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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책들의 우주/문학 +237


내가 수줍게 사랑하고 좋아했던 배우이자, 극작가이며, 소설가였던 샘 쉐퍼드Sam Shepard가 73세의 나이로, 수다스러우면서도 지독히 쓸쓸했던 이 세상과 헤어졌다. 

나는 그가 부러웠다. 그의 재능이며, 그의 언어가, 그의 표정이.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정말 좋아하고 사랑하며 혼자 숨겨두었던 존재들이 나에겐 알려주지 않고 마음대로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으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모나드에서 모나드로 연결고리는 없겠지만, 모나드 바깥에선 단절된 모나드들을 볼 수 있으리라 한 때 생각했지만, 태어남-죽음은 하나의, 일체의 모나드임을. 

우리 각자는 그 속에 웅크리고 앉아 정해진 궤도를 돌아다가 사라진다. 하지만 그 궤도가 얼마나 우아해질 수 있는지, 한 번 보여주자. 샘 쉐퍼드를 떠올리면서, 천천히 그의 부고 기사를 읽으며. (아. 젊었던 그가 나왔던 테렌스 멜릭의 <<천국의 나날들Days of Heaven>>은!! 혹은 줄리 델피와 함께 나왔던 <<Voyage>>는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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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

도널드 바셀미(지음), 김상률(옮김), 책세상 



이 번역 소설을 다시 영어로 옮긴다면 어떻게 될까? 어느 정도까지는 비슷할까, 아니면 전혀 다른 소설이 될까? 바셀미의 고도로 양식화되어 있는 미니멀리즘 소설을 한글로 옮기는 작업은 쉽지 않을 테지만, 너무 성의 없이 옮겼다는 건 바셀미의 소설을 기다려온 나에겐 상당히 불쾌하게 여겨졌다. 실제 원작에서는 문장은 짧고 단순하며 표현은 매우 절제되어 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이 번역본에서는 늘어지며 중언부언하면서 양식 자체가 무너져 버렸다. 그러니 이 번역서를 읽고 바셀미를 읽었다고 하지 말기를. 


도널드 바셀미는 20세기 후반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가 중의 한 명으로,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미니멀리즘 소설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이제서야 소개된다는 것이 뒤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리처드 브라우티건을 읽는 독자가 거의 없듯, 도널드 바셀미도 한국에선 그와 비슷해 보인다. 언어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이 번역본은 너무 형편없어서 반드시 영어로 읽어보길 권할 뿐이다. 


찾아보니, 아예 원문과 대조하여 번역서의 표현과 비교하여 새로 번역한 블로그가 있어 링크를 달아둔다. 거의 모든 페이지에서 최선의 번역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http://blog.aladin.co.kr/710357193/8795032 

http://blog.aladin.co.kr/710357193/8797048 

(위 블로그에 가면 <<백설공주>>의 번역에 대해선 여러 개의 글을 확인할 수 있다)


아래 평점은 한글 번역본을 읽고 바셀미가 어떠니 평가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은 것이다. 바셀미의 <<백설공주>>가 형편없음이 아니라. 



백설공주 - 4점
도널드 바셀미 지음, 김상률 옮김/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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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 Acide sulfurique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문학세계사 (2006년 초판 1쇄) 



작년 이맘때쯤 프랑스에서 아멜리 노통브(Amelie Nothomb)의 신작 <<황산>>이 발표되었을 때, 프랑스 비평계는 뜨거운 논란에 휩싸였다. 한쪽에선 "스캔들!", "졸작!"을 외치며 "매년 신작을 내놓지 않아도 되니 힘겨우면 좀 쉬라"고 비아냥거리는 동안, 다른 쪽에서는 "비판을 위한 비판은 그만!" "프랑스에서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 많은 책을 팔면 으레 미움을 사게 되어있다.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반박했다.

논쟁이 격렬해지자 서평 전문잡지 <<리르>>는 비판과 옹호의 글을 나란히 게재하기도 했다. 그 사이, 책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 205쪽, 옮긴이의 말 중에서


사놓고 읽지 않다가, 오늘 우연히 들고 읽었다. 두 시간 정도 들고 읽었으니, 매우 짧은 소설이고 쉽게 읽힌다. 2006년에 번역된 소설이 아직도 팔리고 있으니, 아멜리 노통브의 팬은 한국에도 꽤 많은 셈이다. 


하지만 (그 유명한)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을 이제서야 읽었다는 것 이외에 이 소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건 없다. 소설을 너무 쉽게 썼다는 것. 굳이 사서 읽을 필요 없는 소설이다. "매년 신작을 내놓지 않아도 되니 힘겨우면 좀 쉬라"라는 평가에 절대적으로 공감한다. 감동적이지도 재미있지도 않다. 비상식적이고 우화라고 하기엔 너무 허술하다. 이걸 소설이라고 내놓았다니, 너무 잘 나간다고 막 출판한 느낌이다. 사서 읽지 마시라. 후회한다. 



Ame'lie Nothomb (1966~ ) - 위키를 보면 알겠지만, 실제로 거의 매년 1권 이상의 소설을 내고 있다!! 





황산 - 4점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문학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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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나의 격한 집착은 뜰로 난 창문처럼 죽음을 향해 있네." - 조르주 바타유


바타이유(Georges Bataille, 1897~1962)의 "무신론대전"(La Somme athe'ologique)에 나온 문장으로, 원문은 'Ma rage d'aimer donne sur la mort comme une fenetre sur la cour'이다. 


위 사진은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죽은 자들의 백과전서Enciklopedija Mrtvih>>라는 다닐로 키슈Danilo Kis의 소설 첫 장을 찍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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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아프게 하는 것이 나를 강하게 만든다

알렉상드르 졸리앙(지음), 성귀수(옮김), 책읽는수요일 




"오늘은 어제보다 덜 나빴다. 그런 오늘보다 내일은 좀 더 나을 것이고, 그렇게 계속 나아질 것이다.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하나의 원칙만을 고수할 것이다. 마치 살아서 다른 할 일이 없는 사람처럼, 주님이 나를 세상에 내신 이유가 오직 그것뿐인 것처럼, 그리하여 오로지 그 하나를 이루는 일에 나의 구원이 달려 있는 것처럼, 모든 사소한 일, 작은 기도, 세세한 규칙들을 철저히 수행해나갈 것이다."

"이 원칙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자각하고, 자기가 하는 일에 전략을 다하며, 신이 지켜보는 앞에서 굳건히 매진할 것을 내게 요구한다. 하지만 정작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그런 원칙이 일상의 처음 취하는 동작에서부터 꼼꼼히 적용되어야만 한다."

- 교황 요한 23세, <<영혼의 일기>>, 1962년 12월 23일 (54쪽에서 재인용) 



부끄러웠다. 졸리앙의 글을 읽으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어느 순간 세속에 물들어 적당히 거짓말을 하고 적당히 타협을 하며 사소한 나쁜 행위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잊고 지내던 것이었다. 소년이었던 시절, 나는 내 삶의 지향점이 분명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으며, 사랑은 날 떠났고, 나에게 실패했으며, 모든 것들은 내가 원하던 대로 움직였다고 생각했으나, 그건 내 착오였다. 그 착오의 영향은 꽤 심각해서 아직도 허우적되고 있다. 그 때의 나는 오만했으며, 타인의 충고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터무니없는 낙관주의로 날 나락으로 몰아가고 있었지만, 그것을 알지 못했다. 



졸리앙은 그런 이야기를 하진 않는다. 다만 그의 육체적 고통에 대해서, 자신이 벗어나고 했던 그 불완전성에 대해서 끊임없이 싸워왔음을 이야기할 뿐이다. 인터넷 서점(혹은 책 표지)에서의 저자 소개는 아래와 같다. 



1975년 스위스 시에르에서 트럭운전사 아버지와 가정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탯줄이 목에 감겨 질식사 직전에 기적적으로 태어나 뇌성마비를 갖게 되었고, 3살 때부터 17년간 요양 시설에서 지냈다. 장애로 인해 불편과 고통, 난관에 수없이 부딪히면서 그는 내면에 잠자고 있는 인식에 대한 강렬한 갈증을 느껴 철학에 빠졌다. ... 

- 인터넷서점 작가 소개 




"실재성과 완전성을 나는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 - 스피노자, <<에티카>>, 제2부 정의 6



스피노자의 저 한 마디는 졸리앙의 인생 전체를 위로 끌어올린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 이 표현은 아래의 글귀로 이어진다.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바 그 직관, 즉 우리 모두가 불성을 타고 났다는 위대한 깨달음과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 94쪽 




이 책은 '내려놓음'에 대한 명상과 그 서술로 이루어져 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 졸리앙은 나직한 목소리로 그리스도교와 불교를 오가며 부족한 자신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그러나 저자는 자신의 육체를, 자신의 일상을 통해서 그것을 담담히(아마 처절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적는다. 그런데 그 울림이 작지 않아서, 책을 한 번 잡으면 놓지 못한다. 


나는 알렉상드르 졸리앙에 대해서는 신문 칼럼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역시 이 책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마치 짧은 힐링 여행 같은 책이라고 할까. 마음의 여유를 잃기 쉬운 요즘, 이 한 권의 책이 휴식이 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추천한다.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이 나를 강하게 만든다 - 8점
알렉상드르 졸리앙 지음, 성귀수 옮김/책읽는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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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https://www.concertgebouw.be/en/event/detail/1442/Federico_Garcia_Lorca 




강의 백일몽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지음), 정현종(옮김), 민음사 




이 번역 시집은 시인 정현종이 스페인어에서 영어로 번역된 작품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했다. 하지만 어떤 시들은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옮겨지고, 옮겨진 그 언어에서 다시 또다른 언어로 옮겨지는 사이에도 그 아름다움을 잃어버리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이 시집의 경우에 해댱된다. 채 마흔이 되기 전에 총살당한 이 스페인 시인의 시집을 읽고 있자면, 지중해의 태양 아래에서 첫 사랑을 만난 듯 가슴 떨리고 흥분된다. 


서정적인 강렬함이 지배하는 로르카의 시 세계는 후회없이 앞으로만 달려가는 청춘의 아름다운 무모함과 인생의 낭떠러지 앞에서 서로를 향해 미소 짓는 사랑으로 어우러져 있다. 그리고 스페인의 자연은 그 무모함과 위험한 사랑을 지지하며 같이 노래 부른다. 


시들은 적절한 은유와 상징, 알레고리 또는 직접적인 표현으로 읽는 이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이 시집을 읽는 동안 독자는 스페인 그나라다의, 저 거대한 대지를 감싸고 도는 지중해의 뜨거운 태양 아래, 사랑스럽기만 한 바람의 그늘 속에서 앉아 있게 될 것이다.  



산티아고 시를 위한 마드리갈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

내 달콤한 사랑

공중의 흰 동백

햇빛은 희미하게 비친다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

어두운 밤에

잠든 은빛 풀잎들이

텅 빈 달을 덮는다


거리의 비를 보렴

돌과 수정의 비탄을

사라지는 바람 속에서 본다

네 바다의 재와 그림자를 


네 바다의 재와 그림자

산티아고, 태양에서 먼

옛 아침의 물이

내 가슴에서 떤










강의 백일몽 - 10점
페데리코 가르시아로르카 지음, 정현종 옮김/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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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의 책

한유주(지음), 문학과지성사 




문장은 대체로 짧다. 그렇다고 긴 문장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문장들의 호흡은 한결같이 짧고 반복적이며, 작가 한효주의 숨소리가 문장들에 어김없이 들어가거나 들어갈 것으로 계획되었던 '있다'와 '없다' 사이 어디쯤 자리잡고 앉아있었. 그 숨소리에 귀기울이며 나는 이 소설집을 읽는다. 그리고 읽었다. 계절과 계절 사이를 지나, 작년을 지나 올해 봄까지. 


