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파아란 영혼

현대소설 +58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The Sense of An Ending 

줄리언 반스(지음), 최세희(옮김), 다산책방



나는 우리 모두가 이러저러하게 상처받게 마련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80쪽) 



살아가면서 과거를 끄집어내는 일이 얼마나 될까. 삶은 고통스러워지고, 사랑은 이미 떠났으며, 매일매일 반복되는 무의미한 일상 속에서 이 세상은 한때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빛깔을 잃어버렸음을. 감미로운 허위만이 우리 곁에 남아 우리 겉을 향기롭게 감싸며 근사하게 보이게 만들지만, 그것은 언젠간 밝혀질 시한부 비밀같은 것. 그럴 때 그 과거는, 어쩌면 우리의 현재를 만들어낸 고통의 근원일까, 아니면 도망가고 싶은 이 세상 밖 어떤 곳일까. 


"토니, 이제 당신은 혼자야."라고 이혼한 아내 마거릿은 전화 속에서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아내의 목소리가 전화 속에서 사라져 버리지만, 토니는 별 반응이 없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 자신이나 아내 마거릿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마치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 듯, 자신의 인생도 그런 궤적을 그리며 평범하며, 이혼했으나 세상에서 가장 잘 자신을 알고 있는 마거릿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 믿는다, 혹은 착각한다, '우리 부부'라는 단어 속에서.  


늙어버린 토니 앞에 갑자기 등장한 과거는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다. 그저 과거일 뿐이며, 토니 밖에서, 사악한 질투심에 무너졌던 토니의 영향력 아래에서 어떤 우연이 만들어졌을 뿐, 토니는 토니이고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마치 다른 우주에 존재하는, 서로 만날 수 없는 행성들처럼. 


인간은 생의 종말을 향해 간다. 아니다, 생 자체가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 그 생에서 가능한 모든 변화의 닫힘을 향해, 우리는 기나긴 휴지기를 부여받게 된다. 질문을 던질 시간적 여유를. 그 밖에 내가 잘못한 것은 무엇이었나? (255쪽) 


과거 속에서 젊은 베로니카는 토니를 버렸고, 에이드리언은 그의 친구 토니를 버린 베로니카와 사랑을 나눈다. 그래서 뭘? 에이드리언은 질투심으로 눈이 먼 토니의 사악한 언어 앞에서 무너졌을까. 아니면 ... 


1부는 젊은 토니를, 2부는 늙은 토니가 화자로 나온다. 그리고 2부는 베로니카의 어머니 사라 포드 부인의 유언장과 자살한 에이드리언의 일기가 실마리가 되어, 토니의 기억을 새로 만들며, 인생의, 사소하지만 비극적인 우연에 대해 이야기한다.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이야기는 쉴새 없이 우리의 마음을 때리지만, 결말을 짐작하긴 쉽지 않다.  


1부의 토니와 2부의 토니는 서로 경쟁하며 결말을 향해간다. 결국 과거는 편집되고 윤색되고 변경된다. 과거는 현재에서만 해석 가능한 어떤 이야기일 뿐, 과거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존재한다면 그건 아무 의미도 없다. 서랍에 깊숙이 숨겨져 있는 어둠 속의 사진과 같은 것. 


의미는 해석되지 않는다. 이 소설은 갑자기 등장한 과거의 숨겨진 이야기를 끝에 가서 드러내지만, 그리고 그 이야기를 향해 모든 것들이 구성되어 있지만, 에이드리언의 자살을 설명하지 못한다. 실은 에이드리언의 자살이 도리어 살아남은 토니의 이기적인 평범함을 설명하게 되는 기묘한 이야기 구조는 도리어 악의적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지독히 냉소적이다. 


우리는 타인에게 관심없는 토니들이고 늘 혼자였고 앞으로도 혼자일 토니다. 사랑마저도 자기를 합리화해야 하는 것이고 그 사랑을 잃어버렸을 때조차 자신의 문제가 아닌 그/그녀의 문제로 환원시킨다. 이래저래 상처 받기 마련이라고 여기지만, 상처마저 자신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온 것이라 믿는다, 이러저러하게. 


마거릿마저 토니를 향해 '당신은 혼자야'라고 말했을 때,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늙은 베로니카가 '아직도 전혀 감을 못 잡는구나, 그렇지? 넌 늘 그랬어,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그러니 그냥 포기하고 살지그래'라며 토니를 질책했을 때조차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소설이 끝날 때까지. 


거기엔 축적이 있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 혼란이 있다. 거래한 혼란이 있다.(255쪽) 


소설은 이 마지막 문장으로 끝나지만, 책임은 혼란 속에서 사라져버리고 사람들은 저 마다의 상처를 가진 채 홀로 서 있을 것임을 예감하게 한다. 시간은 한 개인의 삶에 무신경하고 나는 사랑하는 너에게 관심이 있으나, 끝내 너를 알지 못할 것이다. 너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신비이니, 나는 너를 알려고 하지 않을 것이며 알려고 하는 모든 시도는 실패로 끝날 것이다. 에이드리언만이 과거 속에서 현재를 예감하고 미래에 절망했을 뿐이다. 토니의 내일에 대해 상상하지 말자. 그는 적당히 비관적으로 변할 테지만, 그렇다고 그의 삶이 급격한 변화를 겪거나 아픔을 겪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이 점에선 베로니카의 견해가 옳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고 혼자였던 어떤 이가 갑자기 우리가 되지 못한다. '우리 부부'라는 단어만큼 어색한 표현도 없을 텐데, 토니는 ... 그래서 나는 참 악의적이다라고 적는 것이다. 


할아버지 토니는 20대 토니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베로니카를 향해서도, 에이드리언을 향해서도, 마거릿을 향해서도. 결국 혼자인 토니는, 혼자 거리를 걸으면서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이었나' 스스로에게 묻겠지만, 금방 잊고 말 것이다. 





* 2017년 영화로도 만들어질 예정이다. 

The Sense of an Ending : http://www.imdb.com/title/tt4827986/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0


강상중과 함께 읽는 나쓰메 소세키 

강상중(지음), 김수희(옮김), AK 



강상중 교수의 책이 계속 번역되어 소개된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그의 책은 그 존재만으로도 한국과 일본을 잇는 가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한국이름을 쓰는 재일한국인으로, 그리고 일본지식인으로 살아가는 그는, 한국과 일본 너머 어떤 곳을 지향하는 듯하다. 적어도 강상중을 읽는 일본인 독자나 한국인 독자는 서로 대화를 나눌 정도의 식견을 가졌을 것이다. (손정의도 이와 비슷하고 그는 이미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을 넘어 세계인이 되었으니까)


이 책은 강상중 교수가 읽은 나쓰메 소세키에 대한 안내서이다. 나쓰메 소세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본 소설가다. 무라카미 하루키, 마루야마 겐지, 오에 겐자부로를 지나 나쓰메 소세키로. 그 중에서도 나쓰메 소세키는 단연코 최고다. 이는 그가 일본소설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20세기 초반에 이미 20세기 전체를 물들이게 될 어떤 근대성을 포착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강상중 교수는 <<살아야하는 이유>>(송태욱 옮김, 사계절출판사)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강상중 교수는 이 책에서 가볍고 부드럽게 그가 읽은 나쓰메 소세키를, 그리고 소세키의 소설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게 소세키의 생애와 주요 소설들에 대해 스케치를 하며 소개하고 있다.


사회는 어쩌면 미치광이들이 모여 있는 곳인지도 모르겠다. 미치광이들이 모여 맹렬히 싸우고 서로 으르렁거리고 욕을 퍼붓고 빼앗고, 그 전체가 집단적으로 세포처럼 무너졌다가 다시 솟아나고 솟아났다가 다시 무너지며 살아가는 곳을 사회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 중에서 다소 이치를 알고 분별이 있는 놈은 오히려 방해가 되니 정신병원을 만들어 가둬둔 채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자는 보통 시민이고 병원 밖에서 날뛰고 있는 자가 오히려 미치광이다. 미치광이도 고립되어 있으면 미치광이 취급을 받지만 단체가 되어 세력이 생기면 정상적인 인간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심한 미치광이가 돈과 권력을 남용하여 대다수 경미한 미치광이들에게 난동을 부리게 하고, 자신은 사람들로부터 훌륭한 사내라는 말을 듣는 예가 적지 않다. 

- <<나는 고양이로서이다>> 중에서 


어쩌면 반-시대적이며 지식인 중심적인 소세키의 소설을 부담스러워할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 좋을 것이다. 나 또한, 아직 <<나는 고양이로서이다>>를 읽지 않았지만, 소세키 소설이 가진 태도를 이 책을 통해 보다 명확하게 알게 되었고 할까. 


그리고 몰랐던 사실 하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에 대해 나쓰메 소세키는 소설 속에서 매우 냉정하고 객관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동시대와의 거리 두기가 소세키 소설이 시대를 넘어 감동과 울림을 가지게 된 계기가 아닐까. (1,000엔 지폐에 원래 이토 히로부미가 인쇄되었는데, 주변국의 반발로 나쓰메 소세키로 바뀌었다는 사실은 이에 비추어 무척 흥미로운 일이기도 하다) 


솔직히 나야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에 대해 열광하지만, 일부 독자들에게 소세키는 다소 어렵게 느껴진다는 사실을 역자 후기를 통해 처음 알았다. 어쩌면 일종의 교과서 소설에 대한 반감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점에서도 이 책은 나쓰메 소세키에 대한 재미있고 유용한 지침서가 될 것이다. 그리고 강상중 교수는 더 깊이 들어가지 않고 딱 그 수준에 맞추어 서술해내간다. 



* 최근 현암사에서 나쓰메 소세키 전집이 나오고 있다. 아래와 같은 장정으로. 강력하게 추천한다. 나는 이 시리즈가 나오기 전에 번역된 소설들 다수를 구입한 상태지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0




그로 깔랭 - 내 생의 동반자 이야기.

에밀 아자르 지음. 지정숙 옮김.

동문선.

 

 

 

외롭지 않아? 그냥 고백하는 게 어때. 외롭고 쓸쓸하다고. 늘 누군가를 원하고 있다고. 실은 난 뱀을 키우고 있지 않았어. 그건 나야. 나의 다른 모습. 길고 매끈하지만,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내 모습이었어.

 

드레퓌스양을 사랑하고 있지만, 드레퓌스양에겐 말하지 않았어. 난 그녀의 눈빛만 봐도 그녀가 날 사랑하고 있다는 걸 느껴. 그래, 그녀와 난 엘리베이터에서만 이야기를 했을 뿐이지. 한 두 마디. 그 뿐이긴 하지만, 난 알 수 있어. 그리고 창녀로 만나긴 했지만, 우리는 서로에 대해 많은 부분을 공유할 수 있었지.

 

그로 깔랭을 동물원으로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삶이 바뀐 건 아니야. 외롭고 쓸쓸하다는 걸 숨기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을 뿐. 그리고 보면 그로 깔랭을 키우면서 난 날 숨기고 있었던 셈이군. 내 외로움을, 내 사랑을, 내 의도를, 내 진심을, ...

 

------------

 

참 슬픈 소설이다. 말을 하지 못하는 뱀 - 그로 깔랭을 키우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지만, 실은 뱀이 이 소설의 중심 주제는 아니다. 에밀 아자르가 이야기하고 싶은 바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교감을 나누는 삶이 파리라는 도시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선택하는 곳은 창녀집이다. 그 곳에서 이 주인공은 그가 사랑하는 드레퓌스양과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이 하룻밤 이후 그는 그로 깔랭과 떨어질 수 있게 된다.

 

그 정도로 거대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건 힘든 일일까. 그 정도로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얻지 못하는 것일까. 에밀 아자르, 로맹 가리가 왜 권총 자살로 자신의 인생을 끝내었는지 알 수 있을 것같다. 이 책 가득한 유머는 실은 '나 너무 외롭고 쓸쓸해'의 동어반복이며 주인공이 키우는 그로 깔랭이라는 이름의 뱀 또한 실은 주인공의 숨겨진 '반영물'이다. 즉 '꾸쟁(주인공이름) = 그로 깔랭', '인간 = 뱀'의 등식이 성립한다.

 

유쾌한 유머를 가장하고는 소설은 나에게 결정타를 날리며 끝을 맺는다. 

 

"빠리 같은 커다란 도시 속에서 사람들은 결코 허전함을 느낄 걱정이 없다."

 

----

 

(서울에서도 마찬가지지. 결코 허전함을 느낄 걱정이 없어. 이미 온 몸 가득 허전함 속에 파묻혀 있으니, 허전함을 알기나 하겠어. 로맹 가리... 나도 권총 자살로 마감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군.)

 

 

--- 


위 리뷰를 쓴 지도 10년이 넘었다. 다시 읽으니, 에밀 아자르, 혹은 로맹 가리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그가 사랑했던 진 세버그가 떠오른다. 그의 소설은 유머 속에서도 숨길 수 없는 비극을 담아낸다. 벗어날 수 없는 어떤 비극성을 포착한다. 서울에서도 사람들은 결코 허전함을 느낄 걱정이 없다. 늘 무언가를 해야 하고 쫓김을 당하고 불안해한다. 대도시에서의 일상인 걸까, 아니면 현대인의 운명일까. 그런데 이 책은 다시 나오지 않나? 로맹 가리의 책들이 다시 출판되던데 말이다. 


- 로맹 가리, 혹은 에밀 아자르.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0




현기증. 감정들 Schwindel. Gefühle

W.G.제발트(Sebald) 지음, 배수아 옮김, 문학동네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 우연히 일어난 피부 접촉은 늘 그랬듯이 무게도 중력도 없는 어떤 것, 실제라기보다는 허상과도 같은, 그래서 한없이 투명한 사물처럼 나를 관통해가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95쪽) 



'벨, 또는 사랑에 대한 기묘한 사실', '외국에서', 'K박사의 리바 온천 여행', '귀향'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단편소설집일까, 아니면 장편소설일까. 아니면 이 구분이 그냥 무의미한 걸까. 장편소설이 아니라 단편소설집이라고 하기엔 4개의 이야기는 하나의 주제의식을 공유하는데, 그건 여행(에의 기록/기억)이다. 서로 다른 인물들의, 서로 다른 도시로의, 서로 다른 시기 속에서의, 하지만 동일한 테마를 가진 여행의 기록(기억), 이 소설이 장편소설이 되는 이유이면서 제발트가 가지는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떠나는 것, 낯선 곳(혹은 잊혀졌던 곳)에서 머무는 것, 그 곳에서 자고 걷고 만나고 이야기하며 얇고 사소한 감정의 변화를 깊숙하게 느끼는 것, 그리고 기억해내는 것, 기록하는 것, ... 소설은 이렇게 구성되어 흘러간다. 하지만 우리가 익히 아는 그런 여행(의 기록)이 아니다. 


