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피티Graffiti에 대한 의견은 다양하다. 우리는 이미 장 미셸 바스키아가 그래피티 아티스트 출신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최근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뱅스키Bansky가 이야기하는 그래피티는 기억해둘만 하다. 지난 달 아트인컬쳐에서는 그래피티, 즉 스트릿 아트에 대한 특집 기사가 있다. 우리의 삶이 시장(Market)과 소비(Consumption)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자유로워지기 위한 시도는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 시도의 아방가르드는 예술가들이다.
“그래피티는 미술의 가장 저급한 형식이 아니다. 한밤에 몸을 숨기며 하는 일이며, 주위 어른에게 거짓말을 하며 행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가능한 가장 정직한 예술형식이다. 거기에는 엘리티즘과 허위의식이 없다. 그것은 한 도시의 최고의 벽에 그려져 전시되지만 누구에게도 입장료를 요구하지 않는다. 벽은 언제나 당신의 작품을 알리는데 최고의 장소였다. 우리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그래피티를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수익을 창출하지 않는 것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의 가치 기준이 오직 돈이라면, 당신의 생각은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그래피티가 사람을 놀라게 하고 그 지역 사회의 타락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래피티는 오직 다음의 3 종류의 사람들에게 위험할 뿐이다. 즉, 정치인들, 광고기획자들, 그리고 그래피티 롸이터들이다. 우리들의 이웃과 주변을 진정으로 훼손하는 사람들은 건물을 가로지르며 덮고 있는 각종의 거대한 구호들을 휘갈겨 쓴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물건들을 사지 않으면 우리의 삶이 불충분하다고 느끼게 만들려 하는 버스 광고들이다. 그들은 모든 가능한 공간과 표면에서부터 당신의 얼굴에 이르기까지 그것들이 자신들의 메시지를 외치길 기대한다. 하지만 결코 당신에게 그것에 대답할 권리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들이 이 싸움을 시작했다. 그렇다. 벽은 그들에게 반격할 수 있는 선택의 무기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세계를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들이 위해 경찰이 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이 세계를 보다 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반달족(그래피티를 하는 사람)’이 된다.”
- Bansky, <<벽과 그림Wall and Piece>>, 서문 중에서(이태호, ‘스트릿 아트, 도시 정글에 피는 꽃들’(Art in Culture, 2008년 7월) 중에서 재인용
Bansky : http://www.banksy.co.uk/
(* 위 이미지들은 Bansky의 웹사이트에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 비상업적인 사용이기에 그대로 가지고 왔으나, 문제가 될 것으로 삭제될 것입니다. 위 사이트에서 Bansky의 보다 많은 작품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현대미술'에 해당되는 글 23건
- 2008/08/16 Bansky, 그리고 스트릿 아트(Street Art)
- 2008/08/14 온 카와라On Kawara, 두아트서울
- 2008/07/15 시간과 존재에 대한 예술 - 온 카와라 & 로만 오팔카
- 2008/06/06 Atta Kim: On-Air, 로댕갤러리 (2)
- 2007/11/26 Contemporary Istanbul 2007 art fair
- 2007/11/19 미술 시장에 대한 메모 1 (2)
- 2007/11/16 “똥과 창자 그리고 자존과 해방” - 안창홍, 정복수 전, 갤러리아트사이드
- 2007/09/27 오치균 - 진달래와 사북의 겨울
- 2007/09/17 황혜선 - 기억의 창, 이화익갤러리
- 2007/09/17 조숙진 전, 아르코미술관
- 2007/06/28 레베카 호른 Rebecca Horn 展
- 2007/06/15 거미 (2)
- 2007/04/30 William Wegman, 'Funney & Strange', 성곡미술관
- 2006/06/11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 에프라임 키숀
- 2005/08/30 명화를 보는 눈, 다카시나 슈지
- 2005/05/22 임원주(Won Ju Lim)
- 2004/05/19 천천히 그림 읽기, 조이한/진중권
- 2004/04/15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마리 앤 스타니스제위스키
- 2003/12/06 피카소 - 성스러운 어릿광대
- 2003/12/06 68년으로의 여행
ON KAWARA JUL.23, 2008 - AUG.24, 2008 doART Seoul
흥미로운 의문이지만, 함부로 물어서는 안 되는 문장이 있다. 특히 반데카르트주의가 횡행하는 현대에서 그 문장은 종종 한 개인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이다.