그 사이 아이는 자라나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고, 자기 주장을 펼쳤고, 어른들의 말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이 들고 늙어가는 우리들은 서로를 배려하며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다. 아이가 상처 입으며 우리 속으로 들어오는 동안, 나는, 늙어가는 우리들은 우리 밖으로 나가 혼자 웅크리고 말을 잃어버린다. 그렇게 아름답게 수다스럽던 청춘이 사라지고, 그 청춘 옆에서 조용히 젊은 영혼을 어루만지던 책도, 언어도 얼어 간다. 그가 내 곁을 떠나고 그녀 주변을 맴돌던 그 화사한 미소도 사라진다. 


변화란, 어쩌면 과거의 상실이고 다시 오지 않을 사랑의 증거다. 아마 작가 한효주는 얼어버린 마음을, 잃어버린 단어, 혹은 어떤 대명사를, 따스함을 찾아 떠난 여행길에서 스스로 움츠리고 가라앉고 조용해지며 팔을 내리고 손을 굳게 쥐고 입을 닫게 되는 자신을 발견한 것일지도 모른다. 


침묵을 견딜 수 없어질 때쯤 해가 완전히 졌다. 실내등이 켜져 있었지만, 매우 어두웠다. - 206쪽  


결국 침묵 바깥으로 나갈 일이 없다. 변화 앞에서 침묵은 그녀의, 나의 유일한 무기였고 그 무기가 잘못되었음을 깨닫는 건, 언제나 황혼 녘이다. 작가의 숨소리에서 주저하며 강요된 억제의 불편함이 느껴지는 건 나 뿐일까. 때론 글쓰기보단 우는 것이, 잔뜻 술에 취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그래서 나이 들고 보니, 글쓰기가 내 일상에서 저 멀리 달아나, 도망가, 내 곁으로 오지 않을 거리로 밀려나있긴 했지만. 


문장이 딱딱해지고 건조해지고 반복되며 있음과 없음에 매달리게 된다. 실험적 글쓰기가 아니라, 침묵 밖으로 나가기 위한 싸움이고 이미 일어난 변화에 저항하기 위한 일종의 전략이다. 얼지 않기 위한 필사적 노력이다. 그렇게 작가는 나이가 들고, 변하고, 나도 이미 죽은 날이 더 가까운 나이가 되었다. 변화, 참 싫다. 그렇게 얼어가는 건 더 싫다. 



얼음의 책 - 8점
한유주 지음/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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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거리를 둔다

소노 아야코(지음), 김욱(옮김), 책읽는고양이(도서출판 리수)




우연히 알게 된 이 책, 소노 아야코의 <<약간의 거리를 둔다>>는 매우 산뜻한 울림을 가졌다. 어느 면에선 냉소적이며, 어느 순간엔 포기하는 듯 보이고, 때론 그냥 되는 대로 내버려두면서 일상을 사는 듯하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낙관적이며 희망을 잃지 않는, 다소 이율배반적인 면까지 보인다. 이런 점에서 그녀의 종교-카톨릭-가 큰 힘이 되는 듯 싶다. 그래서인지 자주 '운명'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 책은 운명론적이지 않다. 도리어 실용적인 처세술에 대한 격언들, 저자 자신의 생각들이 담겨있다. 짧은 에세이들을 통해 그녀는 매우 현실적인 조언을 하며, 지지치 않기를 강력하게 말한다. 책의 서두에서부터 인내와 운명을 이야기하는 것은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최선을 다해 기다리고 노력하면 언젠간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싶은 탓이다. 


인간에겐 운명이 강제로 부과된다. 우리가 바꿀 수 없으므로 운명이다. 또 억지로 바꿔본들 부자연스럽고 아름답지 못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감수하고 그 운명을 토양삼아 인생을 키워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운명을 초월하는 인간의 위대함이다. - 45쪽 


또한 살아가면서 부딪히게 되는 여러 어려움을 묵묵히 견뎌내길 기원한다. '불행한 사람만이 희망을 소유한다'(62쪽)든가 '타인에게 상처주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107쪽)고 말하며 원래 살아간다는 게 그런 것일 뿐이니, 희망을 버리지 버리지 말라고 조언한다. 


타인의 장점을 깨닫는 것이 재능이라면 타인의 좋지 않은 점을 깨닫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본능이다. - 131쪽 


일본에선 매우 저명한 작가인 소노 아야코를 이제서야 알게 된 것은 그동안 내 독서가 다소 편파적이었음을 드러내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 책은 매우 작고 얇고 짧다. 카페에 앉아 한 시간이면 다 읽을 수 있는 분량이다. 하지만 그 울림은 꽤 길다. 또한 유쾌하고 긍정적이다.(또는 내가 소노 아야코를 읽을 수 있음을 그만큼 폭이 넓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닐까) 



(1931년생인 소노 아야코의 2015년 신간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그동안 소노 아야코의 여러 수필집에서 발췌한, 일종의 편집본이다. 여든을 훌쩍 넘긴 그녀가 이 정도의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에 상당히 놀랐는데, 예전 글들을 모은 책이였던 셈이다. 그래서 일본 아마존의 평점은 상당히 낮다. 소노 아야코의 에세이에 대한 평가라기 보다는 소노 아야코의 신간으로 알고 구입한 독자들이 실망하며 낮은 평점을 준 것이다.) 




약간의 거리를 둔다 - 8점
소노 아야코 지음, 김욱 옮김/책읽는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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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hur Golden의 <<Memoirs of a Geisha>>(Vintage)를 읽다가 옮겨적는다. 회상으로 넘어가는 부분이 인상적이다(영어로 읽어서 그럴 지도 모르겠다). 



Long before midnight, Pumpkin and the two elderly maids were sound asleep on their futons only a meter or so away on the wood floor of the entrance hall; but I had to go on kneeling there, struggling to stay awake until sometimes as late as two o'clock in the morning. Granny's room was nearby, and sh slept with her light on and her door opened a crack. The bar of light that fell across my empty futon made me think of a day, not long before Satsu and I were taken away from our village, when I'd peered into the back room of our house to see my mother asleep there. My father had draped fishing nets across the paper screens to darken the room, but it looked so gloomy I decided to open one of the windows; and when I did, a strip of bright sunlight fell across my mother's futon and showed her hand so pale and bony. To see the yellow light streaming from Granny's room onto my futon......I had to wonder if my mother was still alive. We were so much alike, I felt sure I would have known if she'd died; but of course. I'd had no sign one way or the other. 

- p.76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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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이다

조지수(지음), 지혜정원



어쩌면 나도, 이 책도, 이 세상도 유감일지도 모르겠구나. 다행스럽게도 책읽기는, 늘 그렇듯이 지루하지 않고 정신없이 이리저리 밀리는 일상을 견디게 하는 약이 되었다. 하지만 책 읽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나는 이제 책 읽는 사람들을 만날 일 조차 없이 사무실과 집만 오간다. 주말이면 의무적으로 가족나들이를 하고 온전하게 나를 위한 시간 따위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한참 고민하다가 이젠 그런 고민마저 사치스럽다고 여기게 되는 건 그만큼 미래가 불안하고 현재가 아픈 탓이다. 


근대는 "주체적 인간"이라는 이념으로 중세를 벗어났다. 현대는 "가면의 인간"에 의해 근대를 극복한다. 우리의 새로운 삶은 가면에 의해 운명의 노예라는 비극을 극복한다. 가면이 새로운 주체적 운명이다. (26쪽) 


Masks Mocking Death

James Ensor 

100.3 x 81.3 cm, Oil on canvas

1888, Staatsgalerie Stuttgart, Germany 



'가면'은 현대를 특징짓는 몇 되지 않는 단어라 생각하지만, 학자들은 '가면'이라는 단어 대신 '정체성(identity)'를 사용한다. 시뮬라크르와 정체성이 결합되면 흥미로운 주제가 될 것이다. 이 결합만으로도 충분히 비극적인 전망을 가능하게 하지만, 비극적이라 여기는 건 나같은 근대주의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일지도. 


거짓은 삶의 본래적인 양상이다. 문명과 문화는 허영과 기만을 자양분으로 성장한다. (26쪽) 


이십대 후반, 태어나 처음으로 자살을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내 생의 모토를 '진정성'으로 삼았을 때, 나는 현대 문명과 문화로부터 멀어진 것이다. 그 이후 내 마음대로 살았으니, 나에게 충실하고자 노력했다. 철이 없었다. 세계는 벽으로 둘러쳐져 있었으나, 나에게 벽이 없었다. 하지만 가면을 집어드는 순간, 벽에 손이 닿는 순간, 나는 사라지고 외부세계만 눈에 보였다. 


내적 사색과 사회적 조회가 좋은 삶의 조건이다. (135쪽) 


나는 내적 사색만 추구하는 인간이다. 사회적 조화? 그걸 잊고 지냈다. 그러다가 뒤늦게 사회적 조화를 찾으려고 하니, 마치 수영을 하지 못하는 노인이 강을 건너기 위해 강물에 뛰어드는 꼴이라고 할까. 한 마디로 '찌질이'인 셈이다. 이 책의 부제가 '세상의 모든 찌질이들에게 바치는 헛소리 모음집'이니, 이 글도, 이 책도 헛소리의 한 종류로 구분될 것이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하긴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에밀 시오랑이 자신의 태어남을 저주하였듯이, 나도 내 존재 자체를 저주하게 될까. 모를 일이다. 



* 관련 리뷰 * 

2003/01/25 - [책들의 우주/문학] - 내 생일날의 고독, 에밀 시오랑

2008/12/24 - [책들의 우주/문학] - 나스타샤, 조지수

2015/02/28 - [책들의 우주/문학] - 원 맨즈 독, 조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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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The Sense of An Ending 

줄리언 반스(지음), 최세희(옮김), 다산책방



나는 우리 모두가 이러저러하게 상처받게 마련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80쪽) 



살아가면서 과거를 끄집어내는 일이 얼마나 될까. 삶은 고통스러워지고, 사랑은 이미 떠났으며, 매일매일 반복되는 무의미한 일상 속에서 이 세상은 한때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빛깔을 잃어버렸음을. 감미로운 허위만이 우리 곁에 남아 우리 겉을 향기롭게 감싸며 근사하게 보이게 만들지만, 그것은 언젠간 밝혀질 시한부 비밀같은 것. 그럴 때 그 과거는, 어쩌면 우리의 현재를 만들어낸 고통의 근원일까, 아니면 도망가고 싶은 이 세상 밖 어떤 곳일까. 


"토니, 이제 당신은 혼자야."라고 이혼한 아내 마거릿은 전화 속에서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아내의 목소리가 전화 속에서 사라져 버리지만, 토니는 별 반응이 없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 자신이나 아내 마거릿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마치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 듯, 자신의 인생도 그런 궤적을 그리며 평범하며, 이혼했으나 세상에서 가장 잘 자신을 알고 있는 마거릿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 믿는다, 혹은 착각한다, '우리 부부'라는 단어 속에서.  


늙어버린 토니 앞에 갑자기 등장한 과거는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다. 그저 과거일 뿐이며, 토니 밖에서, 사악한 질투심에 무너졌던 토니의 영향력 아래에서 어떤 우연이 만들어졌을 뿐, 토니는 토니이고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마치 다른 우주에 존재하는, 서로 만날 수 없는 행성들처럼. 


