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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 - 세속을 노래한 시인

에리히 아우어바흐(Erich Auerbach) 지음,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좋은 책이다. 간결한 문장으로 핵심을 찌른다. 이종인 선생의 번역도 신뢰할 만하며 단테가 어떻게 문학적으로 성장해 나갔으며, 어떻게 근대 문학의 시초가 되었는가를 분석하고 예증한다. 단테 문학의 변화와 성장은 이 책의 중심 테마이며, <<신곡>>을 향해간다. 



인간에 대한 단테의 미메시스는 고전 고대의 미메시스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고, 그 이전의 중세 시대에는 전혀 없었던 미메시스를 도입한 최초의 인물이다. 단테는 고전 고대처럼 인간을 아득히 떨어져 있는 신화적 영웅으로 보지도 않았고, 중세 시대처럼 인간의 윤리적 타입을 추상적으로 혹은 일화적으로 재현하지도 않았다. 단테는 살아있는 역사적 리얼리티 속의 인간, 단일성과 전체성을 간직한 구체적 개인으로서의 인간을 재현했다. 

- 343쪽 



사실적인 표현과 문장이 동시대의 다른 작가들과 어떻게 구분되는가를 실제 문학 작품들을 예시하여 중세 후반기의 문학과 단테가 이룬 문학의 차이를 보여준다. 딱딱하고 어색했던 중세 말의 표현들이 어떻게 자연주의적으로, 감각적이며 세속적인 풍성함을 가지게 되는가를 말이다. 



조반니 피사로 이래 화가들은 세상에 대해 날카로운 지각을 개발해왔다. 그래서 단테와 그 시대의 위대한 화가인 조토 사이에는 어떤 유사점이 발견된다. 두 사람에게 사건은 자급자족적 리얼리티로 다시 태어난다. 두 사람은 고전적 감각을 지녔고 리드미컬한 구조를 구현한다. 또 이 세상의 감각적 구체성 속에서 사물에 내재하는 법칙을 파악하는 방법도 상당히 유사하다. 

- 195쪽 




하지만 단테 문학 이상으로 이 책에서 내 관심을 끌었던 것들이 있었다. 그 첫 번째가 플로티노스에 대한 짧은 설명이다. 몇 페이지에 걸친 플로티노스에 대한 설명에서 아우어바흐는 중세 초기 미메시스 예술의 몰락을 플로티노스를 통해 설명한다. 실은 이러한 관점에서의 이해는 나로서도 처음 읽는다. 그만큼 중세 초기 신플라톤주의에 대한 소개가 거의 없고 플로티노스 철학에 대한 번역이나 소개는 최근의 일이기도 하지만, 그냥 막연하게 중세 예술에서의 미메시스에 대한 무관심, 또는 경멸이 종교적인 이유에서의 엄숙주의라고 여겼던 것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었기 때문이다. 



신플라톤주의의 창시자 플로티노스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가져온 여러 요소들을 융합하여 그 자신의 유출주의를 만들어냈고, 신비하면서도 종합적인 명상으로 기울어졌다. 이렇게 하여 영(Spirit)이 참여하는 지상의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그렇지만 아름다움은 내적 원형(이데아)의 상태에서만 순수하다고 보았고 물질 속에서는 들어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플로티노스의 사상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형상 없는 질료는 플라톤의 비존재(non-being)와 동일시되어, 완전한 존재를 갖춘 이데아와는 정반대의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렇게 하여 질료(물질)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단순한 저항을 의미하지 않게 되었다. 물질은 그 다양성과 분할 가능성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악(惡)이 되었다. 영이 물질세계로 유출되기는 하지만, 다양하고 구체적인 물질은 피지스(physis: 이것은 개체화의 시작[principium individuationis]이 되는데 곧 저급한 영혼을 의미함)를 통하여 다시 한 번 악하고 불순한 것이 된다. 따라서 미메시스 예술은 경험적 리얼리티와 접촉하지 못하고 순수한 에우레시스(euresis: 내적 형상의 복사물)가 된다. 플로티노스는 미학의 영성적 체계에 대하여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지만 그 실제적 결과는 미메시스의 부정이었다. 그는 생성(becoming)보다 존재(being)를, 물질보다는 이데아의 우월성을 강조했고, 물질과 변화를 형이상학적 비존재(존재하지 않는 것)와 동일시했다. 이런 사상은 세속적 운명을 예술 속에서 재현된 가능성을 모조리 파괴했다. 

- 56쪽 



두 번째는 그리스도 스토리에 대한 설명이다. 성경을 종교 경전으로, 그리고 서양예술작품에서 표현된 다양한 종교적 주제나 소재의 원천 정도로만 여겼지, 그것을 하나의 서사 문학으로 접근하지 못했는데, 아우어바흐는 이를 분석하고 있었다. 




그리스도 스토리는 로고스logos의 비유(parousia) 혹은 이데아의 나타남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 51쪽 



그리스도 스토리는 개인적 생활의 강렬함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 다양성과 풍부한 형식 또한 보여준다. 그 스토리는 고대 미메시스 이론의 한계를 돌파한다. 그 스토리 속에서 인간은 지상의 위엄을 잃어버린다. 모든 일이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고, 고전주의에서 규정한 장르의 구분(합리와 우연의 구분)은 가뭇없이 사라진다. 숭고한 스타일과 천박한 스타일의 구분도 더 이상 없다. 복음서에는 마치 고대 코미디처럼 온갖 계급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어부, 왕, 고위 사제, 세리, 창녀 등이 그들이다. 지체 높은 사람이라고 해서 희극 속의 인물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그와는 전혀 다르게, 모든 사회적, 미학적 제한이 철폐된다. 그 무대는 다양한 종류의 인간을 허용한다. 그 무대에 오르는 캐릭터들은 하나의 집단으로 혹은 각각의 개별 인물로 등장하든 여전히 다양성을 유지한다. 각각의 개인은 온전하게 합법화되며, 그 합법화는 사회적인 기반과는 무관하다. 그의 현세적 지위와는 상관없이 그의 개성은 완전히 개발되며, 그에게 일어난 일은 고상하지도 천박하지도 않다. 예수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베르도도 엄청난 굴욕을 당한다. 그리스도 스토리가 갖고 있는 자연주의(자연스러운 사실주의)는 깊이나 넓이에 있어서 전례 없는 것이다. 고대의 시인이나 역사가들은 인간의 사건을 이런 방식으로 서술하지 않았고 그럴 능력도 없었다. 

- 53쪽에서 54쪽 



세 번째는 단테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관계다. 단테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에 깊이 심취해 있었으며, 그 철학이 단테의 문학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글을 쓸 때 단테처럼 철저하게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쓰는 사상가는 없을 것이다. 이런 단테에게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아퀴나스 철학이었다. 그가 믿고 따른 아퀴나스 철학은 개성적 형태를 중시하고 그에 대한 묘사를 정당화했다. 성 토마스는 이 세상이 하나의 이미지를 따라 창조되었다는 신학적인 교리로써 사물의 다양성을 설명했다.(...) 따라서 천지창조 전체를 두고 볼 때, 다양성은 완전함의 반대 명제가 아니라 그것의 적절한 표현이다. 더욱이 우주는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움직임에 적극 참여하며, 그 움직임은 우주의 형식들을 움직여 자기-완성으로 나아간다. 이런 행동의 능력이 발휘되는 과저에서 다양성은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필요한 과정이다.

- 178쪽에서 179쪽 



단테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세속적 자연주의는 아퀴나스 철학에 기반해 있는 셈이다. 마치 고딕 자연주의처럼. 


 

책 뒤에 수록된 '인명-용어풀이'도 꽤 재미있게 읽었다. 잘 알려져 있는 철학자에 대한 설명보다 가령 사랑이나 천국, 연옥 같은 단어에 대한 풀이는 그 자체로 흥미로운 것이었다. 에리히 아우어바흐의 책이라는 점에서 반드시 읽어야겠지만, 이 번역서 자체의 완성도도 나쁘지 않고 강력하게 추천한다. 꽤 밀도가 높은 책이라 읽는데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것이다. 