온 카와라(On Kawara)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시간과 인간 존재에 대해 천착한다는 점에서 로만 오팔카(Roman Opalka)와 비교하였지만, 실은 로만 오팔카보다 더 개념적이고 추상적이다. 로만 오팔카는 회화적 형태에 대한 탐구를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로만 오팔카의 페인팅 작품들은 숫자들의 끝없는 나열들이 극도로 절제된 색채와 형태로, 현대 미니멀리즘 회화의 연장선상에 위치해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온 카와라는 이러한 회화적 전통과는 무관하거나 대립적 관계를 형성한다. 이 점에서 온 카와라는 현대 개념미술에 있어서 특별한 작가로 인정받는다. 그는 자신의 흔적을 지우면서 자신이 있었음을 증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자신의 범위를 넘어, 과거에 존재했던 사람들에 대해서, 앞으로 존재할 사람들에 대해서까지 그 존재들의 증명 방식에 대해 탐구한다. 하지만 시간 앞에 유한한 우리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시간과 싸울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온 카와라에게 있어서 그 싸움의 방식은 우리가 있었던 한 순간의 시간을 그대로 옮겨놓는 방식이 된다.
사간동 두아트서울(doART Seoul)에서 열리고 있는 이번 전시는 한국에 온 카와라가 처음 소개되는 전시이면서 난해하기로 유명한 현대 개념미술이 어떤 것이며, 그 난해함 너머로 우리 현대인들의 존재 본질을 탐구하는 현대 예술의 한 극점과 만날 수 있다.
아래의 글은 두아트서울의 전시 안내문에서 인용한 것으로, 현재 두아트서울에서 전시되는 작품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다.
1968년 6월 1일부터 1979년 9월 17일까지 작가가 이동한 경로를 지도 위에 상세히 기록한 작품. 1년이 한 권의 책을 이루어, 총 12권으로 구성된다.
I MET
1968년 5월 10일부터 1979년 9월 17일까지 작가가 만나 대화를 나눈 사람들의 이름을 매일 매일 기록한 작품. 1년이 한 권의 책을 이루어, 총 12권으로 구성된다.
I GOT UP
1968년 5월 10일부터 1979년 9월 17일까지 작가가 매일 아침 일어난 시각을 기입한 엽서를 두 명의 지인에게 보낸 엽서를 모은 작품. 1년이 한 권의 책을 이루어, 총 12권으로 구성된다.
I GOT UP은 엽서에 본인의 메시지를 직접 쓰지 않고 고인으로 찍어 보내는 데 의의가 있는데, 이는 최대한 개인적인 궤적을 남기지 않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로 보여진다. 이것은 작가가 다른 작품들의 모든 글을 타이핑으로 입력하며, 또한 일본을 떠난 이후, 세계 공통어라 일컬어지는 ‘에스페란토’어를 사용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ONE MILLION YEARS
1969년에 제작되어 이전 백만년(998031 BC)을 타이핑한 작품과 1993년 이후 백만년(1001980 AD)의 날을 타이핑한 작품. 1969년에 제작된 백만년의 과거편은 “그동안 살다가 죽은 사람들 모두를 위하여”라는 헌사로 시작되며, 1981년 제작된 백만년의 미래편은 “마지막 생존자를 위하여”라는 헌사로 시작된다. 그러나 두 작품 사이에 설정된 12년이 무엇을 뜻하거나 지시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PURE CONSCIOUSNESS
1998년 이후 계속 진행되어오는 프로젝트로, 1997년 1월 1일부터 7일까지 7개의 날짜그림을 세계 각지의 유치원에 설치한 후 어린이들의 일상을 작품과 함께 촬영하는 조그마한 책자로 만들어낸다. 현재까지 총 17개 프로젝트가 진행되었으며 그 도시들은 Sydney, Reykjavik, Abidjan, Shanghai, Leticia, Sisli-Istanbul, Avignon, Lund, Madagascar, Bad Blankenburg, London, Thimphu, Bequia, Toronto, Yusuhara Cho, Inari, New York이다.
