서 아래 두 개의 지침이 반영되었는가? 글쎄다. 연극 연출에서 이해되는 바, '물질화'라든가 '말과 구별되는, 별도의 언어'가 무대 위에서 보여졌는가를 따져 묻는 것은 나의 능력 밖이다. 하지만 확연히 다른 이 연극. 아마 한국에선 실제로 보기 어렵지 않겠는가. 


1. 조형적이면서 시각적으로 말(parole)을 물질화하기.
2. 말과는 별도로 무대 위에서 발음되고 의미되는 모든 언어, 또는 공간에서 표현되는 모든 것 혹은 공간에 의해 해체되거나 공간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으로 이루어진 언어.
- 104쪽 
 

아르토가 이야기하는 바 잔혹극의 지침인데, 다소 어렵게 느껴질 지도 모르겠다. 이에 이 책의 역자인 박형섭 교수의 설명을 인용하는 편이 좋겠다.  


아르토가 ‘잔혹연극’이라고 명명하는 ‘연극’은 서구의 문학적 연극을 지양하고 동양의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연극으로의 회귀를 강조한다. 즉 희곡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연극이 아니라 무대 연출에 중점을 둔 물질언어의 발명에 몰두하는 연극이다. 따라서 극작가보다는 무대 형상화에 종사하는 모든 연극인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배우의 연기는 물론 연출가의 관점, 무대장식가의 미적 능력, 심지어는 극장의 구조까지도 고려의 대상이 된다. 가령 배우는 매순간 창조의 상태에 놓여있다. 그의 말과 행동은 살아있어야 하며 즉각적이고 직접적이라야 한다. 고정된 언어의 반복적 구사가 아니라 울림과 생명이 용솟는 고함과 같은 활동적인 말표현이라야 한다. 그의 이중(double)의 개념은 여기서 비롯한다. 배우는 진정한 연극 속의 창조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 역자 서문 중에서 



말(언어)에 대한 반감(혹은 반대)은 포스트모더니즘, 즉 20세기 후반의 산물이 아니다. 따지고 든다면 19세기 후반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고 20세기 전반기는 우리가 가진 언어에 대한 반감/반대/한계에 대해 극단까지 밀어붙인다. 여기에 앙토넹 아르토도 포함될 것이다. 


문명인은 하나의 괴물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의 마음 속에서는 행위가 생각과 일치되기는 커녕 오히려 행위에서 생각을 이끌어내는 능력이 부조리한 상태로까지 확장된다. - 15쪽 


그는 문명, 서구문명에 대한 반감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발리 연극에 대한 찬사를 보낸다. 극작가가 쓴 희곡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무대 위 모든 것이 가지는 가능성을 극단까지 추구하며 극적인 순수함을 이끌어내는 연극, 이를 아르토는 잔혹극이라고 명명한다. 


'잔혹 연극'은 연극에 정열적이고 경련하는 듯한 삶의 개념을 주기 위해 창조되었다. 잔혹성은 강렬한 엄격함이나 무대적 요소들의 극단적인 응축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잔혹 연극은 잔혹성에 의존하는 연극인 것이다. 

잔혹성은 필요한 경우 피를 부를 것이지만 체계적으로 피를 요구하지 않는다. 결국 잔혹성의 의미는 무미건조한 정신적 순수함의 개념과 뒤섞여 있다. 이 정신적 순수함이란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는 대가를 삶에 지불하는 일에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 순수함이다. 
- 181쪽 





출처 - https://theatrerun.wordpress.com/tag/antonin-artaud/  



아르토는 발리 연극에서 잔혹극의 단초를 발견한다. 


(...)발리 연극의 첫 공연은 춤, 노래, 판토마임, 음악 등의 특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환영과 공포의 시각 하에서 연극을 자율적이고 순수한 창조적 차원으로 되돌려 놓았다. - 81쪽 



아래 영상은 발리 전통 연극의 일부다. 그가 찾으려고 했던 바가 무엇이었을까? 






정열의 '시간'(temps)에 관한 비밀을 체험하는 것, 조화로운 율동을 조절하는 어떤 음악적 '템포'(tempo)를 체험하는 것, 그러한 것들이 바로 연극적 양상이다. 

- 194쪽 



이 책을 전문적인 연극 이론 서적으로 분류할 수도 있지만-마치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를 인류학 서적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처럼-, 그 전에 이 책은 탁월한 시적 산문집이며, 서구 근대 문명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그 대안을 찾는다는 점에서 문명 비평서로도 읽을 수 있다. <<슬픈 열대>>가 20세기 최고의 기행산문집들 중 한 권이듯이. 

아르토가 이 책에서 보여준 시적인 문장, 극적인 설득력, 그리고 연극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이 책이 아직도 사람들에게 읽히고 영감을 주는 이유가 될 것이다.    



연기 

공연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언어처럼 암호화될 것이다. 그러므로 불필요한 동작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운동은 하나의 리듬에 맞추어질 것이다. 각각의 등장인물들은 극단적으로 유형화됨으로써 그들의 제스처와 얼굴 표정, 의상 등은 조명과 같은 특징을 띨 것이다. 

- 145쪽 



2014년 봄부터 읽기 시작해 12월이 되어서야 겨우 다 읽을 수 있었다. 책은 의외로 단단하고 압축적이다. 한 문장 한 문장을 놓쳐 읽을 수 없었고 어떤 문장 앞에서는 한참을 서성거려야 했다. 책을 읽는 내내, 앙토넹 아르토의 시도가 20세기 후반 얼마나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끼쳤을까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책이 몇 권 되지 않을 듯 싶다. 예술을 전공하는 이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한다. 





잔혹연극론 - 10점
앙토넹 아르토 지음, 박형섭 옮김/현대미학사



별첨) 


아르토에 대한 영화가 있었다. 영화에 대한 평점도 제법 높다. 아래 youtube 동영상으로 영화의 도입부를 잠시 볼 수 있다. 



http://www.amazon.com/compagnie-dAntonin-v%C3%A9ritable-histoire-dArtaud/dp/B007KDA3B6

영화 정보 : http://www.imdb.com/title/tt0106810/ 






2) 아르토는 발리 연극에서 연극의 순수함을 발견했는지 모르겠지만, 고대 연극의 특징들 - 제의에서 시작했다는 점, 음악이 연극에 포함되었고 가면을 쓰고 나온다는 점 - 에서, 아르토가 이야기하는 바 잔혹극은 일종의 고대적 방식으로의 회귀, 혹은 언어 이전 시기로의 복귀 같은 게 아닐까 싶어 한 번 자료를 찾아보았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적 방식으로  연극 연출이 실험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하는데, 아래 연극은 모든 부분에서 고대 그리스적 방식을 적용한 것은 아닌 듯싶다. 고대 그리스의 원형 극장에서 재현한 영상물을 찾아보았으나, 없어 아래 연극 영상을 올린다. 하지만 아래 설명에도 있듯이,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작품이다. 

(아마 한국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연극이겠지. ㅡ_ㅡ;)




Filmed by the famed British actor/director Sir Tyrone Guthrie, this elegant version of Sophocles' important play adds a brilliant stroke--the actors wear masks just as the Greeks did in the playwright's day. The story of Oedipus' gradual discovery of his primal crime--killing his father and marrying his mother--has influenced many of the great plays, films and books of all time. When this landmark film production of one of the great dramas ever appeared, it was hailed from all corners: "Spectacular and awesome...this film is a jewel of great price!" raved The New York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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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문명 Civilisation 

케네스 클라크(Kenneth Clark) 지음, 최석태 옮김, 문예출판사, 1989년 

(현재 절판) 




책을 읽어나가면서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케네스 클라크Kenneth Clark. 이미 20세기의 저명한 미술사학자였지만, 그는 미술의 역사 뿐만 아니라 철학, 문학, 건축, 음악을 아우르면서 서양 문명의 역사를 개괄하고 있었다. 


가령 그는 장 안트완 와또와 존 키츠, 그리고 모차르트를 함께 비교하며 설명한다. 아래 그가 인용한 존 키츠의 시 구절을 옮긴다. 



Ay, in the very temple of Delight   

Veil'd Melancholy has her sovran shrine, 

Though seen of none save him whose strenuous tongue 

Can burst Joy's grape against his palate fine;  


아아, 환희의 신전 바로 그 안에서 

베일에 가린 우울은 그녀만의 자유로운 성지를 가진다.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지만, 오직 강렬한 혀로 

기쁨의 포도를 예민한 입 안에 넣고 터뜨릴 수 있는 자를 제외하고는.


- 키츠Keats, <우울에 부치는 송가 Ode on Melancholy> 중에서 

(이 책의 215쪽에서 옮기나, 문학 인용문에 대한 번역은 신뢰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수준이다. 이에 직접 번역했다. 뭐, 나도 신뢰할 수준이 안 되겠지만. 이에 원문도 함께 찾아 옮긴다.) 



케네스 클라크는 '와토보다 더 '예민한 입(palate fine)'을 가진 사람은 없었습니다'라고 말한다(번역서에서는 '민감한 입'으로 옮기고 있다). 대강 이해할 순 있으나, palate가 미각이나 감식력 등을 뜻하기 때문에, '탁월한 심미안' 정도로 받아들으면 된다(이럴 때 원문을 찾아 읽는 것이 좋다). 



와토가 세상에 나온 것은 18세기 초의 일이었습니다. 그의 걸작 <시테르 섬에의 순례 Pilgrimage to Cythera>는 1712년, 루이 14세가 아직도 생존 중인 시대에 그려졌습니다. 이 그림에는 모차르트 오페라에서 경험할 수 있는 특유한 경쾌함과 예민함이 있으며, 또 인생의 극적 요소를 파악하는 감각이 있습니다. 비너스 섬에서 한 나절을 보내고, 이제 귀로에 선 이들 남녀의 미묘한 관계는 <여자는 다 이런 것Cosi Fan Tutte> 속에서 자신에 넘친 연인들이 출발에 앞어서 전개한 무아 상태의 흥분을 연상시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차르트의 그 오페라는 70년 이상이나 뒤에 작곡되었습니다. (215쪽) 




Jean-Antoine Watteau, Pilgrimage to Cythera



지금도 그러한지 모르겠으나, 내가 경험한 한국의 인문학자들이나 인문학 전공 교수들 대부분이 가진 편협한 전문성 - 자신의 학위 논문 주제만 딱 알고 나머지는 전혀 모르는(심지어 인문학 전공 교수이면서 서양 철학사 한 권 제대로 읽어 내지도 못하는 지적 무능함까지 갖춘) - 과 대비되는 케네스 클라크의 이 책은, 1969년 그가 쓰고 직접 출연한 영국 BBC 다큐멘터리 <문명 Civilisation>의 방송 대본을 책으로 옮긴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방송 대본이라고 낮게 치부하기에는 책은 의외로 탄탄하고 폭넓은 주제를 아우르면서 인문학과 서양 예술에 깊은 관심을 가진 독자들의 지적 호기심을 쉴새없이 자극한다. 