인간은 생의 종말을 향해 간다. 아니다, 생 자체가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 그 생에서 가능한 모든 변화의 닫힘을 향해, 우리는 기나긴 휴지기를 부여받게 된다. 질문을 던질 시간적 여유를. 그 밖에 내가 잘못한 것은 무엇이었나? (255쪽) 


과거 속에서 젊은 베로니카는 토니를 버렸고, 에이드리언은 그의 친구 토니를 버린 베로니카와 사랑을 나눈다. 그래서 뭘? 에이드리언은 질투심으로 눈이 먼 토니의 사악한 언어 앞에서 무너졌을까. 아니면 ... 


1부는 젊은 토니를, 2부는 늙은 토니가 화자로 나온다. 그리고 2부는 베로니카의 어머니 사라 포드 부인의 유언장과 자살한 에이드리언의 일기가 실마리가 되어, 토니의 기억을 새로 만들며, 인생의, 사소하지만 비극적인 우연에 대해 이야기한다.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이야기는 쉴새 없이 우리의 마음을 때리지만, 결말을 짐작하긴 쉽지 않다.  


1부의 토니와 2부의 토니는 서로 경쟁하며 결말을 향해간다. 결국 과거는 편집되고 윤색되고 변경된다. 과거는 현재에서만 해석 가능한 어떤 이야기일 뿐, 과거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존재한다면 그건 아무 의미도 없다. 서랍에 깊숙이 숨겨져 있는 어둠 속의 사진과 같은 것. 


의미는 해석되지 않는다. 이 소설은 갑자기 등장한 과거의 숨겨진 이야기를 끝에 가서 드러내지만, 그리고 그 이야기를 향해 모든 것들이 구성되어 있지만, 에이드리언의 자살을 설명하지 못한다. 실은 에이드리언의 자살이 도리어 살아남은 토니의 이기적인 평범함을 설명하게 되는 기묘한 이야기 구조는 도리어 악의적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지독히 냉소적이다. 


우리는 타인에게 관심없는 토니들이고 늘 혼자였고 앞으로도 혼자일 토니다. 사랑마저도 자기를 합리화해야 하는 것이고 그 사랑을 잃어버렸을 때조차 자신의 문제가 아닌 그/그녀의 문제로 환원시킨다. 이래저래 상처 받기 마련이라고 여기지만, 상처마저 자신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온 것이라 믿는다, 이러저러하게. 


마거릿마저 토니를 향해 '당신은 혼자야'라고 말했을 때,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늙은 베로니카가 '아직도 전혀 감을 못 잡는구나, 그렇지? 넌 늘 그랬어,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그러니 그냥 포기하고 살지그래'라며 토니를 질책했을 때조차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소설이 끝날 때까지. 


거기엔 축적이 있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 혼란이 있다. 거래한 혼란이 있다.(255쪽) 


소설은 이 마지막 문장으로 끝나지만, 책임은 혼란 속에서 사라져버리고 사람들은 저 마다의 상처를 가진 채 홀로 서 있을 것임을 예감하게 한다. 시간은 한 개인의 삶에 무신경하고 나는 사랑하는 너에게 관심이 있으나, 끝내 너를 알지 못할 것이다. 너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신비이니, 나는 너를 알려고 하지 않을 것이며 알려고 하는 모든 시도는 실패로 끝날 것이다. 에이드리언만이 과거 속에서 현재를 예감하고 미래에 절망했을 뿐이다. 토니의 내일에 대해 상상하지 말자. 그는 적당히 비관적으로 변할 테지만, 그렇다고 그의 삶이 급격한 변화를 겪거나 아픔을 겪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이 점에선 베로니카의 견해가 옳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고 혼자였던 어떤 이가 갑자기 우리가 되지 못한다. '우리 부부'라는 단어만큼 어색한 표현도 없을 텐데, 토니는 ... 그래서 나는 참 악의적이다라고 적는 것이다. 


할아버지 토니는 20대 토니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베로니카를 향해서도, 에이드리언을 향해서도, 마거릿을 향해서도. 결국 혼자인 토니는, 혼자 거리를 걸으면서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이었나' 스스로에게 묻겠지만, 금방 잊고 말 것이다. 





* 2017년 영화로도 만들어질 예정이다. 

The Sense of an Ending : http://www.imdb.com/title/tt4827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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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의 녹색노트

구광렬 엮고 옮김, 문학동네 



음유시인 


             니콜라스 기옌 




알갱이가 빽빽한 옥수수

피델 카스트로와 그의 부하들이 

그란마에서 내릴 때,

격정의 바다는

그들이 난폭한 걸음으로 출발하는 걸 본다 

턱수염 없는 근엄한 얼굴,

이마엔 나비들을,

구두엔 수렁, 늪을,

죽음, 군인처럼 노란 유니폼에 미제 총을 한 

죽음은 그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몇몇은 상처를 입고 쓰러졌으며 

몇몇은 목숨을 잃었다 

손가락 수보다 조금 더 많은 수가 

희망과 피로로 다시 영광을 향해 출발했다 

깨어난 길에선 주먹을 움켜쥐고 

양귀비를 따 노래를 불렀다 

칼날은 빛났으며 총은 번쩍거렸다 

마침내 산속으로 먼저 들어간 

피델 카스트로는 병영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산맥에서 내려간다.

평원은 총들의 바다가 될 것이다." 



1967년 10월 9일, 체 게바라 사망 당시 그가 메고 다녔던 홀쭉한 배낭 속에는 색연필로 덧칠이 된 지도 외에 두 권의 비망록과 녹색 노트 한 권이 들어 있었다. 두 권의 비망록은 사후 '체 게바라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돼 호사가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었는데, 나머지 노트 한 권은 시가 빼곡히 적혀 있다는 소문만 무성했을 뿐 40년 간 베일에 싸여 있었다. 하지만 몇 년 전 노트 속의 시 69편이 밝혀졌다. 바로 체 게바라가 좋아했던 네 명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세사르 바예호Cesar Vallejo, 니콜라스 기옌Nicolas Guillen, 레온 펠리페Leon Felipe의 시들이었다. - 6쪽 


번역자인 구광렬 교수는 체 게바라의 노트에 빠졌겠지만, 나는 세사르 바예호 때문에 이 책을 샀다. 


예전, 어느 프랑스 소설에서 '세자르 발레조'로 옮겨진 그를 읽었고 그 페루 시인의 시를 읽고 싶었다. 시간은 흘렀고 기억은 흐릿해지고 시집은 일상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시집을 읽기 시작한 건 몇 년 전부터다. 시의 아름다움을 다시 느끼기 시작했다고 할까. 특히 영미시의 아름다움에 빠졌다. 그리고 잊고 있던 세사르 바예호를 떠올렸다. 혹시 싶어 찾아보았으나, 한 권은 절판되었고 구할 수 있는 건 이 책이 유일했다. 



XV

-<<트릴세>>에서 



세사르 바예호 


그 많은 밤을 함께 보낸 저 모퉁이,

하지만 지금 나, 걷기 위해 앉아 있네.

죽은 연인들의 침대는 누가 빼버렸을까?

아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넌 조금 전 다른 일로 여기 도착했지.

지금은 없구나. 네 곁에서,

네 허벅지 사이에서 밤을 읽고 

알퐁스 도데의 이야기를 읽었건만.

혼동하지 마, 

이 사랑하는 모퉁에서였잖아.


지난 여름날을 생각해,

작고 창백한 얼굴로

이 방 저 방 드나들던 너를.


비 내리는 이 밤, 

우리 둘,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열렸다 닫히는 두 개의 문,

그 사이로 넘나드는 바람,

그리고 그림자 둘. 


혁명가 체 게바라의 안목으로 선택된 네 명의 시인을 우리는 새로, 다시 만난다. 쿠바를 떠나 다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던 남미의 숲 속에서 노트를 꺼내 이 시들을 읽었을 체 게바라를 떠올리면, ... 어떤 시들은 가끔 어두운 하늘의 별빛 같다고 할까.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듯한 지금, 무참하게 내려누르는 일상의 공포, 책임, 무모함 속에서 시집은 작지만 강한 위로가 된다. 특히 파블로 네루다의 시는 너무 아름다워, 소리 내어 읽기도 한다. 


이 겨울의 아침, 언어가 가진 슬픈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쓸쓸한 마음을 잠시 스스로를 잊을 수 있지 않을까. 아무에게나 추천해도 좋을 시집이다. 


** 


2015/03/04 - [책들의 우주/문학] - 죽은 전원시, 세자르 바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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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고독했던 때는 없네 


- 고트프리트 벤 (Gottfried Benn, 1886 ~ 1956) 



8월처럼 고독했던 때는 없네

성숙의 계절 -, 땅에는

붉은, 황금빛 신열(身熱)

그런데 그대 정원의 즐거움은 어디에 있는가? 


맑은 호수, 부드러운 하늘,

깨끗한 밭들은 조용히 빛나는데

그대 군림하는 왕국의 개선(凱旋)은,

그리고 그 개선의 자국은 어디에 있는가?


모든 것이 행복을 통해 드러나는 곳,

술 냄새 속, 물건 소리 속에

시선을 나누고, 반지를 나누는 곳에서

그대는 행복의 적(敵)인 정신에 몸 두고 있네 






지독했던 8월이 가고, 여기저기 긁힌 마음의 가장자리는 찢어진 헝겊으로 잘 덮어두곤 가을 놀이를 시작했다. 하지만 갑작스런 변화는, 몸에 무리를 주기 마련. 노트 정리를 하다가 메모 해 두었던 벤의 시를 읽으며, 문득 고독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게, 고독한 건 아닌가. 


이번 가을 벤의 시집 읽으면서 보내야 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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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 깔랭 - 내 생의 동반자 이야기.

에밀 아자르 지음. 지정숙 옮김.

동문선.

 

 

 

외롭지 않아? 그냥 고백하는 게 어때. 외롭고 쓸쓸하다고. 늘 누군가를 원하고 있다고. 실은 난 뱀을 키우고 있지 않았어. 그건 나야. 나의 다른 모습. 길고 매끈하지만,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내 모습이었어.

 

드레퓌스양을 사랑하고 있지만, 드레퓌스양에겐 말하지 않았어. 난 그녀의 눈빛만 봐도 그녀가 날 사랑하고 있다는 걸 느껴. 그래, 그녀와 난 엘리베이터에서만 이야기를 했을 뿐이지. 한 두 마디. 그 뿐이긴 하지만, 난 알 수 있어. 그리고 창녀로 만나긴 했지만, 우리는 서로에 대해 많은 부분을 공유할 수 있었지.

 

그로 깔랭을 동물원으로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삶이 바뀐 건 아니야. 외롭고 쓸쓸하다는 걸 숨기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을 뿐. 그리고 보면 그로 깔랭을 키우면서 난 날 숨기고 있었던 셈이군. 내 외로움을, 내 사랑을, 내 의도를, 내 진심을, ...

 

------------

 

참 슬픈 소설이다. 말을 하지 못하는 뱀 - 그로 깔랭을 키우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지만, 실은 뱀이 이 소설의 중심 주제는 아니다. 에밀 아자르가 이야기하고 싶은 바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교감을 나누는 삶이 파리라는 도시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선택하는 곳은 창녀집이다. 그 곳에서 이 주인공은 그가 사랑하는 드레퓌스양과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이 하룻밤 이후 그는 그로 깔랭과 떨어질 수 있게 된다.