8월 24일까지 하는 이번 전시를 놓치지 말기를 바라며, 온 카와라의 한국 전시를 진행한 관계자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저작권 공지]
- 중간에 인용된 글의 저작권은 '두아트서울'에서 가지고 있습니다.
- 맨 위의 이미지는 두아트서울 홈페이지에서 가지고 왔으며, 저작권은 '두아트서울'에서 가지고 있습니다. 아래 두 이미지는 두아트서울에서 발간한 ‘온 카와라 한국 전시 도록’을 제가 직접 찍어 올린 것입니다.
- 온 카와라 전시 작품은 두아트서울 홈페이지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doartseoul.com/en/exhibitions/introduction.asp?ExhibitionsPK=10
살아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내 심장이 뛰고 내 혈관에 따뜻한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일까, 아니면 이성을 만나 열정적인 키스를 나누고 있을 때,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걸까? 그렇다면 살아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의 인생 전체는 일종의 가상이거나 허위일 지도 모른다. 우리의 인생, 그리고 그 인생을 둘러싼 모든 사건들이 시뮬라크르일 지도, 나란 존재하지 않고 나란 누군가의 눈에 비친, 누군가의 생각과 언어에 의해 형성된 어떤 픽션일 지도 모른다. 더 절망적인 사실은 내 것이 아닌 인생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늘 내가 생각했던 것은 어긋나고 내가 한 말은 오해되고 내 글은 무시되고, 내 사랑이 번번히 막다른 골목의 시궁창에 빠지게 될 지라도, 나는 내 인생을, 내 존재를 어떻게 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내가 자살하더라도 나라는 가상의 존재는 세상 어딘가에 남아있다는 것이다. 르 클레지오의 소설의 한 문장 처럼, 내가 죽고 내가 알던 모든 사람들이 죽었을 때야 비로소 무로 될 수 있는 것이다.
도대체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이 가상이든, 허위이든, 살아있는 자는 그 살아있음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 로만 오팔카의 작업이 날 감동시키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그의 행위는 단순하고 명확하다. '나는 살아있다. 나는 여기에 있었고, 여기에서 숫자를 적고 있었다.' 시간에 대한 탐구는 곧바로 자기 존재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로만 오팔카는 숫자를 캔버스에 적는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국내의 몇몇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얼마 전에는 사간동 학고재에서 전시되기도 한 세계적인 작가이다. '숫자를 적는 행위' 자체로 주목을 받았지만, 실은 단조로운 색채와 병렬적으로 이어져 있는 숫자들의 나열이 가지는 조형적 아름다움도 무시하지 못한다.
이런 작품과 더불어 그는 자신의 사진을 찍는다. 일련의 사진들은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면서 살아있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증언한다.
시간에 대한 탐구는 현대 미술의 강박증과도 같아 보인다. 하지만 거대해진 세계 앞에서 한 개인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혹시 지하철 속에서 이 무수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지? '개인주의'가 유행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익명성 속에 자신의 몸을 숨긴 개인일 뿐이다.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결국 우리는 실패할 것이고 그렇게 죽을 것이다. 현대의 비관주의는 자신의 개별적이고 독창적인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즉물적인 방식을 택하도록 강요한다. 그래서 그 속에는 자신의 감정이나 주장, 일상이 드러나지 않고 객관적인 소재를 택해 '그저 (살아)있었음'을 표현하도록 할 뿐이다.
이 점에 온 카와라는 로만 오팔카와 비슷한 지점에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의 방식은 더 극단적이고 파괴적이다. 그는 날짜를 적는다. 하나의 캔버스에 0시부터 24시까지, 꼬박 하루동안 하나의 날짜 작품을 완성시킨다. 완성시키지 못할 때는 이를 파기한다. 그리고 그 날의 신문을 아래에 배치한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매일 엽서를 보낸다는 것이다. 엽서의 내용은 언제나 정해져 있다. 'I GOT UP AT 11.10 A.M'
로만 오팔카가 자신의 (시간 위의) 삶을 캔버스와 사진 속으로 넣는다면, 그래서 그 순간만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증명한다면, 온 카와라는 일정 시간 동안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통보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에서 한 인물이 이야기하듯, "천만에! 모두 꾸며낸거야. ... ... 그는 존재하지 않아. 그가 하는 행동도 말도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아. ... ..."라고 하여도 무방할 정도이다.
