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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철학 +49




서양철학사 History of Philosophy

윌리엄 사하키안William Sahakian(지음), 권순홍(옮김), 문예출판사 





1. 

서로 얽혀있는 것이다.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원불변하는 진리를 찾고 이를 지성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인류의 분투가 필사적으로 이어졌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있는 이 세계가 불완전하고 저기 완전한 세계가 존재하고 이 세계와 저 세계의 관계부터 파악해야 한다. 이것의 역사를. 


철학의 입장이 아닌 예술사의 입장에서 이 곳과 저 곳의 대비는 세계에 대한 비관적 인식의 시작이며, 어떤 절망이, 보이지 않는 슬픔이 이 세계 전반에 물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플라톤적 신비주의가 밀려들 것임을 예감케 한다. 플라톤이 말했던 이데아는 중세의 신으로 변화하고 칸트에게 있어서는 다시 ‘물자체’가 된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인식은 '물자체'에 가 닿지 못한다. 중세의 유명론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바, 보편개념은 이름 뿐이듯, 로크, 버클리, 흄으로 이어지는 영국의 경험론 철학자들은 경험 너머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다고 말하였고 칸트에 이르러, 저 영원불변하는 세계에 대한 관심을 닫아두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이고 옳은 방법이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은 쉽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우리 인간은 위를 향하고 있어서 그런 걸까. 하지만 그것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을 때, 이 세계는 아주 조금 그 쓸쓸한 베일을 벗는다. 그것이 견디기 어려운 슬픔과 포기, 쓸쓸함과 자조, 방관의 자세를 불러올지라도. 



2. 

서양철학사를 읽었다. 십 수 년 전 한창 공부할 때 이후 처음인 듯하다. 그 사이 몇 권의 지성사 책을 읽긴 했으나, 철학사와 지성사는 그 진행 방식이나 언급되는 내용이 매우 상이하다. 철학사는 개별 철학자에 초점을 맞춘다면, 지성사는 지적 세계의 변천에 그 관심을 기울이며 당대의 지적 흐름을 설명한다. 그래서 전자는 철학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는 이들이 읽기 유리하거나 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이 인내를 가지고 읽는 책이 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전자보다 더 폭넓은 주제와 인물을 다루며 좀 더 방대하지만 읽기는 상대적으로 편할 수 있겠다. 내가 이렇게 적고 있긴 하지만, 두 부류의 책을 일반 독자가 소화하긴 어렵긴 매 한가지일 게다. 


윌리엄 사하키안의 <서양철학사>는 다른 철학사와 비교해 다소 평이한 서술로 이루어진다. 딱딱하지 않고 짧은 분량에 철학사의 중요한 쟁점들은 다 거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특징은 19세기 이후의 철학자들에 대한 서술이 책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영미 철학에 대한 비중은 너무 높아서 베르그송에 대한 언급보다 사무엘 알렉산더(Samuel Alexander, 1859-1938)에 대한 설명이 더 길 정도다. 심지어 나는 사무엘 알렉산더라는 철학자를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이것은 이 책의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 될 것이다. 근현대 철학에 대한 여러 시각을 한 눈에 조망해볼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지만, 그것이 영미철학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점에서 편협성을 띄기 때문이다. 



3. 

<서양철학사>라는 제목을 단 책들 중 그 분량이 적은 편에 속하며 단숨에 고대철학에서 중세철학으로, 다시 근대철학으로 넘어가는, 다소 빠른 전개는 독서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중요한 철학자에 대해선 적절한 분량을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어서, 현대 가까이 오기 전까지 저자의 시각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Saint Thomas Aquinas)에 대한 설명은 매우 좋아, 이전에 읽었던 토마스 아퀴나스 개론서보다 더 압축적이면서 그의 철학에 대한 이해를 분명하게 할 수 있었다. 


다만 시중에서 구하기 어려운 책이 된 지 오래되긴 했으나, 재출간을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그 때 구입해서 꼭 읽어보길 바란다. 




(아마존에는 딱 2개의 리뷰가 있는데, 둘다 평점이 다섯개. 그리고 중고 가격은 2.5달러. 그러나 1968년에 출간된 이후 다시 나오지 않은 듯싶다. 하퍼콜린스의 대학교재 시리즈인듯한데, 새로운 책이 나왔고 그 책은 평점이 그다지... )



서양철학사 - 8점
윌리엄 사하키안/문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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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과 은총 La Pesanteur et La Grace 

시몬 베유 Simone Weil(지음), 윤진(옮김), 이제이북스 




신은 오직 부재不在의 형태로 천지만물 속에 존재한다. 

- 183쪽 




나이에 따라 읽는 책, 읽히는 책은 달라진다. 새삼스럽게 지루하던 고전이 재미있어질 수 있고 웃고 열광하던 대중 소설이 식상해질 수도 있다. 이건 책의 탓이 아니다. 나이듦의 신비일 뿐이다. 


성당을 다닌 지 벌써 1년이 되어간다. 그렇다고 미사에 쓰이는 모든 기도를 외우는 것도 아니지만, 아주 조금은 시몬느 베유(1909-1943)의 마음을 알 것같기도 하다. 


이 책은 세계2차대전, 그야말로 전쟁통에 쓰여진 짧은 아포리즘 모음집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존재를 끌어당기는 ‘중력’ 앞에서 신을 향해 상승하려는 신앙의 은총에 대해 이야기한다. 


종종, 자주 기독교적 테마가 극적인 불행, 견딜 수 없는 고통, 그 속에서의 믿음, 신앙의 확인, 은총과 기적, 마치 그리스 고전비극의 한 장면들처럼 극적인 비애감으로 가득차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그렇기 때문일 테고, 최선을 당해 보이지 않는 가치를 지켜 살아가는 선량한 우리-신앙을 가졌거나 가지지 않았거나, 심지어 종교나 신앙을 거부하거나 싫어하는-들이 살아가게 되는 삶의 서사구조일 탓이다.


책은 기독교적 테마로 가득하지만, 비극적인 상황, 고통과 두려움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또는 최선을 다해, 진심으로 신, 보이지 않는 질서, 저 영원한 침묵을 지키는 우주 그 자체에 의지하고자 하는 우리인간의 본성을 비애조로 노래한다.



창조는 사랑의 행위이며 영원하다. 매순간 우리의 존재는 곧 우리에 대한 신의 사랑이다. 그러나 신은 오직 자기 자신을 사랑할 뿐이다. 신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은 곧 우리를 통해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존재를 부여해 주는 신은 우리가 존재하지 않겠다고 동의할 때 우리를 사랑한다. 

우리의 존재는 오로지 이와 같은 신의 기다림과 그리고 존재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동의로 이루어진다. 우리에게 존재를 부여한 신은 우리들 곁에서 영원히 그 존재를 얻으려 애걸한다. 우리에게 주고 나서 바로 얻으려고 애걸하는 것이다. 

- 58쪽 



 



13살 때의 시몬느 베유





중력과 은총 - 10점
시몬느 베이유 지음, 윤진 옮김/이제이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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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입문 Theory of Beauty :  An Introduction to Aesthetics 

H. 오스본(Harold Osborne) 지음, 김광영 옮김, 박우사, 1994



한창 공부할 때 사둔 책을 이제서야 읽는다. 지금은 구할 수도 없고 구해 읽을 필요도 없는 책이다. 1952년 영국에서 출판된 책이며 해롤드 오스본의 주저도 아니다. 번역이 딱히 좋은 것도 아니고 미학에 대한 충실한 이론서도 아니다. 저자는 예술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아름다움(Beauty)를 가진 예술 작품에 대한 이론적, 미학적 논의를 이 책을 통해 전개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이름들은 한글로만 표기되어 정확히 누구인지 알기 어렵고 일부는 잘못 표기된 경우도 있어, 제대로 된 이해를 어렵게 만든다. 또한 많은 인용문들은 어느 책에서 발췌한 것인지 알기 어려우며 그 번역을 신뢰하기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최근의 이론들이나 관점에 기반하지 않아 미학의 기본적인 생각을 다듬을 수 있으며, 특히 예술작품론이나 감상론 부분은 잘 다루어지지 않는 영역이라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오스본은 책의 서두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연구는 당초 파산적(破産的)인 것'(10쪽)이라고 적고 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오스본은 자신만의 과감한 주장을 전개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다양한 관점에서 예술작품과 아름다움의 관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기술한다.  

 

예술작품이란 이 사람이나 저 사람 또는 여러 사람들에게 때때로 현실화되어 보이는 영원한 가능성인 것이다. 

- 128쪽 


미학 전공자에게도 이 책을 추천하고픈 생각은 없다. 요즘 좋은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으니, 새 책을 읽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냥 습관처럼 읽은 책에 대한 메모를 남기기 위해 이 리뷰를 적는다. 이 책이 궁금하다면 영국 아마존에서 구할 수 있다. 


나이가 들어, 이제서야 인문학 책들이 읽히기 시작하는데, 시간이 없다. 허망하다. 



https://www.amazon.co.uk/dp/B0000CIBJR/ref=cm_sw_r_cp_dp_T2_3GOrzbM9WCK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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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힐리즘과 문화(Nihilism en Culture) 

고드스블룸(Johan Goudsblom) 지음, 천형균 옮김, 문학과지성사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 49쪽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한 채 살아 죽는다. 자신이 이상주의자인지 현실주의자인지, 고전주의자인지 낭만주의자인지, 플라톤주의자인지, 반-플라톤주의자인지. 심지어 인문학을 전공하는 이들 중에서도 이를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동시에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지)를 알지 못한다. 


고드스블룸이 니힐리즘을 문화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분석하고 정리하고자 한 것은 현대에 이르러 니힐리즘이 일종의 문화의 차원으로까지 확대되어 대중화되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이 책의 두 번째 부분에서 문화에 대한 다양한 이론을 소개하고 이 속에서 니힐리즘의 문제를 거론하게 된다. 


전반적으로 니체의 니힐리즘에 많은 할애를 하고 있지만(그 정도로 니체와 니힐리즘을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그렇다고 다른 이들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가장 고귀한 가치는 상실되어 버렸다. 그 가치들은 평가절하되었다. 존재의 목적도 상실되어가고 있다. 존재의 목적에 대한 문제도 모두 미해결의 문제로 남아있다. 이것이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니힐리즘이다. '진리의 세계'란 결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신앙에 관한 모든 글이나, 진리로 인정되고 있는 모든 것이 허위임을 그것은 일깨워주고 있다. 니힐리즘은 '무'에 대한 감정, 즉 '허무감 pathos in vain'을 통해 절정에 도달하는 하나의 계시이다. 

- 61쪽 


특히 '진리 추구'라는 관점에서의 니힐리즘에 대한 접근(니체에 기대어)은 이 책의 내용을 진지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미 니힐리즘은 이 시대의 저변 문화가 된 것처럼 보인다. 


한 때 나는 '니힐리즘'이라는 단어가 더욱 유행할 것이라 여겼다. 동시대의 많은 이론들이 니힐리즘을 부추기며 '무가 바로 진리'라는 걸 대변하는 듯, 기존의 질서, 학설, 태도를 거부하고 무시하는 듯한 발언(이렇게 요란하게 발언하는 이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을 이어갈 때, 허무주의가 우리 시대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 여겼다. 그리고 그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사람들은 종교를 찾을 것이고 새로운 중세가 올 것이라고. 


체홉은 이 사태를 이미 예견한다. (실은 19세기 이후 많은 예술가들과 작가들이 니힐리즘을 노래했다)


모든 감정과 사상은 나와는 상관없이 존재한다. 과학, 연극, 문학, 제자들에 대한 나의 모든 비판 속에서, 그리고 모든 정경 속에서 나는 가장 훌륭한 분석가조차도 발견할 수 없었던 일반적인 개념이나 살아있는 인간의 신으로 불리는 것까지도 상상으로 그릴 수가 있다. 

그것마저도 없다면, 있는 것은 오직 무 뿐이다. 

이 극빈과 심한 질병과 죽음의 공포가 몰고온 환경이나 인간의 영향이 한때 내가 생활철학으로 받들고, 나의 존재의 의미와 즐거움을 찾았던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산산이 파괴해버리고 말았다. 

나는 지쳐버렸다. 그렇다면 생각하고, 말하는 것조차도 소용없는 일이 아닌가. 나는 조용히 앉아서 나에게 닥쳐오는 것을 맞이할 생각이다. 

- 안톤 체홉, <<음울한 이야기>>(272쪽에서 재인용) 


고드스블룸의 입장은 니힐리즘에 대한 사회문화적 차원에서의 연구를 통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원하는 뉘앙스를 풍기지만(종종 니힐리즘이 가진 부정적 요소를 강조하면서), 그것에까지 이 책은 이르지 못한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자신의 선명한 주제의식을 드러내었다기 보다는 니힐리즘을 둘러싼 니체와 다양한 작가와 학자들의 사례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은 절판되어 구할 수 없는 책이지만, 니힐리즘에 대해 관심있는 독자라면 일독을 권한다. 의외로 책 읽는 속도가 빨랐는데, 저자의 풍부한 인용과 깔끔한 정리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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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상이 건축을 결정짓는 걸까, 아니면 건축이 우리 일상을 결정짓는 걸까. 


대구에서 개인적 공간이 희박한, 하지만 오래전엔 자연스러웠던, 공동체적 가치를 가졌던 건물을 보고 .. 

그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건축의 가치를 새삼 느꼈다. 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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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를로 퐁티 Merleau-Ponty

J. 슈미트Schmidt(지음), 홍경실(옮김), 지성의 샘, 1994년 



다시 메를로-퐁티를 읽을 일이 생겨, 서가에서 이 책을 꺼냈다. 예전 밑줄까지 그으며 이 책을 읽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다시 읽으면서 그 땐 이해되지 않던 것들이 이해되기도 했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메를로-퐁티의 안내서로 적당하지 않다. 


이 책의 원서는 아래와 같다. 원서 표지에서 알 수 있듯이 사회과학의 입장에서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위치를 여러 학자들과의 비교를 통해 다시 되짚어보는 책이라 하겠다. 다시 말해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철학이 좀 더 쉽게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이 책은 어울리지 않는다. 



또한 전체를 다 번역한 것도 아니고 전체 5장 중 3장만 번역했다. 


1. 들어가는 글: 메를로-퐁티와 사회사상 

2. 현상학, 구조주의, 그리고 인문과학

3. 타인들 


나머지 챕터의 제목을 알 순 없으나, 사회과학자로서의 메를로-퐁티에 대한 책이지 철학자 메를로-퐁티에 대한 것이라 보기 어렵다. 그리고 슈미트가 집중하는 부분도 메를로-퐁티의 핵심 주제라기 보다는 다른 학자들과 비교하기 쉽고 자신의 관심사에 집중되어 있다고 할까. 솔직히 '타인들'이라는 챕터는 좀 생뚱맞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메를로 퐁티의 저작 속에서 타인들에 대한 생각을 훑고 지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학자들과의 교차를 통해 조망하고 있기 때문에, 메를로 퐁티에 대한 깊이있는 분석이나 이해를 도모하기도 어려웠다.


아마 5장 전체를 읽었다면  내 평가가 다소 달라졌을 지도 모르겠지만, 메를로-퐁티 철학에 대한 입문을 위해서 읽어야 할 글이 있다면, <<행동의 구조>> 맨 앞에 나오는 알퐁스 드 와렌스의 <애매성의 철학>이 내가 읽어본 바 최고였다. 


