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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문학 +84



영어공부를 위해 방송통신대 영어영문학과를 편입했다. 그러나 영어 공부 대신 나는 영미시의 아름다움과 셰익스피어를 알게 되었다. 문학 전공자로서, 시 창작까지 공부했지만, 영미시의 아름다움을 중년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는 건, 내가 다닌 학부 과정이 형편없었거나, 내 지적 역량이 떨어졌던 탓일 게다. 


셰익스피어는 매너리즘 후반과 바로크 전반기에 속한다. 근대에서 속하면서도 근대가 시작되던 시기의 혼란스러움이 셰익스피어 극작품 속에 숨겨져 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처럼, 극중 인물들의 운명을 가로지르며 절정을 지나 결말에 이르게 한다. 맥베스는 셰익스피어의 다른 극작품들과 비교해 그 분량은 짧으며, 극적 완성도나 속도감은 최고다. 하나의 사건은 곧장 다른 사건으로 이어지며 인물들의 감정도 마치 폭풍이 치는 해안가의 파도처럼 격정적이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것들이 매너리즘적 속성이라 파악하고 이를 매너리즘 양식 속에서 해석하는 것을 방송통신대 영문학과 졸업 논문 주제로 정했다. 아래는 졸업논문계획서다. 바쁜 프로젝트 중에 겨우 시간을 내어 급하게 적어 제출했다. 회사를 다니면서 방송통신대 다니는 것은, 그냥 졸업했다는 것만으로도 박수 칠만한 일임을 휴학을 밥 먹듯 한 뒤에서야 알게 되었다. 작년에 졸업할 수 있었으나, 결국 하지 못하고 올 1학기에 졸업한다. 얼마 남지 않았으니, 최선을 다해보기로 하자. 


*     *  

<<맥베스>>의 매너리즘적 성격에 대하여



셰익스피어가 활동했던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은 문학과 예술의 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시기였다. 중세가 끝났지만, 중세의 여운이 남아 있었으며(<<맥베스>>에서는 세 명의 마녀들로 표현된다), 동시에 운명의 손(또는 기독교의 질서)을 벗어나 개인의 능력, 이성과 과학을 믿는 시대로 나아가려고 몸부림친다. 그래서 한 손에는 종교를, 한 손에서는 이성을 들고 서로 갈등하면서 혼란스러워 하고 그 사이에서 고통스러워한다. 


셰익스피어는 세르반테스와 함께 매너리즘의 가장 위대한 작가들 중의 한 명이다. 하지만 매너리즘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모호함은, 양식적인 측면에서의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분석하고 적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한다. 이에 필자는 1)문학에서의 매너리즘 양식의 특성을 먼저 정의하며, 2)세익스피어가 살았던 시대의 영국과 유럽 상황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 난 다음, 3)세익스피어의 <<맥베스>>가 가지는 매너리즘적 특성을 분석하고자 한다. 


매너리즘은 일반적으로 르네상스 고전주의와 바로크 사이의 반동적 양식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속하는 이들로는 말년의 미켈란젤로, 세르반테스, 마키아벨리, 엘 그레코 등이 있다. 이들은 다가오는 미래-이성의 시대인 근대-를 예감하면서도 동시에 종교적 질서에 대한 믿음(혹은 의심) 속에서 끊임없이 번민하고 갈등하는 세계를 공유한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군주론>>를 통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비도덕적 수단까지도 용인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러하다고 말하면서 노골적인 폭로주의적 태도를 취한다. 즉 잘못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전도된 이상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준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몽상(꿈)에 빠진 인물을 통해 시대착오적 현실-근대이지만 중세인-을 비아냥거리며 비판하고 절망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도 현실의 세계가 비현실적 요소(꿈, 유령, 마녀 등)로 영향 받고 흔들리며 결말에 이르게 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비극적 현실 속에 숨겨진 인간 군상의 진실을 보며, 그 앞에서 신의 세계에서 벗어난 인간의 개별성에 주목하게 된다. 매너리즘은 신의 세계를 떠나 인간의 세계로 가는 도정 상에 위치하면서 그 길 위에서 흔들리는 시대상을 대변하는 양식인 셈이다. 


필자는 이러한 매너리즘적 세계가 어떻게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구성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구성이 그 당시 영국과 유럽의 상황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가를 분석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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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hur Golden의 <<Memoirs of a Geisha>>(Vintage)를 읽다가 옮겨적는다. 회상으로 넘어가는 부분이 인상적이다(영어로 읽어서 그럴 지도 모르겠다). 



Long before midnight, Pumpkin and the two elderly maids were sound asleep on their futons only a meter or so away on the wood floor of the entrance hall; but I had to go on kneeling there, struggling to stay awake until sometimes as late as two o'clock in the morning. Granny's room was nearby, and sh slept with her light on and her door opened a crack. The bar of light that fell across my empty futon made me think of a day, not long before Satsu and I were taken away from our village, when I'd peered into the back room of our house to see my mother asleep there. My father had draped fishing nets across the paper screens to darken the room, but it looked so gloomy I decided to open one of the windows; and when I did, a strip of bright sunlight fell across my mother's futon and showed her hand so pale and bony. To see the yellow light streaming from Granny's room onto my futon......I had to wonder if my mother was still alive. We were so much alike, I felt sure I would have known if she'd died; but of course. I'd had no sign one way or the other. 

- p.76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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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The Sense of An Ending 

줄리언 반스(지음), 최세희(옮김), 다산책방



나는 우리 모두가 이러저러하게 상처받게 마련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80쪽) 



살아가면서 과거를 끄집어내는 일이 얼마나 될까. 삶은 고통스러워지고, 사랑은 이미 떠났으며, 매일매일 반복되는 무의미한 일상 속에서 이 세상은 한때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빛깔을 잃어버렸음을. 감미로운 허위만이 우리 곁에 남아 우리 겉을 향기롭게 감싸며 근사하게 보이게 만들지만, 그것은 언젠간 밝혀질 시한부 비밀같은 것. 그럴 때 그 과거는, 어쩌면 우리의 현재를 만들어낸 고통의 근원일까, 아니면 도망가고 싶은 이 세상 밖 어떤 곳일까. 


"토니, 이제 당신은 혼자야."라고 이혼한 아내 마거릿은 전화 속에서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아내의 목소리가 전화 속에서 사라져 버리지만, 토니는 별 반응이 없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 자신이나 아내 마거릿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마치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 듯, 자신의 인생도 그런 궤적을 그리며 평범하며, 이혼했으나 세상에서 가장 잘 자신을 알고 있는 마거릿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 믿는다, 혹은 착각한다, '우리 부부'라는 단어 속에서.  


늙어버린 토니 앞에 갑자기 등장한 과거는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다. 그저 과거일 뿐이며, 토니 밖에서, 사악한 질투심에 무너졌던 토니의 영향력 아래에서 어떤 우연이 만들어졌을 뿐, 토니는 토니이고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마치 다른 우주에 존재하는, 서로 만날 수 없는 행성들처럼. 


인간은 생의 종말을 향해 간다. 아니다, 생 자체가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 그 생에서 가능한 모든 변화의 닫힘을 향해, 우리는 기나긴 휴지기를 부여받게 된다. 질문을 던질 시간적 여유를. 그 밖에 내가 잘못한 것은 무엇이었나? (255쪽) 


과거 속에서 젊은 베로니카는 토니를 버렸고, 에이드리언은 그의 친구 토니를 버린 베로니카와 사랑을 나눈다. 그래서 뭘? 에이드리언은 질투심으로 눈이 먼 토니의 사악한 언어 앞에서 무너졌을까. 아니면 ... 


1부는 젊은 토니를, 2부는 늙은 토니가 화자로 나온다. 그리고 2부는 베로니카의 어머니 사라 포드 부인의 유언장과 자살한 에이드리언의 일기가 실마리가 되어, 토니의 기억을 새로 만들며, 인생의, 사소하지만 비극적인 우연에 대해 이야기한다.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이야기는 쉴새 없이 우리의 마음을 때리지만, 결말을 짐작하긴 쉽지 않다.  


1부의 토니와 2부의 토니는 서로 경쟁하며 결말을 향해간다. 결국 과거는 편집되고 윤색되고 변경된다. 과거는 현재에서만 해석 가능한 어떤 이야기일 뿐, 과거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존재한다면 그건 아무 의미도 없다. 서랍에 깊숙이 숨겨져 있는 어둠 속의 사진과 같은 것. 


의미는 해석되지 않는다. 이 소설은 갑자기 등장한 과거의 숨겨진 이야기를 끝에 가서 드러내지만, 그리고 그 이야기를 향해 모든 것들이 구성되어 있지만, 에이드리언의 자살을 설명하지 못한다. 실은 에이드리언의 자살이 도리어 살아남은 토니의 이기적인 평범함을 설명하게 되는 기묘한 이야기 구조는 도리어 악의적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지독히 냉소적이다. 


우리는 타인에게 관심없는 토니들이고 늘 혼자였고 앞으로도 혼자일 토니다. 사랑마저도 자기를 합리화해야 하는 것이고 그 사랑을 잃어버렸을 때조차 자신의 문제가 아닌 그/그녀의 문제로 환원시킨다. 이래저래 상처 받기 마련이라고 여기지만, 상처마저 자신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온 것이라 믿는다, 이러저러하게. 


마거릿마저 토니를 향해 '당신은 혼자야'라고 말했을 때,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늙은 베로니카가 '아직도 전혀 감을 못 잡는구나, 그렇지? 넌 늘 그랬어,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그러니 그냥 포기하고 살지그래'라며 토니를 질책했을 때조차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소설이 끝날 때까지. 


거기엔 축적이 있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 혼란이 있다. 거래한 혼란이 있다.(255쪽) 


소설은 이 마지막 문장으로 끝나지만, 책임은 혼란 속에서 사라져버리고 사람들은 저 마다의 상처를 가진 채 홀로 서 있을 것임을 예감하게 한다. 시간은 한 개인의 삶에 무신경하고 나는 사랑하는 너에게 관심이 있으나, 끝내 너를 알지 못할 것이다. 너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신비이니, 나는 너를 알려고 하지 않을 것이며 알려고 하는 모든 시도는 실패로 끝날 것이다. 에이드리언만이 과거 속에서 현재를 예감하고 미래에 절망했을 뿐이다. 토니의 내일에 대해 상상하지 말자. 그는 적당히 비관적으로 변할 테지만, 그렇다고 그의 삶이 급격한 변화를 겪거나 아픔을 겪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이 점에선 베로니카의 견해가 옳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고 혼자였던 어떤 이가 갑자기 우리가 되지 못한다. '우리 부부'라는 단어만큼 어색한 표현도 없을 텐데, 토니는 ... 그래서 나는 참 악의적이다라고 적는 것이다. 


할아버지 토니는 20대 토니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베로니카를 향해서도, 에이드리언을 향해서도, 마거릿을 향해서도. 결국 혼자인 토니는, 혼자 거리를 걸으면서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이었나' 스스로에게 묻겠지만, 금방 잊고 말 것이다. 





* 2017년 영화로도 만들어질 예정이다. 

The Sense of an Ending : http://www.imdb.com/title/tt4827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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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적 문학이론의 전개 

(개정판: 맑스주의와 형식, 원제: Marxism and Form)

프레드릭 제임슨 Fredric Jameson (지음),  여홍상, 김영희(옮김), 창작과비평사 



책 뒷 장을 펼쳐보니, 1997년 5쇄라고 적혀있다. 지금 읽어도 쉽지 않은 이 책을 나는 1997년이나 98년 쯤 구입했을 것이다. 아마 인적이 뜸했던 그 대학 도서관 서가에서 꺼내 읽은 아래 문장으로. 