아래는 사랑이라는 용어 풀이에 실린 아퀴나스의 사랑에 대한 정의다. 선한 것은 아름답고 사랑스럽다는 것일까. 선미(kalokagathia) 의식은 그리스의 것이라 여겼는데, 중세 후기에도 어김없이 등장한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선을 원함(velle bonum)이다. 자기 자신에게 또는 남에게 선을 원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은 이기적 사랑과 우정의 사랑으로 나뉜다. 사랑의 고유한 원인은 선이다. 사랑은 사람의 본성에 타고난 것이나 그 본성에 어울리는 것이다. 악이 선'처럼' 나타날 때 악을 사랑하게 된다. 아름다움(pulchrum)은 선과 같은 개념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름다움의 소유는 보는 것 또는 인식에 있는데, 선의 소유는 사랑 속에 있다. 사랑의 가까운 원인은 선에 대한 인식이다. 이 인식이 없으면 그것을 결코 욕심낼 수 없다. 사랑의 결과는 상호 침투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것을 주는 자가 그것을 받는 자 속에 있고, 또 반대로 사랑 받는 자가 사랑하는 자 속에 있도록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엑스터시(황홀)는 사랑의 결과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영혼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와서 사랑의 대상으로 옮겨가기 때문이다. 격정과 질투는 사랑의 결과이다. 강렬한 사랑은 그것을 반대하고 가로막는 온갖 장애물을 다 물리치기 때문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자가 행하는 모든 것의 원인이다. 바로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2부 1편 중에서(367쪽 재인용) 

 


아우어바흐(1892-1957) 



단테 - 10점
에리히 아우어바흐 지음, 이종인 옮김/연암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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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아프게 하는 것이 나를 강하게 만든다

알렉상드르 졸리앙(지음), 성귀수(옮김), 책읽는수요일 




"오늘은 어제보다 덜 나빴다. 그런 오늘보다 내일은 좀 더 나을 것이고, 그렇게 계속 나아질 것이다.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하나의 원칙만을 고수할 것이다. 마치 살아서 다른 할 일이 없는 사람처럼, 주님이 나를 세상에 내신 이유가 오직 그것뿐인 것처럼, 그리하여 오로지 그 하나를 이루는 일에 나의 구원이 달려 있는 것처럼, 모든 사소한 일, 작은 기도, 세세한 규칙들을 철저히 수행해나갈 것이다."

"이 원칙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자각하고, 자기가 하는 일에 전략을 다하며, 신이 지켜보는 앞에서 굳건히 매진할 것을 내게 요구한다. 하지만 정작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그런 원칙이 일상의 처음 취하는 동작에서부터 꼼꼼히 적용되어야만 한다."

- 교황 요한 23세, <<영혼의 일기>>, 1962년 12월 23일 (54쪽에서 재인용) 



부끄러웠다. 졸리앙의 글을 읽으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어느 순간 세속에 물들어 적당히 거짓말을 하고 적당히 타협을 하며 사소한 나쁜 행위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잊고 지내던 것이었다. 소년이었던 시절, 나는 내 삶의 지향점이 분명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으며, 사랑은 날 떠났고, 나에게 실패했으며, 모든 것들은 내가 원하던 대로 움직였다고 생각했으나, 그건 내 착오였다. 그 착오의 영향은 꽤 심각해서 아직도 허우적되고 있다. 그 때의 나는 오만했으며, 타인의 충고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터무니없는 낙관주의로 날 나락으로 몰아가고 있었지만, 그것을 알지 못했다. 



졸리앙은 그런 이야기를 하진 않는다. 다만 그의 육체적 고통에 대해서, 자신이 벗어나고 했던 그 불완전성에 대해서 끊임없이 싸워왔음을 이야기할 뿐이다. 인터넷 서점(혹은 책 표지)에서의 저자 소개는 아래와 같다. 



1975년 스위스 시에르에서 트럭운전사 아버지와 가정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탯줄이 목에 감겨 질식사 직전에 기적적으로 태어나 뇌성마비를 갖게 되었고, 3살 때부터 17년간 요양 시설에서 지냈다. 장애로 인해 불편과 고통, 난관에 수없이 부딪히면서 그는 내면에 잠자고 있는 인식에 대한 강렬한 갈증을 느껴 철학에 빠졌다. ... 

- 인터넷서점 작가 소개 




"실재성과 완전성을 나는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 - 스피노자, <<에티카>>, 제2부 정의 6



스피노자의 저 한 마디는 졸리앙의 인생 전체를 위로 끌어올린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 이 표현은 아래의 글귀로 이어진다.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바 그 직관, 즉 우리 모두가 불성을 타고 났다는 위대한 깨달음과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 94쪽 




이 책은 '내려놓음'에 대한 명상과 그 서술로 이루어져 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 졸리앙은 나직한 목소리로 그리스도교와 불교를 오가며 부족한 자신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그러나 저자는 자신의 육체를, 자신의 일상을 통해서 그것을 담담히(아마 처절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적는다. 그런데 그 울림이 작지 않아서, 책을 한 번 잡으면 놓지 못한다. 


나는 알렉상드르 졸리앙에 대해서는 신문 칼럼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역시 이 책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마치 짧은 힐링 여행 같은 책이라고 할까. 마음의 여유를 잃기 쉬운 요즘, 이 한 권의 책이 휴식이 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추천한다.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이 나를 강하게 만든다 - 8점
알렉상드르 졸리앙 지음, 성귀수 옮김/책읽는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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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시대 The Age of Shakespeare 

프랭크 커모드(지음), 한은경(옮김), 을유문화사 크로노스 총서 11



책은 얇지만, 의외로 단단하고 빽빽하다. 셰익스피어(1564 ~ 1616)가 살고 활동했던 시대 전후로 셰익스피어 극작품에 영향을 주고 받은 다양한 환경적 요인이나 연극 제작, 그리고 개별 작품에 대해 분석하고 언급하고 있으니, 당연히 쉬운 책이라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독자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 또한 그랬으니. 그래서 그런지 이 번역서에 대한 일반 독자의 반응은 좋지 않다. 너무 어렵다는.  


그러나 미 컬럼비아대 비교문학과 교수인 제임스 샤피로(James Shapiro)는 프랭크 커모드(Frank Kermode, 1919~2010) 교수 생전에 '현존하는 최고의 셰익스피어 안내자(reader)'라고 평가했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Frank_Kermode)


이 책의 대부분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연극 제작을 둘러싼 다양한 환경을 서술하고 분석하는 데 할애되어 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셰익스피어 극작품의 일부를 인용하여 어떻게 셰익스피어에게 영향을 미쳤는지까지 보여준다. 


엘리자베스 시대(이 용어는 편의상 제임스 1세 초까지 망라하기도 한다)는 전문 연극이 발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주목할 만하다. 

최초의 대중연극은 주로 임시 극장에서 공연되었고, 심지어 여인숙의 뒷마당이 무대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16세기 후기에 이르러 런던에는 최고 3,000명까지 수용할 수 잇는 전용극장이 여럿 생겨났는데, 이런 극장은 주로 극단주들이 소유했다. 대개 극단은 과거 길드와 구조가 흡사했으나, 셰익스피어의 극단은 다소 달랐다. 단원들이 연극은 물론이고 극장까지 소유했기 때문이다. '주주'들은 연극을 위탁하고 소유하고 출연했으며, 셰익스피어의 경우는 직접 연극을 쓰기도 했다. 그를 위시하여 일부 동업자들은 상당한 수입을 올리며 자산가로 성장했다. 하지만 이건 나중 일이었고, 엘리자베스 여왕 초창기에 극장 공연자들은 여전히 곡예사나 순회 공연자, 방랑자 정도의 취급을 받았다. 

- 10쪽 


(* 참고. 엘리자베스 1세(1533 ~ 1603), 제임스 1세(1566 ~ 1625). 엘리자베스 시대는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초반으로 이해하면 된다. 예술사에서는 매너리즘 시대로 이해하는 기간이다.)


따라서 일반 독자에게 권하기는 다소 난이도가 있는 책이다. 더구나 2004년도에 런던에서 출간된 이 얇은 책을 내기 전 프랭크 커머드는 이미 10권 이상의 셰익스피어 저술을 썼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책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목차도 아래와 같다. 


- 종교개혁과 왕위 계승의 문제

- 엘리자베스의 영국

- 셰익스피어, 런던으로 가다

- 로드 체임 벌린스멘 극장

- 극장

- 초기의 셰익스피어 

- 글로브극장

- 글로브극장의 연극

- 블랙 프라이어스 연극 


셰익스피어 연극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진 이들에게 이 책은 보물단지에 가까워 보인다. 아마 그 정도 되려면 전문연구자일 테니, 프랭크 커모드를 모를 일 없을테지만.  영미문학에서의 프랭크 커모드는 상당한 유명한 연구자이며, 오래 전 <<종말 의식과 인간적 시간>>이라는 번역서가 나오기도 했다.  나 또한 이 책을 꽤 열심히 읽었으니, 프랭크 커모드의 책은 두 권을 읽은 셈이다. 


이 책은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초, 영국 상황에 대해서도 간단한 이해를 도울 수 있는데, '엘리자베스 여왕의 처녀성은 찬양과 희망을 표출한다는 은밀한 신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29쪽)라는 언급은 꽤 흥미로웠다. 왕이 아니라 여왕, 더구나 결혼을 하지 않은 여왕은 영국 귀족 사회에서도 상당히 골치거리였다고 한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는 셰익스피어의 주요 극작품에 대한 간단한 언급도 등장하는데, 중요한 부분이라 인용해본다. 먼저 <<햄릿>>에 대한 언급이다. 