출간된 지 오래된 책이라 이젠 구할 수 없긴 하지만, 메를로-퐁티의 유명세에 비해 그에 대한 책은 부족하기만 하다. 하긴 어느 철학자가 안 그럴까. 인문학도 유행을 타기 마련이긴 하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도 못한 채 유행만 쫓아 읽는 풍토는 20년 전이나 지금이 변하지 않은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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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공유하지 않은 자들의 공동체 

(The Community of Those who Have Nothing In Common) 

알폰소 링기스Alphonso Lingis(지음), 김성균(옮김), 바다출판사 






우리가 속한 환경의 외계外界를 향해 우리가 전진하는 과정은 우리의 죽음을 향해 전진하는 과정이다. 죽음은 세계의 모든 틈새에 존재하고, 심연은 세계를 연결하는 모든 회로의 이면에도 존재하며, 세계를 연결하는 길들의 저변에도 존재한다. (252쪽)




철학서답지 않은, 부드럽고 다소 낯선 문장들은 독자에게 느리게 읽을 것을 요구한다. 이 강제된 느림은 현대스럽지 않다. 책 표지는 알폰소 링기의 글과 어울리고, 타자와 공동체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담은 책이지만, 산문처럼 읽히는 건 그만큼 문학적인 탓이리라. 번역되자마자 바로 구입했지만, 몇 년이 지나서야 겨우 다 읽을 수 있었던 건 저 느리게 읽기가 내 일상과 참 멀리 떨어져있기 때문이다. 꽤 힘들게 읽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여서 이 서평도 만만치가 않다. 하지만 이 읽기의 경험은 우리에게 독서에 집중할 한 두 시간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해 줄지도 모른다.


링기스의 철학은 사상의 측면에서나 행동의 측면에서 대학의 상아탑에 갇힌 보통의 포스트모던 학문들을 멀리 벗어나 있다. ... ... 그는 자신의 동료학자들과는 반대로 제 3세계와 고대 문명의 유적지들을 직접 여행하면서 체험한 사랑, 신뢰, 죽음, 육욕을 탐구하고 그 결과들을 독창적인 1인칭 문장으로 유려하게 서술한다. ... ... 링기스의 철학은, 한 마디로 말해서 전통적인 철학의 강박관념을 떨쳐버리는 철학이다. 

- 스티븐 재니스Stephen Janis(<시티 페이퍼City Paper> 편집위원 및 기자) 

(* Mortal Thoughts - Philosopher Alphonso Lingis Brings the Real World to the Ivory Tower, by Stephen Janis, Citypaper.com) 



링기스는 아무 것도 공유하지 않은 자, 즉 타자에 대해 이야기하며 타자를 받아들이며 공동체를 이루어나가는 과정에 대해 서술한다. 그는 서구의 합리성이란 타자를 지우고 배제하며 추방하는 것임을 전제한 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을 말한다. 그리고 그 극복의 계기를 '죽음'에서 찾는다. 책 말미에 그 스스로 타자로서 죽을 고비에 겪었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죽음이 우리와 타자를 이어주는 강력한 끈임을 주장한다.



합리적 공동체가 한창 작업하는 와중에 형성되는 공동체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아무 것도 공유하지 않은 사람들의 공동체 - 죽음과 '죽어야 할 운명'을 제외하면 아무 것도 공유하지 않은 사람들의 공동체 - 이다. 그렇다면 인간들은 서로 분리시키고 격리시키는 죽음은 공통 죽음common death일까? 그리고 그런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닌 무無로서 분류될 수 있을까? 

- 38쪽 



그리고 책의 대부분은 합리적 자아가 어떻게 타자를 인식하고 이해하며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대한 철학적 논의(혹은 사색)이다. 합리성과 타자, 타자성의 경계, 개별화된 개인과 타자, 소통, 나라는 존재와 죽음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지향해야 될 공동체에 대해. 



타자에게 내밀어지는 손은 타자의 취약성, 피로, 고통과 접촉하고 그 손의 소유자를 타자가 죽어가는 자리로 데려간다. 그 손은 낯선 정언명령에 순종한다. 이런 타자의 죽음 과정은 나와 유관한 것이다. - 252쪽 



하지만 우리 바깥의 타자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쉽지 않다. 심지어 우리 안의 타자도 무시하고 지우며 없애는 것이 바로 서구의 합리성이다. 그리고 타자와 마주하는 과정은 그 순간순간 모두가 투쟁의 과정이다. 



소통에 참여하는 과정은 전달하려는 메세지의 배경잡음과 그 메세지 자체에 내재된 잡음에서 메세지를 추출하는 과정이다. 소통은 간섭과 교란에 대항하는 투쟁이고, 배경으로 밀쳐져야 하는 부적절하고 애매한 신호들에 대항하는 투쟁이며, 소통자들 사이에서 상호적으로 제시되는 신호들에 내재된 잡음들 - 사투리억양들, 틀린 발음들, 모호한 발음들, 더듬거림들, 헛기침들, 돌발적 탄성들, 발설되다가 중단되는 단어들, 문법을 벗어난 축약어들 - 과 시각매체에 포함된 소음에 대항하는 투쟁이다. 

- 116쪽 



이 투쟁 속에서 타자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한 노력과 그 방법들에 대해 다양한 철학자들의 논의, 문화인류학적 사례, 현대 예술이나 과학 기술, 그리고 자신의 경험에서 끄집어낸다. 



살아있는 우리는 타자들의 죽음에 노출된다. 이 책에서 제시되는 것은 근본적인 의무, 즉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그들과 함께 있어야 하며 그들과 동반해야 하는 근본적인 의무이다. 병원에서든 빈민촌들에서든 외롭게 홀로 죽어가는 사람을 방치하는 사회는 급속히 자멸하는 사회이다. '죽어가는 사람과 우리가 함께 하는 공동체'는 '공통적인 것을 공유하고 공립하는 사람들과 우리가 함께 하는 공동체'와 어떤 관계를 맺을까? 

- 261쪽 



책이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천천히 읽는다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    * 


덧붙이는 글) 


이 책을 다 읽고 난 다음, 위 서평과는 무관하게 '아무 것도 공유하지 않은 자'란 바로 평범한 우리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 책의 논의를 한국 사회에 적용하니, 꽤 심각한 정치학 서적이 된다. 타자란 바로 우리들이고, 합리성으로 무장한 자들은 바로 국가 권력이다. 국가 권력은 타자인 우리를 배제하고 지우고 있었다. 링기스에 의하면, 합리성이란 개개의 특성을 무시하고 하나의 균질성을 향해간다. 


세계의 잡음을 제거하는 과정은 합리주의자가 되는 과정이다. 소통의 위한 최초 노력은 사고력이 추구할 탈물질화를 미리 시작한다. 하나의 형식을 그것의 경험적 실현과정들에서 독립시키기 위한 노력은 보편적인 것, 과학적인 것, 수학적인 것을 구성하기 위한 노력으로 귀결된다. - 128쪽 



애초에 타자의 죽음이란 죽음이 아니다. 그냥 없는 것이다. 그것은 무시되는 것이며 그 어떤 호소력도 가지지 못한다. 평범한 우리들은 지금도 죽어나가지만, 국가 권력 앞에선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우리는 여러 매체들을 통해 소통하려고 노력하지만, 소통이란 단어는 우리들에게만 해당될 뿐, 그들에겐 해당되지 않는다. 즉 소통의 의미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소통을 폭력의 연속으로 간주하되 특히 다른 수단을 사용하는 폭력의 연속으로 간주하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은 주장과 논쟁을 통해 이루어지는 소통의 변증법 과정에서 소통자들 각자를 타자가 아닌 자신으로 만들어주는 틈새 시간을 목격한다. 그 사람은 그 틈새 시간에 '저마다 자신이 하는 말의 정당성을 확증하기 위해 말하는 소통자들'을 목격한다. 소통자는 자신의 정당성을 확증하기 위해 말하는 과정은 타자를 침묵시키기 위해 말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처음부터 소통자의 정당성을 확증할 가능성을 배제해버렸다. 왜냐면 소통은 타자 - 소통자의 상대방 - 가 아닌 국외자 - 야만인, 의인화된 잡음 - 를 침묵시키기 위한 노력이기 때문이다. 

- 118쪽 



한국의 보수 정권 앞에서 국민들은 타자이며, 국외자이고, 잡음일 뿐이다. 그들 앞에서 우리는 침묵해야 될 자들이며, 그들 앞에서 나서서는 안 될 존재다. 잊혀진 존재이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존재다. 


그러니 우리에겐 자유만 있을 뿐이다. 말할 수 있고 행동할 수도 있다. 단 저 성벽 밖에서. 성 안으로 들어와 어떤 행동을 하는 순간, 그 때서야 비로서 우리가 타자였음을 깨닫게 된다. 이 자괴감, 이 무능력함, 그리고 스스로 속고 있었구나 하는 반성과 후회가 태풍처럼 휘몰아친다. 즉 그들을 향한 분노나 투쟁의식이 아니라, 먼저 스스로부터 무너지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스스로 침묵을 강요한 채 걸음을 멈추고 부서지는 자신의 마음 속으로 숨는다. 


한국 사회의 비극은 드러나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곳에 있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타자화시키면서 끊임없이 무능력하게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타자로 만든 그들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공격하거나 우리들 내부에서 갈등하고 상처입고 상처입히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얼마나 더 나락으로 떨어질 것인가에 대해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미 타자화된 우리는 한국 사회에 속한 이가 아니다. 국가는 없고 국가 없는 국민이다. 그러니 이 사회의 미래는 더 이상 호소력이 없거나, 지금 당면한 문제만으로 타자인 우리는 충분히 고통스럽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 사실조차 모른 채, 그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믿으며 따라하면서 타자를 부정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하긴 이것도 전체 역사로 보자면, 아주 짧은 기간일지도 모르리라. 아주 사소한... (이렇게라도 해야 그나마 위안이 된다고 해야 하나) 




* 스티븐 재니스: 탐사 보도 전문 저널리스트로 여러 저널리스트 상을 수상했다. 아마존에 저자 페이지가 있다. http://www.amazon.com/Stephen-Janis/e/B009OBYC6O  (누구인지도 모른 채 인용하는 것이 다소 무책임해보여 누구인지 찾아보았다. Citypaper라고 해서 이런 잡지가 있는가 했더니, 미국 대도시마다 다 있었다. 다행히 스티븐 재니스가 쓴 리뷰가 있었지만, 이 원문은 확인하지 못했다. 시티페이퍼에서 검색되지 않았다. 원문이 사라진 것이다. 해당 시티페이퍼는 볼티모어 시티페이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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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천년을 사는 방법

움베르토 에코(지음), 김운찬(옮김), 열린책들 





이 책은 움베르토 에코가 <<레스프레소L'espresso>>라는 이탈리아 주간지에 실었던 <미네르바 성냥갑> 칼럼을 모아 낸 책이다. 칼럼집이라고 할 수 있는데, 1년 전에 읽었던 도정일 교수의 칼럼집,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과 묘하게 비교된다. 어떤 이는 이 '비교'가 부적절하다고 강하게 주장할 것이다. 나도 '비교'할 생각은 없다. 다만 책 구입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는 독자로서, 도정일 교수의 칼럼집에 대해선 돈이 아까웠지만, 움베르토 에코의 칼럼집에 대해선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걸 이야기할 필요성을 느낄 뿐(그런데 이것은 저자가 신경 쓸 부분이라기 보다는 출판사 관계자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움베르토 에코의 에세이집들을 읽어본 독자들이라면, 이 책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에코의 인문학적 재치는 유머스러하면서도 그 특유의 통찰력을 보여준다. 가령 <왜 시인은 게을러야 하는가> 같은 칼럼에서. 


책과 예술, 인터넷 등 여러 분야에 대한 다양한 칼럼들로 채워진 이 책은 책상에 앉아 정독하면, 도리어 재미없어진다. 스마트폰에 정신 팔린 사람들도 가득찬 소란스러운 지하철이나 버스, 독서는 안중에도 없이 영어 공부방이 되어버린 커피숍 등에서 움베르토 에코는 최고의 선택이다. 


나도 거의 십수년만에 움베르토 에코의 칼럼집을 읽었다. 예전에 사두었던 에코의 칼럼집 한 두 권이 서가 어딘가에 있을 텐데 말이다. 



그러므로 독자들이여, 안심하시라. 열 권의 책을 읽든 같은 책을 열번 읽든, 똑같이 교양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단지 전혀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나 걱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런 걱정을 전혀 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들이다. 

- 32쪽 



책을 읽다고 교양 있는 사람이 될 것같진 않고, 다만 요즘 같은 시절의 한국에서 책을 읽다는 것이 얼마나 유별난 습관인지, 깨닫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으니, ... 그래도 움베르토 에코 같은 이에게서 위안을 얻어야 할 것이다. 


* 움베르토 에코 사이트 : http://www.umbertoeco.co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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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지음), 김태환(옮김), 문학과지성사 



베스트셀러가 된 철학책을 읽었다. 한국에서 공학을 전공한 후 독일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현재 베를린 예술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한병철의 <<피로사회>>. 몇 해 전 이 책으로 떠들썩할 때, 나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베스트셀러가 되는 건 책의 내용보다는 마케팅의 힘이 더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 초 집 근처 구립도서관 서가에 새로 들어온 책 서가에 한병철 교수의 <<투명사회>> 몇 페이지를 읽고 난 다음, 바로 그의 책 세 권을 주문하고야 말았다. 그만큼 인상적이고 놀라웠다고 할까. 

단정적인 논조였지만, 일관성이 있었고 나에겐 매우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고 해야 할까.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Leistungsgesellschaft로 변모했다. 이 사회의 주민도 더 이상 "복종적 주체Gehorsamssubjekt"가 아니라 "성과주체Leistungssubjekt"라고 불린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이다. 
- 23쪽 


성과는 신자유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가치다. 그리고 나는, 우리는 그것을 달성할 수 있다. 기업의 목표를 지나 국가의 목표가 되고 가정의 목표가 되며, 너와 나의 목표가 되었다. 그리고 할 수 있다는 가능성, 긍정의 가능성을 바탕으로 스스로를 고갈시킨다. '이제 금지, 명령, 법률의 자리를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대신한다.'(24쪽)


긍정성의 폭력이 깃드는 곳은 부정이 없는 동질적인 것의 공간, 적과 동지, 내부와 외부, 자아와 타자의 양극화가 일어나지 않는 공간이다. 
(... ...)
긍정성의 폭력은 박탈privativ하기보다 포화saturativ시키며, 배제exklusiv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exhaustiv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직접적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 21쪽 


그는 피터 한트케를 인용하며, 한트케가 이야기하는 '근본적 피로'를 끌어들인다. 성과사회의 피로를 벗어나기 위해 한트케의 피로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피로는, 현실 사회에 묶인 현대인들에게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건 한국적 상상황에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매우 짧은 책이고 압축적이다. 의외로 책 읽는 속도는 느리고 하나하나 꼼꼼하게 읽어야 한다. 읽은 지 몇 달만에 쓰는 서평인 탓에 허술하긴 하지만, ... 이 책 무척 좋다. 일독을 권한다. 