밖으로 나오는 길에 흰 염주비둘기 한 쌍을 지켜보았다. 비둘기들은 여러 번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날개짓 몇 번으로 나무 꼭대기 높은 가지로 위로 급격하게 떠올랐다가, 짧고도 영원하게 느껴지는 순간 동안 고요히 창공에 머문 다음 다시 앞으로 쏟아질 듯한 자세로 하강하며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나지막한 구르륵 소리를 냈고, 그 중 몇 그루는 이 백 년 이상 그 자리에 서 있었을 것이 분명한 키프로스 나무들 주변에서 날개를 고정시킨 채 커다란 원을 그리며 빙빙 돌았다. (70쪽) 


나로선 이 여행들(의 기록)을 따라가기엔 참 힘들었다. 서술은 빽빽하고 무거우며, 한 번 표현된 감정은 곧바로 사물이 되어 아래로 가라앉는다. 독자의 시선은 무거워진 분위기를 따라 아주 느리고 천천히 움직인다. 한참을 읽었다 싶지만, 고작 몇 페이지를 지났을 뿐이고 그와는 반대로 시간은 참 빨리 흐른다. 


감정을 서정적으로 이야기하는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도리어 딱딱하고 즉물적이다. 독자는 제발트의 서술을 따라가지만, 그 곳으로 감정이입되어 들어가지 않는다, 못한다.  


어쩌면 이것도 늙어간다는 징표일까,  아니면 제발트식 여행(의 기록)이란 그런 걸까. 낯선 나와 마주하거나 잊고 있던 나를, 혹은 내가 무심코 흘려보냈던 기억들을 새삼스레 되새기면서, 끊임없이 뒷걸음질치면서 타자화, 사물화하는 걸까. 여행을 하면서 나를 찾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나를 지워나가는 걸까, 그리고 스스로 수수께끼가 되는 걸까. 


그는 특히,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일이 내 안에서 저절로 설명되고, 그럼에도 그 일들이 더욱 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수수께끼처럼 변해간다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199쪽)


우리는 외부를 끝내 알 수 없다. 실은 내부도 알 수 없다. 내 마음은 텅 비었고 영혼의 존재를 알 수 없기에 믿을 수도 없다. 신념은 조각났고 소설은 의미 찾기를 그만 두었다. 고작 보여줄 뿐이다. 그것도 자세하고 정확하게. 감정마저도 객관적으로. 


제발트의 문장이 갖는 독일어의 밀도는, 역자로서의 경험이 참으로 빈약하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생각하기에, 문학 텍스트 중에서도 가장 치밀한 종류이며 그것이 갖고 있는 텍스처texture의 성질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252쪽) 


배수아의 의견대로, 너무 빽빽하고 무거워서 따라가기 버거울 정도다. 하지만 그녀의 '제발디언'은, 글쎄다. '제발디언'이라는 단어는 매우 사적인 호감을 드러내는 표현일 뿐, 일반 독자가 읽기엔 어렵고 재미없고 문장에 너무 많은 힘을 쓰고 있다고 할까. 마치 야니스 크세나키스(iannis xenakis)의 음악을 듣는 기분이랄까. 하긴 나도 크세나키스의 음악을 좋아하지만... 


소설 중간에 등장하는 피사넬로 작품은 아래와 같다. 고딕 양식의 성 아나스타시아 성당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다. 15세기 초반에 그려진 초기 르네상스 작품이다. 그나저나 이 작품의 일부를 소설에 등장시킬 생각을 하다니... 


St. George Liberating the Princess of Trebizond

Pisanello (1395 - 1455), fresco, 223 × 620 cm (87.8 × 244.1 in)

from 1436 until 1438

Church of Saint Anastasia (독일어 - Pellegrini-Kapelle)  


과감하게 읽으라는 권유는 하지 못하겠다. 다만 제발트가 살아있었다면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올라갔을 것이며, 노벨문학상을 받았거나 그만한 명성을 누렸을 것이라는 것이다. 


사족이긴 하지만 가끔 한국 문학판에 대해 아쉬운 건 번역된(혹은 번역되지 않더라도) 동시대 외국 문학이 어떻게 한국 작가들과 작품 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에 대해서 너무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설가 배수아의 초기 작품들을 읽고 나는 얼마나 실망했던가. 그 이후 그녀의 작품을 읽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오에 겐자부로가 십 수년 전 하루키를 비난했지만, 지금은 인정한다고 말했듯이, 그녀의 최근 작들이 궁금해진다. 적어도 제발트를 읽고 흔들렸다면 말이다. 



영어 번역판 표지



* 제발트의 다른 소설. 

2016/05/07 - [책들의 우주/문학] - 아우스터리츠Austerlitz, W.G.제발트Sebald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0





책상은 책상이다

페터 빅셀(지음), 이용숙(옮김), 예담 



뭐라고 해야 하나, 이런 경우를. 채 30분도 되기 전에 다 읽은 이 소설집. 뭔가 생각하기도 전에 금방 끝나버리는 소설. 그리고 누구나 조금의 관심만 있다면 한 번쯤은 생각하게 되는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진 짧은 소설들. 하지만 페터 빅셀은 이 소설들을 썼고,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에피소드라고 하기엔 지금 여기에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주인공들의 또다른 공통점은 대부분 나이가 많은 남자라는 사실이다. 정서적으로 유연한 여성들에 비해 남자들은 실제로 나이가 들어가면서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사회와 소통이 점점 어려워지는 경우가 더 흔하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젊은 작가 빅셀이 고집 세고 편협한 이런 노인들을 더 없이 따뜻하고 이해가 충만한 시선으로 그려냈다는 점이다. 지구가 둥근지 확인하려고 떠난 노인을 날마다 기다리는 작가, 또 요도크 밖에 아무 것도 모르는 할아버지를 애정으로 감싸는 작가의 태도는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세상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려는 작가적 사명감의 표현이다. - 옮긴이의 말 중에서, 101쪽


고집 세고 편협한 이런 노인들을 만난다면 우리들은 과연 어떻게 할까? 따뜻하고 이해가 충만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아니면 고집 세고 편협한 젊은이들을 만난다면? 과연?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사회와의 소통이 어려워진다면, 그건 그/그녀의 문제인가, 사회의 문제인가,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원래부터 그렇게 생겨먹은 문제인가. 


작가적 사명감은 이미 일어난 문제를 감싸 안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의 근원을 파고들어야 하는 건 아닐까? 페터 빅셀의 한계는 여기에 존재한다. 따뜻하고 감성적인 동화적 시선으로 현대의 문제를 바라보고 어물쩡 넘어가려는 것이다. 


다시 묻자. 당신 앞에 어버이연합의 할아버지가 자신의 고집을 내세우면서 싸우려고 든다면? 엄마부대 봉사단의 할머니가 나타나 편협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논리로 세월호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또는 일베에 빠져 당신의 의견에 대해 사사건건 반박하며 과격한 논리로 공격을 일삼는다면? 


이 소설은 이 지점에서 무너져내린다. 아마 많은 이들이 이 소설을 읽고 자신의 잘못, 소외되고 편협한 사고와 언어를 가지게 된 이들에 대해 무정하게 대했다는 것을 후회하고 반성한다면, 그건 잘한 일일까? 


글쎄다. 내가 읽은 이 소설집은 좀 형편없다. 많은 사람들이 읽고 감동했다지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0



풀베개

나쓰메 소세키(지음), 오석윤(옮김), 책세상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풀베개>>의 놀랍고 아름다운 시작은, 어쩌면 이 소설의 시작과 끝을 동시에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소설은 독자가 읽게 되는 첫 문장들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어쩌면 '하이쿠 소설'이라는 후대의 평가도 우호적인 것일지도. 



 산길을 올라가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지(理智)에 치우치면 모가 난다. 감정에 말려들면 낙오하게 된다. 고집을 부리면 외로워진다. 아무튼 인간 세상은 살기 어렵다. 

 살기 어려운 것이 심해지면, 살기 쉬운 곳으로 옮기고 싶어진다. 어디로 이사를 해도 살기가 쉽지 않다고 깨달았을 때, 시가 생겨나고 그림이 태어난다. 

 인간 세상을 만든 것은 신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다. 역시 보통 사람이고 이웃끼리 오고 가는 단지 그런 사람이다. 보통 사람이 만든 인간 세상이 살기 어렵다고 해도 옮겨 갈 나라는 없다. 있다고 한다면 사람답지 못한 나라로 갈 수 밖에 없다. 사람답지 못한 나라는 인간 세상보다 더 살기가 어려울 것이다. 

 옮겨 살 수도 없는 세상이 살기가 어렵다면, 살기 어려운 곳을 어느 정도 편하게 만들어서 짧은 생명을, 한 동안만이라도 살기 좋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시인이라는 천직이 생기고, 화가라는 사명이 내려진다. 예술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인간 세상을 느긋하게 만들고, 사람의 마음을 풍성하게 해주는 까닭에 소중하다. 

 살기 어려운 세상에서 살기 어렵게 하는 번뇌를 뽑아내고, 고마운 세계를 직접 묘사해내는 것이 시고 그림이다. 혹은 음악이고 조각이다. 자세히 말한다면 묘사해내지 않아도 좋다. 그저 직접 보기만 하면 거기에서 시도 생기고, 노래도 샘솟는다. 착상을 종이에 옮기지 않아도 보옥이나 금속이 부딪쳐서 나는 소리는 가슴속에 일어난다. 

- 7쪽~ 8쪽



하지만 소세키는 우리를,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나는 소설 속의 '나미 氏'와 같은 이를 그리워하고 있는 지도 모르고, 작중화자처럼 그런 여행을 꿈꾸고 있는 지도 모른다. 나에게 이 소설은 부러움의 대상인 셈이다. 


그래서 소설은 전쟁 중인 현실과 멀리 떨어져, 딴 세상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는, 아주 자주 딴 세상을 꿈꾼다. 그건 유토피아가 아니다. 그저 지금 여기를 벗어나 잠시 쉴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남 몰래 연애도 하고, 사랑도 하고, 경제적 불안이나 세상사의 갈등이나 불협화음에서 벗어나, 어떤 사색의 풍요로움 속에 빠지고 싶은 게다. 


이 소설은, 바로 이 사색의 풍요로움으로 넘쳐나며, 나미 氏의 가느다란 아름다움에 취해 있다. 소세키의 소설들 대부분이 현실 속에서 갈등하며 흔들리는 자아의 심리를 보여준다면, 이 <<풀베개>>는 그 갈등과 흔들림에서 한 발짝 옆으로 벗어나 꿈 속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소설 끝에서 나미 氏의 이혼한 남편이 등장하고 전쟁터로 나가는 규이치를 배웅해주는 장면에서, 주인공 화자가 그림 한 장면을 포착해내는 순간, 결국 예술의 창작은 꿈에서 벗어나 현실의 슬픔 속에서 나온다는 걸 이야기할 땐, 여행의 끝은 언제나 집으로 돌아오는 것임을 비극적으로 깨닫게 된다. 



나미 씨는 우두커니 떠나가는 기차를 보내고 있다. 그녀가 우두커니 서 있는 동안에, 이상하게도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애련이 얼굴 가득히 떠 있다. 

"그거야! 그거야! 그게 나오면 그림이 됩니다."

나는 나미 씨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속삭였다. 내 가슴 속의 화면은, 뜻하지 않았던 바로 이 순간에 이루어졌다. 

- 190쪽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0




아우스터리츠 Austerlitz 

W.G.제발트(지음), 안미현(옮김), 을유문화사 




병상에 누워, 안경을 쓰지도 못한 채,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를 읽었다. 병상에서의 소설 읽기란, 묘한 느낌을 준다. 일상을 벗어난 공간 속에서, 현실은 적당한 거리를 둔 채 떨어져있고, 허구와 사실은 서로 혼재되어 혼란스럽게 한다. 시간마저 겹쳐 흐르며 외부는 모호해진다. 어쩌면 현대 소설이란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마치 <<아우스터리츠>>처럼.  


제발트는 소설 중간중간 사진들이 인용하는데,  마치 '이 소설은 허구가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이다'라고 말하는 듯 보였다. 허구와 사실 사이를 오가며, 소설은 대화의 인용으로 이루어진다. 문장의 호흡은 길고 묘사는 서정적이면서 치밀하고, 등장인물들의 마음은 한결같이 슬프기만 하다. 과거는 추억이 되지 못하고 스스로도 모르고 있었던 내 마음의 상처를, 가족의 상처를, 현대의 비극을 다시 꺼내어 보듬고 어루만진다. 대화는 자주 끊어지지만, 기억은 이어지고 소설은 챕터도 없이 그냥 하나다. 시간은 끊김 없고 끊어져 있던 기억들도 그것 안에서 하나로 이어져있듯, 소설은 허구와 사실을 이어 하나로 만든다.


아직도 2차 대전의 상처를 드러내며, 정면으로 응시하며 나아가는 <<아우스터리츠>>를 보며, 요즘 한국 문학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낀다. 미국의 이창래도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정작 한국 작가들만 무관심한 듯 싶기도 하고...


<<아우스터리츠>>의 명성은 이 작품을 향하고 있는 문제 의식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소설 작법에서부터 전혀 다른 글쓰기를 보여주며, 현대 소설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있다. 그 스스로 '다큐멘터리 픽션'(1)이라고 이야기하듯, 이 소설은 사건 중심이라기 보다는 사실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몇 개의 중요한 사실들과 이를 연결하여 소설의 중심 뼈대(내러티브)를 만들고 그 뼈대는 다시 사진들, (건축)공간에 대한 서술, 인물들에 대한 탐구와 인터뷰 등으로 형체를 이룬다. 


그런데 이 작법은 소설 감상에 그 어떤 영향을 주지 않으며, 도리어 전쟁에의 상처, 가족의 비극, 그리고 쓸쓸한 회상 속으로 빨려들게 하며, 작품에 대한 몰입도를 높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소설적 완성도를 지닌다.

 


Bigsby(*) suggests that it was out of frustration with the strictures of academic publication that Sebald turned to creative writing (a vague and ungainly term that, by default, winds up being the most accurate generic description of his work). "He'd originally taught German literature," says Bigsby, "and had published the kind of books that academics do. But he got increasingly frustrated, and began to write in what he called an 'elliptical' way, breaching the supposed boundaries between fast and fiction - not what you're supposed to do as an academic." Sebald himself sometimes described his work as "documentary fiction," which goes some way toward capturing its integration of apparently irreconcilable elements. 


제발트는 학술 서적들의 심한 비난들에 대한 불만으로 문학창작(자연스레, 그의 작품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포괄적인 설명이 될 수 있는, 다소 모호하고 어색한 단어인)의 길로 들었다고 빅스비는 말한다. "그는 원래 독일 문학을 가르쳤어요"라고 빅스비는 말하며, "그는 학교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면 으레  하듯 몇 종의 책들을 출판했죠. 그러나 그의 불만은 계속 늘어났으며, 그가 말하는 '생략된(elliptical) 방식'으로이미 가정되어 있던 사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제발트에게 대학 연구자처럼 하라고 제시되어져 있던 기존 방식이 아니라." 제발트는 그 스스로 그의 작품을 종종 명백하게 양립할 수 없는 요소들의 결합을 포착하기 위한 어떤 방식들을 향해 가는,  "다큐멘터리 픽션"이라고 표현했다. 


- Why You Should Read W. G. Sebald BY MARK O’CONNELL 

THE NEW YORKER, DECEMBER 14, 2011

http://www.newyorker.com/books/page-turner/why-you-should-read-w-g-sebald  


Christopher Bigsby(1941~): 소설가, 비평가, 제발트가 있었던 University of East Anglia의 Colleague. 



