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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현대미술 +164



은주

유현경, oil on canvas

180*140cm, 2017 

출처: http://www.mu-um.com/?mid=02&act=dtl&idx=2370



화가와 모델은 마주 보는 거울처럼 각자 서로의 모습을 비추거나 튕겨내면서 시시각각으로 어떤 예기치 못한 장면들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두 시선이 팽팽하게 밀고 당기는 힘이 균형점에 도달할 무렵, 작품의 의미가 완성된다.

'은주'라는 작품도 그런 과정을 통해 구성해낸 결과물이다. 이 작업을 하는 동안 작가는 막막하고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모델은 아무 것도 후련하게 내보이지 않았고, 화가는 뭘 포착해야 할 지 몰라 미로 속을 헤맸다. 

- 이주은, <모델, 화가 그리고 예술권력>, 중앙일보 2018년 3월 3일 



이주은의 글을 보고 작품이 무척 궁금했다. 일요일 오전 메모해둔 노트를 우연히 발견하고 작품을 찾아보았다. 작가의 말대로 작품은 어딘가 막막하고 답답해 보였지만, 그건 작가가 아니라 모델이 그래서 그런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니 모델을 잘 옮긴 셈이다. 


우리는 자주(너무 자주) 막막하고 답답한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 해결하거나 명확해져야 된다고 믿는다. 그렇게 이 문명이 만들어졌고 철학에서 말하는 바 '이성'이란 것도 그렇다. 이성이란 기본적으로 기하학적이며 인과율의 노예다. 결과가 있으면 무조건 원인이 있어야만 한다. 원인을 규명하지 못하면 그건 이성이 탐구해야 될 영역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단연코 도덕이란 없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진짜 그런 걸까. 


현대의 반-이성주의는 여기에 기초해 있다. 즉 이 세상은 너무 자주 우리를 막막하고 답답하게 만들고 그렇게 버려두고 저 멀리 우리를 원인도 모를 어딘가로 내몰고 있기 때문이다. 실존주의자들이 한결같이 절망에 휩싸이는 것도 이 때문이고 현대의 예술가들이 끝없는 실험의 방황 속으로 뛰어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바야흐로 현대란 이 문명의 기조를 정한 어떤 것, 기하학적이며 인과율적인 것들에 대해 반기를 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냥 막막하고 답답한 게 원래 이 세상이라 여기고 그대로 옮길 순 없는 걸까. 그리고 마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처럼. 그것을 그대로 옮기면 되는 것이다. 현대의 어떤 이론에 따르면, 그 막막하고 답답한 풍경을 마주하고 해답을 찾아나가는 건 작가가 아니라 관람객이다. 현대 예술의 장점은 어쩌면 이런 무책임함(?)이 아닐까. 그래서 저자는 사라지고 익명의 관람객들만 남아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 그리고 어느 순간 그 관람객들이 캔버스에 담기게 될 것이다. 


전시 보러가지 않은 지 참 오래되었다. 나도 조금은 무책임해진 건 아닐까. 내가 사랑하는 장소들과 존재들에 대해서. 그런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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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규철 -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Ahn Kyuchul - Invisible Land of Love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 2015

2015.09.15 - 2016.5.22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전시실 5 



고립과 격리는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에서 공간의 중심적 특성이 된다. 입구의 금붕어들은 고립된 자신만의 공간에서 맴돌고, 필경사의 방은 참가자를 위한 격리실(Klausur), 예배실 또는 일종의 감옥이 되며, 64개의 방은 자발적인 고립과 실종을 위한 미로가 된다. 침묵의 방에 이르러 이러한 격리는 물리적 경계를 넘어 끝없는 우주적 공허, 아무 것도 없음, '지금 여기'가 없는 상태의 경험으로 이어진다. 일상공간으로부터의 단절, 타인들로부터의 격리, 홀로 남은 자의 고독은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로 가는 여정, 피할 수 없는 항해의 과정이다. 스님들의 묵언수행, 기도하는 사람들의 합장과 눈감기, 우리가 학교에서 보내는 그 긴 침묵의 시간들은 모두 같은 길을 향하고 있다. 

- 전시 브로셔에서. 




기억을 더듬는다. 전시에 대한 기억. 안규철 그리고 마종기. 몇 개의 이미지. 문장들. 참여와 경험. 현대미술은 이제 이미지를 넘어 참여, 실천, 경험을 향한다. 20세기적 비전은 사라지고 21세기는 고대적 이상을 불러 일으킨다. 빠르게 발달하는 인쇄, 미디어 기술은 예술의 범위를 확장시킬 것이라고 여겨졌지만, 도리어 예술는 더 폐쇄적으로 변한다. 그래서 같은 공간에서의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체험과 공유만이 진정 예술을 즐길 수 있는 어떤 것이라 말한다. 


그래서 안규철의 작업은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지고 구성되면서 앞으로 나아가 사라진다. 


기억의 벽, 2015 


그래서 현대미술은 종종 자기의 공간을 한정시키고 단절시키면서 동시에 참여자의 경험을 극대화시키려고 한다. 일종의 반-일상적 공간과 사건을 제공하면서 일상에 숨겨진, 진정한 의미를 상기시키려는 듯하다. 그것이 성공하든지, 실패하든지 상관하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 


결국 현대미술를 사랑한다면,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계속 돌아다니며 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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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토버 

2017.12.8 - 2018.1.31. 

아르코미술관 제 2 전시실 




몇몇 작품들은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대단한 느낌은 없었다. 결국 설치작품들은 규모와 공간의 문제일까. 스펙터클이 중요한 것일까. 꼭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작품을 보기 전에 작품에 대한 설명을 읽거나 들어야 한다는 것은 작품의 해석과 수용에 치명적이다. 결국 조형 예술이 활자언어에 종속되어 그것의 해석/비평에만 의지하게 된다. 무채색의, 별 감흥없이 서있다가 설명을 듣거나 읽었을 때야 비로서 '아'하고 반응한다면, 그것은 독립적인 조형작품이 아니다. 대체로 이 전시의 작품들이 그랬다. 


현대 미술은 너무 자주 비평적 언어에 종속되어, 먼저 개념적 어젠다를 설정한 후, 마치 개념의 설계도를 따라가듯 작품이 만들어지거나, 그렇게 전시된다. 러시아 혁명에 대해 살펴보면서 한국 현대를 이야기하고자 한 이 전시는 실패했다. 애초에 '러시아 혁명'은 우리로부터, 일반 대중으로부터 너무 멀리 있다. 즉 관객과 공감하기 어려운 주제다. 프랑스 혁명의 귀결이 '나폴레옹'이듯 러시아 혁명의 귀결은 '스탈린 체제'와 '냉전'이다. 차라리 혁명이 아니라, 혁명을 부르게 되는 상황에 주목하고, 그 상황에 대한 보다 나은 해결책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엄밀하게 말해 예술가의 역할로 보긴 어렵거나 제한적일 것이다. 


이상엽의 사진이나 양유연, 이우성의 작품은 이미 보았다. 양유연의 최근 작품은 처음이었으나, 그 변화가 나쁘지 않았다. 페인팅에서의 스타일의 변화는 사각 평면에 담긴 것 뿐만 아니라 사각의 평면을 어떻게 구성하는가, 페인팅이 담기는 매체, 또는 형태도 중요하다. 이상엽의 사진은 잘 알려져 있는 작품들이다. 



전시 팜플릿에 이번 전시에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을 옮긴다. 



- 지금도 자본주의는 여전히 지배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지만, 다른 체제로의 이행은 역사적 필연일 것이다. 비록 지금은 존속하지 않지만, 100년 전 인류의 한 사회는 자본주의와는 다른 길로 사회주의 혁명을 관철했다. 러시아혁명이라 명명되는 이 사건은 인류의 역사에 내재되어 있던 본성을 끄집어낸 사건이었으며,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유토피라와 같은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 이 전시 <<옥토버>>는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일어났던 러시아혁명에 주목하면서도 한국사회에서의 계급투쟁과 계급적대를 한국의 근현대사와 당대의 운동을 통해 고찰하고자 한다. 


- 이처럼 <<옥토버>>는 시대와 상황은 다르지만, 지배/피지배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계급적대와 계급투쟁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며, 더 나은 사회와 체제를 이성적으로 열망하고 희망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사회의 진보적인 힘에 대해 예술언어는 어떻게 응답하는지를 담아내고자 한다. 




양유연, 얼룩, 장지에 아크릴릭, 198x138cm, 2017




이상엽, 자본주의_모스크바, 종이에 잉크젯, 100x150cm, 2004



이상엽_울란우데, 부랴트공화국_Epson 9800 K3 ink, Hahnemuhle paper, monochrome_17×17 _2006


이상엽_모스크바, 러시아_Epson 9800 K3 ink, Hahnemuhle paper, monochrome_11×14 _2007 



이상엽의 사진 작품 몇 개 더 찾아 올린다. 사진이 좋은 점은 실제 보는 것과 모니터로 보는 것과의 차이가 다른 장르보다 덜하다는 것이다. 양유연이나 이우성의 작품은 실제로 봐야 하지만.. 



이우성의 아르코 전시 작품 이미지는 구하지 못했다. 대신 학고재 전시 풍경을 학고재 웹사이트에서 일부 옮긴다. 학고재






2009/02/09 - [예술의 우주/리뷰] - 그림 좋다 展 과 Propose 展 - 순수와 상업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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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용 The Invisible Dragon: Essays on Beauty 

데이브 하키(지음), 박대정(옮김), 마음산책, 2011년 




몇 번 읽다가 만 책이다. 구입하려고 목록에 올려놓았다가 다른 책들에 밀려 결국 사지 않은 책이기도 하다.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X 포트폴리오>에 속한 몇몇 보기 어려운 작품을 국내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책이기도 하다. 


 

X Portfolio

Robert Mapplethorpe (United States, 1946-1989)

1978

Photographs; portfolios

Black clamshell case with gelatin silver photographs

Closed: 14 13/16 x 14 x 1 15/16 in. (37.62 x 35.56 x 4.92 cm); Open: 14 13/16 x 29 3/4 in. (37.62 x 75.57 cm)



안타깝게도 로버트 메이플소트의 <X 포트폴리오>는 위 사진정도만 보여줄 수 있음을. 대신 LA카운티미술관 웹사이트에선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작품을 볼 수 있지만, 심신미약자들이나 보수적 신앙심에 불타오르는 이들에겐 권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의 계기는 저 작품 때문이었다. 사람들, 특히 미국 (상업주의) 사회가 보여준 아름다움에 대한 위선적 태도때문이었다.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아름다운 포르노성 사진이 공공장소에 전시되면서 이를 둘러싼 논쟁이 일었는데, 이 논쟁의 모든 면에서 지식인들의 부정직성이라는 돌림병이 침투했다. 이것이 그가 아름다움에 관한 글을 쓰게 된 실제 계기였다. 비굴한 태도를 부르는 이 스캔들에 휩쓸린 사람들이 모두 산적 떼처럼 거짓말을 했으며 영리한 위선의 옷을 입었다. 모두 이 일의 귀추에 대한 이해관계로 얽혀 있었다. 모두에게 돈이 걸린 문제였다. 비평가인 저자가 그 논쟁에 참여한 이유는 오로지 맨해튼 다운타운 시절부터 로버트 메이플소프와 친구였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 16쪽 



책은 재미있다. 다소 과격한 어조로, 산만하게 여러 이론가들을 오가며, 아름다움에 대한 부조리와 위선을 드러내고자 저자는 고분분투한다. 현대 미술에 대한 지식인들과 치료기관들(*)의 오해와 위선에 대해 공격하며 그것이 어떻게 잘못되었는가를 지적한다. 그래서 이 책은 새로운 이론이나 작품에 대한 해석을 담고 있지 않다. 오로지 허위에 대한 공격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데이브 하키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아름다움의 인간적 속성들은 로마의 신들처럼 수없이 많고 다양하며 효용 면에서 놀랍도록 비슷하다. 그것들은 우리가 필요로 할 때 손 닿는 곳에 있다. 새로움, 친숙함, 오래됨, 자율, 드묾, 신성, 변덕, 장엄, 기발함, 공모, 효용 등이 그런 것이다. 이들이 당장에 띠는 가치가 우리의 제물을 바칠 사당을 결정한다. 우리가 눈앞에 있는 구체화한 외관과 닮음의 장관을 - 소유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와 우리 자신 너머의 모든 것 사이의 공간을 좁히는 다신교적 포용으로 그 장관에 합류하기 위해 - 마음껏 받아들일 자유를 느낀다면 결코 자신의 욕망을 미심쩍어하는 일은 없다. 

- 171쪽 



아마 보들레르의 말처럼, "아름다움은 행복을 추구하는 습관적인 방식만큼이나 종류가 많"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    * 


현대미술에 대한 여러 이슈들 중 한 가지가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작품들과 같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기에) 과격한 방식의 소재나 주제, 표현방식으로 제작된 작품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이고 전시하며 해석할 것인가다. 이 점에서 데이브 하키는 명확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래서 인접 학문을 전공하고 현대 미술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이들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 대부분은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작품들이 주는 무한한 감동을 알지 못한다. 역겹고 추악하며 구토를 유발하는 작품들 앞에 서서 왜 우리들 중 일부는 열광하고 눈물을 흘리는가를 그들은 알지 못하면서 현대 미술에 대해 떠든다. 더 심각한 경우는 부게로나 제롬과 같은 위선와 허위에 가득찬 19세기 작품들을 예로 들며 도상학적 해석을 이어나갈 때, 작품은 감상과 감동의 대상이 아닌 지적 해석의 수단으로만 존재하게 만든다. 그들 대부분은 왜 마크 로스코 작품 앞에서 우리가 움직이지 못하는지 알지 못한다. 마크 로스코 작품 앞에서 서면 오로지 나와 작품만 존재하는 흥미로운 경험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아마 데이브 하키도 그런 심정이었을까. 이미 죽은 친구 메이플소프의 작품들 두고 역겨운 비난을 일삼는 이들을 앞에 두고 말이다. 




Dave Hickey(1940 ~ )





*치료기관: 데이브 하키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치료기관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조롱한다. 그것은 예술작품을 그들의 시각으로 서열화하고 해석하며 위치지우기 때문이며, 이를 교묘하게 전파하여 세뇌하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용 - 8점
데이브 히키 지음, 박대정 옮김/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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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AF 2016 (Korea International Art Fair)

10.13 - 16. 코엑스 



매년 키아프를 가다가 최근 몇 년 뜸했다. 정신없이 바쁘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미술과의 관계도 소원해지기도 했고 미술 종사자들과의 교류도 많이 끊어졌다. 한 달에 두 세 번씩 보러 가던 전시도, 지금은 몇 달에 한 번 갈까 말까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나 싶기도 하고 살아간다는 게 이런 건가 싶기도 하다. 그 사이 미술 애호가가 늘었나 기대해보기도 하지만, 늘 그렇듯 미술 애호가도, 미술 시장도 제 자리 걸음이다.


독서 인구를 조사해봤더니 늘지는 않고 책 읽는 사람들은 더 책을 읽으려고 노력한다나. 미술도 그런 건 아닐까. 어느 순간 부의 상징처럼 미술 작품을 소장하고 소장한 사람들끼리 서로 환담을 나누고. 그래서 책 읽는 사람이나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나, 자기 주위에 그런 사람들만 있으니 옛날보다 늘어났을 것이라 오해한다. 실은 온라인의 발달로 끼리끼리 교류가 더 편해졌을 뿐인데. 


아트페어는 역시 아트페어다. 미술관에서의 전시와 아트페어에서의 전시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고, 아트페어는 일종의 시장이고 박람회다. 그래서 아트페어에서 볼 수 있는 작가나 작품의 스펙트럼은 한정적이다. 그렇다고 아트페어에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작품이 팔리지 않는 작가라고 오해해서도 안 된다. 다 팔려서 아트페어에 나올 작품이 없을 수도 있다. 다만 키아프의 스페트럼은 많이 좁다고 할까. 일종의 축제여야 하는데, 올핸 그런 분위기도 없는 것같고 그런 작품들도 드물었다. 시장성 뿐만 아니라 예술성을 가진 작품들도 많이 선보였으면 좋았을 텐데. 가령 최근 많은 기업들에서 아트컬렉션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러한 기업들의 예술 수집 활동을 보여준다거나 .... 하지만 시장성은 더 강화된 걸까. 2015년 180억원에서 2016년 235억원으로 거래액이 늘어났다고 하니, 내년엔 좀 더 나아지려나. 


이번 키아프에서는 참가한 지방 갤러리 수준이 예사롭지 않았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낯선 갤러리들이 많고 그 갤러리들이 전시한 작가들도 새로웠다.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큰 모험인가는 갤러리 일을 해본 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작가들을 발굴하는 젊은 갤러리들이 늘어나야 한다고 교과서같은 말을 적어보지만, 쉽지 않다. 그런 갤러리들을 많은 애호가들이 지지해 주어야 하고 작가들도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비평이나 담론의 문제가 아니라 역시 시장의 문제다. 시장이 뒷받침해주어야만 좋은 갤러리가 살아남는다. 


하지만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맨날 미술 평론가들이 떠들어봤자 아무 소용없다. 작품이 팔려야 된다. 그래야 갤러리도 임대료 내고 전기세 내고 작가들은 캔버스 사고 물감 살 수 있다. 공적 기금만 바라지 말고 말이다. (공적 기금과 갤러리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한때 꿈이 갤러리 운영이었는데, 이제 꿈 많던 철없던 시절의 백일몽같은 게 되어버렸다.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걸 보면, ... 아직 철이 덜 든 건가. 2016년 키아프에서 만난 기억 남는 작품 몇 점의 이미지를 올려본다. 