*     *   
덧붙이는 글 1)
맥그레이스의 <<경쟁 우위의 종말>> 마지막 부분은 개인에 대한 전략에 대한 것이다. 경영학은 이제 기업을 지나 개인의 차원까지 확대 적용된다. 그런데 동시대의 탁월한 인문학자들은 경영학과는 정반대되는 지점을 가리킨다. 어느 것이 옳고 그른가의 문제라기 보다는 우리 시대가 가진 갈등 국면을 여실히 드러낸다고 할까. 어쩌면 미국적 이데올로기와 유럽적 이데올로기의 충돌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를 대학 교육에 적용하면 아주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인문학의 성과는 보이지 않고 계량적 측정이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과사회의 피로 속에서 인문학은 죽어가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성과사회 속에서 직장인 교수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성과사회에 적응하다보니, 인문학이 죽어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후자라고 보지만, 인문학 교수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피로사회 - 10점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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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7.08 01:54

    비밀댓글입니다

  • 지하련님 추천 글보고 책 읽어봤습니다. ㅎㅎㅎ


    제 생각엔.... 인문학이 의외로 굉장히 부르주아 스러운 분야라는데 가장 큰 문제가 있는 듯합니다.
    인문학자의 급여는 배고플지 몰라도 인문학적 소양을 쌓는 일만큼은 결코 배고프지않기 때문입니다. ㅋㅋㅋ

    게다가 인문학적 감성 및 능력(?)을 통해서 수혜를 얻고자하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취업따위를 노리는 사람들이 아닌 듯합니다. 요즘 거부가 되는 실크로드라는 IT의 핫한 아이돌들의 흔한 비하인드 스토리 역시 인문학적 소양인 경우가 많습니다. 장래희망이 최소 자기사업체 설립에서 최대 세계적인 기업 총수정도 스케일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이 인문학인듯 합니다.(혹은 사회를 어느 방향성으로든 우선 엎어보겠다는 야심가이거나;;;;) ㅎㅎㅎ

    얼마 살진 않았지만;;; 살수록 사회라는 단어가 합리, 이성, 원리, 원칙, 개념 과는 전혀 별개의 개념이라는 생각이 굳어집니다 ㅜㅜㅜㅜ

    • 실은 합리, 이성, 원리, 개념과 사회, 혹은 우리 삶은 매우 깊숙하게 결부되어 있습니다. 다만 이걸 철학 서적을 읽으면서 파악하기란 쉽지 않아요. 그리고 '굉장히 부르주아'스러운 분야가 된 것도 없지 않아 있는 듯해요. 저같은 경우에도, 돈벌이와는 직접적 연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고 돈벌이와 관련없는 부분에 대한 의견까지 피력하기도 하고 글을 남기기도 하니 말이죠.

      그런데 이것은 '사랑'과 비슷한 종류입니다.돈벌이와는 무관하죠. 하지만 살아가다가 마주하게 되는 문제들의 깊숙한 곳에는 철학적인 질문이 있죠. 가령 '왜 나는 그/그녀를 사랑하는 것일까'따위의 질문 말이죠. '왜 나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왜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것일까?'라는 질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왜 나는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 거지?'라는 질문도 비슷합니다. 실은 이런 물음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철학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고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철학의 백미는 서양에서는 플라톤이 될 것이고, 동양에서는 공자가 될 것입니다. 최초에 질문한 자가 있었을 것이고 그것의 답을 구한 자가 있을 것입니다. 최초의 철학은 동시에 문학이며, 기하학이고, 자연과학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사회가 복잡해지는 만큼 철학도 복잡해졌고 우리가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세상에 살고 있듯, 철학도 보다 단순하고 분명한 일상어로 우리 삶을 이야기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보니, 철학 책은 뭔가 여유로운 사람들이 읽는 책 비슷하게 여겨지는데, 실은 그렇지 않고, 도리어 여유롭지 못한 이들이 읽어야 하는 책입니다. 왜냐면 여유는 세상을 얼마나 깊이 있게 보고 이해하고 대처하느냐에 달려있으니깐요. ^^

  • 저도 지하련님께서 정성스럽게 달아주신 답글에 모두 동의합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런 생각을 하는 나도 어쩌면 부르주아구나 ㅋㅋㅋ 라는 생각에 저런 답글을 달아봤습니다.

    저는 ... 인문학의 힘을 누구보다 믿습니다. 다만, 대중은 저와는 의견이 다를 것이라는 생각은 저를 힘들게 합니다. ㅎㅎ


선생님께서 강의를 위해 손수 적으신 노트를 보내주셨다. 이에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한글번역본을 주문하고 영어 번역을 구했다.


학부 시절, 강의 시간에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철학자에 들은 바 없다는 건 죄악이다. 아무리 문학 전공이라고 해도. 학생들에게 미래가 없는 건 그 학생들의 선생들에게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지적(知的) 자극을 제대로 받지 못했음은 종종 내가 대학 잘못 선택해 갔나 하는 생각이 든다(하긴 다른 대학엘 갔어도 마찬가지였을 듯).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을 읽으면, 꽤 우울해지겠구나. 하지만 우울(melancholy)이란, 천재들의 기질임을!!


아래에선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를 독일어 원문 - 영어 번역(the Ogden (or Ogden/Ramsey) translation) - 영어 번역(the Pears/McGuinness translation) 형태로 된 PDF 파일을 구할 수 있다.


http://people.umass.edu/klement/t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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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등학생 때 사실 겉멋으로 시작했는데 .... 어째 대학가서 고등학생때보다 이해를 더 못하던 책이었네요. ㅎㅎㅎ

    확실히 천재의 책이라 그런지 직관과 객기가 뭔가 작가의 의도와 부합하는 읽기활동이 된 건 아니었나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랜만에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ㅎㅎ

    • 어쩌면 모든 철학책들이 다 그런 것같아요. 차라리 겉멋으로 읽을 때가 좋았습니다. 그 땐 몰라도 아는 척 할 수 있었는데, 이젠 아, 모르겠다라는 절망감이 더 크게 다가오니깐. ㅜㅜ 아. 이것도 읽다 말았네요. 다시 읽어야 겠어요.


아미엥에서의 주장 Positions(1964~1975)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지음), 김동수(옮김), 솔, 1991 








정치는 나를 열광시켰으며 나는 공산주의 투사가 되려고 노력했다. 철학 속에서 나의 흥미를 끌었던 것은 유물론과 그 비판적 기능, 즉 과학적인 지식의 편에 서며, 이데올로기적인 '지식'의 모든 신비화에 대항하는 기능, 그리고 신화들과 거짓말들의 단지 도덕적인 포고에 대항하여 그것에 대해 합리적이고 격렬하게 비판하는 기능이었다. - 44쪽 



* *


솔직히 말해, 이 글은 어색하다. 1991년 양장본으로 번역 초판이 나왔고 1996년 보급판 3쇄까지 나왔다. 보급판 3쇄, 내가 읽은 책이다. 내가 알기로 그 당시 보통 2,000부를 출판하였으니, 지금과 비교하여 많이 팔렸고 많이 읽혔다. 그러다가 순식간에 알튀세르가 사라졌다.


그 많던 독자들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내 앞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이야기하던 친구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을 강제하던 선후배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아직도 그 강제의 폭력성을 떠올릴 때면 그들이 저항하던 폭력적 사회와 그들의, 갓 들어온 신입생들과 소위 운동권에 대해 관심이 없던 동료 학생들을 향한 폭력성은 닮아있음을, 그리고 결국 그들이 이 사회를 이렇게 엉망으로 만든 공범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맑스의 전(全)이론, 다시 말해 맑스에 의해 확립된 과학(역사적 유물론)과 맑스에 의해 열린 철학(변증법적 유물론)은 계급 투쟁을 그 중심과 핵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계급 투쟁은 맑스-레닌주의적 노동운동의 정치적 실천에서뿐만 아니라, 이론에 있어서, 그리고 맑스주의적 과학과 철학에 있어 '결정적인 고리'다. - 69쪽 



이십여 년 전에도 읽었을 위 문장을 다시 읽으니, 참 멀리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계급 투쟁은 계급 의식부터 생겨야 하는데, 솔직히 계급 의식을 만들기조차 버거운 상황이 되었다. 아니 부르조아 - 프롤레타리아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구분은 이미 호소력을 잃은지 오래다. 그래서 알튀세르는 용감하게 프로이트와 라깡을 마르크스 안으로 끌어들였는지도 모르겠구나. 



왜 철학은 단어들을 두고 서로 싸우는가? 계급투쟁의 현실은, 단어들에 의해 '표현되는' '사고들'에 의해 '표현된다.' 과학적, 철학적 추론 속에서 단어들(개념,범주들)은 인식의 '도구'들이다. 그러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철학적 투쟁 속에서 단어들은 또한 무기이고 폭탄이며 진통제이고 독약이다. 모든 계급투쟁은 때때로 한 단어의 편에 서서 다른 단어에 대항하는 투쟁 속에서 요약될 수 있다. - 54쪽 



알튀세르의 이런 면 - 이론적 실천 - 으로 인해, 그의 제자였던 랑시에르(Jacques Ranciere)는 단호하게 알튀세르의 이론을 거부한다(알튀세르의 제자들로는 에티엔 발리바르, 피에르 마슈레이, 자끄 랑시에르 등이 있다).



자크 랑시에르는 오늘 다루는 세 명의 철학자들 중 알튀세르에 대해 가장 비판적이며, 그 스스로 고백하듯이 알튀세르의 입장에 대한 거부에서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전개해나갔다. 랑시에르에게 있어 알튀세르 입장의 문제점은 정치적 행위자들이 실천하는 것은 결국 "그들 자신은 사유하거나 사유할 수 없"는 진리라는 측면에서 그것은 '엘리트주의'라는 것이었다. 정치적 행위자들로서 대중들의 능력을 불신하고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입장은 '사유하는 지식인 집단'과 '사유하지 못하고 생산하는 대중 집단'의 선 긋기라는 것이다. 부르주아적인 것과 프롤레타리아적인 것의 구분, 말할 자격이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격리, 교육 받는 자와 가르치는 자의 분리에 대한 저항에서 랑시에르는 '출발'한 것이다. 

- 박기순, <'정치'의 가능성에 대해 새롭고 다르게 사유하다> 중에서 

출처: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09261 



하지만 이 작은 책, 짧은 논문들의 모음집인 이 책이 읽혀야 한다면, 그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라는 논문 때문이다. 아마 철학 전공자보다 영화나 미디어 전공자들이 더 많이 읽었을 이 논문은 앞으로도 계속 읽힐, 꽤 시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알튀세르는 이 짧은 논문을 통해, '생산 관계들, 즉 자본주의적 착취관계들의 재생산'을 위해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이 기여한다고 주장한다.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 국가가 허용하는 폭력에 의해 기능하는 억압적 국가 장치 - 군대, 경찰 등 - 과 달리 '이데올로기에 의해' 기능하며, 종교(다양한 교회들의 체계), 교육(공적, 사적인 다양한 '학교들'의 체계), 가족, 법률, 정치(다양한 정당들을 포함하는 정치적 체계), 조합, 커뮤니케이션(잡지, 라디오, TV 등), 문화(문학, 예술, 스포츠 등)에 걸쳐 있다고 말한다(실은 그냥 이 사회 전체라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결국 기존 체제는 억압적 국가 장치로 관리되면서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로 끊임없이 재생산되어 유지된다. 여기에는 '개인들을 주체로서 호명하는 과정'이 포함되는데, 이는 '완전히 혼자서 활동'하도록 하면서 '종속에 의해서, 종속을 위해서만' 존재하도록 만들기 위함이다. 거칠게 설명하자면, 각각의 개인들이 자유로운 주체임을 알게 되는 것은 개인들의 자발적인 각성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호명에 의해서이고 이 호명은 보다 거대한 주체(신이거나 국가이거나)에 의해서다. 즉 누군가를 불러줌으로써 개인을 자유로운 주체로 올리고 그 주체에게 지배 이데올로기를 심는다.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의 확산을 통해 기존 생산관계는 확대, 재생산된다. 어쩌면 이러한 확대, 재생산 구조에 저항하고 해체하는 것을 알튀세르는 이론적 실천으로 여겼는지도. 





그 외의 논문들, <프로이트와 라깡>, <혁명의 무기로서의 철학>, <자본론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맑스주의와 계급투쟁>, <아미엥에서의 주장> 등도 읽을 만하다. 하지만 이런 책에 관심 있는 독자가 얼마나 될까 싶고, 이 책은 이제 시중에서 구하기도 어려우니, 다시 번역되어 나오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을 듯 싶다.


그리고 이 책이 얼마나 호소력이 있을 지도 의문스럽다. 동시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현대적 해석이나 접근이 아니라, 그냥 정치 일반에 대한 지극히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이해를 돕는 책이면 충분해 보인다. 그 정도로 나라가 엉망이 되었으니까. 그냥 보수주의자가 보기에도 지금은 이상한 시대다. 보수라는 단어까지 부끄러운 시대가 되었으니, 마르크스주의는 그냥 신기루다. 


문제는 '보수'라는 단어인데, 이제는 그 단어가 조금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 생각할 때, 이명박 정권은 보수를 표방하고 들어선 첫 정권이었지만 독단적인 국정 운영과 부패, 비리 의혹으로 얼룩져 실패한 정권이었다. 박근혜 정권은 그런 오점을 청산하고 태어난 합리적인 보수정부이기를 기대했건만, 지금까지의 결과로 봐서는 더 이상 기대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한 정권은 부패했고, 또 다른 보수정권은 무능이라는 평가를 받을 것이라 생각하니 허무하다. 

- 이상돈, <<공부하는 보수>>, 책세상, 12쪽 



거참, 이런 시대에 알튀세르라니! 나는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아래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의 영문 번역이다. 관심있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 연구를 위한 노트 (영문 번역)



* 알튀세르에 대한 비판은 랑시에르를 통해서도 가능하지만, E.P.톰슨은 아예 책까지 냈다.<<이론의 빈곤>>(책세상, 2013). 알튀세르에 대해 조금 웹 서핑을 해보다가 찾았다. 직장인이다 보니, 이런 책이 나오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건 그렇고, 요즘 주머니 사정도 좋지 않은데, ... ㅡ_ㅡ;; 




아미엥에서의 주장 - 10점
루이 알튀세르 지음/솔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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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을 찾아서 - 현대미술의 시작

이우환(지음), 김혜신(옮김), 학고재





번역자인 김혜신 교수에 따르면, 이 책에 실린 이우환의 글들은 주로 1960년대 말 쓰여졌다고 한다. 60년대 말에 출간된 이 책을 2000년에 일본에서 재 출간하였고, 2011년에 한국의 학고재에서 한글로 번역, 출판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 당시 이 책은 일본 미술계의 ‘태풍이면서 바이블’이었다. 


우리는 이우환이 세계적인 예술가의 반열에 올라섰음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그가 탁월한 미술 비평가이자 이론가이며 일본 현대 미술에서도 그 위상이 대단한다는 사실은 일반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일본어로 글을 쓰는 시인이자 산문가이며, 그의 일부 글은 일본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인정 받고 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이우환은 일본에서 먼저 유명해졌고 그 다음 파리를 중심으로 한 서유럽에서, 그런 다음 한국 미술계에 소개되었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믿을까?)