'Elliptical'라는 단어에 대한 번역어를 좀 더 고민해봐야겠지만, 예전에도 한 번 언급했듯이 현대 소설, 아니 현대 예술가들은 스스로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에 대한 작법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해롤드 블룸은 이를 '시적 영향에의 불안'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우리 시대는 새로운 방식, 일종의 혁신을 추구해야만 하는 지점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W.G.제발트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여기에 성공하고 있다.  


-- 



(1) 제발트가 스스로 '다큐멘터리 픽션'이라고 이야기했으나, 그는 노벨문학상을 받기 전에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그리고 2015년 실제로 다큐멘터리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벨라루스의 논픽션 작가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제발트의 문학과 알렉시예비치의 작품은 확연히 다르지만, 제발트를 읽으면서 알렉시예비치를 떠올렸다. 번역된 제발트의 책들을 몇 권 더 챙겨 읽고 자세한 리뷰를 적어볼 생각이다. 그만큼 중요한 작가이기도 하다.알렉시예비치도 읽을 예정이니, 서로 비교해볼까 한다. 



W.G.제발트(Winfried Georg Sebald), 1944 -2001 






* 현대 예술가라면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종종 어떤 이들은 자신의 예술론을 책으로 내기도 한다. 이는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칸딘스키가 그랬고 미셸 빅토르, 로브-그리예, 오에 겐자부로, 심지어 이우환도 자신만의 예술론을 모아 책을 냈다. 아래 책은 미셸 뷔토르의 소설론이다. 소설 쓰기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2014/02/10 - [책들의 우주/이론] - 새로운 소설을 찾아서, 미셸 뷔토르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0





지도와 영토(La Carte Et Le Territoire)

미셸 우엘벡(지음), 장소미(옮김), 문학동네 





매우 선명하다. 이 소설을 읽은 지 네다섯달이 지났지만, 소설 속의 인물들도 선명하고 사건도, 내용도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놀란다. 소설을 읽으면서, 현대미술에 대해 이렇게 박식할 수 있다니, 감탄을 했다. 소설을 쓸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하며 책장을 넘겼지만, 문장, 인물, 사건의 선명함을 너머 어떤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오진 않았다. 도리어 씁쓸하기만 할 뿐. 



친구들도 이미 모두 죽고 어떤 의미로는 이미 과거에 속하게 된, 실질적으로 삶이 끝나버린 노인의 감정을, 형제나 친구처럼, 곧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리라는 약속처럼 죽음을 대하는 노인의 음산하고 담담한 감정을 프란츠 리스트가 말년에 작곡한 실내악 소품들보다 더 잘 표현한 음악은 아마 없으리라. <수호천사에게 올리는 기도>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자슬랭은 젊은 시절을, 학생 시절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 351쪽 



지금 독자는 그 자신과 어떤 연관도 없는 이야기를 읽는다. 고작 책값, 조금의 시간, 그리고 감정의 동요나 사소한 몰입 정도만 가지고. 그런데 미셸 우엘벡도 그렇게 소설을 적는 듯하다. 너무 차갑다고 할까. 마치 얼음처럼. 아무런 가치 평가도 없다. 심지어 주장마저도 없다. 제드나 우엘벡, 혹은 자슬랭의 입을 통해 나오는 이야기, 그 속에서 작가는 어떤 주장이나 가치판단을 내리는 듯 싶지만, 이마저도 차갑기만 하여 호소력을 지닌 주장이라기 보다는 무미건조한 기사처럼 읽힌다. 


결국 건조하고 차가운 대기와도 같은 문장과 서술로 인해 소설은 선명하고 직선들로만 연결되는 구조물을 만들어내지만, 그 그림자는 없다. 모든 등장인물은 정해진 방향으로 움직이거나 이미 움직인 후라, 그 어떤 후회나 반성도 하지 않는 듯 보인다. 최대한 감정이 억제된 인물들로만, 아니 미셸 우엘벡은 의도적으로 즉물적인 서술을 하고 있다. 그리고 무의미한 스틸사진들이 병렬적으로 구성되다가 하나로 합쳐지지만, 그건 제드의 죽음이다. 그것도 담담하게 서술될 뿐이다. 


어떤 이는 현대 미술의 뒷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평할 지 모르겠으나, 과연 그럴까.  '노인의 음산하고 담담한 감정', 아마 이 소설 <<지도와 영토>>를 지배하는 감정일 게다. 



  



그리고 그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는 순간, 펑펑 울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 * 


서평을 다 적고 다시 업데이트를 하다 보니, 문득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떠오른다. 묘한 동질감이 있다고 할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2

  • 이 저자라면... '복종'이란 책을 썼던 저자 아닌가요... 이슬람 문화를 무조건 나쁜 것으로 폄하해서 소설에 기술해서 논란이 되었던...

    • 말 많은 작가예요. "우엘벡이 누구인가? 1958년생, 보수적 정치성향에 극단주의자, 쓰는 글마다 센세이션을 몰고 다니는 도발적 싸움꾼. 프랑스 태생이지만 테러위협 때문에 현재 아일랜드에 거주 중."(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139) 시인 이장욱은 이렇게 적고 있네요. ~ 하지만 논란만큼 매우 중요한 소설가이기도 합니다. ~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조너선 사프란 포어(지음), 송은주(옮김), 민음사 




결국은 울고 말았다. 소설 끄트머리에 가서, 오스카와 엄마가 아빠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비극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지금 당장이라도, TV 방송 뉴스 채널로 가보라. 모든 뉴스들이 현대판 비극들로 도배되어 있다. 뉴스 앵커나 기자들은 자신들과는 무관한 일인양, 무미건조한 어조와 '이건 진짜야'라는 눈빛으로 또박또박 분명한 목소리로 말한다. 


하지만 오스카는 아빠를 찾아나선다.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아빠를. 



첫 번째 메시지. 화요일 오전 8시 52분. 누구 있니? 여보세요? 아빠다. 있으면 받으렴. 방금 사무실에도 전화했는데 아무도 받지 않는구나. 잘 듣거라, 일이 좀 생겼어. 난 괜찮다. 꼼짝 말고 소방수가 올 때까지 기다리래. 아무 일 없을 거다. 상황을 좀 더 알게 되면 다시 전화하마. 그냥 아빠는 괜찮으니 걱정 말라고 전화했어. 곧 다시 걸게. 


아빠로부터 네 개의 메시지가 더 와 있었다. 9시 12분, 9시 31분, 9시 46분, 10시 4분에. 나는 그것들을 듣고 또 들었다. 무엇을 해야할 지, 아니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어떤 기분이 들어야 할지 미처 알 겨를도 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10시 22분 27초였다. 

발신자 번호를 봤다. 아빠였다. 

- 35쪽 ~ 36쪽



소설은 어수선하고 수다스럽고 유쾌하기까지 하다. 아홉살 꼬마 오스카에겐 모든 것들이 호기심의 대상이자, 그리움의 대상이다. 사진들이 나오고 문장들마저 조각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소설 작법으로 비극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하고 빙빙 둘러가는 과정을 반영하다. 그래서 독자들은 빙빙 둘러, 오스카를 따라가며 9월 11일을 아주 천천히 떠올리며, 그 사건 한 복판에 있었던 어느 가족의 슬픈 이야기를 소설 결말부에 가서야 비로소 마주한다. 


소설에 대한 형식적 파괴, 또는 실험적인 변화가 작품 속 깊숙히 들어가 어우러져 있다. 그래서 스토리와 형식은 하나의 형태를 지니며, 이 소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 원하지 않던 비극과 그 비극을 극복하기 위한 가족의 노력을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0





자화상

에두아르 르베 Edouard Leve 지음, 정영문 옮김, 은행나무 




소설일까? 그냥 일기일까? 자서전일까? 에세이일까? 예술 형식에 대한 구분이 호소력을 가지지 못하는 시대에, 장르를 적는 건 무의미하다. 책 표지에 적힌 '장편소설'이라는 단어가 부적절해보인다. 


이 책의 서술, 그것이 진실인지, 허위인지 에두아르 르베를 제외한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심지어 에두아르 르베는 이 짤막한 글 속에서 자신이 여든 다섯 살에 죽을 것임을 예감하지만, 마흔 둘의 나이로 자살하니, 이 책 자체로 일종의 부조리일지도 모른다. 실은 내 일상이, 내 인생이, 이 세상이, 이 우주가 다 부조리하고 무의미하지만, 우리는 죽을 힘을 다해 그걸 부정하고 있지. 


이미 죽은 자의 자화상.  


서로 연관성 없는 문장들은 병렬적으로 나열되며 대기가 되고 구름이 되고 자화상의 하늘이 된다. 하지만 그 속에서 그 어떤 의미도 구할 수 없다. 개별 문장들은 일종의 취미판단일 뿐, 가치판단은 아니다. 단지 자신의 선호를 나타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더욱 개별적인 산문이 되고 유명론(Nominalism)적 가치를 지닌다,고 볼 수 있을 지도. 


짧지만, 읽기 어렵다. 어떤 문장은 흥미롭지만, 어떤 문장은 재미없다. 취향이 특이하지 않고 세계 비판적이지도 않다. 그저 보여줄 뿐이다. 어쩌면 일종의 유서이거나 기록일지도 모른다. 


형식적으로 무척 흥미롭지만, 문학적으로 대단하다고 보긴 어렵다,고 적지만, 자신없다. 실은 이런 식의 작법으로 글을 쓰고 싶어졌다. 일종의 시리즈물이 나오면 어떨까. 예술가들이 돌아가면서 르베 식의 자화상을 쓰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이면, 정말 가치있는 무의미의 축제가 될 지도. 



*    * 


에두아르 르베는 사진작가다. 그의 사진 몇 장을 찾아 올려본다. 소설 <<자화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진 모르겠다. 


 

Reconstitutions by Edouard Leve 





몇 장의 작품들을 찾았으나, 많진 않다. 포르노그라피 연작들이 눈에 띈다. 



Sans titre (de la serie Rugby)

edouard leve




에두아르 르베. 어느 프랑스 저널에 실린 르베의 사진 전시 기사에 실린 사진이다. 기자는 왜 이 사진을 실었을까. 소설과 달리 꽤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르베. 나도 강인해지고 싶다. 인상만으로도.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0


오에 겐자부로, 작가 자신을 말하다 
오자키 마리코 진행/정리, 윤상인, 박이진 옮김, 문학과 지성사 



이런 인터뷰집은 감동적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이 인터뷰를 위해 그가 냈던 소설들을 다시 읽었고(거의 50여 권에 이르는), 인터뷰를 진행한 오자키 마리코는 질문 하나하나에 공을 들인다.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을 읽은 지 십 수년이 지난 나에게도 이 책은 <<개인적 체험>>, <<동시대 게임>>, <<조용한 생활>>을 읽던 그 때 그 기분에 빠져들게 만들기 충분했다. 도리어 최근 들어 오에 겐자부로를 읽지 않았구나 하는 후회까지 들게 만들었으니.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목적은 분명해 보인다. 소설가의 일반적인 인터뷰집이라고 하기엔 문학(이론)적이고 다양한 작가들-일본 작가뿐만 아니라 전 세계 작가들-이 등장하고 오에 겐자부로 소설들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갖추고 있어야만 제대로 읽을 수 있다. 

그는 한 때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내가 예전에 쓴 글에서 오에 겐자부로의 의견을 인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 때 부정적이었음을 인정했고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 나름의 방식으로 앞으로 걸어가고 있다고, 노벨문학상까지도 가능할 것이라고 말한다.(나는 <<해변의 카프카>> 이후 하루키를 읽지 않았다.) 


외국어에서 받아들인 것을 일단 메이지 이후의 일본 문장체로 전환하고 그런 후 나의 소설 문장으로 만들어 가지요. 
그런데 바나나 씨나 무라카미 씨는 외국 문학을 자신의 육체로 온전히 받아들이고 자신의 육체로부터 문어체가 아니라 오히려 구어체, 일상 회화와 같은 문체로 자연스럽게 방출시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내 소설의 문어체, 즉 쓰기 언어적인 특질이 과거의 것이 되고 그 다음 단계로 살아있는 구어체 문장을 두 작가가 만들기 시작했지요. 더구나 무라카미 씨는 요즘 들어 자신의 구어체를 새로운 문체로 향상시키고 있다고나 할까, 확고히 굳히고 있어서 세계 곳곳에서 작품들이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신선한 눈부심은 나로서는 달성 불가능한 것이지요. 
- 264쪽 


문체에 대한 이야기다. 외국문학에서 영향 받았음을 숨기지 않고 외국문학에서 유래한 문장을 일본어 문장으로, 그리고 그만의 독자적인 문체로 만들어나가고 있음을 밝힌다. 그렇다면 한국어 문장이라는 건 뭘까? 


역자가, 예를 들어 엘리엇의 시상 속으로 깊이 집중해 들어가서 엘리엇을 일본어로 자기 안에서 공명시키기 위해서는 이 단어 밖에 없었구나 ... ... 그런 사정을 내가 알 수 있을 정도의 번역을 보면, 그것을 옆에 두는 것만으로도 내 안에서 나의 언어가 조금씩 솟아나옵니다. 
- 274쪽 


한국에서는 이제 번역 시집은 팔리지 않고 아예 새로운 시집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건 어쩌면 독자의 문제가 아니라 문학 종사자들의 문제가 아닐까. 동시에 세계의 다양한 언어들로부터 영향받아 우아하게 변할 수 있었던 한국어 문장은, 번역 문학의 영향이라는 문제를 도외시한 채로, 정체 불명의 시장(market) 언어로부터 몰락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자신들은 번역 문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번역 문학에 대해, 번역된 문학의 문장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던, 도리어 어떤 소설가의 소설을 두고 번역투의 문장이라며 비난했던. 그러니 좋은 번역문학가가 드물고 좋은 번역에 대한 관심도 없다. 아예 언어에 대한 사랑 자체가 없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이 책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외)국어와 문체가 된다. 

소설가로서 살기 위한 조건은 두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자신의 문체를 만드는 것이 가능한가, 아닌가. 다른 하나는 이야기를 만드는 재능이 있는가, 없는가. 
- 52쪽 

 
오에 겐자부로는 그가 영향을 받았던 많은 작가들을 언급한다. 윌리엄 블레이크, 맬컴 라우리, 토마스 엘리엇, 오든 등 그는 많은 외국 문학 작품들과 작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하면서도 일본어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동시에 묻어난다. 실은 프랑스어와 영어가 자유로운 것이 그가 세계 문학으로부터 다양한 영향을 받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실로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지금 가장 주의하고 계시는 것은? 
"와타나베 가즈오 선생님이 말씀하신 '스스로의 믿음에 빠진 기계가 되는' 것. 노년이란 정말로 그런 방향으로 하락해가는 듯해서요." 
- 416쪽 


그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후 일본 천황이 주는 문화훈장을 거부했다. 지금도 그는 문학가로서 할 수 있는 바 현실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있다. 그가 한 때 석방을 위해 노력했던 시인 김지하와 대비되는 모습이다. 한국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모두 '스스로의 믿음에 빠진 기계가 되는' 듯하다. 오에 겐자부로가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년의 작품late work'를 자주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까. (* 에드워드 사이드,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마티)


"고향을 잃은 망명자는, 언제까지나 안주하지 않고 중심을 향해 비판하는 힘을 지속한다." - 에드워드 사이드 


아마 올해도 노벨문학상 발표 때가 되면 한국의 몇 명 작가들 집 앞으로 기자들이 몰려갈 것이다. 하지만 몰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참 부끄럽다고 여긴다. 한국 사회는 날로 형편없어지는데, 그 사이에 한국 문학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작년 슬픈 사건 때 잠시 들렸을 뿐... ... 그것도 문학계의 원로들은 사라진 자리였다. 오에 겐자부로가 칠순의 몸을 이끌고 나와 원전 반대를 말하던 것과는 사뭇 대비된다. 