홍경택의 작품이다. 홍경택은 늘 그렇듯 정답이다. 홍경택의 작품은 실제로 봐야 안다. 그 날카로움, 그 치열한 날카로움 속에 담긴 무한한 애정과 열정을. 



김덕용의 작품은 언제나, 그 재료가 주는 따뜻함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낮은 목소리로 우리를 이끈다. 그러고 보니, 참 오랜만에 김덕용의 작품을 보았다. 


안창홍의 작품이다. 역시! 팔렸다. 


김택상의 작품이다. 기존의 단색화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접근법을 가지고 있지만, 그걸 알아차리고 이해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동시에 최근 한국 단색화에 대한 재조명도 다소 부담스럽다고 할까. (그나저나 김택상 선생님께 한 번 연락드리고 만나야 하는데 말이다.) 


 

김현숙의 작품이다.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 대단해 보였다. 작가에게 필요한 것은 먼저 성실성이다. 그 다음이 재능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훌쩍 뛰어오르는 순간이 있다. (몇 년 만에 얼굴을 뵈었는데, 그대로였다.) 


마이클 크레이그-마틴의 작품이다. 워낙 유명한 작가이니, 설명을 생략해도 될려나. 하지만 이런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했던 20세기 중후반과 달리 지금은 너무 쉽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왜 일까. 


가끔 읽게 되는 미술 잡지에서 매달 가볼 만한 전시를 노트하곤 하는데, 가는 일은 거의 없다. 하긴 아는 이가 전시를 하고 전시 기획을 해도 못 가는 마당에. 2017년에는 좀 달라지려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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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디컬 뮤지엄 - 동시대 미술관에서 무엇이 '동시대적'인가? 

클래어 비숍 Claire Bishop (지음), 구정연 외 (옮김), 현실문화 

(저자의  website: http://clairebishopresearch.blogspot.kr/)



지난 가을, 키아프(Korea International Art Fair)를 갔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달은, 차고, 이지러진다>> 전을 관람했다. 이 두 이벤트의 묘한 대비는 무척 흥미로웠고 나에게 고민거리를 던져주었지만, 그 뿐이었다. 키아프만 간 사람들과 국립현대미술관에만 간 사람들 사이의, 두 경향의 현대미술전시가 보여주는 간극이 메워지지 않을 듯 느껴졌다면, 심한 비약일까. 아트페어와 미술관의 전시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여기에서 같은 미술관 공간이라도 비엔날레같은 행사라면, 또 달라진다. 


이를테면 조르조 아감벤은 동시대를 시간적 파열temporal rupture에 근거한 상태로 상정하고, 이렇게 쓰고 있다. 동시대적임contemporariness은 "시차와 시대착오를 통해 시대에 들러붙음으로써 시대와 맺는 관계이다." 그리고 이같은 시기창조나 '시간의 차이'에 의해서만 자신이 사는 시대를 진정하게 응시할 수 있다. 그는 동시대적임을 "시대의 어둠에 시선을 고정하고" "펑크낼 수 밖에 없는 약속시간을 지키는 것"으로 묘사했다. 시대착오는 또한 이 문제와 씨름하는 몇 안 되는 미술사가 중의 한 명인 테리 스미스의 독해에도 스며들어 있다. 그는 동시대를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담론 모두의 반대편에 놓아야 한다고 설득력 있게 주장해 왔는데, 동시대가 이율배반과 비동시성의 특징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즉 전 지구적 통신 시스템의 확산과 소위 시장 논리의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동시적이고 양립할 수 없는 상이한 근대성의 공존, 여전히 진행 중인 사회적 불평등과 차이가 지속하고 있는 현상이 그것이라는 것이다.(30쪽 ~ 31쪽)



클레어 비숍은 동시대 미술이라는 단어에 주목하면서 '동시대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설명한다. 그리고 동시대 미술을 전시하는 공간으로서의 미술관을 이야기하고 그 역할에 주목한다. 


그들은 1퍼센트의 이름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현재 혹은 과거에) 주변화되고 열외로 취급되고 억압받은 구성원들의 관심사와 역사를 대변하고자 한다. [물론] 이 미술관들이 예술을 역사 일반에 예속시킨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보다는 시각생산물의 세계를 동원하여 예술이 역사의 바른 편에 서야 하는 필연성을 이끌어내고자 한다는 것이다. (11쪽) 


그리고 세 개의 미술관을 소개한다. 네덜란드 에이트호번의 반 아베 미술관, 마드리드의 레이나소피아 미술관, 슬로베니아 류블랴나의 메텔코바 동시대 미술관. 


이처럼 역사를 현재 지향적으로 접근하는 일은, 미래를 보는 시선으로 오늘을 이해하게 해주고, 국가적 자부심 또는 헤게모니가 아닌, 창조적인 질문과 문제 제기의 이름으로 말하는 능동적이고 역사적인 행위자로서 미술관을 다시 상상하게 한다. (...) 결과적으로 이 제안은 예술작품과 다큐멘터리 자료, 사본, 복원물을 끊임없이 병치함으로써 오브제를 탈물신화한다. 동시대적인 것은 시대구분이나 담론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역사 시기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 혹은 실천이 된다. (97쪽) 


미술이론 전문서적인 탓에 일반 독자에게 권할 성격의 책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우리는 미술관의 존재와 위상, 그리고 그 가치와 필요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대부분 공적 기금을 통해 운영되는 미술관들은 자주 논란에 휩싸인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이나 서울시립미술관이 그 예가 될 수 있겠다. 그리고 그 반대편의 리움미술관이나 일민미술관, 혹은 아트선재센터 등과 같이 기업들이 후원하는 미술관을 보면, 우리는 많은 것들을 고민해야만 할 것이다. 


실은 지방의 국공립미술관의 상황은 더 열악하다고 해야 한다. 이 점에서 열악하다는 말은 여러 뜻을 포함하고 있는데, 전시 기획도 어려울 뿐더러 막상 오픈하면 관람객들도 많지 않다. 아마 국공립미술관에 대한 예산 삭감 문제는 비단 우리나라 뿐 아니라 많은 서방 국가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점에서 클레어 비숍의 책은 동시대성이라는 관점에서 미술관에 대해 묻고 있지만, 이 질문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의 미술관에 대해 전반적으로 다시 묻게 된다. 


미술관계자에겐 일독을 권한다.  (그런데 현대미술이론 서적은 다 왜 이렇게 단어들을 어렵게 사용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철학책보다 더 어렵다고 느끼는 건 나만 그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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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



가나아트 컬렉션 앤솔러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어느 대담에서 미술관에 들어가기 전과 미술관에 들어가 작품 감상을 하고 나온 후, 거리 가로수 이파리의 색이 달라져 있을 거라고, 세상 풍경이 더 생생해지고 풍요로워졌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미술관에 들어가 작품을 둘러보고 나오는 일상이 우리들의 삶과 얼마나 멀리 동떨어져 있는가를 생각할 때면, 참 서글픈 생각이 든다. 나 또한 일반인들의 그런 일상을 무너뜨리고 미술 - 순수 미술 - 과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을 한 때 고민하고 실천하기도 했지만,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한가람미술관에서 가끔, 인상주의전을 하기만 하면, 비싼 입장료를 내고 길게 줄을 서서 들어가는 사람들을 보면, 더 절망스러운데, 그들 대부분 미술을 좋아하고 그걸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 전시에 가게 된 다른 목적 - 아이들의 교육이나 일종의 허영의식 - 이 더 커 보이기 때문이다. (한때 미술 작품 구입도 이와 비슷했다. 적어도 미술을 사랑하고 어느 정도 감식안이 생긴 후에 작품 구입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나, 전혀 그렇지 못하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느 정도 컬렉션이 되는 이들은 아예 갤러리 후원을 하거나 갤러리를 직접 운영해버린다.) 


정작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서울시립미술관엔 관람객이 적다. 토요일 오후라면 사람들로 북적이지 않을까 했으나, 의외로 한가하다. 서울시립미술관의 한가로운 풍경은 지방의 국공립미술관의 그것을 예상케한다. 그리고 이는 정부나 지자체 예산 문제와 이어진다. 실은 미술관의 태만도 일부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학교에서의 미술을 포함한 예술 교육 전반이 잘못된 것인데 말이다. 그러므로 국공립미술관에 관람객 수가 적다고 하여 예산을 깎기보다는 도리어 학교에서의 예술, 특히 미술 교육과 연계된 국공립미술관의 역량 강화가 무엇보다 필요하며, 이에 따른 예산을 늘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글쎄다. 정치인들 중에 예술 교육에 관심 있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련지. (명품엔 관심 많겠지만!)


'가나안트 컬렉션 앤솔로지' 전은 2001년 가나아트 이호재 대표로부터 기증받은 200점의 작품 중 24명 작가의 대표적인 민중미술 작품 28점을 선보이는 전시다. 대부분 1980년대 만들어진 작품으로 정치적 메시지가 확연히 드러나는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 열리고 있는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16 전(~11월 20일까지)과 확연히 다른 느낌으로 들어왔다가 그냥 나가는 이도 보았지만 '민중미술'이라는 한국 미술 역사의 한 장면을 연출하였으며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중견 작가들의 초기 작품들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전시임에 분명하다. 작품이 전시되고 있는 작가들은 강요배, 권순철, 김봉준, 김용태, 김정헌, 김호득, 김호석, 민정기, 박불똥, 손상기, 손장섭, 신학철, 심정수, 한성금, 안창홍, 오윤, 이종구, 임옥상, 정복수, 홍선웅, 홍성담, 홍순모, 황재형 등이다. 


강요배, 심정수, 손상기의 작품만 스크랩해본다. 조각가 심정수의 작품은 이번이 처음이었거나 예전에 보았으나 무심코 흘려보낸 듯하다. 강요배와 손상기의 작품은 예전부터 좋아했고. 그 외 김호득, 안창홍, 정복수의 작품들을 좋아했다. 


맥잡기

강요배( 1952~) 

종이에 포스터컬러, 200×200cm, 1983 

(출처: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


하지만 강요배의 근작들만 이들에게 위 작품은 참으로 낯선 것이다. 미술관 측의 작품 설명 일부를 옮긴다. 


강요배는 민중미술 1세대 작가로서, 주로 사회의 모순에 대해 발언하는 작품을 발표하였다. <맥잡기>는 작가가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 활동하던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장식적인 색채 등 민화풍의 소박하고 고졸한 표현 방식으로 그려진 정사각형의 작품이다. 화면 중앙에 흰 무명바지와 저고리를 입고 머리에 흰 천을 두른 한 청년이 쭈그리고 앉아있다. 양손에 나뭇가지를 붙잡고 맥잡기를 시도하고 있는데, 검은 구름이 가득한 하늘은 배경으로 화면 맨 위 중앙에는 '건곤(乾坤)'의 괘가 그려져 있다. (...) 작가는 급속한 서구화가 가져온 전통 문화의 붕괴 현실을 고발하고, 강한 극복의지를 표출하고자 하였다. - 전시설명 중에서



백로즈음

강요배

 Acrylic on canvas, 97×130cm, 2012

(출처: http://topclass.chosun.com/board/view.asp?tnu=201305100007 )


최근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서정성 밑에 굳고 일관된 역사 의식이 숨겨져 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민중미술로 시작하여 현재에 이른 강요배 작품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는 것도 꽤 의미 있을 것같다. 



오늘

심정수(1942~)

동, 103x147x64cm, 1990 

(출처: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


심정수는 사회와 괴리된기존의 추상적인 경향의 조각에 반대하며 진정한 삶과 사회의 리얼리티를 담아내려는 조각을 주장하였다. (...) 1980년대 '현실과 발언'의 창립동인으로 활동하면서 비판적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암울하고 절망적인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였다. 특히 고통받는 민중들의 삶의 모습과 시대의 아픔을 가장 한국적인 조형언어로 선보였다. <오늘>은 행동하는 인물 군상을 통해 오늘의 나아가야 할 바를 강하게 제시하는 작품이다. 새로운 세대에 대한 희망과 바램이 북을 치고 꽹과리를 들고 있는 인물, 어깨동무하고 행진하는 노동자, 민중의 모습을 통해 전달된다. - 전시 설명 중에서


심정수의 작품은 작지만, 힘차고 역동적이다. 강렬한 표현력으로 공간을 사로잡고 지나는 이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조금은 거칠고 덜 세련되었더라도 강인하고 그 내부로부터 솟아나오는, 생명력있는, 정말로 왕성하게 살아 있는 미술을 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더 이상 잃어버리기 전에 우리 미술의 건강성을 찾아야겠다. 편협되고 일방적인 사고의 강요에서 벗어나, 모든 문화, 가치존중의 평등시대를 이루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존중하지 못하면 어느 누구에게서도 존중받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우리 현실의 모습과 역사 그리고 의식과 인식, 또한 우리 속에 잠재되어 있는 건강한 정서, 그 모든 것들을 일깨워내야만 한다.”―심정수, 작가노트 중에서, 1990. 


공작도시 - 붉은 지붕

손상기(1949 ~ 1988)

캔버스에 유채, 111x144cm, 1984 

(출처: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 


손상기는 풍경화를 통해 서민의 삶을 표현했던 작가이다. 초등학교 때 척추를 다쳐 성장이 멈추는 불구가 되어 '꼽추화가'로 불리기도 했는데, 39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초기에는 자연적 이미지를 통해 자전적 이야기를 직, 간접적으로 표현하였으나, 사회와 역사 문제로 작품 세계를 확장시켰다. 80년대 당시 기계화, 산업화로 치닿고 있는 비인간적인 현실을 도시 풍경으로 그리면서 현실에 대한 인식과 사실적 발언을 도모하였다.

<공작도시> 연작은 붉게 물든 도시의 지붕과 잿빛의 담벼락을 보여준다. 시선의 흐름은 전면에 가로막혀 있는 철조망 너머로 붉은 지붕의 수평면을 따라 점차 희미해지며 이어진다. - 전시 설명 중에서 


손상기의 작품들은 보이는 이의 마음 한 구석을 잡아당긴다. 그의 <공작도시> 연작은 너무나 유명해서 미술애호가라면, 아마 다들 한 두번씩은 보았을 것이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2층에서 열리고 있는 이 전시는 작지만, 무척 실속 있다. 전시 관람은 무료다. (현재 열리고 있는 미디어시티서울 전도 무료!) 전시 관람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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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말 Body Speaking Words

2015. 10. 17 ~ 12. 31

한미사진미술관 



작년 겨울, 온 몸이 지쳐있었을 때, 한미사진미술관엘 갔다.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그 인근에 간 틈을 타, 잠시 미술관에 갔다 왔다. 미술관 안은 조용했다. 미술관의 조용함은, 뭔가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탓에 나를 거친 현실로부터 떨어지게 한다. 하지만 이 낯설고 편안한 조용함은 반대로, 사람들이 좀 더 미술에 가까워지면, 미술시장 활성화나 예술가의 생계에 도움이 될 텐데라는 생각과 만나면, 조용함이 깨진 미술관이 어쩌면 우리 미래를 위해선 더 좋은 게 아닐까 하는.  


이 전시는 한미사진미술관이 소장한 작품들을 가늠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몸을 주제로 하여 소장품들을 모아 전시하였고, 작품들의 수준 또한 좋았다. 다만, 몸의 말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메시지보다는 사진가들이 몸을 바라볼 때, 어떻게 바라보고 변모하였는가에, 지역이나 시대별로 그 변천사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전시 스토리나 구성이 좀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각 개별 작품의 완성도에 비해 전시 구성은 아쉬운 점이 많았던 전시였다.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내설악), Gelatin silver print, 1977 ⓒ강운구 


하지만 몇몇 사진들이 주는 울림은 대단한 것이었고, 몇 명의 사진작가들을 새로 알게 된 것은 나에겐 꽤 소중했다. 모리스 타바르, 안타나 수트쿠스, ....  몇 장의 사진을 올린다. 아래 사진 작품들은 한미사진미술관 소장품은 아니다. 구글 검색을 통해 찾은 몇 개의 이미지들이다. 


모리스 타바르 Maurice Tabard, Untitled, 1929 


안타나 수트쿠스 Antanas Sutkus 


안타나 수트쿠스 Antanas Sutkus 



* 한미사진미술관 : http://www.photomuseum.or.kr/ 

- 송파구 한미약품 빌딩 꼭대기 층에 있다. 입장료를 받으며, 미술관 창 밖 풍경이 무척 좋다. 근처를 왕래하는 이들에게 한 번 정도 들어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좋은 곳이 될 것이다. 8호선 몽촌토성역에서 나오면 바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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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책 a walk 

      이인선 개인전

      정동경향갤러리(경향신문사 별관 1층), 2005년 8월 23일 - 29일

 

 

#1. 상실의 시대


언제부터 가슴 한 켠에선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처음 스치는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도심의 잿빛 거리에서, 익숙한 간판의 낡은 커피향이 풍기는 찻집에서, 자욱한 담배 연기로 가득한 호프집에서, 누군가를 만나 원색 계열의 즐겁고 화려한 수다를 떨고 있는 동안마저도 거친 세파에 네모진 가슴의 어느 모퉁이에선 무관심에 방치되어 사라져가다가 결국은 형체도 없이 사라져, 겨우 그 어떤 것이 있던 자국만 남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쓸쓸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왜 나는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막연한 느낌을 가지고 있는 걸까. 그리고 이 느낌은 나만 가지고 있는 느낌일까. 가끔 거리 한 복판에서, 그 공간 속에서 나의 이름을 아는 이가 한 명도 없다는 사실에 끔찍한 공포를 느낀 적이 있었다. 19세기의 예술가들이 ‘모더니티’라고 열광했던 그 기분을 느낄 때마다 등에 땀방울 맺히고 시선은 좌우로 흔들리며 파란 하늘은 우주 끝으로까지 밀려나는 듯하고 회색빛 벽에 잠시 몸을 기대고 이마의 땀을 손바닥을 닦아낼 때, 나는 왜 지금 여기에 있는가를 반문해보곤 한다.