1960년대 말 이우환은 현상학에서 바라보는 바, 서양 근대 철학의 흐름 속에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예술 시각을 이 책을 통해, 그리고 모노하(もの派)라는 미술 운동을 통해 드러낸다. 이 책은 일본 모노하 운동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으며, 미술 이론가 이우환을 제대로 알린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0여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그 탄탄함과 생생함이 가시질 않는데, 60년대 말, 70년대 초 메를로 퐁티, 마르틴 하이데거, 장 폴 사르트르, 그리고 니시다 기타로를 인용하며 일본 현대 미술이 나아가야 할 바를 제시하였을 때, 얼마나 많은 동시대 일본인들은 그를 질투했을까는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더구나 1960년대 말의 이우환만큼 탁월한 식견으로 뛰어난 글을 쓰는 미술 비평가, 혹은 이론가를 한국에서 만나지 못했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원래 테이블이나 의자, 풍경 자체는 아무런 시각적인 원근법도 가지지 않는 세계이다. 실재는 인간의 가치 조정 없이 스스로의 거리를 가지고 자유로운 모습을 보이는 세계인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이 쪽이 중심이 되어 저 쪽을 보고 싶은 대로 규정하는 표상 관념에 의해 시야의 세계를 원근법의 화신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110쪽) 



그는 서구의 모더니즘 미술을 부정한다. 그는 근대 철학은 실제 세계와는 무관한, 우리 관념의 표상을 상정하고 그 표상을 그대로 투영시킨다고 말한다. 즉 외부 세계는 우리의 관념으로 해석, 투영된 것이지, 실제 존재하는 바 외부 세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그의 생각이 아니라 20세기 현상학자들, 특히 메를로 퐁티가 지적하는 바이며, 그 외 많은 사상가들이 지적해온 바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메를로 퐁티에서 출발해 니시다 기타로에 이른다. 



우리의 신체라고 생각되는 것이 이미 모순적 자기 동일로서 행위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행위하는 것이 보고 있는 것이며, 보는 것이 행위하는 것이다. 신체의 움직임은 이미 표현 행위인 것이다. … … 행위하는 것과 보는 것이 결합하는 곳에 신체가 있다. 행위적-직관적으로 사물이 보이는 곳에 신체가 있는 것이다. 

- 니시다 기타로, <인간의 존재> 중에서(227쪽 재인용) 



… … 예술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예술가의 온전한 신체라고 해도 좋다. 

- 니시다 기타로, <무의 자각적 한정> 중에서(228쪽 재인용) 



관계항2007



우리가 1990년대 초반 포스트모더니즘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서 서구 근대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면, 이우환은 이미 1960년대 근대 철학, 근대성(Modernity)의 한계성을 이야기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예술적 방향이나 실천을 고민하고 있었던 셈이다. (하긴 그 전에는 한국의 암울한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그럴 여유도 없었겠지만, 그런데 지금은 뭐지?)


그가 집중하고 있는 현재의 작품 활동은 이런 그의 고민이 고스란히 투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인 동시에 공간이며, 공간인 동시에 시간인 지점이 열리는 순간, 시간은 동시성의 장소로서 만남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그런 순간은 오는 시간도 가는 시간도 아니고, 바로 지금 여기의 안과 밖이 상호매개되는 열린 만남의 세계라는 점에서, 비대상적 차원인 것이다. (231쪽)



이런 측면에서 그는 상당히 관념적인 작가이며 일반 대중에게는 매우 어렵게 다가온다. 특히 그가 지향하는 미니멀한 표현 방식과 20세기 후반 서구 미술계를 주도했던 미니멀리즘과는 전적으로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언제나 나는 니시다가 말한 ‘절대모순적 자기 동일’을 비동일성의 지평으로 삼아, ‘무의 장소’를 관계성의 표현을 통한 무한한 울림-여백으로 전개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려 한다. 

(… …)

예술의 과제는 인간이 더욱 직접적인 세계로 해방될 수 있는 만남의 ‘장소’를 어떻게 열어 제시할 것인가 하는 데 있다. 그것은 어떻게 현실을 표현의 상태성으로부터 그것의 현재화로 이끌어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242쪽) 



딱딱한 미술 이론서인 관계로 일반 독자에게 추천할 만한 책은 아니다. 그렇다고 미술 전공자에게 추천하기에도 이 책은 솔직히 말해 어렵다. 실은 '어렵다'라고 하는 것이 다소 무안하게 여겨질 정도다. 1960년대 말 쓰여져, 그 당시 일본 미술계의 무수한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던 책을 두고 '어렵다'라고 말하는 내가 부끄럽다. 아직까지 한국 문화, 예술계의 지적 토양은 1960년대 말 일본 근처에도 가지 못한 것이다. 


굳이 이 책의 단점을 이야기하자면, 근대 철학을 이야기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다소 거칠게 나누고 있었다. 서양 근대 철학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드러나지 않고 한 쪽 방향으로 다 몰아넣고 있다는 느낌 말이다. 실은 그의 목적, 원근법적인 서양 근대 미술을 넘어서 새로운 예술적 실천을 도모하기 위함이지만. 하긴 이 책은 전문 철학 서적은 아니니... 


미술 이론 전공자이거나 비평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권한다. 그리고 이우환의 작품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이우환의 작품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탁월한 가이드북이 될 것이다. 






만남을 찾아서 - 10점
이우환 지음, 김혜신 옮김/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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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읽은 인터뷰인데, 블로그에 스크랩을 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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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인터뷰>[단독] "'가장 창조적인 5% 인재'는 그냥 내버려두는 게 최상"

김대식 腦과학 전공 카이스트 교수

http://media.daum.net/society/newsview?newsid=20140725115605537 


**

 

스크랩을 하기 위해 프린트해두었던 인터뷰를 다시 들춰보는데, 일이십년 전과 비교해 확실히 세상이 빨라졌다는 생각이 든다. 기술의 발달과 관련 지식의 전파도 빠르고 이러한 것들이 실생활에 반영되는 속도도 빨라졌다. ... 이러다가 급격한 붕괴나 반발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김대식 교수는 현재 중앙선데이에 기고하고 있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중앙선데이에 가서 검색해봐도 될 것이다. 


인상적인 두 구절을 옮긴다. 


** 


"인간의 선택은 하나의 당구공이 다른 당구공을 치면 그 당구공이 움직이는 것처럼 단일한 인과관계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인과관계가 합쳐져 이뤄진다. 그래서 현대과학에서 '선택의 풍경'이란 말을 쓴다. 산꼭대기에서 하나의 공을 굴리면 산의 풍경에 따라 공이 굴러내려 온다. 프레임은 선택돼 있지만 어떤 결정이 날지는 모른다. 이처럼 인간은 예측할 수 없는 기계다."



"그래서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대학교 교수들보다 월급을 많이 받아야 한다고 본다. 어린이들의 뇌를 만들어주는 게 초등학교 교사다.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커리큘럼을 바꿔야 한다. 어렸을 때 교육은 평생 바꾸기 어렵다. 특정 이념이나 특정 종교, 정치적 성향 같은 것은 집어넣으면 바꿀 수 없다. 그래서 뇌가 유연성이 높은 시기에는 수학, 물리와 같은 변하지 않는 진리를 먼저 가르치고 역사, 사회, 윤리 등의 개념은 나중에 가르쳐야 한다. 어렸을 때 이런 것을 가르쳐 놓으면 사고가 자유롭지 못하다." 


** 


초등학교 선생님들은 참 똑똑하고 현명해야 하는데, 갈수록 대우가 낮아지는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똑똑하고 현명한 학생들이 교대에 가는 건 아니기 때문에, 교대에 가서 제대로 공부하는 지도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대학동기 중의 한 명은 교대를 다니다 자퇴했는데, 이유는 졸업하면 선생님으로 갈 수 있는 안정성으로 인해 너무 엉망인 대학생활을 하는 모습에 크게 절망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뭐 이건 20여년 전 버전이지만.ㅡ_ㅡ;; (아이고 나도 나이가 이렇게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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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 철학으로 읽기

조중걸저 | 한권의책 | 2013.03.04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몬드리안의 <구성>은 이러한 이념의 회화적 대응물이다. 거기에는 어떠한 종류의 재현적 요소도 없다. 그것은 서로 단지 네모들의 집합일 뿐이다. 세계는 결국 그와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의 추상적 창조물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이렇게 되어 모방으로써의 예술은 완전히 종말을 고한다. 이제 창조로써의 예술만이 남게 되었다.(307쪽) 



이렇게, 묵시록적으로 끝나는 이 책은 단순히 서양미술사에 대한 소개나 이해로만 머물지 않는다. 하나의 양식, 하나의 작품 속에는 우리가 미처 몰랐던 많은 것들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그것은 도상학적 해석으로만 이해되지 않는다. 예술(혹은 예술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온전히 그 시대로 돌아갈 필요가 있고, 그 시대의 생각, 사고, 감정, 웃음과 눈물을 편견없이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 책이 때로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그 시대로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기 때문이고, 그 시대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대부분이 스스로의 마음을 어루만지지도 못하는데, 어찌 과거로 돌아가 그 시대 사람의 마음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예술은 그렇게,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와는 다소 떨어진 어느 자리 쯤에 위치해 있고 지금의 예술가들이 변방에 있듯이(혹은 소수의 지지 속에서) 옛날에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예술은 나와는, 우리와는 참 멀리 있는 듯 느끼기도 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 책은 서양 미술의 역사에 대한 폭넓고 깊이 있는 이해를 줄 수 있는 몇 되지 않는 책들 중의 한 권이 될 것이다. 그것도 한국을 떠나, 세계적으로.


이 책에 대한 서평은 굳이 필요없다. 그냥 사서 읽으면 된다. 비단 예술에 관심있는 이뿐만 아니라 인문학에 관심있는 이들 모두에게 추천한다.



함수의 도입과 바로크baroque 예술의 발생은 필연적인 관계를 맺는다. 함수는 이제 근대 세계에 있어서 중시되기 시작한 운동법칙, 곧 인과율의 수학적 표현이었다. 바로크 예술가들은 이러한 함수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노력한 것이다. 따라서 바로크 예술의 역동성과 X축의 독립변수의 연속적 변화에 따른 종속변수의 운동법칙은 같은 것이다. 이것은 카라바조Caravaggio의 그림 몇 점만 보아도 금방 확인되는 사실이다. 

형이상학적 해명이 없는 예술사는 도상학이나 도상학적 연대기밖에는 되지 않는다. 필자는 인간의 정신이 그 이상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형이상학적 해명은 필자의 신념이다. 고딕은 단지 건축적 기법의 문제가 아니며, 다위니즘Dawinism은 하나의 생물학적 가설의 문제만은 아니다. 어떤 심미적이거나 학구적인 업적도 동시대의 세계관에서 자유롭지 않다. 오히려 그것들은 동시대 이념의 선구이거나 반영이다. (서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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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잠을 깼다. 메일을 확인하고 앞날에 대한 걱정을 잠시 했다. 나이가 들수록 걱정만 늘어난다. 이 시대 탓인가, 아니면 나이가 들면 원래 그런 건가, 내가 유독 그런 건가, 이런 잡념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 잡은 책이 조중걸의 <<서양미술사 철학으로 읽기>>다. 나에겐 일종의 복습이고 반복이 되겠지만, 돌이켜보니, 서양미술의 역사에 빠져 공부하던 시절이 행복했음을 깨닫는다. 



서양미술사 철학으로 읽기

조중걸저 | 한권의책 | 2013.03.04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아리스토텔레스가 군사전문가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를 '불구'라고 조롱하면서 전인적 인간을 이상으로 삼고, 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다윈Charles Robert Darwin과 헉슬리Thomas Henry Huxley에게 야유와 경멸을 퍼부어대고, 현대의 강단 철학자들이 감상적이고 우아한 어구를 인용하며 학생들을 헛된 이념 속에 가둬두려 하는 것은 모두 그들이 기득권자이기 때문이고 또 자신들의 기득권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256쪽) 




몬드리안의 <구성>은 이러한 이념의 회화적 대응물이다. 거기에는 어떠한 종류의 재현적 요소도 없다. 그것은 단지 서로 다른 네모들의 집합일 뿐이다. 세계는 결국 그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추상적 창조물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되어 모방으로써의 예술은 완전히 종말을 고한다. 이제 창조로써의 예술만이 남게 되었다. (307쪽) 




결국 '언어는 존재의 집'(하이데거)이고, '언어는 세계를 비추는 거울'(비트겐슈타인)이니, 추상적 기호 이외에 남는 건 없었다. 사랑도 그랬고, 그녀도 그랬던 셈이다. 그래서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가 실재를 압도할 것이라고 여겼던 것일까. 


어쩌면 내가 지금 진짜라고 믿는 것들은 다 시뮬라크르인지도 모르겠다. 실은 내가 나비였고, 인간이 된 꿈을 꾸는 것일게다. 정말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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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즘과 예술철학에 관한 성찰 

T. E. 흄(Hulme) 지음, 박상규 옮김, 현대미학사 





위대한 화가란 모든 사람들의 비젼이 되었고, 

또 장차 비젼이 될 어떤 사물의 비젼을 처음으로 가졌던 사람들이다. 

- 133쪽 


 


토마스 어네스트 흄(Thomas Ernest Hulme, 1883 - 1917)이라는 영국의 예술 비평가가 쓴 <<Speculation>>을 번역한 이 책은 다소 의외의 번역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 1980년대 초반 박상규 교수(홍익대)가 번역한 문고판 책을 현대미학사에서 관심을 가져 새로 낸 듯하지만, 대단한 명성을 가지고 있었던 책은 아니기 때문에 전공자가 아니면 꺼내보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2000년대 초반에 구입하였으니, 한창 공부하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그간 읽지 않고 서가에 꽂아두고 있다가 최근에서야 다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비평가의 문장이면서 동시에 자신만의 예술론을 이야기하는 흄의 문장은 사색적이면서도 모호하기만 했다. 꼼꼼한 독서가 필요하지만, 그렇게 하여 얻는 건 이미 다 논의되었던 내용들이거나,  흄이 기대고 인용하는 저자들의 책을 직접 읽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분명 1900년대 초반에는 최신의 시각이었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장점이 있다면, 보링거(Wilhelm Worringer)과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의 예술론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다. <<추상과 감정이입>>이라는 저서로 미술사의 해석에 탁월한 관점을 제시한 보링거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흄은 이 책 전반에서 보링거의 태도 -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예술과 자연주의적이고 감정이입적인 예술의 대비 - 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이를 더욱 풍부하게 묘사하고 있다. 또한 베르그송의 충실한 번역자였으며, 베르그송의 추천을 받기도 한 흄은 이 책에서 베르그송 철학에 대한 탁월한 요약을 제시하며, 이를 바탕으로 예술론으로까지 확장시킨다.


보링거의 이론에 기대어 흄은 아래와 같이 이야기한다. 


예술에는, 이와 같이 서로 다른 두 개의 종류가 있다. 첫째로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예술, 즉 희랍의 예술과 르네상스 이래의 근대 예술이 있다. 이러한 예술에 있어서는 선은 부드럽고 생명력이 있다. 그리고 이집트와 인도와 비잔티움의 예술과 같은 예술이 또 하나 있다. 이러한 예술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각을 형성한 경향이 있고, 곡선은 날카롭고 기하학적으로 되어 있고, 그리고 예컨대, 인체의 표현은 때로는 아주 비생명적이고 비틀어져서 여러 종류의 딱딱한 선과 입체적인 형태에 알맞게 되어 있다. (79쪽) 



그들은 실존의 여러 가지 혼란과 변덕에도 불구하고 보링거가 말한느 일종의 정신적 '공간 기피'에 좌우되어 있다. 예술에 있어서는 이러한 정신상태는 어떤 추상적인 기하학적 형태를 창조하려는 욕망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상태는 인내력이 강하고 영속성이 있으므로 외부 자연의 유동성과 비영속성의 비난처가 될 것이다. (82쪽) 



세잔, <목욕하는 여자들>, 208 × 249 cm, 1906 (출처: 위키피디아)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세잔느의 최근의 그림의 하나인 <목욕하는 여자들>을 보라. 이 그림에서는 모든 선이 피라미드형으로 나란히 그려져 있고, 여자들은 이 모양에 알맞게 그려져 있다. 만일 하나의 그림에서 만족할 율동적인 구도를 항상 찾아보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피라미드형의 구도에는 매력을 느끼기 보다는 오히려 싫증을 느낄 것이다. 그 형태가 아주 강렬하게 강조되어 있고, 기하학적인 특색을 갖추고 있으므로 그 그림은 '생명적인' 예술의 영역으로부터 추상적인 예술의 영역에로 끌어올려진 것이 된다. 그 형태는 르네상스의 예술에서 볼 수 있는 어떤 것보다도 라벤나에 있는 (테오도라 황후) 비잔티움의 모자이크에서 보는 구도에 훨씬 더 흡사하다. (94쪽) 


라벤나 산 비탈레 성당의 모자이크화 - 테오도라 황후와 시녀들. (출처: 위키피디아) 



그리고 베르그송의 철학과 예술론에 대한 논문들도 책에 실려 있어, 도움이 될 것이다. 