실제 다큐멘터리가 13부로 나누어 방송된 것처럼, 이 책도 1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구사 일생The Skin of Our Teeth>로 시작해 13장 <영웅적인 물질문명Heroic Materialism>으로 끝나는 이 책은 중세부터 19세기말, 20세기 초까지의 서양 문명을 탐구한다.


대부분의 지성사 책들이 철학이나 사상에 기울어져 서술되는 것과 달리, 이 책은 압도적으로 건축과 시각 예술 작품에 많은 부분이 할애되어 있다. 그래서 책에는 다수의 미술 작품 도판이 있으며, 해당 작품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읽을 수 있다. 



(13부 전체를 볼 수 있으나, 아, 한글 자막은 없다. 짧은 듣기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다큐멘터리다.) 



서양 미술사에 대해선 전문가 수준이라고 자부하는 나에게도 이 책은 중세 후기, 근세 초기 북유럽 미술에 대한 설명은 무척 유용했다. 또한, 가령 이런 문장들은 흥미로웠다. 


중세와 르네상스의 건축이 현대 건축보다 훨씬 나은 이유의 하나는 그 건축가가 예술가였다는 점에 있습니다. (...) 본직이 아닌 모든 건축가들 중에서 미켈란젤로는 가장 모험적이며, 고전주의적 원칙이나 기능면의 여러 가지 요구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덜 제약받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실제적이 아니어서가 아닙니다.(...) 아마도 미켈란젤로만이 미완성의 커다란 골치덩어리였던 성 베드로 대성당을 정돈할 만한 정신적 정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결국 그의 독자성으로 이 건물을 혼연일체의 통일체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164쪽 - 165쪽) 


 

케네스 클라크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알브레히트 뒤러를 비교하며, '뒤러는 아주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였스니다. (...) 그에게는 우선 강렬한 자의식과 과도한 허영심이 있었습니다'(147쪽)라고 말한다. 



Raphael, Portrait of a Cardinal, oil on wood, 79cm*61cm, about 1510 


라파엘로의 어느 추기경은 '최고의 교양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균형과 자제심을 갖춘 사람'으로 느껴지지만, 


오스발트 크렐은 지금 막 히스테리를 일으킬 것같습니다. 저 노려보는 듯한 눈, 자의식이 강한 내성적인 얼굴, 얼굴의 볼륨을 불안정하게 함으로써 뒤러가 아주 잘 파악한 저 불안, 이건 얼마나 독일적일까요? 그리고 독일 이외의 나라였다면 또 얼마나 이상한 일이었을까요? (140쪽) 



Albrecht Durer, Portrait of Oswolt Krel, oil on panel, 50cm * 39cm, 1499



우리가 알고 있다고 여겨지는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의 양상은, 의외로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이 시기(15세기와 16세기)의 건축과 미술은 고딕에서 국제 고딕, 혹은 후기 고딕으로 이어지면서 동시에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기법들을 받아들여 양식 상으로는 르네상스로 향하는 듯 여겨지나, 정신적으로는 중세에서 바로 종교개혁으로 이어진다. 


말이 종교개혁이지, 이는 성직자의 차원에서였지, 실제 일반 대중에게서는 일종의 반달리즘으로 표현되었다. 이 시기에는 16세기 이탈리아 매너리즘의 경향까지도 보이는 바, 16세기 북유럽 미술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와는 판이하게 다른 미술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케네스 클라크는 뒤러의 작품을 저렇게 설명한다. 


이 책의 몇 부분을 옮기며 설명하다 보니, 일반 독자에게 이 책은 꽤나 까다롭게 여겨질 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앞선다. 이미 절판된 책이니, 구하기는 무척 어려울 것이고, 도서관에서도 찾기 쉽지 않아 보인다. 또 번역된 문장들 상당수가 비문들이어서 이 부분에 까다로운 독자들은 화를 낼 만한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 수준의 책을 한글로 접하긴 어려운지라, 독자들에게 과감하게 추천한다.


(또는 이 책의 번역서가 새로 나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생생한 컬러 도판들과 함께.)  



Amazon Link : http://www.amazon.com/Civilisation-Personal-View-Kenneth-Clark/dp/B0016XQ7LQ/ref=sr_1_5?s=books&ie=UTF8&qid=1410690328&sr=1-5 




예술과문명

케네드클라크저 | 최석태역 | 문예출판사 | ..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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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보엠 2015.07.24 19:51 신고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의 행보는 정말 복잡해서 공부할 부분이 많아요.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기도 하고 또 반대로 이탈리아에 회화적 영향을 주는 게 보이니 이 분야를 공부하는 사람에겐 기쁜 일일까요? 저는 반종교개혁이라고도 불리는 카톨릭 종교개혁 시대의 북이탈리아 회화와 기억술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 학생인데, 추천해주신 클락크의 다큐는 꼭 볼게요. 시작페이지에 저장해두었어요. 매일 한 편씩 보려고 합니다. 추천 고맙습니다.

    • 16세기는 정말 흥미로운 시기입니다. 16세기 초반 이탈리아는 르네상스 절정기였으나, 북유럽은 이탈리아와 비교해보면 너무 경직되어 있지요. 그리곤 곧바로 종교개혁이 일어납니다. 마치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건너뛰고 곧바로 근대로 뛰쳐나가는 듯합니다. 제대로만 공부한다면 현대, 그리고 앞으로 오게 될 어떤 시대에 대한 무수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 (아마 제가 계속 공부를 했더라면 그 시대를 열심히 공부했을 텐데 말이죠. ㅎㅎ )


사진, 인덱스, 현대미술 

(원제 Le Photographique

로잘린드 크라우스 Rosalind Krauss(지음), 위베르 다미슈 Hubert Damisch(불어 옮김), 최봉림(불어를 한글로 옮김), 궁리 (대림이미지총서05) 





Jackson Pollock (1912-1956)

Gelatin silver print, 1950

National Portrait Gallery

Smithsonian Institution

Gift of the Estate of Hans Namuth

Image copyright Estate of Hans Namuth



그러나 분명 나무스는 사진가로서 그 자신만의 고유한 예술가적 역량으로 촬영 각도, 프레이밍, 흑백 콘트라스트, 그리고 문제가 되는 사진 대상의 모든 구성 요소를 고려했다. (...) 

나무스의 사진 속에서 폴록은 언제나 커다란 화폭 사이에 끼여 있는데, 어떤 화폭은 벽에 세워져 있고, 어떤 화폭은 바닥에 놓여져 있다. 그 연속 상태 속에서 검은 선과 하얀 선은 뒤얽혀 공격적인 모티브를 형성하며, 또한 아틀리에의 바닥에 보이는 얼룩 반점들 속에서 반복된다. 그리하여 사진은 위아래가 하나로 붙은 공간을 재창조한다. 여기에서 사람의 형상이 제대로 존재할 수 없다. 인체가 중력과 단단한 바닥과 맺는 관계는 아무래도 애매 모호할 뿐이다. 작업실 공간은 더 능동적이고 더 현란한 또 다른 공간에 의해 포섭되어 진다. 물감으로 뒤덮인 평면들의 연쇄 결합은 콜라주의 결합 양상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애초의 작업실 벽과 바닥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사진이 보여주는 특수한 평면적 시각 효과에서 기인한다. 

- '텍스트로서의 사진 - 나무스와 폴록의 경우' 중에서, 146쪽 



Jackson Pollock painting in his studio on Long Island, New York, 1950.

Credit: Hans Namuth



한스 나무스의 사진은 잭슨 폴록으로 가는 창과도 같다. 크라우스는 이 점을 제대로 지적한다. 우리는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대가 잭슨 폴록을 알지만, 그의 예술 세계를 탁월한 시각으로 카메라로 잡아 해석해낸 한스 나무스에 대해선 소홀했다. 


이 책을 기획하고 여기저기 실린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글들을 모아 불어로 번역한 위베르 다미슈는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사진에 대한 글들의 가치를 발터 벤야민, 롤랑 바르트에 비해 손색없다며 격찬한다. 이 격찬에 대해서 내가 뭐라 말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점만은 분명하다. 잭슨 폴록 대신 한스 나무스에 대해서 설명하듯, 이 책은 온전히 사진에 대해서만, 사진의 존재 가치에 대해서 씌여진 책이다. 회화적 전통 속에서가 아니라 오직 사진만을 위한 이론적 지평을 만들고 해석하며 독립적 가치를 논한다. 


하지만 이 책 만만치 않다. 거의 한 달 내내 들고 다니며 읽었다. 겨우 다 읽고 정리하는 지금, 이 모음집에 대해서 뭐라고 적어야 할 지 모르겠으니 말이다. 흥미로움으로 따지자면, 탁월한 비평집들 못지 않았지만, 책은 쉽지 않았다. 사진 이론서이지만, 인문학 서적이며, 사진에 대한 깊은 이해 뿐만 아니라 현대 인문학 전반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만 이 책을 읽을 수 있다. (어쩌다가 미술 비평은 이 지경이 되었을까. 직접 사진을 찍는 이들 중 이 책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이가 몇 명이나 될까) 



그러므로 발자크에 따르면, 자연계의 모든 신체는 일련의 유령들로 구성된다. 유령들은 사방 모두 아주 얇은 막이 무한히 포개어진 잎 모양의 무수한 층들로 이루어지며, 눈은 이를 통해 신체를 인지한다. 

인간은 결코 창조할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해 환영처럼 만질 수 없는 것으로 어떤 단단한 것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또는 무(無)에서 어떤 사물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다게레오식 사진 촬영은 사진 찍는 대상의 여러 층 가운데 하나를 급습하여 은판에 덧붙이는 것이다. 그로 인해 전술한 신체는 다게레오 사진을 찍을 때마다 유령, 다시 말해 신체를 구성하는 본질적 부분을 잃어버리는 게 분명하다. 

- 나다르의 회고록 <내가 사진가였을 때> 중에서 (32쪽 재인용) 



거의 읽히지 않는 나다르의 회고록에서 인용한 위 문장을 읽으면서 '사진적인 것'에 대해 생각했다. '사진은 인영, 흔적, 자국의 형태로 이루어진다는 사실', 어쩌면 이것은 이 책 전반을 흐르고 있는 중심 테마이기도 하다. 그래서 크라우스는 퍼스의 '인덱스Index'에 의존하며 사진적인 것의 정의를 내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Alfred Stieglitz

Equivalent

1930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등가물'에 대해 크라우스는 이렇게 적는다. 