극도로 제한된 작업 스타일은 '위태위태한 현대인들의 존재 상실의 위기감'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일 지도 모른다. 실은 우리들은 이미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다. 자신의 개성이나 독창성 따위는 날조된 것에 가깝다. 어쩌면 라크스의 말대로 우리의 생각이나 행동 패턴은 우리의 물적 토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실제 우리와는 무관한 어떤 생각과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그렇다면 과연 나란 무엇이고 살아있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혹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맞부딪혀야 할 상대는 시간(Time)이다.
One Million Years
On Kawara, 1999
2 volumes, each 2.012 pgs., leatherbound
(EDITION/SET: 500 num & 60 num. & sign.)
h: 14.5 x w: 10.5 cm / h: 5.7 x w: 4.1 in
http://www.artnet.com/artwork/424415142/424301160/one-million-years.html
Atta Kim: On-Air
로댕갤러리
사진이 무엇일까. 그렇다면 사진에 대한 글은 무엇일까. (이 질문은 내가 예술에 대한 글을 쓰지 않는 순간까지 나를 괴롭힐 것이다.)
어느 화창한 봄날, 미래에 대한 불안과 예술에 대한 사랑, 또는 호기심을 데리고 찾아간 로댕갤러리 안에서 나는 (현대)사진이 표현할 수 있는 바의 어느 극점을 발견하였다. 김아타의 이전 작업들, 뮤지엄 프로젝트나 해체 시리즈, 그 외 인물 사진 시리즈를 보았지만 내 시선을 끌지 못했다. 분명 그 때도 그의 작업들은 비평적 지지를 얻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사진 속에서 그의 카메라가 가진 즉물적이며 파괴적인 속성이 싫었다. 나는 좀더 우아한 방식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사진들은 피사체를 즉물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아픈 사진들이었고 필름에 옮겨진 피사체나 그 피사체를 바라보는 관객을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 오직 사진만 존재했고 사진 속의 세계가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사진 속의 사람들은 박제된 동물처럼, 혹은 어떤 인위적 목적에 의해 조장되어진 사물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카메라가 가지는 폭력적 속성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로댕갤러리에서 본 그의 최근 작업들은 놀라웠다. 지금까지도 나는 그의 이전 작업들과 온-에어 시리즈와의 연관관계를 선명하게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이전의 작품들에 대한 내 반감과 온-에어 시리즈에 대한 감탄은 선명한 금을 그으며 내 안에서 서로 대비되었다.
그리고 로댕갤러리의 전시는 끝났고 이 글은 어떻게든 정리해야만 하는 내 습성에 의해 씌어지는 것이지, 김아타 사진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이나 예리한 비평적 접근은 아니다. 도리어 찬사에 가깝다. 정말 온에어 시리즈는 대단했다. 시간과 운동에 대한 본질적인 접근이나 조망이 카메라라는 매체를 통해 아주 탁월하고 아름답게 표현될 수 있다는 사실에 찬탄을 금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 철학이 운동을 부정하고 정지만을 추구했던 것은 운동은 시간의 축에 따라 이루어지며, 그것은 끝내는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어떤 종말, 어떤 불안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점에서 우리의 삶도 그렇다. 플라톤이 영원한 세계를 이야기하였을 때, 그것은 우리 삶에 뿌리 깊이 박혀있는 어떤 불안을 없애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 불안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추동시키는 원동력이었다. (그리스 예술과 철학이 우울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김아타의 온-에어 속에서 시간과 운동은 매력적인 소재이면서 우리의 삶,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의 본질적 구성에 대한 어떤 통찰을 전해주는 듯하다. 그것은 바로 시간과 운동을 넘어서 있는 어떤 공간에 대한 것이다. 그것인 일종의 멸망이고 어떤 폐허이며, 보는 이들에게 무한한 노스탤지어를 자아낸다.