왜 지금/여기 지금 여기에 있는가하고 묻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이 질문이 얼마나 허황된 질문을 깨닫게 된다. 아무런 이유도, 그 어떤 필연성도 없다. 그저 우연적인 현상일 뿐. 나의 삶이 이 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것에는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다.


#2. 현대의 산책자


산책자란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이 거리를 떠도는 방랑자다. 자신의 익명성을 즐기며 타인의 익명성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이는 18세기 이후에야 시작되고 19세기에서야 본격화된 낯설고 흥미진진한 경험이다. 19세기의 예술가들을 사로잡았던 그 경험이다. 하지만 21세기의 산책자는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이 거리를 떠돌다가는 길을 잃어버리고 만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 채 안절부절 못하다가 극도의 두려움에 휩싸이곤 한다. 자신을 둘러싼 외부세계의 모든 것들이 낯설어졌을 때, 예술가들은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양식에 몰두하게 되지만, 모더니즘의 이러한 양식은 결국엔 낯설어진 세계 앞에서 극단적으로 개인화되고 주관화된 양식으로 변모해갔다.


19세기의 산책자와 21세기의 산책자는 똑같이 낯선, 익명의 공간 속에 놓여진다. 하지만 19세기의 산책자는 그 곳에서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해 내지만, 21세기의 산책자는 그 곳에서 뒷걸음질치다가 결국에는 그 낯선 공간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개인화되고 주관화된 시선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주관화된 공간 속에서 떨쳐내지 못한 막연한 상실의 느낌과 싸우기 시작한다. 똑같은 산책이지만, 결국엔 19세기의 산책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산책으로 변해간 것이다.


낯선 세계 속에서, 자신을 알지 못하는 익명의 공간 속에서, 버려진 듯한 느낌으로 길을 걷다가도 익숙한 어떤 이의 이름을 듣거나 익숙한 물건이나 음악을 듣게 될 때, 아주 짧은 시간이기는 하지만, 막연한 상실감에서 잠시 벗어나 편안함을 느끼게 되는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리하여 이인선은 똑같은 산책자이면서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이 거리를 떠돌다가 우연히 마주하게 된 낯선 풍경 속에서 자신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익은 듯한 풍경을 찾아내고 그 풍경을 자신의 시각으로 풀어내고 변용시킨다.


#3. 익숙한 산책


이인선의 <1367-1 번지>는 거대한 익명의 도시 모퉁이에 흔히 볼 수 있는 낡고 오래된 건물을 캔버스에 옮긴 작품이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 드러나 있는 건물은 현실적이라기보다는 비현실적인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 그러나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좀 더 익숙하고 편안한 느낌을 풍기는 건 어떤 이유 때문일까. 


이인선의 작품들이 가지는 특징은 여기에 있다. 일련의 <1367-1 번지> 작품들은 거대한 도시 문명 속에서 늘 익명성의 타자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면서 느낀 고립감, 쓸쓸함, 막연한 상실감 등을 익숙하고 편안한 풍경으로 변화시킨다. 그래서 쓸쓸한 도시의 변두리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어떤 건물을 옮겨와서는 비현실적인 어떤 공간 속에 위치시키고 그 건물 속에서 견고하고 따뜻한 어떤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도시의 쓸쓸하고 외로워 보이는 어떤 건물 하나가 화가의 작업을 통해 거칠고 차가워 보이는 형태감이나 색채를 잃어버리고 아주 오래전에 우리 옆에 있었을 법한 어떤 풍경 속으로 자리 잡게 된다. 원래는 하나였지만, 어느 순간 잊고 지내온, 그래서 외부와는 아무런 소통도 없이 따로 떨어진 채로 살아가고 있는 어떤 풍경을 이인선은 외부 세계의 어떤 풍경 속에서 끄집어내고 그것을 화폭에 옮겨놓는 것이다.


이제 낯설음으로 열광하던 산책자에서 낯설음을 익숙함으로 변화시키는 산책자로 자리이동이 시작된 것이다.

 

(글쓴이. 김용섭)






* 2005년에 쓴 글이다. 자료 관리를 위해 블로그에 업로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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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 박스 프로젝트 2015:

율리어스 포프 Julius Popp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비트.폴 펄스(bit.fall pulse)>는 데이터의 최소 단위 정보 조각(bit)의 떨어진(fall), 즉 쏟아지며 짧은 순간만 존재할 수 있는 정보의 일시성과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전파되는 정보의 활발한 맥(pulse)을 의미합니다. 작품은 실시간으로 인터넷과 연결되어 작가가 고안한 통계 알고리즘을 통해 인터넷 뉴스피드에 게재된 단어의 노출빈도수를 측정하고 각 단어의 중요도에 따라 '물 글씨' 단어를 선택합니다. 전시장 안에서 연속적으로 빠르게 쏟아져 내리는 이 '정보 데이터의 폭포'는 1초도 안 되는 시간에만 유효한 정보의 일시성과 현대인이 이해하고 소화시킬 시간적 여유를 제공하지 않는 정보 과잉의 현대 사회를 시각화합니다. 또한 생동감 있게 오늘날의 주요 사건과 연루된 단어들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작가는 개별적인 단어의 가치보다는 인간과 사회가 정보를 어떻게 소비하는지, 또한 소비되는 정보의 의미와 가치는 어떻게 변화하는지 주목합니다. 

- <전시 설명> 중에서 




출처: 직접 찍음(낡은 폰 카메라로 찍은 탓에...) 



이런 작품은 콘텍스트에 의해 많이 좌우된다. 적절한 아이디어와 기술, 데이터(단어)의 조합과 일시성, 조명과 소리. 미디어 설치작품은 공간과 호흡하며 공간 속으로 들어가 공간의 일부가 되거나 공간의 전부가 된다. 공간을 새롭게 하며, 그 공간을 찾아온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우리의 마음을, 머리를, 몸을 환기시킨다. 율리어스 포프의 작품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 설치 작품은 본질적으로 그러하다. 


율리어스 포프는 이 작품으로만 너무 오래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만큼 직접적이고 이해하기 쉽고 도심의 공간 속에 들어가기 용이하다. 또한 다양한 매체들과 연계되면서 21세기 초반 문명의 특성을 고스란히 담아낸다는 점에서도 비평적 찬사를 끌어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결국 대중의 호응(재미있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과 우호적 비평(다양한 매체와 혼합과 연결)을 만들 수 있는 어떤 컨셉만 있으면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까지 미친다. 인간 삶에 대한 고독한 탐구와 끊임없는 연마가 아니라, 적절한 탐색과 만남, 괜찮은 아이디어(혁신적인 아이디어가 아니라)가 현대 예술가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나에게 율리우스 포프의 작품이 매력적인 측면은, 바로 '물소리다. 기계들이 만들어내는 둔탁한 물소리. 어두운 갤러리 공간에서 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글자들 위로 거칠고 무거운 물소리가 들린다. 그 여운은 꽤 길어서 이 느낌은 뭘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치 디스토피아를 암시하듯. 

더 멀리 나아가선 칸트의 '숭고미'까지. 결국 우리는 자연의 거대한 흐름에 굴복하고 말 것이다. 아무리 현대 문명에 열광할 지라도 그건 순간이며, 떨어지는 물처럼 사라질 것이다. 그저 흘러가는 물이 될 것이다. 어느 새 강이 되고 끝없는 바다가 될 것이다. 

자연의 관점에선 모든 것이 부질없다. 결국 율리우스 포프의 작품이 향하는 곳은 바로 이 지점이다. 모든 것은 허무하고 부질없다는 것. 

이 첨단의 미디어 예술가도 현대의 허무주의와 싸우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허무하다는 것을 환기시키는 걸까. 그건 관람객의 몫이다.   





미술관에서는 율리우스 포프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율리어스 포프(1973~ )는 독일 라이프치히 시각예술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뉴욕현대미술관(2008), 리옹 현대미술관(2008), 빅토리아 앤드 알버트미술관(2009), ZKM(2015) 등의 해외 유수 기관의 기획전에 참가하였으며, 2012년 런던 올림픽을 기념하는 <비트.폴bit.fall> 작품 설치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과학과 예술의 경계에 위치한 그의 작품은 정보의 특성을 주목하고 디지털 시대의 정보와 인간의 상호적 관계를 탐구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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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어스로부터 온 엽서들(Postcards from Google Earth) 

- 클레멘트 발라(Clement Valla) 

http://www.postcards-from-google-earth.com/










이 흥미로운 프로젝트는 구글 어스에 찍힌 사진들의 모음이다. 그런데 모여진 사진들이 이상하고 낯설다. 그냥 프로그램 결함이나 에러로 여길 법한 이 사진들에 대한 클레멘트 발라의 생각은 다르다. 


내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구글 어스 이미지들은 색인화된 사진들-어떤 장소를 찾고 그 곳을 미리 볼 수 있는 형태가 아니라, 자동화된 데이터 모음으로, 끊김없이 아주 매끄러운 환상을 만들고 업데이트하면서 재현(representation)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진들은 프로그램 알고리즘의 에러나 결함이 아니라, 시스템 안의 변칙적이며 비표준적인 것이며, 그래서 시스템 안에 존재하는 국외자(outlier)라고 할까. 


결국 우리는 이 사진들을 통해 재현된 어떤 장소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진들(these uncanny images)이 나오게 된 알고리즘, 컴퓨터나 서비스와 관련된 저장 시스템, 위성 카메라나 지도 등등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작가는 이를 두고  '재현의 새로운 모델'(a new model of representation)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구글 어스를 찾게 되는 것은 지구(Earth) 위의 어떤 장소 때문인데, 이 기묘한 사진들은 우리가 목적으로 했던 그 장소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하게 한다. 다소 거칠게 표현하지만, 표상 그 자체가 아니라 표상을 둘러싼 환경을 고민하게 한다고 할까. 클레멘트 발라의, 이런 생각이 너무 흥미롭기만 하다. 그리고 그는 이 프로젝트를 바탕으로 2014년 스위스에서 설치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Postcards from Google Earth Installation

inkjet on vinyl, mdf

2014, Festival des Images, Vevey, Switzerland

(출처: http://clementv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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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나 카렐Nina Canell 개인전 <새틴 이온Satin Ions>

2015년 5월 29일 - 8월 9일 

아르코미술관 제2전시실 





전시 팸플릿을 읽어야만 이해가 되는 예술 작품은 어떻게 받아야 들여야 할까. 그리고 이해만 될 뿐이라면 또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난감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작년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 니나 카렐 개인전인 그런 종류의 전시였다. 마치 '현대 미술의 제 무덤 파기 프로젝트'로 여겨질 정도라고 할까. 


요점만 말하자면, 예술 작품은 본질적으로 '어떤 심리적 환기'를 가지고 와야 한다. 칸트는 이를 '쾌', '불쾌'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그런데 나는 니나 카렐 작품 앞에서 멈칫멈칫할 수 밖에 없었다. 일종의 연구이긴 하지만, 그래서? 연구는 실험실에서 하는 것이다. 마치 외계인의 언어처럼 내 앞에 덩그러니 놓여진 여러 작품들을 보면서 난감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또한 이번 전시 <새틴 이온>에서는 오늘날의 무선 인터넷과 같이 와이어리스의 세계의 기반이 되는 지하 매설 케이블에 관심을 두고, 서울 근교에서 수집한 재활용 케이블 덩어리들로 전시의 마지막 챕터를 구성한다. 오늘날 수많은 디지털 정보는 선이 없는(wireless) 상태를 지향하지만, 이는 사실 지하의 보다 많은 양의 케이블 증가라는 아이러니한 현상을 만들고 있다. 작가는 이러한 관심에서 서울 근교의 케이블 재활용센터를 방문하여 녹아 내려 형태가 변화한 상태와 향후를 위해 재탄생되는 미래적 시간을 함의한 상태 사이에 놓여져 있는 케이블 덩어리들을 수집한다. 케이블의 심지가 빠지고 껍질만 남은 피복 플라스틱에 열을 가해 모양이 변형된 이 덩어리들은 수십 미터의 물리적인 길이가 '정보'의 송수신이라는 비물질적 거리를 드러내는 덩어리로 변모한 역설적인 상태를 암시한다. 

- 전시 팸플릿 중에서  




추상화된 디지털 정보는 물질적인 케이블에 의존한다? 그래서? 물질과 비물질의 관계, 혹은 디지털과 케이블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는 언어와 책의 관계와 같다. 말과 혀의 관계다. 즉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은 보이지는 것들을 매개로 한다. 표현되지 못한 우리의 생각이 우리 육체 속에 담겨져 있듯이. 마치 뭔가 대단한 연구인 양 포장하고 있지만, 늘 있던 어떤 물음의 동어반복일 뿐이다. 





니나 카넬은 물체의 성질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그 물성과 주변 환경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의식한다. 서로 다른 재료와 물질이 결합하여 이루어지는 작가의 조각은 이러한 인간의 시각에는 쉽게 포착되지 않지만 공간 내에 공존하는 비물질적인 영역의 항상성(consistency)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 전시 팸플릿 중에서  



시각적으로도 흥미롭지 못했고 주제의식도 또한 문제적이지 않았다. 더구나 작품들이 보여주는 미적 완결성은 형편없었다. 재미있지도 않았다. 대단한 테크놀러지가 담긴 것도 아니고 전자파 구덩이로 만든 것도 아니다. 솔직히 이 전시를 위해 내가 낸 세금이 들어갔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을 뿐이다. 너무 안타까워서 전시 설명을 위해 서 있던 도슨트(혹은 큐레이터였는지도)에게 물어보았다. 작품이 마음에 드냐고? 아. 그녀는 마음에 든다고 했다. 현대 미술이 암울해지는 순간이다. 지금도 몇몇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현대 미술의 무덤을 파고 있는 중이다. 아주 열심히. 그리고 일군의 평론가들도 여기에 동참에 일반 대중들은 알아듣지도 못할 단어를 사용해가며 깊숙이 깊숙이 땅을 파고 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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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 LEE BUL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 2014 

2014.9.30 – 2015.3.1 

(현대자동차 http://brand.hyundai.com/ko/main.do)





그 공간에 서면, 작품 한 가운데 서면, ‘여긴 어디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빨리 나가거나 계속 머무르거나. <태양의 도시 II>에서. 


2014년 이불은 현대자동차의 지원을 받아 국립현대미술관에 2개의 작품을 전시한다. <태양의 도시II>와 <새벽의 노래II>. 둘 다 기계적 초현실주의, 혹은 실험주의라고 할까. 미술에서 초현실주의나 실험주의라고 하면, 반-기계적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그렇지 않다. 이탈리아의 F.T.마리네티Marinetti는 미래주의를 주장하면서 기계적 특징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하지만 그 흐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고 금세 반-기계주의로 기울었지만.


내가 이불의 작품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녀의 이번 작품이 기계적 형태를 띄면서도 반-현실적인 유토피아를 향하고 있다고 할까. 




태양의 도시 II, 2014

폴리카보네이트, 아크릴 거울, LED 조명, 전선, 330 x 3325 x 1850 cm

사진: 전병철,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출처 http://brand.hyundai.com/ko/art/with-mmca/mmca-hyundai-motor-series-2014-leebul.do



한 편으로 건축적이면서 반-건축적이기도 하다. 건축이란 사람이 지낼 수 있는 공간, 사람과 호흡하는 공간을 향하지만, 이불의 작품 속에서 사람이 기댈 곳은 없었다. 작품 속을 걸어갈 수 있으나, 그것은 참여가 아니라 바라봄일 뿐이다. 



태양의 도시 II, 2014

폴리카보네이트, 아크릴 거울, LED 조명, 전선, 330 x 3325 x 1850 cm

사진: 서지연 아트인포스트 제공

출처 http://brand.hyundai.com/ko/art/with-mmca/mmca-hyundai-motor-series-2014-leebul.do




이불은 인류의 자유와 해방을 목표로 한 근대 기획의 모든 서사들을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으로 보고 이에 대해 물음을 제기한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완벽’에 대한 환상에 대해 언급한다. 완벽에의 헛된 열망과 그 적나라한 실체를 마주하게 함으로써 어쩌면 외면하고자 하는 현실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이불의 작품 세계는 삶과 죽음, 추와 미, 세속과 신성, 실재와 꿈이 무수히 교차하는 현실 속으로 차갑고도 뜨겁게 그 근원 혹은 경계를 찾아 나아간다. (전시 팜플릿 중에서) 



현대 예술은 종종 질문을 던진다. 이불은 낯선 공간을 보여주면서 관객을 자극한다. 낯선 공간 속에 관객을 밀어넣고 다소 신기하면서도 차갑고 두터운 경험을 선사하면서 작품 속 공간과 작품 밖 공간을 대비시킨다. 그리고 원시적이며 무섭고, 그러면서 기계적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흥미롭게도 국립현대미술관은 더 기계적인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새벽의 노래 III, 2014

알루미늄, 폴리카보네이트, 메탈라이즈드 필름, LED 조명, 전선, 스테인리스 스틸, 포그 머신, 가변 설치

사진: 전병철,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일반 관람객들에겐 이 정도의 경험도 무척 값질 것이다. 하지만 너무 스펙터클에만 집중한 건 아닐까. 다가갈 수 없는 공간에 대한 두려움, 경외감은 이미 자연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작품이 조금 어렵게 느껴졌다. 그 공간이 익숙하지 않았고 너무 멀었다. 