이렇듯 다양한 스타일이 구사되는 이면으로 가족의 이중성과 그 외 여러 이중성에 대한 불안한 마음이 배어있다. 햄릿에게 클라우디우스는 삼촌이자 아버지이며, 그 자신이 조카이자 아들이다. 끔찍한 현실이다. 자신의 어머니와 계부가 몸을 합했다는 사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간통이 실은 근친상간이라는 것은 혐오스러울 따름이다. 

대사는 언어학적인 이중적 의미로 가득하며, 전례가 없을 정도로 중언법이 많이 사용된다(중언법은 '하나를 통한 둘'을 뜻하며, 하나의 복잡한 개념이 형용사와 명사 대신 접속사로 연결되는 두단어로 표현된다.[옥스포드사전]). 사전에서는 중언법의 예로 <<햄릿>>이 인용된다. "의전법으로 잘 비준된 것 Well ratified by law and heraldry"(1막 1장 87).  이 때 '법과 의전 law and heraldry'은 '의전법'을 의미한다. 

- 148쪽 


아래는 <<맥베스>에 대한 서술이다. 


현재의 상황으로 만들어지는 미래는 다의적이다. 시간은 다의성의 대리인이다. 던컨을 살해하기로 결정한 것은 한 순간 어느 쪽으로도 진행될 수 있다. 그리고 이 결정은 시간이 정지된 순간에 이루어진다. 이 순간은 의도와 행위 간의 간극이며, 그 사이에 과거와 현재, 미래는 다의적으로 하나가 된다. 정당한 것은 사악한 것과, 실패한 것과 성공한 것과, 미래와 순간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 176쪽 



영문학 전공자에게는 이 책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혹시 이 글을 읽게 되는 을유문화사 관계자가 있다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크로노스 총서를 계속 발간하는 것을 검토해볼 것을 권한다.아마 국내에 번역된 여러 인문 시리즈들 중 이 시리즈가 단연코 최고라고 여기는데, 나오다가 중단되었다(참고로 이 시리즈의 1권으로 번역된 폴 존슨의 <<르네상스>>는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최고의 르네상스 개론서이다). 그러니 다시 나오기 시작한다면, 나라도 열심히 소개할 테니 .... )






셰익스피어의 시대 - 10점
프랭크 커모드 지음, 한은경 옮김/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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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박물관 미술관 예술기행 - 유럽편 - 

차문성(지음), 책문(성안당), 2013년 초판/2015년 장정개정판 


좋은 책이다. 비전문가인 저자가 전문가가 되어간 과정이 녹아있다. 성실한 내용과 애정이 담긴 글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박물관학 석사 과정을 마쳤으나,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특히 유럽 주요 도시에서 가기 쉬운 미술관/박물관을 선정해 보여주었다는 점도 이 책이 꽤 실용적임을 증명한다. 


내가 이 책을 읽은 목적은 유럽의 여러 도시에 흩어진 미술관, 박물관에 대한 체계적인 정보를 얻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이 책은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대한 체계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책 제목 그대로 예술기행이다. 런던, 파리, 암스테르담, 프랑크푸르트, 생페테르부르그 등의 도시에 있는 미술관/박물관에 대한 소개와 그 곳에 대한 간단한 느낌이나 감상, 그리고 소장 전시되고 있는 주요 작품들에 대한 짧은 안내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 내 목적은 달성하지 못한 셈이다. 


하지만 매우 부러웠다. 한 달 이상 파리에 체류하면서, 일 드 프랑스와 생-제르맹 거리를 오가며, 갤러리에만 있었던 건 아닌가 후회를 한다. 누구나 다 가는 루브르와 오르세만 간 걸 이제서야 후회하다니. 다시 가게 되면 꽤 오래 머무르며 작품들을 보고 와야 겠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작품들 대부분은 이미 여러 미술 관련 서적에서 본 내용들인 탓에, 빠르게 읽었다. 서양미술의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꽤 도움이 될 내용이었다. 


대부분의 유럽 여행객들이 미술관 관람이 목적이 아닌 만큼, 이 책에서 언급된 도시에 가게 될 경우, 이 책은 꽤 유용할 수 있겠다. 



렘브란트, <예루살렘의 멸망을 탄식하는 예레미야>, 1630,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Rijksmuseum)


구약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그렸다. 렘브란트가 24세라는 젊은 나이에 이런 깊이를 가진 작품을 그렸다는 건 놀랍기만 하다. 아마 그만큼 신앙심이 깊었을 것이다. 예레미야의, 고통을 지긋이 누르며 곤혹스러워하는 얼굴 옆으로 불타는 예루살렘이 보인다. 바로크 특유의 명암법은 화면 전체를 감싼다. 한 쪽은 밝고 한 쪽은 어둡다. 하지만 밝은 쪽은 슬픔으로 가득하고 어둠 속으로는 절망감이 감돈다. 그리고 팔을 괴고 있는 모습 아래로 성경이 보이고 그 밑으로는 바빌론의 왕 느부갓네살로부터 받은 금은보화로 보이는 것들이 놓여져 있다. 전체적으로 사선으로 비스듬하게 기대고 있는 예레미야의 모습을 통해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바로크의 고민이 보인다. 확실하 바로크는 과거를 향하지 않는다. 미래로 열린 양식이다. 한 쪽은 밝고 한 쪽은 어둡다. 그러나 우리 시선은 어두운 쪽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 그래서 저 반짝이는 금속물질의 물건은 참 흥미롭기만 하다. 


이 책에선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을 소개하면서 이 작품을 언급했다. 위 설명은 내가 별도로 작성한 것이라 책 내용과는 다소 다를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두 작품이 눈에 들어왔는데, 마네의 베르트 모리조 초상화와 렘브란트의 위 작품이었다. 마네와 베르트 모리조의 관계에 대해선 다음에 한 번 언급하기로 하자. 혹자는 19세기 미술사 가장 아찔한 로맨스라고도 하니 말이다. 대체로 검증되지 않은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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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따의 정치학

조기숙(지음), 위즈덤하우스, 2017 



정치학이라는 단어가 있어 정치학 이론서라고 오해하기 쉽다. 더구나 아래 동영상을 보면 꽤 전문적인 정치 이론서라는 면모까지 풍긴다. 하지만 전혀 아니다. 이 책은 팟캐스트 <정봉주의 전국구>에서 나눈 이야기들을 기초로, 조기숙 교수의 개인적인 경험들과 의견(노무현과 문재인에 대한 왕따 현상),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여러 언론사들의 사례들,이해를 돕기 위한 서구 정치사의 변화와 관련된 이론들이 다소 어수선하게 전개되는 대중 정치 서적에 가깝다.  




지식인 중에 이명박과 노무현이 다르지 않다며 '노명박'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꽤 있다. 최근에는 친박과 친문이 패권주의적이라는 점에서 같다며 반문연대를 지지하기도 한다. 이는 매우 위험하고 무책임한 주장이다. 흑백을 구분하지 못하는 반지성적 태도다.

나는 조동문과 한경오가 같다는 말을 절대로 할 생각이 없다. 분명히  이들 언론은 다르다. 하지만 진보언론이 노무현과 문재에게만큼은 가혹했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 이 책을 쓰게 되었다. 

- 325쪽 


저자가 이 책을 쓴 계기는 위 인용문과 같다. 그래서 책 내용 대부분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할애되어 있으며, 상당히 설득력 있다는 점에서 문재인 정부 이전/이후의 여러 진보 언론의 다시 행태를 떠올리게 만든다. 


처음부터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내가 기고하던 고정 칼럼이 노무현에게 유리하면 수정되거나 삭제되거나 이상한 제목이 붙는 일을 겪으면서 언론의 부당함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 12쪽 


책의 서두에서 노무현 정부와 거리를 두었던 조기숙 교수는 자신이 어떻게 친노가 되어갔는지 묵묵히 서술하며, 중후반에는 정동영 의원과의 관계를 이이야기하며 자신이 정치권에 몸 담게 되는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노무현 - 문재인으로 이어지는 야당 정치 지형의 변화를 통해 친노, 친문 프레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일 뿐, 이 책의 대부분은 한겨레, 경향, 오마이뉴스가 어떻게 친노프레임, 친문프레임을 어떻게 확대 재생산하며, 특히 노무현 대통령이나 문재인 후보에게 부정적인 어조로 기사를 내보내는가에 맞춰져 있다. 실제 기사를 사례로 하기 때문에 읽으면 읽을수록 황당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좌우언론은 역대 가장 민주적이었던 노 대통령에게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프레임을 사용해 비판했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제왕적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 90쪽 


 그리고 이렇게 된 이유가 이념의 차이에게 기인한다고 보는 저자는 서구의 구좌파, 신좌파라는 구도를 가지고 와서 설명하는데, 아마 이 책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 될 것이다. 가볍지만 심각한 왕따 이야기들 속에 갑자기 서구 정치사에 대한 학술적 서술이 다소 뜬금없이 진행된다. 