이처럼 벤야민(Walter Benjamin)의 평론들의 한 장마다에서 풍겨나오는 우울 - 사사로운 의기소침, 직업상의 낙담, 국외자의 실의, 정치적 역사적 악몽 앞에서 느끼는 비감 등 - 은 적합한 대상, 즉 종교적 명상에서처럼 거기에서 정신이 자신을 끝까지 응시할 수 있고 그 속에서 심미적인 것에 불과할지라도 순간적인 구원을 발견할 수 있는 어떤 표상이나 이미지를 찾아 과거를 더듬는다. 그리고 발견해낸다 - 30년 전쟁의 독일에서, '19세기의 수도' 빠리에서. 왜냐면 바로끄와 근대의 이 둘 모두가 그 본질상 우의적(allegorical)이어서 우의이론가의 사고과정에 걸맞기 때문인데, 자신을 형상화해줄 외부의 대상을 찾는 비구상화된 의도인 이 사고과정을 그 자체가 이미 '언어 이전'의 우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 73쪽 ~ 74쪽 


그 때, 1990년 후반 문학전공자들의 일부는 발터 벤야민에 빠져 있었다. 아마도 이십 대 후반 이 책에서 유일하게 읽을 수 있었던 챕터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십년 가까이 지난 후인 올 8월부터 읽기 시작해 겨우 다 읽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벤야민은 죽은 채로 우리 옆에 앉아 속삭이고, 나에게 이제 독서란 1시간 이상 지속되기 어려운 일상이 되었고, 회사에서의 시간 이외에 나머지 시간들은 다 조각나 있었다. 길고 조용하게 이어지는 양질의 시간이 나에게 구하기 어려운 일이 되었고, 이 책의 독서 경험은, 최근 내가 읽는 다른 책처럼 조각나 있고 형편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대한 뒤늦은 독서는, 나에게 깊은 후회와 함께 이제서야 읽을 수 있다는 안도감을 갖게 하였다. 종종 어떤 책들은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마치 프루스트의 소설들처럼.  이 책은 나에게 헤겔-마르크스의 이론이 어떻게 문학 이론에 영향을 끼쳤는가를, 다소 얕게 알고 있었던 에른스트 블로흐와 루카치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었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아도르노부터 시작해 마르크스주의적 해석학의 몇 가지 형태라는 2장에선 발터 벤야민, 마르쿠제와 쉴러, 에른스트 블로흐를 다룬 후, 게오르그 루카치, 사르트르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시 말하자면 저자는 헤겔과 마르크스에 영향을 받은, 20세기 전반기 중요하게 여기지는 문예이론가들의 대표적인 저서들을 중심으로 비판적 서술을 전개한 후, 마지막 챕터에서 '변증법적 비평'에 대해 논의하며 책을 끝낸다. 종종 프레드릭 제임슨을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로 오해하기도 하지만, 헤겔-마르크스의 영향 아래서에서  현대 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과 비판을 전개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제임슨의 태도가 잘 드러나는 책들 중의 한 권이며, 앞으로 그가 나아가게 될 어떤 이론적 지향점을 이해하게 해준다. 그 현대문화를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단어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 이 책의 모든 부분들이 중요했지만, 아마 가장 중요한 부분은 마지막 챕터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술작품에 대한 그의 시각을 확실하게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아래 문장처럼. (프레드릭 제임슨을 읽다 보면, 종종 아도르노에 대한 편애같은 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가 연구한 싸르트르가 아니라... )


이제 우리는 상품사회에서 예술작품이 지니는 심원한 소명이 무엇인지 깨닫기 시작한다. 그것은 상품이 되지 않는 것이며 소비되지 않는 것이며 상품적 의미에서 불쾌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원리를 가장 충분히 전개하여 적용한 아도르노의 음악 분석으로 되돌아가도 무방할 터인데, 이 분석은 실제로 그의 여타의 비교적 헤겔적인 실천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저서 가운데 가장 진실로 마르크스주의적인 부분을 이룬다. - 383쪽 


이 책 <<변증법적 문학 이론의 전개>>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책으로 일찍 번역되어 국내 소개되었지만, 제대로 읽히지 못한 책들 중의 한 권이다. 문학이론 서적들이 드물던 시절, 나 또한 이 책에 대한 추천사를 읽지도, 듣지도 못했으니. 더구나 1장 아도르노에 대해 읽기 위해선 현대 음악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하고 그러면서 근현대의 여러 학설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어야 하니, 제대로 읽히지 못했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 일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아도르노의 저서들 중 <<신음악의 철학>>을 선택하여 아도로노의 고급문화주의자적 면모를 드러내면서 동시에서 문화산업에 대한 부정과 함께 그 속에서 작품이 상품이 되지 않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은 이제 열정의 모방이 아니라 음악적 매체를 통하여 무의식에서 나온 신체적 충동들을 위장되지 않은 상태로 기록하는 것이며, 형식의 금기들이란 그러한 충동들을 검열하려 하고 그것들을 합리화하여 이미지로 전환시키려 하는 것이므로, 이런 형식의 금기들에 공격을 가하는 충격들 및 정신적 외상(trauma)들을 위장 없이 기록하는 것이다. 이처럼 쇤베르크의 형식적인 혁신들은 표현된 사물의 변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후자의 새로운 리얼리티가 의식으로 뚫고 나오도록 도와주었다. 최초의 무조 작품들은 정신분석학의 꿈의 기록(transcript)이라는 의미에서 기록이다. ...... 그러나 이러한 표현상 혁명의 상처들은 그림과 음악 모두에서 원본능(id)의 밀사로서 예술가의 의식적인 의지에 저항하는 얼룩과 반점이며, 이들은 표면을 훼손시키고 옛날 이야기의 핏자욱처럼 추후의 의식적인 수정으로 씻어낼 수 없는 것이다. 참된 수난은 그것이 더 이상 예술작품의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표시로서 이것들을 작품 속에 남겨놓았다. 

- 아도르노, <<신음악의 철학 Philosophie der neuen Musik>> 42~43쪽 (40쪽에서 재인용)


문학(이론) 전공자에게 추천하지만, 만만치 않는 책이다. 이 책을 제대로 읽으려면 헤겔의 <<법철학>> 서문이나 <<정신현상학>>, 또는 마르크스의 <<독일이데올로기>> 정도는 읽거나 개론 수준의 이해를 가져야 할 터이고 소개된 여러 문학이론가들에 대해서도 기본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긴 그래도 쉽지 않을 것인데, 끊임없이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아나톨 프랑스도 나오고 페르난도 페소아도 등장한다. 작가 이름 뿐이긴 하지만 말이다. 가끔 이런 문장 - '무조성이란 말하자면 음악의 유명론(唯名論) 같은 것이다' - 이 등장할 때면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책은 흥미진진하고 많은 것들을 새로 읽고 되새길 수 있을 것이다. 


아놀드 쇤베르크, <<구레의 노래>>



기억해둘 만한 인용문들을 옮긴다. 시간이 나면 다시 읽어볼만한 책인데, 그럴 수 있을 지 모르겠구나. 


"따라서 역사가 우리로부터 시간적으로 점차 멀어지거나 우리가 사고 속에서 역사로부터 거리를 두게 되기만 하면 역사는 더이상 내면화될 수 없고 이해가능성을 상실하게 된다. 역사의 이해가능성이란 애당초 잠정적인 내면성에 부속된 단순한 환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 끌로드 레비-스트로스, <<슬픈 열대>> 중에서 (265쪽 재인용) 


"역사란 내가 깨어나려 애쓰는 악몽이다."

- 제임스 조이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 중에서 (302쪽 재인용) 


"문체와 관계를 맺는 것은 역사보다는 생물학이나 과거의 차원이다. 문체는 작가의 '대상'이며 영광이자 감옥이며 고독이다... ... 그 비밀은 작가의 육체에 파묻힌 기억이다. 문체의 암시적인 힘은 말해지지 않은 것이 일종의 언어적 간격으로 남아 있는 회화에서처럼 속도의 현상이 아니라 밀도의 현상이다. 왜냐하면 문체의 비유 속에 거칠거나 부드럽게 조합되어 문체 밑에서 견고하고 깊이있게 지속되는 것은 언어와는 전적으로 다른 한 현실의 단편들이기 때문이다."

- 롤랑 바르트, <<Le Degre zero de l'ecriture>>, 58~59쪽(331쪽 재인용)


"유력한 개개인이 그들의 정신과 성격의 특수한 자질로 인해 사태의 개별적 양상과 일부 특정한 결과를 변화시킬 수는 있지만 사태의 전반적인 추세를 바꿀 수는 없고, 이 추세는 다른 힘들에 의해 결정된다."

- 쁠레하노프, <<역사 속에서의 개인의 역할 The Role of the Individual in History>> (352쪽 재인용)


"세계가 어떻게 되어야 한다고 설교하는 데 대해 한 마디 하자. 이 문제에 대해 철학은 항상 지각생이다. 세계에 대한 사고로서 철학은 현실이 그 전개과정을 다 마친 이후에야 나타난다. 개념이 가르치는 것은 역사가 이미 필연적인 것으로 보여준 것이다. 현실이 성숙했을 때에야 이상은 현실적인 것과 대치되는 것으로 등장한다. 이때 이상은 이 세계의 본질을 포괄하는 지적 영역의 형태 속에서 이 세계를 스스로 재구성한다. 철학이 그 백발을 은빛으로 칠할 때 삶의 형식은 이미 노쇠했으며 이 은빛으로 칠한 백발은 삶을 회춘시킬 수 없으며 단지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날기 시작한다."

- 헤겔, <<법철학>> 서문에서. (356쪽 재인용) 


"변증법이 헤겔의 손에서 신비화되었다 하더라도 그가 변증법의 일반적 작용형태를 포괄적, 의식적으로 제시한 최초의 사람임에 변함이 없다. 그에게 있어서는 변증법이 거꾸로 서 있다. 신비화의 껍질 내부에서 합리적 핵을 찾아내려면 이를 다시 바로 세워야 한다."

- 칼 마르크스, <<자본론>> 제 2판 서문에서 (361쪽 재인용)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 193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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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고독했던 때는 없네 


- 고트프리트 벤 (Gottfried Benn, 1886 ~ 1956) 



8월처럼 고독했던 때는 없네

성숙의 계절 -, 땅에는

붉은, 황금빛 신열(身熱)

그런데 그대 정원의 즐거움은 어디에 있는가? 


맑은 호수, 부드러운 하늘,

깨끗한 밭들은 조용히 빛나는데

그대 군림하는 왕국의 개선(凱旋)은,

그리고 그 개선의 자국은 어디에 있는가?


모든 것이 행복을 통해 드러나는 곳,

술 냄새 속, 물건 소리 속에

시선을 나누고, 반지를 나누는 곳에서

그대는 행복의 적(敵)인 정신에 몸 두고 있네 






지독했던 8월이 가고, 여기저기 긁힌 마음의 가장자리는 찢어진 헝겊으로 잘 덮어두곤 가을 놀이를 시작했다. 하지만 갑작스런 변화는, 몸에 무리를 주기 마련. 노트 정리를 하다가 메모 해 두었던 벤의 시를 읽으며, 문득 고독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게, 고독한 건 아닌가. 


이번 가을 벤의 시집 읽으면서 보내야 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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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 깔랭 - 내 생의 동반자 이야기.

에밀 아자르 지음. 지정숙 옮김.

동문선.

 

 

 

외롭지 않아? 그냥 고백하는 게 어때. 외롭고 쓸쓸하다고. 늘 누군가를 원하고 있다고. 실은 난 뱀을 키우고 있지 않았어. 그건 나야. 나의 다른 모습. 길고 매끈하지만,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내 모습이었어.

 

드레퓌스양을 사랑하고 있지만, 드레퓌스양에겐 말하지 않았어. 난 그녀의 눈빛만 봐도 그녀가 날 사랑하고 있다는 걸 느껴. 그래, 그녀와 난 엘리베이터에서만 이야기를 했을 뿐이지. 한 두 마디. 그 뿐이긴 하지만, 난 알 수 있어. 그리고 창녀로 만나긴 했지만, 우리는 서로에 대해 많은 부분을 공유할 수 있었지.

 

그로 깔랭을 동물원으로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삶이 바뀐 건 아니야. 외롭고 쓸쓸하다는 걸 숨기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을 뿐. 그리고 보면 그로 깔랭을 키우면서 난 날 숨기고 있었던 셈이군. 내 외로움을, 내 사랑을, 내 의도를, 내 진심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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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슬픈 소설이다. 말을 하지 못하는 뱀 - 그로 깔랭을 키우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지만, 실은 뱀이 이 소설의 중심 주제는 아니다. 에밀 아자르가 이야기하고 싶은 바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교감을 나누는 삶이 파리라는 도시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선택하는 곳은 창녀집이다. 그 곳에서 이 주인공은 그가 사랑하는 드레퓌스양과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이 하룻밤 이후 그는 그로 깔랭과 떨어질 수 있게 된다.

 

그 정도로 거대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건 힘든 일일까. 그 정도로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얻지 못하는 것일까. 에밀 아자르, 로맹 가리가 왜 권총 자살로 자신의 인생을 끝내었는지 알 수 있을 것같다. 이 책 가득한 유머는 실은 '나 너무 외롭고 쓸쓸해'의 동어반복이며 주인공이 키우는 그로 깔랭이라는 이름의 뱀 또한 실은 주인공의 숨겨진 '반영물'이다. 즉 '꾸쟁(주인공이름) = 그로 깔랭', '인간 = 뱀'의 등식이 성립한다.