마지막으로 오에 겐자부로가 어학 공부에서 중요한 것이라고 말한 걸 옮긴다. 영문학과를 다니고 있긴 하지만, 외국어 공부는 참 어렵다. 다시 마음을 잡아야겠다. 


어학 공부에서 중요한 것은?
"사전을 세심하게 찾아보는 것. 정말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문장(시에서도)은 카드에 옮겨두고 외워버릴 것. 붉은 줄을 그어둔 책을 시간이 지나 몇 번이라도 다시 읽는 것.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시에서도)은 자신의 일본어로 번역해보는 것. 같은 작품을 두 가지 외국어로 읽어보는 습관을 기르는 것." 




오에 겐자부로, 작가 자신을 말하다 - 10점
오에 겐자부로 지음, 윤상인.박이진 옮김, 오자키 마리코 진행.정리/문학과지성사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2

  • 일본 작가에 대한 견해는 항상 보류하는 저이지만...

    마지막에 외국어 공부부분만큼은 정말 최고의 공감력을 이끌어 내는 좋은 조언을 해준 작가이군요 !!!!

    • 오에 겐자부로, 아베 코보, 특히 나쓰메 소세키는 정말 대단한 작가들입니다. 아직 야스나리는 읽지 못했는데, 올해 한 권 정도 읽어볼까 하고 있고요. 몇 명의 일본 작가들은 세계적으로도 대단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작가들이 더 분발해야 되는데, 그러기엔 출판 시장이 작고 독자의 층도 너무 얇죠. ㅜㅜ



"예, 그럴 겁니다! 백작은 이른 아침, 정확히 8시 반에 일어났다. ... ... 백작 부인은 목 둘레에 화려한 레이스가 달린 라일락 꽃무늬 드레스를 차려입었다. ... ... 테레지나는 몹시 배가 고팠다. ... ... 루크레지아는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었다. ... ... 오, 세상에!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있습니까? 우리는 한줄기 태양광선을 채찍 삼아 쉼 없이 회전하는 보이지 않는 팽이 위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 연유도 모른 채, 결코 목적지에 도달하지도 못하면서, 우리에게 때로는 더위를 때로는 추위를 선사하고, 혹은 쉰 번쯤 혹은 예순 번쯤 회전한 후에는 죽음을 - 대개는 어리석은 짓만 범했다는 아쉬움과 함께 - 선사하기 위해 그저 그렇게 돌고 도는 데에 재미 붙인 양 미친 듯이 회전하는 모래 알갱이 위에 우리가 놓여 있는 것 아닐까요? 신부님, 코페르니쿠스가, 바로 코페르니스쿠스가 휴머니티를 더는 회복할 수 없을 만치 파괴시켰습니다. 우리가 이룬 그 모든 잘난 발명과 발견들로 인해, 어느덧 우리 자신이 무한히 작은 존재라는 새로운 개념에 서서히 젖어 들었어요. 그러고는 스스로를 우주 속의 보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자각하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들 개개인의 불행뿐 아니라 인류의 총체적인 불행에까지요. 우리들의 이야기는 이제 한낱 버러지들의 이야기에 불과해요. 앤틸리스 제도의 작은 재난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별거 아닙니다. 그 폴란드 참사회원의 주장대로, 아무런 목적 없이, 돌고 도는 데 진력이 난 가엾은 지구가 다소 인내심을 잃고 급기야 제 몸의 무수한 출구 중 한 곳에서 불꽃을 좀 뿜어내고 말았지요. 대체 무엇이 그토록 지구를 분노케 했을까요? 아마도 그것은 지금보다 더 한심한 적이 없었던 인간들의 우매함일지도 모릅니다. 그만두죠. 햇볕에 그을린 무수한 버러지들. 그래도 우린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 루이지 피란델로, <나는 故 마티아 파스칼이오> 중에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0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The Theory of Light and Matter 

앤드루 포터 Andrew Porter (지음), 김이선 (옮김), 21세기북스 

http://www.andrewporterwriter.com/ANDREW_PORTER/Andrew_Porter_-_Writer.html




연거푸 영어권 작가들의 단편 소설집을 읽었다. 줌파 라히리, 앨리스 먼로, 그리고 앤드루 포터. 그들에게서, 겉으로 드러나는 어떤 차이보다 보이지 않는 공통점을 발견했는지도 모르겠다. 사건들과 인물들을 사이에 서서, 그 숱한 감정들에 휩쓸리지 않으며, 쓸쓸한 냉정을 유지하며, 아파하면서도 이를 드러내지 않고 사랑을, 혹은 미래를 믿으며 살아가는(남는) 것... 어쩌면 21세기 초반 동시대 단편들이 가지는 특징일까.  


그리고 앤드루 포터에게서는, 사건 속에 있지만, 사건에 대해서 그 어떤 것도 판단내리지도, 결정하지도, 행동하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서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과 만나게 된다. 


절망적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희망적이지도 않은 모습. 그렇게 그저 사라질 뿐인 우리들의 모습. 한때 마음 속 깊이 사랑했지만(아니면 사랑이 아닌 어떤 사랑인지도 모를), 단 한 번도 고백하지 못했던 불륜의 연인처럼. 



로버트의 와인을 마시면서 거기 어둠 속에 앉아, 결국, 어쩌면 몇 시간 동안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결국에 나는 떠나야 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 131쪽 



소설 속에선 아직 추억으로 펼쳐지지만, 끝내 망각될 흔적이다. 


서로에게 입히는, 혹은 스스로 입는 상처에 대해 알지만, 아는 것과 그 상처를 치료하는 것, 그 상처에 반항하고 저항하는 것은 무관하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서로 다르고, 이제 만나지도 않는다. 아는 것은 그저 아는 것일 뿐이고 움직이는 것은 그저 움직이는 것일 뿐이다. 빛과 물질은 다르고, 빛은 물질을 통과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에 빛이 한 번도 가 닿은 적이 없거나 물질이 빛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알고 있다는 사실마저도 부정하는 건 아닐까. 그래서 이미 알고 있는, 그러나 견디기 힘든 진실이 드러나는 것이 무섭고,이미 떠나버린 그가, 그녀가 내 곁을 떠났음을 공식적으로 알려오는 것이 두려워, 내가 먼저 떠나는 것으로 꾸미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우리가 다 알고 있다고 믿지만, 이젠 알아도 아는 것이 아니다. 포스트모던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진정으로 알고 있는 것, 조금의 노력으로도 실체를 알 수 있음에도, 그래서 이미 알고 있음에도 그것을 부정하는 것. 사랑 앞에서 사랑을 부정하는 것. 미래 앞에서 과거를 핑계삼아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 앤드루 포터의 소설들은 휴머니즘을 버리지 않지만, 휴머니즘 앞에서 한없이 주춤거린다. 그는 무척 힘들게 이 소설들을 썼을 것이고 지금도 참 고통스럽게 글을 쓰고 있을 게다. 


주춤거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 21세기의 도시는 우리에게 생의 열정 대신 병든 마음까지 치료한다는 정신의학과 배 고프면 언제든 허기를 해결할 수 있는 편의시설들을 가져다 놓았으니,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을 잃어버렸으나, 그걸 알고 있으나, 그것을 모르는(외면한) 상태다. 


끝없이 주춤거리다, 주춤거리다, 죽을 생이다.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못할 생이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 8점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21세기북스(북이십일)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0


그저 좋은 사람 (원제: Unaccustomed Earth 길들여지지 않는 땅) 

줌파 라히리Jhumpa Lahiri (박상미 옮김), 마음산책 





출처: http://www.telegraph.co.uk/culture/books/10304137/The-Lowland-by-Jhumpa-Lahiri-review.html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이란 단어가 등장한 것이 헬레니즘(Hellenism) 시대였으니, 이 시기는 고향을 떠나 바다 건너 도시로, 전 세계가 고향이 되거나 고향이 사라진 때였다. '사랑하면서 동시에 미워한다'는 이율배반적 싯구가 역사 최초 등장한 시기였으며, 전쟁으로, 혹은 폭정으로 몰락하는 도시를 뒤로 하고 새로운 도시를 향해 떠나던 시기였다. 젊은 알렉산드로스 3세가 길을 떠나 돌아오지 않았고 사랑은 없고 사랑하는 나만 있었던 시대였다. 어디서 왔는지 묻지도 말고 사랑하냐고 좋아하냐고 묻지 말고 그저 하룻밤을 보내던 연인들의 시대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시대가 다시 도래했으니, 바로 20세기 후반 이후의 우리 시대다. 


줌파 라히리(Jhumpa Lahiri), 익히기도 어려운 이름을 가진 그녀의 소설을 읽었다. 그녀는 미국인인가, 영국인인가, 인도인인가? 아니면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건가? 깨진 도자기 파편이든지 집터의 흔적이든, 역사적 기록이 가능한 이래, 한 번도 코스모폴리탄을 경험한 적이 없었던 한국 사람들은, 한국 독자들은 줌파 라히리가 던지는 메시지를 알기나 할까? 


나는 이 소설집을 아주 길게, 혹은 띄엄띄엄, 이미 지쳐버린 사무실의 텅빈 점심 시간에, 하루에 꼭 두 번씩 정지했으면 하고 바라는 지하철 안에서, 외로워 마시는 술 한 잔이 목을, 위를, 온 몸을 적실 때마다 더 외로워지는 술자리에서, 나와 피부색이 다른, 아빠나 엄마 한 쪽이 동남아나 아프리카계인 소년, 혹은 소녀가 소설가가 되어 문단의 화려한 조명을 받는 그 순간을 떠올렸다. 그 순간은 언제쯤 올 것인가. 많은 독자들이 열광하며 따르는 시대는 올 것인가. 


가끔 이런 생각을 하면, 한국은 참 절망적인 곳이다. 


줌파 라히리의 소설들은 단정하고 예의 바르며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는다. 어쩌면 모든 위대한 소설이 다 그러할 것이다. 읽으면 아프지만, 다 읽고 나면 '그래, 우리 삶이, 내 삶이 이렇지', 되뇌이게 된다. 


이 단편집은 미국에서 살아가는 인도 이민자들의 삶을 다룬다. 그런데 '이민(immigration)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는다. 인도 출신이라는 사실이 빠진다면, 평범한 미국인들의 가정 이야기다. 그렇다. 어디에서나 살아가는 건 똑같다. 줌파 라히리는 이렇게 보편성을 끄집어 내며,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사랑하지만,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헤어짐은 있으나,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이별이거나 좋은 추억으로 남는다. 최선을 다해 서로를 아낀다. 각자의 방식이 다르겠지만, 다르다는 건 축복이다. 갈등이 있고 오해가 있고 사건이 있을 수 있지만, 그건 지나가는 바람일 뿐, 서로 마주 잡은 손을 놓치지는 법은 없다. 어찌되었건 우리는 같은 땅 위를 살아가고 있으니까. 영원히 길들여지지 않을 그런 땅 위를 말이다.


오랜만에 참 좋은 소설을 읽었다. 이런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나는 글을 쓰는 고통을 이겨내지 못했다. 계속 노력했다면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 그래, 용기가 없었다. 어쩌면 내 인생이나 네 인생이나 똑같아라는 말을 하기 싫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줌파 라히리의 인터뷰는 글을 쓰는 이들에게 많은 것들을 다시 한 번 더 깨닫게 해준다. 




출처: http://blog.naver.com/lesliepak/220067661295 (번역해주신 에게해님께 감사하며)



그저 좋은 사람

줌파 라히리저 | 박상미역 | 마음산책 | 2009.09.05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2

  • 이베이에서 파는 75센트하는 중고책 구입해서 읽고 있는데요..첫번째 이야기부터 예사롭지 않네요. 첫소설로 퓰리처상 받았다는게 이해가 됩니다.

    • 아, 이베이! 이베이에서도 중고책을 파는군요(당연한 이야기지만). 영어로 읽으면 더 좋을 것같아요. 뭐랄까 편한 영어를 사용할 것같아요. 이창래의 소설을 영어로 읽으려다 포기한 경험이 있는 저로선. ㅜㅜ;;;
      줌파 라히리의 다른 소설도 읽을 계획인데, 밀린 책들이 너무 많아서 아마 내년 여름은 되어야 할 것같아요. ㅡ_ㅡ;;

셰익스피어의 기억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지음), 황병하(옮김), 민음사 





나이가 든다는 것, 그건 보이지 않는 것, 가려진 것, 지금 없지만 다가오는 공포에 신경쓰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지상에서의 시간을 쌓아갈수록 갑작스레 부는 바람에서 계절의 수상함을 알고, 사랑하는 여인의 뜬금 없는 키스의 따스함 속에 깃든 슬픈 이별의 메세지를 읽으며, 길을 지나는 이름없는 행인의 무표정한 얼굴 아래로 차마 말할 수 없는 인생의 고단함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나도 나이를 먹고 있었다. 


민음사에서 나온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전집 중 마지막 권인 <셰익스피어의 기억>을 읽었다. <모래의 책El Libro de arena>(1975)<셰익스피어의 기억La memoria de Shakespeare>(1983)을 묶어 번역한 이 책은 짧지만 보르헤스의 세계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소설집이다. 


나에게 보르헤스는, 내가 그를 알고 지낸 지난 20여년간 포스트모더니즘, 현대 소설가의 최고봉, 알레고리, 무수한 현대소설가에게 영향을 준 이, 백과사전, 자기반영성 등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나이가 드는 것, 죽는 것, 의미 없음의 공포를, 그리고 사랑의 위대함과 버려야만 완성되는 어떤 예술을 알고 있는 소설가였다. 


그의 문장은 짧고 딱딱했지만, 그 딱딱함은 거친 세월의 때가 묻은 낡은 나무 문짝의 것이었다. 알레고리와 은유로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도, 결국에는 우리가 잃어버린 사랑, 추억, 자기 자신을, 그리고 우리가 시작했던 문명의 시작을 되새기고 있었다.


대학 시절 읽었던 보르헤스는 없었고, 이제서야 보르헤스를 제대로 읽게 된 것이다. 며칠 전 번역되었으나, 아직 읽지 못한 보르헤스의 책 수 권을 주문해 읽기 시작했다. 





 







셰익스피어의 기억 - 보르헤스 전집 5

보르헤스저 | 민음사 | 2007.05.15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0


나의 아름다운 정원

심윤경(지음), 한겨레출판





언제 이 책을 샀던 걸까. 그리고 하필이면 이 소설이었을까. 몇 명 등장하지도 않는, 굳이 분류하자면 '성장소설' 쯤으로 이야기될 수 있는 이 소설은 두 명이 죽는다. 한 명은 그냥 사라지고 한 명은 죽고 ... 차라리 일종의 알레고리이거나 은유라면 좋을 텐데, 그렇진 않고 참 슬프다는 생각만 들게 하니, 눈물샘을 자극하는 순정 소설(만화가 아니라)같다고 할까. 