 

그 정도로 거대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건 힘든 일일까. 그 정도로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얻지 못하는 것일까. 에밀 아자르, 로맹 가리가 왜 권총 자살로 자신의 인생을 끝내었는지 알 수 있을 것같다. 이 책 가득한 유머는 실은 '나 너무 외롭고 쓸쓸해'의 동어반복이며 주인공이 키우는 그로 깔랭이라는 이름의 뱀 또한 실은 주인공의 숨겨진 '반영물'이다. 즉 '꾸쟁(주인공이름) = 그로 깔랭', '인간 = 뱀'의 등식이 성립한다.

 

유쾌한 유머를 가장하고는 소설은 나에게 결정타를 날리며 끝을 맺는다. 

 

"빠리 같은 커다란 도시 속에서 사람들은 결코 허전함을 느낄 걱정이 없다."

 

----

 

(서울에서도 마찬가지지. 결코 허전함을 느낄 걱정이 없어. 이미 온 몸 가득 허전함 속에 파묻혀 있으니, 허전함을 알기나 하겠어. 로맹 가리... 나도 권총 자살로 마감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군.)

 

 

--- 


위 리뷰를 쓴 지도 10년이 넘었다. 다시 읽으니, 에밀 아자르, 혹은 로맹 가리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그가 사랑했던 진 세버그가 떠오른다. 그의 소설은 유머 속에서도 숨길 수 없는 비극을 담아낸다. 벗어날 수 없는 어떤 비극성을 포착한다. 서울에서도 사람들은 결코 허전함을 느낄 걱정이 없다. 늘 무언가를 해야 하고 쫓김을 당하고 불안해한다. 대도시에서의 일상인 걸까, 아니면 현대인의 운명일까. 그런데 이 책은 다시 나오지 않나? 로맹 가리의 책들이 다시 출판되던데 말이다. 


- 로맹 가리, 혹은 에밀 아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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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식사 대신 에이미 로월(Amy Lowell, 1874 - 1925)의 시를 한글로 옮겨보았다. 

며칠 전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에 로웰의 시가 실렸는데, 처음 듣는 시인이었고 처음 읽는 시였다. 

충분히 매력적이었고 흥미가 일었다. 하지만 시인의 이름만 제공하고 시 제목은 영어를 병기하지 않았다. 

'고착된'이라는 단어는 쉽게 fixed를 떠올릴 수 있었지만, 먼저 에이미 로웰로 검색해 로웰의 시 목록(http://www.poemhunter.com/amy-lowell/)을 훑었다. 

하지만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구글에서 Amy Lowell fixed idea를 추천 검색 키워드로 제시해주었다.

(원문 - https://www.poetryfoundation.org/poems-and-poets/poems/detail/42980


먼저 원문을 옮기고, 내가 번역한 것을, 마지막으로 중앙일보에 실린 번역시를 올린다. 

중앙일보에 실린 시는 너무 풀어서 번역했다는 느낌도 있고 (너무 의역한... 뭐, 내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방통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난 다음부터 영시 번역이 무척 재미있다. 

대학 시절 외국 문학을 좀 체계적으로 배웠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체계적으로 가르쳐줄 교수도 없었을 것이고, 그걸 체계적으로 배울 준비가 된 학생도 없었고, 나 또한 그런 학생이 아니었음을... 




A Fixed Idea  



What torture lurks within a single thought 

When grown too constant; and however kind 

However welcome still, the weary mind

Aches with its presence. Dull remembrance taught 

Remembers on unceasingly; unsought 

The old delight is with us but to find 

That all recurring joy is pain refined  

Become a habit, and we struggle, caught 

You lie upon my heart as on a nest 

Folded in peace, for you can never know 

How crushed I am with having you at rest

Heavy upon my life. I love you so 

You bind my freedom from its rightful quest. 

In mercy lift your drooping wings and go.

  


고착된 생각 



끝없이 거듭되어 자라나는 하나의 단일한 생각 안에 

고문같은 것이 숨겨져 있다는 것; 그리고 친절하긴 하지만

아직 반갑긴 하지만, 그 지친 마음은 

그 존재로 고통스럽지, 흐릿해진 추억은 길들여진 채 

쉼없이 기억되고; 찾지도 않는

그 오래된 기쁨은 우리와 함께 있으나, 결국 알게 된다네  

모든 회상되는 즐거움은 정제된 고통임을 

습관이 되네, 그리고 우리는 싸우지, 잡힌 상태로

당신은 어느 보금자리인 듯 내 마음에 누워 

평화로이 감싸여, 당신은 절대 알 수 없지 

내 삶 위에 무겁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 당신으로 인해

얼마나 나는 짓눌려졌는지. 나는 너무도 당신을 사랑하네 

당신은 내 자유를 그것의 정당한 탐색로부터 구속하고 

자비로이 당신의 축 늘어진 날개들로부터 풀어줘, 그리고 가. 





아래는 중앙일보에 번역되어 실린 에이미 로웰의 시다. 



고착된 생각




너무 계속 자라는 한 가지 생각안에는 

고문 같은 고통이 숨어있지,

아무리 다정하고 아무리 반가워도 

내 지친 마음은 그 생각 때문에 더 아픈 거야.

길들여진 둔한 기억은 끊임없이 계속 기억하지,

찾지도 않은 오래된 기쁨은 우리와 함께 있지만 알게 되지,

되풀이되는 모든 기쁨이 단지 습관이 된 정제된 고통일 뿐임을,

우리는 벗어나려 애쓰지만 다시 사로잡히지. 

당신은 마치 둥지 위에서처럼 내 가슴 위에 누워있지,

평화롭게 팔짱 낀채, 그러나 당신은 결코 알 수 없어,

내 삶 위에 당신이 무겁게 쉬고 있을 때,

내가 얼마나 큰 고통으로 바스러지는지.

난 당신을 너무 사랑해, 당신은 당연히 날 찾아 나의 자유를 구속하지

제발 날 불쌍히 여겨 처진 날개를 들고 떠나줘. 

(출처: http://news.joins.com/article/20453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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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증. 감정들 Schwindel. Gefühle

W.G.제발트(Sebald) 지음, 배수아 옮김, 문학동네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 우연히 일어난 피부 접촉은 늘 그랬듯이 무게도 중력도 없는 어떤 것, 실제라기보다는 허상과도 같은, 그래서 한없이 투명한 사물처럼 나를 관통해가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95쪽) 



'벨, 또는 사랑에 대한 기묘한 사실', '외국에서', 'K박사의 리바 온천 여행', '귀향'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단편소설집일까, 아니면 장편소설일까. 아니면 이 구분이 그냥 무의미한 걸까. 장편소설이 아니라 단편소설집이라고 하기엔 4개의 이야기는 하나의 주제의식을 공유하는데, 그건 여행(에의 기록/기억)이다. 서로 다른 인물들의, 서로 다른 도시로의, 서로 다른 시기 속에서의, 하지만 동일한 테마를 가진 여행의 기록(기억), 이 소설이 장편소설이 되는 이유이면서 제발트가 가지는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떠나는 것, 낯선 곳(혹은 잊혀졌던 곳)에서 머무는 것, 그 곳에서 자고 걷고 만나고 이야기하며 얇고 사소한 감정의 변화를 깊숙하게 느끼는 것, 그리고 기억해내는 것, 기록하는 것, ... 소설은 이렇게 구성되어 흘러간다. 하지만 우리가 익히 아는 그런 여행(의 기록)이 아니다. 


밖으로 나오는 길에 흰 염주비둘기 한 쌍을 지켜보았다. 비둘기들은 여러 번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날개짓 몇 번으로 나무 꼭대기 높은 가지로 위로 급격하게 떠올랐다가, 짧고도 영원하게 느껴지는 순간 동안 고요히 창공에 머문 다음 다시 앞으로 쏟아질 듯한 자세로 하강하며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나지막한 구르륵 소리를 냈고, 그 중 몇 그루는 이 백 년 이상 그 자리에 서 있었을 것이 분명한 키프로스 나무들 주변에서 날개를 고정시킨 채 커다란 원을 그리며 빙빙 돌았다. (70쪽) 


나로선 이 여행들(의 기록)을 따라가기엔 참 힘들었다. 서술은 빽빽하고 무거우며, 한 번 표현된 감정은 곧바로 사물이 되어 아래로 가라앉는다. 독자의 시선은 무거워진 분위기를 따라 아주 느리고 천천히 움직인다. 한참을 읽었다 싶지만, 고작 몇 페이지를 지났을 뿐이고 그와는 반대로 시간은 참 빨리 흐른다. 


감정을 서정적으로 이야기하는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도리어 딱딱하고 즉물적이다. 독자는 제발트의 서술을 따라가지만, 그 곳으로 감정이입되어 들어가지 않는다, 못한다.  


어쩌면 이것도 늙어간다는 징표일까,  아니면 제발트식 여행(의 기록)이란 그런 걸까. 낯선 나와 마주하거나 잊고 있던 나를, 혹은 내가 무심코 흘려보냈던 기억들을 새삼스레 되새기면서, 끊임없이 뒷걸음질치면서 타자화, 사물화하는 걸까. 여행을 하면서 나를 찾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나를 지워나가는 걸까, 그리고 스스로 수수께끼가 되는 걸까. 


그는 특히,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일이 내 안에서 저절로 설명되고, 그럼에도 그 일들이 더욱 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수수께끼처럼 변해간다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199쪽)


우리는 외부를 끝내 알 수 없다. 실은 내부도 알 수 없다. 내 마음은 텅 비었고 영혼의 존재를 알 수 없기에 믿을 수도 없다. 신념은 조각났고 소설은 의미 찾기를 그만 두었다. 고작 보여줄 뿐이다. 그것도 자세하고 정확하게. 감정마저도 객관적으로. 


제발트의 문장이 갖는 독일어의 밀도는, 역자로서의 경험이 참으로 빈약하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생각하기에, 문학 텍스트 중에서도 가장 치밀한 종류이며 그것이 갖고 있는 텍스처texture의 성질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252쪽) 


배수아의 의견대로, 너무 빽빽하고 무거워서 따라가기 버거울 정도다. 하지만 그녀의 '제발디언'은, 글쎄다. '제발디언'이라는 단어는 매우 사적인 호감을 드러내는 표현일 뿐, 일반 독자가 읽기엔 어렵고 재미없고 문장에 너무 많은 힘을 쓰고 있다고 할까. 마치 야니스 크세나키스(iannis xenakis)의 음악을 듣는 기분이랄까. 하긴 나도 크세나키스의 음악을 좋아하지만... 


소설 중간에 등장하는 피사넬로 작품은 아래와 같다. 고딕 양식의 성 아나스타시아 성당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다. 15세기 초반에 그려진 초기 르네상스 작품이다. 그나저나 이 작품의 일부를 소설에 등장시킬 생각을 하다니... 


St. George Liberating the Princess of Trebizond

Pisanello (1395 - 1455), fresco, 223 × 620 cm (87.8 × 244.1 in)

from 1436 until 1438

Church of Saint Anastasia (독일어 - Pellegrini-Kapelle)  


과감하게 읽으라는 권유는 하지 못하겠다. 다만 제발트가 살아있었다면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올라갔을 것이며, 노벨문학상을 받았거나 그만한 명성을 누렸을 것이라는 것이다. 


사족이긴 하지만 가끔 한국 문학판에 대해 아쉬운 건 번역된(혹은 번역되지 않더라도) 동시대 외국 문학이 어떻게 한국 작가들과 작품 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에 대해서 너무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설가 배수아의 초기 작품들을 읽고 나는 얼마나 실망했던가. 그 이후 그녀의 작품을 읽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오에 겐자부로가 십 수년 전 하루키를 비난했지만, 지금은 인정한다고 말했듯이, 그녀의 최근 작들이 궁금해진다. 적어도 제발트를 읽고 흔들렸다면 말이다. 