2014년 전시 감상문을 지금이라도 정리해두는 이유는 이불은 그만큼 중요한 작가이기 때문이다. 1997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의 전시 작품은 정말 대단했다. 





화엄 Majestic Splendor

1997

stills from original installation

Courtesy: Studio Lee Bul

Photo: Robert Puglisi

출처 http://www.mori.art.museum/korean/contents/leebul/introduction/03.html



아래와 같이 죽은 물고기를 전시 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시각적 효과를 가졌을 텐데, 전시 기간동안 물고기는 썩어갔다. 썩어가면서 다양한 향을 내품었다. 결국 관람객들의 항의로 인해 철수되었지만, 이 때 이불은 전세계 미술계에 강력한 인상을 남긴다. 이 얼마나 대단한 접근인가. 미술관 공간에 대한 질문부터 니네들도 이렇게 냄새 풍기며 썩을 거라고 경고까지 날리니까. 그리고 그 썩어가는 과정에 대해 경외감을 가진 제목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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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싹' 그리고 '정물화: 살아있는 것의 소고' - 김주연 사진전

2016.4.7 - 5.3, 트렁크갤러리, 서울 





트렁크갤러리도 참 오랜만이었다. 설치 작가로 알고 있었는데, 사진 작품으로 만났다. 2008년의 쿤스트독이었나, 아니면 다른 전시에서였나, 김주연의 작품을 만난 적이 있다. 선명한 작품 스타일로 한 번 보면 기억하게 된다. 그 동안 다양한 공간/물건에 식물을 키웠는데, 이번엔 옷이다. 



김주연, 존재의 가벼움I -2, 사진, 피그먼트 프린트, 144×108cm, 2014



시간은 현대 미술에 있어서 중요한 화두다. 김주연은 그 위로 생명의 시작과 끝은 넣으며 식물이 자라고 있는 공간을 탈세속화시킨다. 세속에서 일정 기능을 수행하는 어떤 것에 씨앗을 심음으로서, 그것이 가지고 있던 세속의 기능을 잃게 만든다. 그리고 마치 버려진 물건처럼, 버려졌다가 기적처럼 식물에 의해 전혀 다른 기능과 목적으로 되살아 나는 듯하다. 


그런데 이건 무엇을 지향하는 걸까? 여기에선 고객을 갸웃거릴 수 밖에 없다. 왜냐면 자연 속에 버려지는 모든 것들 위로는 무조건 어떤 것이 자라기 때문이다. 그게 식물이든 곰팡이든.  결국 작품들은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어떤 공간을 그대로 옮겨온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다만 깊은 산 속에서 마주할 때와 갤러리에서 마주하는 것이 다를 뿐. 

  


김주연, 정물화살아있는 것에 대한 소고I, 사진, 90×60cm



갤러리에서 인류 문명을 부정하는 작품을 만나, 우리와 무관한(혹은 거부하는) 자연을 경험하는 것 자체가 현대 문명에 대한 깊은 의문과 우려가 될 수 있겠다. 우리가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것들 대부분, 그것을 위치한 콘텍스트를 상실하는 순간 전혀 다른 존재가 되기 때문에. 


그래서 김주연의 작품들은 자라나는 식물 속에서 우리를 다시 묻는 일종의 질문이며 반성이 된다.   




김주연, Metamorphosis, 아시바구조물, 신문지 약 18000부(3톤), 씨앗식물, 가변설치,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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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혜규. 2010년 아트선재센터의 전시는 꽤 충격적이었다. 즉물적이면서 날카로운 느낌을 자아내면서 동시에 토테미즘적인 분위기는 나에겐 매우 낯선 작품들이었다. 그 세계는 근대적 현실에 기초하고 있으나 근대적 삶을 도려내고 근대의 맨 얼굴을 드러내며 파괴한다. 그리고 그 세계의 복원을 주술적 방식으로 모색하고 있다고 할까. 이번 전시도 이러한 경향을 연장선상에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올해 맡은 프로젝트로 인해 나는 거의 전시를 보지 못했고, 얼마 전 리움에 열린 양혜규의 개인전도 가지 못했다. 뒤늦은 후회를 만회하고자, 양혜규의 몇몇 문장과 이미지를 저장한다. 


*   * 


"몇 년 동안 블라인드에 빠져있었다. 블라인드 사이로 조명이 진하게 지나가는 날카로운 선은 성적인 쾌감에 비교할 수 있을 만큼 멋있게 보였다. 솔 르윗의 '세 개의 탑이 있는 구조물'은 원래 선으로만 이루어진 작품이었는데, 그것을 모두 블라인드 면으로 대체해서 표현해 봤다. 그러니까 원래 작품이 가지고 있던 여러 속성이 달라졌다. 원본을 뒤집고 새롭게 해석한다는 의미다. 사실 블라인드 자체는 미약한 존재다. 반면 성(城)은 공동체의 구역을 배타적으로 구획하는 견고한 것이다. 허약한 블라인드로 된 '성채'는 이러한 배타적인 '공동체에 도전'하기 위한 작품이다." 

- 양혜규, 2015년 4월, <중앙선데이>와의 인터뷰 중에서. 








Sonic Crescent Moon - Medium Regular #4

2014

Steel frame, metal grid, powder coating, nickel plated bells, metal rings

173 x 54 x 54 cm (H x W x D), 23.2 kg






Series of Vulnerable Arrangements - Voice and Wind, 2009 




Haegue Yang, Shooting the Elephant 象 Thinking the Elephant, installation view. Courtesy Leeum, Samsung Museum of Art.




Haegue Yang, Yearning Melancholy Red, 2008 



"빛, 움직임, 소리는 공간의 역학 안에 있으면서 '추상'을 조명해주고, 단 하나의 이미지만을 시사하는 관습적인 서사를 잠재운다. 나는 최근 들어 다양한 기능을 부여받은 무빙라이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손을 만지는 것처럼, 빛은 천천히 공간을 가로질러 움직이며 다양한 표면을 어루만진다. 나는 이를 투명하지만 실재하는 공기와 관계가 있다고 본다. 조명은 또한 그림자를 만드는 기능적인 기계이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무빙라이트의 빛 세례는 다양한 길이와 선명도로 그림자를 드리우며, 자신의 개별적인 시점에서 바라보는 관찰자에 대한 관념을 담고 있다. 빛은 자율적인 형식이다. 물리적 경계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설치에는 첨단 극장 조명 장비의 움직이는 빛 세례와 정적인 적외선 히터의 붉은 광열 등 다양한 조명이 사용되었다. 둘 다 광원이면서 서로 다른 효과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설치에는 각 히터는 선풍기와 짝지어져 있어 서로 상반되는 힘을 가한다. 짝지은 두 장비 사이에는 서로를 향한 일종의 열망과도 같은 대화, 바람과 열이 서로를 맹렬하게 부정하는 역설적인 재앙이 발생한다. 서로를 파멸시킬 것처럼 작용하며 이는 나에게 사랑과 혁명의 법칙을 증거한다. 그들의 존재는 이러한 가능한 파괴에서 온 것이며 강점적 에너지를 남용한다. 나는 이를 전복적인 행위로 본다. 이는 절박하고, 근본적으로 비능률적이다." 

- 양혜규, 2008년, 래드캣미술관과의 인터뷰 중에서. (<셋을 위한 목소리> 에서 재인용)




셋을 위한 목소리 - 10점
양혜규 지음/현실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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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미술잡지를 보다, 오랜만에 선무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주말 사무실 출근 전 건성건성 읽곤 집에 와서 그의 전시 기사들을 챙기며 메모해둔다. 의외로 선무에 대한 글이 검색되지 않는다. 국내에서보다 국외에서 더 주목받는 듯하다. 하지만 그의 삶이 가지는 드라마틱한 요소, 30년 북에서 살다 의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탈북하여 한국에서 들어온 사내, 새터민 화가, 홍대 미대 졸업, 그리고 이젠 두 아이의 아빠. 그런 그가 보여주는 흥미로운 작품 세계는 충분히 주목받을 만하고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선무, 들어라!, 캔버스에 유채, 116×91cm, 2009



특히 그가 배웠던 방식의 작품 스타일(일명 주체미술!)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명확한 메시지를 무겁지 않은 화법으로 드러낸다는 점은 보는 이들을 자연스럽게 분단환경을 환기시키면서 작가의 의도를 분명히 전달한다. 



선무, 열다, 캔버스에 유채, 72×60cm, 2009



선무, 선무의 노래, C 프린트, 2014


선무, 창밖의 낯익음, C 프린트, 2014



최근의 작품들에서 그가 적극적으로 서구 현대 미술의 방식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선무, 엄마 여기 서울이야, 캔버스에 유채, 91×72cm, 2010



몇몇 작품들은 아프고 슬픈 분단 현실을 드러내지만, 우리들은 그걸 외면하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최근의 한국 예술가들 중에 누가 분단 현실에 대해서 탐구하고 조명하면서 이야기하는가? 비극적인 현실에 대해서 너무 둔감해진 건 아닐까. 이제 분단예술 따윈 없고, 이미 과거형이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선무의 존재는 더욱 두드러진다. 



선무, 조선의예수2, 캔버스에 유채, 91×91cm, 2010



한국현대미술에서 선무는 매우 중요한 작가이다. 그는 미래형이다. 탈북자 가족들 중에서 소설가나 시인이 나올 것이며 다문화가정이라는 배경을 가진 예술가들이 나와, 한국 사회의 현재를 조명하고 비판하게 될 것이다. 나는 정말 그것이 기대된다. 우리에게 참으로 많이 아픈 이야기를 들려줄 테지만, 그러는 동안 한국 사회는 성장하게 될 것이다. 



선무, 꽃보라 Piece of flower, 캔버스에 유채, 190×130cm, 2013



* 선무 / SUNMU / 線無   http://sunmu.kr

* 인터뷰기사 -  [RFA 초대석] 뉴욕에서 개인전 연 탈북화가 선무 

(선무의 인터뷰 기사 실린 '자유아시아방송(영어: Radio Free Asia, 약칭 RFA)은 1994년 미국 의회가 입법한 국제 방송법(International Broadcasting Act)에 의해, 1996년에 미국 의회의 출자에 의해 설립된 국제 방송국'이다. 홈페이지 상단의 언어들을 클릭하면, 해당 언어별로 다른 컨텐츠로 나온다.미국 연방 정부 기금에서 지원을 받아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웹사이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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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ndro Erlich 레안드로 에를리치

Port of Reflections 대척점의 항구

2014. 11. 4 - 2015. 9. 13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서울박스 

한진해운 박스 프로젝트 2014 




2012년 송은아트스페이스에서의 전시 이후 다시 만나는 레안드로 에를리치다. 1973년 부에노스 아이레스 출신인 레안드로 에를리치는 2001년에 이미 베니스 비엔날레에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작가로 참여했다. 이십대 후반에 이미 그는 아르헨티나 최고의 작가 반열에 오른 셈이다. 2005년에 다시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가했고, 2000년에는 휘트니 비엔날레, 2001년에는 이스탄불 비엔날레에 참가했다. 


이른 나이에 세계적인 명성을 쌓기 시작했는데, 이번 국립 현대 미술관에 전시된 <대척점의 항구>는 그간 그가 보여주었던 공간의 착시 효과를 통한 물리적 환경의 변화, 경험, 그리고 관람객의 놀라움 등을 느끼기엔 다소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이전 송은아트스페이스는 낮은 천장의 실내 공간에서의 전시라는 점에서 작품은 좋았으나, 관람객의 극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힘에 부쳤다고 할까. 


레안드로 에를리치는 규모있는 작품에서 강한 면모를 보인다고 해야 할까. 하긴 형편없는 작품이라도 규모에서 압도하면 그럴싸해 보이기도 한다.(파리 오르세 미술관 1층을 가득채운 19세기 후반 아카데미 미술 작품들을 떠올려 보라.이 작품들을 보며 흥분하는 관람객들이란!!)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전시 모습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전시 모습



위 사진들은 전시 공간 아래서 위로 본 모습이다. 그런데 저 위에서 아래를 보면 어떤 모습일까?(전시를 관람하면서 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안내를 받지 못했고 그럴 여유도 없었다.)  





이미지 출처: http://www.leandroerlich.com.ar/ 


위에서 본 레안드로 에를리치의 <대척점의 항구>는 이런 모습이다. 그러니 반드시 위로 올라가서 두 개의 시선으로 작품을 바라봐야만 제대로 감상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다른 작품 <Swimming Pool>이다. 아래 사진을 보면 풀장 아래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출처: http://whenonearth.net/the-swimming-pool-by-leandro-erlich-in-kanazawa-japan/ 



그리고 아래에선 이런 모습이다. 아, 이건 풀장이 아니다. 



출처: http://twistedsifter.com/2012/08/fake-swimming-pool-illusion-by-leandro-erlich/ 


실제 물은 약 10cm정도만 채워져 있을 뿐이다. 그리고 물 아래 투명한 유리가 있고. 위에서 아래로 보면 영락없는 풀장이지만(실제 물인가 하고 만져보는 사람들도 있다), 아래에서 위로 보면 이건 뭐랄까. 



아래 작품은 2013년 런던 건축 페스티벌에서 전시된  <Dalston House>다. 2004년 프랑스 파리에서 <Batiment>이라는 이름으로 최초 전시된 이후, 세계 여러 도시에서 초대 전시되는 듯 싶다. 


아래 작품 사진을 보자.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약 45도 정도로 기울어진 거대한 유리를 통해 시각적 착시 효과를 노린 설치 작품이다. 아이디어도 흥미롭지만, 더 흥미로운 것은 관람객들의 반응이다. 



출처: http://www.dezeen.com/2013/06/26/dalston-house-by-leandro-erlich/ 


아래는 2004년 파리 전시 모습이다. 


출처: http://www.artforworldexpo.com/InitialProject/works_27_LeandroErlich.html 


레안드로 에를리치의 작품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고 관람객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여기에 참여한다. 


이번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의 전시 설명을 읽어보자.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유망작가 레안드로 에를리치는 서울관의 중심 공간인 서울박스의 공간적 특성을 반영한 신작 <대척점의 항구 Port of Reflections>을 선보입니다. 아름다운 항구로 변신한 서울박스 공간을 부유하는 선박들과 가로등은 거울처럼 맑은 수면 위에 반사된 물그림자와 함께 환상적이며, 초현실적인 풍경을 보여줍니다. 현실과 환영, 실재와 가상이 절묘하게 결합된 풍경 속으로 직접 뛰어들어 경험할 수 있는 이 작품은 (...) 순수한 시각적 호기심을 유도합니다. 



위 전시 설명은 이번 전시 작품 이외에 이 글에서 언급한 두 작품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런 일관된 테마로 10년 이상 작품 활동을 해오고 있다. 이번 전시는 올 9월까지 이어지니, 한 번 가서 경험해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작품 이미지 및 자료 참고)

레안드로 에를리치 홈페이지 : http://www.leandroerlich.com.ar/ 

Dalston House by Leandro Erlich http://www.dezeen.com/2013/06/26/dalston-house-by-leandro-erlich/ 

Leandro Erlich http://en.wikipedia.org/wiki/Leandro_Erlich 

http://www.artforworldexpo.com/InitialProject/works_27_LeandroErlich.html 

http://momaps1.org/exhibitions/view/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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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조선미술 순례 
서경식(지음), 최재혁(옮김), 반비 




현대 미술을 전공하는 친구가 있다면, 그/그녀와 이야기하는 게 어려울까? 그렇지 않을 게다. 그렇다면 그/그녀가 만들고 보여주는 미술 작품은? 정녕 모른다면 친구에게 물어보면 될 것이고, 바로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동시대 미술(우리에겐 현대미술)을 보고 감상하지 못한다면, 그건 미술에 대한 전문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하고 우리 시대에 대한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즉 자신을 돌보지 못하고 주위를 돌아볼 겨를 조차 없이 무언가에 쫓겨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이 옳은지에 대한 확신은 없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자주 전시장을 찾고 자기 자신에 대해 보다 솔직해지고(심지어 자신의 아픔, 상처와 대면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는 여유를 가진다면, 현대 미술은 감상하기 어려운 분야가 아니라는 점을 알려주고 싶다. 마치 이 책의 저자, 서경식 교수처럼. 그는 태생적 아픔으로부터 두 형의 구속 등 그의 인생 자체가 바로 한반도의 비극을 고스란히 담고 있지만, 그는 이로부터 도망치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이 그의 미술 순례 시리즈의 시작점이었을 지도. 

서경식은 미술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공감을 가지고 있으나, 전문적인 식견으로 파고 들어 분석하는 이가 아니다. 그리고 그걸 원하지도 않는다. 그는 현대 미술 작가들과의 대화를 바탕으로 그들의 작업과 작품에 대해 소개하면서도 어렵거나 지루하지 않고 도리어 감동적이고 내가 우리 미술에 대해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구나 하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미술에 대한 이야기는 감동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마음을 울리는 작품 앞에서, 그 작품과 그 작품을 만든 작가와의 이야기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감동은 커녕, 위선과 위악으로 가득찬 작품 도판을 책에 실고 갖가지 이론을 들이미는 책들을 보면서, 나는 '예술 작품의 감동 앞에선 그 어떤 이론도 무용지물인데'라고 중얼거리곤 한다.(아, 이 중얼거림이란!) 