우리들의 성장은 과연 그랬던가. 누군가가 죽고 사라지고 정든 집을 떠나야만 성장할 수 있었던 걸까. 소년 화자인 '동구'는 몇 해 살지 못하고 죽을 여동생 '영주'의 탄생과 함께 소설의 시작을 알린다. 그리고 '영주'가 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읽기를 배우고 어두웠던 80년대 초 세상을 잠시 엿본다. 하지만 그 선생님도 사라지고, 할머니 - 어머니 - 아버지로 이어지는 가족의 갈등은 너무 일상적이어서 심각해보이지 않고 도리어 흔한 풍경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정신병원에 입원한 어머니를 만나고 오는 '동구' 앞에서 '우리는 가족이다'라고 강변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낯설게까지 여겨지는 건 내가 이상한 것일까.  


문장은 좋고 서술에 힘이 있어, 이야기를 쉬지 않고 앞으로 간다. 그래서 더 아쉬운 걸까. 아니면 우리들, 1970년대에 태어난 동구와 같은 세대인 나에게 이런 성장소설은 뭔가 맥이 빠지고 애처로움만 자아낸다. 


하지만 소설은 참 좋기만 하니, ... 그래도, 이야기는 이야기이고 작품성이나 예술성은 이야기의 완성 뒤에 오는 어떤 것이다. 이 소설은 이야기하는 방식은 빼어나지만, 딱 거기에서 멈춘다. 그래서 이야기에 몰입되지만, 이야기가 끝난 다음 알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이렇게 성장한 어떤 소년이 있었다는 정도. 그게 나는 아쉽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개정판]

심윤경저 | 한겨레출판 | 2013.12.13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0


미국의 송어 낚시Trout Fishing in America

리처드 브라우티건Richard Brautigan(지음), 김성곤(올김), 비채 




‘미국의 송어 낚시’氏를 만나는 것이 쉬워진 탓에, 읽기는 맥주 캔 마시기와 비슷해졌다,고 빨간 말보루 담배를 피우던 그녀가 더듬, 더듬거리며 말했다.


티브이에 나오는 걸 그룹 아이돌이 꿈인 그녀는, 반드시 예능토크쇼에 나가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에 대해 발언할 것이라고, 다시 나에게 말을 더듬, 더듬, 더듬거리며 말했다. 나는 건전하고 낙천적이어서 그녀가 좋다. 


그녀의 꿈과 행동, 그리고 현실에 심각한 오류가 있듯이, ‘미국의 송어 낚시’氏도 그와 그를 둘러싼 소설, 혹은 이야기가 가진 치명적 결함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예의가 바르다는 이유로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미국의 송어 낚시’氏는 점심 시간의 조용한 사무실에서, 거친 공기와 피곤하고 증오스런 지하철 안에서, 읽히지 않은 책들이 될 나무로 둘러쳐진 숲 속에서, 숲 속은 아니라고 ‘미국의 송어 낚시’氏는 나에게 지적했다, 숲 속에서가 아니라 아파트 사각형 공간 구석 방 책들 사이에서, 그가 겪었던 미국을 이야기해주었다. 


그것이 어디든, 국가라는 틀 속에서 살아간다는 건 적당한 수준에서 정신의 줄을 놓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해,라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최근 심각할 정도로, 도전적인 다이어트를 해서 제작년 미국 여행에서 사온 미니스커트가 잘 들어간다며, ‘미국의 송어 낚시’氏와 감사의 섹스를 했다. 


갑작스런 극적인 사랑 표현을 받은 ‘미국의 송어 낚시’氏는 화끈거리며 달아오르며 자기 속의 몇 페이지를 태워버렸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그 섹스 탓이 아니라 거대한 50센트짜리 동전 때문임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낚시를 싫어해요”라고 고백했다. 그녀가 더듬, 더듬거리며 날 쳐다보았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외면했다. 말과 행동 사이에는 그 어떤 연관 관계도 맺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평론가의 몫이고, 고결한 우리는 그들의 입과 위장을 보호해 주어야 했다. 예의가 바르다는 이유로. 


‘미국의 송어 낚시’氏는 미국에서 송어 낚시를 하게 됨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고, 그저 안타까워 했다. ‘미국의 송어 낚시’氏는 그들의 대가족이 이런 저런 이유로 흩어지고 사라졌다며, 나에게 낡고 먼저 냄새 나는, 이미 죽은 송어로 발효시킨 술을 권했다. 실은 그 사실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 그리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우주의 일임을 ‘미국의 송어 낚시’氏에게 이해시켰다. 


지금에 와서 솔직하게 이야기하건대, 이미 프린트된 채 여행하던 그에게 이를 이해시키는 동안 나는 여러 차례 그를 죽이고 싶었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지난 후, 서점들이 사라지고, 취미/레저/낚시 코너에서 ‘미국의 송어 낚시’氏가 함께 사라져간다고 롱스커트를 입은 그녀에게 슬픈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장사가 되지 않던 어두운 술집 구석에 앉아 있던 그녀는 다시 더듬, 더듬, 더듬거리며 무언가 꿈을 이룬다는 건 자신을 파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녀는 오늘 밤에도 자신의 모든 걸 팔 준비가 되었는데, 아직 예능토크쇼는커녕, 걸 그룹 아이돌이 되기 위해 5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며 번 돈으로 연예기획사를 차렸다가 세무 조사를 받았다며 분개했다. 하지만 그녀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적, 원수가 되어야 한다며, 나의 연약함을 욕했다. 


나는 최근 들어 ‘미국의 송어 낚시’氏를 만나지 못했다. 아마 그는 공항 한 구석에서 취해 쓰러져 자고 있을 것이다. 미국행 비행기 표를 구하지 못한 채. 어제 밤 아메리카 사람으로 보였던 리처드가 알려 주었다. 



리처드 브라우티건





미국의 송어낚시[개정판]

리처드 브라우티건저 | 김성곤역 | 비채 | 2013.10.04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5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지음), 예담 





연애의 기억일까, 아니면 사랑의 기억일까. 딱 세 명만 나오는 이 소설은 일종의 연애 편지이며, 나머지 등장인물들은 배경 삽화에 머물고 그저 흘러갈 뿐이다. 말줄임표가 유독 많은 이 소설을 다 읽고 난 다음, 나는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연애라고 할 만한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고, 쓸쓸함만이 가득했다. 결국 모든 것은 죽어 사라지고,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 혹은 그녀가 남긴 흔적이라는 건 우리 마음의 위로를 위한 변명거리일 뿐이다. 


소설은 못 생긴 여자를 향한 사랑을 담고 있다지만, 실제로 그녀를 만나지 못한 나는 그녀가 못 생겼는지 알지 못한다. 도리어 내 경험 상 못 생긴 여자가 클래식 음악과 미술에 조예 깊은 경우를 보지 못했다. 반대로 문화적 깊이를 가진 이들 모두 예쁜 여자가 아닐까 하는 편견을 가졌는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소설에 나온 그녀는 못 생기지 않았다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해 보인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못 생긴 여자에 대한 내용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실은 나도 잘 모르겠다. 오랜만에 읽은 소설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너무 진지한 소설만 읽은 탓일까. 독자들은 이런 소설을 읽을 것이고 소설가들은 이런 소설을 쓸 것이다. 나의 문제다. 세상은 시간이 갈수록 형편없어지고 사랑도 피폐해져 진심어린 사랑 따윈 부서진 개집에 들어가 나오지 않는 요즘, 사랑 이야기가 뭘까 싶다. 나의 문제다. 사랑은 없고 현실만 남은 내 문제다. 아마 살아남은 그들에게도 사랑은 사라지고 현실만 남게 될 것이지만, 소설가는 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실은 그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아, 거친 현실 속에서 지쳐 죽어갈 때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현실 속에서 남는 건 사랑’뿐이더라고. 


이 소설을 선뜻 권할 마음은 없다. 몇 년 전 내가 이 책을 서점에서 구입한 것은 대학 선배의 소설이면서 책 뒤에 시디가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디는 수 백장 시디 더미 속에서 길을 잃었고 나는 현실 속에서 길을 잃어버렸으니, 거참. 


박민규의 다른 소설을 읽은 바 없으니, 소설에 대해서 평하기도 그렇다. 다만 연애 소설을 원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산뜻한 선물이 될 것이다. 어느 정도는 해피엔딩이니까.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저 | 예담 | 2009.07.20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0



다다를 수 없는 나라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문학동네 




아직도 갈리마르에서 일하고 있는 지 모르겠다. 이 책이 나오고 난 다음 문학동네 초청으로 한국에 잠시 들른 적이 있었던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소문을 듣고 이 책을 읽던 독자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런 류의 소설을 쓸 수 있는 이도 얼마 되지 않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소설가들에게 있어 최고의 영광은 최고의 데뷰작을 쓰는 것이 아닐까. 꼭 르 클레지오가 <<조서>>로 데뷰했듯이. 이 소설을 안 읽었다면 서점 가서 사서 꼭 읽어보길. (2005년 11월)



--


원제 "Annam"은 베트남의 옛 이름이다. 베트남은 한 때 프랑스 식민지였고, 그 때의 명칭이 '안남'이다. 실은 중국이 베트남을 부를 때, '안남'이라고 하는데, 이를 프랑스가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우리가 동남아시아에서 나는 쌀을 '안남미'라고 하는데, 여기서 유래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식민지 베트남 출신이고, 알베르 까뮈나 자끄 데리다의 고향이 식민지 알제리 출신이라는 것은 늘 흥미를 끈다. 


이 소설은 그런 식민지 풍경을 그린다. 문장은 서정적이다 못해, 부드러운 꿈결 같고 동남아시아 특유의 하늘과 대기가 소설 속에 녹아든 듯하다. 이 짧은 소설이 주는 여운은 꽤 길어서, 이 책을 읽은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 



크리스토프 바타이유다. 오래 전 한국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김정란 교수와의 인터뷰다. 현재 그라세의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그라세는 갈리마르 출판 그룹의 계열사로 알고 있다.  http://blog.aladin.co.kr/urblue/529249 





다다를 수 없는 나라

크리스토프 바타유저 | 김화영역 | 문학동네 | 2006.09.30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0



아무것도 쓸 수 없다. 다만 이 견딜 수 없는 초조감을 적어 잊어버리고 싶다. 지금 나는 바위에 쇠사슬로 묶여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모든 걱정, 앙심, 초조, 강박관념이 나를 긁고 할퀴고, 되풀이해서 덮치도록 내맡겨져 있다. 이런 날에는 산책을 해도 안 되고, 일을 해도 안 된다. 어떤 책을 읽어도 내가 쓰고 싶은 주제의 일부가 내 마음 속에 부글거리고 일어난다. 서섹스 전체에서 나만큼 불행한 사람은 다시 없을 것이다. 또는 내 안에, 그것을 사용할 수만 있다면 사물을 즐길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비축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만큼 강하게 의식하고 있는 사람도 없다. 

- 1921년 8월 18일 목요일 


어느 책에선가 예술가의 자살율을 살펴보았더니, 소설가들의 자살율이 최고였다고 전했다. 화가와 음악가의 자살율은 기억나지 않는다. 언어를 다룬다는 건 그만큼 어렵고 고된 일이다. 


작년말부터 읽기 시작한 책은 아직도 이 백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다. 워낙 이 책 저 책 오가며 읽는 터이기도 하지만, 비밀스러운 일기가 출판되리라고 그녀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녀가 죽은 후 수십 년이 지난 후 더구나 동양의 작은 나라의 중년 남자가 읽는다는 건 ... ...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은 고등학교 때 읽은 후, ... ... 아직 없다. 다만 그녀의 비평, 수필은 여러 번 읽었고 이제 그녀의 일기다. 등대로... 델러웨이 부인 ... 은 번역서만 가지고 있을 뿐, 읽어야지 할 뿐이다. 


여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는 서울엔 이미 어둠이 내렸고 긴 새벽을 위로할 술 한 잔이 그리워진다. 버지니아 울프였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문장에 대한 그리움이 사라진 2013년, 버지니아 울프를 읽는 건 참 낯설고 쓸쓸한 일이다. 지독히도 쓸쓸한.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시다. 그래서 나는 술집 앞의 술 취한 수병처럼 후회하고 있다." 

- 1924년 8월 15일 금요일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0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 10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민음사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Memoria de Mis Putas Tristes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민음사 



1.
이름 없는 사람들의 독자성으로 포장된, 도시인의 무관심으로 가득한,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만, 실은 자신의 이야기를 맞은 편 사람에게 떠들고 있을 뿐인, 소란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른, 도심의 커피숍에는 무의미한 젊음을 소비하기 위한 21세기의 이십대만 가득했다. 희망을 잃어가는 중년은 없었고, 이승만, 새마을운동, 유신 시대를 겪었던 과거의 기억을 마치 찬란했던 영화처럼 여기는 노년도 없었다. 그저 방향을 잃어버렸고 애초에 방향 따윈 없었던 이십대만 있었던 어느 커피숍에서 나는 1928년에 태어난, 어느 소설가의 소설을 쫓기듯이 다 읽었다.

‘소설을 쫓기듯이 읽었다’는 표현이 주는 당혹감이나 처참한 기분을 알 만한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요즘 내 일상이다. 하긴 다행스러운 것은 이 소설은 해피앤딩이다. 요즘 보기 드문, 결코 일어나기 힘든, 행복한 결말이다. 마지막 문장을 한 번 소리 내어 읽어볼까. 



2. 
태양은 공원의 편도나무 사이로 떠올랐고, 강이 마른 탓에 일주일이나 늦게 도착한 하천 우편선이 포효하면서 항구로 들어왔다.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건강한 심장으로 백 살을 산 다음, 어느 날이건 행복한 고통 속에서 훌륭한 사랑을 느끼며 죽도록 선고받았던 것이다. 
- 151쪽 


사랑이야기다. 그것도 천연덕스럽고 이국적인 느낌까지 자아내는, 그러나 한국에서는 일어나기 어려운 종류의 이야기다. 아흔이 된 노인네의 사랑이야기라니! 그것도 몸을 팔기 위해 나선 사춘기 소녀(창녀)와의, 말도 안 되는 러브 스토리. 

그러니 마르케스다. 놀랍도록 아름다운 이 소설은 아흔이 된 주인공의 순수하고 열정적이며 아름다운 마음을 만날 수 있고, 그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주는 소설 속 사람들-다 창녀였거나 창녀와 관계되었던 - 을 만날 수 있다. 

세월이 참 많이 흐른 것이다. 노년의 소설가 마르케스는 자신을 아껴주는 마음만으로도 감동받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어떤 어린, 하지만 순수한 창녀를 추억한다. 거친 현실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지 않는다. 심지어 주인공인 아흔의 노인은 젊었던 시절 자신을 받아주었던, 한때의 창녀에게 위로의 조언을 듣기까지 한다. 

“마음 가는 대로 하세요. 하지만 그 아이를 잃어버리지는 마세요.” 그녀는 말했다. “혼자 죽는 것보다 더한 불행은 없어요.” 
- 131쪽 


3.
소설은 오직 주인공의 철부지 같은 생각, 이해하기 힘든 태도, 쓸쓸한 추억을 따라 흐르며, 낡은 흑백 사진과도 같은 사랑을 되새긴다. 그리곤 끝이다. 정열적인 키스 같은 것도, 사랑의 밀어도, 사랑을 지키기 위한 분투도 존재하지 않는다. 마르케스만이 가능한 소설이고 마르케스이니, 가능한 사랑이야기인 셈이다. 