그것은 대기 상태의 각인이다. 빛의 굴절을 통해 가시화된 구름의 형상은 바람의 방향과 습도를 기록하고 가시화한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어떤 것의 흔적을 구름이 고정시키는 한에서, 그것들은 자연의 기호들이다. <등가물>에서 스티글리츠는 이 자연의 기호들을 비자연 기호로 변환시키는 곡예를 수행했다. 다시 말해 구름이라는 자연의 기호를 사진이라는 문화의 언어로 전환시켰다. 

- 209쪽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파울라 또는 햇살, 베를린>, 1889년 



현재(2014년) 절판되어 시중에서 구하지 못한다면, 도서관에서라도 구해 읽으면 좋을 것이다. 특히 사진, 이미지, 미술사 전공자들에게 추천한다. 책의 난이도는 상당하지만, 의외로 재미있고 흥미롭다. 






사진인덱스현대미술

로잘린드크라우스저 | 최봉림역 | 궁리 | 2003.07.15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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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림이다 Conversation with David Hockney 

마틴 게이퍼드Martin Gayford(지음), 주은정(옮김), 디자인하우스 






미술평론가 마틴 게이퍼드Martin Gayford가 지난 10년 간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와 나눈 대화들을 모아 책으로 펴냈다. 책 제목은 <A Bigger Message : Conversation with David Hockney by Martin Gayford>, 한국 번역서의 제목은 <다시, 그림이다: 데이비드 호크니와의 대화> 




Mr and Mrs Clark and Percy

Acrylic on canvas, 1970-1971

305 cm × 213 cm, Acrylic on canvas, Tate Gallery, London




데이비드 호크니? 이 글을 읽는 이에게 데이비드 호크니를 설명해야 하나? 먼저 그는 화가다. 생존해 있는 영국 최고의 화가이며, 평단, 예술가, 화상 등을 가리지 않고 최고로 인정하는 예술가다. 그는 <명화의 비밀Secret Knowledge : Rediscovering the Lost Techniques of the Old Masters>이라는 책을 통해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와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를 통해 그림을 정교하게 그린 화가들을 보여주기도 했다. 르네상스 이후 몇몇 화가들이 사용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되던 방식을 대부분의 화가들이 이용하였음을 책을 통해 밝혔으며, 이 방식으로도 위대한 화가들을 따라잡지 못했음을 설득력 있게 기술하기도 했다(하지만, 논란거리만을 쫓는 평자들에겐 미술사에서 유명한 화가들이 사진과 같은 원리를 이용해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베겼다는 데에만 집중했고 일반 독자들에게도 그렇게 알려지기도 했다). 




명화의 비밀

데이비드호크니저 | 남경태역 | 한길아트 | 2003.10.01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나에게는 2000년대 후반 갔던 파리 피악Fiac(세계 3대 아트페어 중 하나)에서 내 눈을 단숨에 사로잡은 단 한 점의 풍경화를 그렸던 예술가이기도 하다. 지극히 편파적이긴 하지만, 데이비드 호크니만 제대로 알아도 현대 미술의 대부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만큼 데이비드 호크니는 사진, 영화, 무대 미술, 회화 까지 장르를 넘나들며 미술의 의미를 다시 묻고 있다) 






나도 그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대 미술을 이해하기 위해 어려운 미술 용어들로 도배되고 제대로 된 분석 없이 양식만 훑는 미술 입문서나 전문 교양 서적을 읽는다. 한 때 지적 허영에 가득 차, 그런 책들을 읽으며 우쭐대기도 했지만(그런 책들로 인해 우리가 조금이나마 앞으로 간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현대 미술이란 지독하게 어려운 것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일상 생활에선 사용하지 않을 단어를 써가며 미술 작품을 논하는 모습은, 진정 위대한 작품을 모독하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이 책, 이 대화집은 그런 전문 용어 따윈 거의 나오지 않는다. 원근법에 대한 기술은 다소 어려울 수 있겠지만, 대부분 그린다는 것, 본다는 것에 대해 집중한다. 



내가 사람들을 차에 태워 여기로 올 때 길이 무슨 색이냐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들은 대답하지 못했지요. 10분 후에 내가 같은 질문을 다시 하자 그들은 길의 색이 다르다는 점을 알아보았습니다. 그 후에 그들은 "길이 무슨 색인지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솔직히 그런 질문을 받지 않았다면 길의 색은 그저 길색일 뿐입니다. 무엇인가를 바라볼 때 자신이 보고 있는 것에 대해 항상 이와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래야 사물을 훨씬 더 명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84쪽) 





누군가는 이 책에 실린 호크니의 의견이 호크니만의 의견이라고 여길 지도 모른다. 그는 사진(카메라)은 기술일 뿐이고 작품으로서의 사진은 드로잉의 영역 속으로 들어와 있고, 영화는 드로잉에서 시작한 미술의 역사 속에서 사진을 거쳐 사진들의 연속물로서 미술의 역사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는 아이폰와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리며 포토샵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새로운 기술은 늘 자신을, 예술가를 흥분시킨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계가 사진처럼 보인다고 여깁니다. 나는 사진이 대부분 맞지만, 그것이 놓치고 있는 약간의 차이 때문에 사진이 세계로부터 크게 빗나간다고 늘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 지점이 내가 찾고 있었던 바입니다.(47쪽) 



드로잉과 흔적 만들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나 새로운 매체를 탐구하는 것을 즐길 것입니다. 나는 기술에 미친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시각적인 것은 어떤 것이나 나의 흥미를 끕니다. 매체는 흔적을 만들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것이지 흔적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98쪽) 




Place Furstenberg, Paris, August 7,8,9, 1985 #1

Photographic collage, 88.9 x 80 cm

Collection of the artist



이 책의 시작부터 끝까지 그는 어떻게 보고 어떻게 그리느냐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결국 드로잉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제대로 된 드로잉을 만들기 위해서는 자세히 끈질게 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네, 그렇죠. 그(반 고흐)가 그랬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맞습니다. 반 고흐는 많이 응시했을 겁니다. 틀림없이 아주 집중해서 보았을 겁니다. 사실 오랫동안 작업하면 눈이 아주 피곤해집니다. 그러면 그저 눈을 감아야 합니다. 전적으로 강렬한 응시를 했기 때문입니다. (185쪽) 



정말로 뛰어난 소묘화가에게는 공식이 없습니다. 각각의 이미지가 새롭습니다. 렘브란트와 프란시스코 고야, 피카소, 반 고흐의 작품이 그렇습니다. 렘브란트나 반 고흐의 작품에서는 같은 얼굴이 반복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작품에는 항상 개개인의 특징이 드러납니다. (187쪽) 




A Bigger Splash

1967, Acrylic on canvas

243.8 x 243.8 cm

Tate Gallery, London



현대 미술에 관심있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은 귀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이 책에는 정말 많은 예술가들의 이름이 나온다. 북유럽 예술가들의 한글 표기가 마음에 들지 않고(베르메르Vermeer를 페르메이르로 옮기고 있는 등 많은 이름이 다소 낯설게 - 영어 식인지 모르겠지만 - 옮겨졌다), 한 두 군데(내가 발견한) 오역이 보이지만, 이름과 작품 명 뒤에는 원문 표기가 되어 있고 문장은 쉽게 잘 읽히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 그리고 용지의 선택이 무척 마음에 들고 인쇄 품질도 좋다. 도판은 작지만 꽤 선명하다. 


이번 여름, 데이비드 호크니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본다면, 몰랐던, 혹은 알고 있다고 여겼던 미술을 새삼스럽게 다시 알게 되는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그림이다

마틴 게이퍼드저 | 주은정역 | 디자인하우스 | 2012.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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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 철학으로 읽기

조중걸저 | 한권의책 | 2013.03.04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몬드리안의 <구성>은 이러한 이념의 회화적 대응물이다. 거기에는 어떠한 종류의 재현적 요소도 없다. 그것은 서로 단지 네모들의 집합일 뿐이다. 세계는 결국 그와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의 추상적 창조물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이렇게 되어 모방으로써의 예술은 완전히 종말을 고한다. 이제 창조로써의 예술만이 남게 되었다.(307쪽) 



이렇게, 묵시록적으로 끝나는 이 책은 단순히 서양미술사에 대한 소개나 이해로만 머물지 않는다. 하나의 양식, 하나의 작품 속에는 우리가 미처 몰랐던 많은 것들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그것은 도상학적 해석으로만 이해되지 않는다. 예술(혹은 예술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온전히 그 시대로 돌아갈 필요가 있고, 그 시대의 생각, 사고, 감정, 웃음과 눈물을 편견없이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 책이 때로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그 시대로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기 때문이고, 그 시대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대부분이 스스로의 마음을 어루만지지도 못하는데, 어찌 과거로 돌아가 그 시대 사람의 마음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예술은 그렇게,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와는 다소 떨어진 어느 자리 쯤에 위치해 있고 지금의 예술가들이 변방에 있듯이(혹은 소수의 지지 속에서) 옛날에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예술은 나와는, 우리와는 참 멀리 있는 듯 느끼기도 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 책은 서양 미술의 역사에 대한 폭넓고 깊이 있는 이해를 줄 수 있는 몇 되지 않는 책들 중의 한 권이 될 것이다. 그것도 한국을 떠나, 세계적으로.


이 책에 대한 서평은 굳이 필요없다. 그냥 사서 읽으면 된다. 비단 예술에 관심있는 이뿐만 아니라 인문학에 관심있는 이들 모두에게 추천한다.



함수의 도입과 바로크baroque 예술의 발생은 필연적인 관계를 맺는다. 함수는 이제 근대 세계에 있어서 중시되기 시작한 운동법칙, 곧 인과율의 수학적 표현이었다. 바로크 예술가들은 이러한 함수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노력한 것이다. 따라서 바로크 예술의 역동성과 X축의 독립변수의 연속적 변화에 따른 종속변수의 운동법칙은 같은 것이다. 이것은 카라바조Caravaggio의 그림 몇 점만 보아도 금방 확인되는 사실이다. 

형이상학적 해명이 없는 예술사는 도상학이나 도상학적 연대기밖에는 되지 않는다. 필자는 인간의 정신이 그 이상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형이상학적 해명은 필자의 신념이다. 고딕은 단지 건축적 기법의 문제가 아니며, 다위니즘Dawinism은 하나의 생물학적 가설의 문제만은 아니다. 어떤 심미적이거나 학구적인 업적도 동시대의 세계관에서 자유롭지 않다. 오히려 그것들은 동시대 이념의 선구이거나 반영이다. (서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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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시미즈 레이나(지음), 박수지(옮김), 학산문화사 




La', tout n'est qu'ordre et beaute',

Luxe, calme et volupte' 

그 곳에선 모든 것이 질서와 아름다움,

호화로움, 조용함, 쾌락 뿐.