지성은 모든 물체란 완전히 분석되어서 개개로 분리될 수 있는 요소로 되어 있다는 것을 명백히 하고자 한다. 그래서 지성은 결과로서 모든 변화를 이러한 분자의 단순한 위치의 변화에 귀착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 지성은 변화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변화를 설명한다. (168쪽) 



즉 그것들은 진정한 시간 속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 모든 것은 '주어져' 있다. 진정한 창조는 없다. 그는, 생명의 모든 형태의 특징은 생명의 모든 형태가 뚜렷하게 지속성 속에 존재하여 있고, '시간'이 그것에 대하여 차이를 일으키게 한다고 주장한다. 시간이 그것을 '깨물고', 그리고 이빨의 흔적을 거기에 남긴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늙어간다. 그런데 물질은 결코 늙어 가지 않는다. 물질은 항상 '불변하는' 것이고, 항상 '동일한' 것이다. (178쪽) 



보링거와 베르그송의 예술론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이 책은 그 소개 정도로 읽을 만하다. 다만 깊이 있는 연구 논문이라기 보다는 스케치에 가깝기 때문에 연구자들이라면, 다른 책을 읽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맨 뒤에 실린 <잿더미>라는 글은 단상을 엮어놓은 짧은 노트이나, 두고 읽을만큼 좋다. 






휴머니즘과 예술철학에 관한 성찰

T.E.흡저 | 현대미학사 | 2002.09.14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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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들 - 논문들과 연설 하나 Wirklichkeiten in denen wir leben 

한스 블루멘베르크Hans Blumenberg(지음), 양태종(옮김), 고려대학교 출판부






한스 블루멘베르크의 <<세계의 독서가능성>>(Die Lesbarkeit der Welt, Suhrkamp, 1981)은 문학동네 모더니티총서로 번역, 출간될 예정이었으나 어떤 연유에 의해서인지 몰라도 출간되지 못했다. 나는 이 총서의 목록을 통해 흥미로운 제목인 <<세계의 독서가능성>>으로 그에 대해 흥미를 느꼈고 그의 책이 번역되길 기대했다. 


하지만 꽤 시간이 흐른 뒤에야 짧은 책 한 권이 번역되었을 뿐이고, 오늘 내가 리뷰하고자 하는 이 책이다. 그러나 내 리뷰는 피상적인 수준에서 그칠 것이다(이 블로그에 자주 오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듯 나는 직장인이고 전문 학자이거나 학생이 아니기에). 역자인 양태종 교수(동아대 독문학과)는 스스로 ‘비판을 감내해야 할 번역본’이라고 적었으나, 이는 독자인 나에게 해당되는 사항이기도 하다. 꼼꼼히 읽고 정리한다면, 1) 철학에서의 ‘기술’, 2) 모방과 예술, 그리고 근대 예술의 자율성, 3)철학과는 다른 수사학의 위치, 4)시적 언어와 진리 등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얻을 수 있겠지만, 이렇게 할 독자가 몇 명쯤 될까.


인문학이 유행이라고 하지만, 인문학이 유행이 아니라 유행뿐인 어떤 것들 - 차마 인문학이라고 이름 붙이기조차 어려운 - 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 유행을 쫓는 이들에게 이 책은 너무 어렵거니와 현실과는 참 멀리 떨어져 보일 것이다. 하긴 너무 전문적인 철학책이기도 하지만.  


네 개의 논문, <현상학의 양상들에서 본 생활세계와 기술화>, <“자연의 모방” - 창조적 인간 이념의 전사에 대하여>, <수사학의 현재적 현실에 대한 인간학적 접근>, <언어상황과 내재시학>은 다소 어려웠으나, 나에게 매우 유용한 글들이었다. 특히 <“자연의 모방” - 창조적 인간 이념의 전사에 대하여>은  예술의 자율성과 근대 철학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었으며, 특히 자연의 모방이라는 관점을 벗어나 어떻게 예술 작품이 존재의 세계로 나아가는가에 대한 흥미로움을 안겨주었고, <수사학의 현재적 현실에 대한 인간학적 접근>은 철학과는 다른 입장에서 출발한 수사학이 어떻게 스스로의 자리매김을 하게 되고, 이것이 ‘철학적 인간학’과 연결되는가를 한스 블루멘베르크는 고대와 근대를 오가며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주었다. 


짧으나, 폭넓은 인용과 뚜렷한 주제의식이 담긴 논문들로 한스 블루멘베르크는 기술(테크네), 수사학, 예술과 언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명확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그는 근대적 입장 - 기술, 예술, 수사학, 시학 등이 자연의 모방이거나 본래 잠재해 있던 어떤 형상의 재현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이며 지극히 인간적인 것인가를 정초해 나가게 되었는가에 대해 분명한 해석을 이 짧은 책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 책은 철학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을 때, 보다 제대로 읽을 수 있고, 특히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들

한스 블루멘베르크저 | 양태종역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11.09.30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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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고려대학교 출판부에서 발간하는 수사학 총서 시리즈로 나왔는데, 이는 한스 블루멘베르크가 현대 수사학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 실린 <수사학과 현재적 현실에 대한 인간학적 접근>을 읽어본다면 알 수 있다. 그는 ‘플라톤이 소피스트들의 수사학과 싸우면서 추정한 것은 이들의 수사학이 진리[에]의 [도달] 불가능성 테제에 근거를 두고서, 이로부터 참인 것 대신에 관철될 수 있는 것을 제시하는 권리를 끌어낸다는 것이다’(126쪽)라고 말한다. 이렇게 수사학은 철학과는 적대적인 위치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기독교의 전통에서는 ‘신의 진리가 수사학적 방식의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가능한 한 장식 없이 그 자체로 제공되어 한다는 것’, 그래서 신의 진리를 이야기한 성인들의 말들은 ‘수사규칙을 보호하기 위한 꺼풀 안에서 더 인간답게 된다는 것이다'. 중세 후기로 갈수록 수사학은 자신만의 영역을 차지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신의 세계와 차츰 그 거리를 두기 시작하고 인간적 세계에 대한 긍정, 또는 인정이 시작되는 때와 일치한다. 그리고 '근대 미학에서는 수사학의 함축이, 수사학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진리와 관련이 있다는 함축이, 수사학의 최종 승리를 찬미한다.’(126쪽) ‘심지어 예술과 진리가 동일시된다. 플라톤이 정립한 철학과 수사학 사이의 적대감은 철학 자체에서, 최소한 철학의 언어에서, 철학에 대항하는 미학으로 명백히 나타난다’(127쪽)고 말한다. 


이 논문 속에서 블루멘베르크는 수사학의 철학적 근거가 어덯게 마련되고 있는가를 서술한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기술 - 자연의 모방이거나 이미 자연, 혹은 재료에 내재된 어떤 형상(잠재태)의 의지로 구현되는 현실태가 아니라 근대적 의미의 창조/발명으로서의 기술에 대한 설명, 그리고 예술의 창조성, 자율성에 대한 설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예술은 그 자체가 곧 인간의 가능성들에게 모범적인 존재이다. 예술 작품은 더 이상 무엇인가를 의미하려고만 하지 않고, 무언인가로 존재하려 한다’(123쪽)고 말한다. 그는 고대/중세적 세계를 벗어나 근/현대 예술의 입장, 즉 존재로서의 예술을 분명히 드러낸다. 파울 클레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는 ‘최종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우연한 것을 본질로 만드는 일”일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이 수사학 총서의 한 권으로 번역, 출간되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실은 철학 전문 서적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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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저녁, 레비나스에 대한 리뷰를 읽다가 레비나스의 문장을 옮겨적는다. 아련한 느낌이 든다.




주체가 어떠한 가능성도 거머쥘 수 없는 죽음의 상황으로부터 타자가 함께 하는 실존이라는 또 다른 특성을 끌어낼 가능성이 있다. (... ...) 미래는 손에 거머쥘 수 없는 것이며, 우리에게로 떨어져서 우리를 엄습하고 사로잡는 것이다. 미래, 그것은 타자이다. 미래와의 관계, 그것은 타자와의 관계 그 자체이다. 오로지 홀로 있는 주체 안에서 시간을 이야기한다는 것, 순수하게 개인적인 지속에 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해 보인다. 

- <<시간과 타자>> 




죽음이 확실함일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으며, 또 죽음이 무화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도 확실하지 않다. (... ...) 현존보다 더 영향을 미치는 파열, 선험성보다 더 선험적인 선험성, 죽을 수 밖에 없음, 이것은 예측으로 환원할 수 없는 시간의 양상이며, 비록 수동적이지만 경험으로, 무의 이해로 환원될 수 없는 시간의 양상이다.

- <<신, 죽음 그리고 시간>> 




 나이가 들수록 '현 미래는 적대적이다'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나만 그런 것일까. 어제 하루 종일 컨디션이 좋지 못했다. 기분이 좋지 않았고 울적하기만 했다. 


그리고 사무실에서 거의 마지막으로 퇴근하고 난 뒤, 집에 오자마자 식사를 하고 바로 뻗었다. 하긴 그 시간도 오후 10시를 넘겼더라.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기만 하고, 내 인생의 열차는 끝도 없는 어두운 터널로 들어가는 듯하기만 하다. 


이번 겨울, 레비나스의 책 몇 권을 읽어야 겠다. 




시간과 타자

엠마누엘레비나스저 | 문예출판사 | 1996.01.30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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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통행로, 사유이미지 

발터 벤야민 지음, 김영옥/윤미애/최성만 옮김, 도서출판 길 







우리에게 필요한 시간이란, 5분, 10분, 5분, 이런 식으로 조각난 것이 아니라, 1시간, 2시간, 혹은 하루나 이틀 이상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시간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 사치스러운 일상이 되어버린 2013년 가을, 내가 집어든 책은 도서출판 길에서 나온 ‘발터 벤야민 선집 1권 - 일방통행로, 사유이미지’이다.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내 조각난 시간 틈 속으로 들어와 사뿐히 내려앉은 벤야민의 글들은 번뜩이는 통찰이 어떻게 짧은 글들로 조각나 고딕 교회의 모자이크화처럼 구성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결국 발터 벤야민은 20세기의 전반기를 살았다고 하기에는 너무 급진적이었다. 그것은 그의 인식 태도 - 대중문화에 대한 높은 관심 속에서 사회주의적이며 카발라적인 진지함을 잃지 않고 그것을 그 속에서 해석하고 실천하려는 - 에서도 기인하지만, 그의 글쓰기 방식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이 책은 벤야민 글쓰기의 급진성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이러한 글쓰기의 급진성으로 이미 조각난 시간, 조각난 일상을 영위하는 현대인에게 꽤 적절한 책이 되었다(그러나 가끔 만나게 되는 곱씹어야 하는 문장들 앞에선 아쉽긴 하지만). 


고전적 예술 양식은 이미 사라지고 그 흔적들이 광고 문구 - 위대한 작가들의 문장에서 따오거나 유래한 비유적 문장들로 즐비한 - 나 디자인 소품 - 이미 고전 예술을 넘어 현대적 예술 양식의 하나로 인정받는 - 으로 남겨진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이 세계란 24시간 꺼지지 않는 케이블 방송처럼 끊임없이 변하며, 이 세계의 본질마저 이미지들의 연속체로 존재한다. 연속체, 즉 영화적인 병렬적 구성 - 벤야민의 ‘일방통행로’를 구성하는 방식인 셈이다. 


그는 각 단락을 나누고 그 단락마다 에피소드를 담는다. 마치 각기 다른 상품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일렬로 늘어선 아케이드를 지나는 산보자의 시선에 들어오는 거리 풍경처럼, 이 책도 그런 구성을 띄는 것이다. 


하지만 거리를 산책할 때나 그 산책을 끝내고 혼자 있을 집으로 돌아왔을 때의 끝없는 허전감, 쓸쓸함 - 혹은 이름도 알지 못하는 행인들 사이에서 경험하는 익명성의 공포 - 을 우리는 이미 경험을 통해 알고 있듯이, 벤야민이 향하는 곳은 그 산책의 본질을 호도하고 그 산책의 외관으로서의 글쓰기 형식 자체이거나 그 산책의 쓸쓸함을 극복하기 위한, 비현실적 이상향이다. 그래서 벤야민은 여러 문학작품들에 빗대어 세계를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며 이를 설득력 있게 전달하지만, 우리는 벤야민을 통해 현실 변화의 단초를 읽기 보다는 이미 변해버린 현실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데 지나지 않는다. 


실은 너무 늦게 우리가 벤야민을 읽기 시작한 것이며, 너무 일찍 벤야민이 절망했던 탓이다. 그러나 그나마 이런 글쓰기를 통해 변해버린 현실을 알려주는 이마저도 드문 탓에, 벤야민은 우리들의 숨겨진 친구가 된다. 


이 책은 벤야민의 주저가 아니다. 일종의 산문집에 가까우며, 짧은 글들의 연속으로 인해 도리어 독서의 혼란스러움만을 가져다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발터 벤야민’이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있을 지도.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발터벤야민저 | 김영옥외역 | 길 | 2007.11.30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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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망각 - 10점
모리스 블랑쇼 지음, 박준상 옮김/그린비



기다림 망각 L'attente L'oubli 
모리스 블랑쇼(지음), 박준상(옮김), 그린비 



장르가 불분명한 이 책은 모리스 블랑쇼의 일종의 에세이다. 일종의 연애담으로 읽어도 될 것이며, 문학론으로 읽어도 되고, 인생에 대한 태도로 읽어도 무방하다. 어차피 모리스 블랑쇼 연구자가 될 턱 만무하고 어려운 철학 용어나 문예 이론을 들이민다고 해서 이해될 리도 없다. 이 책 속의 그도 그녀를 향해 끊임없이 이야기하지만, 그녀는 그의 바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모든 것은 죽고 사라져야만 비로소 의미가 드러나는 법이다. 망각. 
그리고 그 드러나는 의미를 기다리는 것. 그것이 언어이거나 문학이거나 예술이 될 것이다. 

이 책은 그와 그녀를 통해, 모리스 블랑쇼가 마주 했던 언어와 문학에 대한 일종의 고백이자, 연애담, 그리고 이론적 방향에 대한 개요이다. 그래서 연구자에겐 꽤나 흥미로운 텍스트가 될 것이고 일반 독자에게는 흥미로운 문장들로 이루어진 연애 아포리즘이 될 수 있다. 