소설은 충분히 아름답고 사랑은, 그 사랑이 어떤 것이든 가치 있고 축복 받을 일이다. 마음의 편견과 벽을 허물고 누군가의 진심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마르케스는 우아하게 풀어놓았다. 

하지만 현실은 노년의 마르케스가 희망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사랑은 언제나 그래왔듯이 이상적이 아니라 현실적이기만 하다. 부언하자면 이상적으로 포장되었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사랑을 나누는 것이며, 그 현실적 사랑의 아름다운 면만 보여준 셈이다. 결국은 우리는 땅을 딛고 서있어야만 하지, 하늘을 날 수는 없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선 돈을 벌어야만 하고 감동을 주기 위해선 뭔가 준비를 해야만 한다. 결국 사랑도 현실적인 고려 속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협상에 가깝고, 현대의 이론을 빌리자면, 그건 동물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니 마르케스인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을 무시하고 오직 아름다운 노년과 사춘기 소녀 간의 사랑을 우아하게 들려주고 있으니까. 

오래 기억할 좋은 소설을 읽었다. 다만 쫓기듯 읽은 참혹함만 쓸쓸하게 내 중년의 페이지를 장식할 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3

  • 지하련님, 안녕하세요. 반디앤루니스 컨텐츠팀 현선입니다.

    이번에 지하련님의 리뷰를 6월 5주 <반디 & View 어워드>로 선정했습니다. 어워드 관련 적립금은 지하련님의 반디 아이디로 일주일 이내에 지급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날씨는 덥지만, 즐거운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반디앤루니스 컨텐츠팀 현선 드림



저지대 - 8점
헤르타 뮐러 지음, 김인순 옮김/문학동네



저지대 

헤르타 뮐러(지음), 김인순(옮김), 문학동네




참 오래 이 소설을 읽었다. 하지만 오래 읽은 만큼 여운이 남을 진 모르겠다. 번역 탓으로 보기엔 뮐러는 너무 멀리 있다. 문화적 배경이 다르고 그녀의 양식이 낯설다. 자주 만나게 되는 탁월한 묘사와 은유는, 도리어 그녀의 처지를 짐작케 해주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어떻게든 하기 위해, 그녀는 의미의 망 - 단어들을 중첩시키고 시각적 이미지를 사건 속에 밀어넣어 사건을 애매하게 만들었으며, 상처 입은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인물들 마저도 꿈과 현실 사이에 위치시켰다. 


이러한 그녀의 작법은 시적이며 함축적이지만, 한 편으로는 읽는 독자로 하여금 답답하고 모호하게 만들기도 한다. 



얼굴의 모든 낱말은

악순환에 대해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다. 


사물들이 물질을 통해 속이고, 감정들이 몸짓을 통해 속이기 때문에, 낱말의 소리는 자신 역시 속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압니다. 물질의 속임과 몸짓의 속임이 마주치는 접점에서, 말의 소리는 자신이 꾸며낸 진실을 가지고 둥지를 틉니다. 글을 쓸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얼마만큼 신뢰할 수 있느냐 보다는 거짓이 얼마만큼 성실하느냐 입니다. 

- 262쪽 - 263쪽

'모든 낱말은 악순환에 대해 알고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연설 중에서 



하지만 그녀의 소설은 대단히 매력적이며, 한 번은 읽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대신 이 소설을 읽을 땐 한 번에 다 읽는 것이 좋을 지도. 나는 너무 띄엄띄엄 읽은 탓에, 제대로 읽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0


도리스 레싱Doris Lessing 지음, <마사 퀘스트Martha Quest>, 나영균 옮김, 민음사, 1981년 초판

마사 퀘스트 - 10점
도리스 레싱 지음, 나영균 옮김/민음사

 


1981년도에 출판된 책이라, 노랗게 변한 책만 펼치면 종이가 세월 먹는 향이 코 끝에 닿는다. 요즘에는 보기 드물게 책의 뒷 표지에는 레싱의 옆얼굴 사진이 크게 인쇄되어 있다. (나는 이 책을 어디에서 구한 것일까.) 지금은 구할 수 없는 민음사 이데아 총서의 세 번째 권. 오래 전에 번역된 소설들이 최근 번역되는 소설들, 가령 파올로 코엘류의 작품들이나 <다빈치 코드>같은 것보다 훨씬 낫다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소설의 시작은 꽤 흥미진진한 문장들로 시작한다. 가령 이런 문장들.


그러는 동안에도 마사는 불행한 사춘기의 고통을 맛보며 나무밑 긴 풀밭에 누워서 ‘어머니가 지겹다. 모든 늙은 여자는 지겹다. 그들의 대인관계는 하나같이 거짓말과 회피와 타협으로 뭉친 끔찍한 것이다.’라고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녀는 젊은이 특유의 고통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신경과 본능을 다해 갈망하는 충실한 삶을 환경이 그들에게서부터 빼앗아간다고 느끼는 데서 오는 고통이었다.
- 22쪽



 

그녀는 사춘기에 있었으므로 불행할 수 밖에 없었고, 영국인이었으므로 불안하고 반항적일 수 밖에 없었고, 이십세기의 사십년대에 살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인종,계급,여성의 문제와 당면할 수 밖에 없었고 과거의 얽매인 여자들을 거부할 수 밖에 없었다.
- 24쪽




이런 문장들이 풍기는 분위기가 이 소설 1부 전체를 물들인다. 하지만 나머지는 이에 비하면 매우 맥 빠지고 1부에서 그토록 반항적이면서 당돌하고 매력적인 마사는 도회지에 나와 방탕한 생활을 시작하게 되고 몇 명의 남자를 거치고 난 다음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더글라스와 결혼을 해버린다. 그리고 이 결혼식에 대한 서술로 이 소설은 끝나버린다. 꽤 황당한 결말이다. 가령 1부에 읽을 수 있는 이런 대화.

‘넌 인종간의 장벽을 부인하니?’
‘물론이야’
‘물론이지’ 그는 비꼬듯이 말했다.
‘넌 반 유태주의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인종적 편견을 싫어하니?’
‘당연하지’ - 이 말엔 답답하다는 어조가 있었다.
‘넌 무신론자야?’
‘내가 그렇다는 건 네가 잘 알면서’
‘사회주의를 신봉해?’
‘말할 것도 없지 않어’ 그녀는 열내어 말하고 나서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심각한 인간으로서의 자기가 몰락을 했나보다 하는 우스꽝스런 의식에서였다. 조스는 마사의 웃음에 상을 찡그릴 뿐이었다. 그는 정통적 유태인 가족에서 태어난 열아홉살의 유태인 소년과 그보다 더 고루하게 키워진 사춘기의 영국 소녀가 이 대화의 한 마디 한 마디를 위험천만한 이단으로 받아들일 사람들로 꽉 찬 마을의 가게 뒷방에서 이런 자명한 이치에 서로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조금도 엉뚱하다는 의식이 없음이 분명했다.
- 86쪽에서 87쪽




이런 식의 대화는 이 책에 나오는 거의 유일한 경우이고 나머지는 마사의 자의식 강한 태도가 부딪히는 경우이거나 그 외의 영국 식민지 시절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흔하디 흔한 인종적 편견을 드러내는 경우이거나 시시콜콜한 연애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400페이지가 넘는 이 소설을 다 읽고 난 다음의 황당함이란, 굳이 이 소설을 읽지 않아도 추측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 소설은 5부작으로 씌어진 소설의 첫 번째 권에 해당되고 나머지 4권을 통해 마사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펼쳐진다는 사실을 역자의 해설을 읽고 난 다음에야 알 수 있었다.

<마사 퀘스트Martha Quest>도 마사의 환멸의 교육을 내용으로 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녀의 이름 퀘스트는 영어로 탐색이란 뜻이 있으며 이것은 명백히 의도적으로 그녀의 인생탐헙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1952년에 출판된 이 작품은 그러나 독립된 하나의 작품이라기보다 <폭력의 아이들 Children of Violence>라는 총괄적 제목으로 불리우는 5부작 중의 첫째권이다. 나머지 네 작품은 <어울리는 결혼 A Proper Marriage>(1954), <폭풍의 여파 A Ripple from the Storm>(1958), <육지에 갇혀서Landlocked>(1965), <네 개의 문이 있는 도시 The Four Gated City>(1969)이다. 다섯 개의 작품은 마사 퀘스트의 탐험과 환멸과 실험과 도전과 이상의 모색을 그 내용으로 한다.
- 461쪽


마사 퀘스트. 실은 이 책을 서점에서 구할 수 없고 도서관에서도 이 책을 빌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이 책이 새로 출판될 가능성도 적어 보인다. 나머지 네 권과 함께 여성문학을 전공하는 이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출판된다면 모를까.

여유가 된다면 마사 퀘스트가 나오는 나머지 네 권도 구해 읽어봐야겠다. 남아프리카 끄트머리에서 자라난 한 반항적이고 자의식 강한 사춘기 소녀가 공산당원이 되고 자신의 모험을 계속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아마 도리스 레싱도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페르시아 지방에서 태어나 아프리카의 로디지아라는 곳에서 자라났고 열네살 이후론 학교라는 곳을 다니지도 않은 한 여자아이가 20세기 후반 최고의 여성 소설가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종류의 일이니 말이다.

이 소설의 첫 장에 인쇄되어 있는 문장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말이다.

나는 너무도 지쳐 있고 미래가 오기도 전에 미래에도 지쳐 있다.
- 올리브 슈라이너


* 도리스 레싱의 자서전 표지다. '식민지 출신'이라는 단어가 사라진 요즘, 그녀의 삶은 어땠을까 조금은 궁금해진다. 위 리뷰는 꽤나 오래 전에 쓴 글인데, 이제서야 여기다 올린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2

  • 저는 도리스 레싱의 소설을 최근에야 처음으로 읽었는데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생각보다 한국에 번역되어 있는 작품이 적은 것이 놀랐고요. 잘 읽었습니다.

    • 한국은 '특이하게도' 영어에 대한 관심과는 반대로 영미 현대 문학에 대한 관심은 현저히 떨어집니다. 현대 영미 문학 중에 주목할 만한 소설가들이 참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진짜 소설 읽기는 10대 읽는 것보다 20대 중후반, 그리고 30대, 40대 접어들수록 더 재미있는 것같아요. 어렸을 때 읽었던 세계문학전집을 다시 읽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 ㅎㅎ 댓글 감사합니다. ~


아르세니예프의 생 
이반 알렉세예비치 부닌(지음), 이희원(옮김), 작가정신, 2006년



아르세니예프의 생 - 10점
이반 알렉세예비치 부닌 지음, 이희원 옮김/작가정신
 

 
1.
‘그래, 그랬지. 나는 지금 이 순간 늙어가고 있고, 지나간 일 따윈 돌이킬 수 없지. 하지만 밀려드는 슬픔은 왜일까’라는 말을 하기 위해 나는 이 소설을 6개월 동안 가슴 조이며 읽었다. 6년에 걸쳐 번역한 소설을 나는 6개월에 걸쳐 읽으며, 한 장 한 장마다 러시아의 차가운 서정(敍情)을 느꼈고 거친 대지의 순수 속으로 빨려 들어갔으며, 한 영혼이 어떻게 서글픔에 잠긴 채 과거를 되새길 수 있는가를 보았다. 

나는 목격자이며, 방관자였고, 공범이 되었다. 지금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대해, 지나쳐 버린 세월에 대해, 무채색으로 흐려져만 가는 추억에 대해, 그리고 시들지 않는 사랑의 기억에 대해. 그 때 나는 최선을 다했으나, 어쩌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밀려드는 건 그나 나나 똑 같은 것이리라. 

2. 
이반 알렉세예비치 부닌, 러시아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하지만 그는 사랑하는 러시아로 돌아가지 못한 채, 1953년 파리에서 죽었다. 몰락한 귀족 집안 출신의 시인이자, 소설가. 이 두꺼운 소설은 그의 자전적 성격이 강하게 묻어난다. 

이 소설은 한 젊은이가 태어나 성장하면서 겪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질풍노도와 같은 방황도, 자신의 생을 파멸로 이끄는 사랑도,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열정도 없다. 소설은 마치 순백의 눈이 쌓인 러시아 중부 평원 가운데를 지나는 강물을 담아 있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쬐는 햇살의 각도에 따라, 계절마다 방향을 바꾸며 부는 바람, 혹은 시시때때로 자신의 모양을 바꾸는 구름들로 인해 끊임없이 변모하는 말 없는 강물처럼, 소설은 잔잔하게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며, 러시아적 삶과 자연을 노래한다. 

우리의 삶이 시간 위에서 유한함의 비극을 가지고 있듯이, 소설 전체를 물들이는 것은 바로 지나간 추억에 대한 쓸쓸한 반추다. 그 위로 러시아의 건조하고 차가운 풍경이 겹친다. 

3.
 

내 삶의 첫 기억은 미심쩍은 정도로 무언가 좀 하찮은 구석이 있다. 초가을 햇살이 비쳐 드는 커다란 방, 그리고 그 방의 창을 통해 남쪽으로 보이는 산비탈 위로 빛나는 가을 태양의 건조한 섬광 …… . 오로지 그 단 한순간! 왜 하필이면 그날, 그 시간, 그 순간이 아무런 이유 없이, 기억이 가능해진 후의 내 삶에 있어 첫 기억으로 그토록 선명하게 나의 의식을 사로잡은 것일까? 그리고 그 순간 이후로는 왜 또다시 오랜 기억의 공백이 있는 것일까?
나의 유년기는 슬프게 기억된다. 모든 유년기는 서글픈 것이다. 아직 온전한 삶으로 깨어나지 못한 무료한 생활과,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한 여리고 겁먹은 영혼이 고요한 세상 속에 흐릿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 11쪽 



문장은 유려하고 아름답고, 정처 없는 젊은 영혼이 머무는 곳은 가족이거나 문학, 또는 소녀에 대한 사랑이다. 그리고 사랑으로 향하는 젊은이는 자신의 이해할 수 없는, 이해할 수 없었던 갈망으로 그 사랑을 놓친다. 이 소설이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그저 노년이 된 어떤 사람의 고백처럼 읽히는 건, 지나간 추억에 대한 표현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소설 전반을 물들이기 때문이다. 

4.
 

육지의 가장자리, 칠흑 같은 어둠, 짙은 안개와 차가운 파도는 거세게 몰아쳤고, 파도소리는 잦아들다가 커지면서 야생침엽수가 내는 소리처럼 솟구쳐 오르기도 했다 …… . 밤의 심연은 앞을 볼 수 없이 캄캄하고 불안했고, 요람에서부터 시작된 고통스럽고 적대적이고 무의미한 삶을 말하는 것 같았다. 
- 302쪽



청춘은 캄캄하고 불안하고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바닥까지 떨어졌다가 구원처럼 나타나는 것은 문학이 아니라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방해하는 것은 알 수 없는 어떤 것. 삶의 비극은 그 비극의 원인을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우리 영혼의 병은 심해져만 가고, 그 사이 우리 사랑도 우리 곁을 떠나버린다. 그리고, 

그 해 봄에 나는 그녀가 폐렴에 걸려 집으로 돌아갔고, 그리고 일주일도 되지 않아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또 가능한 한 오랫동안 내게 그 사실을 숨기게 한 것도 그녀의 뜻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495쪽 



이 소설을 통틀어 가장 멋없는 몇 개의 문장들로 수놓아진 이 작품의 끝은,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것, 그리고 아름다운 추억은 끊임없이 되새겨지지만, 그 밑에 흐르는 슬픔은 어쩌지 못한다는 것뿐이다. 