 

유쾌한 유머를 가장하고는 소설은 나에게 결정타를 날리며 끝을 맺는다. 

 

"빠리 같은 커다란 도시 속에서 사람들은 결코 허전함을 느낄 걱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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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도 마찬가지지. 결코 허전함을 느낄 걱정이 없어. 이미 온 몸 가득 허전함 속에 파묻혀 있으니, 허전함을 알기나 하겠어. 로맹 가리... 나도 권총 자살로 마감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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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리뷰를 쓴 지도 10년이 넘었다. 다시 읽으니, 에밀 아자르, 혹은 로맹 가리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그가 사랑했던 진 세버그가 떠오른다. 그의 소설은 유머 속에서도 숨길 수 없는 비극을 담아낸다. 벗어날 수 없는 어떤 비극성을 포착한다. 서울에서도 사람들은 결코 허전함을 느낄 걱정이 없다. 늘 무언가를 해야 하고 쫓김을 당하고 불안해한다. 대도시에서의 일상인 걸까, 아니면 현대인의 운명일까. 그런데 이 책은 다시 나오지 않나? 로맹 가리의 책들이 다시 출판되던데 말이다. 


- 로맹 가리, 혹은 에밀 아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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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은 책상이다

페터 빅셀(지음), 이용숙(옮김), 예담 



뭐라고 해야 하나, 이런 경우를. 채 30분도 되기 전에 다 읽은 이 소설집. 뭔가 생각하기도 전에 금방 끝나버리는 소설. 그리고 누구나 조금의 관심만 있다면 한 번쯤은 생각하게 되는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진 짧은 소설들. 하지만 페터 빅셀은 이 소설들을 썼고,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에피소드라고 하기엔 지금 여기에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주인공들의 또다른 공통점은 대부분 나이가 많은 남자라는 사실이다. 정서적으로 유연한 여성들에 비해 남자들은 실제로 나이가 들어가면서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사회와 소통이 점점 어려워지는 경우가 더 흔하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젊은 작가 빅셀이 고집 세고 편협한 이런 노인들을 더 없이 따뜻하고 이해가 충만한 시선으로 그려냈다는 점이다. 지구가 둥근지 확인하려고 떠난 노인을 날마다 기다리는 작가, 또 요도크 밖에 아무 것도 모르는 할아버지를 애정으로 감싸는 작가의 태도는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세상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려는 작가적 사명감의 표현이다. - 옮긴이의 말 중에서, 101쪽


고집 세고 편협한 이런 노인들을 만난다면 우리들은 과연 어떻게 할까? 따뜻하고 이해가 충만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아니면 고집 세고 편협한 젊은이들을 만난다면? 과연?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사회와의 소통이 어려워진다면, 그건 그/그녀의 문제인가, 사회의 문제인가,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원래부터 그렇게 생겨먹은 문제인가. 


작가적 사명감은 이미 일어난 문제를 감싸 안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의 근원을 파고들어야 하는 건 아닐까? 페터 빅셀의 한계는 여기에 존재한다. 따뜻하고 감성적인 동화적 시선으로 현대의 문제를 바라보고 어물쩡 넘어가려는 것이다. 


다시 묻자. 당신 앞에 어버이연합의 할아버지가 자신의 고집을 내세우면서 싸우려고 든다면? 엄마부대 봉사단의 할머니가 나타나 편협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논리로 세월호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또는 일베에 빠져 당신의 의견에 대해 사사건건 반박하며 과격한 논리로 공격을 일삼는다면? 


이 소설은 이 지점에서 무너져내린다. 아마 많은 이들이 이 소설을 읽고 자신의 잘못, 소외되고 편협한 사고와 언어를 가지게 된 이들에 대해 무정하게 대했다는 것을 후회하고 반성한다면, 그건 잘한 일일까? 


글쎄다. 내가 읽은 이 소설집은 좀 형편없다. 많은 사람들이 읽고 감동했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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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베개

나쓰메 소세키(지음), 오석윤(옮김), 책세상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풀베개>>의 놀랍고 아름다운 시작은, 어쩌면 이 소설의 시작과 끝을 동시에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소설은 독자가 읽게 되는 첫 문장들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어쩌면 '하이쿠 소설'이라는 후대의 평가도 우호적인 것일지도. 



 산길을 올라가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지(理智)에 치우치면 모가 난다. 감정에 말려들면 낙오하게 된다. 고집을 부리면 외로워진다. 아무튼 인간 세상은 살기 어렵다. 

 살기 어려운 것이 심해지면, 살기 쉬운 곳으로 옮기고 싶어진다. 어디로 이사를 해도 살기가 쉽지 않다고 깨달았을 때, 시가 생겨나고 그림이 태어난다. 

 인간 세상을 만든 것은 신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다. 역시 보통 사람이고 이웃끼리 오고 가는 단지 그런 사람이다. 보통 사람이 만든 인간 세상이 살기 어렵다고 해도 옮겨 갈 나라는 없다. 있다고 한다면 사람답지 못한 나라로 갈 수 밖에 없다. 사람답지 못한 나라는 인간 세상보다 더 살기가 어려울 것이다. 

 옮겨 살 수도 없는 세상이 살기가 어렵다면, 살기 어려운 곳을 어느 정도 편하게 만들어서 짧은 생명을, 한 동안만이라도 살기 좋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시인이라는 천직이 생기고, 화가라는 사명이 내려진다. 예술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인간 세상을 느긋하게 만들고, 사람의 마음을 풍성하게 해주는 까닭에 소중하다. 

 살기 어려운 세상에서 살기 어렵게 하는 번뇌를 뽑아내고, 고마운 세계를 직접 묘사해내는 것이 시고 그림이다. 혹은 음악이고 조각이다. 자세히 말한다면 묘사해내지 않아도 좋다. 그저 직접 보기만 하면 거기에서 시도 생기고, 노래도 샘솟는다. 착상을 종이에 옮기지 않아도 보옥이나 금속이 부딪쳐서 나는 소리는 가슴속에 일어난다. 

- 7쪽~ 8쪽



하지만 소세키는 우리를,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나는 소설 속의 '나미 氏'와 같은 이를 그리워하고 있는 지도 모르고, 작중화자처럼 그런 여행을 꿈꾸고 있는 지도 모른다. 나에게 이 소설은 부러움의 대상인 셈이다. 


그래서 소설은 전쟁 중인 현실과 멀리 떨어져, 딴 세상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는, 아주 자주 딴 세상을 꿈꾼다. 그건 유토피아가 아니다. 그저 지금 여기를 벗어나 잠시 쉴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남 몰래 연애도 하고, 사랑도 하고, 경제적 불안이나 세상사의 갈등이나 불협화음에서 벗어나, 어떤 사색의 풍요로움 속에 빠지고 싶은 게다. 


이 소설은, 바로 이 사색의 풍요로움으로 넘쳐나며, 나미 氏의 가느다란 아름다움에 취해 있다. 소세키의 소설들 대부분이 현실 속에서 갈등하며 흔들리는 자아의 심리를 보여준다면, 이 <<풀베개>>는 그 갈등과 흔들림에서 한 발짝 옆으로 벗어나 꿈 속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소설 끝에서 나미 氏의 이혼한 남편이 등장하고 전쟁터로 나가는 규이치를 배웅해주는 장면에서, 주인공 화자가 그림 한 장면을 포착해내는 순간, 결국 예술의 창작은 꿈에서 벗어나 현실의 슬픔 속에서 나온다는 걸 이야기할 땐, 여행의 끝은 언제나 집으로 돌아오는 것임을 비극적으로 깨닫게 된다. 



나미 씨는 우두커니 떠나가는 기차를 보내고 있다. 그녀가 우두커니 서 있는 동안에, 이상하게도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애련이 얼굴 가득히 떠 있다. 

"그거야! 그거야! 그게 나오면 그림이 됩니다."

나는 나미 씨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속삭였다. 내 가슴 속의 화면은, 뜻하지 않았던 바로 이 순간에 이루어졌다. 

- 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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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에서 내던 <<세계의 문학>>이 지난 겨울호로 '발행을 중단'했다, 혹은 폐간했다. 문학 잡지의 사소한 발행 중단이라고 하기엔 <<세계의 문학>>이라는 잡지가 가졌던 위상이나 내가 즐겨보던 잡지엿던 터라,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 내가 대학을 입학하고 난 다음, 처음 샀던 문학잡지이기도 했던 <<세계의 문학>>. 그 해 박일문이 '하루키 패러디'라는 지적을 받으면서 <오늘의 작가상>을 받았고, 나는 <<세계의 문학>>에 실린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읽었다.


 



<<창작과 비평>>이나 <<문학과 사회>>와 달리, 좀 더 문학주의적이라고 할까, 이론주의적이라고 할까. 그 때 내가 받았던 인상은 그랬다. 그동안 많은 여러 문학 잡지들이 발행을 중단했다. <<문학정신>>, <<외국문학>>, <<상상>> 등등. 세상이 변하면 문학도 변하고, 문학잡지도 변해야 한다. 가끔 들리는 공공 도서관에 비치된 문학잡지들을 보며, 누가 저 잡지들을 읽을까 언제나 궁금하다. 결국 학생이나 관계자, 또는 나같은 이들이 읽을테지만. (나 같은 이들이라, ... 적고 보니, 참 쓸쓸하다는 생각이...)  


그래서 마지막 호를 샀다. 산 지 벌써 몇 달이 지났건만, 아직도 읽지 못한 채, 이 글이나 적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들 중의 하나가 바로 소셜 미디어와 사람들 간의 소통 증가다. 사람들은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등과 같은 소셜 미디어같은 것들의 등장과 활성화로 사람들이 자주 대화하고 소통이 늘어났다고 여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반대다. 


우리는 대화하면서 서로를 알아간다. 서로 얼마나 닮았는가를, 서로 얼마나 다른가를. 그러나 소셜미디어의 발달은 서로의 공통 관심사를 향해 갈 뿐, 서로의 다른 점을 부각시키지 않는다. 다른 점들이 부각되는 순간, 우리는 서로를 차단한다. 페이스북 알고리즘은 비슷한 사람들을 서로 끌어당기고 결국 우리는 비슷한 끼리끼리 모여 섬을 이룬다. 


그렇게 문학도, 문학잡지도 섬이 된 것이 아닐까. 한 때 문학은 서로 만나지 못하고 대화할 기회 조차 없었던 이들을 이어주던 다리가 되었다면, 지금은 스스로 고립되어가는 섬이 되고 있다. 


<<세계의 문학>>이 발행을 중단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문학의 존재나 위상이 예전만 못하고 잡지도 그러했기 때문은 아닐까. 이제 문학은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해 가야하는 건 아닐까. 


소설가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을 보면서 그녀의 수상보다 저들은 번역문학도 자신들의 문학 속으로 끌어당기는구나하며 부러웠다. 우리에게는 번역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나 비평 따윈 없다. 그리고 한국의 문학이 그것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가에 대해 돌아보지도 않는다.


제발트의 소설을 읽고 난 다음, 다큐멘터리에 대해 생각했다. 그 스스로 다큐라고 이야기했으니까. 그러다가 진짜 다큐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문학은 타자를 받아들이며 성장해간다. 아니, 예술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무너뜨리고 낯선 것을 받아들이면서 앞으로 나간다. <<세계의 문학>> 마지막 호 편집자 서문에 알레시예비치에 대한 이야기가 실린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세계에 대한 나의 비전, 즉 내 귀가 어떻게 삶을 듣고 또 내 눈이 어떻게 삶을 보는가를 전달하는 데 가장 잘 맞는 장르를 계속 찾아왔다. 이것도 해 보고 저것도 해 본 후 결국 나는 인간의 목소리가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장르를 선택했다. 실제의 사람들은 내 책 속에서 전쟁이나 체르노빌 재난, 그리고 거대 제국의 몰락 등 시대의 중요한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 나라의 역사, 그들 공통의 역사에 대해 구술로써 기록하면서 동시에 그들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말로 옮기고 있다. 오늘날처럼 사람과 세계가 매우 다면적이고 다양해진 상황에서 예술 속 다큐멘트는 점점 흥미로워지는 것에 반해, 그와 같은 예술은 종종 무기력해졌다. 다큐멘트는 그것이 원래의 상태를 포착하고 간직할 때의 리얼리티에 가깝게 우리를 데려다준다. 그 다큐멘트 자료들로 20년간 작업을 하고 그것으로 다섯 권의 책을 쓰고 난 후, 나는 예술이 사람들에 관해 많은 것을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고 선언한다. 