책은 읽기 편하고 내용은 어렵지 않다. 연구자에겐 어려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모리스 블랑쇼가 궁금했던 이들에게 추천할 만한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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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것, 즉 기다림을 하나의 중성적 행위로 만드는 것에 주의하는 것, 자기에게 감겨서, 가장 내부의 것과 가장 외부의 것이 일치하는 그러한 원들 사이에 끼여서, 예기치 않은 것으로 다시 향하는, 기다림 속에서의 부주의한 주의, 어떠한 것도 기다리기를 거부하는 기다림, 발걸음마다 펼쳐지는 고요의 자리

- 모리스 블랑쇼, '기다림 망각(L'attente L'oubli)'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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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 10점
브뤼노 라투르 지음, 홍철기 옮김/갈무리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브뤼노 라투르(지음), 홍철기(옮김), 갈무리, 2009 





야만성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야 말로 야만인이다. 

- 레비 스트로스(Levi-Strauss)






직장 생활을 하며 이런 책을 읽는 것이 얼마나 큰 도전인가를 새삼 느꼈다. 솔직히 끔찍했다. 사무실에 인문학 책을 꺼내놓을 시간적 여유가 없고 집에 돌아와 책을 읽는 건 불가능하며(연신 나를 찾는 이제 20개월 정도를 넘긴 아들 녀석으로 인해), 내가 책을 읽는 시간이라곤, 아들이 잠든 후나 이동 중인 전철이거나 잠시 들른 커피숍이 전부다. 이 푸념이 나에게도 생소하지만, 나와 비슷한 처지의 다른 이들에게 독서는 참으로 멀리 있는 것인 듯 싶다. 


좀 더 많은 시간과 여유를 가지고 집중해 읽었다면 라투르의 이 책은 보다 더 흥미롭고 내가 벗어나지 못할 근대적, 계몽적 사유를 보다 풍성하게 만들 기회를 가졌을 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몇 년 전 서점에서 우연히 구입했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는 제목이 무척 도전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이제서야 읽었다. 아마 한 두 번 읽으려고 했을 텐데, 저자의 표현방식에 적응하지 못했다. 실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가 쓰는 몇 개의 주요 단어들 - 하이브리드, 정화, 대칭적/비대칭적 등 - 에 대해선,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더 어렵고 모호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아마 프랑스학계 특유의 글쓰기 방식인 듯하지만(프랑스의 다른 인문학자들처럼). 



야생의 사유와 계몽된 사유는 때때로 서로 아름다운 화해에 도달하거나 무지개 빛깔을 발하는 간섭을 일으킬 수 있다. - 7쪽 



혹시 지금 우리 시대가 '근대'라고 느낀 적이 있는가? 데카르트적 근대 말이다. 아니면 20세기의 무수한 반-근대주의자들처럼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느낀 적이 있는가? 정말로 그들의 책에서 이야기하듯 이 세상이 그렇게 만들어지고 움직이고 있는가? 


 


원시의 정신과 오늘 우리의 정신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는 주장은 거부될 것이다. 정보이론이 순수한 메시지에 집중한 반면에 원시 시대 사람들은 메시지의 물리적 결정론의 징후들을 메시지로 착각한다. ... ... 동식물계에서 감지할 수 있는 특성들을 하나의 메시지인양 다루고 그 속에서 '서명' 즉 기호를 읽어냄으로써 인간(원시정신의 소유자)은 엉뚱한 것을 중요한 요소로 삼는 오류를 범했다. 하지만 실제 의미 있는 요소가 어디에 있는지(미시적인 차원)를 알려줄 완성된 도구가 없었기에 인류를 해석을 통해 '희미하게' as through a glass darkly 나름대로 차이를 분간하였다. 이 원리의 발견적 가치와 현실의 정합성은 첨단 발명품들 즉 전기통신공학, 컴퓨터와 전자현미경 등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알려진 바 있다. 

- 249쪽 (Levi-Strauss, 1966, p268)



브뤼노 라투르는 인류학에 의지해, 근대라는 개념은 개념일 뿐, 우리 세상을 그대로 비추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마치 애초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처럼. 그리고 그 단추를 가지고 앞을 향해 나아갔을 뿐이다. 그리고 이 근대에서 시작된 '탈-근대'로 이상하긴 마찬가지. 


그렇다고 라투르가 '비-근대주의자'는 아니다. 그의 목표는 '화해'에 있으며,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출발점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나아가자는 데 있다.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인문학이 이 세계와 우리 삶 속에서 시작되었으나, 도리어 이 세계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해석 불가능하다고 단정짓고, 우리 삶을 기하학적으로 재단하고 억지로 정해진 어떤 틀 속에서 밀어넣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근대적 삶이고 근대의 이론들인 셈이다. 



아추아르족은 각자 폐쇄된 채로 대립을 피할 수 없는 두 세계 - 인간 사회의 문화세계와 동물 사회의 자연세계 - 사이에 존재하는 이와 같은 이율배반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화의 연속적 가능성이 끊어지는 특정한 지점이 존재하는데, 여기서부터 인간에게는 극도로 낯선 야생의 세계가 시작된다. 문화의 영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자연의 이 조그만 조각은 소통관계가 수립될 수 없는 사물들의 집합을 포함한다.

- 53쪽 (Philippe Descola의 1986년도 저작에서 인용. 



아추아르족의 일상에서 우리의 일상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어쩌면 이 책은 인문학이 앞으로 어떤 태도로 걸어가야 하는가에 대한 적절한 지적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세계는 변하지 않았으나, 근현대 철학은 우리의 진정한 세계와 무관하게 전진했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라투르는 근대의 학자들이 이야기하는 바 그 근대인은 우리가 아니다라고 말할 뿐이다. 



두서 없는 리뷰이지만, 여유가 되는 이들에게 이 책 읽기를 권한다. 좀 시간은 걸리겠지만, 꽤 흥미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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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리즘 철학 - 10점
조중걸 지음/한권의책
 


아포리즘 철학 
조중걸(지음), 한권의책 




결국 철학은 우리가 무엇을 모르는가를 말해주기 위해 존재한다. 오랜 철학적 탐구가 세계와 우리 자신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해주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철학은 기껏해야 우리가 무엇을 모르는지, 왜 모를 수밖에 없는지, 새로운 앎은 어느 지점에서 개시되어야 하는지를 말해줄 뿐이다. 이것이 몽테뉴가 말한 바 "내가 무엇을 아는가?"의 의미다.
따라서 철학은 우리에게 겸허하라고 말한다. 오랜 탐구 끝에 우리는 기껏해야 우리가 큰 무지에 잠겨 있다는 사실을, 또한 무지에 잠기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뿐이다. 위대했던 니콜라우스 쿠자누스가 신과 관련해 "무지無知의 지知"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인간의 한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서문 중에서  



책이 서점에 나오자마자 구입한 것이 작년 이맘때였는데, 이제서야 겨우 다 읽고 되새기게 된다. 이 작은 책이 가지는 위력은 실로 대단하다. 차라리 두꺼운 서양철학사 대신 이 책을 읽는 것이 철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나 태도를 가지게 하기 위해 적절하지 않을까. 

특히 쇼펜하우어, 니체,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설명은 나에게 다시 한 번 그들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었다. 

아마 몇 명은 이 책의 편파적인 관점 - 저자는 상당수의 근대 독일철학자들을 건너가버린다. 대신 쇼펜하우어와 니체로 채운다. - 에 대해 불만을 제기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이 도리어 현대를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한다. 

거추장스러운 낙관적 합리주의, 이성주의 대신 정직한 비관주의, 현실주의가 더 나은 법이다. 그렇다면 나도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일까? 그러고 보면 세계에 대한 이해와 인식, 그리고 삶에 대한 태도와 행동 사이에 놓여진 이 거대한 단절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비관적 세계 인식 속에서 합리적 삶을 견지하려고 말도 안 되는 노력을 거듭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낙담할 필요는 없다. 베르그송이 말하는 바, 지성이란 내 전부가 아니라 내 일부일 뿐이다. (이렇게 나는 변명을 하나 가지게 된다) 

이 책은 철학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좋을 것이고 철학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충분히 좋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자주 만나게 되는 철학 책에서 읽지 못하는 내용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될 것이며, 그 알게 되는 내용은 그간 알아왔던 어떤 세계를 흔들어놓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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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예술 : 형이상학적 해명 - 10점
조중걸 지음/지혜정원




현대예술 : 형이상학적 해명 

조중걸(지음), 지혜정원 




읽고 난 다음 서평을 쓰지 못하는 책들이 있다. 쓰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책에 대한 소개 대신 무조건 '읽어라'라고 하는 편이 낫고, 몇 문장의 인용은 도리오 책에 대한 누(累)가 되어 인용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서평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에 대한 시도이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글이란 서문 일부의 인용 정도가 되지 않을까? 



언어학, 인류학, 기호학 등의 연구에 매달렸던 많은 사람들이 나름의 통찰에 준해 현대의 형성에 공헌했다. 그러나 이것들이 현대라는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형이상학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것들 역시도 현대의 한 현상일 따름이다. 이 책은 이러한 성취의 이면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포착하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이 연구는 탐구의 탐구이며, 설명의 설명이다. 독특하고 때때로 도발적으로 느껴지는 낯선 현대 예술은 이러한 토대 위에서만 포괄적으로 설명된다. 궁극적인 도전에 의해서만 현대예술과 그 예술가들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 20세기의 새로운 언어학이나 분석철학이 현대를 설명하기보다는 현대가 오히려 새로운 학문들을 해명한다. 현대의 저변을 형성하는 형이상학에 대한 고찰만이 언어학이나 기호학의 본질적 의미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현대예술은 언어학이나 기호학과 병존한다. 모두가 현대의 형이상학 위에 기초한다. 모든 것은 물결 위의 포말이다. 하상엔 굴곡진 형이상학이 있다. 

현대에 시도된 다채로운 예술적 성취들은 당혹과 분노, 경멸과 외면의 대상이기도 했다. 현대예술은 감상자들을 소외시키며 발생했다. 사람들은 새로움이 가져다주는 이익에보다는 손해와 결여와 책임에 훨씬 민감하다. 과거는 금의 시대이고 현대는 타락한 시대이다. 현대는 그러나 모든 시대가 그렇듯이 가치중립적이다. 다른 어떤 시대, 다른 어떤 생활 양식이 현대에 비해 더 많은 가치와 미덕을 지닌 것도 아니었다. 현대에 이르러 더 많은 자율성과 독립성에 대한 요구가 증가한 만큼 증가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공평한 인식이 현대에 대한 이해를 높일 것이다. 혐오는 때때로 몰이해와 무지가 동기이다. 파라켈수스가 말한 바 "지식이 사랑을 부른다"

현대예술은 야유와 냉소를 동반한다. 진정한 예술은 감상적 위안을 거부한다. 깊이와 진실은 언제나 자기 부정을 전제하듯이 현대의 유의미한 성취는 전통과의 완전한 단절에서 출발한다. 전현대성에 젖은 시대착오적 센티멘탈리스트들이 현대에 대해 느끼는 거부감은 그러므로 이들의 자기부정의 부정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자기만족과 자기위안보다 더 역겨운 것도 없다. (8쪽 - 10쪽) 



아마 이 책을 읽을 독자들은 경험하게 되는 바, 어렵고 난해하게 여겨지는 문장들을 읽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심지어 감동까지 받을 수 있다는 것에 놀라게 될 것이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현대예술을 알게 되고, 철학 전반에 대해서, 나 자신과 우리 시대에 대한 깊이있는 공감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독서의 놀라움을 전해준다. 고작 책 한 권인데... 하지만 어떤 책 한 권은 어떤 이에게는 그동안 알고 있었던 모든 것들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놓기도 한다. 바로 이 책, <<현대예술 - 형이상학적 해명>>처럼. 


그리고 이 책은 내가 아는 한에 있어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깊은 이해를 도울 수 있다. 실제 포스트모더니즘 작품, 특히 서사문학에서의 사례들 - 리처드 브라우티건, 움베르토 에코, 존 파울즈,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도널드 바셀미, 저지 코진스키, 마르케스 등에 이르는 문학작품들에 대한 이해와 분석은 한국어로 씌여진 바 최고의 책이다. 


강력하게 추천하는 바, 일독을 권한다. 아마 책을 펼치는 순간, 덮지 못할 것이며, 자연스럽게 두 세 번 읽게 되겠지만. 



책의 속 표지에 적힌 문구. '불안 속의 영혼들에게'. ... 어쩌면 이 책만큼 절망에 빠진 현대의 우리들에게 위안이 될만한 책이 또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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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 10점
게오르그 짐멜 지음, 윤미애 외 옮김/새물결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게오르그 짐멜(지음), 김덕영, 윤미애(옮김), 새물결 



국내에서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 1858 ~ 1918)에 대한 관심이 이토록 저조한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는 철학을 연구하였으며(신칸트주의자이면서 니체의 강력한 영향권 아래에 있다), 사회학, 미학, 문화비평을 아우르며, 동시에 그의 글들은 대부분은 현대 문명이나 문화, 대도시 사람들의 마음/정신, 일상, 태도, 형식에 대한 탁월한 통찰을 보여주고, 그의 문장은 짧으면서 뛰어난 문학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19세기 말, 20세기 초 이런 글을 썼다는 점에서 놀라움마저 불러일으킨다. 내가 알고 있는 한, 발터 벤야민 이전에, 그 누구도 이런 식의 글을 본격적으로 선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유행이란 사회적 균등화 경향과 개인적 차별화 경향 사이에 타협을 이루려고 시도하는 삶의 형식들 중에서 특별한 것’(57쪽)이고, 이 형식 밑에는 ‘모방’이라는 태도가 흐르고 있다. ‘모방은 우선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을 위해 투자되는 에너지가 헛되지 않는다는 장점을 가진다’(56쪽). 이런 측면에서 지금 한국에서 게오르그 짐멜을 읽는다는 것은 사회적 영향이 거의 없는, 쓸모 없는 개인적 차별화 경향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하지만 나는 게오르그 짐멜을 읽기를 강력하게 권한다. 확실히 그는 한 시대를 주도하는 사상가는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수도 없을 것이다. 나는 며칠 전 페이스북에 이렇게 적기도 했다. 


새벽에 읽어나, 지난 몇 주간 읽었던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를 끝냈다.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번뜩이는 짐멜의 통찰력은 놀라웠지만, 전체적으로 '짐멜의 사회학이란 배부른 부르주아 사회학자의 쓸모없는 지적 유희'라는 주류 학계의 비판적 시각에 대해 부분적 동의를 하게 된다는 점에서 짐멜은 그의 지적 재능을 낭비한 경향이 심했다. 이 책에 실린 몇 편의 글들은 읽지 않아도 될 정도로. 역자가 고르고 고른 글이었을 텐데 말이다. (2013. 4. 8) 


적어도 그는 전통적 인문학이 원하는 바의 '어떤 체계'를 벗어나 인상적이고 표피적인 일상의 현상을 분석하였다. 그는 편지, 식사, 유행, 손잡이 등에 대해서 분석하고 글을 썼다. 그의 글이 형편 없어서가 아니라, 그의 시도 자체가 마치 유행과도 같아, 세월이 지나면 사라질 어떤 것에 대한 감상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 감상이 아무리 분석적이고 논리적이라도 하더라도 그는 짧은 글들을 적었고 학문의 체계를 향하던 그 당시 다른 학자들 - 뒤르켐, 베버 등 - 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느슨했던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강력하게 짐멜 읽기를 권하는 것은, 내일 아침 내가 딛고 있는 이 땅이 무너져 저 깊은 아래로 떨어져 버릴지도 모르는 공포를 가지고, 돈과 물질적 풍요로 넘쳐나는 이 시대에 불편한 타협을 하면서 고통스러워 하는 이들에게 게오르그 짐멜 만한 위로는 없기 때문이다. 짐멜은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모험의 가장 일반적인 형식은 삶의 전체적인 맥락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형식이다. 여기서 말하는 삶의 전체성이란 개별적인 내용들이 아무리 뚜렷하고 화해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다를 지라도, 그 안에는 통일적인 삶의 과정이 관통한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 결국 모험은 우리 존재 안에 있는 이물질이다. 하지만 어떠한 방식으로든 존재의 중심과 결합되어 있는 이물질이다. 외부는 내부의 형식이 된다. 비록 멀고 친숙하지 않은 우회로를 거쳐서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정신적 삶에서 차지하는 이러한 위치 때문에 모험에 대한 기억은 쉽게 꿈과 같은 색채를 띤다. 
(204쪽) 


20개의 짧은 글들로 이루어진 이 책의 게오르그 짐멜의 전체를 알 순 없겠지만, 적어도 짐멜이 어떤 사상가였는지는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아래는 20개의 글 제목이다. 