- 보들레르, <여행에의 초대> 중에서




나에게 행복이 있다면, 그건 길을 가다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이미 절판되어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책을 우연히 구하는 것. 1990년대 중반, 여행이라도 가게 되면, 나는 그 지역의 서점과 레코드샵을 찾아 다녔다. 작은 서점 구석에 낡은 문고판 책이나 문학 전집의 낱권을 샀다. 작은 도시의 서점에 있을 법 하지 않은 인문학 책을 구할 때면, 신기함마저 느끼곤 했다. 대학 시절, 얼마 안 되는 용돈이었으나, 그 돈으로 틈만 나면 책과 레코드를 사모았고, 결혼을 앞두고 작은 집으로 옮겨야 하는 탓에 절반 이상을 버리거나 나누어주었다. 그 시절, 대부분 나이가 지긋했던 서점 주인과 말할 틈은 없었지만, 그 때 한창 빠져 있던 재즈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던 레코드샵 주인들은 여럿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앳돼 보였을 텐데, 그 주인들은 나와 말을 섞어 주었다. 


시미즈 레이나의 이 책은 지금도 남아 영업을 계속하고 있는 세계의 서점들에 대한 기록집이다. 이 책을 펼치자마자, 나는 서점 하나 운영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짧은 글 대신 책 전체를 압도하는 것은 사진들이다. 그 사진들을 보며, 작은 서점을 운영하는 것. 한 구석에서 드립 커피를 내리고 오래된 턴테이블에 요요마의 바흐를 올려놓을 것이다. 모든 이들이 말리는 일이 될 테지만, 이 책 속 서점들처럼이라면야, ... 서점은 여행이고, 휴식이며, 즐거운 만남이다. 


온라인 서점에서의 위시리스트와 달리, 실제 서점에서는 예상치 못한 저자와의 만남이 있고 잊고 지내던 책들을 다시 볼 수 있다.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 책에 대해 서점 진열대는 나에게 알려준다. '네가 좋아할 만한 책이라고!' 


시미즈 레이나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은 책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책과 서점에 대한 추억이 있는 이들에게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책 속에도 나오긴 하지만, 몇몇 작가의 에세이와 인터뷰는 짧지만 여운이 길다. 책 속의 어떤 이처럼, 나도 갑작스레 내리는 비를 피하기 위해 서점에 간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마산 문화문고... 지난 2007년 폐업하였지만 ... 


참 잘 만들어진 책이다. 책 표지가 좋고 황홀한 색감으로 표현된 서점 사진들은 책 좋아하는 이들의 소박한 물욕과 숨겨진 여행에의 욕구를 부추긴다. 한 번 쯤은 읽고 볼 만한 책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시미즈 레이나저 | 박수지역 | 학산문화사 | 2013.10.25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많은 서점들이 나오지만, 아래 두 서점은 ... 기억해둘만했다. 


Bart's Books (미국 오하이오주) http://www.bartsbooksojai.com/  



파리의 '세익스피어앤컴퍼니' http://www.shakespeareandcompan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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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예찬

지오 폰티(지음), 김원(옮김), 열화당 





너무 늦게 이 책을 읽은 걸까. 나는 지오 폰티가 적어나가는 건축과 예술의 새로운 표현들을 접하며 건축이 왜 예술과 멀리 떨어지게 된 걸까 하는 의심을 했다. 아마 한국에서는 건축 관련 학과가 예술대학과 멀리 떨어진 탓이 클 것이라는 추측만 했고, 예술의 역사에서 건축이 가지는 의미를 다시 되새겼다. 


이 책, 놀라운 책이다. 지오 폰티는 우아하게 건축과 예술을 찬양하며 현대적 예술이 지향해야 되는 바를 이야기해준다. 



건축 속의 침묵으로 인해 건축을 사랑하라. 그 속에 건축의 목소리와 은밀함과 강한 노래가 감추어진 침묵으로 인해 (17쪽) 



기계는 존재하기 위해, 그리고 이바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역학의 소산이다. 건축은 꿈의 소산이다. 꿈과 같이, 건축은 움직이지 않는다. 꿈은 제자리에 머물다가 사라질 뿐이다. 건축은 정지해 있다. 정지한 생명, 다시 말해서 희열의 생명을 지닌다. (46쪽) 



건축과 예술에 대한 경구들의 모음집 같은 이 책은 한 줄 한 줄 읽어나가는 것이 안타까웠다. 실은 어느 주장은 내 생각과 달랐지만,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도리어 나는 왜 이 책을 이제서야 읽게 되었나 후회하고 있었다 


건축을 전공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건축이 지니는 형이상학적 가치가 무엇인지 일깨워줄 것이며, 다른 이들에게는 건축과 예술의 의미를 새롭게 깨우치게 해주는 책이 될 것이다. 




건축은 꿈에 속하는 것이다. 삶은 꿈이다. 예술은 그 꿈의 환영이다. 그 환영은 우리의 진리다. (189쪽) 





건축예찬

지오폰티저 | 김원역 | 열화당 | 2008.05.07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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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미술

브랜든 테일러 지음, 송기매 옮김, 예경, 2002

 


 

1970년대 이후의 현대 미술에 대한 책이다. 하지만 너무 많은 화가가 나오고 너무 많은 용어가 나온다. 당연, 이 책의 결론은 "혼란스러움"이다. 그러나 이를 '혼란'으로 볼 수도, '모색'으로 볼 수도 있다. 

 

모더니즘의 대안, 회화와 정치, 형식의 도난, 미술관 속의 미술, 정체성 이야기 등으로 구성된 이 책은 현대 예술가들의 다양한 실험과 고민들을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편견없는 시각에서 서술하고자 하는 저자의 이러한 노력은 이 책이 다소 밋밋하게 읽히는 데에 일조를 하고 있다.

 

2004년 문학동네 겨울호에서 가라타니 고진이 '문학'에 대해 다소 고전적인 발언을 한 강연 원고가 실려 지식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의 말, 문학은 실천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그것이 이상하고 낯선 말처럼 느껴지는 데에는 환상을 자극하고 현실을 뒤로 숨기려는 대중 매체의 영향이 큰 듯 보인다. 그런 점에서 문학은 현대 미술에 비해 한참 뒤쳐져 있다. (가라타니 고진의 언급은 별도의 책으로 번역, 출판되었다.)

 

다니엘 뷔렝은 1971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중앙에 두 조각으로 이루어진 줄 무늬 그림(아크릴,천)을 걸어놓았다. 그리고 전시 도중 미술관 측에 의해 철거당했다. 뷔렝은 '미술관 중앙에 걸려 있는 작품은 자기 도취적인 건축물 속에 모든 것을 종속시키려는, 건물 속에 감춰진 은밀한 기능을 여지없이 폭로한다'라고 말했다.



다니엘 뷔렌, <내부(구겐하임 미술관 중앙)>, 1971, 천에 아크릴


 

미술관이라는 공간이 억압적인 기구로서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1970년대는 시작한다. 후기산업사회라는 시대 속에서. 그리고 이 책은 정체성의 문제를 마지막 챕터로 소개한다. 1992년 에이즈로 죽은 데이비드 보냐로비치는 동성애에 일련의 작품들을 제작한다. 

 



Fuck You Faggot Fucker

David Wojnarowicz, 1984.

Black-and-white photographs, acrylic, and collage on masonite

48” x 48”.

Collection of Barry Blinderman, Normal, Illinois.



Untitled

David Wojnarowicz, 1992

실버 프린트에 실크스크린

4개의 에디션, 96.5*66cm 



책에 실려 있는 <무제>(1992년도 작)라는 작품은 실버 프린트에 실크스크린으로 제작되었으며 작품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때로 나는 사람들이 내가 어디에 있는지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미워하게 된다. 나는 텅 비어서, 완전하게 비어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는 것은 모두 시각적 형태, 나의 팔과 다리, 내 얼굴, 내 키와 내 자세, 그리고 내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목소리이다. 그러나 나는 너무 심하게 비어 있다. 정확히 1년 전의 나의 모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 작품을 발표한 그 해 그는 에이즈로 죽는다.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작품들은 '정치적'이다. 어딘가 뒤틀려있고 불만이 많으며 호소할 대상이 사라진 시대의 호소의 몸짓들을 보여준다. 실린 작품들을 보기 위해서라도 이 책을 구입할 필요가 있겠지만, 책을 읽고 얼마나 공감하게 될 것인가는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다. 


* * 


2014년에 이 책을 다시 꺼내 살펴본다는 것은 참 흥미롭다. 가령 이런 작품. 



Boyd Webb

<Nourish>, 1984

1.5 * 1.2m, 단색사진, 사우스 햄프턴 미술관 


보이드 웹의 이 사진은 고래의 젖꼭지를 빨고 있는 남자를 보여주고 있다. 책의 설명에는 '고래의 피부는 낡은 고무로 된 모형이고 젖꼭지는 인디언 채소(?)이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 * 


그리고 에이즈가 지금도 사회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언론에서, 지면에서 사라지자 마치 그 문제가 사라진 것처럼 여겨진다는 점은 흥미롭기만 하다. 


데이비드 보냐로비치의 작품은 아래 주소에서 볼 수 있다. 

https://www.visualaids.org/artists/detail/david-wojnarowicz



* 본 리뷰는 2004년 이 책을 읽고 쓴 글에다, 2014년에 덧붙였다. 그 때 당시에는 도판들을 인터넷으로 구할 수 없었는데, 이번에 찾아보니 상당히 많이 나온다. 이럴 때 격세지감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되는가 싶다. 




오늘의미술

브랜든테일러저 | 송기매역 | 예경 | 2002.01.30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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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흥미로운책이네요!^^

    • 1990년대까지만 나와 약간 아쉽긴 하지만, 그리고 모르는 작가들 이름이 수두룩한 탓에 다소 진도가 느리긴 하지만, 옆에 태블릿 PC나 노트북 놔두고 검색해가면서 흥미로운 작가들이 나왔을 때, 구글에서 관련 작품들 보며 읽으면 좋습니다. ~



세계 명화 비밀

모니카 봄 두첸(지음), 김현우(옮김), 생각의 나무 





이 책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고야의 <1808년 5월 3일>, 마네의 <올랭피아>, 고흐의 <해바라기>, 뭉크의 <절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잭슨 폴록의 <가을의 리듬>이라는 작품에 대해 쓰고 있다. 원제는 'The private life of a masterpiece'. 


일반 독자가 읽기에도 좋고 전문적인 식견을 가진 이가 읽기에도 나쁘지 않다.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개별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는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에서 잭슨 폴록의 <가을의 리듬>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었다. 하지만 고흐와 뭉크는 그들 삶의 아픔만큼 그들 작품이 가지는 울림은 어쩌지 못했다. 