- 영원한 인간을 찾아서 A Search for Eternal Man, 알렉시예비치. 

(http://alexievich.info/indexEN.html)



내가 형식의 문제나 작법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까 늘 고민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알레시예비치는 운이 좋았다고 할 수 밖에. 



나는 전쟁이 아니라 전쟁터의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전쟁의 역사가 아니라 감정의 역사를 쓴다. 나는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역사가다.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시간 속에 살고 구체적인 사건을 겪는 구체적인 사람을 연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영원한 인간을 들여다보아야만 한다. 영원의 떨림을. 사람의 내면에 항상 존재하는 그것을.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박은정 역, 사람이 전쟁보다 귀하다. 중에서 .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이 의미있는 문학인가 판단하기 위해 범주와 장르를 따르는 것은 좋은 문학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즉 그 목소리와 내용으로, 그 영혼과 긴박함으로, 그 진실과 그리고 무엇보다 지혜로서 우리의 세계와 존재에 대한 이해와 경험을 확장하는 글쓰기로써 삶과 죽음에 반응하는 것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필립 구레비치Philip Gourevitch, 논픽션은 노벨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Nonfiction deserves a Nobel, <<Newyorker>> 2014. 10. 9 



<<세계의 문학>> 창간호다. 1976년에 태어난 이들도 이젠 40대인가. 그만큼 세월이 흘렀고 세상이 변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변할까 생각하니, 아찔하기만 하다. 하지만 아직 우리는 호메로스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음을, 플라톤이 저 이데아의 세계를 이야기했던 그 비극적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글이 두서없고 뜬금없다. 문학이라, ... 참 오랜만에 생각해보게 된다.  



출처: http://myungworry.khan.kr/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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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 This Craft of Verse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거용 옮김, 르네상스 








우리는 시를 향해 나아가고, 삶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리고 삶이란, 제가 확신하건대 시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시는 낯설지 않으며, 앞으로 우리가 보겠지만 구석에 숨어 있습니다. 시는 어느 순간에 우리에게 튀어나올 것입니다. (11쪽) 



예술의 세계에서 '그것을 아는 것'과 '그것을 행하는 것'은 종종 전혀 다른 궤도를 돌기도 한다. 시를 쓰는 것과 시를 아는 것, 그림을 그리는 것과 그림을 아는 것, ... ... 이 둘은 서로 연관되어 있지만, 때로 다른 세계를 지칭한다. 그래서 어떤 예술가들은 자신이 위대한 작품을 쓰거나 그리고 있음을 알지 못한 채 죽기도 한다. 현대에 있어서는 아르튀르 랭보나 반 고흐가 대표적인 경우일 것이다. 


우리가 안다고 할 때는 그것을 행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여기지만, 예술의 세계에서는 안다는 것은 그것을 못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문학 전공자인 나에게는 작품을 내 기준으로 선별하기 시작했을 때, 거의 습작을 포기하게 되었다. 이런 사람들은 꽤 많아서, 이들의 공통점은 형편없는 작품이나 만들어내면서 작가라며 으스대는 이들을 역겨워하는 이름없는 아웃사이더가 되며 진정한 작가들의 충실한 지지자가 된다.  


루이스 호르헤 보르헤스. 이 이름 앞에 무슨 말을 더 덧붙일 것인가. 20세기 후반의 가장 위대한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그는,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1967년과 68년에 하버드대학교에서 여섯 차례의 문학 강의를 진행한다. 녹음테잎으로만 있던 이 강의자료가 십 여년 전 발견되고, 보르헤스의 육성 강의를 그대로 글로 옮겼고, 얼마 뒤 이 책이 나온다. 그 때 2000년이었다.


그 자신 스스로 위대한 작가였던 보르헤스는 문학의 전통(역사) 앞에서 한없이 고개 숙이며 그것의 참 의미에 대해 소곤거린다. 위대한 문학 작품들의 지지자가 되며, 그 작품이 어떻게 존재하고 읽히는가에 대해 설명한다. 어쩌면 어떤 것이 진정한 문학인가를 알아차리는 순간, 더 깊이 문학 속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그것이 무척 어렵고 힘겨운 일이라고 할 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보르헤스는 자신의 문학 너머 거대하기만 문학의 역사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보르헤스는 하버드대학에서의 그 여섯번 강의를 통해, '시라는 수수께끼', '은유', '이야기하기', '번역', '사고와 시', '한 시인의 신조'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이 때 이미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생각나는대로 기억하는대로 강연했다. 보이지 않는 청중들을 위해서. 그런데 이 책을 읽는 동안, 그는 이 원고를 어떻게 준비했을까, 이 강의를 들었던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하는 생각에 잠기고 만다. 보르헤스, 그는 작가이기 이전에 진정한 작가들의 지지자였으며, 성실한 독자였고, 호기심 가득찬 눈으로 도서관 서가 사이를 배회하던 소년이었다. 


보르헤스는 이 짧았던 강연을 통해 놀랍도록 우아하고 아름다운 시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소설이 아니라 서정시와 서사시의 세계로. 보르헤스는 정작 소설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이 강연에서 그는 시인의 면모를 드러냄과 동시에 문학의 저 세계로 우리를 이끌고 여행을 떠난다. 소설이 등장하지 않았다고 서운해하지 말기를. 그는 위대한 이야기꾼들과 저 서사시의 전통에 대해서 이야기하니까.  



With ships the sea was sprinkled far and nigh, 

Like stars in heaven 

- Wordsworth 


(바다에는 배들이 멀리 또 가까이 뿌려져 있네,

 하늘의 별처럼) 



대학 시절, 아니 이제까지 내가 들었던 그 어느 문학 수업도 보르헤스의 이 강연록보다 아름답지 못했다. 그 많던 작가들의 수업이나 강연을 들었으나, 그들 대부분 시들을 암송하여 들려주지 못했다(암송했던 이는 두 분 있었는데, 한 분은 시인이며, 한 분은 내 예술사선생님이셨다). 더구나 시 행간 사이에 숨겨진 의미를 고대에서부터 끄집어내어 지금으로 가지고 오는 이도 없었다. 이런 수업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는 학생의 비극이다.(하긴 이런 수업을 할 수 있는 이 보르헤스 말고 누가 있으랴)



She walks in beauty, like the night 


바이런 저 싯구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 번역하지 않아도. 보르헤스는 서로 다른 언어를 오가며, 시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어떤 시어들이 가지는 아름다움은 특정 언어에서 더욱 부각된다고. 


대학을 졸업한 후 듣게 된 수업에서 예술사 선생님께서 바이런의 싯구를 강의 중간에 암송하셨을 때, 그 아름다움을 미처 몰랐다. 실은 대학 시절 다양한 언어를 오가며 위대한 문학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배울 수 있어야만 했다. 그러기엔 내가 너무 지적으로 무능했고 내가 다녔던 대학과 그 대학 교수들 대부분은 위대한 문학을 가르치기에 적당하지 못했다. 


보르헤스의 이 책을 문학과 시에 대해 궁금한 모든 이들에게 추천한다. 그리고 철부지 비평가들과 문학을 사랑하지 않는 학자들에게 놀아난 '문학의 위기'가 보르헤스의 저 짧은 책 안에서 어떻게 무너지는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 사랑이 사라지지 않듯 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시는 사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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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스터리츠 Austerlitz 

W.G.제발트(지음), 안미현(옮김), 을유문화사 




병상에 누워, 안경을 쓰지도 못한 채,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를 읽었다. 병상에서의 소설 읽기란, 묘한 느낌을 준다. 일상을 벗어난 공간 속에서, 현실은 적당한 거리를 둔 채 떨어져있고, 허구와 사실은 서로 혼재되어 혼란스럽게 한다. 시간마저 겹쳐 흐르며 외부는 모호해진다. 어쩌면 현대 소설이란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마치 <<아우스터리츠>>처럼.  


제발트는 소설 중간중간 사진들이 인용하는데,  마치 '이 소설은 허구가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이다'라고 말하는 듯 보였다. 허구와 사실 사이를 오가며, 소설은 대화의 인용으로 이루어진다. 문장의 호흡은 길고 묘사는 서정적이면서 치밀하고, 등장인물들의 마음은 한결같이 슬프기만 하다. 과거는 추억이 되지 못하고 스스로도 모르고 있었던 내 마음의 상처를, 가족의 상처를, 현대의 비극을 다시 꺼내어 보듬고 어루만진다. 대화는 자주 끊어지지만, 기억은 이어지고 소설은 챕터도 없이 그냥 하나다. 시간은 끊김 없고 끊어져 있던 기억들도 그것 안에서 하나로 이어져있듯, 소설은 허구와 사실을 이어 하나로 만든다.


아직도 2차 대전의 상처를 드러내며, 정면으로 응시하며 나아가는 <<아우스터리츠>>를 보며, 요즘 한국 문학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낀다. 미국의 이창래도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정작 한국 작가들만 무관심한 듯 싶기도 하고...


<<아우스터리츠>>의 명성은 이 작품을 향하고 있는 문제 의식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소설 작법에서부터 전혀 다른 글쓰기를 보여주며, 현대 소설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있다. 그 스스로 '다큐멘터리 픽션'(1)이라고 이야기하듯, 이 소설은 사건 중심이라기 보다는 사실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몇 개의 중요한 사실들과 이를 연결하여 소설의 중심 뼈대(내러티브)를 만들고 그 뼈대는 다시 사진들, (건축)공간에 대한 서술, 인물들에 대한 탐구와 인터뷰 등으로 형체를 이룬다. 


그런데 이 작법은 소설 감상에 그 어떤 영향을 주지 않으며, 도리어 전쟁에의 상처, 가족의 비극, 그리고 쓸쓸한 회상 속으로 빨려들게 하며, 작품에 대한 몰입도를 높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소설적 완성도를 지닌다.

 


Bigsby(*) suggests that it was out of frustration with the strictures of academic publication that Sebald turned to creative writing (a vague and ungainly term that, by default, winds up being the most accurate generic description of his work). "He'd originally taught German literature," says Bigsby, "and had published the kind of books that academics do. But he got increasingly frustrated, and began to write in what he called an 'elliptical' way, breaching the supposed boundaries between fast and fiction - not what you're supposed to do as an academic." Sebald himself sometimes described his work as "documentary fiction," which goes some way toward capturing its integration of apparently irreconcilable elements. 


제발트는 학술 서적들의 심한 비난들에 대한 불만으로 문학창작(자연스레, 그의 작품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포괄적인 설명이 될 수 있는, 다소 모호하고 어색한 단어인)의 길로 들었다고 빅스비는 말한다. "그는 원래 독일 문학을 가르쳤어요"라고 빅스비는 말하며, "그는 학교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면 으레  하듯 몇 종의 책들을 출판했죠. 그러나 그의 불만은 계속 늘어났으며, 그가 말하는 '생략된(elliptical) 방식'으로이미 가정되어 있던 사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제발트에게 대학 연구자처럼 하라고 제시되어져 있던 기존 방식이 아니라." 제발트는 그 스스로 그의 작품을 종종 명백하게 양립할 수 없는 요소들의 결합을 포착하기 위한 어떤 방식들을 향해 가는,  "다큐멘터리 픽션"이라고 표현했다. 


- Why You Should Read W. G. Sebald BY MARK O’CONNELL 

THE NEW YORKER, DECEMBER 14, 2011

http://www.newyorker.com/books/page-turner/why-you-should-read-w-g-sebald  


Christopher Bigsby(1941~): 소설가, 비평가, 제발트가 있었던 University of East Anglia의 Colleague. 



'Elliptical'라는 단어에 대한 번역어를 좀 더 고민해봐야겠지만, 예전에도 한 번 언급했듯이 현대 소설, 아니 현대 예술가들은 스스로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에 대한 작법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해롤드 블룸은 이를 '시적 영향에의 불안'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우리 시대는 새로운 방식, 일종의 혁신을 추구해야만 하는 지점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W.G.제발트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여기에 성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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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발트가 스스로 '다큐멘터리 픽션'이라고 이야기했으나, 그는 노벨문학상을 받기 전에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그리고 2015년 실제로 다큐멘터리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벨라루스의 논픽션 작가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제발트의 문학과 알렉시예비치의 작품은 확연히 다르지만, 제발트를 읽으면서 알렉시예비치를 떠올렸다. 번역된 제발트의 책들을 몇 권 더 챙겨 읽고 자세한 리뷰를 적어볼 생각이다. 그만큼 중요한 작가이기도 하다.알렉시예비치도 읽을 예정이니, 서로 비교해볼까 한다. 