영어 번역판 표지



* 제발트의 다른 소설. 

2016/05/07 - [책들의 우주/문학] - 아우스터리츠Austerlitz, W.G.제발트Seba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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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은 책상이다

페터 빅셀(지음), 이용숙(옮김), 예담 



뭐라고 해야 하나, 이런 경우를. 채 30분도 되기 전에 다 읽은 이 소설집. 뭔가 생각하기도 전에 금방 끝나버리는 소설. 그리고 누구나 조금의 관심만 있다면 한 번쯤은 생각하게 되는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진 짧은 소설들. 하지만 페터 빅셀은 이 소설들을 썼고,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에피소드라고 하기엔 지금 여기에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주인공들의 또다른 공통점은 대부분 나이가 많은 남자라는 사실이다. 정서적으로 유연한 여성들에 비해 남자들은 실제로 나이가 들어가면서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사회와 소통이 점점 어려워지는 경우가 더 흔하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젊은 작가 빅셀이 고집 세고 편협한 이런 노인들을 더 없이 따뜻하고 이해가 충만한 시선으로 그려냈다는 점이다. 지구가 둥근지 확인하려고 떠난 노인을 날마다 기다리는 작가, 또 요도크 밖에 아무 것도 모르는 할아버지를 애정으로 감싸는 작가의 태도는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세상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려는 작가적 사명감의 표현이다. - 옮긴이의 말 중에서, 101쪽


고집 세고 편협한 이런 노인들을 만난다면 우리들은 과연 어떻게 할까? 따뜻하고 이해가 충만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아니면 고집 세고 편협한 젊은이들을 만난다면? 과연?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사회와의 소통이 어려워진다면, 그건 그/그녀의 문제인가, 사회의 문제인가,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원래부터 그렇게 생겨먹은 문제인가. 


작가적 사명감은 이미 일어난 문제를 감싸 안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의 근원을 파고들어야 하는 건 아닐까? 페터 빅셀의 한계는 여기에 존재한다. 따뜻하고 감성적인 동화적 시선으로 현대의 문제를 바라보고 어물쩡 넘어가려는 것이다. 


다시 묻자. 당신 앞에 어버이연합의 할아버지가 자신의 고집을 내세우면서 싸우려고 든다면? 엄마부대 봉사단의 할머니가 나타나 편협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논리로 세월호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또는 일베에 빠져 당신의 의견에 대해 사사건건 반박하며 과격한 논리로 공격을 일삼는다면? 


이 소설은 이 지점에서 무너져내린다. 아마 많은 이들이 이 소설을 읽고 자신의 잘못, 소외되고 편협한 사고와 언어를 가지게 된 이들에 대해 무정하게 대했다는 것을 후회하고 반성한다면, 그건 잘한 일일까? 


글쎄다. 내가 읽은 이 소설집은 좀 형편없다. 많은 사람들이 읽고 감동했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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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곰팡이 

-산책시 1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 이문제, <<산책시편>> 중에서  




이문재의 <<산책시편>>(민음사)가 있는데, 서가를 찾아보니 없다. 정리되지 않는 서가, 정리할 시간도 없는 서가, 이젠 책 읽을 시간과 여유마저 사라지고, 이 시도 읽었으나 이젠 기억나지 않아, 신문에서 읽은 다음, 출처를 찾아본 다음에서야 시집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이문재를 읽던 시간도 이젠 드물어지고, 가을은 아직 저 멀리 있기만 하다. 끝나지 않을 것같은 여름밤, 책은 읽히지 않고 잠도 오지 않는데, 어찌 꿈을 꿀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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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베개

나쓰메 소세키(지음), 오석윤(옮김), 책세상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풀베개>>의 놀랍고 아름다운 시작은, 어쩌면 이 소설의 시작과 끝을 동시에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소설은 독자가 읽게 되는 첫 문장들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어쩌면 '하이쿠 소설'이라는 후대의 평가도 우호적인 것일지도. 



 산길을 올라가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지(理智)에 치우치면 모가 난다. 감정에 말려들면 낙오하게 된다. 고집을 부리면 외로워진다. 아무튼 인간 세상은 살기 어렵다. 

 살기 어려운 것이 심해지면, 살기 쉬운 곳으로 옮기고 싶어진다. 어디로 이사를 해도 살기가 쉽지 않다고 깨달았을 때, 시가 생겨나고 그림이 태어난다. 

 인간 세상을 만든 것은 신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다. 역시 보통 사람이고 이웃끼리 오고 가는 단지 그런 사람이다. 보통 사람이 만든 인간 세상이 살기 어렵다고 해도 옮겨 갈 나라는 없다. 있다고 한다면 사람답지 못한 나라로 갈 수 밖에 없다. 사람답지 못한 나라는 인간 세상보다 더 살기가 어려울 것이다. 

 옮겨 살 수도 없는 세상이 살기가 어렵다면, 살기 어려운 곳을 어느 정도 편하게 만들어서 짧은 생명을, 한 동안만이라도 살기 좋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시인이라는 천직이 생기고, 화가라는 사명이 내려진다. 예술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인간 세상을 느긋하게 만들고, 사람의 마음을 풍성하게 해주는 까닭에 소중하다. 

 살기 어려운 세상에서 살기 어렵게 하는 번뇌를 뽑아내고, 고마운 세계를 직접 묘사해내는 것이 시고 그림이다. 혹은 음악이고 조각이다. 자세히 말한다면 묘사해내지 않아도 좋다. 그저 직접 보기만 하면 거기에서 시도 생기고, 노래도 샘솟는다. 착상을 종이에 옮기지 않아도 보옥이나 금속이 부딪쳐서 나는 소리는 가슴속에 일어난다. 

- 7쪽~ 8쪽



하지만 소세키는 우리를,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나는 소설 속의 '나미 氏'와 같은 이를 그리워하고 있는 지도 모르고, 작중화자처럼 그런 여행을 꿈꾸고 있는 지도 모른다. 나에게 이 소설은 부러움의 대상인 셈이다. 


그래서 소설은 전쟁 중인 현실과 멀리 떨어져, 딴 세상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는, 아주 자주 딴 세상을 꿈꾼다. 그건 유토피아가 아니다. 그저 지금 여기를 벗어나 잠시 쉴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남 몰래 연애도 하고, 사랑도 하고, 경제적 불안이나 세상사의 갈등이나 불협화음에서 벗어나, 어떤 사색의 풍요로움 속에 빠지고 싶은 게다. 


이 소설은, 바로 이 사색의 풍요로움으로 넘쳐나며, 나미 氏의 가느다란 아름다움에 취해 있다. 소세키의 소설들 대부분이 현실 속에서 갈등하며 흔들리는 자아의 심리를 보여준다면, 이 <<풀베개>>는 그 갈등과 흔들림에서 한 발짝 옆으로 벗어나 꿈 속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소설 끝에서 나미 氏의 이혼한 남편이 등장하고 전쟁터로 나가는 규이치를 배웅해주는 장면에서, 주인공 화자가 그림 한 장면을 포착해내는 순간, 결국 예술의 창작은 꿈에서 벗어나 현실의 슬픔 속에서 나온다는 걸 이야기할 땐, 여행의 끝은 언제나 집으로 돌아오는 것임을 비극적으로 깨닫게 된다. 



나미 씨는 우두커니 떠나가는 기차를 보내고 있다. 그녀가 우두커니 서 있는 동안에, 이상하게도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애련이 얼굴 가득히 떠 있다. 

"그거야! 그거야! 그게 나오면 그림이 됩니다."

나는 나미 씨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속삭였다. 내 가슴 속의 화면은, 뜻하지 않았던 바로 이 순간에 이루어졌다. 

- 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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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

자끄 프레베르 Jacques Prevert 

안민재 역편, 태학당 






헌책방에서 구한 시집. 예전엔 외국 번역 시집들이 꽤 많았는데, 지금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하긴 시집 읽는 이도 드문 마당에... 


번역이 다소 형편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오늘 다시 보니 어느 것은 좋고 어느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형편없는 것이 아니라... 


1994년에 출판되었고 인터넷서점에선 검색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래 소개한 시를 읽는 것만으로도 닫혀있는 마음은 밖으로 무너지고 저녁 바람을 새삼 느끼고 저 하늘 달빛이 이 버릇없는 작은 도시의 사람들 위를 비추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될 것이다. 


대학시절 불어로 시 읽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젠 불어 단어들이 머리 속에서 흔적으로 남았다. 시를 읽으며 술을 마시던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하고, 그 시절 탓에 지금 삶이 어려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 갈피 잡을 수 없는 중년의 봄날이 이어진다.  


 



공원 Le Jardin 




우주 속의 별

지구 속의 

파리

파리 몽수리 공원에서

어느 겨울 아침 햇빛

네가 내게 입 맞춘 

내가 네게 입 맞춘

그 영원의 한순간을

다 말하려면

모자라리라

백만 년 또 수백만 년도 






어느 새의 그림을 그릴려면 Pour faire le portratit d'un oiseau 





우선 문이 열린

새장을 하나 그릴 것

다음에는 새를 위해

뭔가 예쁜 것을 

뭔가 단순한 것을

뭔가 예쁜 것을

뭔가 쓸모 있는 것을 그릴 것

그 다음엔 그림을

정원이나

숲이나

혹은 밀림 속

나무에 걸어놓을 것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움직이지 말고 ... ...

때로는 새가 빨리 오기도 하지만 

여러 해가 걸려서

결심하기도 한다

실망하지 말 것

기다릴 것

필요하다면 여러 해를 기다릴 것

새가 빨리 오고 늦게 오는 것은

그림의 성공과는 관계 없는 것

새가 날아올 때

혹 새가 날아오거든

가장 깊은 침묵을 지킬 것

새가 새장에 들어가길 기다릴 것

그가 새장에 들어가거든

살며시 붓으로 새장을 닫을 것

그리고 

차례로 모든 창살을 만들되

새의 깃털을 다치지 않도록 조심할 것

그리고는 가장 아름다운 가지를 골라

나무의 초상을 그릴 것

푸른 잎새와 신선한 바람과

햇빛의 가루를 또한 그릴 것

그리고는 새가 결심하여 노래하기를 기다릴 것

혹 새가 노래 하지 않으면

그것은 나쁜 징조

그림이 잘못된 징조

그러나 새가 노래하면 좋은 징조

당신이 사인해도 좋다는 징조

그렇거든 당신은 살며시

새의 깃털 하나 뽑아서

그림 한구석에 당신 이름을 쓰라 





절망이 의자 위에 앉아 있다 Le de'sepoir est assis sur un banc 




광장의 의자 위에

어떤 사람이 앉아

지나가는 사람을 부른다

외안경에 낡은 회색 옷을 입은 그는

담배를 피우며 앉아 있다

그를 바라보면 안 된다

그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

그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냥 스쳐야 한다

그가 보이거든

그의 말이 들리거든

걸음을 빨리 하여 지나쳐야 한다

혹 그가 신호라도 한다면

당신은 그의 옆에 앉을 수 밖에 

그러면 그는 당신을 보고 미소 짓고 

당신은 참혹하게 고통 받고

계속 그 사람은 웃기만 하고

당신도 같은 웃음을 웃게 되고

웃을수록 당신의 고통은 더욱 참혹하고

고통이 더 할수록 더욱 어쩔 수 없이 웃게 되고

당신은 거기 의자 위에 

움직이지 못하고 미소 지으며 

주위에는 아이들이 놀고

사람들 조용히 지나가고 

새들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날아가고

당신은 의자 위에 

가만히 앉아 있다

당신은 안다 당신은 안다

이제 다시는 이 아이들처럼 

놀 수 없음을

이제 다시는 조용히 

이 행인들처럼 지나갈 수 없음을

당신은 안다

이 새들처럼

이 나무에서 다른 나무로 

날아갈 수 없음을 

당신은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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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에서 내던 <<세계의 문학>>이 지난 겨울호로 '발행을 중단'했다, 혹은 폐간했다. 문학 잡지의 사소한 발행 중단이라고 하기엔 <<세계의 문학>>이라는 잡지가 가졌던 위상이나 내가 즐겨보던 잡지엿던 터라,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 내가 대학을 입학하고 난 다음, 처음 샀던 문학잡지이기도 했던 <<세계의 문학>>. 그 해 박일문이 '하루키 패러디'라는 지적을 받으면서 <오늘의 작가상>을 받았고, 나는 <<세계의 문학>>에 실린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읽었다.