이 책에서도 다소 어려운 단어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가령 윤석남에 대한 챕터에서 길게 '페미니즘' 관련 이야기가 나온다든지 ..., 하지만 페미니즘은 그저 시류처럼 흘러 지나가고 여성 작가로서의 윤석남에 대하여, 윤석남이 만드는 작품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그것을 보다 풍성하게 해주는 곁다리 이야기였을 뿐이다. 

현재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신경호, 정연두, 윤석남, 미희, 홍성담, 송현숙, 그리고 월북작가 이쾌대, 조선 시대의 신윤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이 책은 쉽게 읽히나 가볍지 않고, 진지하고 심각하지만 울거나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다. 마치 그런 일들이 있었나 할 정도로 담담하게 서술되고 있다. 아마 그건 이 책의 저자도 이미 굴곡진 한국 현대사의 피해자였으며,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작가들이 바로 그런 현대를 살아온 이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이미 여러 예술 서적으로 탁월한 에세이스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서경식의 신작 <<나의 조선미술 순례>>도 기대를 벗어나지 않는다. 도리어 작가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서 더 좋았다. 2015년, 이 책으로 시작해도 나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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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인상적인 부분을 짧게 메모해보았다. 이 책의 제목에 대해 그는 '한국'이라는 단어 대신 '조선'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한국'은 그 범위가 작아 자기 같은 재일한국인이나 미희와 같은 해외입양아 등 우리 민족 전체를 보여주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단어라 생각했으며, 동시에 '조선'이라는 단어 속에는 우리 근현대사의 아픔이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신경호, 넋이라도 있고 없고: 초혼 1980, 1980 


집에서 그렸을 거예요. 광주항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그렸던 그림이죠. 광주 상황이 끝나고 나니까 거지와 넝마주이, 구두닦이가 하나도 안 보이는 거예요. 그 기간에 다 사라져버렸죠. 그들은 대부분 고아였거든요. 찾거나 신고하는 사람도 없었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그들이 언젠가는 광주로 돌아올 텐데 하는 마음으로 그렸던 그림입니다. - 신경호 (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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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두는 피사체가 되는 일반 시민들과 대화를 나누고 커뮤니케이션을 하면서 작품을 만든다. (84쪽) 

정연두, 상록타워 Evergreen Tower55×80×32,  사진, 2001



정연두, 상록타워 Evergreen Tower55×80×32, 사진, 2001



예술가는 사회적인 리더도, 세상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려운 사람들을 이끌어주는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관찰자에 가까운 존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다기보다 예술 자체가 하나의 좋은 매개체가 되는 것 같아요. 이해하기 힘들어도 "아아, 이건 예술이니까, 아트 프로젝트니까 ... ..." 라면서 관대히 봐주시는 것 같습니다. - 정연두(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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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 미인도, 114.2cm * 45.7cm, 비단에 채색, 간송미술관 



바로 이런 인상이다. 나 역시 '미인도'에서 같은 인상을 받았다. 남성이 지닌 시선의 폭력에 갇혀 긴장하는 모습도 없고, 거꾸로 거기에 아양 떨며 자신을 상품화하려는 생각도 없이, 정녕 '자연체'인 것이다. 한 마디로 '미인도'의 여성은 '기호'가 아니다. 자신을 그리고 있는 화가가 동성인 여성이거나, 혹은 어쩌면 자기 자신이기에 가능한 자연스러움을 보여준다. (2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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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디아스포라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다고 생각되지만, 저는 단지 외국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디아스포라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디아스포라가 된 배경에는 어떤 식으로든 강제성이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경제건, 전쟁이건, 혹은 입양 제도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억지로 갈라지고 헤어진 경험이 바로 디아스포라의 체험이라고 생각합니다. - 미희(3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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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담, 욕조: 어머니 고향의 푸른 바다가 보여요, 1999 



섬에서 자란 인간이라서 제게 물은 생산의 이미지입니다. (중략) 힘들 때마다 고향의 푸른 바다를 떠올리면 힘이 났습니다. 

그런데 남산에 있는 안기부 지하실에서 그 생산과 생명의 물, 생업으로서의 물, 나의 희망으로서의 물이 하필이면 나를 고문하는 도구가 될 줄 어떻게 예상했겠습니까? 안기부 놈들이 이른바 나를 물과 맞서게 했고, 결국 그 물에게 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날조한 대로 저는 북한에도 두 번이나 왕래한 간첩이 되어버린 거죠. 

감옥에서 나왔지만 그 후로는 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되살아나서 완전히 폐인처럼 살았습니다. 밥을 먹고 나서도 물을 마실 수 없었습니다. 

물에 대한 공포를 계속 껴안고 살아갈 것인가? 세계를 이루는 원초적 개념 중 하나인 물에 공포를 가진 채로 살아간다면 앞으로 내가 어떻게 예술가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고민 끝에 물과 정면대결하자고 생각했어요. - 홍성담 (333쪽)







나의 조선미술 순례 - 10점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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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을 찾아서 - 현대미술의 시작

이우환(지음), 김혜신(옮김), 학고재





번역자인 김혜신 교수에 따르면, 이 책에 실린 이우환의 글들은 주로 1960년대 말 쓰여졌다고 한다. 60년대 말에 출간된 이 책을 2000년에 일본에서 재 출간하였고, 2011년에 한국의 학고재에서 한글로 번역, 출판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 당시 이 책은 일본 미술계의 ‘태풍이면서 바이블’이었다. 


우리는 이우환이 세계적인 예술가의 반열에 올라섰음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그가 탁월한 미술 비평가이자 이론가이며 일본 현대 미술에서도 그 위상이 대단한다는 사실은 일반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일본어로 글을 쓰는 시인이자 산문가이며, 그의 일부 글은 일본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인정 받고 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이우환은 일본에서 먼저 유명해졌고 그 다음 파리를 중심으로 한 서유럽에서, 그런 다음 한국 미술계에 소개되었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믿을까?)


1960년대 말 이우환은 현상학에서 바라보는 바, 서양 근대 철학의 흐름 속에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예술 시각을 이 책을 통해, 그리고 모노하(もの派)라는 미술 운동을 통해 드러낸다. 이 책은 일본 모노하 운동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으며, 미술 이론가 이우환을 제대로 알린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0여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그 탄탄함과 생생함이 가시질 않는데, 60년대 말, 70년대 초 메를로 퐁티, 마르틴 하이데거, 장 폴 사르트르, 그리고 니시다 기타로를 인용하며 일본 현대 미술이 나아가야 할 바를 제시하였을 때, 얼마나 많은 동시대 일본인들은 그를 질투했을까는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더구나 1960년대 말의 이우환만큼 탁월한 식견으로 뛰어난 글을 쓰는 미술 비평가, 혹은 이론가를 한국에서 만나지 못했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원래 테이블이나 의자, 풍경 자체는 아무런 시각적인 원근법도 가지지 않는 세계이다. 실재는 인간의 가치 조정 없이 스스로의 거리를 가지고 자유로운 모습을 보이는 세계인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이 쪽이 중심이 되어 저 쪽을 보고 싶은 대로 규정하는 표상 관념에 의해 시야의 세계를 원근법의 화신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110쪽) 



그는 서구의 모더니즘 미술을 부정한다. 그는 근대 철학은 실제 세계와는 무관한, 우리 관념의 표상을 상정하고 그 표상을 그대로 투영시킨다고 말한다. 즉 외부 세계는 우리의 관념으로 해석, 투영된 것이지, 실제 존재하는 바 외부 세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그의 생각이 아니라 20세기 현상학자들, 특히 메를로 퐁티가 지적하는 바이며, 그 외 많은 사상가들이 지적해온 바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메를로 퐁티에서 출발해 니시다 기타로에 이른다. 



우리의 신체라고 생각되는 것이 이미 모순적 자기 동일로서 행위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행위하는 것이 보고 있는 것이며, 보는 것이 행위하는 것이다. 신체의 움직임은 이미 표현 행위인 것이다. … … 행위하는 것과 보는 것이 결합하는 곳에 신체가 있다. 행위적-직관적으로 사물이 보이는 곳에 신체가 있는 것이다. 

- 니시다 기타로, <인간의 존재> 중에서(227쪽 재인용) 



… … 예술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예술가의 온전한 신체라고 해도 좋다. 

- 니시다 기타로, <무의 자각적 한정> 중에서(228쪽 재인용) 



관계항2007



우리가 1990년대 초반 포스트모더니즘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서 서구 근대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면, 이우환은 이미 1960년대 근대 철학, 근대성(Modernity)의 한계성을 이야기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예술적 방향이나 실천을 고민하고 있었던 셈이다. (하긴 그 전에는 한국의 암울한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그럴 여유도 없었겠지만, 그런데 지금은 뭐지?)


그가 집중하고 있는 현재의 작품 활동은 이런 그의 고민이 고스란히 투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인 동시에 공간이며, 공간인 동시에 시간인 지점이 열리는 순간, 시간은 동시성의 장소로서 만남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그런 순간은 오는 시간도 가는 시간도 아니고, 바로 지금 여기의 안과 밖이 상호매개되는 열린 만남의 세계라는 점에서, 비대상적 차원인 것이다. (231쪽)



이런 측면에서 그는 상당히 관념적인 작가이며 일반 대중에게는 매우 어렵게 다가온다. 특히 그가 지향하는 미니멀한 표현 방식과 20세기 후반 서구 미술계를 주도했던 미니멀리즘과는 전적으로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언제나 나는 니시다가 말한 ‘절대모순적 자기 동일’을 비동일성의 지평으로 삼아, ‘무의 장소’를 관계성의 표현을 통한 무한한 울림-여백으로 전개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려 한다. 

(… …)

예술의 과제는 인간이 더욱 직접적인 세계로 해방될 수 있는 만남의 ‘장소’를 어떻게 열어 제시할 것인가 하는 데 있다. 그것은 어떻게 현실을 표현의 상태성으로부터 그것의 현재화로 이끌어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242쪽) 



딱딱한 미술 이론서인 관계로 일반 독자에게 추천할 만한 책은 아니다. 그렇다고 미술 전공자에게 추천하기에도 이 책은 솔직히 말해 어렵다. 실은 '어렵다'라고 하는 것이 다소 무안하게 여겨질 정도다. 1960년대 말 쓰여져, 그 당시 일본 미술계의 무수한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던 책을 두고 '어렵다'라고 말하는 내가 부끄럽다. 아직까지 한국 문화, 예술계의 지적 토양은 1960년대 말 일본 근처에도 가지 못한 것이다. 


굳이 이 책의 단점을 이야기하자면, 근대 철학을 이야기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다소 거칠게 나누고 있었다. 서양 근대 철학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드러나지 않고 한 쪽 방향으로 다 몰아넣고 있다는 느낌 말이다. 실은 그의 목적, 원근법적인 서양 근대 미술을 넘어서 새로운 예술적 실천을 도모하기 위함이지만. 하긴 이 책은 전문 철학 서적은 아니니... 


미술 이론 전공자이거나 비평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권한다. 그리고 이우환의 작품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이우환의 작품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탁월한 가이드북이 될 것이다. 






만남을 찾아서 - 10점
이우환 지음, 김혜신 옮김/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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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 조각 알렉산더 칼더 Alexander Calder  

July 18 - October 20, 2013 

리움Leeum, Samsung Museum of Art 




전시를 보고 난 다음, 리뷰를 쓰기 위해 몇 편의 논문들과 자료들을 모아두었는데, 역시 직장인이란 늘 시간이 없다보니, 이젠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그냥 메모만 해둔다. 


2013년 여름에 있었던 이 전시는 총 118점이 전시된 국내 최대 규모의 알렉산더 칼더 회고전이었다. 칼더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무척 뜻깊은 자리였으며, 칼더를 모르는 이들에겐 칼더의 조각 인생 전체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었던 자리였다. 



서커스 장면 Circus Scene

1929

Wire, wood and paint

127 x 118.7 x 46 cm

Calder Foundation, New York



알렉산더 칼더(1898-1976)는 움직이는 조각, 모빌을 창안하여 현대 조각의 혁신을 이끌었다. 미술가 집안에서 태어나 일상 속에서 미술을 접하며 자란 칼더는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했으나 결국 잠재된 예술성을 따라 조각가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1920년대 파리에 머물면서 몬드리안과 미로, 뒤샹, 아르프 등 당시 파리 미술계를 이끌던 작가들과 교류하며 추상 미술과 초현실주의같은 당대 최신 미술 경향을 접하고 크게 영향 받았다. 칼더의 대표적인 작업인 모빌과 스태빌은 칼더의 예술적 재능과 동시대 아방가르드 미술, 움직임을 구현하는 그의 공학적 지식이 조화를 이루어 탄생한 20세기 최고의 혁신적 조각이다. - <전시 팜플렛> 중에서



<서커스 장면>이라는 작품에서 우리는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철사로만 표현하는 칼더의 재능을 확인할 수 있다.  <곡예사들>이라는 아래 작품에서 칼더가 지닌 탁월함을 확인할 수 있다. 



곡예사들 Acrobats

c. 1927

Wire and wood

87.6 x 22.9 x 30.5 cm

Calder Foundation, New York

Gift of Katherine Merle-Smith Thomas in memory of Van Santvoord Merle-Smith, Jr., 2010




(... ...) 칼더 예술의 근간이 형성된 1920년대와 그의 혁신적인 작업인 모빌이 처음 등장하는 1930년대의 작업들이 선보인다. 우선, 그의 예술적 관심이 발하기 시작한 학창 시절의 그림들, 동물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묘사한 동물 스케치들, 1926년 파리 이주 직후에 시작된 철사조각들이 전시되어 있다. 대상의 특징적인 형태와 움직임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이를 놀라운 솜씨로 표현한 철사조각은 칼더의 천재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어 칼더가 파리의 주요 미술가들과 교류하며 추상미술을 익히고 이를 자신만의 양식으로 탄생시킨 1930년대의 역사적인 모빌과 스태빌도 감상할 수 있다. - <전시 팜플렛> 중에서 


Small Feathers

1931

Wire, hout, lead and paint

97.8 x 81.3 x 40.6 cm

Calder Foundation, New York





The Star, 1960

Polychrome sheet metal and steel wire, 35 3/4 x 53 3/4 x 17 5/8”

Bequest of George and Susan Proskauer 



(... ...) 작가의 전성기인 1940년대의 작업부터, 그가 말년에 집중적으로 제작한 대형 공공조각의 모형들이 전시되어 있다. 원숙의 경지에 들어선 1940년대의 모빌은 단순히 균형을 이루는 수준을 넘어 역동적이고 다양한 움직임들을 보여준다. 조각의 형태 역시 작업실 주변 자연 환경에서 받은 영감과 초현실주의의 영향이 반영된 유깆거인 특징이 두드러지면서 다채로와진다. 칼더는 작가로서 큰 명성을 얻은 이후에도 여전히 새로운 실험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2차 대전 동안 부족해진 금속 재료를 대신하여 나무나 청동으로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작업을 선보여 예술가로서의 부단한 노력과 창의성을 보여주었다. - <전시 팜플렛> 중에서 




The three wings

Sculpture by Alexander Calder, 1967. 

Angered, Gothenburg, sweden.

출처 - http://commons.wikimedia.org/wiki/




1960년대부터는 칼더는 공학기술을 이용해 공공 장소에 어우러지는 대형 조각을 만드는 일에 더 흥미를 느꼈다. 산업용 철판을 사용한 그의 대형 조각들은 마치 선박을 건조하듯 볼트로 조립하여 완성되었다. 1960년대는 많은 미국 조각들이 공공조각을 제작한 시기인데, 그 가운데서도 역동적이면서 부드러운 곡석인 특징적인 칼더의 대형 조각은 직사각형의 단순하고 기하학적인 1960-70년대 국제 양식의 건물들과 대비를 이루며 공간에 활기를 불어 넣었고 도시의 랜드 마크가 되었다. - <전시 팜플렛> 중에서 





거대한 속도 La Grande vitesse 

1969

sheet metal, bolts, and paint 



칼더의 <거대한 속도>는 너무 유명한 조각이라, 구글에서 검색해보면 세계 여러 도시에서 이 작품을 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칼더의 탁월함은 자연적 요소 - 공간, 바람, 공기 - 등과 어우러지면서 조각이 움직이며 이 움직임 속으로 관객이 참여한다는 것이다. 이 움직임은 지극히 기하학적이면서도 유려하고 아름답다. 더구나 대중적이기까지 하다. 칼더의 작품은 쉽게 볼 수 있으니, 다음에 보게 되면다면 한 번 유심히 보면서 칼더의 작품이 시사하는 바를 곰곰히 생각해보는 것도 무척 흥미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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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 더 브릴리언트 아트 프로젝트 

드림 소사이어티 전 - X brid 

2014. 10. 11 - 11. 16 

서울미술관 




전시를 관람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어제 본 것처럼 아직도 전시 관람의 여운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 전시에 나온 작품들 하나하나는 눈 여겨 보고 기억해 둘 만큼 전시 수준이 높았다. 신경 쓴 흔적이 눈에 보인다고 할까. 


실은 전시를 자주 다니고 한때 미술계에서 일했던 이로서 조금 부끄러웠다. 내가 모르는 작가들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대부분의 작가들이 몇 년에 한 번씩 개인전을 여는 탓에, 신경 쓰지 않으면 좋은 전시도 놓치고 오래 활동해왔으나 모르는 작가가 있기 마련이라고 하지만, ... 내가 게을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이제 미술 애호가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지금은 더욱더. 