W.G.제발트(Winfried Georg Sebald), 1944 -2001 






* 현대 예술가라면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종종 어떤 이들은 자신의 예술론을 책으로 내기도 한다. 이는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칸딘스키가 그랬고 미셸 빅토르, 로브-그리예, 오에 겐자부로, 심지어 이우환도 자신만의 예술론을 모아 책을 냈다. 아래 책은 미셸 뷔토르의 소설론이다. 소설 쓰기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2014/02/10 - [책들의 우주/이론] - 새로운 소설을 찾아서, 미셸 뷔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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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필립 솔레르스(Philippe Sollers)사드(Marquis de Sade)에 대해 인터뷰하는 영상을 보았다. 영상 속에서 한국에서 사드의 책을 번역 출판하고자 하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고, 번번히 판매금지되었고, 최근에서야 겨우 '청소년 유해 도서' 형태로 구입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것도 출판사가 항소한 끝에 제한적 판매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직 사드의 책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필립 솔레르스의 흥미로운 이야기는 사드 문학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었다. 


* Marquis de Sade에 대한 영문위키 : https://en.wikipedia.org/wiki/Marquis_de_Sade 



“사드의 사랑 (Un amour de Sade)”, 필립 솔레르스와의 인터뷰 from ParisLike on Vimeo.




아래는 위 영상에서 나온 사드의 유언을 옮긴 것이다. 



사드의 유언 

샤롱통 성 모리스 병원에서 온전한 정시관 건강 양호한 상태에서 남김. 

1806년 1월 30일 

D.A.F. 사드 


"나는 금한다, 내 육체가 그 어어떠한 구실로도 부검되는 것을. 

내가 숨을 거둔 후엔 방에서 시신을 옮기지 않은 채

그리고 가져온 나무 관관에 48시간 동안 그대로 안치해 두었다가, 

앞서 언급한 48시간이 지난 뒤에 못을 박아 관을 폐쇄할 것을 간절히 요망한다. 

이 시간 동안, 베르사유에에 소재한 에갈리떼 길(평등 길) 

101번지에 사는 목재상 레노망씨에게 특사를 보내어, 

마차를 가지고 그가 몸소 와 줄 것을 부탁해,

그의 호송 하에 시산을 에페르뇽 근처, 

망세의 자치구 말메종에 있는 내 소유의 숲으로 데려가고, 

그 곳에 도착하면 오래된 성 쪽에서 난 길을 따라 들어가, 

숲을 가르는 넓은 길의 오른편에 자리한 덤불 숲에 

어떤 형태의 장례식 없이 안장해주길 바란다. 

덤불 속에 묏자리를 정하면 굿일은 말메종의 농부가 해주며 노르망 씨가 이를 감독하고

내가 무덤을 묻힐 때까지 그가 자리를 지켜주길 바란다. 

만일 그가 원한다면, 형식적 애도의 관행이 아닌 나에 대한 마지막 애정의 증거를 보이고자 하는 

내 친척이나 친구들과 동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무덤이 채워지면, 그 위에 도토리를 뿌려, 후에 그 자리 위로 다시 잡목이 우거지도록 하여, 

내 무덤의 흔적이 지상으로부터 사라지게 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나에 대한 기억이 모든 이들의 마음에서 지워질 것이라고 스스로 자부할 수 있도록." 

(번역: 박해준Park Haijun)



사드에 대해선 몇 권의 책이 나와있다. 읽지 않았기에 뭐라 평할 순 없고, 조만간 한 권 읽어볼 생각이다. 필립 솔레스의 저 책은 한국에 번역 출판될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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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조너선 사프란 포어(지음), 송은주(옮김), 민음사 




결국은 울고 말았다. 소설 끄트머리에 가서, 오스카와 엄마가 아빠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비극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지금 당장이라도, TV 방송 뉴스 채널로 가보라. 모든 뉴스들이 현대판 비극들로 도배되어 있다. 뉴스 앵커나 기자들은 자신들과는 무관한 일인양, 무미건조한 어조와 '이건 진짜야'라는 눈빛으로 또박또박 분명한 목소리로 말한다. 


하지만 오스카는 아빠를 찾아나선다.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아빠를. 



첫 번째 메시지. 화요일 오전 8시 52분. 누구 있니? 여보세요? 아빠다. 있으면 받으렴. 방금 사무실에도 전화했는데 아무도 받지 않는구나. 잘 듣거라, 일이 좀 생겼어. 난 괜찮다. 꼼짝 말고 소방수가 올 때까지 기다리래. 아무 일 없을 거다. 상황을 좀 더 알게 되면 다시 전화하마. 그냥 아빠는 괜찮으니 걱정 말라고 전화했어. 곧 다시 걸게. 


아빠로부터 네 개의 메시지가 더 와 있었다. 9시 12분, 9시 31분, 9시 46분, 10시 4분에. 나는 그것들을 듣고 또 들었다. 무엇을 해야할 지, 아니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어떤 기분이 들어야 할지 미처 알 겨를도 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10시 22분 27초였다. 

발신자 번호를 봤다. 아빠였다. 

- 35쪽 ~ 36쪽



소설은 어수선하고 수다스럽고 유쾌하기까지 하다. 아홉살 꼬마 오스카에겐 모든 것들이 호기심의 대상이자, 그리움의 대상이다. 사진들이 나오고 문장들마저 조각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소설 작법으로 비극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하고 빙빙 둘러가는 과정을 반영하다. 그래서 독자들은 빙빙 둘러, 오스카를 따라가며 9월 11일을 아주 천천히 떠올리며, 그 사건 한 복판에 있었던 어느 가족의 슬픈 이야기를 소설 결말부에 가서야 비로소 마주한다. 


소설에 대한 형식적 파괴, 또는 실험적인 변화가 작품 속 깊숙히 들어가 어우러져 있다. 그래서 스토리와 형식은 하나의 형태를 지니며, 이 소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 원하지 않던 비극과 그 비극을 극복하기 위한 가족의 노력을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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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페리온의 노래 

J. Ch. F. 횔덜린(지음), 송용구(옮김), 고려대 출판부 




"우리는 시를 향해 나아가고, 삶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리고 삶이란, 제가 확신하건대 시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시는 낯설지 않으며, 앞으로 우리가 보겠지만 구석에 숨어있습니다. 시는 어느 순간에 우리에게 튀어나올 것입니다." 

- 보르헤스, <시라는 수수께기> 중에서(<<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 박거용 옮김, 르네상스, 11쪽) 



시는 아무래도 원문 그대로 읽어야 제 맛이다. 번역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동일한 단어라고 언어마다 그 어감이나 뉘앙스, 풍기는 멋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글로 옮겨서 밋밋한 시라도 원문으로 읽으면 풍성한 느낌을 주는 시일 수 있다. 몇 해 동안 영시를 읽으면서 배운 바라고 할까. 


횔덜린에 대해선 익히 들어왔으나, 그의 시를 제대로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백 여년 전 독일 튀빙겐, 헤겔과 셀링이 있었고, 루소의 사상과 나폴레옹의 혁명 공화정이 유럽을 지배하던 시절, 신고전주의자들과 낭만주의자들이 뒤섞여, 서서히 싹트던 민족주의적 이상을 노래하던 그 때, 그 당시 가장 위대한 시인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모든 이들이 프리드리히 횔덜린이라고 말할 것임에 분명하다. 


만약 내가 독일인이라면, 그의 <독일인의 노래Gesang des Deutschen>은 놀랍도록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호소력 짙은 시가 될 것이다. 지금도 그러한데, 그 당시에는 어땠으랴. 하지만 한글로 읽는 이 시집은 횔덜린을 앍고 그 시절의 분위기, 그리고 강렬한 이상과 염원으로, 그리스 고전주의적 미학을 성취하고자 할 때의 시학이 어떠한가를 알 수 있겠지만, 시 특유의 감미로움이나 위안, 서정적인 표현이나 비유를 즐기기에는 너무 관념적이라고 할까. 


그래도 시 읽기란, 잠시 내 몸과 마음을 놓고 쉬어갈 수 있는 휴식일 것이다. 


이 시집만 읽는 건 재미있을 듯하지 않고 그 당시 독일의 분위기라든가, 독일 문학 사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할 때 더 흥미로울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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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에두아르 르베 Edouard Leve 지음, 정영문 옮김, 은행나무 




소설일까? 그냥 일기일까? 자서전일까? 에세이일까? 예술 형식에 대한 구분이 호소력을 가지지 못하는 시대에, 장르를 적는 건 무의미하다. 책 표지에 적힌 '장편소설'이라는 단어가 부적절해보인다. 


이 책의 서술, 그것이 진실인지, 허위인지 에두아르 르베를 제외한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심지어 에두아르 르베는 이 짤막한 글 속에서 자신이 여든 다섯 살에 죽을 것임을 예감하지만, 마흔 둘의 나이로 자살하니, 이 책 자체로 일종의 부조리일지도 모른다. 실은 내 일상이, 내 인생이, 이 세상이, 이 우주가 다 부조리하고 무의미하지만, 우리는 죽을 힘을 다해 그걸 부정하고 있지. 


이미 죽은 자의 자화상.  


서로 연관성 없는 문장들은 병렬적으로 나열되며 대기가 되고 구름이 되고 자화상의 하늘이 된다. 하지만 그 속에서 그 어떤 의미도 구할 수 없다. 개별 문장들은 일종의 취미판단일 뿐, 가치판단은 아니다. 단지 자신의 선호를 나타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더욱 개별적인 산문이 되고 유명론(Nominalism)적 가치를 지닌다,고 볼 수 있을 지도. 


짧지만, 읽기 어렵다. 어떤 문장은 흥미롭지만, 어떤 문장은 재미없다. 취향이 특이하지 않고 세계 비판적이지도 않다. 그저 보여줄 뿐이다. 어쩌면 일종의 유서이거나 기록일지도 모른다. 


형식적으로 무척 흥미롭지만, 문학적으로 대단하다고 보긴 어렵다,고 적지만, 자신없다. 실은 이런 식의 작법으로 글을 쓰고 싶어졌다. 일종의 시리즈물이 나오면 어떨까. 예술가들이 돌아가면서 르베 식의 자화상을 쓰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이면, 정말 가치있는 무의미의 축제가 될 지도. 



*    * 


에두아르 르베는 사진작가다. 그의 사진 몇 장을 찾아 올려본다. 소설 <<자화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진 모르겠다. 


 

Reconstitutions by Edouard Leve 





몇 장의 작품들을 찾았으나, 많진 않다. 포르노그라피 연작들이 눈에 띈다. 



Sans titre (de la serie Rugby)

edouard leve




에두아르 르베. 어느 프랑스 저널에 실린 르베의 사진 전시 기사에 실린 사진이다. 기자는 왜 이 사진을 실었을까. 소설과 달리 꽤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르베. 나도 강인해지고 싶다. 인상만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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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기억해둘 만한 해가 되었다. 2016년, 아직 프로젝트는 끝나지 않았고 주말에 쉰 적이 없다. 스트레스로 인한 폭음 뒤, 몸져 누워 나가지 않은 때를 제외하곤. WLB(Work & Life Balance)라는 단어를 이야기했던 때가 부끄러워졌다. 


일요일 출근 전, 르 클레지오를 짧게 읽었다. 불과 1년 만에 이렇게 동떨어진 일상이 되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스물 여덟 무렵, 자신만만하게 젊은 날의 르 클레지오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했는데, 그의 놀라웠던 데뷔작, <<조서>>, 그 이후의 슬프고 감미로웠던 <<홍수>>, <<사랑하는 대지>>, <<물질적 황홀>> ... 십 수년이 지나고 노년의 르 클레지오는 서울에 와서 살기도 하고 노벨 문학상을 받았는데, 이제 르 클레지오는 내 일상 밖으로 물러나 있었다.


내 탓도, 세상 탓도 아니다. 애초에 이렇게 설계되어 있었다. 거대한 인과율 속에 우리는 잠겨 있고, 그 체계가 실재하는 것이든, 상상적인 것이든 상관없다. 꿈 속에 있으면 그것이 실재라고 믿듯, 우리는 새장을 벗어날 수 없고 언어를 버릴 수 없다. 쓸쓸한 1월이고 슬픈 겨울이다.  



모든 것은 자리를 바꾸고 움직이고 서로 침투하며 수정된다. 그러나 모든 것은 존재하며 모든 것은 명백하다. 만약 죽음이 한 인간이기를 그치는 것을 뜻한다면 세계의 이 모든 광경은 죽음의 광경이다. 사실적이며, 실제로 있는, 효과적 죽음, 지울 수 없고 단단하고 정확한 죽음, 저항할 수 없고 바꿀 수 없으며 떼어낼 수 없는 죽음의 광경, 바라보는 수백만 개의 눈, 무한히 많은 눈들의 비전이요, 또 그 눈들을 보지 못하는 우리들의 시선인 죽음의 광경이다. 