이들 세대의 핵심 가치관을 '탈물질주의 post-materialism'라고 하는데 물질보다는 가치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문화를 연구한 잉글하트Ronald Inglehart 교수는 유럽의 변화를 일컫어 '조용한 혁명 silent revolution'이라고 했다. 

- 171쪽 



잉글하트 교수의 책은 1977년도에 나왔으며 압축적 정치 성장을 겪고 있는 한국 정치에 적용하는 것이 맞는지에 대해선 논의의 여지가 있다. 또한 '조용한 혁명'의 결과가 에마뉘엘 마크롱이며 미국에서는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많은 분량을 차지하진 않지만, 현대 정치학 이론을 바탕으로 한국의 현실 정치를 분석하고자 하는 시도라는 점에서 재미있기는 하나,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 많으며 좀 더 다듬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노무현에게 조금이라도 호의적인 사람은 말할 권리를 잃어버리는 게 한국 사회라는 걸 그 때 분명히 깨달았다. 사실 지금도 내가 팟캐스트를 열심히 하는 이유는 다른 영향력 있는 지면이나 방송에서 발언할 기회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 209쪽 


이 책은 정치학 이론서가 아니다. 이 책의 목적은 한국 현실 정치의 이론화가 아니라, 왜 노무현과 문재인은 좌우언론 따지지 않고 왕따를 당하고 있는가이며,  이 점에서 이 책은 충분한 공감과 설득력을 가진다는 점에서 읽는 이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더구나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난 다음 사라진 단어들을 보라. 친문이나 친노, 그리고 여타 많은 인물들. 이러한 언론들의 변신이 나는 놀랍기만 하다. 


우리 사회의 위기는 늘 지성 리더십이 초래한다고 생각한다. 조선시대에도 유림이 패거리 싸움을 할 때 서민들이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했다. 

- 327쪽 


마지막으로 이 책에 실린 도표 하나 올린다. 그리고 이번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우리모두 기원해보자. 




왕따의 정치학 - 8점
조기숙 지음/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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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입문 Theory of Beauty :  An Introduction to Aesthetics 

H. 오스본(Harold Osborne) 지음, 김광영 옮김, 박우사, 1994



한창 공부할 때 사둔 책을 이제서야 읽는다. 지금은 구할 수도 없고 구해 읽을 필요도 없는 책이다. 1952년 영국에서 출판된 책이며 해롤드 오스본의 주저도 아니다. 번역이 딱히 좋은 것도 아니고 미학에 대한 충실한 이론서도 아니다. 저자는 예술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아름다움(Beauty)를 가진 예술 작품에 대한 이론적, 미학적 논의를 이 책을 통해 전개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이름들은 한글로만 표기되어 정확히 누구인지 알기 어렵고 일부는 잘못 표기된 경우도 있어, 제대로 된 이해를 어렵게 만든다. 또한 많은 인용문들은 어느 책에서 발췌한 것인지 알기 어려우며 그 번역을 신뢰하기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최근의 이론들이나 관점에 기반하지 않아 미학의 기본적인 생각을 다듬을 수 있으며, 특히 예술작품론이나 감상론 부분은 잘 다루어지지 않는 영역이라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오스본은 책의 서두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연구는 당초 파산적(破産的)인 것'(10쪽)이라고 적고 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오스본은 자신만의 과감한 주장을 전개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다양한 관점에서 예술작품과 아름다움의 관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기술한다.  

 

예술작품이란 이 사람이나 저 사람 또는 여러 사람들에게 때때로 현실화되어 보이는 영원한 가능성인 것이다. 

- 128쪽 


미학 전공자에게도 이 책을 추천하고픈 생각은 없다. 요즘 좋은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으니, 새 책을 읽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냥 습관처럼 읽은 책에 대한 메모를 남기기 위해 이 리뷰를 적는다. 이 책이 궁금하다면 영국 아마존에서 구할 수 있다. 


나이가 들어, 이제서야 인문학 책들이 읽히기 시작하는데, 시간이 없다. 허망하다. 



https://www.amazon.co.uk/dp/B0000CIBJR/ref=cm_sw_r_cp_dp_T2_3GOrzbM9WCK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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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대인의 빅픽처

선대인(지음), 웅진지식하우스 



대중 경제학 책이라 여겼으나, 실제로는 주식 투자 가이드북이라 할 수 있겠다. 요점은 세계 경제 흐름의 큰 그림(빅픽처)를 보면서 투자해야 된다는 것. 일종의 가이드북이며 깊이 있는 내용을 다루고 있진 않다. 나로선 약간 실망했다고 할 수 있다. 초반엔 꼼꼼하게 정독하였으나, 후반으로 갈수록 대강 읽게 되었다. 주식 투자를 하고 있지 않으나, 약간의 관심을 가지고 있는 터라 몇 가지의 지침이 될 만한 언급을 옮겨보자면 아래와 같다. 


투자의 기본은 리스크 관리

 - 30쪽 



개인투자자들을 위한 절대 원칙 

첫째, 스스로 실천할 수 있는 투자 방법을 택해야 한다.

둘째, 투자를 하면서 과한 스트레스를 받지 말아야 한다.

셋째, 반드시 여윳돈으로 투자해야 한다. 

- 271쪽 


바이오 헬스케어(B), 금리(I), 색산업(G), 석유(P), 인도(I), 중국(C), 기술기업(T), 미국(U), 리스크(R), 환율(E)를 저금리 저성장 시대의 키워드로 주목하면서 이 부분에 대해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다. 2015년도에 출간되었으니, 벌써 2년이 지난 셈이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내용 중 일부는 바로 앞으로 닥쳐온 것도 있다. 가령 미국의 기준 금리 인상. 한국 정치의 불확실성이 제거되어 주가가 오른 상황에서 미국의 금리 정책에 대한 대응이 주목된다. 


한 나라의 경제 상황에서 중요한 것이 정치적 불확실성인데, 사람들은 아직도 경제를 살리기 위해 경제정책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듯하다. 실은 제대로 된 정치가 이루어지는 것이 더 중요한데도 말이다. 


주식 투자에 대한 가이드북 성격을 가지고 있으므로(책 말미에는 여러 추천 도서와 관련 웹사이트 정보를 제공하고 있음), 주식 투자에 대한 방향을 잡고 싶은 이들에겐 괜찮은 책이 될 수 있다. 


선대인 소장의 책은 이번이 처음이었던 관계로, 다른 책들도 한 번 읽어봐야 겠다. 






선대인의 빅픽처 - 8점
선대인 지음/웅진지식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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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https://www.concertgebouw.be/en/event/detail/1442/Federico_Garcia_Lorca 




강의 백일몽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지음), 정현종(옮김), 민음사 




이 번역 시집은 시인 정현종이 스페인어에서 영어로 번역된 작품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했다. 하지만 어떤 시들은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옮겨지고, 옮겨진 그 언어에서 다시 또다른 언어로 옮겨지는 사이에도 그 아름다움을 잃어버리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이 시집의 경우에 해댱된다. 채 마흔이 되기 전에 총살당한 이 스페인 시인의 시집을 읽고 있자면, 지중해의 태양 아래에서 첫 사랑을 만난 듯 가슴 떨리고 흥분된다. 


서정적인 강렬함이 지배하는 로르카의 시 세계는 후회없이 앞으로만 달려가는 청춘의 아름다운 무모함과 인생의 낭떠러지 앞에서 서로를 향해 미소 짓는 사랑으로 어우러져 있다. 그리고 스페인의 자연은 그 무모함과 위험한 사랑을 지지하며 같이 노래 부른다. 


시들은 적절한 은유와 상징, 알레고리 또는 직접적인 표현으로 읽는 이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이 시집을 읽는 동안 독자는 스페인 그나라다의, 저 거대한 대지를 감싸고 도는 지중해의 뜨거운 태양 아래, 사랑스럽기만 한 바람의 그늘 속에서 앉아 있게 될 것이다.  



산티아고 시를 위한 마드리갈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

내 달콤한 사랑

공중의 흰 동백

햇빛은 희미하게 비친다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

어두운 밤에

잠든 은빛 풀잎들이

텅 빈 달을 덮는다


거리의 비를 보렴

돌과 수정의 비탄을

사라지는 바람 속에서 본다

네 바다의 재와 그림자를 


네 바다의 재와 그림자

산티아고, 태양에서 먼

옛 아침의 물이

내 가슴에서 떤










강의 백일몽 - 10점
페데리코 가르시아로르카 지음, 정현종 옮김/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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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의 책

한유주(지음), 문학과지성사 




문장은 대체로 짧다. 그렇다고 긴 문장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문장들의 호흡은 한결같이 짧고 반복적이며, 작가 한효주의 숨소리가 문장들에 어김없이 들어가거나 들어갈 것으로 계획되었던 '있다'와 '없다' 사이 어디쯤 자리잡고 앉아있었. 그 숨소리에 귀기울이며 나는 이 소설집을 읽는다. 그리고 읽었다. 계절과 계절 사이를 지나, 작년을 지나 올해 봄까지. 