 



<<창작과 비평>>이나 <<문학과 사회>>와 달리, 좀 더 문학주의적이라고 할까, 이론주의적이라고 할까. 그 때 내가 받았던 인상은 그랬다. 그동안 많은 여러 문학 잡지들이 발행을 중단했다. <<문학정신>>, <<외국문학>>, <<상상>> 등등. 세상이 변하면 문학도 변하고, 문학잡지도 변해야 한다. 가끔 들리는 공공 도서관에 비치된 문학잡지들을 보며, 누가 저 잡지들을 읽을까 언제나 궁금하다. 결국 학생이나 관계자, 또는 나같은 이들이 읽을테지만. (나 같은 이들이라, ... 적고 보니, 참 쓸쓸하다는 생각이...)  


그래서 마지막 호를 샀다. 산 지 벌써 몇 달이 지났건만, 아직도 읽지 못한 채, 이 글이나 적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들 중의 하나가 바로 소셜 미디어와 사람들 간의 소통 증가다. 사람들은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등과 같은 소셜 미디어같은 것들의 등장과 활성화로 사람들이 자주 대화하고 소통이 늘어났다고 여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반대다. 


우리는 대화하면서 서로를 알아간다. 서로 얼마나 닮았는가를, 서로 얼마나 다른가를. 그러나 소셜미디어의 발달은 서로의 공통 관심사를 향해 갈 뿐, 서로의 다른 점을 부각시키지 않는다. 다른 점들이 부각되는 순간, 우리는 서로를 차단한다. 페이스북 알고리즘은 비슷한 사람들을 서로 끌어당기고 결국 우리는 비슷한 끼리끼리 모여 섬을 이룬다. 


그렇게 문학도, 문학잡지도 섬이 된 것이 아닐까. 한 때 문학은 서로 만나지 못하고 대화할 기회 조차 없었던 이들을 이어주던 다리가 되었다면, 지금은 스스로 고립되어가는 섬이 되고 있다. 


<<세계의 문학>>이 발행을 중단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문학의 존재나 위상이 예전만 못하고 잡지도 그러했기 때문은 아닐까. 이제 문학은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해 가야하는 건 아닐까. 


소설가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을 보면서 그녀의 수상보다 저들은 번역문학도 자신들의 문학 속으로 끌어당기는구나하며 부러웠다. 우리에게는 번역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나 비평 따윈 없다. 그리고 한국의 문학이 그것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가에 대해 돌아보지도 않는다.


제발트의 소설을 읽고 난 다음, 다큐멘터리에 대해 생각했다. 그 스스로 다큐라고 이야기했으니까. 그러다가 진짜 다큐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문학은 타자를 받아들이며 성장해간다. 아니, 예술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무너뜨리고 낯선 것을 받아들이면서 앞으로 나간다. <<세계의 문학>> 마지막 호 편집자 서문에 알레시예비치에 대한 이야기가 실린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세계에 대한 나의 비전, 즉 내 귀가 어떻게 삶을 듣고 또 내 눈이 어떻게 삶을 보는가를 전달하는 데 가장 잘 맞는 장르를 계속 찾아왔다. 이것도 해 보고 저것도 해 본 후 결국 나는 인간의 목소리가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장르를 선택했다. 실제의 사람들은 내 책 속에서 전쟁이나 체르노빌 재난, 그리고 거대 제국의 몰락 등 시대의 중요한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 나라의 역사, 그들 공통의 역사에 대해 구술로써 기록하면서 동시에 그들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말로 옮기고 있다. 오늘날처럼 사람과 세계가 매우 다면적이고 다양해진 상황에서 예술 속 다큐멘트는 점점 흥미로워지는 것에 반해, 그와 같은 예술은 종종 무기력해졌다. 다큐멘트는 그것이 원래의 상태를 포착하고 간직할 때의 리얼리티에 가깝게 우리를 데려다준다. 그 다큐멘트 자료들로 20년간 작업을 하고 그것으로 다섯 권의 책을 쓰고 난 후, 나는 예술이 사람들에 관해 많은 것을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고 선언한다. 

- 영원한 인간을 찾아서 A Search for Eternal Man, 알렉시예비치. 

(http://alexievich.info/indexEN.html)



내가 형식의 문제나 작법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까 늘 고민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알레시예비치는 운이 좋았다고 할 수 밖에. 



나는 전쟁이 아니라 전쟁터의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전쟁의 역사가 아니라 감정의 역사를 쓴다. 나는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역사가다.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시간 속에 살고 구체적인 사건을 겪는 구체적인 사람을 연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영원한 인간을 들여다보아야만 한다. 영원의 떨림을. 사람의 내면에 항상 존재하는 그것을.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박은정 역, 사람이 전쟁보다 귀하다. 중에서 .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이 의미있는 문학인가 판단하기 위해 범주와 장르를 따르는 것은 좋은 문학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즉 그 목소리와 내용으로, 그 영혼과 긴박함으로, 그 진실과 그리고 무엇보다 지혜로서 우리의 세계와 존재에 대한 이해와 경험을 확장하는 글쓰기로써 삶과 죽음에 반응하는 것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필립 구레비치Philip Gourevitch, 논픽션은 노벨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Nonfiction deserves a Nobel, <<Newyorker>> 2014. 10. 9 



<<세계의 문학>> 창간호다. 1976년에 태어난 이들도 이젠 40대인가. 그만큼 세월이 흘렀고 세상이 변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변할까 생각하니, 아찔하기만 하다. 하지만 아직 우리는 호메로스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음을, 플라톤이 저 이데아의 세계를 이야기했던 그 비극적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글이 두서없고 뜬금없다. 문학이라, ... 참 오랜만에 생각해보게 된다.  



출처: http://myungworry.khan.kr/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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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 This Craft of Verse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거용 옮김, 르네상스 








우리는 시를 향해 나아가고, 삶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리고 삶이란, 제가 확신하건대 시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시는 낯설지 않으며, 앞으로 우리가 보겠지만 구석에 숨어 있습니다. 시는 어느 순간에 우리에게 튀어나올 것입니다. (11쪽) 



예술의 세계에서 '그것을 아는 것'과 '그것을 행하는 것'은 종종 전혀 다른 궤도를 돌기도 한다. 시를 쓰는 것과 시를 아는 것, 그림을 그리는 것과 그림을 아는 것, ... ... 이 둘은 서로 연관되어 있지만, 때로 다른 세계를 지칭한다. 그래서 어떤 예술가들은 자신이 위대한 작품을 쓰거나 그리고 있음을 알지 못한 채 죽기도 한다. 현대에 있어서는 아르튀르 랭보나 반 고흐가 대표적인 경우일 것이다. 


우리가 안다고 할 때는 그것을 행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여기지만, 예술의 세계에서는 안다는 것은 그것을 못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문학 전공자인 나에게는 작품을 내 기준으로 선별하기 시작했을 때, 거의 습작을 포기하게 되었다. 이런 사람들은 꽤 많아서, 이들의 공통점은 형편없는 작품이나 만들어내면서 작가라며 으스대는 이들을 역겨워하는 이름없는 아웃사이더가 되며 진정한 작가들의 충실한 지지자가 된다.  


루이스 호르헤 보르헤스. 이 이름 앞에 무슨 말을 더 덧붙일 것인가. 20세기 후반의 가장 위대한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그는,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1967년과 68년에 하버드대학교에서 여섯 차례의 문학 강의를 진행한다. 녹음테잎으로만 있던 이 강의자료가 십 여년 전 발견되고, 보르헤스의 육성 강의를 그대로 글로 옮겼고, 얼마 뒤 이 책이 나온다. 그 때 2000년이었다.


그 자신 스스로 위대한 작가였던 보르헤스는 문학의 전통(역사) 앞에서 한없이 고개 숙이며 그것의 참 의미에 대해 소곤거린다. 위대한 문학 작품들의 지지자가 되며, 그 작품이 어떻게 존재하고 읽히는가에 대해 설명한다. 어쩌면 어떤 것이 진정한 문학인가를 알아차리는 순간, 더 깊이 문학 속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그것이 무척 어렵고 힘겨운 일이라고 할 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보르헤스는 자신의 문학 너머 거대하기만 문학의 역사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보르헤스는 하버드대학에서의 그 여섯번 강의를 통해, '시라는 수수께끼', '은유', '이야기하기', '번역', '사고와 시', '한 시인의 신조'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이 때 이미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생각나는대로 기억하는대로 강연했다. 보이지 않는 청중들을 위해서. 그런데 이 책을 읽는 동안, 그는 이 원고를 어떻게 준비했을까, 이 강의를 들었던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하는 생각에 잠기고 만다. 보르헤스, 그는 작가이기 이전에 진정한 작가들의 지지자였으며, 성실한 독자였고, 호기심 가득찬 눈으로 도서관 서가 사이를 배회하던 소년이었다. 


보르헤스는 이 짧았던 강연을 통해 놀랍도록 우아하고 아름다운 시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소설이 아니라 서정시와 서사시의 세계로. 보르헤스는 정작 소설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이 강연에서 그는 시인의 면모를 드러냄과 동시에 문학의 저 세계로 우리를 이끌고 여행을 떠난다. 소설이 등장하지 않았다고 서운해하지 말기를. 그는 위대한 이야기꾼들과 저 서사시의 전통에 대해서 이야기하니까.  



With ships the sea was sprinkled far and nigh, 

Like stars in heaven 

- Wordsworth 


(바다에는 배들이 멀리 또 가까이 뿌려져 있네,

 하늘의 별처럼) 



대학 시절, 아니 이제까지 내가 들었던 그 어느 문학 수업도 보르헤스의 이 강연록보다 아름답지 못했다. 그 많던 작가들의 수업이나 강연을 들었으나, 그들 대부분 시들을 암송하여 들려주지 못했다(암송했던 이는 두 분 있었는데, 한 분은 시인이며, 한 분은 내 예술사선생님이셨다). 더구나 시 행간 사이에 숨겨진 의미를 고대에서부터 끄집어내어 지금으로 가지고 오는 이도 없었다. 이런 수업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는 학생의 비극이다.(하긴 이런 수업을 할 수 있는 이 보르헤스 말고 누가 있으랴)



She walks in beauty, like the night 


바이런 저 싯구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 번역하지 않아도. 보르헤스는 서로 다른 언어를 오가며, 시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어떤 시어들이 가지는 아름다움은 특정 언어에서 더욱 부각된다고. 