- 르 끌레지오, '침묵' 중에서 (김화영 옮김, 세계사)




J.M.G. Le Clézio, portraits (1963 à gauche, 2011 à droite). Sourcing images : "L'Express", 1963. "Le Monde", 2011 (archives Vert et Plume) 

출처: www.the-plumebook-cafe.com/jusqua-la-fin-du-mond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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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미나 마르케스Fermina Marquez

발레리 라르보(지음), 정혜용(옮김), 시공사 





<20세기 전반기 가장 위대한 소설>이라는 평가는 다소 황당해보인다. '20세기 청춘 소설의 효시'라는 뒷표지의 찬사도 오버다. 작고 흥미로운 소설이나, 과도한 찬사는 도리어 이 소설에 대한 쓸데없는 부푼 기대를 만들고, 짧은 독서 뒤의 실망감을 더 크게 만들 뿐이다. 그러니 정직해질 필요가 있겠다. 


1911년. 벨 에포크의 파리. 발레리 라르보의 청춘 소설. 밝고 낙관적이었던 시절, 소녀, 소년들이 보여주는 사랑이야기라고 하기엔 왠지 진지하고, 그렇다고 철학적인 소설이라고 하기엔 페르미나 마르케스라는 여주인공에 대한 묘사가 간지럽기만 하다. 조아니의 대사는 장황하기만 하고 산토스도 상남자 스타일로 등장한다. 


이소설은 전체적으로 감미로운 사랑이야기라기 보다는 젊은 한 때, 설레는 사랑 앞에서 우리는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가에 대한 진지하면서 외롭기만 한 스케치라고 할까. 그리고 이 스케치 앞에서 딱 멈춘다. 소설 마지막 부분의 회상은 어딘가 어색하고 '그 땐 그랬지' 수준에서 멈추고 만다. 조아니는 군대에서 죽고, 산토스는 결혼해 잘 살고, 페르미나 마르케스는 잘 살고 있겠지로 끝난다. 


1911년, 벨 에포크 시절의 청춘 소설이라는 점을 떠올린다면, 이 소설은 읽을 만하다. 하지만 그 배경을 벗어나면, 이 소설은 평범한 소설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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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 



당신이 꼭 좋은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참회를 하며 무릎으로 기어 사막을 통과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당신 육체 안에 있는 그 연약한 동물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게 하라 

내게 당신의 상처에 대해 말하라, 그러면 

나의 상처에 대해 말하리라.

그러는 사이에도 세상은 돌아간다.

그러는 사이에도 태양과 비는 

풍경을 가로질러 지나간다. 풀밭과 우거진 나무들 위로

산과 강 위로

당신이 누구이든, 얼마나 외롭든

세상은 당신의 상상 앞에 스스로를 드러내며 

기러기처럼, 거칠고 들뜬 목소리로 소리치고 있다. 

다시, 또 다시 네 자리가 있다는 걸,

이 세상 모든 것들 속에. 



- 메리 올리버


 

장석주의 책, <<일요일의 인문학>>을 다 읽고 짧은 서평을 올렸다. 최근에 책도 못 읽고 글도 못 쓴 탓에, 그 짧은 서평 쓰는 것도 힘들었다. 메리 올리버의 책은 사놓고 읽다 말았는데, ... ... 메리 올리버의 '기러기'는 장석주의 책에서 다시 옮겨적었다가, 다시 수정한다. ㅡ_ㅡ;;  구글링을 해서 찾은 시 원문과 장석주의 책에 실린 번역과 다르다. 마지막 문장을 번역하여 덧붙인다. 




출처: http://tumblr.austinkleon.com/post/123746526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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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적인 화해 Les accommodements raisonnables 

장 폴 뒤부아(지음), 함유선(옮김), 현대문학 





출처: http://lci.tf1.fr/culture/livres/2008-08/le-nouveau-jean-paul-dubois-est-savoureux-4873947.html 




바로 그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차이를 고려하는 능력이었다. 그러나 또한 집중해서, 현재에 그대로 머무르는 능력이었다. 특히 방심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아닌 걸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육체의 살결도 배의 연한 살도 손가락의 기교도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어느 정도 흥분이 지나가자, 우리의 신체를 연결하는 뼈 마디마디가 모두 별 차이가 없어졌다. (안나든 셀마든) 누구의 육체든. 그렇다. 만일 내가 무엇인가에 이르고 싶다면, 생각할 필요가 있는 그런 방식이었다. 현실을 깨달아야 한다. 부드럽게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그녀가 요구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얼마나 오래 모든 걸 계속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 307쪽 



우울증에서 벗어난 아내와의 섹스. 폴은 '누구의 육체'든, 그렇다며, 자신을 뒤돌아본다. 우리는 이 소설 내내 어떤 궁지에 처한 것으로 보이는 중년의 프랑스 남자를 만나지만, 그가 왜 그 지경에 몰렸는지 알지 못한다. 아버지의 변화, 우울증에 걸린 아내, 도망치듯 프랑스를 벗어나 미국으로 온 주인공 폴. 


몇 해 전 나에게 놀라운 감동을 안겨주었던 <<프랑스적인 삶>>과 달리, <<이성적인 화해>>는 밋밋하고 까닭없는 방황이 이미 진행된 채로 소설은 시작했고 시작과 동시에 그 결말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결국 모두 제 자리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것. 


스크립터 닥터(script doctor)인 폴의 아버지 스테른, 아내 안나, 그리고 자녀들, 시나리오 작업을 위해 건너간 헐리우드의 휘트먼, 셀마, ... 폴의 주위를 둘러싼 여러 사람들이 보여주는 행동들, 폴과의 대화, 교감을 통해 소설은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보여준다. 한국에 사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그렇다고 공감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장 폴 뒤부아는 인물에 대한 사려깊은 태도와 쓸쓸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회고조의 문장으로, 내가 읽었던 <<프랑스적인 삶>>에서처럼 뒤부아만의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한다. 하지만 전작 <<프랑스적인 삶>>에 비한다면, 이번 소설을 평이했다. 


도리어 소설보다는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도망칠 수 있었던 폴이 부러웠다. (작중 인물의 환경을 부러워하다니!) 툴루즈에서 LA로. 우울증을 이겨내지 못한 채, 스스로 요양소로 들어간 아내 안나. 그 사이 폴은 안나의 젊은 시절을 연상시키는 셀마를 만나 육체적 사랑을 속삭인다. 하지만 안나가 우울증에 빠져있듯, 셀마는 마약에 취해 있고, 파티를 할 때, 섹스를 할 때, 그저 쓸쓸했다. 이성적인 화해란,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의 방황 끝에 제 자리로 돌아온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그런 희망을 꿈꾸는 걸까. 셀마와의 짧은 밀애는 지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안전한 방황인 셈이다. 안나는 미국으로 오지 않았고 셀마는 프랑스로 가지 않는다. 갈등은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우리가 왜 변하는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어쩌면 변화란 의미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갈테니 말이다. 


장-폴 뒤부아의 <<프랑스적인 삶>>은 권하지만, 이 소설은 권하지 않겠다. 그리고 이 소설을 이미 읽은 이들에겐 이 소설 몇 배의 감동을 <<프랑스적인 삶>>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내 보수적인 기준에서 권하지 않겠다는 뜻일 뿐, 이 소설은 여느 작가들의 소설들보다는 훨씬 좋다. 






이성적인 화해 - 6점
장폴 뒤부아 지음, 함유선 옮김/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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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가 맨 




아 - 입 벌려요.


너는 마른 휘파람을 불기 위해 입술을 모았고,

나는 그게 지겨웠어.

슈가 맨, 벤츠를 사 줘.


너는 노래방에서 탬버린을 훔쳐 왔지.

꽃집에서 버린 시든 꽃을 주워 왔지.

아울렛에서 싸구려 팬티를 사 왔지.

나는 그것들을 쓰레기통에 넣었어. 


슈가 맨, 너한테 없는 것을 줘.

다이아몬드 - 

은빛 배 - 

파리로 날아가는 전용 비행기 - 

번뜩이는 빌라의 지붕 - 

금빛 넘실거리는 전자 오르간 - 


아 - 입 벌려요.


너는 녹아 사라지고,

깊게 썩은 입이 말하기 시작했어. 

가엾은 슈가 맨.

너는 노래방에서 ... ... 


- 장정일, <세계의 문학>, 2015년 여름호 



도서관에서 문학잡지를 읽는다. 밖은 낮아지는 구름, 어두워지는 대기, 사랑을 꿈꾸지 않는 젊음, 어긋나버린 시간들로 채워지고, 나는 흔들리며 가라앉는 마음 끝자락을 꽉 부여잡곤, 오래 전에 잃어버린 내 시간들의 흔적을 더듬거린다. 장정일. 그도 이젠 소년이 아니고 나도 이젠 문학 습작생이 아니다. 


구립 도서관을 채운 사람들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젊은이부터 은퇴한 후 책읽기로 시간을 보내는 늙은이까지, 책은 세계의 비밀을 담은 어떤 것이 아니고, 도서관은 숨소리까지 죽인 독서광들의 아지트도 아니다. 그저 형편없어져 가는 도시의 쓸쓸하고 슬픈 뒷골목같은 곳. 


계간지에 실린 시들을 읽으며, 아, 내가 모르는 시인들이 이렇게 많구나, ... 아, 이 시인은 아주 오래 전 술자리에서 만난 적이 있었지, ... 시인과 술을 마시지 못한 지도 꽤 많은 시간이 지났음을 깨닫는다. 하긴 술을 마시며 시에 대해, 문학에 대해, 예술에 대해 이야기해 본 게 몇 년 전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겨우겨우 루이지 피란델로의 소설, <<나는 고 마티아 파스칼이오>>을 다 읽으며, 마티아 파스칼의 철부지 같은 모험도 19세기에나 가능한 일임을, 세상의 우연과 신비, 슬픈 가능성마저도 사라졌음을, 식어버린 커피 속에서 첨벙거리며 탄식했다. 


다시 한 주일이 시작되고, 나는 야근에, 스트레스에, 쫓기듯 시간을 보낼 것이다. 빨리 이 가을도 가고, 이 겨울도 갔으면 좋겠다. 그래야 좀 쉴 수 있을 것같다. 그 전까진 최선을, 사력을 다해 끝을 내야 할 목표가 존재하니... 그 전까진 무너지지 말아야지. 십 수년 만에 장정일의 시 읽으며, 늙지 않는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구나 하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늙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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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랜만이네요 ㅎ

    전 제가 어렸을 때랑 똑같아서 지겨운데 ㅋㅋㅋ 어른처럼 생각하고싶어요.

    • 오랜만!이예요. ^^

      실은 어른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다만 어른처럼 생각한다는 건 주위를 좀 더 신경쓴다고 할까요. 이게 조금 달라질 뿐, 나머진 그대로인 것같아요. 하긴 그 사소한 변화가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 오는 것이긴 하지만요. ~...

    • 그 변화가 좋은 건가요 아님 나쁜건가요. 아님 경우에따라 다른 건가요? 제가 요즘 그게 궁금해서요.

      굳이 위 글의 맥락이랑 상관없이 그냥요...

    • 다들 겪는 변화이니,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니예요. 좋게 받아들이면서 젊은 시절의 열정이나 가치를 계속 지켜나가는 게 제일 좋겠죠. ~ 힘들긴 하지만요. ~ : )



눈 




시몬느, 눈은 그대의 목처럼 희고,

시몬느, 눈은 그대의 무릎처럼 희다.


시몬느, 그대의 손은 눈처럼 차고,

시몬느, 그대의 가슴은 눈처럼 차갑다.


눈은 볼의 키스에만 녹는데,

그대 가슴은 이별의 키스에만 녹는가.


눈은 소나무 가지에서 슬픈데

그대 이마는 밤빛 머리칼 밑에서 슬프구나.


시몬느, 그대의 동생 눈은 정원 속에서 잠들고 있다.

시몬느, 그대는 나의 눈, 나의 사랑. 


- 레미 드 구르몽Remy de Gourmont (1838 ~1915)  

(오증자 옮김, 정우사, 1976년)  






퇴근길, 길가 헌책방엘 들렸다. 알라딘이 아니라 진짜 헌책방. 그리고 이 책을 들고 나왔다. 오증자 교수. 한때 성실했던 프랑스문학 번역가였지만, 지금은 그녀의 번역서는 거의 없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그녀의 번역작인데, 그녀 남편은 유명한 연극연출가 임영웅이다. 그래서 아직까지 출판되고 있는 걸까. 