도판도 나쁘지 않고 설명도 무리없이 읽힌다. 미술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권할만한 책이다. 


** 


"나는 매일 죽음과 함께 살았다. 나는 인간에게 가장 치명적인 두 가지 적을 안고 태어났는데, 그것은 폐병과 정신병이었다. ... ... 질병, 광기, 그리고 죽음은 내가 태어난 요람을 둘러싸고 있던 검은 천사들이었다" - 뭉크 


뭉크는 <병든 아이>라는 작품은 6개의 페인팅과 다수의 판화 작품으로 제작하며, 아래 작품은 그 첫 번째 작품이다. 열네살이 되던 해 결핵으로 죽은, 자신의 동생 소피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그려진 작품이다. 두첸의 설명은 이렇다. '그림의 소재 자체는 대단히 일상적인 것이었지만, 비평가들은 미완성처럼 보이는 작품의 낯선 감정적 스타일에 대해 적대적이고 모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 외 내 눈을 끌어당긴 여러 작품을 소개하고 싶지만, 다음 기회로 미룬다. 다만 뭉크는 나쁜 건강에도 불구하고 80세까지 살았으며, 말년에는 목가적인 작품들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의 초기작들이 너무 유명한 나머지, 뭉크에 대한 소개는 초반에만 국한되고 후기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나 또한 관심 없었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뭉크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 싶었다. 



The Sick Child

Edvard Munch, 1885-86

oil on canvas, 119.5 * 118.5cm 

오슬로국립미술관 






세계 명화 비밀

모니카 봄두첸저 | 김현우역 | 생각의나무 | 2006.10.01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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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부자들

오진희(지음), 머니플러스 




제목이 꽤 역설적이다. 그림으로 정신적 부자가 될 순 있겠으나, 물질적 부자는 글쎄다. 하지만 책의 제목과 상관없이 미술 시장과 관련된 책이 많이 출판되고 많이 읽혀지는 게 미술 시장 전체를 위해서 좋은 일이다. 


<<그림부자들>>은 현재 경제신문 기자가 미술 시장을 취재하고 체험하고 공부하면서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미술 시장에 대해서 궁금한 이들, 그리고 미술을 감상의 측면이 아닌 투자의 측면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적절하다. 그러나 딱 그 지점까지이다. 


도리어 이 책은 좀 더 좋은 책이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점에서 멈춰버린 느낌이다. 더 많은 컬렉터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더 좋은 작가들과의 인터뷰를 하며 한국 미술 시장과 관계된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면 이 책은 좀 더 좋은 책이 되었을 것이다. 


미술 관계자들에겐 이 책을 권하진 않는다. 





그림부자들

오진희저 | 머니플러스 | 2013.03.22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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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ntemporary Art를 '동시대 미술'로 옮겨야 하나? 이전에는 현대 미술로 옮겼는데, 이 잡지에 실린 정형탁 편집장의 글을 읽고 난 다음, 고민에 빠졌다. 


아서 단토A.Danto가 정의한 '예술의 종말' 이후 생긴 '컨템포러리'는 이제 더 이상 미술작품은 어떠해야 한다는 특수한 존재방식에 방점을 찍은 거다. 예술이 미학의 집으로 편입되었을 때 이미 이런 현상은 예견되었는지 모르겠다. 팝아트의 등장으로 미술의 고유한 가치를 찾으려는 목표는 허망한 것이 되었고 삶과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노력들이 생겨났다. (정형탁, '자살, 자본의 메타모프로시스' 중에서, 65쪽) 


(솔직히 정이 가지 않는) 미술 이론가 아서 단토를 인용하며, 그는 컨템포러리의 의미를 구한다. 굳이 저토록 진지해질 필요는 없어 보이지만 말이다. 다시 이야기해서 동시대 미술의 예술의 진지함, 심각함, 이론에의 집중을 벗어나고자 다양한 노력을 하는 것과 반대로 평론가들은 더 진지해지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 글은 '컨템포러리'의 의미를 구하고 있고, 도리어 '모든 게 예술이고 모두가 예술가다. 그런데 과연 그럴 수 있는가? 현실은 여전히 공고하게 시스템의 언어 속에서 작동한다'고 지적하며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바 '특수한 존재방식'이 있음에 저항해야 된다는 것이 이 글의 요지이긴 하다. 


그가 인용하는 알랭 바디우는 '다문화주의란, "화폐만을 통해 보편화되는 세계를 유지하기 위한 문화주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라고 비판'했다고 한다. 결국 돈이 문제인가? 


2.

이 잡지 - Contemporary Art Journal 2011년 Vol.7'도 거의 2년만에 읽었다. 올해 읽은 책 수를 세어보니 잡지를 포함해도 20권이 되지 않았다. 일상이 바빠지니, 독서나 전시 관람에 쏟는 시간이 해가 갈수록 줄어든다. 그런데 이 줄어드는 시간만큼 내 관심사는 더 넓어지니, 이를 어쩌면 좋으랴. 


3. 

근데 사실 '스칼라 마인드Scholar mind'와 '크리틱 마인드Critic mind'는 구별된다고 보거든요. 스칼라 마인드는 가치 중립이거든요. 크리틱 마인드가 되려면 어떤 것을 그래도 선호해야 됩니다.자기가 보는 전형이 있어야 되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 그것 때문에 많이 고민했어요. 그 당시에도 고민했고. 지금에서야 어떠냐 하면은 둘 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 김복영, 대담 중에서, 15쪽 


4. 

이러한 논리에 따른다면, 한국 사회에서 자살률이 높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외부의 충격이 한국 사람들이 견디어 내기 힘들만큼 크거나, 아니면 외부의 충격이 크지는 않지만 한국 사람들의 내부가 취약하거나 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자살률이 빠르게 증가하는 이유 역시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외부의 충격이 점점 더 강해지거나, 한국 사람들의 내부가 점점 더 취약하거나 이다. 

- 이홍균, '자살의 사회적 원인' 중에서, 41쪽 


5. 

이제는 화가도 필요 없다. 작가도 필요 없다. 음악가도 필요 없다. 조각가도 필요 없다. 종교도 필요 없다. 공화당도 필요없다. 왕당파도 필요 없다. 제국주의도 필요 없다. 무정부주의자도 필요 없다. 사회주의자도 필요 없다. 볼셰비키도 필요 없다. 정치가도 필요 없다. 프롤레타리아도 필요 없다. 민주주의자도 필요 없다. 군대도 필요 없다. 경찰도 필요 없다. 민족도 필요 없다. 이 모든 천치들은 필요 없다. 더 이상 아무 것도 필요 없다. 아무 것도. 아무 것도. 그리하여 새로움이라는 것도 결국엔, 지금 우리가 원치 않는 그 모든 것들, 똑같은 것으로 변하겠지만, 우리는 다만 그것이 덜 썩어 빠진 것이 되기를 바라며, 너무 빨리 '그로테스크한' 것으로 변하지 않기를 바란다. 

- 루이 아라공Louis Aragon, 1920년 2월 5일, 다다 제 2선언. (정형탁의 글 중에서 재인용, 66쪽) 


6. 

1917년 뒤샹이 변기를 출품한 앙데팡당전에 강사로 초빙받은 시인이자 미술평론가였던 아르튀르 크라방Arthur Cravant은 예술적 제스처로 스스로 자살을 선택하기도 했다.

- 정형탁, '자살, 자본의 메타모르포시스' 중에서, 67쪽 


7.

장 - 루이 뿌아트뱅의 '자살: 불가능한 매뉴얼'이라는 아티클은 주의 깊게 읽어볼만 했으나, 한편으로는 끔찍하기도 했다. 자살을 직접적으로 예술 작품의 소재나 주제, 더 나아가 퍼포먼스의 일환으로 다룬 여러 사례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 잡지야 전문가들이 읽을 터이지만, 이 공개된 공간에서 인용하기에는 끔찍하기만 하다. 몇 사례는 너무 끔찍한 탓에, 크리스 버든 Chris Burden의 초기 작품인 Shoot은 애교스러울 정도이다. 






이와 같은 자살에 관한 접근 중 가장 의미 있는 예시들은 60년대 말 비엔나 출신의 2명의 예술가, 귄터 브루스Gunter Brus와 루돌프 슈바르츠코글러Rudolph Schwarzkogler에 의해 주도된 활동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 당시 슈바르츠코글러는 공개적으로 퍼포먼스를 펼친 것이 아니라 단지 사진 시리즈를 위해서만 퍼포먼스를 한 유일한 아티스트였다. (...) 실제로 그는 29살의 나이에 창문에서 뛰어내림으로서 다른 인생, 앙토닌 아르토Antonin Artaud가 주목한 '익명의 삶과 우주에 연결된 신체', 그리고 질 들뢰즈Gilles Deleuze가 명명한 '기관 없는 신체le corps sans organe'에 대한 사색의 행위와 통찰을 끝내버렸다. 

- 82쪽


자살은 도덕이나 재현과 관련된 존재의 경계만을 밝히는 미학의 주제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내밀한 결합, 내면과 심리, 상상 속에 판타즘과 실천 가능한 행동의 주제가 되었다. 

- 82쪽


자살을 예술과 삶의 영역에서 다룰 때 야기되는 한계는 항상 같은 것이다. : 우리는 자살을 보여줄 수 없고, 단지 이것에 대한 준비와 결과만을 보여줄 수 있다. 아직 어떤 작가도 자신의 자살을 연출하거나 사진, 비디오로 촬영하지는 않았다. 

- 83쪽 



9. 

그 외 읽을만한 글이 많았다. 이제 작업을 하는 이들과 술 한 잔 할 여유마저도 사라져 버렸지만, 가끔 읽는 이런 잡지도 사소한 위안을 구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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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술가들은 자살조차도 예술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겠지요. 그런데 자살할만큼 힘들어 하는 사람과 자살로 인해 고통받는 남은 사람들을 보면 어디까지가 한계인가하는 질문이 생길 것 같아요. 아니면 그 질문조차 의미없는 것일까요?

    • 위의 사례로 등장한 것은 자살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지점으로 몰린 우리의 모습을 가감없이 드러내어 심리적 해소를 기대하고 있다고 할까. 하지만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자살에 이르는 어떤 감정이나 태도에 대해 위로하고 치유하려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살에 몰린 사람들을 위한 예술 참여 치료가 좀 더 활성화되어야 할 것 같고요. ... 뭐랄까, ... 위 내용과는 무관한 것이지만, 저는 한국 사회, 한국 사람들 스스로가 자신들을 자살로 몰고 가는 것같아요.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고 비난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자신의 가족을 채찍질하고 ... 안 되면 남 탓, 사회 탓을 하고는 결국 극단적인 시도를 하는 ... 뭔가 나라 전체적으로 잘못되어 있다고 할까 그런 생각을 요즘 자주 하게 됩니다. ㅜㅜ;;

현대예술 : 형이상학적 해명 - 10점
조중걸 지음/지혜정원




현대예술 : 형이상학적 해명 

조중걸(지음), 지혜정원 




읽고 난 다음 서평을 쓰지 못하는 책들이 있다. 쓰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책에 대한 소개 대신 무조건 '읽어라'라고 하는 편이 낫고, 몇 문장의 인용은 도리오 책에 대한 누(累)가 되어 인용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서평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에 대한 시도이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글이란 서문 일부의 인용 정도가 되지 않을까? 