대학을 졸업한 후 듣게 된 수업에서 예술사 선생님께서 바이런의 싯구를 강의 중간에 암송하셨을 때, 그 아름다움을 미처 몰랐다. 실은 대학 시절 다양한 언어를 오가며 위대한 문학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배울 수 있어야만 했다. 그러기엔 내가 너무 지적으로 무능했고 내가 다녔던 대학과 그 대학 교수들 대부분은 위대한 문학을 가르치기에 적당하지 못했다. 


보르헤스의 이 책을 문학과 시에 대해 궁금한 모든 이들에게 추천한다. 그리고 철부지 비평가들과 문학을 사랑하지 않는 학자들에게 놀아난 '문학의 위기'가 보르헤스의 저 짧은 책 안에서 어떻게 무너지는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 사랑이 사라지지 않듯 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시는 사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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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스터리츠 Austerlitz 

W.G.제발트(지음), 안미현(옮김), 을유문화사 




병상에 누워, 안경을 쓰지도 못한 채,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를 읽었다. 병상에서의 소설 읽기란, 묘한 느낌을 준다. 일상을 벗어난 공간 속에서, 현실은 적당한 거리를 둔 채 떨어져있고, 허구와 사실은 서로 혼재되어 혼란스럽게 한다. 시간마저 겹쳐 흐르며 외부는 모호해진다. 어쩌면 현대 소설이란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마치 <<아우스터리츠>>처럼.  


제발트는 소설 중간중간 사진들이 인용하는데,  마치 '이 소설은 허구가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이다'라고 말하는 듯 보였다. 허구와 사실 사이를 오가며, 소설은 대화의 인용으로 이루어진다. 문장의 호흡은 길고 묘사는 서정적이면서 치밀하고, 등장인물들의 마음은 한결같이 슬프기만 하다. 과거는 추억이 되지 못하고 스스로도 모르고 있었던 내 마음의 상처를, 가족의 상처를, 현대의 비극을 다시 꺼내어 보듬고 어루만진다. 대화는 자주 끊어지지만, 기억은 이어지고 소설은 챕터도 없이 그냥 하나다. 시간은 끊김 없고 끊어져 있던 기억들도 그것 안에서 하나로 이어져있듯, 소설은 허구와 사실을 이어 하나로 만든다.


아직도 2차 대전의 상처를 드러내며, 정면으로 응시하며 나아가는 <<아우스터리츠>>를 보며, 요즘 한국 문학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낀다. 미국의 이창래도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정작 한국 작가들만 무관심한 듯 싶기도 하고...


<<아우스터리츠>>의 명성은 이 작품을 향하고 있는 문제 의식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소설 작법에서부터 전혀 다른 글쓰기를 보여주며, 현대 소설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있다. 그 스스로 '다큐멘터리 픽션'(1)이라고 이야기하듯, 이 소설은 사건 중심이라기 보다는 사실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몇 개의 중요한 사실들과 이를 연결하여 소설의 중심 뼈대(내러티브)를 만들고 그 뼈대는 다시 사진들, (건축)공간에 대한 서술, 인물들에 대한 탐구와 인터뷰 등으로 형체를 이룬다. 


그런데 이 작법은 소설 감상에 그 어떤 영향을 주지 않으며, 도리어 전쟁에의 상처, 가족의 비극, 그리고 쓸쓸한 회상 속으로 빨려들게 하며, 작품에 대한 몰입도를 높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소설적 완성도를 지닌다.

 


Bigsby(*) suggests that it was out of frustration with the strictures of academic publication that Sebald turned to creative writing (a vague and ungainly term that, by default, winds up being the most accurate generic description of his work). "He'd originally taught German literature," says Bigsby, "and had published the kind of books that academics do. But he got increasingly frustrated, and began to write in what he called an 'elliptical' way, breaching the supposed boundaries between fast and fiction - not what you're supposed to do as an academic." Sebald himself sometimes described his work as "documentary fiction," which goes some way toward capturing its integration of apparently irreconcilable elements. 


제발트는 학술 서적들의 심한 비난들에 대한 불만으로 문학창작(자연스레, 그의 작품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포괄적인 설명이 될 수 있는, 다소 모호하고 어색한 단어인)의 길로 들었다고 빅스비는 말한다. "그는 원래 독일 문학을 가르쳤어요"라고 빅스비는 말하며, "그는 학교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면 으레  하듯 몇 종의 책들을 출판했죠. 그러나 그의 불만은 계속 늘어났으며, 그가 말하는 '생략된(elliptical) 방식'으로이미 가정되어 있던 사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제발트에게 대학 연구자처럼 하라고 제시되어져 있던 기존 방식이 아니라." 제발트는 그 스스로 그의 작품을 종종 명백하게 양립할 수 없는 요소들의 결합을 포착하기 위한 어떤 방식들을 향해 가는,  "다큐멘터리 픽션"이라고 표현했다. 


- Why You Should Read W. G. Sebald BY MARK O’CONNELL 

THE NEW YORKER, DECEMBER 14, 2011

http://www.newyorker.com/books/page-turner/why-you-should-read-w-g-sebald  


Christopher Bigsby(1941~): 소설가, 비평가, 제발트가 있었던 University of East Anglia의 Colleague. 



'Elliptical'라는 단어에 대한 번역어를 좀 더 고민해봐야겠지만, 예전에도 한 번 언급했듯이 현대 소설, 아니 현대 예술가들은 스스로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에 대한 작법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해롤드 블룸은 이를 '시적 영향에의 불안'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우리 시대는 새로운 방식, 일종의 혁신을 추구해야만 하는 지점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W.G.제발트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여기에 성공하고 있다.  


-- 



(1) 제발트가 스스로 '다큐멘터리 픽션'이라고 이야기했으나, 그는 노벨문학상을 받기 전에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그리고 2015년 실제로 다큐멘터리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벨라루스의 논픽션 작가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제발트의 문학과 알렉시예비치의 작품은 확연히 다르지만, 제발트를 읽으면서 알렉시예비치를 떠올렸다. 번역된 제발트의 책들을 몇 권 더 챙겨 읽고 자세한 리뷰를 적어볼 생각이다. 그만큼 중요한 작가이기도 하다.알렉시예비치도 읽을 예정이니, 서로 비교해볼까 한다. 



W.G.제발트(Winfried Georg Sebald), 1944 -2001 






* 현대 예술가라면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종종 어떤 이들은 자신의 예술론을 책으로 내기도 한다. 이는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칸딘스키가 그랬고 미셸 빅토르, 로브-그리예, 오에 겐자부로, 심지어 이우환도 자신만의 예술론을 모아 책을 냈다. 아래 책은 미셸 뷔토르의 소설론이다. 소설 쓰기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2014/02/10 - [책들의 우주/이론] - 새로운 소설을 찾아서, 미셸 뷔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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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소식 



파울 첼란 




이제는 아무도 밟지 않는, 

에둘러 가는 백리향(百里香) 양탄자 

종소리벌판을, 가로 

질러 놓인 빈 행(行).

바람이 짓부수어 놓은 곳으로는 아무 것도 실려 오지 않는다. 


다시금 흩어진 

말들과의 만남, 가령 

낙석(落石), 딱딱한 풀들, 시간. 



- 전영애 옮김, <<죽음의 푸가>>(민음사) 중에서 





이렇게 다시 시집을 읽을 줄 알았다면, 그 많던 시집들을 버리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외국 시를 읽게 될 줄 알았다면, 지금 나오지 않는 번역 시집을 사두고 버리지 말 걸, 이렇게 외국 시의 아름다움을 즐기게 될 줄 알았다면 외국어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해 둘 것을... 


이번 주 내내 파울 첼란의 시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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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독 행성




 박정대

     

 


 콜 미, 가수는 밤 새 노래를 하고 나는 로즈제라늄 곁에 누워 있네

 여기는 12월의 입구를 떠도는 고독 행성


 방울토마토처럼 입 안 가득 깨물고 싶은 밤


 그 밤의 옆구리로 밤새도록 눈발들은 허공의 밀사처럼 소리 없이 내리는데, 눈발들이 내려와 고독고독 쌓이는 이곳은 하얀 침묵의 지붕을 모자처럼 쓰고 서 있는 고독 행성


 콜 미, 밤 새 가수는 저음으로 노래를 부르고 지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쌓이는 노래들


 고독 행성에 호롱불이 켜지는 점등의 시간이 오면 생의 비등점에선 주전자의 물이 끓어오르고 톱밥 난로의 내면을 가진 천사들은 따스하게 데워진 생의 안쪽에서 영혼의 국경선을 생각하네


 콜 미, 가수의 목소리도 가랑잎처럼 바람에 뒤척이는데 창문 밖 국경수비대들도 하얀 눈발을 뒤집어쓰고 곤하게 잠든 세계의 지붕 밑


 천사들의 숨결에 로즈제라늄만 사붓이 흔들리는 시간


 여기는 바람이 불 때마다 저 홀로 펄럭이며 아득하게 깊어가는 한 잎의 고독 행성





'고독고독'하다는 게 무얼까. 나도 참 '고독고독'한데, '고독고독'하다는 게 뭘까. 뒤늦게 박정대의 시집, '사랑과 열벙의 화학적 근원'을 찾으니, 절판되었다. 도서관에서 복사라도 할까. 


고독고독한 바람이 불고 고독고독한 가수가 '텔미'를 부르는 행성, 고독고독하게 밤 새 눈이 내리고, 아득하게 깊은 사랑에 빠지고 싶지만, 고독고독하기만 한 바람을 가진 고독고독한 이의 행성, 고독 행성. 


따스한 봄바람 부는 대도시 서울은 나이가 들수록 고독고독해지만 한다. 실은 그런 시대이고, 그런 행성인 게다. 


고독고독고독....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 박정대, 웅진, 2007 




고독고독한 일상을 견디기 위한 짧은 노래 하나. 


Sarabande - Ludovico Einaudi by Angèle Dubeau & La Piet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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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와 영토(La Carte Et Le Territoire)

미셸 우엘벡(지음), 장소미(옮김), 문학동네 





매우 선명하다. 이 소설을 읽은 지 네다섯달이 지났지만, 소설 속의 인물들도 선명하고 사건도, 내용도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놀란다. 소설을 읽으면서, 현대미술에 대해 이렇게 박식할 수 있다니, 감탄을 했다. 소설을 쓸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하며 책장을 넘겼지만, 문장, 인물, 사건의 선명함을 너머 어떤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오진 않았다. 도리어 씁쓸하기만 할 뿐. 



친구들도 이미 모두 죽고 어떤 의미로는 이미 과거에 속하게 된, 실질적으로 삶이 끝나버린 노인의 감정을, 형제나 친구처럼, 곧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리라는 약속처럼 죽음을 대하는 노인의 음산하고 담담한 감정을 프란츠 리스트가 말년에 작곡한 실내악 소품들보다 더 잘 표현한 음악은 아마 없으리라. <수호천사에게 올리는 기도>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자슬랭은 젊은 시절을, 학생 시절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 351쪽 



지금 독자는 그 자신과 어떤 연관도 없는 이야기를 읽는다. 고작 책값, 조금의 시간, 그리고 감정의 동요나 사소한 몰입 정도만 가지고. 그런데 미셸 우엘벡도 그렇게 소설을 적는 듯하다. 너무 차갑다고 할까. 마치 얼음처럼. 아무런 가치 평가도 없다. 심지어 주장마저도 없다. 제드나 우엘벡, 혹은 자슬랭의 입을 통해 나오는 이야기, 그 속에서 작가는 어떤 주장이나 가치판단을 내리는 듯 싶지만, 이마저도 차갑기만 하여 호소력을 지닌 주장이라기 보다는 무미건조한 기사처럼 읽힌다. 