회화가 추구하는 평면성이 시간을 무시하고 공간성만을 추구하는 어떤 것이라면, 김아타의 카메라는 시간을 받아들이면서도 변하지 않는 어떤 공간성을 추구하고 그것일 발견해낸다는 점에서 놀랍기만 할 뿐이었다. 올해 상반기 보았던 여러 전시들 중에서 최고의 전시였다.
오늘 오후 2시에 출국한다. 인천공항에서 출발해,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가 다시 이스탄불로 가는 여정이다. 이스탄불 공항 세관에 낼 서류들을 준비하고, 짐을 꾸렸다. 우습게도 해외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다. 일 때문에 해외에 처음 나가면, 계속 일 때문에 나가게 되는 징크스가 있다고 한다. 하긴 내년에도 계속 일 때문에 나가게 될 예정이니.
이번 일을 준비하면서 영어가 조금 늘긴 했으나, 아직 간단한 생활 영어 수준이다. 가서 어떻게 설명은 할 것같은데, 행정적인 절차가 다소 걱정이긴 하다. 영문 보도 자료도 만들어야 하는데, 미처 챙기질 못했다. 의외로 할 일이 많아, 시간에 쫓겼다. 그 사이, 돈을 벌기 위해 원고 집필 때문에 더 바빴다. 또 감정적인 혼란 상태에도 여러 번 빠져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이스탄불에 가서도 원고 집필이 예정되어 있다. 납기일에 쫓기다 보니. ㅡ_ㅡ;)
Art Fair 참가는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고, 참가할 수준의 작가가 있고, 참가 비용만 있으면 된다. 다행히 나만 Art Fair 참가 경험이 없지만, 준비하는 데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내년에는 아마 나 혼자 준비해야할 것 같은데 말이다. Contemporary Istanbul 아트페어의 분위기에 대해선 도착해서 올리도록 하겠다. 다행히 인터넷이 되는 호텔로 예약을 했다.
(그런데 Google Map에서 확인해보니, 행사 장소와 너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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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2회째를 맞는 Contemporary Istanbul Art Fair는 이슬람 경제/문화권의 국제도시이며, 비잔틴 문화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며 동양과 서양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는 Istanbul에서 열리는 신생 아트페어이다. 최근 Art Fair는 기존 4대 아트페어의 위상과 경쟁력이 다소 약화되면서, 각 지역별 Art Fair가 강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이에 Contemporary Istanbul은 2회임에도 불구하고 전세계 7~80여개의 Gallery가 참여하고 있으며, 유럽, 북미, 아시아 등 지역의 편중없이 참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Art Fair이다.
미술 시장은 크게 1차 시장 Gallery, 2차 시장 Art Fair, 3차 시장 Auction으로 나누어진다. 이 중 Art Fair는 B2C의 측면과 B2B의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또한 미술의 최신 트렌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Art Fair보다는 비엔날레를 중요하게 취급되었으나, 최근에는 Art Fair 주최측의 다양한 부대 행사와 프로그램 등으로 인해 미술의 최신 트렌드를 파악하기에 손색없다고 할 수 있다.
Contemporary Istanbul Art Fair는 터키 Istanbul Convention and Exhibition Center에서 열리며 행사는 11월 28일부터 12월 2일까지이다.
한국에서 참여하는 갤러리로는 한불문화교류협회 '내-안에'의 A&B Gallery, Misool Sidae AKA Seoul Gallery 등이다. A&B Gallery는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불문화교류협회 '내-안에'(Nez-A-Nez)의 전속 갤러리로서 최근까지도 서교동에 전시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내-안에'의 사정으로 인해 잠시 휴관을 하고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A&B Gallery는 매년 독일 칼스루헤 아트페어, 독일 퀼른 아트페어에 참가하고 있으며, 프랑스와 독일의 여러 갤러리에서 다양한 전시를 기획, 진행하고 있다. 이번 Contemporary Istanbul Art Fair에서 참가하는 작가로는 강창열, 장동문, 오태환, 김석중, 박해수, 박문관, 손광배, 권무형 등이다. 이 중 강창열, 장동문, 오태환, 김석중, 박해수는 한국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박문관, 손광배, 권무형은 프랑스와 독일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특히 권무형은 최근 유럽에서 높은 평가와 주목을 받고 있다.