- 현대 문화에서의 돈
- 대도시와 정신적 삶
- 유행의 심리학. 사회학적 연구
- 장신구의 심리학
- 이방인
-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 손잡이, 미학적 접근
- 얼굴의 미학적 의미
- 양식의 문제
- 알프스 여행
- 식사의 사회학
- 감각의 사회학
- 감사. 사회학적 접근
- 신의. 사회학적 접근
- 편지. 비밀의 사회학
- 모험
- 부끄러움의 심리학에 대해서
- 비밀, 사회심리학적 스케치
- 분별의 심리학
- 다리와 문 

특히 몇 편의 글들은 놀라움까지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현대 문명/문화와 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미학적 분석은 1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충분한 호소력을 가진다. 


슐라이어마허가 강조한 바에 따르면, 기독교의 경건함, 곧 신에 대한 열망을 인간 영혼의 항구적인 상태로 만든 최초의 종교이다. 이에 반해서 그 이전의 신앙 형식들은 종교적 분위기를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연결시켰다. 
마찬가지로, 돈에 대한 열망은 정착된 화폐 경제에서 인간의 영혼이 보여주는 항구적인 상태이다. 그래서 심리학자는 돈이 바로 우리 시대의 신이라고 사람들이 빈번히 탄식하는 모습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물론 거기에서 돈에 대한 표상과 신에 대한 표상 사이에 존재하는 의미 있는 관련성들을 밝혀낼 수 있다.  왜냐하면 신성모독을 범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심리학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신의 개념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심층적인 본질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다양성과 대립은 신을 통해서 통일성에 도달하게 되며, 또한 신은, 중세 말기의 저 특기할 만한 근대정신인 니콜라우스 폰 쿠사(Nikolaus von Kusa, 니콜라우스 쿠자누스)의 멋진 표현을 빌리자면, 모순의 지양 - 또는 대립의 지양 - 이라는 사실이다. 존재의 모든 낯섦과 화해 불가능성은 신에서 통일성과 화해를 발견한다는 이 이념으로부터 평화, 안전, 그리고 모든 것을 포괄할 정도로 풍부한 감정이 유래하는데, 이 감정은 신에 대한 표상 및 우리가 신을 소유한다는 표상과 결부된 것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돈이 자극하는 감정들은 이것과 심리학적인 유사성을 지닌다. 
(27쪽- 28쪽) 


그의 돈(화폐)를 둘러싼 현대 문명에 대한 분석은 탁월하다. 그리고 그 분석은 철학적이며 문화적인 영역까지 확대되어 더욱 더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역자는 짐멜의 이러한 넓은 관심사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다소 오버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하지만 다른 한 편 짐멜을 사회학자만으로 보기에는 그의 지적 세계가 너무나도 넓다. 방금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원래 철학자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사회학 이외에도 철학, 미학, 그리고 심리학이라는 인식 도구와 수단을 구사하면서 방대한 모더니티 이론을 구축하려고 시도한 거장이다. 우리는 아마도 짐멜의 지적 세계를 인식의 다신주의, 아니 어쩌면 인식의 범신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85쪽) 


두서없는 서평이지만,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를 권한다. 이 책 이외에도 짐멜 선집 2권이 더 번역되어 있으니, 다른 책을 구해서 읽어도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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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블랑쇼에 대하여 - 10점
엠마누엘 레비나스 지음, 박규현 옮김/동문선



결혼을 하고 나이가 들고 직장에서의 내 위치가 올라갈수록 개인 시간을 만들기란 참 어려운 일임을 새삼 깨닫고 있다. 특히 돈벌이와 무관한, 개인적 시간은 가족의 양해를 구해야 하는 일임을. 그 중 하나가 책을 읽고 난 다음 짧은 서평을 쓰는 시간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읽은 몇 권의 책에 대한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 

이 책도 그 중 한 권이다. 쓰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쓰게 된다면, 적어도 그 책에 대한 찬사가 되어야 하고, 그 찬사가 그 책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에마누엘 레비나스의 '모리스 블랑쇼에 대하여'는 찬사를 받기에 충분한 책이다. 레비나스는 오래 동안 블랑쇼와의 깊은 우정을 통해 그의 세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며, 레비나스의 애정 어린 철학적 시선은 이 짧은 책을 통해 모리스 블랑쇼 - 20세기 후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에게 직,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주류 문학이 아닌 비 주류 문학에 서서, 전통적 문학에 반기를 든 작가이자 이론가였던 - 가 지향하였던 문학과 예술을 탁월하게 재구성해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현대적 문학, 또는 다가올 예술에 대한 낯설고 기묘하고,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어떤 이론과 마주하게 될 것이며, 그 앞에서 서서 그동안 배워왔던 문학과 예술의 존재를 거부하게 될 것이다. 

아래 인용은 내가 그저 한 번 읽고 싶은 문구들의 일부이다. 이 책은 문학 이론서들 중에서 최고의 책들 중 한 권이 되겠지만, 아마 이 책을 언급하는 이는 드물다는 건 슬픈 일이다. 
 

** 


예술의 본질은 언어로부터 말할 수 없는 것으로 향하고, 작품에 의해 요소의 어두운 모습을 가시화하는 데 있다. 작품을 이렇게 모순과 더불어 묘사한다는 것은 변증법과 상관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대립항들의 교차로부터 타자를 삼키는 동일자가, 이 교차가 극복되고 그에 따라 모순이 완화되는 사유의 계획을 끌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사유가 이러한 변증법적 계획을 풀어놓아야 한다면, 즉 하나의 종합에 도달해야 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세계에, 가능성과 인간의 결단력의 영역에, 행동과 적합성 가운데 머무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문학은 그 어떤 사유도 다다를 수 없는 해안 - 문학은 사유할 수 없는 영역으로 향한다 - 으로 우리를 내던진다. 그 곳에서 존재-지각에 매달리는 관념론적 형이상학이 종결된다. 문학은 모든 가장 과감한 시도들에 의존해서는 벗어날 수 없는 세계의 모든 지평들을 성큼 건너가는 어떤 초월을 향한 유일한 모험이다. (23쪽)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사물들을 말들로부터 벗어나게 하며 존재에게 메아리를 울리는 근원적인 언어로 되돌아가는 것일 게다. 사물들의 존재는 작품 속에서 명명된 것이 아니라 말하여지는 것이며, 말들은 사물들의 부재를 가리킨다. 존재한다는 것은 말하는 것을 가리키지만, 그것은 모든 이야기 상대자가 부재한 상황에서 말하는 것이다. (18쪽) 


블랑쇼에 의하면, 세계를 밝게 비추는 것과는 거리가 먼 예술은 세계의 기초가 되는 모든 빛이 차단된 황량한 지하의 세계를 일깨운다. 예술은 우리의 거주에, 그리고 사막에서의 오두막의 기능을 하는 건축물의 찬란함에 추방의 본질을 되돌려준다. (중략) 예술은 빛이다. 하이데거에게 이 빛은 위로부터 내려와 세계를 만들고 거주처를 구축하는 빛이다. 반면 블랑쇼에게 이 빛은 지하로부터 올라온 밤의 어두운 빛으로 세계를 해체하고, 그 세계를 기원으로, 되풀이됨으로, 중얼거림으로, 끊임없이 딸각거리는 소리로, 어떤 '깊은 옛날, 아주 먼 옛날'로 인도한다. 비현실에 대한 시적 탐구란 실재의 맨 밑바닥을 탐구하는 것이다. (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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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말 좋은 글을 많이 개재하시네요. 아까 '서양 사상의 역사'로 댓글을 달았던 학생입니다. ^^ 링크 블로그도 걸어두었는데 좋은 글 읽으러 자주 들르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모리스 블랑쇼는 관심을 가져도 좋을 만큼 특이하면서도 무척 매력적인 작가입니다. 얼마 전 선집이 번역되어 나오고 있으니, 한 번 찾아 읽어보면 좋을 듯합니다.

    • 꼭 읽어보겠습니다. ^^ 수능 끝나고 부랴부랴 인문학 공부를 하니 읽을 책이 무척 많네요!

    • 이번에 수능 보셨어요? 훔훔.. 그럼 모리스 블랑쇼는 다소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인문학은 말 그대로 사람과 글에 대한, 즉 세상사에 대한 학문이므로 나이가 들수록 공부하는 재미가 나는 분야이지요. 대학 들어가기 전 한 번 읽을 만한 책들을 한 번 추려봐야 겠군요. ^^;;;

    • 네 현재는 푸코를 공부하고 있고 서양철학사도 함께 읽고 있습니다. 프랑스 유학 후에 전공할 학문이 철학이기에 철학이라는 학문이(혹은 인문학) 저한텐 더 각별하네요. ^^


앞으로 자주 최저 기온을 갱신하는 날들이 이어질 것이다. 출근길, 여러번 구두 바닥이 미끌,미끌거렸다. 그러나 미끄러져 넘어지는 사람을 보지 못했고 나 또한 미끄러지지 않았다. 내 바람이, 미래가, 우리들의 마음이 미끄러져 끝없이 유예되는 것과는 반대로, 내 낡은 구두 밑은 의외로 눈이 녹아 언 길 위를 잘 버텨주었다. 


잦은 술자리, 업무 스트레스로 인해 건강이 안 좋아졌다. 안 좋아지는 것만큼 세상도 안 좋아지고 개인 경제 상황도 안 좋아졌다. 말 그대로 올 한 해는 최악이다. 다행히 심심풀이 삼아 온 온라인 토정비결에선 내년 운이 좋다고 하니, 그걸 믿어볼까나. (이렇게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행운(저 세상의 논리와 질서)에 기대게 된다)


아주 오래 전 서양미술사 강의를 할 때, 이집트 미술을 설명하면서 '과연 파라오 밑의 국민들이 행복했을까요? 아니면 불행했을까?'라고 묻곤 했다. 나는 '당연히 불행했어요'라고 대답할 것이라 여기며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행복했을 수도 있다'고 답할 지 모르겠다. 그리고 실제로도 불행하지 않았고 행복했다고 믿는 편이 낫고 타당하다. 이는 '합리적이고 성실하며, 세상 분위기가 그의 편인 군주 밑의 신분제 사회가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과도 연결된다. 그만큼 이집트 사회는 변화가 없었고 흔들리지 않는 질서가 있었다. 몇 천년 동안 예측가능한 시기가 계속 되었다. 변화말로 사람들의 불안을 야기하는 어떤 것이다.  


사상의 자유라든가 발언/표현의 자유는 전적으로 근대(modern)의 산물이다. 어떤 위계질서를 버리고 극적인 변화와 새로운 질서 속에서 선택한 것이 개인의 자유이고 개인에 대한 (계량적) 믿음이다. 하지만 현대, 지금/여기에 이르기까지도 동시대 모든 사람에게 그런 근대적 의식을 바란다는 건 무리였다. 과연 누가 그들에게 근대적 의식을 강요하는가! 


근대적 의식은 변화를 긍정하고 변화 속에서 진정으로 나은 가치를 찾을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한다. 그 대신 불안을, 두려움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내일을 택한다. 초기 근대 예술가들 - 말년의 미켈란젤로, 폰토르모, 파르미지아니노 등 - 이 보여준 불안, 두려움, 막연한 공포는 여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기교적으로 능수능란하고 강렬한 자신감으로 가득차 있던 바로크 예술가들 - 몬테베르디, 바흐, 비발디, 푸생, 렘브란트, 베르니니 등 - 에 의해 이 불안은 극복되고, 데카르트, 라이프니츠는 합리적 세계관 속에서, 버클리와 흄은 경험적 세계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확신 - 진리가 없어도 잘 살아갈 수 있다 - 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근대적 의식은 오래 가지 않고, 20세기 후반 논의되기 시작한, 반-근대적이라 일컫어지는 '포스트-모던'(post-modern)은 근대의 가려져 있던 불안, 두려움, 공포를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한다. 그렇다면 한국은 포스트모던 사회인가? 그래서 전 근대적인 시기(후기 조선에 가까웠던 시기)에 대한 향수로 목 말라 하는 것일까? 


글쎄다. 잘 모르겠다. 우리에게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룰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고, 1인당 국민소득 1천불에서 1만불로 가는 것과 1만불에서 2만불, 3만불 가는 것과는 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서로 다른 의견을 공유하고 나은 대답을 찾기 위해선 시끄러운 의견 조정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민주주의, 자유주의, 다원주의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역설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관심을 가져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엔 이미지로서의 정치가 답이고, 매스미디어에 의해 사람들의 의식은 조장될 수 있고, 비판적 시각을 키울 수 있는 책 같은 건 살아 있는 동안 1권도 읽지 않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마당에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미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글은 두서 없고 생각은 미끄러지기만 한다. 이런 주절거림은 결국 나를 위한 것이다. 내 패배감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올 한 해, 나는 패배했다. 근대의 반성적 자기 의식은 외부를 향하지 않는다. 의식의 지향성이란 이것이다. <매트릭스>의 니오가 선택한 알약도 바로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알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현상학자들은 그러한 알약의 시작이 어디인지 묻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현상학적 접근이다. 


척 맨지오니의 'Consuelo's Love Theme'을 듣는다. 안소니 퀸이 주연을 한 '산체스의 아이들' OST 앨범. ... 두툼한 LP를 꺼내어 듣고 싶지만, 지금은 사무실, 점심 시간을 이용해 적는 이 짧은 글. ... 결국 나는 근대인(homo modus)임으로 '내일의 나'를 향해 가겠지만, ... 16세기 사람들이 느꼈을, 그 불안함을 떨치지 못하는 건 어떤 이유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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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 10점
루이 알튀세르 지음, 권은미 옮김/이매진




그가 죽고 난 다음, 르몽드에서 한 면을 통째로 특집으로 꾸몄다. 20세기 후반기 마르크스주의는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내팽개쳐져 있을 무렵, 어느 마르크스주의자의 인생과 학문 세계가 유력 일간지 특집으로 나온 것이다. 


루이 알튀세르. 현대적 마르크스주의를 만든, 거의 독보적인 인물. 구조주의와 정신분석학을 마르크스주의에 도입한 철학자. 


하지만 그는 레지스탕스 동료이기도 했던 아내를 목졸라 죽이고 침묵의 세월 보내며 죽는다. 그리고 죽기 전에 발표한 자서전,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는, 사랑하는 아내에 대한 추억을 끄집어 내며, 자신의 세계를 정신분석학적으로 도려내어 분석한다. 


문장 문장 하나가 잔인하고 고통스러우며, 추억은 쪼개지며, 사랑은 냉정하게 분석되며, 민감한 영혼은 자리잡지 못한 채 허공으로 사라져버린다. 희망으로 대변되는 미래를 이야기하기엔 이 책은 철저하게 자기 분석적이다. 