이번 전시는 현대자동차가 직접 후원하는 '더 브릴리언트 아트 프로젝트The Brilliant Art Project'의 하나로 기획된 '드림 소사이어티 Dream Society' 전으로, 이번이 2회째다. 1회 때에서 옛 서울역, 지금은 문화역서울 284로 불리는 전시관에서 열렸고 그 때도 대단한 관심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하지만 가진 못했다). 


그 때도 대안공간 루프의 디렉터 서진석이 기획하였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드림 소사이어티라는 단어는 롤프 옌센이라는 미래학자의 저서에서 가지고 온 단어로, 정보사회에 뒤이어 '꿈과 감성을 파는 사회'가 올 것이고 이를 '드림 소사이어티'로 명명한다. 이번 전시를 후원한 현대자동차, 이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 그리고 이 전시를 보러온 관람객 모두 이런 '드림 소사이어티'를 꿈꾸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사회로 가는 건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을 테고, 이 여정을 위한 이번 전시의 주제는 X brid다.   



X brid는 혼성물, 이질적인 것의 결합 등을 뜻하는 하이브리드(Hybrid)와 미지의 수 'X'를 충첩시킨 보다 창조적이고 진보된 신조어이다. 'X'는 수학에서 아직 결정되지 않은 기호, 미지수를 뜻하며 '1+1'이 규정, 결정되지 않아 여러 가능성을 열어둔 새로운 '1'의 생성임을 환기시킨다. 이러한 의미에서 'X'는 서로 이질적이거나 상충하는 것의 융합으로 종래 질서와 인식 범위에 갇히지 않는 미지의 다양하고 확장된 세계를 말한다. 


모든 이질적인 요소들이 융합된 'X'는 기존의 관습이나 가치관, 생활방식에서 벗어나고 껍질뿐인 외관, 외양에 찬사를 보내는 삶의 태도나 인식 등을 넘어서 궁극적으로 '완벽한 거듭나기'를 제안한다. 

- 서진석(대안공간 루프 디렉터) 



X brid에 대해 이번 전시를 기획한 서진석의 글 일부를 옮긴다. 하지만 쉽진 않다. 전시 기획의 어려움을 여실히 느끼게 만든다. 수준 높은 작품들로, 왕성한 활동을 하는 작가들로, 한 쪽으로 편향되지 않으면서도 기존의 관습에서 벗어나 새롭고 미래지향적인 느낌을 보여줄 수 있도록 하는 것. 내가 적고 있긴 하지만, 이건 참, 어렵다. 


이에 서진적은 본 전시의 목적 아래 3가지로 요약한다. 


드림 소사이어티 전의 목적

첫째, 21세기 예술의 새로운 환경적 공공성 제시 

둘째, 다양한 장르의 창작자들과의 협업을 통한 무경계 융합 예술 제시

셋째, 21세기 예술계와 산업계 간의 수평적 교류 

- 서진석(대안공간 루프 디렉터) 



전시를 관람하고 난 다음 위 목적에 어느 정도 부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지만, 이러한 메시지가 관람객에게 제대로 전달되었는지에 대해선 의문이다. 하긴 관람객들 대부분은 개별 작품들이 주는 놀라움과 신선함에 먼저 매료되었을 테니, 본 전시의 목적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더라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최우람(CHOE U-Ram)

URC-1 

motor headlights, steel, COB LED, aluminium radiator, DMX controller, PC

312*332*296 cm

2014 



최우람의 작품은 먼저 기계 장치의 조형성, 그리고 그 기계 장치가 보여주는 율동, 운동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끈다. 이번 작품은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가지는 조형성이 돋보였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로웠다.  








백정기(BEAK Jungki) 

Egg Incubator: Candle and Plant 

egg, candle, plant, thermoelement, incandescent lamp, glass, wood, steel, mixed media

dimensions variable 

2014 



이번 전시에서 날 매혹시켰던 작가다. 그는 '달걀 부화기'는 작품을 선보였는데, 화분에서, 양초에서 전기를 얻어 달걀 부화기를 만들고 실제 달걀을 부화시킨다. 과거의 미술 작품이 정지된 조형성, 또는 반복되는 조형적 움직임에 집중하였다면, 이 작품은 조형적인 영역을 벗어나 환경 속에서 무언가를 얻고 이를 과정화시키며 어떤 실질적인 가치를 환기킨다. 그는 이 작품을 위해 많은 것들을 새로 공부하고 배웠을 것이다. 앞에서 소개한 최우람도 마찬가지일 테지만.


하지만 '달걀 부화'라는 컨셉은 재미있고 신선하기는 하나, 묵직한 느낌은 없다. 소년이 좋아할 만한 컨셉이지, 현대 예술이 싸워야 하는 어떤 것들에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는 건, 내가 너무 진지하고 심각해서 그런 걸까. 



김기라(KIM Kira)

A Weight of Ideology_Darkness at Noon-Behind of Rainbow 

designed carpet, handmade wool carpet 

300cm diameter circle 

2014 



이 점에서 김기라의 작품은 너무 심각하고 끔찍하기까지 하다. 위 둥근 카펫은 한국의 세대별 자살율을 표현한 것이다. 신발을 벗고 이 카펫 위에 잠시 서 있어 보았는데, 아, 기분이 매우 나빴다. 



파블로 발부에나(Pablo Valbuena) 

Para-Site

site-specific installation

video-projection on exhibition plinths 

2014 



파블로 발부에나의 작품은 무척 흥미로웠다. 우리에게 공간의 해체와 재구성이 어떤 것임을 알려주며 빛과 공간의 하모니를 표현하고 있다. 아래 동영상이 실제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Youtube에서는 그의 다른 작품들에 대한 동영상 몇 편을 찾아 볼 수 있다.  









요시타즈 야마가타(Yoshikazu Yamagata) 

The Seven Gods - Cloths from Chaos 

writtenafterwards 

2013



요시타즈 야마가타는 일본의 패션 디자이너/패션 아티스트로 '융합'이 관점에서 이 전시에 초대된 듯 보인다. 작품은 다소 생경스럽고 일본적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풍겼다. 선호가 분명한 작품이지만, 실제로는 이 작품을 패션쇼 형태로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전시 오픈 때 요시타즈 야마가타의 패션쇼가 진행되었다. 



강영호 (KANG Youngho)

The Judgement which Prohibits Pride 

pigment ink on fine art paper

225 * 15 cm

2014 



강영호는 사진 촬영을 일종의 퍼포먼스 속에서 진행하였다. 이 퍼포먼스 동영상이 전시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놀라웠다. 사진들은 마치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고 빨려들 듯한 신비로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예승(LEE Yeseung)

A Wild Rumor 

interactive media installation

micro-controller, motion sensors, scientific experiment tools, plastic containers, daily objects, table, lights, chair

dimensions variable 

2013 



이예승의 작품은 보이는 것과 실제로 존재하는 것의 차이를 탐구한다. 이 과정은 무척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몇몇 작가의 작품은 사진을 찍지 못한 탓에 옮기지 못했다. 다음 기회에서 별도로 소개할 수 있을 듯하다. 특히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은! 


전시는 이미 끝났고 전시 기획과 준비에 현대자동차가 큰 후원을 했다. 그들의 예술 후원은 좀 남다른 면이 있다. 이 흥미로운 후원과 지원 프로그램이 지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이번 전시의 경우에도 전시가 기획되고 작가 섭외가 끝난 후, 전시에 필요한 대부분의 비용을 현대자동차가 지원했다고 한다. 그런데 전시 중에 자동차의 느낌은 없었다. 이러한 간접적 환기는 고도의 전략은 장기간의 접근이 필요하다. 그들의 예술 마케팅이 성공하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성공 케이스가 되어 한국의 많은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예술가들의 직, 간접적 지원/후원 활동을 하였으면 좋겠다. 






제 1회 드림 소사이어티 전 

http://brand.hyundai.com/ko/art/project/the-brilliant-art-series.do 

참고) 

http://www.theartro.kr/arttalk/arttalk.asp 

드림 소사이어티, 예술의 사회적 기능을 다시 묻다 - 안소연(미술평론가)



제 2회 드림 소사이어티 전 : Xbrid, 그 복합적인 결합을 통한 새로운 창조에 대하여

http://brand.hyundai.com/ko/art/project/season2-2014-dream-society-brid.do



전시 제목을 인용한 롤프 옌센의 저서. 



드림 소사이어티 DREAM SOCIETY[재판]

롤프 옌센저 | 서정환역 | 리드리드 | 2005.07.28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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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보이스 Joseph Beuys (1921 - 1986) 





요셉 보이스를 조금 안다고 여겼는데, 나는 전혀 그를 모르고 있었다. 솔직히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의 작품을 실제로 분명히 봤을텐데, 그 기억은 나지 않고 작품 스틸 이미지만 머리에 맴돌 뿐이다.  



Joseph Beuys 1976 

출처: http://uk.phaidon.com/agenda/art/articles/2014/march/03/why-joseph-beuys-and-his-dead-hare-live-on/



그의 예술 세계는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시작해, 치유와 회복, 특정 매체에 대한 집중, 은유, 알레고리, 예술과 삶, 과거에 대한 반성과 미래에 대한 진취적 모험에까지 이른다. 심지어 그는 실제 정치 활동까지 한다. 이런 다양성 밑에는 일관된 주제와 표현 방식이 있는데, 실은 이런 일관성이 그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How to Explain Pictures to a Dead Hare (죽은 토끼에게 그림을 어떻게 설명할까)

- Performance on 26 November 1965 at the Galerie Schmela(뒤셀도르프)


 

"For me the Hare is a symbol of incarnation, which the Hare really enacts-something a human can only do in imagination. It burrows, building itself a home in the earth. Thus it incarnates itself in the earth: that alone is important. So it seems to me. Honey on my head of course has to do with thought. While humans do not have the ability to produce honey, they do have the ability to think, to produce ideas. Therefore the state and morbid nature of thought is once again made living. Honey is an undoubtedly living substance-human thoughts can also become alive. On the other hand intellectualizing can be deadly to thought: one can talk one's mind to death in politics or in academia." - Joseph Beuys

(나에게 토끼는 육신화의 상징이죠. 이 토끼는 사람이 단지 상상 속에서만 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진짜 보여주고 있어요. 땅을 파서 그 건축물 자체가 집인 곳을 이 지구에 만들죠. 이렇게 해서 지구에 그 스스로 구체화시킵니다: 그건 유일하게 중요한 것입니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게 보여요. 물론 내 머리 위의 꿀은 생각과 관련이 있죠. 사람들은 꿀을 생산할 능력을 가지지 못했지만, 그들은 생각할 수 있고 개념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사상의 오래되고 병적인 본성은 다시 한 번 살아있는 것이 됩니다. 꿀은 의심할 여지 없이 인류의 사상을 또다시 살게 만드는, 살아있는 실체예요. 반면에 합리화는 사상에 있어서 치명적인 것이예요. 그것은 정치나 학문에 있어서 자신의 마음을 죽음과 이야기하게 만들 겁니다.)   

(* 번역해보았는데, 많이 다듬어야 한글로 뜻이 통할 것같은데, 능력 부족이군요. 양해를.) 



작품 이해를 돕기 위해 위 문장을 옮겨왔으나, 작품 이해를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 퍼포먼스는 요셉 보이스의 대표적인 작품 중의 하나이지만, 받아들이긴 쉽지 않다. 다른 작품들도 비슷한데, 그가 기대고 있는 세계가 북유럽, 켈트적 전통에 기반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즉 우리와는 정서적으로 맞지 않다고 해야 하나. 


주술적이거나 제의적이라는 특징은 요셉 보이스 뿐만 아니라 현대 예술가들에게 대부분 해당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특히 요셉 보이스에게 해당된다. 죽은 토끼와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는 다시 되살아남을 느낀다. 즉 이미 죽어야만 다시 되살아날 수 있는 기회를 붙잡을 수 있음을 반어적으로 표현한다. 그가 죽다 살아났던 것처럼, 새로운 세계는 죽음을 거쳐야만 맞이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말하는 동안 그의 숨결은 죽은 토끼를 거치고 그가 퍼포먼스를 한 유리 부스 안에는 죽음을 거쳐온 생기(生氣)로 넘친다. 


실제 그의 퍼포먼스를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짧은 영상이지만, 한 번 보자. 

 




요셉 보이스의 펠트와 지방에 대한 천착에 대해선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개인적인 경험 - 진위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 에 의해 치유와 회복의 상징이 되었다. (참고: 요셉 보이스 한글 위키피디아 설명) 그리고 그의 단골 매체가 되었고 일종의 집착처럼 느껴질 정도다. 



Joseph Beuys, The Pack 1969

Staaliche Museen Kassel, Neue Galerie. 

(c) DACS, 2005

출처: http://www.tate.org.uk/whats-on/tate-modern/exhibition/joseph-beuys-actions-vitrines-environments 



지방을 펠트천으로 감싸고 마치 개가 끄는 눈썰매 모습처럼 낡은 폭스바겐 밴에 연결된 이 작품은 일종의 비상 사태를 대비하기 위한 물건들처럼 보인다. 즉 상처입고 죽어가는 누군가가 있다면 썰매에 있는 지방과 펠트천으로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 이런 상징과 은유는 ..., 역시 낯설다. (ㅡ_ㅡ)


<7,000 떡갈나무> 프로젝트는 그의 컨셉 - '사회적 조각, 혹은 예술작품으로서의 사회(social sculpture - society as artwork)'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Some of the 7,000 Oaks planted between 1982 and 1987 for Documenta 7 (1982)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Social_sculpture



Joseph Beuys, 7000 Oaks. Located on West 22nd Street between 10th and 11th Avenues. 

(The 7000 Oaks project began in 1982 with a planting of 7,000 trees, each accompanied by basalt stone columns, through the city of Kassel, Germany. Dia Art Foundation continued this project with plantings in Chelsea in 1988 and 1996.)

출처: http://www.times-arrow.com/joseph-beuys-7000-oaks/ 



"나는 7,000그루의 떡갈나무를 심을 것이다. 7,000그루의 떡갈나무 옆에는 각각 한 개의 돌들이 세워질 것이며, 이로써 최소한 800년을 생존한다고 알려진 떡갈나무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역사적인 순간은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노동과 테크놀로지의 개념, 물질주의, 정치적 이데올로기, 산업화, 자본주의 혹은 공산주의란 미명 아래 인간이 취해온 폭력적인 황폐화과정에서 벗어나 올바른 재생의 과정, 다시 말해, 자연 뿐 아니라 사회생태학적인 관점에서 생명을 부여하는 소생의 과정인 '사회적 유기체'를 이끌어낼 때이다. 이를 위해 나는 돌을 필요로 한다." - 요셉 보이스 

출처: 송혜영, <요셉보이스의 <20세기 종말>>(2009. 영남대학교)에서 재인용



생명과 돌이 지니는 영속성, 그리고 이를 직접 땅에 심는 행위(action)으로 시작되고 시간 속에서 지속되는 예술작품. 요셉 보이스는 우리 모두가 예술가이며, 예술을 통해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Joseph Beuys

The End of the Twentieth Century, 1983–5, 

(c) DACS, 2014

출처: http://www.tate.org.uk/art/artworks/beuys-the-end-of-the-twentieth-century-t05855



"이것은 새로운 세상의 각인이 새겨진 낡은 세상을 의미합니다. 마치 석기 시대의 식물처럼 생겨난 이 마개를 보십시오. 나는 현무암 덩어리에서 정성 들여 원추형의 마개를 파내었고, 이 마개가 아프지 않고 따스함을 유지하도록 펠트와 점토로 감싼 후 깊숙이 파여진 원래의 자리에 삽입하였습니다. 마치 현무암 그 자체가 한때 지구내부에서 분출하여 응고되었듯이, 이것은 얼어붙은 돌덩어리에서 무언가 움직이고 솟구치고 살아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요셉 보이스

출처: 송혜영, <요셉보이스의 <20세기 종말>>(2009. 영남대학교)에서 재인용 



그런데 이 사회적 예술이 기반하고 있는 세계는 켈트적 전통, 고대 샤먼의 세계다. 일종의 반 지성주의, 반 인간주의이며, 이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20세기 초반 몇몇 예술가들이 매료당했던 원시적 양식의 지속으로도 볼 수 있다. 이는 미술 양식 뿐만 아니라 연극에서는 제의적 양식으로 표현되었다. 아마 다른 장르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우슈비츠 이후 더 이상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고 아도르노가 말했듯이, 차마 말할 수 없는 비극 뒤에서 인간적인 것들은 믿을 수 없는 어떤 것이 된다. 요셉 보이스에게 나타나는 인간적인 것들에 대한 배격은 우리 앞에 놓여진 어떤 죽음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새로 태어나야 된다는 제의(祭儀)로 양식화된다. 그의 작품들의 상당수는 이러한 알레고리를 밑바탕에 깔고 진행된다.


하지만 역시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의 화법은 우리와는 전혀 다르다. 그가 서구 미술계에 절대적 영향력을 끼쳤던 것만큼 나에게 호소력 있기를 바라지만, ... 그렇진 못한 듯싶다. 기회가 닿는다면, 다시 한 번 그의 작품을 보고 다시 이 글을 업데이트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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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비즘에 대한 세잔의 영향에 대해 자세히 알아본 바가 없었다. 현대미술에 대한 세잔의 영향은 너무 거대하기 때문에, 큐비즘 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현대 미술가들은 세잔의 후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아마 내가 현대 미술에 대한 긴 글을 쓴다면, 뒤샹과 세잔만으로 글의 초반을 장식할 것이다. 뒤샹은 현대 미술을 난장판으로 만든 이라면, 세잔은 현대 미술을 견고하게 만든 이다. 과거와 단절하고 현대 미술이 끊임없는 혁신을 감행하게 된 계기는 뒤샹이고, 현대 미술이 과거의 역사와 단절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어지며 현대 미술 또한 서양 미술사의 한 챕터임을 끊임없이 환기시키에 한 이가 있다면 그가 바로 세잔이 될 것이다. 