그 사이 아이는 자라나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고, 자기 주장을 펼쳤고, 어른들의 말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이 들고 늙어가는 우리들은 서로를 배려하며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다. 아이가 상처 입으며 우리 속으로 들어오는 동안, 나는, 늙어가는 우리들은 우리 밖으로 나가 혼자 웅크리고 말을 잃어버린다. 그렇게 아름답게 수다스럽던 청춘이 사라지고, 그 청춘 옆에서 조용히 젊은 영혼을 어루만지던 책도, 언어도 얼어 간다. 그가 내 곁을 떠나고 그녀 주변을 맴돌던 그 화사한 미소도 사라진다. 


변화란, 어쩌면 과거의 상실이고 다시 오지 않을 사랑의 증거다. 아마 작가 한효주는 얼어버린 마음을, 잃어버린 단어, 혹은 어떤 대명사를, 따스함을 찾아 떠난 여행길에서 스스로 움츠리고 가라앉고 조용해지며 팔을 내리고 손을 굳게 쥐고 입을 닫게 되는 자신을 발견한 것일지도 모른다. 


침묵을 견딜 수 없어질 때쯤 해가 완전히 졌다. 실내등이 켜져 있었지만, 매우 어두웠다. - 206쪽  


결국 침묵 바깥으로 나갈 일이 없다. 변화 앞에서 침묵은 그녀의, 나의 유일한 무기였고 그 무기가 잘못되었음을 깨닫는 건, 언제나 황혼 녘이다. 작가의 숨소리에서 주저하며 강요된 억제의 불편함이 느껴지는 건 나 뿐일까. 때론 글쓰기보단 우는 것이, 잔뜻 술에 취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그래서 나이 들고 보니, 글쓰기가 내 일상에서 저 멀리 달아나, 도망가, 내 곁으로 오지 않을 거리로 밀려나있긴 했지만. 


문장이 딱딱해지고 건조해지고 반복되며 있음과 없음에 매달리게 된다. 실험적 글쓰기가 아니라, 침묵 밖으로 나가기 위한 싸움이고 이미 일어난 변화에 저항하기 위한 일종의 전략이다. 얼지 않기 위한 필사적 노력이다. 그렇게 작가는 나이가 들고, 변하고, 나도 이미 죽은 날이 더 가까운 나이가 되었다. 변화, 참 싫다. 그렇게 얼어가는 건 더 싫다. 



얼음의 책 - 8점
한유주 지음/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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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거리를 둔다

소노 아야코(지음), 김욱(옮김), 책읽는고양이(도서출판 리수)




우연히 알게 된 이 책, 소노 아야코의 <<약간의 거리를 둔다>>는 매우 산뜻한 울림을 가졌다. 어느 면에선 냉소적이며, 어느 순간엔 포기하는 듯 보이고, 때론 그냥 되는 대로 내버려두면서 일상을 사는 듯하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낙관적이며 희망을 잃지 않는, 다소 이율배반적인 면까지 보인다. 이런 점에서 그녀의 종교-카톨릭-가 큰 힘이 되는 듯 싶다. 그래서인지 자주 '운명'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 책은 운명론적이지 않다. 도리어 실용적인 처세술에 대한 격언들, 저자 자신의 생각들이 담겨있다. 짧은 에세이들을 통해 그녀는 매우 현실적인 조언을 하며, 지지치 않기를 강력하게 말한다. 책의 서두에서부터 인내와 운명을 이야기하는 것은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최선을 다해 기다리고 노력하면 언젠간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싶은 탓이다. 


인간에겐 운명이 강제로 부과된다. 우리가 바꿀 수 없으므로 운명이다. 또 억지로 바꿔본들 부자연스럽고 아름답지 못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감수하고 그 운명을 토양삼아 인생을 키워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운명을 초월하는 인간의 위대함이다. - 45쪽 


또한 살아가면서 부딪히게 되는 여러 어려움을 묵묵히 견뎌내길 기원한다. '불행한 사람만이 희망을 소유한다'(62쪽)든가 '타인에게 상처주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107쪽)고 말하며 원래 살아간다는 게 그런 것일 뿐이니, 희망을 버리지 버리지 말라고 조언한다. 


타인의 장점을 깨닫는 것이 재능이라면 타인의 좋지 않은 점을 깨닫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본능이다. - 131쪽 


일본에선 매우 저명한 작가인 소노 아야코를 이제서야 알게 된 것은 그동안 내 독서가 다소 편파적이었음을 드러내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 책은 매우 작고 얇고 짧다. 카페에 앉아 한 시간이면 다 읽을 수 있는 분량이다. 하지만 그 울림은 꽤 길다. 또한 유쾌하고 긍정적이다.(또는 내가 소노 아야코를 읽을 수 있음을 그만큼 폭이 넓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닐까) 



(1931년생인 소노 아야코의 2015년 신간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그동안 소노 아야코의 여러 수필집에서 발췌한, 일종의 편집본이다. 여든을 훌쩍 넘긴 그녀가 이 정도의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에 상당히 놀랐는데, 예전 글들을 모은 책이였던 셈이다. 그래서 일본 아마존의 평점은 상당히 낮다. 소노 아야코의 에세이에 대한 평가라기 보다는 소노 아야코의 신간으로 알고 구입한 독자들이 실망하며 낮은 평점을 준 것이다.) 




약간의 거리를 둔다 - 8점
소노 아야코 지음, 김욱 옮김/책읽는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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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기시 마사히코(지음), 김경원(옮김), 이마, 2016 



현대적인 삶은,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조각나고 파편화되어, 이해불가능하거나 수용하기 어려운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져 있는 지도. 그래서 그 조각이나 파편들을 이어붙여 우리가 이해가능하거나 수용가능한 형태로 만들고자 하는 학문적/이론적 시도는 애체로 불가능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이러한 삶이나 그 삶 속의 사람들, 사건들, 이야기들을 분석하고 체계화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그 조작과 파편들의 일부이거나, 그 일부를 묘사한 글이나 풍경이 전부이지 않을까. 그리고 기시 마사히코의 이 책,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은 그렇게 시작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단편적인 에피소드를 주욱 늘어놓고, 그것을 통해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관한 생각'(7쪽)으로 시작되지만, 그 생각은 정리되지 못한 채 겉돌기만 하고 '원래 이렇지, 뭐' 식의 자조로 끝난다고 할까. 그런데 이 자조 앞에서 우리들은, 독자들은 이론적이 아니라 심정적으로 무너진다. 기시 마사히코가 펼쳐놓는 사람들 앞에서, 사건들 앞에서, 이야기들 속에서 결국 마주하는 건 쓸쓸한 우리들이거나 어디로도 갈 곳 없고 공감받지 못하는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기시 마사히코는 구술 조사를 주로 하는 사회학자다. 


사회학을 연구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 경우에는 한 사람씩 찾아가 어떤 역사적 사건을 체험한 당사자 개인의 생활사를 듣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까지 적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해 왔다. - 9쪽 



여기에는 다 쓸 수 없지만 구술 조사의 현장에서는 이렇듯, 갑작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수없이 일어난다.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이들은 구술현장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도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널려 있다. 사회학자로서는 실격인지 모르지만, 언젠간 '분석할 수 없는 것'만 모아서 책을 내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 13쪽 


이 책 속에 나오는 에피소드들은 대체로 저마다의 사연이 있고 호소력이 있으며 애잔하다. 


아버지는 수감되고 어머니는 증발되고 아이들은 보육시설에 맡겨졌으니 아무도 없는 방이 되었는데도, 악취와 해충에 대한 민원이 몇 번이나 되풀이해 들어왔다. 그래서 아파트 관리 회사의 입회 아래, 그 분이 여벌 열쇠로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곳에서 눈에 들어온 것은 가구도 아니고 무엇도 아닌, 텅 빈 깨끗한 방이었다고 했다. - 62쪽 


학문의 테두리 안으로 모이지 않지만, 어찌되었건 우리 삶이며 일상이고, 우리가 길을 가며 마주치게 되는 이 도시의, 이 세계의 사람들의 이야기들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딱히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냥 자신이 수행해왔던 사회학적 연구 속에서, 그 연구에 들어오진 못했지만, 저마다의 사연으로 누군가에게 알려지길, 읽히길, 그리고 읽혀졌으면 하는 저자의 바람으로 이렇게 책으로 엮여져 나온 것일지도. 


우리는 언제나 어디에 가든 있을 곳이 없다. 그래서 언제나 지금 있는 곳을 벗어나 어디론가 가고 싶다. - 80쪽 


우리들은 '책 읽기'라는 행위를 통해 어떤 참여를 하게 된다. 소극적 형태의, 작은 공유이거나 공감이 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가치있는 일이다.  