나는 20대 후반 이 책을 두 세번 읽었다. 그 이후 나는 학문의 세계를 떠나 직장인이 되었고 사랑과 술에 대한 개인적 역사를 만들며 사십대가 되었다. 그 사이 루이 알튀세르의 자리엔 다른 학자들이 자리잡았고, 알튀세르는 한참 유행에 뒤진 학자가 되었지만, ... 그의 자서전은 현대적 자서전- 지극히 비극적이고 철저하게 외로웠던 20세기 포스트모더니즘적 세계 속에서 - 의 규범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결국 나는 이 책을 다시 읽게 될 것고, 끊임없이 되새기게 될 것이다. 진정한 독서란 한 번 읽는 것이 아니라 반복해 읽는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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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철학은 우리가 무엇을 모르는가를 말해주기 위해 존재한다. 오랜 철학적 탐구가 세계와 우리 자신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해주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철학은 기껏해야 우리가 무엇을 모르는지, 왜 모를 수 밖에 없는지, 새로운 앎은 어느 지점에서 개시되어야 하는지를 말해줄 뿐이다. 이것이 몽테뉴가 말한 바 "내가 무엇을 아는가?"의 의미이다. 

따라서 철학은 우리에게 겸허하라고 말한다. 오랜 탐구 끝에 우리는 기껏해야 우리가 큰 무지에 잠겨 있다는 사실을, 또한 무지에 잠기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뿐이다. 위대했던 니콜라우스 쿠자누스가 신과 관련해 "무지無知의 지知"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인간의 한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조중걸, '아포리즘 철학', 서문 중에서, 한권의 책




아포리즘 철학
조중걸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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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연 - 10점
플라톤 지음, 강철웅 옮김/이제이북스




향연 

플라톤(지음), 강철웅(옮김), 이제이북스



* 이 글은 '독서모임 빡센'의 5월 모임에서 오고간 이야기를 정리한 글입니다. 정리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던 관계로 문장의 비약이나 비문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궁금하신 점은 댓글을 달아주시면 아는 만큼 답글을 달도록 하겠습니다.   




1. 번역서의 선택 



<<뤼시스>>를 옮길 때 늘 걸리는 것이 ‘필리아’(그리고 ‘에로스’)였고 말하자면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해맸다. 결국 선택은 ‘사랑’을 ‘필리아’에 주고 ‘연애’를 ‘에로스’에 주는 방식이었다. 그 때 해둔 고민 때문에 이번에는 그 말들로 인한 문제 많은 시간을 잡아먹지는 않았다. 같은 옮긴이가 앞선 <<뤼시스>>에서는 ‘필리아’에 ‘사랑’을 주었다가 이제 <<향연>>에서는 ‘에로스’에 ‘사랑’을 줄 수 있겠느냐는 고민도 <<뤼시스>> 때 대강 끝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나의 <<뤼시스>> 번역을 읽은 이들은 이 작품에서도 당연히 ‘사랑’이 ‘필리아’를 가리키리라고 예단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주요 어휘가 ‘필리아’에서 ‘에로스’로 이행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리말에서도 가장 유연하고 적응력 있는 어휘인 ‘사랑’을 ‘에로스’의 역어로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 역자 후기, 205쪽 



고전은 어떤 번역서로 읽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쉽게 사용하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위 역자 후기에서 볼 수 있듯, ‘필리아philia’와 ‘에로스eros’라는 두 단어가 있고 이 두 단어의 쓰임새는 다르기 때문이다. 시대에 따라, 그리고 언어에 따라 단어가 의미하는 바가 다르니, 철학과 같이 개념을 다루는 학문 분야에서는 단어의 정의는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이 단어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진행된 번역서는 읽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상당수의 한글 번역서들이 이해가 전혀 없는 이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상당하다.) 


강철웅 교수의 <<향연>> 번역은 가장 최근에 이루어졌으며, 나온 책들 중 가장 신뢰할 만하다. 



2. 향연Symposion 



Symposion은 ‘함께 술을 마신다’는 뜻이다. 술자리의 이야기거리로 ‘에로스’가 나왔을 뿐이고, 그 술자리 대화를 옮긴 것이 <<향연>>이다. 


이런 술자리는 고대 그리스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달빛에 핀 매화를 연모하여, 매화가 핀 친구의 집을 옮겨다니며 밤마다 술 마시고 매화의 아름다움에 대해 평하고 그리고 시를 지으며 한 계절을 보내기도 했다. 가지고 배운 자들의 전혀 현실적 기여가 없는 한량짓이긴 하지만. 강희안의 <<양화소록>>에 이런 이야기가 잠시 언급된 기억이 있다. 


실은 지금도 symposion을 열어서 어떤 주제에 대해 술을 마시며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여유가 사라졌고, 그것 물질적 빈곤 탓이 아닌 상대적 빈곤라는 사실은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다. 



양화소록
강희안 저/서윤희.이경록 공역

('양화소록'은 최근 새로 번역되어 나왔으나, 개인적으로, 지금은 품절인 눌와(출판사)에서 나온 '양화소록'을 추천한다. 자세한 식물 사진 도판이 함께 있는 이 책은 식물에 대한 이해를 함께 도울 수 있다. 최근 번역된 '양화소록'(아카넷)은 강희안이 쓴 부분과 역자가 쓴 부분이 잘 구분되지도 않고 역자의 해설이 과도하게 많아, 번역서라기보다는 연구서에 가까웠다.)




3. 플라톤의 이분법 



“내가 내 마음 속으로 단순히 그리고 솔직하게 그리고 어쩌면 어리석게도 단단히 붙잡고 있는 것은 이런 것, 곧 아름다운 사물이 아름답게 되는 것은 아름다움에 의해서이다는 것이다.” - <<파이돈>> 



다소 번역된 문장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플라톤은 <<파이돈Phaidon>>에서 소크라테스를 통해 개별 사물을 가능하게 만드는 보편개념을 가정한다. 이를 현대적으로 옮기면 아래와 같다. 



“우리들이 하나의 사물(즉 하나의 개별적인 사례)이 속하는 그 집합에 그것을 연관 지을 수 없을 때, 우리들은 그것에 대해서 과학적인 설명을 할 수 없으며, 그리고 그건 집합 개념의 지식을 뜻한다.” - <<희랍철학입문>>, W.K.C. 거드리 (박종현 옮김), 종로서적 



이데아의 세계와 현실 세계로 나누는 것은 현실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의 ‘이데아 세계’를 가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현실 세계 ? 생성계의 우리는 이데아 세계 ? 존재계로부터 전락한 것이다. 그래서 생성계의 우리는 플라톤의 입장에서는 원래부터 ‘결여된 존재’가 된다. 기독교적으로 말하자면 ‘원죄’라고 할까. 로마 후기의 신플라톤주의자들과 중세의 시작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거칠게 말해, 보다 좋은 것, 보다 나은 것, 보다 완전한 것을 있고 그것을 향해 살아간다고 하는 순간, 우리는 플라톤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본질이 실존을 앞서는 것’이다. 



희랍 철학 입문 - 탈레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까지
W. K. C. 거스리 저/박종현 역


(그리스철학에 대한 최고의 입문서이다. 그리스 철학을 넘어 현대 철학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잠재태/현실태, 이데아, 질료와 형상, 운동, 아르케 등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도울 수 있다.) 




4. 소년에 대한 사랑



소년에 대한 사랑은 <<향연>> 곳곳에 노골적으로 표현된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내용에 매우 흥미를 가질 것이다. 또한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는 매우 흥미진진하다. 이 이야기는 동성애에 대한 역사적 기원이 되지 않을까, 또는 현대 동성애 이론의 근거가 되지 않을까? 


실제로 동성애 관련 추천 도서에 <<향연>>이 올라와 있다. 일본 에도시대에도 소년 ? 동성애가 유행하였는데, 이 때는 남자들이 대부분이었던 관계로 동성애가 발생했다고 한다. 


<<향연>>에서 나오는 소년에 대한 사랑도 정치경제적인 배경이나 사회적인 배경을 가질 것이나, 충분한 설명을 얻지 못했으며, 또한 <<향연>>에서 동성애는 중요한 사항은 아니다. 




5. 아름다운 대상에 대한 사랑, 에로스eros 



“휼륭한 자는 초대받지 않고도 훌륭한 자의 잔치에 간다”는 속담 패러디가 구사된다. 소크라테스에게 붙인 ‘아름다운’(kalos)이 ‘휼륭한’/’좋은’(agathos)과 통한다는 것, 아가톤(Agathon)의 이름이 ‘훌륭한’/’좋은’을 뜻한다는 것이 작품 전체의 흐름과 관련하여 주목할만하다. 

- 작품 안내, 11쪽 



이와 관련해 거드리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Kalon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정확한 영어 해당어가 없는데, 이것은 전통적인 역어인 “beautiful”이라는 말로는 결코 적합하게 표현되지 않는다. 

- 거드리, <<희랍철학입문>>, 112쪽(박종현 역, 종로서적)




그리스적 의미에서 ‘아름다움’과 현대에서 이야기되는 바 ‘아름다움’은 전혀 다르다. 가령 우리는 여성에 대해서 아름답다라는 형용사를 사용하지만, 남자에 대해서는 대체로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리스 시대의 조각상들을 떠올려보라. 여성을 그린 조각상은 밀로의 비너스 정도 떠오를 뿐, 대부분 남자 조각상들이다. 그것도 미끈하게 빠진. 


그리스 시대는 ‘선한 것’, ‘좋은 것’이 바로 ‘아름다운 것’이었다. 이를 ‘칼로카가티아 

Kalokagathia’라고 말한다. ‘선미善美’라고 하는데, 아르놀트 하우저는 ‘육체적인 요소와 정신적인 요소의 균형이라는 이념을 내세운’다고 설명한다. 



지혜는 그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것들에 속하는데, 에로스는 아름다운 것에 관한 사랑(에로스)이지요. 그래서 에로스는 필연적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자일 수밖에 없고, 지혜를 사랑하는 자이기에 지혜로운 것과 무지한 것 사이에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 <<향연>>, 204b (129쪽)



우리는 편의상 아름다운 것에 대한 사랑을 ‘에로스’라고 옮기고 많은 이들이 그렇게 설명한다. 그래서 에로스는 미학에서 중요한 단어가 되는데, 실은 ‘아름다운 것’에 대한 정의부터 내리고 난 뒤 에로스에 대해 논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냥 ‘아름다운 것에 대한 사랑’이라고 설명하는 통에 아름다운 작품이라든가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연모나 사랑 따위로 해석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르곤 한다. 


아름다운 것에는 좋은 것, 선한 것, 완전한 것이 된다. 따라서 아름다운 것은 이 세상에 없다. 진실로 아름다운 것은 이데아에 속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지혜이거나 진리일 것이다. 반대로 이데아에 속하는 모든 것들은 아름다운 것이다. 왜냐면 그것들은 좋은 것이며 완전한 것이고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로스는 현대적 의미에서의 ‘아름다운 것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데아를 향해 가는 길목에 있는 어떤 사랑’이 된다.


에로스가 아름다움과 추함, 좋음과 나쁨 사이에 있다는 점, 그리고 신조차도 아니라는 점이 확인되고 이 둘에서 결국 에로스가 가사자(죽을 수 밖에 없는 자, 인간)와 불사자(죽지 않는 자, 신) 사이의 중간적 존재 즉 신령(다이몬daimon)임이 귀결된다.

- 작품 안내, 19쪽 



헤르메스 조각상이다. 고대 그리스 후기, 초기 헬레네즘(혹은 그리스 낭만주의)에 속하는 조각상으로, 남성이 가지는 아름다움이 표현되고 있다. 이 조각상과 비교해 그리스 시대의 여성 조각상은 그 유려함이 떨어지는 건 아닐까. 



6. 에로스와 불멸 



결혼과 임신, 그리고 출산의 과정을 에로스의 기능으로 설명하나, 이는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남녀 간의 만남, 결혼 등을 넘어서 있다. 아름다운 것 안에서의 출산을 거듭하며, 이를 통해 불사한다는 견지는 마치 리처드 호킨스의 ‘밈Meme’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머물지 않고 에로스는 ‘아름다운 것 자체에 대한 앎으로의 상승’을 이끈다. <<향연>>에서 인용해보기로 하자. 


그런데 몸에 있어서 임신한 자들은 여인들에게로 더 향하고 이런 방식으로 사랑에 애타는 자들입니다. 아이 낳기를 통해서, 장차 이어질 모든 시간을 위해, 불사와 기억과 자기들이 생각하는 대로의 행복을, 자신들을 위해 마련해 놓으려 하면서 말입니다. 반면에 영혼에 있어서 임신한 자들은 … 몸에 있어서보다도 오히려 훨씬 더 많이 영혼에 있어서 임신하는, 그런 자들이 있으니 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영혼이 무엇을 임신하고 출산하는 것이 적당한가요? 사리분별과 여타의 덕이지요. 시인들도 그리고 장인들 가운데 창의력이 있다고 말해지는 자들도 다, 바로 이것들을 낳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사리분별 가운데서도 단연 가장 중대하고 가장 아름다운 것이 국가들과 가정들의 경영에 관한 사리분별인데, 바로 그것에 붙어 있는 이름이 바로 절제와 정의입니다. - 208e, 209a 



몸에서의 출산 과정이 있듯, 영혼에서도 그런 과정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나아갈 수 있음을 <<향연>>에서는 디오티마를 통해 이야기되고 있다. 



오히려 아름다움의 큰 바다로 향하게 되고 그것을 관조함으로써, 아낌없이 지혜를 사랑하는 가운데 많은 아름답고 웅장한 이야기들과 사유들을 산출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결국 거기서 힘을 얻고 자라나서 어떤 단일한 앎을, 즉 다음과 같은 아름다움에 대한 것으로서의 앎을 직관하게 됩니다. - 210d  



즉 에로스는 결여된 자로서 살아가는 생성계의 우리들에게 완전한 앎을 획득할 수 있는 존재계를 향한 사다리를, 통로를 열어준다. 



7. 실존주의로 본 '향연'



하지만 우리는 완전한 앎을 획득할 수 있는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결여된 자로서의 우리는 과연 에로스의 도움을 받아 존재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그리스 시대에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신비주의적이기까지 하다. 


그리고 근대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예답게, 존재계의 흔적이 생성의 세계에도 있다고 여겼다. 그것이 근대적 사유, 생각하는 나였다. 그것은 존재계는 기하학적 세계이며, 그 기하학적 세계는 자연에서 찾을 수 있다고 여기는 세계관이었으며, 실제로 그렇게 해석되어졌고 물질문명은 발달했다.  


그런데 과연 그랬던 것일까? 우리가 아는 기하학은 불완전한 것이며, 동어반복일 뿐이었다. 극미의 세계와 극대의 세계는 서로 만날 수 없다는 것이 현대 물리학의 귀결이고 ‘서로 평행하는 두 직선은 만난다’는 것이 19세기 후반의 수학에서 드러나게 된다. 


실존주의자들은 물 자체의 세계와 현실 세계를 나눈 칸트,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니체에서 더 나아가 그래서 현실 세계의 우리는 결여되었고 의미도 목적도 없다고 말한다. 


이 지점에서 플라톤 <<향연>>의 ‘에로스’는 타락한다. 결여된 우리를 완전한 우리로 만들 수 있는 에로스 따위는 없다. 고작 결여된 우리를 세속적 방식으로 위로해줄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욕망이 될 것이며, 자포자기이거나 별의 지도를 잃어버린, 방랑하는 영혼의 타락한 벗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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