그는 현대 문화의 내향성을 최초로 들어내 보이며, 우리 마음 속의 기하학에 주목했다. 고전적 현대, 혹은 모더니즘을 새로운 고전주의라고 불리게 만든 예술가이다. 그리스 고전주의, 르네상스 고전주의가 외부에 존재하는 기하학을 찾았다면, 세잔은 우리가 본질적으로 기하학적임을 드러냈다. 


큐비즘은 세잔의 직접적 영향 속에서 기하학주의를 전면에 드러낸다. 세잔 이후 모더니즘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기하학주의로 예술을 지배한다. 아마 연구자들은 프랑스의 누보 로망이라든가, 전후 실존주의 문학이라 이후의 문학들 속에서도 기하학주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래 피카소와 세잔의 작품을 한 번 비교해보라. 얼마나 닮아 있는지. 

(나에게 여유가 된다면, 이와 비슷한 음악과 문학 작품을 찾아 나열해볼 수 있을 텐데.. 아직 그럴 여유가 없구나.) 



Pablo Picasso, Bread and dish with fruits on the table, 1909, oil on canvas, 164 x 132.5cm, Kunstmuseum, Basel 





Paul Cezanne, Still Life, oil on canvas, 60*73cm, 1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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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리에서 떠나는 상상의 유목 - 경지연 전 

Portray Magic, Kyung Ji Yeon - 7th Solo Exhibition. 

인천아트플랫폼, 11.1.-11.12.2014. 




정사각형 캔버스에 담겨진 풍경들은 사방으로 뻗어나갈 수 있으면서도 자족적인 완결 감을 가진다. 1m*1m 크기의 같은 규격과 형식을 가지는 단자적 세계들은 확장 가능성이 있다. 세상 사람들의 희망 사항을 그런 식으로 다 모은다면 밤하늘에 뿌려진 별처럼 많아지리라. 현실이 절망적일수록 멀리 있는 희망의 빛은 더욱 빛날 것이다. 설치형식으로 건 그림들 앞에서 관객은 여기에 머물다가 저쪽으로 옮겨갈 수 있으며, 장면전환은 신속하다.구글에서 검색한 무채색 톤의 자료는 지도와 풍경, 실제와 상상의 중간 단계로 재탄생한다. 칙칙한 현실은 원색과 야광 색을 비롯한 비현실적이고 화려한 색채로 거듭난다. 전시장은 고화질의 총천연색 꿈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듯하다. 풍경의 참조대상인 지도는 모노톤이지만, 형형색색의 젤리나 사탕같이 반짝거리는 미디움으로 변형시킨다. 현실이 씁쓸한 만큼 환상은 달콤할 것이다. 현실이 밋밋한 만큼 환상은 강렬할 것이다. 바람 빠진 풍선 같은 현실은 상상의 바람에 의해 부풀어 오른다. 작가는 상상으로 충전된 기구를 타고 세계 곳곳을 넘나든다. 

- 이선영(미술평론가), 전시 설명 중에서. 






전시를 보러 가기 위해 인천까지 가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긴 했지만, 짧지만 모처럼 기분 좋은 외출이 되었다. 


1930-40년대 지어진 물류 창고 건물을 새로 꾸며 복합 문화 공연 전시 공간인 인천아트플랫폼은 그 시설이나 운영 프로그램 등의 여러 측면에서 부러움을 자아내는 곳이었다. 




경지연의 7번째 전시는 인천아트플랫폼 G1에서 열리고 있다. 


우리의 삶은 여러 개의 층위로 구성되어 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직장인으로서의 나와 글을 읽고 쓰는 사람으로서의 나, 아빠로서의 나와 술을 마시는 나, ... 무수한 나들은 서로 경쟁하며 다투고 헤어지기도 하다가 때론 어루만지기도 하면서 나라는 존재를 구성한다. 



경지연, work1. 로마에서의 기적+콜로세움, 캔버스에 혼합재료, 아크릴채색, 100×100cm, 2014



갤러리 한 쪽 벽에는 작가가 모티브를 얻은 구글의 위성 사진들이 프린트되어 있고 이 사진들이 어떻게 조형적으로 구성되고 창조되었는가는 알 수 있다. 그리고 캔버스 위에 물감들이 보여주는 물질감은 장식적이고 화려하며 기분을 좋게 한다. 종종 예술은 꿈을 꾸고 꿈으로의 통로를 마련한다. 




꿈은 현실을 위해 존재하고 현실 속에서 태어나 자라난다. 그러나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꿈과 현실 사이에 예술이 있고 예술가의 작업, 노동이 존재한다. 경지연의 이번 작품들은 그 사이에서, 때로 삶이 우아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실은 나도 그런 걸까. 작품들은 매끈하면서 리듬감이 있으며 다채롭고 즐겁다. 우리 삶이 그렇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경지연, work4.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타임스퀘어_캔버스에 혼합재료, 아크릴채색, 100×100cm, 2014




경지연, work6. 꿈을 빌려드립니다+괌, 캔버스에 혼합재료, 아크릴채색, 100×100cm, 2014


실제 작품에서는 물감 덩어리가 가지는 느낌, 그것이 캔버스 위에서 요동치는 듯한 분위기, 색채와 형태, 물성의 어루어짐을 느낄 수 있지만, 역시 사진 이미지로는 알기 어렵다. 


전시는 이번 주 수요일까지이니, 오늘이 적기일 것이다. 그리고 인천아트플랫폼, 충분히 가볼 만한 공간이다. 아주 매력적이다. 바로 옆에서는 인천 차이나타운이 있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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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니 혼 Roni Horn 

5.20 - 6. 22. 2014

국제갤러리 Kukje Gallery 





늦은 봄, 관람했던 전시에 대한 소개를 지금 올리는 건 너무 태만한 짓인가. 실은 글을 쓸 시간이 없다. 몸도 피곤하다. 해야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로니 혼Roni Horn.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나하나 작품을 기억하기가 이렇게 어려워졌다는 건, 그만큼 관심사에 멀어졌다는 이야기다. 


형편없어진 '이미지에 대한 기억'력. (현대는 원하지 않는, 그러나 범람하는 이미지들로 인해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고 있는 건 아닐까.) 



로니 혼은 작가 특유의 공간에 대한 감성으로 시간, 기억 그리고 지각이라는 주제들을 탐색하며 강력하고, 절묘할 만큼 아름다운 시각적 명상 속으로 관객들의 시선을 부드럽지만 힘있게 이끌고 나간다. 작가는 몇 초 간격으로 촬영한 사진 이미지들을 쌍을 이루거나 중복시키는 등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활용함으로써 이번 전시의 근간을 관통하는 동일성과 상이성의 본질에 대해 질문한다.  (전시 설명 중에서)





Installation view, 'Roni Horn. Well and Truly', Kunsthaus Bregenz, Austria, 2010

Photo: Stefan Altenburger Photography Zürich

출처: http://www.hauserwirth.com/artists/14/roni-horn/images-clips/20/  



K3에는 본 전시의 주요 작품인 유리 주조 조각들이 소개된다. 이 유리 조각 작품들은 작가의 날카로운 인식론적 문제 의식을 담아낼 뿐 아니라, 관객 개개인이 이 유색의 눈동자 형태 조각들을 유심히 들여다보게끔 유도한다. 전작들에 비해 규모적으로 더욱 확대된 이러한 작품들은 빛을 포획하는 동시에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 거대한 물의 덩어리인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전시 공각 전체를 압도하는 육중함을 지니게 된다. 이들이 띠고 있는 흔치 않은 연두색 계통의 색채는 독특한 빛의 분사를 유발시키는 것은 물론 대지와 바다를 연상시키며 관객들을 사로 잡는다. 조화롭게 설치된 이러한 일련의 유리 조각들은 친밀하고도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공간적 환경을 창조해낸다. (전시 설명 중에서) 





Opposite of White V.1, 2006

출처: http://www.theguardian.com/artanddesign/gallery/2009/feb/25/roni-horn-tate-modern 




국제갤러리에서의 전시는 고요했다. 길게 전시 설명을 옮기는 이유는, 2009년 테이트 모던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가졌던 로니 혼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확실히 대형 유리 주조 작품은, 사진으로 보여지는 것과 달리,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다. 만지고 싶고 한참을 들여다 보게 된다. 사진 작업들도 흥미로웠으나, 탁월하진 않았다. 실은 내가 좋아할 만한 작품이 아니라는 뜻일 게다.  

 



"Untitled (Weather)" - 2011 - Inkjet / pigment print on paper: 5 COLOR PRINTS, mounted on sintra - 31,11 x 26,03 cm each 

출처 http://www.galleriaraffaellacortese.com/artists/view/24/roni-horn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사이로, 텅 빈 캔버스 위에 거울을 올려놓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울을 올려놓을 순 없는 일. 그래서 응시하는 타인이나 자아. 혹은 마주 보는 타인이나 자아를 거울 대신 배치시킨다. 시선의 가리워진 폭력성, 그리고 철학적 질문 - 타자와 동일성. 


하지만 이는 너무 평범하지 않은가. 나에게 로니 혼은 평범했다. (하긴 이 평범함에도 오지 못하는 작가들이 부지기수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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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쉬 카푸어 Anish Kapoor 

2012.10.25 - 2013.2.8 

삼성미술관 Leeum 





황량한 현대 미술의 첨단에 카푸어가 불과 몇 명의 위대한 아티스트들과 함께 우뚝 서 있음은 하나의 구원이다. 시각의 초월적인 기능, 아트의 건전한 엘레멘트의 구사, 풍요로운 표현방식, 긍정적인 미지의 암시 등으로, 그 환기력의 유효성을 정면에서 입증해주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 이우환 


* * 



(리움에서 출간된 아니쉬 카푸어 도록. 잘 만든 도록이다)



전시를 본 것은 일 여년 전이지만, 아니쉬 카푸어는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책상 구석에서 사라지지 않았던 아니쉬 카푸어의 도록 탓도 있었지만, 전시 공간 안에서 보여주는 놀라움과 경이는 현대 미술의 새로운 영역을 여는 듯했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도록 - 아니쉬 카푸어는 리움(Leeum)에서 낸 도록을 직접 감수하며 사진하나하나 손수 골랐다고 전해들었다 - 을 펼치며 그의 작품에 대해서 생각했다. 


하지만 호미 바바의 말대로, 내가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그의 작품을 제한하는 것이 될 것이다. 


카푸어의 작업은 기존에 되풀이 되어온 비평 방식으로 종종 다루어졌는데, 이는 그의 작업을 이미 만들어진 초월적 형이상학의 틀 속에 넣어버림으로써 독창성을 제한해 버렸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공허, 암흑을 절개하는 거울, 아득한, 잊혀진 풍경처럼 수집된, 채색된 꿈의 오브제들, 카푸어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같은 특징들은 '동양적인' 성스러움이나 '서양적인' 숭고 같은 낡아빠진 어휘들에 너무 쉬이 흡수돼 버린다. 초월성에 치우친 담론은 개념미술에 문화적인 강령과 해석적인 코드를 교묘하게 부과한다. - 호미 바바 



이렇듯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들은 우리가 가진 언어적 세계 너머를 향한다. 그리고 작품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혹은 행복하게 강요당하는) 신비한 몰입은 현대 예술의 한 극점을 보여주었다.


카푸어의 고향, 인도를 제외하곤 아시아 최초의 개인전이었으며, 아마 그 규모의 개인전은 한국에서는 꽤 오래동안 힘들 것이다(아니면 없을 것이다). 아래 이미지들은 구글링을 통해 구한 작품 사진들이다. 레비아탄의 경우에는 리움에서 전시되지 않았으며, 2012년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에서 보여주었던 작품이다(이우환은 이 작품을 그랑팔레에서 보았던 놀라움을 도록에 실린 글에서 표현하고 있었다).


*  * 


아니쉬 카푸어에 대한 상당수의 글들이 호미 바바가 지적한 대로의 비평적 방향을 그대로 수용하고, 나 또한 그렇게 해석하려고 했다. 도리어 호미 바바의 글 - 규정하기 어려운 오브제들: 아니쉬 카푸어의 분열적 예술(Elusive Objects: Anish Kapoor's Fissionary Art) - 은 탈식민주의적 관점에서, 또한 포스트모던의 관점에서 기존 사고틀에서 벗어나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증 속에서 씌어졌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강박증이야 말로 기존 틀을 벗어나 혼란 속으로 들어가, 미래를, 새로운 공간을 여는 행위로 유도하는 촉매제다. 


아니쉬 카푸어와 호미 바바는 같은 인도 출신이며, 호미 바바는 아니쉬 카푸어에 대해 다수의 글을 썼다. 아니쉬 카푸어에 대한 글을 통해, 나는 이제서야 호미 바바를 읽었는데, 그의 책을 한 권 사서 읽어야겠다. 




Sky Mirror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Sky_Mirror




Yellow 

출처 http://openhousebcn.wordpress.com/2012/01/27/good-morning-yellow-anish-kapoor-openhouse-barcelona-art/ 




출처 http://www.omnilexica.com/







1000 Names 

출처 http://www.designyearbook.com/2010/06/1000-names-by-anish-kapoor.html




My Red Homeland 

출처 http://chincha.co.uk/2012/11/anish-kapoor-exhibition-review/ 




Leviathan

출처 http://videoinstallationperformanceliupost.wordpress.com/20-2/sung-bok/installation-sung-b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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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작가 금보성 전 

- 송정미 카네기홀 콘서트 후원전시회 

금보성 아트센터, 2014. 9. 20 - 10. 12 





한글의 우수성을 이야기하고 한글의 조형미까지도 이야기하지만, 한글 폰트에 대한 관심이 이제서야 조금씩 늘어나는 것같지만, 순수 미술에 있어서 한글에 대한 관심은 아직 멀기만 하다. 내가 한글에 대한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건 주제넘은 일이지만, 금보성의 한글들은 참 이쁘기만 하다. 마치 꼬마 아이가 넓은 마당에서 뛰어 노는 듯, 생기 넘치기만 하다. 




단단하면서도 무척 부드러워 보이고 여기저기 튀어나갈 듯하면서 고정되어 있는 모습이 신기하다. 마치 한글의 창제 원리가 우리 입 안의 움직임들로 이루어졌듯이, 금보성의 한글들은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움직이며 보는 이의 눈을, 마음을 건드린다. 





실은 저 채색된 한글들은 스티로폼으로 만들어져 있다. 스티로폼이 가지는 가벼움, 거칠지만 쉽게 모양을 만들 수 있는 편의성, 그러나 금보성의 손길 위에서 스티로폼은 그 연약한 물질성 위로 강하고 단단한 조형성을 얻게 된다. 그리고 한글이 가지는 특유의 생명력, 끈기, 부드러움까지도.  



(* 클릭해야만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 클릭해야만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리뷰가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이 전시는 이번 주말까지만 이어질 예정이다. 평창동에 위치한 금보성 아트센터는 김종영 미술관 바로 맞은 편에 위치해 있다. 


특히 이번 한글날, 한글작가 금보성의 작품을 만나러 평창동 산책을 계획해보는 건 어떨까? 아마 한글이 가진 미적 우수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는 김에 근처에 위치한 여러 갤러리와 미술관도 함께 다녀보고, 평창동 구경도 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 클릭해야만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 클릭해야만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 금보성 작가가 직접 작업을 하는 모습이다. 스티로폼이 인상적이다. 




금보성아트센터 위치 (김종영 미술관 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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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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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거친 호소력으로 정치적, 역사적 메시지를 던지는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 


그는 1955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 아파르타이트(Apartheid)에 반대한 백인 변호사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백인 사회에도 섞이지 못하고, 흑인 사회에서도 섞이지 못하는 경계에서 시작한 셈이다. 


그는 경계의 자유(혹은 고독, 혼란) 속에서 눈 앞에 보이는 현실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짓누르는 근대 유럽의 세계관에 대해 본격적인 저항을 한다. 


"자신을 하나의 완성되고 균일한 한 구성체, 자아로 인정하는 서양적 논리는 만들어진 환상임을 표현하고 싶었다." - 윌리엄 켄트리지

(출처: http://www.gaeksuk.com/atl/view.asp?a_id=563)


작년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소개된 윌리엄 캔트리지의 <Felix in Exile>이라는 애니메이션이다.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 <추방된 펠릭스Felix in Exile>



일반적인 애니메이션과 다르게 거칠고 어색하며 둔탁한 느낌을 주는 켄트리지의 애니메이션. 이 낯선 느낌은 제작 방식의 특수함에서 기인한다. 그는 수십 장의 소묘만을 가지고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여 애니메이션을 완성한다. 즉 지울 수 없는 어떤 흔적에 집중하고 이를 역사적 차원으로 끌어올려 질문을 던진다. 이런 그의 거친 스타일을 두고 어떤 이들은 케테 콜비츠와 비교하기도 한다. 


"침식과 무성함, 그리고 붕귀 등의 자연 현상으로 인해서 자연풍경이 변형되고,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 변형된 모습들은 점점 사라져 버린다. 이러한 과정은 지난 날의 일을 잊어버리는 망각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날에 일어난 일의 의미를 되새기고 잊혀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기록, 교육, 미술관, 노래, 그 외의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야만 한다." 