네모진 종이책은 그대로 온전히 바깥 세상을 향해 열려있는 네모난 창이다. 따라서 우리는 책을 읽으면 실제로는 자기 집이나 거리 밖에 알지 못하면서도 여기에 없는 어딘가 '바깥'이 있고, 자유롭게 문을 열고 어디에라도 갈 수 있다는 감각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때가 오면 진정 창과 문을 열어젖히고 자기가 좋아하는 곳으로 풀쩍 뛰어나가는 것이다. - 82쪽 


이웃에게 무관심하고 타인에게 무신경한 현대의 우리들. 그렇다고 해서 이웃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타인에게 신경 써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이 좁은 지구에, 다 같이 모여 살고 있다는 것만 알아도,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없을 지라도, 저마다의 쓸쓸한 사연을 안고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받는 것만으로도, 아주 작은 위안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시간이 흐르는 것이 고통 뿐이라고는 할 수 없다. '다름 아닌 바로 나에게만 시간이 흐르는 것'이라는 '구조'를, 우리는 일체의 감동이나 감정을 빼고, 서로 공유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 안에서 각자가 고독하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 각자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시간이야말로 우리라는 것을 조용하게 나눌 수 있다.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시간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시간'이라는 것도 있다는 단적인 사실을, 서로 알고 있다. 그것을 공유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 141쪽 


기시 마사히코(岸政彦)

사진 출처: http://www.hankookilbo.com/m/v/9716234b333841bb96d0651e0d0ad18a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 10점
기시 마사히코 지음, 김경원 옮김/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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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힐리즘과 문화(Nihilism en Culture) 

고드스블룸(Johan Goudsblom) 지음, 천형균 옮김, 문학과지성사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 49쪽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한 채 살아 죽는다. 자신이 이상주의자인지 현실주의자인지, 고전주의자인지 낭만주의자인지, 플라톤주의자인지, 반-플라톤주의자인지. 심지어 인문학을 전공하는 이들 중에서도 이를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동시에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지)를 알지 못한다. 


고드스블룸이 니힐리즘을 문화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분석하고 정리하고자 한 것은 현대에 이르러 니힐리즘이 일종의 문화의 차원으로까지 확대되어 대중화되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이 책의 두 번째 부분에서 문화에 대한 다양한 이론을 소개하고 이 속에서 니힐리즘의 문제를 거론하게 된다. 


전반적으로 니체의 니힐리즘에 많은 할애를 하고 있지만(그 정도로 니체와 니힐리즘을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그렇다고 다른 이들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가장 고귀한 가치는 상실되어 버렸다. 그 가치들은 평가절하되었다. 존재의 목적도 상실되어가고 있다. 존재의 목적에 대한 문제도 모두 미해결의 문제로 남아있다. 이것이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니힐리즘이다. '진리의 세계'란 결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신앙에 관한 모든 글이나, 진리로 인정되고 있는 모든 것이 허위임을 그것은 일깨워주고 있다. 니힐리즘은 '무'에 대한 감정, 즉 '허무감 pathos in vain'을 통해 절정에 도달하는 하나의 계시이다. 

- 61쪽 


특히 '진리 추구'라는 관점에서의 니힐리즘에 대한 접근(니체에 기대어)은 이 책의 내용을 진지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미 니힐리즘은 이 시대의 저변 문화가 된 것처럼 보인다. 


한 때 나는 '니힐리즘'이라는 단어가 더욱 유행할 것이라 여겼다. 동시대의 많은 이론들이 니힐리즘을 부추기며 '무가 바로 진리'라는 걸 대변하는 듯, 기존의 질서, 학설, 태도를 거부하고 무시하는 듯한 발언(이렇게 요란하게 발언하는 이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을 이어갈 때, 허무주의가 우리 시대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 여겼다. 그리고 그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사람들은 종교를 찾을 것이고 새로운 중세가 올 것이라고. 


체홉은 이 사태를 이미 예견한다. (실은 19세기 이후 많은 예술가들과 작가들이 니힐리즘을 노래했다)


모든 감정과 사상은 나와는 상관없이 존재한다. 과학, 연극, 문학, 제자들에 대한 나의 모든 비판 속에서, 그리고 모든 정경 속에서 나는 가장 훌륭한 분석가조차도 발견할 수 없었던 일반적인 개념이나 살아있는 인간의 신으로 불리는 것까지도 상상으로 그릴 수가 있다. 

그것마저도 없다면, 있는 것은 오직 무 뿐이다. 

이 극빈과 심한 질병과 죽음의 공포가 몰고온 환경이나 인간의 영향이 한때 내가 생활철학으로 받들고, 나의 존재의 의미와 즐거움을 찾았던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산산이 파괴해버리고 말았다. 

나는 지쳐버렸다. 그렇다면 생각하고, 말하는 것조차도 소용없는 일이 아닌가. 나는 조용히 앉아서 나에게 닥쳐오는 것을 맞이할 생각이다. 

- 안톤 체홉, <<음울한 이야기>>(272쪽에서 재인용) 


고드스블룸의 입장은 니힐리즘에 대한 사회문화적 차원에서의 연구를 통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원하는 뉘앙스를 풍기지만(종종 니힐리즘이 가진 부정적 요소를 강조하면서), 그것에까지 이 책은 이르지 못한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자신의 선명한 주제의식을 드러내었다기 보다는 니힐리즘을 둘러싼 니체와 다양한 작가와 학자들의 사례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은 절판되어 구할 수 없는 책이지만, 니힐리즘에 대해 관심있는 독자라면 일독을 권한다. 의외로 책 읽는 속도가 빨랐는데, 저자의 풍부한 인용과 깔끔한 정리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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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hur Golden의 <<Memoirs of a Geisha>>(Vintage)를 읽다가 옮겨적는다. 회상으로 넘어가는 부분이 인상적이다(영어로 읽어서 그럴 지도 모르겠다). 



Long before midnight, Pumpkin and the two elderly maids were sound asleep on their futons only a meter or so away on the wood floor of the entrance hall; but I had to go on kneeling there, struggling to stay awake until sometimes as late as two o'clock in the morning. Granny's room was nearby, and sh slept with her light on and her door opened a crack. The bar of light that fell across my empty futon made me think of a day, not long before Satsu and I were taken away from our village, when I'd peered into the back room of our house to see my mother asleep there. My father had draped fishing nets across the paper screens to darken the room, but it looked so gloomy I decided to open one of the windows; and when I did, a strip of bright sunlight fell across my mother's futon and showed her hand so pale and bony. To see the yellow light streaming from Granny's room onto my futon......I had to wonder if my mother was still alive. We were so much alike, I felt sure I would have known if she'd died; but of course. I'd had no sign one way or the other. 

- p.76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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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한국이 열광할 세계트렌드

KOTRA(지음), 알키 



막상 책을 읽어보면 열광할 것까진 없어 보이는데, 약간 오버한 제목이랄까. 하지만 주목할 만한 내용임에 분명하다. 몇몇 사례는 이미 국내에 기사화된 것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내 흥미를 끌어당겼던 사례 중의 하나였던 유글레나. 학창시절 생물 시간에 식물이면서 동시에 동물인 유글레나에 대해선 배운 적이 기억날 것이다. 그런데 이 녀석이 슈퍼 푸드라니. 또한 바이오연료의 원료로도 주목받고 있다고 한다. 실은 많은 학자들이 오래 전부터 유글레나의 이러한 가치에 대해 알고 있었고 시장성을 확보하기 위한 배양 기술에 매달렸다고 한다. 하지만 끝내 시장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배양 기술을 개발하지 못했고 포기하였는데, 이 배양 기술을 일본유글레나가 개발하여 시장에 진출한 것이다. 아래는 유글레나 소개 영상이며, 그 다음은 CF다. 맛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국내에서도 제품을 구할 수 있다. (그러나 라쿠텐 직구로.. ㅡ_ㅡ;; 수입되다가 지금은 파는 곳이 없는 듯...)  





그 다음 흥미로운 것은 EMS 운동법이었다. 독일에는 꽤 많은 이들이 이 운동법으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지만, 국내에는 아는 사람들은 알고 모르는 사람들은 모르는 운동법이랄까. 막상 검색해보면, EMS(Electrical muscle stimulation) 트레이닝 공간이 한국에도 꽤 있다는 걸 알 수 있지만, 아직 대중화된 것은 아닌 듯 싶다. 이 운동법은 몸에 낮은 주파수의 전류를 흘려보내 근육을 수축시킨 상태에서 운동을 실시해 운동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전기가 흐르는 바디 슈트를 입고 운동해야 한다. 체험기는 http://www.monsterzym.com/knowledge_training/2139476 참조하시길. 