정말 오랜만에 구르몽의 시를 소리 내어 읽었다. 소리 내어 읽으니, 술 생각이 났다. 나이가 들어도 좋은 시 읽을 때, 술 생각 나는 건 어쩌지 못하는 모양이다. 


요즘 사람들은 구르몽의 시를 알까. 쓸쓸하기만 한 6월 밤이다. 나라는 엉망이 되었고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로 변해간다. 이제 시인도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소문이 들린다. ... ... 나는 어쩌지. 이별의 키스에만 녹는 가슴을 가진 채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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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럴 겁니다! 백작은 이른 아침, 정확히 8시 반에 일어났다. ... ... 백작 부인은 목 둘레에 화려한 레이스가 달린 라일락 꽃무늬 드레스를 차려입었다. ... ... 테레지나는 몹시 배가 고팠다. ... ... 루크레지아는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었다. ... ... 오, 세상에!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있습니까? 우리는 한줄기 태양광선을 채찍 삼아 쉼 없이 회전하는 보이지 않는 팽이 위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 연유도 모른 채, 결코 목적지에 도달하지도 못하면서, 우리에게 때로는 더위를 때로는 추위를 선사하고, 혹은 쉰 번쯤 혹은 예순 번쯤 회전한 후에는 죽음을 - 대개는 어리석은 짓만 범했다는 아쉬움과 함께 - 선사하기 위해 그저 그렇게 돌고 도는 데에 재미 붙인 양 미친 듯이 회전하는 모래 알갱이 위에 우리가 놓여 있는 것 아닐까요? 신부님, 코페르니쿠스가, 바로 코페르니스쿠스가 휴머니티를 더는 회복할 수 없을 만치 파괴시켰습니다. 우리가 이룬 그 모든 잘난 발명과 발견들로 인해, 어느덧 우리 자신이 무한히 작은 존재라는 새로운 개념에 서서히 젖어 들었어요. 그러고는 스스로를 우주 속의 보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자각하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들 개개인의 불행뿐 아니라 인류의 총체적인 불행에까지요. 우리들의 이야기는 이제 한낱 버러지들의 이야기에 불과해요. 앤틸리스 제도의 작은 재난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별거 아닙니다. 그 폴란드 참사회원의 주장대로, 아무런 목적 없이, 돌고 도는 데 진력이 난 가엾은 지구가 다소 인내심을 잃고 급기야 제 몸의 무수한 출구 중 한 곳에서 불꽃을 좀 뿜어내고 말았지요. 대체 무엇이 그토록 지구를 분노케 했을까요? 아마도 그것은 지금보다 더 한심한 적이 없었던 인간들의 우매함일지도 모릅니다. 그만두죠. 햇볕에 그을린 무수한 버러지들. 그래도 우린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 루이지 피란델로, <나는 故 마티아 파스칼이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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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달력 





몇 번의 계절이 지나고

이제 우울한 벚꽃은 하얗게 썩어버렸다

마차는 덜컹덜컹 먼 곳을 달리고

바다도 시골도 고요한 공기 속에서 잠자고 있다

어쩌면 이다지도 게으른 날일까

운명은 연달아 어두워져 가고

쓸쓸한 우울증은 버드나무 잎 그늘에 흐려져 있다

이제 달력도 없다 기억도 없다

나는 제비처럼 홀로서기를 해, 그리하여 신기한 풍경 끝을 날아가겠다

옛날의 사랑이여 사랑하는 고양이여

나는 하나의 노래를 알고 있다

그리하여 먼 해초를 태우는 하늘에서 짓무르는 것 같은 키스를 던지겠다

아마 이 슬픈 정열 이외는 그 어떤 단어도 알지 못한다



- 하기와라 사쿠타로(지음), 서재곤(옮김), <우울한 고양이>, 지만지 

*   * 



하기와라 사쿠타로(萩原 朔太郎, 1886 ~ 1942)의 시를 읽는다. 사쿠타로도 오랜만이구나. '쓸쓸한 우울증'이라는 단어를 읽곤 아, 우울증은 쓸쓸했구나 라며 작은 소리로 되뇌었다. 젊은 시절의 사쿠타로도 꽤 쓸쓸했나 보다, 하는 생각도 잠시, 그의 말년은 일본주의자로 점철되어 있다. '일본 근대시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으나, 한국에 소개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하기와라 사쿠타로의 1923년 시집, <우울한 고양이>



1924년의 하기와라 사쿠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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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도정일(지음), 문학동네 





도정일 교수의 산문집을 읽었다. 다소(혹은 매우) 실망이다. 여러 일간지와 저널에, 마치 마감 시간에 쫓겨 쓴 듯한 짧은 글들의 모음이기 때문이고 대부분 지면에 실린 지 꽤 지났다. 다만 저자가 워낙 유명한 지라, 글 읽는 재미가 없다거나 형편없진 않다. 도리어 다른 책들보다 훨씬 낫다. 글들 대부분 짧고 금방 읽힌다. 대신 깊이 있는 통찰을 느끼기엔 글들이 너무 짧고 그 때 그 당시에 읽어야 하는 시평時評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90년대에 쓴 글임에도 불구하고 2015년에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떠나 서글픔마저 느끼게 만든다. 옛날 글 읽는 느낌이 이런 걸까. 몇몇 인용문들은 기억해둘 만했고 다소 긴 분량을 가진 몇 편의 글은 충분히 읽을 만했다. 


그러나 도정일 교수의 진면목을 느끼기엔 아쉬움이 많은 책이다. 아니면 나같은 독자가 읽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덧붙이자면, 글들의 편차가 너무 심하고 밋밋한 칼럼들이 많았다. 글을 읽으면서 책의 완성도를 높이는 편집이 아쉽다고 해야 할 것이다.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 8점
도정일 지음/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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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앗, 그런가요?
    제목이 참 좋아서 언젠간 읽어야지, 싶었는데 말이죠..

    • 1990년 중반부터 쓴 신문 칼럼 모음집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글들이 나쁘다기 보다는 잡지 기고글인지라 지금 읽기엔 철 지난 글들이기도 하고, 사소한 일상을 이야기하는, 부드러운 산문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대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담긴 것도 아니고 ... 재미없다고 할 순 없으나, 저자가 워낙 유명한 분인지라, 그 명성에 책은 미치지 못했다고 할까요. ~ ^^; (아니면 제가 너무 많은 기대를 해서 그런지도 모르겠군요.)




죽은 전원시 




지금 이 시간에 

내 안데스의 사랑하는 동심초와 앵두 같은 리타는 뭘 하고 있을까;

비잔티움은 날 질식시키고

내 몸속엔 풀어진 코냑 같은 피가 잠을 청하는데.


하얀 오후에 속죄의 자세로 옷을 다리던

그녀의 손들은 어디에 있을까;

지금 비가, 내 삶의 의욕을 앗아가는 비가,

가없이 내리는데.


그녀의 플란넬 치마랑 무슨 상관일까;

그녀의 열망; 그녀의 걸음새;

달콤한 사탕수수에 바친 노동.


문에 기대어 황혼 한 줄기를 바라보고 있겠지.

마침내 떨며: "이런 ...... 오늘은 정말 춥구나!"

한 마리 야생의 새도 울겠지, 기왓장 위에서. 


- 세자르 바예호 지음, 구광렬 옮김 



세자르 바예호César Vallejo의 시다.  20세기 남미 최고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국 독자에겐 생소하다. 나도 십수년 그의 이름을 르네 샤르를 사랑하는 소설가가 쓴 어느 프랑스 소설에서 '세자르 발레조'로 읽었다. 그 이후 잊고 지내다 노트 정리 중에 그를 발견하곤 번역된 시집을 찾았다. 


잠시 집에서 쉬는 어느 아침, 그의 시를 읽으며,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내 삶의 의욕을 앗아가는 비가 내리지도 않는데, ... 이미 사랑은 지나가 잊혀졌는데, ... 세상은 이미 어두워져 포기만이 남았는데, ... ... 그런데도 왜 울컥했던 걸까. 


그래, "이런 ... ... 오늘은 정말 춥구나!" 




세자르 바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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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내가 이루어진 것도, 내 일생동안 이끌고 다녀온 이 권태에 처음으로 전염된 것도, 나의 고통이요 나의 쾌락인 이 슬픔에 물든 것도 콩부르의 숲에서였다. 그 곳에서 나는 내 가슴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다른 가슴을 찾아헤맸다. 그 그곳에서 나는 내 가족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는 그 곳에 그의 이름이 복권되고 집안의 재산이 쌓이기를 바랐다. 시간과 혁명이 씻어간 또 하나의 악몽. 여섯 형제 중 남은 사람은 셋. 형과 쥘리와 뤼실은 이제 없고, 어머니는 고통으로 돌아가셨고 아버지의 재는 무덤 속에서 파헤쳐졌다."


"혹 나의 작품들이 내 죽은 뒤에 남게 되고 내가 이름을 남기게 된다면 어느 날 <회고록>의 인도를 받아 어떤 여행자는 내가 그린 장소들을 찾아오리라. 그는 성(城)을 알아볼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 거대한 숲은 찾아도 없을 것이다. 내 꿈의 요람은 사라져버렸다. 바위 위에 홀로 서 있는 성탑만이 그 종탑과 사귀고 폭풍으로부터 그를 보호하던 옛 친구들인 거대한 참나무 숲의 죽음을 울고 있으리라. 그 성탑처럼 홀로 남은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을 아름답게 해주고 나를 보호해주던 내 가문이 내 곁에서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다행스럽게도 나의 인생은, 내가 젊은 시절을 보낸 성탑들처럼 견고하게 땅 위에 지어지지 않았다. 인간은 그의 손으로 세운 성만큼 폭풍에 견디지 못한다." 

- 샤토브리앙(Francois-Rene de Chateaubriand) 


* * 


김화영의 <시간의 파도로 지은 城>에서 인용된 샤토브리앙의 글이다. 프랑스 문학사에서는 대단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샤토브리앙이지만, 다른 나라로의 소개는 그다지 활발하지 않은 듯 싶다. 그의 대표작인 <아탈라>, <르네>는 번역되었으나, 현재는 품절이고. 




아딸라 - 르네
샤또브리앙 저/신곽균 역

영역본을 찾아보았으나, 3권 정도 검색되었다.



 

- 샤토브리앙, <Atala / Rene>



- 샤토브리앙, <무덤 너머로의 회상Memoirs from Beyond the Tomb>



읽고 싶은 건 역시, <무덤 너머로의 회상>이다. 학생 시절이었다면 어떻게든 불어로 읽으려고 했을 텐데, 돌이켜보니, 영어라도 제대로 해놓고 불어공부를 할 걸 하는 후회가 앞선다. 지금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영역본을 찾아보고 있으니. 


프랑소와 르네 드 샤토브리앙. <무덤 너머로의 회상>은 30년 걸쳐 씌여진 회고록이다. 소설가이자 외교관이었으며 1786년에 태어나 1848년에 죽었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프랑스 귀족의 몰락, 프랑스 대혁명, 왕정복고, 나폴레옹 ... 격변기를 보냈고, 그 이야기들이 <무덤 너머로의 회상>에 담긴 것이다. 이후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쳤지만, 지금 샤토브리앙을 읽는 독자들은 많지 않다. 


위에서 소개한 책들 말고 국내 번역된 책들이 있으나, 발췌번역이거나 요약본이라 다소 부족해 보인다. 


* *


얼마 전 웹서핑을 하다 보게 된 정보 하나, 언어 사용인구로 따져, 한국어가 13위였는데, 순위에 민감한 사람들이 한국어의 위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걸 읽었는데, 실은 그게 중요하지 않다. 정작 중요한 것은 한국어로 된 양질의 정보가 얼마나 많고 이 정보들에의 접근이 얼마나 쉽고 편리한가다. 따져보면 한국어로 구할 수 있는 양질의 정보는 많지 않다(영어와 비교하는 건 어불성설이긴 하나, 비교는 늘 최고와 할 때만 의미를 가진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중년의 나이가 되도록 이 사회에 조금이나 기여한 게 있다면, 한국어로 된 정보에 이 블로그가 조금의 도움이 되었다는 것밖에 없는 듯해 좀 씁쓸해졌다. 