언어학, 인류학, 기호학 등의 연구에 매달렸던 많은 사람들이 나름의 통찰에 준해 현대의 형성에 공헌했다. 그러나 이것들이 현대라는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형이상학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것들 역시도 현대의 한 현상일 따름이다. 이 책은 이러한 성취의 이면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포착하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이 연구는 탐구의 탐구이며, 설명의 설명이다. 독특하고 때때로 도발적으로 느껴지는 낯선 현대 예술은 이러한 토대 위에서만 포괄적으로 설명된다. 궁극적인 도전에 의해서만 현대예술과 그 예술가들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 20세기의 새로운 언어학이나 분석철학이 현대를 설명하기보다는 현대가 오히려 새로운 학문들을 해명한다. 현대의 저변을 형성하는 형이상학에 대한 고찰만이 언어학이나 기호학의 본질적 의미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현대예술은 언어학이나 기호학과 병존한다. 모두가 현대의 형이상학 위에 기초한다. 모든 것은 물결 위의 포말이다. 하상엔 굴곡진 형이상학이 있다. 

현대에 시도된 다채로운 예술적 성취들은 당혹과 분노, 경멸과 외면의 대상이기도 했다. 현대예술은 감상자들을 소외시키며 발생했다. 사람들은 새로움이 가져다주는 이익에보다는 손해와 결여와 책임에 훨씬 민감하다. 과거는 금의 시대이고 현대는 타락한 시대이다. 현대는 그러나 모든 시대가 그렇듯이 가치중립적이다. 다른 어떤 시대, 다른 어떤 생활 양식이 현대에 비해 더 많은 가치와 미덕을 지닌 것도 아니었다. 현대에 이르러 더 많은 자율성과 독립성에 대한 요구가 증가한 만큼 증가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공평한 인식이 현대에 대한 이해를 높일 것이다. 혐오는 때때로 몰이해와 무지가 동기이다. 파라켈수스가 말한 바 "지식이 사랑을 부른다"

현대예술은 야유와 냉소를 동반한다. 진정한 예술은 감상적 위안을 거부한다. 깊이와 진실은 언제나 자기 부정을 전제하듯이 현대의 유의미한 성취는 전통과의 완전한 단절에서 출발한다. 전현대성에 젖은 시대착오적 센티멘탈리스트들이 현대에 대해 느끼는 거부감은 그러므로 이들의 자기부정의 부정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자기만족과 자기위안보다 더 역겨운 것도 없다. (8쪽 - 10쪽) 



아마 이 책을 읽을 독자들은 경험하게 되는 바, 어렵고 난해하게 여겨지는 문장들을 읽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심지어 감동까지 받을 수 있다는 것에 놀라게 될 것이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현대예술을 알게 되고, 철학 전반에 대해서, 나 자신과 우리 시대에 대한 깊이있는 공감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독서의 놀라움을 전해준다. 고작 책 한 권인데... 하지만 어떤 책 한 권은 어떤 이에게는 그동안 알고 있었던 모든 것들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놓기도 한다. 바로 이 책, <<현대예술 - 형이상학적 해명>>처럼. 


그리고 이 책은 내가 아는 한에 있어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깊은 이해를 도울 수 있다. 실제 포스트모더니즘 작품, 특히 서사문학에서의 사례들 - 리처드 브라우티건, 움베르토 에코, 존 파울즈,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도널드 바셀미, 저지 코진스키, 마르케스 등에 이르는 문학작품들에 대한 이해와 분석은 한국어로 씌여진 바 최고의 책이다. 


강력하게 추천하는 바, 일독을 권한다. 아마 책을 펼치는 순간, 덮지 못할 것이며, 자연스럽게 두 세 번 읽게 되겠지만. 



책의 속 표지에 적힌 문구. '불안 속의 영혼들에게'. ... 어쩌면 이 책만큼 절망에 빠진 현대의 우리들에게 위안이 될만한 책이 또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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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점
에블린 페레 크리스탱 지음, 김진화 옮김/눌와


벽 - 건축으로의 여행
에블린 페레 크리스탱(지음), 김진화(옮김), 눌와 



벽에 대한 짧은 에세이다. 건축가인 저자는 건축물로서, 우리가 마주 보며 살아가는 공간으로서의 벽에 대한 여행과 생각을 조용히 들려준다. 그 목소리가 매력적인 이유는 그녀가 '벽'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좋은 수필의 밑바닥에는 늘 '사랑'이 깔려있다. 


신체적 접촉을 통해서 얻게 되는 벽에 대한 지각은 차라리 감각적으로 느끼는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햇볕으로 따뜻하게 데워진 벽에 어깨를 기대고 있으면 우리를 받쳐주고 있는 벽의 든든함과 온기를 느낄 수 있다. 동시에 곧게 서 있는 벽, 견고하게 자리하고 있는 벽을 지각할 수 있다. 휴식을 취한다는 것이 꼭 침대나 땅 위에 길게 누웠을 때에만 가능하다고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 11쪽 


벽의 온기... 아마 이런 기억.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다니는 학교 앞에서 한참 동안 기대고 있었던 담벼락. 또는 여자아이가 살던 집 옆 골목길 담벼락에 숨겨져 있던 따뜻했던 느낌같은 것. 

책의 초반은 벽의 재료나 건축적 의미를 묻지만, 책의 후반은 문학적 해석으로 채워진다. 그래서 초반은 딱딱하고 다소 지루한 느낌을 받을 수 있지만, 후반은 흥미롭고 재미있다. 

기억이나 꿈, 상상은 벽의 정신적 이미지를, 다시 말해 벽이라는 물성으로부터 거리를 둔 상징적 가치를 가지는 벽을 재현시킨다. 이런 상징적 기능을 통하여 벽은 또 다른 존재성을 가진다. 즉, 벽은 인간과 직접 맺은 물질, 도구적 관계를 떠나 자신을 생각하는 주체를 밖에서 자신을 실현하고 다시 새로운 형태로 상상과 실제 속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 107쪽 


우리가 매일 만나면서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 벽. 눈에 보이는 건축물이면서도, 마음 속으로 뻗어나가는 상상적 공간이기도 한 벽. 두껍고 무거운 벽에서부터 현대 건축물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유리로 된 벽까지. 

이 책은 벽에 대한 짧고 매혹적인 찬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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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건축 - 상 - 10점
나카무라 요시후미 지음, 정영희 옮김/다빈치

 

 

 

 정통 현대건축의 금욕적인 표현에 건축가들이 이제 더는 주눅들 필요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순수한 것'보다는 이것저것 뒤섞인 혼성품이, '정확하고 깔끔한' 것보다는 적절히 타협한 것이, '쉽고 단순한' 것보다는 한 번 비튼 것이, '분명하게 표현된' 것보다는 애매한 것이, (... ...) 의도적으로 '계획된' 것보다는 관습적인 평범한 것이, 배제하는 것보다는 수용하는 것이, 혁신적이면서도 남겨진 흔적을 지닌 것이, 직접적이고 명쾌한 것보다는 모순에 가득 차 있으며 불분명한 것이 좋다. 나는 명확한 통일감보다는 너저분해도 생동감 있는 것을 중시한다. 나는 불합리성을 인정하고 이중성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나는 의미가 명료한 것보다는 의미가 풍부한 것이, 밖으로 드러나는 기능만큼이나 내부에 감춰진 기능이 좋다. 그리고 둘 중 어느 하나를 고르기보다는 둘 모두를, 즉 흑이냐 백이냐 선택하기보다는 흑과 백 모두, 때로는 회색을 택한다.

- 로버트 벤투리, "건축의 다양성과 대립성 Complexity and Contradiction in Architecture"(1966) 중에서 (<<내 마음의 건축>>, 상권 67쪽에서 재인용)

 

 

 

출처: http://www.paperny.com/venturi.html

 

 

1월에 읽은 책을 이제서야 블로그에 옮긴다. 하지만 기억은 가물가물하고 ... 상하권으로 나누어진 나카무라 요시후미의 '내 마음의 건축'은 잔잔하고 서정적이면서도 현대 건축이 우리에게, 혹은 그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잘 알 수 있게 해준다. 

 

어느 새 우리 주변에는 딱딱하고 건조하기만 한 건물들로 빼곡하게 둘러쳐져 있다. 획일화된 아파트들, 사무용 빌딩들, 도시는 딱딱해져가고 사람들은 대화보다 침묵을 먼저 배우기 시작했다. 풍경의 일부로서의 건축이 아니라 풍경과 건축은 별도의 영역을 가지며, 즉물적인 풍경마저도 도시 안에선 무의미하게 방치되었다.

 

이런 세태에, 요시후미의 이 책은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우리가 살아가는 곳의, 우리가 생활하는 - 잠 자고 먹고 마시며, 책을 읽기도 하고 잠시 앉아서 쉬기도 하는 공간으로서의 건축에 대한 의미를 다시 되새기게 해준다. 

 

특히 로버트 벤투리Robert Venturi의 '어머니의 집Mother's House'는 현대 건축, 혹은 기하학적인 공간이 어떻게 우리 일상과 만나는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또한 요시후미는 스톡홀름 시립도서관을 소개하며 책을 읽고 보관하는 공간에 대해 사색하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향수'에 등장한 폐허가 된 성당 - 산 갈가노 성당 Abbazia di San Galgano 을 찾아가기도 하고, 안동 하회 마을에서 지내면서, 정작 우리는 잊고 지내던 옛 조선 건축에 대해 칭찬하기도 한다.

 

책은 도판을 위해 크고 양장으로 제작되었으나, 글은 짧고 여유로우며 진솔하다. 도판은 풍부해서 저자가 소개하는 물의 다양한 면면을 확인할 수 있어 좋다. 기회가 닿는다면, 이 책 읽기를 권한다.

 

 

 

하권에 대한 리뷰

2012/03/11 - [책들의 우주/예술] - 내 마음의 건축 - 하, 나카무라 요시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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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 이야기 - 2점
아서 단토 지음, 이혜경 엮음, 박선령 옮김/명진출판사

 

앤디 워홀에 대한 원고 청탁을 받지 않았다면, 나는 이 책을 읽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보고 충격과 경악에 휩싸일 수 밖에 없었다. 단연코 이런 출판 기획물 따윈 없어져야 된다.