그 외 전 세계의 다양하고 흥미로운 비즈니스 사례들이 소개되고 있다. 일부는 알고 있는 것이거나 이미 한국에 소개된 것이고, 일부는 아직 소개되지 않았거나 준비 중일 수도 있겠다. 이 책의 장점은 전 세계 사람들이 무엇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가를 쭉 훑어볼 수 있다고 할까. 그렇게 조망하면서 우리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될 지도 모르겠구나. 먹는 것에 대한 관심이나 애완동물, 나만을 위한 생활, 디톡스, 건강, 휴식 등 많은 것들이 우리 일상 속에서 스며들어 우리 삶을 보다 건강하게 만들기 위한 것들이 대부분이니..

 

다만, 전 세계 KOTRA 주재원들이 그 지역에서 각광받거나 유행하고 있는 최신 트렌드를 모아 소개한 대중적이며 흥미로운 책이지만, 하나하나 소재나 주제에 대해 깊이 있는 분석이나 소개가 부족하다는 점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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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된 자가 성공한다

데이비드 알렌David Allen (지음), 고희정(옮김), 청림출판 



상식은 말처럼 쉽지 않다. (213쪽)


애초에 일하는 방법 따위엔 관심 없었다. 일을 성실하면 그 뿐이라고 여긴다. 특히 한국에서는. 그래서 야근 문화가 일반화되어 있고 정해진 시간 내에 빨리 끝내는 것이 아니라 딱 정해진 시간만에 끝내거나 약간 오버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여긴다. 이유는 단순하다. 일을 빨리 끝내면 다른 일이 밀려들기 때문이다. 일을 잘 한다는 건 조직 내에서 고역이다. 일을 잘 한다고 해서 승진의 기회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도리어 알 수 없는 질투와 질시의 대상이 되기 일쑤다. 그리고 하지 않아도 될 상사의 일을 맡기도 하고, 상사가 한 일로 보고 된다. 상황이 이러니, 생산성 도구 같은 것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데이비드 알렌이 가진 세계적인 명성에 비해 한국에서 다소 초라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은 데이비드 알렌이 2003년에 쓴 <<Ready for Anything>>의 번역이다. '생산적인 삶을 위한 52가지 원칙'(52 Productivity Principles for Getting Things Done)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데이비드 알렌의, GTD로 잘 알려진 'Getting Things Done'이라는 방법론에 대한 원칙들을 설명하고 있다. 


책이 딱히 재미있는 건 아니다. 도리어 딱딱하고 원론적이며, 종종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실천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생산성의 극대화란 가구, 고속도로, 오락거리 등 그 어떤 것이든 최소한의 노력으로 만들어낸다는 의미이다. (5쪽) 


실제 우리들은 일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이는 회사 내에서의 일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일까지도 포함된다. 이 때 GTD같은 방법론을 습관화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차이는 현저해진다. GTD 홈페이지에 Getting Things Done 방법론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내리고 있다. 


GTD is a total work-life management system that transforms overwhelm into an integrated system of stress-free productivity. 

(http://gettingthingsdone.com/)


이 문장에서 주목하고 싶은 단어가 있다면, 그건 'stress-free'(스트레스없는)가 될 것이다. 일이 제대로 정리되어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그 결과까지 예측할 수 있다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현대 경영에서 불확실성 경영이나 시나리오 경영이 주목받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일하기의 차원에서까지 불확실성을 적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도리어 개인적 차원에서 불확실성을 어떻게 제거해나가느냐가 핵심이 될 것이다. 


GTD의 다섯 단계는 이런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일하기의 생산성을 높이며 일상의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론을 마치 오래된 습관처럼 익숙해지기 어렵다는 것만 알아둔다면 말이다. 실은 나도 이런 업무 처리와 관련된 책을 읽었지만, 습관처럼 내 것으로 만드는 건 참 쉽지 않았고 몇 달만 방심해도 금방 잊혀진다. 그러고 보니, 이런 유형의 책을 읽은 것도 참 오래되었음을 리뷰를 쓰면서 알게 되었으니. 


아래는 GTD의 다섯 단계다. 데이비드 알렌의 책은, 이 책말고 한 권 더 번역되어 있으니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그 외 업무처리와 관련해서는 스테파니 윈스턴의 <<성공하는 CEO들의 일하는 방법>>도 꽤 좋은 책이다. 추천한다. 



1. 수집 Collect 

- 주의를 끄는 모든 것을 끄집어 내어 새지 않는 통에 넣는다. 수집함, 이메일, 공책, 음성메일 등이 대상이다. 


2. 가공 Process 

- 수집한 항목들을 가공한다. - 모아진 일거리들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 실행할 수 없는 것이면 던져 버리거나 나중에 실행할 수 있는 것으로 분류해 놓는다. 


3. 조직화 Organize 

- 가공한 결과를 검토와 정정이 가능한 범주에 적절히 그룹화하여 넣는다. 4가지 주요 범주는 다음과 같다. 프로젝트 목록, 달력, 다음 행동목록, 대기목록


4. 검토 Review 

- 달력과 행동목록은 매일, 혹은 행동들 중 하나를 실행할 때마다 검토한다. 

- 일주일 단위로 시스템을 청소하고 업데이트하고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습관을 갖는다. 


5. 실행 Do

-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기조하여 행동을 선택한다. 즉 일의 정황에 따라 쓸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 우선 순위를 고려한다. 


그리고 쉐아르님의 "GTD(Getting Thing Done) 따라잡기"라는 글도 추천한다. 


그 외 데이비드 알렌과 GTD 웹사이트 링크이다. 

데이비드 알렌: https://en.wikipedia.org/wiki/David_Allen_(author) 

데이비드 알렌의 GTD 웹사이트 http://gettingthingsdone.com/



관련 추천 도서. (지금도 서점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절판이다. ㅜㅜ)

2008/01/18 - [책들의 우주/비즈] - 성공하는 CEO들의 일하는 방법, 스테파니 윈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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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훈의 대담한 경제

박종훈(지음), 21세기북스 


몇 해 전에 나온 책을 이제서야 다 읽는다. 이미 칼럼을 통해 박종훈 기자의 통찰력 있는 글들을 읽었던 터라, 책을 읽는 과정은 마치 복습하는 느낌이었다. 

(칼럼 주소: http://news.kbs.co.kr/news/list.do?mcd=0849#1)


유명세를 치른 책이라,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테고, 읽은 사람들은 다 읽었을 것이다. 정작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들은 내가 아니라 저 쪽에 있는 사람들인데. 


흥미로운 것들은 경제전문기자(실은 박종훈 기자만 말하겠는가!)가 지적하는 사항들과는 정반대로 국가 정책이 수립되고 실행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국가에서 홍보하고 대단한 성과를 내는 것처럼 포장하는 여러(더 많겠지만) 잘못된 정책들에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심지어는 그런 정책들의 잘못을 지적하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다. 지난 대선에 박근혜 대신 문재인을 지지한 이들이 마치 이해할 수 없는 이들에게 포위된 섬처럼 있었듯이. 


아직도 마음의 상처처럼 남아있는 기억 하나가 있는데, 이십 대 중반 어느 공부 모임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일반 대중들은 무식하거나 무관심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된다(?)는 식의 말을 했다가, 그 무슨 시대착오적인 계몽주의라는 핀잔을 들었던 적이 있었다. 나는 그 때 계몽주의가 잘못된 것인가, 왜 시대착오적인가, 한참 생각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고, 실은 지금도 잘 모르겠다.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없는 정도인 사람이 대통령으로 앉혀놓고 바람직한 미래를 고려하지 않은 기획들을 버젓이 경제 정책이네, 교육 정책이네, 문화 정책이네 하면서 수립하여 실행하면서 그것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이들은 모두 좌파나 빨갱이, 종북으로 몰아붙이는 과정을 보면서도, 사람들이 꿈쩍하지 않는 모습에 나는 절망했다, 끔찍했다. 결국 최순실 사태를 통해 사람들은 거리로 나서긴 했지만, 스스로의 지적 능력으로는 그들이 절벽 앞에 서서 떨어질 날만 기다리는 시한부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 카카오톡을 통해 전파되는 가짜 뉴스들을 진짜라고 믿는, 나이든 이들을 보면 아 나이가 든다는 건 지혜스러움과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마리오네트가 되는 과정이구나 하는 생각까지 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그들 앞에서 우리가 그들 스스로 깨치길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사람들은 민주적인 촛불 시위를 보면서 희망을 느꼈을 지 모르지만, 나는 그 촛불 맞은 편에 서서 그것을 반대하는 이들을 보며 불안과 공포, 절망을 끊임없이 느낀다. 이런 점에서 이 책도 마찬가지다.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 이 책은, 그렇다고 절망을 이야기하진 않지만,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이 자리가 얼마나 허술하고 취약하며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가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특히 자칭 '보수'라고 이야기하는 이들(내가 볼 때 시대착오적인 수구라고 여겨지지만)이 만든 구호들과 정책들이 얼마나 위험하고 잘못된 것인가를 지적하고 있다. 목차만 한 번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논조를 알 수 있다. 


경제정책 - 정부는 왜 눈 앞에 닥친 위기도 못 보는가?