6. 
소설은 구성은 아래와 같다. 

1부 카멘카, 삶의 시작 
2부 나의 조국 러시아
3부 숭고한 사명, 문학
4부 청춘, 그 찬란한 이름
5부 사랑, 시들지 않는 기억 

번역된 것으로는 작가정신(출판사)를 통해 이희원 번역으로 나온 것과 나남출판사를 통해 이항재 번역으로 나온 것이 있다. 후자의 책은 읽지 않았지만, 지금 구할 수 있는 것은 이 책뿐이다. 


7. 
6년에 걸쳐 이 소설을 번역한 이희원 선생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출판사에서도 이 책의 재발간을 검토해보았으면 좋겠다. 이번 겨울, 이 소설은 지친 우리들에게 충분한 위안이 될 수 있으리라.
 

이반 알렉세예비치 부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0

 


진 리스(Jean Rhys),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Wild Sargasso Sea)
윤정길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38권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 6점
진 리스 지음, 윤정길 옮김/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그래, 이제 모든 것은 끝이 났다. 전진과 후퇴도, 의심도 주저도, 좋든 나쁘든 간에, 어쨌든 모든 것은 끝이 난 거다. 우리는 세찬 비를 피하느라 커다란 망고나무 밑에 서있었다. 나, 내 아내, 그리고 혼혈 하인 아멜리. 우리의 짐은 굵은 마직포를 덮은 패 다른 나무 아래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 99쪽



소설은 짧고, 고전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맥이 떨어지는 작품이었다. 마치 19세기 에밀 졸라의 실험소설들과 20세기 초 의식의 흐름 소설을 묶어놓은 듯한 느낌이랄까.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 풍경을 뒤로 하여 감수성 예민한 미모의 여성과 예의 바른 신사의, 사랑 없는 결혼에 대한, 밋밋한 풍경화인 이 소설은 앙투아네트의 인생 속으로 끼어든 로체스터를 통해 식민 시대의 폭력성을 드러내고자 한다.

하지만 시대에 대한 통찰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여자와 남자의 설득력 없는 독백들과 서정적인 식민 풍경 묘사가 전부다. 이 독백들은 의식의 흐름에서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한계는 무엇인가. 실은 이 시대의 식민지 태생의 여성과 본토 출신의 남성 간의 결혼이 야기하는 문제는 이 소설이 그대로 담고 있다. 그러니 스토리의 특별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특별하게 부각되어야 할 것은 왜 그들은 서로 마음의 문을 닫고 불행한 결혼 생활을 지속하게 되는가에 맞추어 져야 할 것이다.

그녀는 이 장소를 사랑한다고 말했지. 그래, 이것이 그녀가 이 장소를 마지막으로 보는 기회가 되게 해주지. 그녀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 한 방울을 쳐다 보겠어. 눈물 한 방울. 나는 그 텅 비어 증오만 남은 광녀의 얼굴을 보지 않을 거다. 그녀가 안녕을 고하겠지. 그 소리를 들어야지. - 233쪽



 

나는 산들도 언덕들도 강들도 비도 증오하고, 그 색깔들이 무엇이든 간에, 황혼도 증오한다. 나는 이 곳의 아름다움도 마력도 그리고 내가 결코 알아낼 수 없는 비밀도 증오한다. 나는 이 곳이 보여주는 아름다움 속에 내재한 무관심도 잔인성도 증오한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 여자를 증오한다. 왜냐하면 이 여자는 그 마력과 그 아름다움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를 목마른 상태로 남겨 놓았다. 내 온 인생은, 발견하기도 전에 이미 상실한 것을 그리워하고 목말라하는 그런 인생이 될 것이다. - 242쪽



하지만 안타깝게도 소설 후반부에 급박하게 전개되는 여러 독백들은 독자들에게 깊은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에밀 졸라가 어떤 특정한 환경(실험실) 속에 인물들(실험소재)를 집어넣어 현실 비판적이며, 시대의 본질을 드러내고자 하였다면, 진 리스는 제국주의 시대가 무너져가고 노예가 해방되고 흑인과 백인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던 어느 시대에(실험실), 뭇 남성들이 좋아할, 재산이 있는 미모의 여성을 등장시키고, 그 당시 평범한, 예의바른 영국 신사와의 결혼이라는 사건(실험소재와 실험 내용)을 통해 시대의 본질 따윈 드러낼 시도 따윈 하지 않고(안타깝게도 그건 진 리스를 둘러싼 여성주의 비평가들의 몫인 듯), 조이스나 울프에서 영향받은 의식의 흐름을 구사하려고 하였으나, 변덕스럽고 급작스러운 감정 변화와 현실감 떨어지는 갈등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인기 많았던 어느 여성 소설가의 시대 비판적인 작품이라는 점에서 이 소설은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일반 독자에게 권할 만한, 그래서 고전으로 남을 그런 소설은 아니었다.


* 리뷰를 올리고 난 다음, 찾아보니 이 소설은 TIME이 선정한 100대 영어권 소설(1923년 이후 출판된)에 랭크되어 있었다. 다소 놀라운 평가이다. 아마 이 소설의 문제성 - 제인 에어에 대한 Hommage(?), 여성주의 소설 등이 높은 평가를 받은 건 아닐까. 흥미롭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0




일러스트: 메테오 페리코니



보르헤스 씨의 정원

부에노스 아이레스, 레꼴레타 인근의 어느 집에는 이중의 특권을 가진 창문이 있다. 그 창문에서는 한 눈에 하늘이 들어오고, 이웃한 집들과의 벽을 따라 굽이쳐 흐르며, 마치 계절들의 여행처럼 보이는 색채들을 가진 식물들, 나무들, 덩굴들로 가득한 넓은 공간, 여기에선 여기에선 pulmon de manzana로 알려진 - 글자 그대로 한 블록의 허파 - 안쪽 정원이 한눈에 보였다. 덧붙이자면, 그 창문은 작고한 내 남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서재를 피난처처럼 보호하고 있다. 그 서재는 오래된 책들로 채워진, 진짜 바벨의 도서관이며, 그 책들의 종이들에는 내 남편의 작은 손으로 거칠게 씌어진 메모들이 있었다.

한낮 정오가 지나고 나는 창문을 내다보기 위해 내 업무로부터 눈을 떼고, 봄철로부터 나는 무너질 것이다. 아니면 만약 여름이라면, 자스민 향기, 혹은 오렌지꽃 향이 보르헤스에게 즐거움을 가져다 주었던 책의 종이들와 가죽 냄새들과 뒤섞였을 것이다.

그 창문은 또 하나의 경이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 창문으로부터 보르헤스가 한 때 살았고, 그의 가장 잘 알려진 단편들 중의 하나인 ‘원형의 폐허’(The Circular Ruins)를 썼던 집의 정원을 볼 수 있다. 나는 여기에서 두 세계를 이리저리 움직일 수 있다. 때때로 나는 보르헤스가 죽은 후에 한 때 멀리 있는 보르헤스에 속했던 그 집의 그 창문을 통해 보는, 오후의 장려함 속으로, 혹은 석양의 부드럽게 타는 듯한 빛깔 속으로 몸이 잠기는 세계가 진짜로 존재하는가 의아해지곤 한다. 아니면 바벨의 도서관의 세계, 책들로 가득한 책장들이 과연 그의 손에 닿았던가?

- 마리아 코다마


* 뉴욕타임즈 2011년 1월 1일에 실린 글을 형편없이 번역했습니다. 원문은 http://www.nytimes.com/interactive/2011/01/02/opinion/20110102_Windows.html 를 보시면 됩니다. 스페인어로 씌어진 글을 에스더 앨런이 영어로 옮겼으며, 이를 다시 한글로 옮겼습니다. 번역이라곤 해본 적 없기에 오역이 많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양해해주시기를.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0

사탄의 태양 아래 - 10점
조르주 베르나노스 지음, 윤진 옮김/문학과지성사




사탄의 태양 아래 Sous le soleil de Satan
조르주 베르나노스 지음, 윤진 옮김, 문학과지성사


폴 장 툴레가 좋아하던 저녁 시간이다. 이맘때면 지평선이 흐릿해진다. 상아색의 구름 한 떼가 지는 해를 감싸면서 하늘 꼭대기에서 땅 밑까지 노을이 가득 차고, 거대한 고독이 이미 식어버린 채 퍼져나가는 시간이다. 액체성의 침묵으로 가득 찬 지평선 … … 시인이 마음 속에서 삶을 증류하여 은밀한 비밀, 향기롭지만 독을 간직한 비밀을 추출해내던 시간이다.
어느새 수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팔과 입을 가진 사람들이 어렴풋한 어둠 속에서 무리 지어 움직이고 있다. 큰 길가에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여기저기 불빛이 비친다. 시인은 대리석 탁자에 팔꿈치를 괸 채 이 밤이, 마치 한 송이 백합처럼, 조금씩 올라오는 것을 바라보곤 했다.
- 11쪽




솔직히 이 소설을 추천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자신의 인생과 자신을 둘러싼 외부 세계에 대해 진지한 사람이라면, 베르나노스는 한 번쯤 읽어야 할 소설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소설은 깊고 우아하며, 그러면서 처절하고 고통스럽다. 이 소설도 그 고통 속에서 시작한다.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서사는 사라지고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생의 굴레, 신의 존재, 자신의 믿음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과 갈등, 그로 인한 환각과 맹목, 죽어가는 시간과 자신의 영혼뿐이다.

그리고 소설은 지평선이 흐릿해진 저녁 시간에서 시작해 아침을 기다리는 것으로 끝이난다(어쩌면 아침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이야기는 내내 사방을 분간하기 어려운 어둠 속에 있는 것이다(마치 우리들의 현대적 삶처럼).


“아! 아! … …” 울 수도 없고 기도할 수도 없었다. 그는 그저 이 말을 되풀이했다. 죽어가는 사람을 지켜볼 때처럼, 매 순간이 돌이킬 수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아무리 짧은 밤이라 해도, 아침은 언제나 너무 늦게 찾아온다. 셀러멘은 어느새 입술 연지를 발랐고, 주정뱅이들은 술에서 깨어났다. 밤의 향연을 마치고 돌아가는 마녀는 뜨겁게 달아오른 몸이 아직 식지 않은 채 하얀 시트 속으로 숨어든다. … … 아침은 언제나 너무 늦게 온다. … … 하지만 이 세상 모든 곳에 유일한 정의(正義)가 불현듯 찾아올 것이다.
(* 셀러멘: 몰리에르의 극에 등장하는 여인으로, 많은 남성들의 연모의 대상이다. 남자들의 환심을 사려는 여자를 말한다: 옮긴이)
- 274쪽




프랑스와 모리악은 베르나노스에 비하면 너무 밋밋하고 평면적이다. 하지만 베르나노스는 단순한 표면 밑의 복잡하고 다층적이며 끊임없이 갈등하는 인간의 심리를 보여주며, 그 고뇌하는 정신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래서 맞이하게 되는 것이 어떤 죽임일지라도 말이다.

죽음을 각오한 신앙, 혹은 믿음.


그러나 종교적 열정이나 신앙마저도 인스턴트 음식이거나 자신의 건강을 지속시켜주는 영양제처럼 변해버린 요즘,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이 소설은 너무 낯설고 정신적이다. 마치 중세의 어느 시대를 거쳐가는 것처럼, 어둡고 축축하며 고통스러운 종교적 환각과 환청으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베르나노스의 인물들은 그 속을 꼿꼿하게 선 채 지나가며 울부짖는다. 휴즈의 말대로 ‘인간의 위대성에 대한 그의 생각은 고통스럽고 중세적이며 기사도적이었다.’(H.S.휴즈, 현대프랑스지성사, 문학과지성사, 135쪽)

베르나노스의 주인공들이 주로 신부이지만, 엄밀히 말해 그의 소설은 종교 소설이 아니다. 그의 소설이 가치있는 것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에서, 인간의 영혼이 현대의 물신주의 속에서 소외당하고 버림받으며, 심지어 분열되어 자신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으려고 할 때, 분명한 목소리로 세계를 향해 나는 살아있고 고통받지만 앞으로 나갈 것이고 그것이 죽음일지라도 내 삶, 내 신념, 내 확신, 내 믿음의 존재가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나는지 묻고 그것을 실행하는 데에 있다. 마치 현대라는 강물이 바다를 향해 시류에 휩쓸려 바다로 흘러갈 때, 그의 인물들은 반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고통스러워하며 절규한다. 심지어 그의 편에 서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고귀한 신마저도 그의 옆에 없음을 직감했을 때조차도.




모리스 삐알라 감독이 연출한 '사탄의 태양 아래'(1987) 트레일러. (* 한국에서도 비디오로 출시되었으나, 오래전 일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0

모데라토 칸타빌레 - 10점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정희경 옮김/문학과지성사

 


모데라토 칸타빌레 Moderato Cantabile
마르그리트 뒤라스




뒤라스의 세기도 있었다.

모든 이들에게 그의, 그녀의 세기가 있었듯이, 뒤라스에게도 그녀만의 세기가 있었다. 그녀가 죽음에 다다랐을 무렵, 그녀 옆엔 늘 서른 다섯 살 연하의 젊은 연인이 주름진 뒤라스의 손을 잡고 그녀의 볼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대며 살며시 웃고 있었다. 그녀의 유작 ‘C’est Tout그게 다예요’는 마치 젊은 날의 그녀가 찾아 헤매던 언어와 사랑의 완결판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그 얇은 책 위로 젊은 연인의 얼굴이 겹쳐지곤 하던 시기도 있었다.

1914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현재의 베트남)에서 태어난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알베르 카뮈와 같이, 식민지령 출신이었다(알베르 카뮈는 북아프리카 태생의 혼혈이었다). 그리고 누보 로망의 시대를 관통하며, 누보 로망과는 전혀 다른 글쓰기로 자신만의 문학 세계를 완성한 여류 작가로서 그 위치를 명확히 했다. ‘내 사랑 히로시마’로 알랭 레네와 같이 영화 작업하였으며, 다양한 영역에서 자신의 재능을 보여주었다. (‘모데라토 칸타빌레’도 피터 브룩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다)


 피터 브룩 감독, 잔 모로, 장 폴 벨몽도 주연.



모데라토 칸타빌레라는 이 소설은 뒤라스의 비밀스런 일기장과도 같은 작품이다. 짧은 순간 스쳐가듯 어느 여인의 사소한 방황을 다루고 있는 소설은, 실은 그 속엔 여인의 내밀하고 농염한, 어쩔 수 없이 갇혀 지낼 수 밖에 없는 상류층 여인의 억압된 욕정과 솔직한 애정 결핍이 뒤범벅되어 끝 간 데 없이 끈적끈적한 외로움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는 작품이다.