 

아서 단토는 앤디 워홀에 관한 한 탁월한 비평가이다. 실은 앤디 워홀이 비평적 찬사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아서 단토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런 단토가 앤디 워홀에 대해 책을 썼다면, 과연 어떤 책일까?

 

확실하게 이 번역서는 아닐 거라는 생각에, 찾아보았다.

 

뉴욕타임즈에 아서 단토의 '앤디 워홀' 1장이 실려있었다.

http://www.nytimes.com/2009/12/13/books/excerpt-andy-warhol.html?pagewanted=all 

 

맙소사! 도대체 이 기괴한 번역서는 무엇이란 말인가! 너무 황당해서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거참, 이런 식으로 책이 나올 수 있다는 생각에, ... 할 말이 없다.

 

아마존에 어느 독자는 이렇게 리뷰해 놓았다.

Like all philosophers' ponderings, this book is more about Arthur Danto than it is about Andy Warhol.

(모든 철학자들의 생각들처럼, 이 책은 앤디 워홀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아서 단토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출판사는 '청소년 롤모델 시리즈'로 번역 출판했다. 그것도 번역을 하고 내용이 어려워서 따로 엮었단다. ㅜ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Andy Warhol by Arthur C. Danto

http://www.amazon.com/Warhol-Icons-America-Arthur-Danto/dp/0300169086/ref=sr_1_1?ie=UTF8&qid=1333210951&sr=8-1

 

(* 그나저나 이 책을 읽고 놀라운 별표를 선사한 일반 독자는 무슨 죄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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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건축 - 하 - 10점
나카무라 요시후미 지음, 정영희 옮김/다빈치

 

 
일요일 아침, 조심스럽게 일어나 서재로 와서 밀린 독서를 하였습니다. 독서가 내 인생 최대의 즐거움이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난 뒤로는 제 독서는 가족의 즐거운 일상을 방해하는 이기적인 취미가 되어버렸습니다. 아내에겐 이런저런 수다를 할 남편이 필요하고 이제 겨우 백일이 되어가는 아이에겐 눈을 마주칠 아빠가 필요합니다. 그러니 제 독서란 아주 이기적인 것이지요.

하지만 습관은 어쩌지 못하는 탓에,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아내와 아이를 방해하지 않고 일어나는 조심스러움이 일요일 아침의 키폰인트인 셈입니다.

나카무라 요시후미의 이 책은 블로그 이웃이신 하늘바다 님께서 추천해주셨습니다. 이 책은 상권, 하권, 이렇게 두 권으로 나왔는데, 저는 이 책을, 여행을 가서 자연 풍경보다는 사람 사는 공간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무조건 읽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자인 나카무라 요시후미도 건축도 그런 것이라 여깁니다. 그런 탓에 찰스 무어Charles Moore의 아래 말을 습관처럼 인용하곤 합니다.


"위대한 건축물을 실감하는 최상의 방법은 그 건축물 안에서 잠을 깨는 것이다."



기분 탓인지, 상권이 하권보다 나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둘의 차이는 크게 없습니다. 이렇게 하권부터 리뷰를 올리는 것은 상권은 지난 1월에 읽었고 하권은 오늘 다 읽은 탓입니다(상권에 대한 서평도 조만간 할 생각입니다만...). 

하권에 소개된 건축물 중에 제 관심을 끌었던 것은 '단 가즈오의 집'입니다. 단 가즈오, 일본의 작가인데, 국내에는 아직 번역 소개되지 않았습니다. 저도 일본 문학들 속에서 몇 번 이름만 접한 작가입니다. 단 가즈오에게 집이란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러나 아래로 축 처진 초가지붕 아래 온돌방이 있고 저녁 불빛이 아련하게 새어나오고 온돌방을 데우는 연기가 초가지붕 주위를 감싸며 올라가는 한국 저녁 풍경은 나 같은 타향 사람에게조차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인간의 거처라는 생각이 들었다. (...) 나는 예전부터 온돌방 한 칸뿐인 생활에 대해 오래도록 헛된 집착을 가져왔으며 나머지는 부엌과 변소면 충분하다... 복잡한 짐도 없는 그 온돌방 안에서 유유자적 늙어가고 싶은 소망이 있다. 
- <<맛있는 방랑기>> 중에


저도 단 가즈오처럼 그런 집을 꿈꾸지만, 그건 그저 꿈이겠지요.

이 책을 읽으면서, 건축물이란 사람과 함께 하는 곳이고 사람이 사라진 뒤에도 그 사람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진정한 건축물이란 그 누구-사람이든 자연이든-도 서로 해하지 않으며 그 사이로 들어가 조화를 이루며 평화를 추구한다고 할까요.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후미가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건축물들 모두 그러한 건축물입니다. 


'내 마음의 건축'이라는 제목이 붙여있긴 하지만, 실은 사람이 살고 생활하는 공간에 대한 책이며, 그 공간을 계획하고 만드는 이들에 대한 책이기도 합니다. 하권 마지막에 저자의 후기 속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 지나치게 계획성을 추구하지 말 것
- 낙천적일 것 



이 두 구절이 참 마음에 와닿습니다. 마치 모든 것들을 행할 때의 태도라고 할까요. 얼마 전 '혼다 이펙트Honda Effect'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습니다. 경영학을 전공한 이들이라면 수업 중에 한 번쯤 들어보았을 이 단어는 비즈니스의 성공이 철저한 사전 시장 조사, 치밀한 전략, 그리고 그것에 기반한 실행이라고 여기기 쉽지만, 실제로는 계획된 것을 재빠르게 수정하고 그 때 그 때 환경에 맞추어 학습하고 빠르게 실행하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실제 혼다 오토바이가 미국 시장에서 성공한 것도 그 때문이기도 하죠. 그러니 지나친 계획성은 도리어 우리의 걸음을 늦게 만들 수도 있는 법입니다. 또한 약간 허술해 보이는 계획이라도 낙천적일 땐 그 계획을 끊임없이 수정하며 앞으로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저자 후기의 저 두 구절이 마음에 와닿은 이유입니다. 

하권의 첫 건축물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작업이고, 마지막 건축물은 루이스 칸Louis Kahn의 작업입니다. 그 두 건축물의 사진을 옮깁니다. 루이스 칸의 솔크연구소는 정말 한 번 가보고 싶네요.  


http://blog.parisinsights.com/?cat=18
르 코르뷔지에 '사보아 주택'


http://patriciamguevara.blogspot.com/2011/01/salk-institute.html
루이스 칸, 솔크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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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테일러의 <<근대의 사회적 상상>>에 나오는 주석인데, 바로크Baroque 문화, 혹은 시대에 대한 언급이 있어 이렇게 메모해 둔다. 미술사 뿐만 아니라 문화사나 지성사에 있어서도 바로크 양식은 매우 중요하다. 고대와 대비되는 근대, 그리고 현대적 삶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는 근대, 그리고 바로크는 그 근대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문화적 양식이기 때문이다.

찰스 테일러는 루이 뒤프레(Louis Dupre')에 기대어 바로크에 대해 언급하였고, 아래 내용은 그 각주이다. 그리고 이 글은 기억의 보조적 수단으로서의 저장이다. 이 각주에서 엿보이는 뒤프레는 바로크에 와서야 중세적 질서가 근대적 질서 속에 종합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종합의 긴장이 바로크 양식을 이룬다는 것. 일견 타당하기도 하지만, 너무 중세적 질서의 영향력을 높이 평가한 것은 아닐까 싶다. '12세기 르네상스론'이 있듯이 어쩌면 중세적 질서(창조주 신을 중심으로 하는 위계적 질서와 이 질서에 유비된 현실적 질서)마저도 바로크가 나오기 이미 오래 전부터 무너진 어떤 것일 지도 모른다.



물론 이렇게 슬쩍 지나가는 언급 뒤에는 거창하고 복잡한 명제가 놓여 있다.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바로크 문화란 일종의 종합명제라는 것이다. 즉 행위자가 세계에 질서를 구축하는, 내면적이고 창조적인(poietic) 존재라는 근대적 이해방식과 형상(Form)에 의해 틀 지어진 우주(cosmos)로서의 세계라는 더 오래된 이해 방식 간의 종합 말이다. 나중에야 우리는 이 종합 명제를 불완전한 것이며 교체될 운명을 지닌 것으로 보게 되었는데, 이는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진실이 무엇이건 간에, 우리는 바로크 문화 속에서 일종의 구조적인 긴장을 볼 수 있다. 그 긴장은 질서와 행위자들 사이에서 나온다. 즉 거기에 이미 존재하는 위계적인 질서 그리고 자신들의 구성적 활동을 통해 그 질서를 지속시키고 완성하는 행위자들 사이의 긴장인 것이다. 이 행위자들은 자신이 스스로의 동기에 따라 행동한다고 생각하며, 그런 의미에서 위계 질서의 바깥에 있고 평등하다고 본다. 그리고 [그들 자신을] 그와 필적한 것의 밖에 위치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루이 14세의 말과 같은 혼성적 정식화는 그로부터 나온 것이다.

나는 뒤프레(Dupre)의 책에 제시된 바로크 예술에 대한 흥미로운 서술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Dupre, Passage to Modernity, pp. 237 ~ 248. 뒤프레는 바로크가 인간 행위주체성과 그것이 발생시키는 세계 사이의 "최후의 포괄적인 종합 명제"라고 말한다. 거기서 이 행위주체성에 의해 발생한 의미들과 우리가 세상 속에서 발견한 의미들에서는 어떤 관계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긴장과 갈등으로 가득 찬 종합명제이다.

바로크 교회는 정적인 질서로서의 우주보다는 신에 이러한 긴장의 초점을 맞춘다. 이 신의 힘과 신성은 우주 속에서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하향성의 힘은 인간의 행위주체성에 의해 취해지며 또 앞으로 나아간다. "따로 떨어진 권력의 중심으로 개념화된, 신적인 질서와 인간적인 질서 사이에서 근대적인 긴장을 빚어내면서"(226) 말이다.

뒤프레는 바로크 문화가 "포괄적이며 영적인 비전"에 의해 통합되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그 중심에는 발생 중인 세계에 형식과 구조를 줄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가진 개인이 있다. 하지만 - 그리고 여기에 그것의 종교적 의미가 있다 - 그 중심은 여전히 초월적인 근원과 수직적으로 연결된 채 남아 있다. 인간 창조자는 매개체들이 하강하는 단계를 거침으로써 그 근원으로부터 자신의 힘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렇게 - 인간적이며 신적인 - 이중의 중심이 바로크의 세계상을 중세의 수직적인 세계상과 구별 짓는다. 중세의 세계상에서는 실재가 단일한 초월적 지점으로부터 내려오기 때문이다. 르네상스의 몇몇 특색 안에서 미리 나타난 바 있는, 이후의 근대성이 지닌 확실하게 수평적인 세계상 또한 마찬가지이다. 두 중심 사이의 긴장이야 말로 바로크에 복잡적이고 불안정하면서도 역동적인 특성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237)
- 찰스 테일러, <<근대의 사회적 상상>>, 128 -129


아래 관련 글 2개를 올린다. 하나는 찰스 테일러 책에 대한 간단한 서평이고, 하나는 바로크 예술에 대한 글이다. 서양미술사 책을 내기 전에 요약, 메모해놓은 글이다. 이젠 미술 관련 글을 쓸 시간조차 없이 바쁘니...