- 윌리엄 켄트리지 (출처: blog.daum.net/iw_sunny/3721689



실은 내가 윌리엄 켄트리지에 대해 이렇게 포스팅을 하게 된 이유는 아래 작품 때문이다. 얼마 전 읽은 미술 잡지에 실린 이 작품 <시간의 거부The Refusal of Time>에 대한 리뷰만으로는 이 작품이 어떤 것인지 감이 오지 않았고, 이 작품을 찾아보았는데, 아!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 시간의 거부(The Refusal of Time) 



2012년 카셀도큐멘타에서 전시되었던 이 작품은 실제 전시장의 느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이 영상만으로도 켄트리지 작품이 가지고 있는 압도적인 기운이 전해오는 듯했다. (2012년 카셀도큐멘타 당시 최고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지금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으며, 올해 초에는 일본 쿄토에서 전시되었다. 아, 한국에는 전시될 수 있을까.)


각자의 하늘에 있는 태양이 머리 꼭대기에 위치할 때가 바로 우리가 정오라고 부르는 시간이다. 우리는 하늘의 별들로부터 시간 관념을 빌려 왔으며, 그것을 개개인의 신체 속에 있는 기관의 리듬에 맞추어 인지했다. 심장과 폐와 맥박은 인간을 일종의 숨 쉬는 시계(몸-시간)로 만든다. 

- 윌리엄 켄트리지, <시간의 거부> 도록 중에서. 

(이정연, '시간의 블랙홀 - 윌리엄 켄트리지' 중에서 재인용, 아트인컬쳐 2014년 7월호) 



거창하게 시작된 글이 아닌지라, 간단한 노트 수준에서 끝낼 예정이지만, 윌리엄 켄트리지에 대한 관심을 앞으로도 지속될 것같다. 거의 모든 장르 - 페인팅, 드로잉, 오페라 무대, 조각, 설치, 애니메이션까지 그의 작업 범위 속에 넣은 윌리엄 켄트리지는 현대 예술이란 장르를 뛰어넘어 모든 장르를 한 곳에 몰아놓은 일종의 용광로 같은 것임을,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시각으로, 어떤 메시지를, 어떤 형식으로 담아낼 것인가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William Kentridge - Shadow Procession

Shanghai Biennale 2000



* 윌리엄 켄트리지 : http://en.wikipedia.org/wiki/William_Kentridge 



2010년 MoMA에서 윌리엄 켄트리지 전시가 열렸는데, 이에 대한 안내 동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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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서서 

이우환 시집, 성혜경 옮김, 현대문학 




이우환 Lee Ufan, 대화(Dialogue), 2011 

 



그의 작품들이 좋아서일까, 이 시집은 그의 회화, 조각, 설치 작품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작고 단단한 설명서처럼 읽혀진다. 내가 알기로, 예술가들 중에서 이우환만큼 명징(明澄)한 글을 쓰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이는 문화예술계 전반으로 옮겨도 다르지 않다. 그는 일본 모노하의 대표적인 작가이자 이론가이며, 현대 철학과 현대 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탁월한 실천력으로 현대 일본 미술의 한 장면을 연출했다. 일본 국어 교과서엔 이미 그의 글이 실려있고, 일본어라는 걸 제외하면, 그는 검증 받은 글쟁이이다. 



이우환 Lee Ufan, 대화 Dialogue (2008) 

(사진 출처: artobserved.com)



젊은 시절 일본으로 건너간 이우환은 일본과 유럽에 먼저 알려졌고 그런 다음 한국에서 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가끔 한국이 대단한 나라인양 떠드는 사람을 보면, 부끄러움을 느끼는데, 이러한 태도 밑에 숨은 자신의 부족함이나 태만, 불성실을 감추려는 불순함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심지어 잘못된 관행, 정치적 낙후성 등마저도 옹호하려고 한다. 


해외에서 유명해져 국내로 들어오는 경우, 한국 내의 텃세는 만만치 않다. 이는 문화예술계는 더 심해서, 그들의 부족함을 상대의 몰이해, 또는 지역의 차이로 환원시킨다. 그래서 한국에서 이우환에 대한 관심은 국내 미술 시장의 급격한 팽창과 함께 한다(이우환 스스로도 그 곤혹스러움을 토로한 바 있다). 그 전까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본계 한국 작가였을 뿐이다. 아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앞으로도 그렇게 느낄 것이다. 그들에게 이우환이 구겐하임과 베르사이유 궁에서 전시한 것은 이미 전세계적으로 인정받았음을 이야기해도 그들의 닫힌 귀와 닫힌 마음은 절대 열리지 않을 것이다.


이우환의 많은 책들이 번역되어 나왔지만, 식자들에 의해 거론되는 경우을 보지 못했다. 가끔 월간 현대문학에 실렸던 책 소개를 제외하곤. 이와 비슷하게, 무수한 번역된 소설들이 나오지만, 정작 한국의 비평가들이 번역 소설들을 평론하는 경우를 자주 보지 못했다. 문체나 문장을 떠나 어떤 세계관과 태도, 인물과 사건의 구성, 언어 등을 다룰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집을 짧지만, 울림이 크다. 또한 이우환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들에겐 그의 작품 세계를 이루는 언어로 안내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예전에도 옮긴 바 있지만, 가령 이런 시 말이다. 





진폭 



자코메티가 모델에게 육박해가면, 동시에 모델 또한 자코메티에게 닥쳐온다. 자코메티는 자꾸자꾸 내쳐가 이윽고 모델 너머까지 나아간다. 그때 모델 또한 점점 돌진해서, 자코메티를 지나 훨씬 이쪽으로까지 전진해버린다. 도전해가는 힘과 덤벼오는 힘이 세차게 겹쳐지는 가운데, 두 개의 대상은 깎여나가, 마침내 하나의 뼈가 되어 남겨진다. 이렇게 해서 생긴 대립의 축은, 자코메티를 넘고 모델을 넘어서 -. 그것은 끊임없이 커다란 진폭을 불러일으키고, 스스로를 공간의 펼쳐짐 속에 숨겨 지운다. 자코메티는 이것을 거리의 절대성이라 일컫었다. 이러한 시선에 따른다면, 본다는 것은 대상과 자신의 치열한 사랑의 운동이 겹치어, 드디어 투명한 여백이 된다는 것인가. 




이우환 Lee Ufan, 대화 Dialogue (2013)

(사진 출처: artobserved.com)



다행히 현대문학에서는 꾸준히 이우환의 책들을 찍어 내고 있다. 이우환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면 좋으리라. 하지만 아직까지도 내가 십 수년 전 삼성미술관에서 열린 이우환 전을 잊지 못하듯, 그의 진수는 작품들일 것이다.  그리고 베르사이유에서의 이번 전시는 아, 내 처지를 후회하게 만들었다. 정말 느끼고 싶은 전시였는데. 기하학적으로 올려진 정원을 걸어가다가 무심코 마주하는 '조응'이라 ... 


 



멈춰서서

이우환저 | 성혜경역 | 현대문학 | 2004.11.19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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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세 미술관 전 - 인상주의, 그 빛을 넘어

국립중앙박물관, 2014.5.3 - 8. 31 





몇 해 전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가서 놀라웠던 건, 1층에 놓인 거대한 작품들 - 제롬이나 부게로 같은 화가들이 그린 - 을 보면서 참 식상하다는 느낌과는 대조적으로 4층(?)의 낮은 천장 아래 놓인 작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 앞에서 전율같은 감동을 느껴졌을 때였다. 어쩌면 예상되었을 법한 일일 지도 모르겠지만, 솔직히 예상했던 범위 이상이었고 그 놀라움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오르세미술관에서의 그 경험에 비한다면, 이번 국립중앙박물관 전시는 다소 어수선하고 산만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급하게 보고 나올 수 밖에 없었던 탓도 있었지만, ... 집중하긴 어려웠다. 그리고 오늘 도록을 꼼꼼히 읽으면서 몇 점의 작품은 본 기억이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했다. 


나의 경우, 이미 국내에 번역된 대부분의 인상주의 연구서들을 읽었고 인상주의와 관련해선 아예 한 학기 수업까지 들었던 터라 왠만한 전문가 이상으로 알고 있다고 여겨지지만, 인상주의 미술에 대한 연구는 현재 진행형이니, 이젠 가물가물해지는10년 전 버전의 지식으로 인상주의를 안다고 하기 조심스럽기만 하다. 솔직히 이런 생각을 할 때면, 내가 공부하는 직업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그 직업을 가졌을 때의 내 모습(괴팍스러워 보이는)도 상상되어, 약간의 다행스러움도 있다.



1. 인상주의, 현대 미술 (시장)의 개화  


사실 제일 처음 인상주의 전시회가 열렸던 1874년의 상황은 간단했다. 제도권 기관인 살롱전의 부당함에 대해 반발하기만 하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 인상주의 전시회가 열린 1886년의 상황은 달랐다. 미술 시장에 대한 화가들 스스로의 독립성을 정립해야 했기 때문이다. 

- 전시 도록, 13쪽  



관심 있는 이들에게는 인상주의의 미술사적 의의는 너무 익숙한 내용일 것이다. 가령 아래와 같은 것들.  


- 반-원근법적 세계관의 시작

- 문학적 세계관에서 회화 그 자체에의 집중(물질성의 강조)  

- 기하학적 세계에서 벗어남. 혹은 새로운 기하학의 시작. 

- 탈중심화, 탈가치화 


그런데 막상 적고 보니, 어려울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건 서양 미술사 교수님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고. 실은 위 짧은 인용문과 관련해서 (내가 아는 바를) 언급하자면, 인상주의 이전의 미술 시장과 이후의 미술 시장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시장 규모가 비약적으로 확대되었다. 공공연하게 인상주의 미술이 현대 미술 시장의 개화를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말할 정도이고, 그 주요한 역할을 한 것은 바로 미국에서의 인상주의 열풍이었다. 지독한 무시와 냉대, 가난 속에서 인상주의가 시작된 것과 반대로, 인상주의 화가들 대부분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말년을 보내게 된다. 고독한 몇 명의 천재들을 제외한다면. 


19세기는 그 전까지 일종의 미술가 생계 수단 프로그램이었던 패트런이 사라진 시대였다(귀족 계급이 힘을 쓰지 못했던 네덜란드에서는 이미 18세기에 시작된). 부르조아지의 등장과 전통적인 성직자와 귀족 계급의 후퇴가 직접적인 영향이었으며, 이 때부터 미술가들은 자신의 재능을 시장에 내놓아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게 되었고, 인상주의자들의 시작은 이런 상황 속에서 새로운 미술을 들고 나온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기존 미술 권력과 싸우면서 동시에 미술 시장에서 인정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있었던 셈이다.   


이런 측면에서 1886년 전시는 미술계 뿐만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인지도가 올라간 인상주의 화가들의 (미술 시장에서의) 자리 잡기가 중요해졌다. 뭐, 이 때에도 위대한 세잔은 무시당하고 있었지만. 


"지난 15년 간 언론과 대중으로부터 가장 많이 공격을 받고 가장 대우를 못 받은 화가는 바로 세잔이다. 사람들은 그의 이름에 모욕적인 수식어란 수식어는 모두 갖다 붙였다. 그리고 아직도 그의 작품에 대고 폭소를 터뜨린다."

- 조르주 리비에르, 1977년. 


하지만 인상주의 화가들은 세잔의 탁월함을 알고 있었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궤적을 찾아가는 흥미로운 동선을 보여준다. 그래서 전시의 목차는 아래와 같다. 


1. 인상주의, 그 이후

2. 새로운 시각, 신인상주의

3. 원시적 삶을 찾아서, 고갱과 퐁타방파

4. 반 고흐와 세잔, 고독한 천재들

5. 파리, 아름다운 시절

6. 세기말의 꿈, 상징주의와 나비파. 


많은 수의 작품이 전시되진 않았지만, 천천히 깊이 살펴본다면 이번 전시 관람을 통해 많은 것들을 얻어갈 수 있다.(하지만 이것이 꽤 어려운 일임을 안다) 



2. 내 마음에 들었던 주요 작품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1840-1926)

야외에서 그린 인물 : 오른쪽으로 몸을 돌린 양산을 쓴 여인 

Essai de figure en plein air: Femme 'a l'ombrelle tourne'e vers la droite 

oil on canvas, 131*88cm, 1886 



이 작품은 왼쪽 버전과 오른쪽 버전이 있고, 이번 전시에선 오른쪽 버전이 전시되었다. 


이 두 작품의 모델은 모네의 두 번째 부인인 알리스의 딸 수잔 오셰데이다. 그는 친 자녀와 의붓 자녀 모두에게 자상하고 다정한 아버지였다.(......) 수잔이 서른 살의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나자 그는 깊은 슬픔에 잠기기도 했다. 

- 전시도록, 41쪽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와르 Pierre Auguste Renoir (1841-1919)

앉아 있는 젊은 여인 Jeune fille assise 

oil on canvas, 65.4 * 55.5 cm, 1909 




풍만한 몸매에 널찍한 얼굴, 관능적인 도톰한 입술, 상큼하고 혈색 좋은 얼굴빛, 그리고 까만 머리칼의 엘렌 벨롱은 그 미모가 르누와르 자신의 이상적 여인상에 부합했기 때문에, 르누와르로서는 이런 엘렌의 모습에 매료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쥘의 약혹녀를 모델로 세우기까지는 수개월 간의 설득 기간이 필요했다. 더욱이 르누와르는 그에게 옷을 입힌 상태에서 모델을 그리겠다는 약속도 해야 했다." 

- 62쪽 



작품 이미지를 찾기 위해 구글링을 해보니, 똑같은 제목의 아래 작품도 있다. 제작년도를 보니, 19년 차이가 난다. 나머지는 보는 이들이 알아서 해석하길. 



Renoir 

Jeune Femme Assise 앉아있는 젊은 여인

oil on canvas, 91 * 72cm, 1890.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1853-1890) 

시인 외젠 보흐 Eug'ene Boch(Le po'ete) 

oil on canvas, 60.3*45.4cm, 1888



반짝이는 별이 빛나는 호화로운 청색 배경은 그의 이상향을 떠올려준다. 예술가들 사이에 영원하고 보편적인 애착 관계가 자리잡길 바란 것이다. 별의 무한성을 통해 예술과 예술가들을 한데 엮으면서 예술적 창작력의 무한한 삶을 구현하려던 그의 생각은 친한 동료 화가의 이 초상화 속에서 표현되고 있다. 외젠 보흐의 이 초상화는 외젠 보흐 보인이 루브르 박물관에 유증했다. 

- 115쪽 


 


폴 시냐크 Paul Signac (1863 - 1935)

안개 낀 에르블레, 작품번호 208 Herblay, Brouilladr, Opus 208 

oil on canvas, 33.2 * 55 cm, 1889 


이유가 뭔지 모르겠지만, 폴 시냐크의 그림이 다른 후기 인상주의 어느 화가들보다 더 끌린다. 이건 천천히 고민해보기로 하자. 


대기는 평온하며, 색조는 서서히 옅어진다. 정밀하고 규칙적인 붓 터치는 흰색 위주의 창백한 빛을 분산시키고, 노란 빛과 푸른 빛은 가까스로 느껴지는 정도다. 집요할 정도로 대칭적인 구도는 정적인 느낌을 더욱 강화하고, 지평선을 중심으로 화면이 정확히 둘로 나뉘는데, 수면에 반사된 풍경만이 물의 흐름으로 아주 약간 흔들리고 있을 뿐이다. 

- 전시도록, 72쪽 




에드가 드가 Edgar Degas(1834-1917)

메닐 위베르의 당구대가 있는 방 Salle de billard au Menil-Hubert 

Oil on canvas, 50.7*65.5cm, 1892



"당구대가 있는 실내 풍경을 그려보려고 하네. 내가 원근법에 대해 조금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공간 안에서 각도를 재고 수직과 수평을 열심히 연구하면 원근법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나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네." 

- 드가, 1982년 



이번 전시에선 드가의 조각 작품들도 볼 수 있다. 실은 이것을 보기 위해서라도 이번 전시는 놓치지 말아야 할 듯 싶다. 


3. 전시장 풍경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를 한다고 해서 전시의 상업성을 배제할 순 없었다. 하지만 상업성이라는 단어 대신 대중을 보고 쉽고 편안하게 끌어들이기 위한 전시 환경의 구성이 아쉬었다. 인상주의 미술의 이해를 돕기 위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이나 참여 프로그램의 운영(돈은 안 되고 노력만 들어가겠지만, 이것이 바로 공공미술관의 역할이 아닐까)이라든가, 보다 넓은 전시 공간의 확보, 다양한 미디어의 활용 등은 전시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비파의 몇몇 눈 여겨볼 만한 작품들도 있었는데, 그 작품들은 다음에 소개하기로 하자. 실은 이 글을 적는 것도 나에겐 꽤 벅찬 일이다. 시간적으로... ㅡ_ㅡ;; 전시가 며칠 남지 않았으니, 서둘러 보기로 하자.  아래는 나비파의 한 명이었던 피에르 보나르의 작품이다. 




피에르 보나르, 흰 고양이, 1894. 


위 작품은 이번 전시에서 소개된 작품은 아니지만, 도록에 흥미로운 구절이 있어 인용해본다. 



19세기 후반의 약 30여 년간, 고양이는 예술 작품 속에서 눈에 띄게 나타났으며, 보헤미아인, 극장식 까페 등과 연계하여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를 표방하던 한 세대의 상징적 동물이 된다. 

- 270쪽 



과연 그랬나? 흥미로운 구절이 아닐 수 없다. 애완동물을 좋아하진 않지만, 고양이에 대한 예술가들의 애호는 꽤 유래가 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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