사이렌이 떠나갈 듯 크게 울렸다. 그 소리는 시내 구석구석은 물론, 바닷바람에 실려 저 멀리 변두리와 주변 도시에까지 우렁차게 들렸다. 황갈색이 더욱 짙어진 석양빛이 홀벽을 쓸어갔다. 황혼 무렵이면 종종 그렇듯, 하늘이 오히려 고요하게 부푼 구름 속에 머무르고, 구름을 벗어난 태양은 마지막 불길을 사르며 빛나고 있었다. 그날 저녁 사이렌은 그칠 줄 몰랐다. 그렇지만 다른 날 저녁처럼 결국 그치고 말았다.
“전 두려워요.” 안 데바레드가 속삭였다.
- 118쪽



하지만 뒤라스의 글쓰기는 언제나 가볍고 스쳐가는 듯한 언어의 운율에,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인물과 사건의 표면만을 훑고 지나간다. 마치 건조한 인상주의 작품처럼.

 

“처음으로 밝히는 것인데, ‘모데라토 칸타빌레’에서 나는 비밀스레 겪어낸 개인적 체험을 전달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외설적이라는 평을 받을까 두려워 이 경험 주변에 벽을 쌓고 거울로 둘러놓았지요. 경험이 격렬했던 만큼 더욱 엄격한 형식을 택한 것이랍니다. 이 작품 속에는 내가 숨어 있어요. 다른 어느 작품에서보다 더욱더 말입니다.”
- 129쪽

 

편지를 읽고 있는 뒤라스


어느 인터뷰에서 말한 뒤라스의 저 문장들은, 이 작품을 접하는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메시지로 읽힌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여주인공 안 데바레드와 뒤라스가 겹쳐져고, ... ... 어느 순간, 안 데바레드 자리에 뒤라스가, 그리고 그녀는 우리들의 비밀스러운, 쓸쓸하고 외로운 연인이 된다. 


이처럼 인물들은 특권적 관찰자에 의해 내부로부터 조명되지 않으며, 감정이 명료하게 드러나는 대신 조심스럽게 추측될 뿐이다. 따라서 내면의 격정을 전달할 수 있는 다양한 문체기법이 사용된다. 단어들은 필연적인 위치에서 엄격하게 통제되고 지각 작용과 문체가 일체화되어 절제와 암시, 간접화의 문체 기법들은 표현효과를 높여주는 것은 물론 구조의 본질적인 요소로서 기능하고 있을 정도다. 이처럼 ‘모데라토 칸타빌레’는 뒤라스의 글쓰기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이루는 작품으로서 새로운 언어 기업의 지평을 열어 보인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역자해설 중에서, 133쪽








하지만 이는 ‘모데라토 칸타빌레’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 그녀의 초기 소설 몇 편을 제외하곤 대부분이 이러한 문장, 글쓰기, 형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동어반복적 양식이 아니라, 늘 새롭게 읽히는, 마치 변덕스러운 여성의 마음을 닮은 듯 우리에게 읽힌다. 그녀의 소설이 매력적인 이유는 그녀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이 만들어냈다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자신의 마음을, 자신이 창조한 인물의 마음을, 그들을 둘러싼 사건과 풍경을, 그저 스쳐가듯, 표면만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그녀는 깊은 곳에 숨겨진 어떤 것들을 끄집어낸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그 여자는 이번에도 그것을 알고 있다. 가슴 사이에 꽂은 목련 꽃은 완전히 시들어 버렸다. 한 시간 만에 한 여름을 겪어낸 것이다. 사내는 곧 정원을 지나쳐 더 멀리 갈 것이다. 그가 지나갔다. 안 데바레드는 가슴에 꽂은 꽃은 비틀어대는 끝없는 몸짓을 계속 하고 있다.
- 109쪽


 

안 데바레드의 방황이 ‘제 자리 뛰기’와도 같은 궤적을 그리지만,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심난한 여정임을 뒤라스는 특유의 감수성과 표현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랑을 향한 우리의 마음, 우리 영혼의 제 자리 뛰기...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여행인가를 뒤라스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그녀의 연인 얀 안드레아.


 그리고 그녀가 얀을 위해 쓴 책.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2

  • noi 2010.04.08 17:15 신고

    몇 주 전 뒤라스가 각본을 쓴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을 보고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답니다. 물론 감독이 영화를 잘 만든 것도 있겠지만 대사가 어쩜 그렇게 매혹적이던지.. [모데라토 칸타빌레]도 책이든 영화든 꼭 접해보고 싶습니다.

    잘 지내시지요?^^

    • 안 그래도 안부 남기려고 했는데.. ㅎㅎ .. 최근에는 너무 바빠서 책도 못 읽고 집중해서 글도 못 쓰고 있어요. (뭐, 그닥 글같은 글을 쓰는 것도 아니지만) 적당하게 바쁘기도 하고 여유롭기도 한 삶이 좋은데 말이죠. 너무 바쁘네요. 벌써 4월이라니. T_T


부영사 - 10점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정우사



부영사
마르그리트 뒤라스.  민음사. 1984. (민음사 이데아 총서 중 한 권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계절풍의 어슴푸레한 빛 속에. (98쪽)



그들은 계절풍 속에 있다. 그런데 그들은, 혹은 그녀는 누구를 기다리는 것일까. 아니 무엇을, 어떤 행동을,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 독자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일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난 그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 혹은 계절풍 속에서, 끊어질 듯 이어가던 서사(narrative)의 가느다란 숨소리를 놓치고 말았다. 그 ‘놓침의 독서’는 나의 기억 속에 몇 개의 이름만을, 몇 명의 존재만을 남겨놓았을 뿐이다.

그, 그녀, 그, 그녀, 그, 그, ......

그와 그 사이, 그와 그녀 사이, 그녀와 그녀 사이, 그녀와 그녀 사이, 아이를 밴 몸으로 계절풍 속을 떠돌다 캘커타 속으로 들어온 한 걸인 소녀의 배고픔과 몇 명의 백인 남자들 사이에 서있는 안 마리 스테레뗴르의 공허 사이. 하나의 공간 속을 떠도는, 멀리 떨어진 존재들, 그 존재들의 영혼 깊숙한 곳, 그 곳까지 계절풍은 불고.



** 뒤라스의 문장은 독특하다. 그래서 그녀의 동시대 작가들이라 할 수 있는 누보로망의 작가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작가이다. <<부영사>>는 그녀의 영화 <<인디안 송>>의 원작 소설이며, 그녀의 대표작들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뒤라스의 소설들이 다 그렇듯이 흥미진진한 물결을 독자에게 선사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님을 염두에 두길.

*** 위 글은 2000년대 초반에 적은 리뷰다. 오늘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떠올라, 오래된 자료들 사이에서 이 리뷰를 찾아 올린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4

  • 윤민연우맘 2009.11.20 12:39 신고

    며칠째 부영사.
    부지런한 포스팅으로 방문객에게 즐거움을 주던 주인장 어디갔나.
    아, 짜증으로 점철된 일주일이로다.
    나, 사업한다~ 여러가지로 골 아프네.
    태생이 게으른데 신경쓰면서 돌아다니면서 할 일이 왜 이리 많은고.

    • 이제 좀 신경써서 포스팅해볼까하고. 딴 이들은 블로그에 올린 글(?)로 책까지 내던데, 나도 제대로 써서 책을.. 흐흠.. 그것보다는, 하도 "지하련씨, 예전 당신 글 좋았는데, 요즘은 엉망이야, 왜 그래?"라는 소리를 최근 들어서 너무 자주 들어, 좀 포스팅에 주의를 기울이다 보니, 초고만 쓰고 올리지 못하는 글들이 꽤 있네. 크크. 기대하삼~.
      그리고 사업한다고? 사업하지 마삼. 천칭자리는 우유부단하고 느려서 사업에는 별로이네. 그런데 어떤 사업을 하길래? 여튼 돈 많이 벌어, 소원 성취. ; )

  • 지나가는사람 2011.05.28 14:15 신고

    리뷰가 참 슬프네요 ㅠ_ㅠ

    • 뒤라스의 소설을 읽는 이가 드문 요즘, 20세기 후반 프랑스 소설에서 뚜렷한 흔적을 남겼지만, 이젠 잊혀져 가고 있는 것같아요.~ 그래서 더 슬플 지도 모르겠어요. ... 뒤라스, 정말 좋은 소설가예요.



빠스꾸알 두아르떼의 가정

카밀로 호세 셀라(Camilo Jose Cela) 지음, 
김충식 옮김, 예지각, 1989년 초판.




어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나만 유독 되지 않는다는 기분이, 그런 경험이 계속 쌓여져갈 때, 그래서 나 자신에 대한 실망과 세상에 대한 불만과 증오가 쌓여져갈 때, 그것을 ‘운명’ 탓으로, ‘팔자’ 탓으로 돌릴 수 있다면 그건 얼마나 축복받을 일인가. 이제 ‘운명’대로, ‘팔자’대로 살면 그 뿐이다. 헛된 희망을 꾸지 말고 그저 원래 나는 불행하게 태어났으며 되는 일이란 없으니, 그저 그렇게 살면 그 뿐이다. 그리고 저 멀리서 ‘운명’와 ‘팔자’를 다스리고 있다는 초월적 실체에 대한 경배를 시작하면 된다. 점쟁이 집에 자주 가고 부적 붙이고 굿도 하고 안 다니던 절에도 나가고 교회도 나가면 된다.


그런데 그렇게 했는데, 그런 주어진 대로 살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불행이 일어난다면, 유독 나에게만 안 좋은 일이 연거푸 생긴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만 할까. 카밀로 호세 셀라의 ‘빠스꾸알’은 자신의 어머니를 난도질해버린다.

선생님, 저는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나쁜 사람이 되었을 뿐입니다.
- 8쪽


소설의 시작은 밋밋하고 도대체 왜 이 사내는 이런 말을 소설의 처음부터 하고 있는 걸까 하고 의아해하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난 다음 이 짧은 시작은 그 무수한 현대 소설들 중 가장 멋진 시작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짧은 문장 속에서 빠스꾸알이라는 이 사내의 가슴 속에 응어리진 분노, 사랑, 증오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요즘의 꼬마 아이들마저도 세상은 불공평하고 비합리적이며 되먹지 못한 곳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이제 ‘세상탓’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이제 세상에 ‘변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세상의 순리대로 살아갈 뿐이다. 나의 태생, 배경, 학력 등으로 내 인생은 정해져 버렸으며 그냥 여기에 만족하고 살아가면 그 뿐이다.

하지만 빠스꾸알은 사랑에 빠졌다. 그는 용감하게도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와는 전적으로 다른 인간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던 행복은 아주 짧은 순간 뿐이었고 연거푸 불행이 이어진다. 더구나 그 불행에 대한 해결책이 그에겐 없었다. 그저 묵묵히 받아들여야만 할 뿐. 태어날 아이가 죽어 나오고 겨우 태어난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버리고 사랑하는 아내는 다른 남자의, 자신의 여동생과 살고 있는 남자의 아이를 가지게 되고. 빠스꾸알에게는 평범한 삶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다른 남자의 아이를 천연덕스럽게 잉태하곤 그 아이를 죽게 내버려둔 그의 어머니나 술만 마시면 몽둥이질을 해대는 그의 아버지와는 다른 삶을 살고 싶었던 빠스꾸알. 하지만 그는 끝내 그의 어머니를 살해한다. 그의 아버지는 이미 죽은 지 오래.

세상에 진리가 있느니, 신의 밝은 빛이 지상에 당도한다느니, 선한 신이 있다느니 하는, 너무 듣기 좋아, 너무 아름다워 눈물이 다 날 지경인 그런 말들은, 불행하게도 빠스꾸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정말 다행스런 일은 그런 말을 지껄이는 이들에게 빠스꾸알에게서 일어났던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 누구나 똑같은 가죽을 뒤집어쓰고 어머니 뱃속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운명은 인간들이 마치 밀랍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우리들을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시켜, 죽음이라는 같은 목표를 향해 여러 갈래의 길로 가는 것을 보고 즐거워합니다. 고운 꽃과 풀들로 가득한 아름다운 꽃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엉겅퀴와 선인장이 무성한 험난한 길을 걷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꽃길을 걷는 이는 평화롭게 세상을 바라보는 기쁨을 맛보면서 천진난만한 얼굴로 행복에 겨워 미소 짓습니다.
그러나 엉겅퀴와 가시밭길을 걷는 자들은 광야의 폭염으로 괴로워하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험상궂은 우거지상을 합니다. 몸에 화장품을 바르고 향수를 뿌리는 것과 지울 수 없는 문신을 넣는 것은 차이가 큽니다.
- 8쪽에서 9쪽.


26살의 카밀로 호세 셀라가 1942년에 발표한 이 데뷔소설은 20세기 이후 모든 사람들이 부딪히게 되는 어떤 실존적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빠스꾸알이라는 인물을 통해 역설적인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운명은 무엇이고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되는 것이냐며.


'작가에 대하여'

 카밀로 호세 셀라(1916~2002) 

2권의 소설이 번역되었으나, 이젠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책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비극성을 가장 적절히 표현하며, 실존적 삶에 물음표를 던지는 20세기 후반 최고의 소설가들 중의 한 명이다.  

'빠스쿠알 두아르떼의 가족', 그리고 '벌집'이 번역되어있으니, 헌책방 어딘가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다. 1989년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으며, 스페인 마드리드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을 정도다.


민음사에서 새로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 - 10점
카밀로 호세 셀라 지음, 정동섭 옮김/민음사


신고

Comment +0

어둠이 내렸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알 턱도 없었고 알기도 싫었을 것이며 알려는 의지도 없었다. 이미 선 긋기는 시작되었다. 저 땅은 아무리 노력해도 닿지 못하는 곳.....

웹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필립 솔레르스(Philippe Sollers)가 사드(Marquis de Sade)에 대해 인터뷰하는 영상을 보았다. 영상 속에서 한국에서 사드의 책을.....

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

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 This Craft of Verse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거용 옮김, 르네상스 우리는 시를 향해 나아가고, 삶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리고 .....

대학로 그림Grim에서

"글을 쓰지 않아요?"라고 묻는다. 매서운 바람이 어두워진 거리를 배회하던 금요일 밤, 그림Grim에 가 앉았다. 그날 나는 여러 차례 글을 쓰지 않냐는 질문을 받았다. 가끔.....

아우스터리츠Austerlitz, W.G.제발트Sebald

아우스터리츠 Austerlitz W.G.제발트(지음), 안미현(옮김), 을유문화사 병상에 누워, 안경을 쓰지도 못한 채,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를 읽었다. 병상에서의 소.....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평전, 다나카 준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평전 다나카 준(지음), 김정복(옮김), 휴머니스트 일본인 저자가 쓴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평전이라니! 놀랍기만 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The Sense of An Ending, 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The Sense of An Ending 줄리언 반스(지음), 최세희(옮김), 다산책방 나는 우리 모두가 이러저러하게 상처받게 마련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

쓸쓸한 커피숍

2016. 06. 10 오늘도 기다림은 이어진다. 그리움은 늘 그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

혼술의 My Way
혼술의 My Way
테슬라의 Market Cap(시가 총액)
음악 소비는 이제 스트리밍이 대세
혼술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