월간미술 10월호를 읽다가 메모해 둔 것을 포스팅한다.
- 권기찬(오페라갤러리코리아 대표), 월간미술 2007년 10월호
- 한국시각문화정책연구원 미술시장팀, 월간미술 2007년 10월호
월간미술 10월에 따르면, 권기찬 대표는 오랫동안 미술 작품 수집을 해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오페라갤러리코리아의 대표가 되었다. 재력이 있으면서, 미술 작품에 대한 안목을 키워온 예라고 할 수 있다. 아라리오갤러리 김창일 대표의 사례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재력도 없으면서 미술에 매료된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반대로 재력만 있는 사람들은?
전 세계 미술시장이 활황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미술시장의 활황세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한국미술시장은 안타깝게도 ‘폐쇄시장’에 가깝다. 한국미술시장에서 수천 만 원에 거래되는 작품을 해외 미술시장에 가지고 나가 그 가격에 팔 수 있을까. 당연, 한국미술시장에서 다시 팔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과연 그 가격을 받을 수 있을까.
미술작품의 투자가치는 단기적 관점이 아닌 장기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주식 투자를 할 때, 기업 가치를 따져보듯이 미술작품에 투자할 때도 미술작품을 제작한 작가를 살펴보고, 동시에 미술작품의 (미학적, 미술사적, 대중적) 가치를 따져봐야 한다. 전체 주식 시장의 투자수익도 장기적으로 그 가치가 상승한다. 미술작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사이 많은 기업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듯이, 작가도, 미술 작품도 인정받기도 하다가 시들해지고, 무명에 가까웠던 어떤 작가가 재평가되기도 한다. 박수근이 무명이었던 시절, 잘 나가던 한국의 서양화가가 누구인지 잘 모르듯이 지금 수천 만 원 하는 작품이 10년 후에 어떻게 될 지 아무도 모른다. 그 점에서 권기찬 대표의 말은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먼저 투자 목적이 아니라 감상과 향유를 우선순위에 둬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감상과 향유의 수준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아래 한국시각문화정책연구원 미술시장팀의 글은 전체적으로 옳은 글이나, 마지막 부분은 ‘그래서 어떻게?’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게 만든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미술관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도대체 누구를 신뢰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해줘야 할까.
무조건 미술관, 갤러리를 자주 다니면서 미술 작품을 봐야 한다. 그래야 보는 눈이 생긴다. 미술교양서적을 읽는다고 현대 미술에 대한 눈이 생기지 않는다. 도리어 현대미술을 이해하는 데 있어 현대 소설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즉 현대 예술에 대한 경험을 늘려야 한다. 현대 음악도 듣고, 소설도 읽고, 무엇보다도 미술관과 대형 갤러리는 자주 방문해 작품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는 동안, 자연스럽게 자신의 안목이 생기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수백만원을 주고 작품을 구입해서 작품 가격이 아무리 떨어진다고 한 들, 후회하지 않게 된다. 왜냐면 먼저 자신이 감상하기 위해서 구입했기 때문에 작품 가격에 연연해하지 않게 되며, 두 번째 이렇게 구입한 작품 대부분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는 반드시 오른다는 점이다.
“똥과 창자 그리고 자존과 해방”
Gallery ARTSIDE
우리는 하루 24시간 동안 몇 마디의 욕을 할까. 욕을 하지 않는다면 욕을 하고 싶은 상황엔 몇 번 처하게 될까. 그리고 이를 내 인생 전반으로 확장시킨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의 삶이란, 실은 고귀하고 대단한 것이 아니라 애초 시작부터 수십억 마리의 정자들 속의 우연한 한 마리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어떤 필연성이나 목적성 없이 그저 죽음을 향해 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허무주의는 이미 우리 현대인에겐 익숙한 삶의 양식이자, 정신적 태도이다. 하지만 누가 감히 그런 양식과 태도를 드러낼 수 있을까. 그러나 현대 예술에 있어서 이 허무주의의 유/무는 매우 중요하다. 대부분의 현대 예술이 이 허무주의와 직간접 영향 관계 속에 있다. 그리고 이 허무주의와의 싸움이 현대 예술가들의 몸짓이며, 말이며, 작품들이다.
이런 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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