정부 차원에서 한글 번역 - 여기에는 외국 서적에 대한 번역 뿐만 아니라 한문으로 된 국문학 서적에 대한 번역도 포함되어야 한다 - 에 대한 다양한 공적 사업이 진행되어야 하고, 이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늘어나야 한다,고 적어보지만, 그게 가능할까 싶다. 기업은 돈 되는 일에 매진하고 정부는 지금 당장 돈이 되지 않고 나중에도 돈이 되지 않으나, 나라를 튼튼하게 하는 기초 사업에 힘을 써야 한다,고 적어보지만, 이 나라 정부 관료나 정치인이 이런 이야기 한 적을 본 적도, 읽은 적도 없다. 


쓸데없이 글이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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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Une Rencontre 
밀란 쿤데라(지음),한용택(옮김), 민음사 



1. 
에밀 시오랑(치오란), 아나톨 프랑스, 프란시스 베이컨,  셀린, 필립 로스, 구드베르구르 베르그손, .... 밀란 쿤데라가 만난 이들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진 이 산문집은 편파적이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그것이 얼마나 낯선가는 경험해본 이만이 알 수 있으리라. 좋아한다는 그 고백이 다른 이들과 나를 구별짓게 만들고 나를 일반적이지 않은, 평범하지 않은, 결국 기괴한 사람으로 만드는가를.  
 

그리고 치오란은 어떤가! 내가 그를 알게 된 시절부터 그가 한 것이라고는 인생의 황혼기에 블랙리스트에 자리 잡기 위해 이 리스트에서 저 리스트로 돌아다니는 일 뿐이었다. 게다가 내가 프랑스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징낳아 그의 앞에서 아나톨 프랑스를 언급했을 때, 그는 내 귀에 대고 짖궂게 웃으면서 속삭였다. "여기서는 절대로 그 이름을 큰 소리로 말하지 마세요. 사람들이 당신을 놀릴 거예요!"라고 말이다. - 71쪽 

  
에밀 시오랑과 아나톨 프랑스를 알고 읽어본 이만이, 그리고 밀란 쿤데라를 알고 있는 이만이 위 문장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의 독자는 한정되어 있고, 시간이 흐를수록 독자의 수는 줄어들 테지. 


  

- 이 책에서 언급되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인터뷰는 이 책에서 나온 것이다. 데이비드 실베스터와의 인터뷰인데, 얼마 전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 에밀 시오랑의 책은 3권이나 번역되었다. 허무주의적 아포리즘으로 유명한 에밀 시오랑은 젊은 시절 프랑스 파리로 온 이후 루마니아로 돌아가지 않고 프랑스어로 작품을 활동하다가 죽는다. 20세기 프랑스 문필가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프랑스어를 구사한 몇 되지 않는 이로 손꼽히지만, 번역된 책에서는 이를 온전히 느낄 수 없고 다만 그의 도저한 허무주의만 알 수 있을 뿐이다. 



2. 
"한 쪽에는 그 어떤 열정도 생기를 불어넣을 수 없는 무관심한 사람들, 소심한 사람들, 이성적으로 사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다른 한 쪽에는 감정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논증은 거의 이해할 수 없어 보이며, 감성으로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후자들은 늘 유죄를 선고하곤 했다."
- 아나톨 프랑스, <신들은 목마르다> 중에서 

아나톨 프랑스의 장례식이 프랑스 국장(國葬)으로 치러지고 난 다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나톨 프랑스에 대한 기묘한 침묵에 대해, 심지어 아나톨 프랑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시대에 뒤쳐지고 취향이 이상한 사람처럼 비춰지는 것에 대해 밀란 쿤데라는 아나톨 프랑스를 인용하며, 프랑스 지식인들의 감정적인 비판을 꼬집는다. 

하지만 비단 프랑스 지식인만 그럴까. 위 문장을 읽으면서 나는 한국의 진보적이라는 지식인들을 떠올렸다(실은 전혀 진보적이지 않은!). 마치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논증하는 듯 싶지만(왜냐면 현란한 이론가를 인용하거나 뭔가 그럴싸한 주의, 주장으로 언어를 구사하기에), 결국엔 감정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판단내리니까. (그리고 한국의 보수적이라는 지식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한국엔 보수란 없다. 보수적 지식인이라고 하는 이들 대부분 한국에선 진보적이라고 봐야할 수준이다) 


3.
구드베르구르 베르그손은 위대한 유럽 소설가이다. 그의 예술에 첫 번째로 영감을 준 것은 사회적 또는 역사적 호기심이 아니고, 지리적 호기심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실존적 추구이며 진정한 실존적 치열함이고, 이 덕분에 그의 소설은 (내 생각으로는) 소설의 현대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정중앙에 자리를 잡는다. 

바로 인간은 자신의 나이 속에서만 존재하고, 모든 것은 나이와 함께 변한다는 점이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가 지금 먹어가는 나이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나이의 수수께기, 오직 소설만이 밝힐 수 있는 주제들 가운데 하나다. - 49쪽 


구드베르구르 베르그손(Gudbergur Bergsson)은 처음 듣는 이름이다. 밀란 쿤데라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싫어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그의 글에서 내가 좋아하는 이름들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란! 가령 크세나키스! 


    

- 베르그손이 표지로 나온 책. 그리고 그의 소설, <백조 The Swan>의 영역본 표지. 




4. 
이 책은 밀란 쿤데라의 산문집이다. 프란시스 베이컨에 대한 글에서 시작해, 그가 아끼는 몇 권의 소설과 소설가들, 아나톨 프랑스가 프랑스 지식인들의 작가 리스트에서 기묘하게 사라지게 된 것에 대한 조소, 지금은 사라진 체코, 프라하의 봄, 망명한 체코 지식인들에 대한 이야기, 크세나키스, 야나체크와 쇤베르크의 음악, 말라 파르테의 소설에 대해 쓴 글들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이 책이 즐거운 이유는 바로 아래같은 이유다. 바르트를 좋아하냐는 프랑스 젊은이의 물음에 대해 밀란 쿤데라는 이렇게 말한다.

"물론 좋아하죠.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어요! 카를 바르트를 말씀하시는 거잖아요! 부정신학의 창시자 말예요! 천재예요! 바르트가 없었다면 카프카의 작품은 상상할 수도 없었을 걸요!" - 69쪽 

밀란 쿤데라는 그 젊은이가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에 대해 묻고 있음을 알지만, 카를 바르트(Karl Barth)를 이야기한다. 카를 바르트를 모를 그 젊은이를 위해 카프카를 살짝 언급하면서 '너랑 더 이상 이야기하기 싫어'라며 속내를 비친다. 이 얼마나 현란한 거부인가! 


5. 
고백하건대, 내가 현재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밀란 쿤데라다. 내가 얼마나 그를 좋아하는지, 이 짧은 산문집을 읽으면서 다시 알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들, 김승옥, 르 클레지오, 뒤라스, 주제 사라마구, 이탈로 칼비노를 지나, 밀란 쿤데라. 

이 글을 쓰면서, 문득 밀란 쿤데라는 프랑스 사람이 아니라 지금은 사라진 체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가 아무리 불어로 글을 쓴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에밀 시오랑이 루마니아 사람이듯. 그래서 번번히 후보로만 언급될 뿐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하는 건 아닐까. 그보다 한참 문학성이 떨어지는 모디아노가 받는 그 문학상을 말이다. 일본의 하루키가 받게 된다면, 아, 밀란 쿤데라는 어쩌란 말인가. (내가 알기로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글을 써서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는 사무엘 베케트가 유일한 듯 싶다)  하긴 20세기 후반 가장 위대한 소설가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도 받지 못했으니. 좀 우습긴 하다. 

 




만남 - 10점
밀란 쿤데라 지음, 한용택 옮김/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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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푸른 이야기(une histoire de bleu) 
장 미셸 몰푸아(Jean-Michel Maulpoix) 지음, 정선아 옮김, 글빛(이화여대출판부) 






늦가을, 잔잔히 비 내릴 때, 하늘의 흐느낌을 듣고 있다고 상상해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럴 때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착잡한 눈물을 슬레이트 지붕과 아연 홈통을 두드리는 맑디맑은 빗물에 보태는 일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매우 부드러운, 거의 평온해진 동작이다. 이 시각, 이 계절에, 우리는 언어를 뒤흔들지 않고, 거기에 우리 자신을 내맡긴다. 이번만큼은 그 적절함이 빗줄기의 속삭임과 유리창의 어둠에 정말 잘 어울린다고 확신하며. 그 순간, 뜻이 확실치 않아 오래 전부터 밀쳐두었던 책 몇 장을 다시 읽어보고 싶으리라. 이번에는 그 감동을 되찾고 그 의미를 이해할 거라고 확신하며. 그래서 만일 펜을 들게 된다면, 무엇을 발견하기보다는 기억해내기 위해서이리라. 자신의 얼굴이 비친 수면 위로 마침내 몸을 숙이듯. 
- 144쪽
 

몰푸아의 시집을 읽으면서 작고 낮은 웃음을 천천히 흘러 나왔다. 번역 시집을 읽으며 이런 기분에 빠진 건 정말 오랜만이니, 역자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다. 푸른 바다에 대한 끝없는 무한과 사랑, 그리고 서정성에 대한 시집이다. 감미롭고 부드러우며 읽는 이의 마음을 스다듬는다. 

아주 드물게, 좋은 번역 시집은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평범한 단어들로만 구성하여 풍부한 시적 풍경을 만들고 그 속에 독자를 안내한다. 이 시집도 여기에 속한다. 아주 드문 번역 시집에. 


청명한 날이면, 난바다는 찬란히 부서진다. 

하얀 기와 얹은 하늘. 낮잠에 취한 바다가 잉크빛 기다란 상처 자국을 수평선의 뺨에 새긴다. 그곳에 돛단배들이 고요한 한길을 내고 새를 키우는 사람의 순백색 사랑을 심는다. 

수풀 넘쳐나는 정원들은 박하, 물망초, 봉숭아 향 날리며 난바다를 향해 더 높이 자란다. 페인트칠한 나무발코니에 뱃사람들의 가슴이 물거품처럼 튀어오르면, 라일락 꽃잎 술렁이는 소리가 바다로 곤두박질친다.

바다의 대기실에서 보낸 어느 여름날 일요일. 드리워진 커튼이 조금 벌어져 있다. 불빛이 깜박인다. 바다의 투명한 물결이 왁스 칠한 가구와 종이 위로 흐르며 잔잔히 흔들린다. 출범을 앞둔 빈약한 함대 한 척. 그리고 물살 위의 배처럼 살랑대는 한 편의 시. 알 수 없는 욕망 하나 눈을 뜬다, 아니 잠든다. 난바다를 향해 문들이 살짝 열리다 이내 다시 닫힌다. 몽상에 젖은 자, 손가락을 푸르름에 적시면 그의 몸은 이윽고 모래가 된다. 
- 16쪽 


시의 제목처럼 첫 문장 하나가 떨어져 나오기도 하고, 아예 없기도 하다. 전체가 하나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서사적인 테마를 가지고 있지 않다. 짧은 시들이 모여 어떤 지향을 가지긴 하나, 이는 비평가에게 맡길 일이니, 우리는 그저 읽으며 조용해질 뿐

'무한은 인간의 문제'라고 여기는 몰푸아는 이 시집을 통해 자신만의 시론(詩論)을 펼쳤는지도 모른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론인가! 


http://www.maulpoix.net/ (장 미셸 몰푸아의 홈페이지. 프랑스어로만 구성되어 있음) 



책의 마지막 부분에 인용된 폴 발레리의 문장. 






어떤 푸른 이야기 - 10점
장 미셸 몰푸아 지음, 정선아 옮김/글빛(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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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 2009년



* * 


요즘 자주 책을 읽다 사진을 찍는다. 

밀란 쿤데라. 

나는 솔직히 그가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하는 건 어떤 이유에서일까. 

너무 지적(知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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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누군가가 석유를 붓고 성냥으로 불을 붙인 다음, "신문 가져올 동안 좀 들고 있어"하며 내 손에 놓고 가서는 돌아오지 않아 불타고 있는 거대한 50센트 짜리 동전 같았다. (23쪽) 


가을은, 마치 육식 식물 속으로 질주해 내려가는 롤러 코스터처럼, 포트 와인과 그 진하고 달콤한 와인을 마셨던,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의 기억에서 오래 전에 사라진 사람들을 데리고 찾아왔다. (39쪽) 


나는 그녀와 섹스를 했다. 

그것은 막 1분이 되기 전의 영원한 59초와도 같았고, 아주 수줍게 느껴졌다. (52쪽) 


- 리처드 브라우티건, <미국의 송어 낚시> 중에서 



출처: http://www.pasunautre.com/ 



리처드 브라우티건을 읽으면 왠지 우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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