결국 건조하고 차가운 대기와도 같은 문장과 서술로 인해 소설은 선명하고 직선들로만 연결되는 구조물을 만들어내지만, 그 그림자는 없다. 모든 등장인물은 정해진 방향으로 움직이거나 이미 움직인 후라, 그 어떤 후회나 반성도 하지 않는 듯 보인다. 최대한 감정이 억제된 인물들로만, 아니 미셸 우엘벡은 의도적으로 즉물적인 서술을 하고 있다. 그리고 무의미한 스틸사진들이 병렬적으로 구성되다가 하나로 합쳐지지만, 그건 제드의 죽음이다. 그것도 담담하게 서술될 뿐이다. 


어떤 이는 현대 미술의 뒷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평할 지 모르겠으나, 과연 그럴까.  '노인의 음산하고 담담한 감정', 아마 이 소설 <<지도와 영토>>를 지배하는 감정일 게다. 



  



그리고 그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는 순간, 펑펑 울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 * 


서평을 다 적고 다시 업데이트를 하다 보니, 문득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떠오른다. 묘한 동질감이 있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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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저자라면... '복종'이란 책을 썼던 저자 아닌가요... 이슬람 문화를 무조건 나쁜 것으로 폄하해서 소설에 기술해서 논란이 되었던...

    • 말 많은 작가예요. "우엘벡이 누구인가? 1958년생, 보수적 정치성향에 극단주의자, 쓰는 글마다 센세이션을 몰고 다니는 도발적 싸움꾼. 프랑스 태생이지만 테러위협 때문에 현재 아일랜드에 거주 중."(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139) 시인 이장욱은 이렇게 적고 있네요. ~ 하지만 논란만큼 매우 중요한 소설가이기도 합니다. ~


웹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필립 솔레르스(Philippe Sollers)사드(Marquis de Sade)에 대해 인터뷰하는 영상을 보았다. 영상 속에서 한국에서 사드의 책을 번역 출판하고자 하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고, 번번히 판매금지되었고, 최근에서야 겨우 '청소년 유해 도서' 형태로 구입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것도 출판사가 항소한 끝에 제한적 판매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직 사드의 책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필립 솔레르스의 흥미로운 이야기는 사드 문학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었다. 


* Marquis de Sade에 대한 영문위키 : https://en.wikipedia.org/wiki/Marquis_de_Sade 



“사드의 사랑 (Un amour de Sade)”, 필립 솔레르스와의 인터뷰 from ParisLike on Vimeo.




아래는 위 영상에서 나온 사드의 유언을 옮긴 것이다. 



사드의 유언 

샤롱통 성 모리스 병원에서 온전한 정시관 건강 양호한 상태에서 남김. 

1806년 1월 30일 

D.A.F. 사드 


"나는 금한다, 내 육체가 그 어어떠한 구실로도 부검되는 것을. 

내가 숨을 거둔 후엔 방에서 시신을 옮기지 않은 채

그리고 가져온 나무 관관에 48시간 동안 그대로 안치해 두었다가, 

앞서 언급한 48시간이 지난 뒤에 못을 박아 관을 폐쇄할 것을 간절히 요망한다. 

이 시간 동안, 베르사유에에 소재한 에갈리떼 길(평등 길) 

101번지에 사는 목재상 레노망씨에게 특사를 보내어, 

마차를 가지고 그가 몸소 와 줄 것을 부탁해,

그의 호송 하에 시산을 에페르뇽 근처, 

망세의 자치구 말메종에 있는 내 소유의 숲으로 데려가고, 

그 곳에 도착하면 오래된 성 쪽에서 난 길을 따라 들어가, 

숲을 가르는 넓은 길의 오른편에 자리한 덤불 숲에 

어떤 형태의 장례식 없이 안장해주길 바란다. 

덤불 속에 묏자리를 정하면 굿일은 말메종의 농부가 해주며 노르망 씨가 이를 감독하고

내가 무덤을 묻힐 때까지 그가 자리를 지켜주길 바란다. 

만일 그가 원한다면, 형식적 애도의 관행이 아닌 나에 대한 마지막 애정의 증거를 보이고자 하는 

내 친척이나 친구들과 동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무덤이 채워지면, 그 위에 도토리를 뿌려, 후에 그 자리 위로 다시 잡목이 우거지도록 하여, 

내 무덤의 흔적이 지상으로부터 사라지게 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나에 대한 기억이 모든 이들의 마음에서 지워질 것이라고 스스로 자부할 수 있도록." 

(번역: 박해준Park Haijun)



사드에 대해선 몇 권의 책이 나와있다. 읽지 않았기에 뭐라 평할 순 없고, 조만간 한 권 읽어볼 생각이다. 필립 솔레스의 저 책은 한국에 번역 출판될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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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조너선 사프란 포어(지음), 송은주(옮김), 민음사 




결국은 울고 말았다. 소설 끄트머리에 가서, 오스카와 엄마가 아빠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비극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지금 당장이라도, TV 방송 뉴스 채널로 가보라. 모든 뉴스들이 현대판 비극들로 도배되어 있다. 뉴스 앵커나 기자들은 자신들과는 무관한 일인양, 무미건조한 어조와 '이건 진짜야'라는 눈빛으로 또박또박 분명한 목소리로 말한다. 


하지만 오스카는 아빠를 찾아나선다.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아빠를. 



첫 번째 메시지. 화요일 오전 8시 52분. 누구 있니? 여보세요? 아빠다. 있으면 받으렴. 방금 사무실에도 전화했는데 아무도 받지 않는구나. 잘 듣거라, 일이 좀 생겼어. 난 괜찮다. 꼼짝 말고 소방수가 올 때까지 기다리래. 아무 일 없을 거다. 상황을 좀 더 알게 되면 다시 전화하마. 그냥 아빠는 괜찮으니 걱정 말라고 전화했어. 곧 다시 걸게. 


아빠로부터 네 개의 메시지가 더 와 있었다. 9시 12분, 9시 31분, 9시 46분, 10시 4분에. 나는 그것들을 듣고 또 들었다. 무엇을 해야할 지, 아니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어떤 기분이 들어야 할지 미처 알 겨를도 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10시 22분 27초였다. 

발신자 번호를 봤다. 아빠였다. 

- 35쪽 ~ 36쪽



소설은 어수선하고 수다스럽고 유쾌하기까지 하다. 아홉살 꼬마 오스카에겐 모든 것들이 호기심의 대상이자, 그리움의 대상이다. 사진들이 나오고 문장들마저 조각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소설 작법으로 비극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하고 빙빙 둘러가는 과정을 반영하다. 그래서 독자들은 빙빙 둘러, 오스카를 따라가며 9월 11일을 아주 천천히 떠올리며, 그 사건 한 복판에 있었던 어느 가족의 슬픈 이야기를 소설 결말부에 가서야 비로소 마주한다. 


소설에 대한 형식적 파괴, 또는 실험적인 변화가 작품 속 깊숙히 들어가 어우러져 있다. 그래서 스토리와 형식은 하나의 형태를 지니며, 이 소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 원하지 않던 비극과 그 비극을 극복하기 위한 가족의 노력을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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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저하는 근본주의자 The Reluctant Fundamentalist 

모신 하미드(지음), 왕은철(옮김), 민음사 




대화체로 이루어진 소설은 종종 군더더기가 있기 마련인데, 이 소설은 깔끔하다. 이야기하는 사람만 있고 듣는 이는 이야기하는 사람의 대화 속에 등장할 뿐이다. 정치적 논란을 불러올 이야기를 매끄럽게 소화시켰다는 점에서 격찬을 받을 만하다. 


하지만 아직 한국은 전 세계 테러 분위기에서 한 발 비켜서 있다. 몇 번의 피해가 있었지만, 이는 전도 지상주의와 경쟁적이고 배타적 신앙심으로 무장한 이들로 인한 것으로 인해, 이슬람 문명에 대해 우리들의 반감은 적다. 


(특정 종교의 경우에는 이슬람 뿐만 아니라 모든 타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므로, 이 종교의 문제라고 보는 편이... ) 


이 소설은 파키스탄인의 대화로만 구성된다. 미국과 파키스탄을 오가며 서로를 이야기하는 목소리 속에 고뇌가 묻어나오지만, 동시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느낌이랄까. 말을 하지만 행동은 없다. 어쩌면 소설의 형식 속에서 두 문명 사이에 끼인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 것일까. 사랑도 없고 문학도 없고 떠돌 뿐이다. 모든 일들은 그저 지나간 일들이고 회상될 뿐이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 아무도 모른다. 


과격한 이슬람 무장단체의 테러가 일상화되어 버린 미국와 북유럽에서 이 소설이 보여주었던 충격은 상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역자인 왕은철 교수는 '나의 번역문이 하미드의 세련된 산문을 우리말로 제대로 살려 냈는지 우려되긴 하지만, 그래도 불편한 주제를 흥미롭게 풀어낸 용감한 소설을 소개할 수 있어서 기쁘다'고 역자 후기를 마무리 짓는다. 세련된 산문이라, ... 아마 이 소설에 쏟아진 무수한 찬사는 뛰어난 문장도 한 몫 했을 텐데, 이를 느끼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듯 싶다. 대화체라서 더욱 그럴 듯 싶기도 하고, ... 영어로도 한 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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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페리온의 노래 

J. Ch. F. 횔덜린(지음), 송용구(옮김), 고려대 출판부 




"우리는 시를 향해 나아가고, 삶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리고 삶이란, 제가 확신하건대 시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시는 낯설지 않으며, 앞으로 우리가 보겠지만 구석에 숨어있습니다. 시는 어느 순간에 우리에게 튀어나올 것입니다." 

- 보르헤스, <시라는 수수께기> 중에서(<<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 박거용 옮김, 르네상스, 11쪽) 



시는 아무래도 원문 그대로 읽어야 제 맛이다. 번역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동일한 단어라고 언어마다 그 어감이나 뉘앙스, 풍기는 멋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글로 옮겨서 밋밋한 시라도 원문으로 읽으면 풍성한 느낌을 주는 시일 수 있다. 몇 해 동안 영시를 읽으면서 배운 바라고 할까. 


횔덜린에 대해선 익히 들어왔으나, 그의 시를 제대로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백 여년 전 독일 튀빙겐, 헤겔과 셀링이 있었고, 루소의 사상과 나폴레옹의 혁명 공화정이 유럽을 지배하던 시절, 신고전주의자들과 낭만주의자들이 뒤섞여, 서서히 싹트던 민족주의적 이상을 노래하던 그 때, 그 당시 가장 위대한 시인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모든 이들이 프리드리히 횔덜린이라고 말할 것임에 분명하다. 


만약 내가 독일인이라면, 그의 <독일인의 노래Gesang des Deutschen>은 놀랍도록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호소력 짙은 시가 될 것이다. 지금도 그러한데, 그 당시에는 어땠으랴. 하지만 한글로 읽는 이 시집은 횔덜린을 앍고 그 시절의 분위기, 그리고 강렬한 이상과 염원으로, 그리스 고전주의적 미학을 성취하고자 할 때의 시학이 어떠한가를 알 수 있겠지만, 시 특유의 감미로움이나 위안, 서정적인 표현이나 비유를 즐기기에는 너무 관념적이라고 할까. 


그래도 시 읽기란, 잠시 내 몸과 마음을 놓고 쉬어갈 수 있는 휴식일 것이다. 


이 시집만 읽는 건 재미있을 듯하지 않고 그 당시 독일의 분위기라든가, 독일 문학 사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할 때 더 흥미로울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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