뒤프레의 책도 꽤 재미있을 것같은데.... 읽을 시간이 있을까. ㅡ_ㅡ;;


 
Louis Dupre, Passage to Moder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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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렌 그리모의 특별 수업 - 8점
엘렌 그리모 지음, 김남주 옮김/현실문화연구(현문서가)


엘렌 그리모의 특별 수업
엘렌 그리모(지음), 김남주(옮김), 현실문화


진정한 행복이란 피상적인 행복에 만족하지 않는 데 있다. 훌륭한 그림이나 시나 노래에 스스로를 헌신하듯 행복에 자신의 삶을 바쳐야 하는 것이다. 매일, 매순간에 자신만의 붓질, 자신만의 표현, 자신만의 음을 입혀야 한다. 멋진 작품은 저자가 자신 안으로 침잠해 그 바닥을 파내 그 안을 삶으로 가득 채우기를 원한다. 진정한 행복이란 새 한 마리, 돌 하나, 나무 하나가 태양에 연결된 빛처럼 에덴에 소속된 그 낙원을, 그 에덴을 되찾는 데 있다. 행복이란 그런 완벽한 조화, 사랑에 빠진 오르페우스의 노래, 천사의 날개가 우리를 스칠 때 우리 영혼에서 나오는 노래다. 일단 그런 상태에 도달하고 나면 그 무엇도 이 조화를 깨뜨릴 수 없다. 행복은 이제 눈문에서가 아니라 샘에서 솟아나기 때문이다. 고유한 힘을 지닌 채 조화의 양만을 품고 확고한 목표를 갖고 매순간 각 사물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행복은 고통도 죽음도 폐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들을 혼돈에서 구해낼 뿐이다.
- 248쪽


오가는 지하철에서 그녀의 책을 읽었다. 그녀의 최근 연주들은 무척 좋다('무척'이라는 것이 다소 편파적으로 들릴 지도 모르겠다. 실은 몇몇 평자들은 엘렌 그리모는 그녀의 외모 덕을 많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이 책을 읽으면 피아니스트로서의 엘렌 그리모가 명확하게 다가온다. 그녀의 생각, 그녀의 문장, 그녀의 꿈을 읽으며 그녀의 연주에 한 발 더 다가가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참 좋은 책이다.

하지만 그녀의 연주를 들어본 적이 없다거나, 그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어떨까? 나같이 까다로운 독자에게는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마음 착한 소녀가 세상을 마냥 아름답게만 보는 책이라고 할까. 문장 표현력도 나쁘지 않지만, 너무 착하다고 할까... 그녀의 피아노 소리도 그렇다. ... 이쁘다..


Helene Grimaud plays the "Adagio" from Mozart's Piano Concerto no.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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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문고판 책을 꺼내 읽는다. 한창 공부를 할 때다. 1990년대 후반, 이 책은 지방의 작은 서점에서 - 지금은 없어졌을 - 구했다. 짧지만, 내용은 탄탄하고 전문적이다.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에 대해 짧지만, 매우 정확한 언급이 담겨있다.

'오뒷세이아'는 같은 10년이란 긴 세월동안의 표류와 귀국을 41일 속에 압축한다. 사건은 극적으로 무서운 속도로 진행된다. 호메로스의 말은 유창하면서 단순하고 기교적이면서도 그 기교를 느끼게 하지 않고, 자유로이, 미끄러히, 장대히 흘러간다. 장려한, 인간을 초월한 광휘 속에 절절한 애조를 띠며 말해진다. 어떠한 용사라 할지라도 인간의 아들로서 태어난 자의 힘의 한계와 세상의 덧없음을 알고 있다. 이것이 다만 강하기만 한 영웅을 만들지 않고 강함과 애처로움이 상접한다. 그러나 이 세계는 결코 체념이나 미신의 세계가 아니다. 지극히 밝은 것이다. 이윽고 언젠가는 죽어야 할 운명에 처한 인간은 신들의 행운을 얻지 못할지라도 절망에는 빠지지 않는다. 아니, 반대로 그러하기에 노력을 쌓아 영원불멸의 이름을 얻으려 한다. 이것이 그리이스 문학, 아니 그리이스인 전체의 하나의 특징이다. 그들은 인간의 아들인 것의 한계를 뼛 속 깊이 느끼고 있었다. 그러므로 인간이 중요한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 중에 인간만큼 덧없는 것은 없다. 그리이스 문학에서 되풀이 강조되는 이러한 생각과, 이것을 어떻게 해서든 밀쳐 버리려는 분투와 노력, 거기에 그리이스 인간성의 하나의 유래가 있다.
- 코우즈 하게시루 & 사이토 닌즈이 지음, '그리이스 로마의 고전문학', 이재호 옮김, 43쪽, 탐구당, 1982년



그리스의 고전 문학이 아직도 호소력이 있고 가슴 절절한 이유는 인간이 가지고, 가질 수 밖에 없는 본질적인 질문-우리는 누구이고, 왜 살아가는가?-에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대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세의 작가들은 여기에서 배워, 인간이기에 자신의 영혼과 생의 고결함을 지키고 살아가야 하는, 도대체 어떻게 할 수 없는 현실적 비극 상황 속에서 살아내는 어떤 생명력 - 베르그송이 찬탄했던 엘랑 비탈과 같은 - 을 그려내게 된 것이다.

위대한 고전주의는 그리스 문학에서 그려졌던 바의, 그런 인간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조형적 대응물은 '슬픔에 잠긴 아테나(Mourning Athena)'가 될 것이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로 등장했던 아테나. 이 여신의 모습에서 우리는 인간 도시의 운명에 대한 아테나의 숙고를 만나게 된다.




'슬픔에 잠긴 아테나'는 파르테논의 조각에 비하면 거의 소품에 지나지 않으나 완전한 의기소침 상태를 완벽하게 통어된 형식으로써 표현하고 있는 점이라든가, 일체의 무리하고 경련적이고 무절제한 느낌을 말끔히 극복하고 있다는 점, 그 자유롭고 경쾌하면서도 침착하고 의젓한 점 등에서 그리스 고전주의의 예술 이외에서는 이에 비견할 작품이 없을 정도이다. - 아놀드 하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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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미술산책 가이드
류동현,심정원 공저, 마로니에북스





"발을 내딛는 순간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세상에는 그런 매혹적인 길이 있다. 한 번 내딛으면 나도 모르는 새 푹 빠져 드는 그런 길. '미술'이라는 길이 바로 그렇다. 이 책은 미술에 관심 있는 독자들을 미술 현장으로 이끌기 위해 쓴 가이드북이다."



저자들은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말미술여행'을 운영하기 시작한 다음부터 미술 전시에는 관심있으나, 선뜻 나서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책이 없을까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 책 한 권을 서점에서 샀습니다. 책은 무척 좋습니다. 문장은 평이하면서도 미술 전문가들이 일반 관람객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다 적고 있었습니다.


주요 미술관, 갤러리들 뿐만 아니라 미술 감상법에 대해서도 적고 있는 이 책은 저자들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씌여져, 쉽고 재미있으며, 귀에 쏙쏙 들어온다고 할까요. 길을 가다 잠시 쉬어가는 카페에 앉아 아무 페이지나 펼치고 읽어도 될 정도로 부담없이 읽을 수 있습니다.

읽기 쉽다고 필요한 내용을 놓치지 않습니다.  올 가을 좋은 전시들이 여러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오래 미술을 사랑할 작정이라면, 미술 전시를 보러가려는데 뭔가 가이드북 한 권 필요하신 분들께 이 책을 선뜻 추천합니다.






서울 미술산책 가이드 - 10점
류동현.심정원 지음/마로니에북스





올댓 주말미술여행 출시
미술 전시 정보/리뷰, 미술 서적 및 미술 관련 칼럼 등으로 이루어진 '올댓 주말미술여행'이라는 어플을 출시하였습니다. 이 어플은 SKT의 지원을 받아 TNM에서 제작한 콘텐츠 어플입니다. 매주 업데이트를 할 예정으로 있으며, 금요일이나 토요일, 이 어플로 주말에 가볼 만한 전시 정보를 확인하실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많은 이용 바라며, 주위에도 많이 추천해주세요~.

QR코드: 안드로이드마켓에서 다운받아 설치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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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에 자리할 수 없는 불가능성들이 존재하는 황야에서의 고독.
문학은 우리를 그러한 황야로 이끈다. 문학은 언제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한다.
- 레비나스


한참 머뭇거렸다. 마치 내가 소설을 쓰지 못하는 이유와 내가 소설을 쓰고 싶은 이유를 담아낸 듯한 저 문장 앞에서.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사물들을 말들로부터 벗어나게 하며, 존재로 하여금 메아리가 울리는 근원적인 언어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일 게다. 사물들의 존재는 작품 속에 명명된 것이 아니라 말하여지는 것이며, 말들은 사물들의 부재를 가리킨다.
- 레비나스


그렇다면 한국어 문학 중에 그런 문학이 있었던 걸까?

오늘 잠시 들른 서점에서 모리스 블랑쇼 선집이 나온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알았다. 기분이 묘했다.
블랑쇼.
매혹적이면서 기묘한 고유명사이다.
 
침묵은 언어를 낳고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낳는다. 그리고 그 곳을 지배하는 것은 우리 영혼의 심연. 그리고 어두움. 내가 꿈꾸는 언어가 있다면 밝혀지지 않은 어두움 속으로 빨려들어가 사라지는, 존재하지 않는 언어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뒷걸음질치고 있는 것이다.




모리스 블랑쇼에 대하여
에마누엘 레비나스 저/박규현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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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깊이 있고 멋진 문장을 만들어내는 사람들 보면 참 대단해요. 전 평생 그렇게 못할 것 같아요. 그런건 타고 나는게 아닐까 싶어요. 그래도 살아있는 동안 부끄럽지 않은 소설 하나 쓰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지 않아요.

    • 그건 저도 마찬가지랍니다. 소설 하나 쓰는 목표를 가지고 노년을 향하는 것도 꽤 멋진 소망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그런 마음(꿈)을 가지고 있다면 언젠가 그걸 하고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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