기업 - 1등만 살아남는 경제는 왜 위험한가?

부동산 - 집, 살 때인가? 팔 때인가?

세금 - 세금은 군대보다 더 무서운 무기다.

빚 - 이미 당신에게는 2,000만원의 빚이 있다

빈부격차 - 아무리 노력해도 부자가 될 수 없는 이유 

복지 - 복지는 분배가 아닌, 성장의 열쇠다

인구 - 인구 감소가 가져올 최악의 경제 불황

청년 - 21세기 가장 소중하고 강력한 자원, 청년 


이 책은 좌파적이거나 마르크스주의적이지 않다. 정치적 지향으로 따지지만 리버럴하고 중도적이라고 할까. 좌파라든가 빨갱이라는 단어에 대한 명확한 정의도 내리지 못하는 이들이(이는 기자(혹은 기레기)도 마찬가지) 그런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대중들을 호도하고 선동하고 있다.(이것도 일종의 계몽주의가 아닌가?)


노인들에게 지급하는 기초연금에 대해선 환호하면서, 기초가 튼튼하지 못한 복지 정책에 대한 포퓰리즘이라는 지적에 동의하는 이들을 보면 만감이 교차하는 건 어쩔 수 없다. 박종훈 기자는 사회안전망이 한 나라에 끼치는 긍정적 영향에 대해 서술한다. 


이 때문에 촘촘하게 잘 짜인 사회 안전망은 그 혜택을 보는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경제 전체를 불황에서 지키는 중요한 버팀목이 된다. 이 같은 사회안전망의 역할을 바로 '경기 자동안정화 기능Automatic Stabilizer'이라고 한다. 경기 자동안정화 기능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경기 불황이나 호황이 왔을 때 정부가 임의로 재정 지출이나 세율을 변경하지 않더라도 자동으로 작동해 경기 변동 폭을 줄여주기 때문이다. (211쪽) 


이처럼 사회안전망의 경기 부양 효과가 훨씬 강력하지만, 부패한 국가는 인위적인 건설 경기 부양책을 더 선호하기 마련이다. 자동화된 사회 안전망과 달리, 인위적인 경기 부양책에는 힘 있는 정치인들이나 고위 관료들이 쉽게 개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213쪽)


몇 해 전부터 서부 유럽 몇몇 국가에서 논의되거나 시범적으로 실행되는 기본 소득 제도도 이런 사회안전망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지만, 한국은 그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한 이들이 대부분이다. 복지의 차원으로만 접근할 것이 아니라, 나라의 경제 시스템을 보다 안정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경제에 대한 뼈 아픈 지적들로 채워진 이 책은 웹사이트에 게재될 때부터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다양한 채널로 공유되었다. 대기업에 유리하게 설계된 조세 제도(뿐만 아니라 그냥 경제 시스템 자체가 그들을 위해 설계되어 있다)는 이 나라 기업 생태계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지만, 그것을 그 누구도 고치려 하지 않는다. 김종인이 끊임없이 선거 때만 되면 나타나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이유는 정치적으로는 (권위적) 보수주의자이지만, 경제적으로는 상당히 진보적이기 때문이다. 실은 진보적이라는 표현 대신 합리적이라는 표현이 적당할 것이다. 그가 보기에도 현재 경제 시스템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부유층에 유리한 조세 정책은 우리나라를 상속형 경제로 만드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나는 유류세와 담뱃세같은 간접세가 전체 세수의 절반이나 되는 반면, 소득세 비중은 낮기 때문에 조세 정책으로 인한 빈부 격차 완화 효과도 거의 없다. (171쪽) 


낙수효과가 실제로는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일반 대중들을 빼곤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단어가 먹힌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자본주의의 핵심은 결국 공정한 경쟁 시스템에 있다. 아무리 무능력해도 부모 잘 만난 덕에 세금 한 푼 안 내고 부모의 부를 고스란히 물려받을 수 있다면, 누가 치열하게 노력하며 발전을 도모하겠는가? (109쪽) 


한동안 IT에서 '디지털 격차Digital Divide'가 화두였는데,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정보격차Information Divide'도 꽤 심각한 수준이다. 문맹률은 낮지만, 문해력도 상당히 낮다는 점에서 정보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세상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들은 계속 줄어들 것이다. 특히 빠른 온라인화는 제대로 된 정보를 접할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하고 있는 건 아닐까. (참고: 한국인의 문해력은 왜 세계 꼴찌인가? http://ppss.kr/archives/66923


이런 상황에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마 그 시작은 이 절박한 경제 상황에 대한 이해가 되지 않을까. 이 점에서 <<박종훈의 대담한 경제>>는 현재 시점에서 꽤 유용하고 비판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줄 최고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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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이다

조지수(지음), 지혜정원



어쩌면 나도, 이 책도, 이 세상도 유감일지도 모르겠구나. 다행스럽게도 책읽기는, 늘 그렇듯이 지루하지 않고 정신없이 이리저리 밀리는 일상을 견디게 하는 약이 되었다. 하지만 책 읽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나는 이제 책 읽는 사람들을 만날 일 조차 없이 사무실과 집만 오간다. 주말이면 의무적으로 가족나들이를 하고 온전하게 나를 위한 시간 따위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한참 고민하다가 이젠 그런 고민마저 사치스럽다고 여기게 되는 건 그만큼 미래가 불안하고 현재가 아픈 탓이다. 


근대는 "주체적 인간"이라는 이념으로 중세를 벗어났다. 현대는 "가면의 인간"에 의해 근대를 극복한다. 우리의 새로운 삶은 가면에 의해 운명의 노예라는 비극을 극복한다. 가면이 새로운 주체적 운명이다. (26쪽) 


Masks Mocking Death

James Ensor 

100.3 x 81.3 cm, Oil on canvas

1888, Staatsgalerie Stuttgart, Germany 



'가면'은 현대를 특징짓는 몇 되지 않는 단어라 생각하지만, 학자들은 '가면'이라는 단어 대신 '정체성(identity)'를 사용한다. 시뮬라크르와 정체성이 결합되면 흥미로운 주제가 될 것이다. 이 결합만으로도 충분히 비극적인 전망을 가능하게 하지만, 비극적이라 여기는 건 나같은 근대주의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일지도. 


거짓은 삶의 본래적인 양상이다. 문명과 문화는 허영과 기만을 자양분으로 성장한다. (26쪽) 


이십대 후반, 태어나 처음으로 자살을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내 생의 모토를 '진정성'으로 삼았을 때, 나는 현대 문명과 문화로부터 멀어진 것이다. 그 이후 내 마음대로 살았으니, 나에게 충실하고자 노력했다. 철이 없었다. 세계는 벽으로 둘러쳐져 있었으나, 나에게 벽이 없었다. 하지만 가면을 집어드는 순간, 벽에 손이 닿는 순간, 나는 사라지고 외부세계만 눈에 보였다. 


내적 사색과 사회적 조회가 좋은 삶의 조건이다. (135쪽) 


나는 내적 사색만 추구하는 인간이다. 사회적 조화? 그걸 잊고 지냈다. 그러다가 뒤늦게 사회적 조화를 찾으려고 하니, 마치 수영을 하지 못하는 노인이 강을 건너기 위해 강물에 뛰어드는 꼴이라고 할까. 한 마디로 '찌질이'인 셈이다. 이 책의 부제가 '세상의 모든 찌질이들에게 바치는 헛소리 모음집'이니, 이 글도, 이 책도 헛소리의 한 종류로 구분될 것이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하긴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에밀 시오랑이 자신의 태어남을 저주하였듯이, 나도 내 존재 자체를 저주하게 될까. 모를 일이다. 



* 관련 리뷰 * 

2003/01/25 - [책들의 우주/문학] - 내 생일날의 고독, 에밀 시오랑

2008/12/24 - [책들의 우주/문학] - 나스타샤, 조지수

2015/02/28 - [책들의 우주/문학] - 원 맨즈 독, 조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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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에 빠져 한국사를 바라보다 

심재훈(지음), 푸른역사 



나라가 시끄럽다. 하긴 시끄럽지 않았던 적이 언제였던가. 어쩌면 이 나라는 그 태생부터 시끄러웠는지도 모르겠다. 아시아 변방에 있는 작은 나라. 다행스럽게도 중국 문화권 아래에서도 독자적인 언어와 삶의 풍속을 가진 나라. 이 정도만으로도 제법 괜찮아 보이는데, 이건 내 생각일 뿐이다. 더구나 이 책이 식자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무분별한 민족주의적 경향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한국사 연구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당연한 지적을 했는데도). 


하지만 이 내용은 책 후반부에 짧게 언급될 뿐, 나머지 대부분은 심재훈 교수가 어떻게 공부했고 유학 생활은 어떠했으며, 고대 중국사 연구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저자의 산문들 위주다. 그리고 미국 대학사회와 한국 대학 사회를 이야기하며 비주류 학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 책에 대한 소개는 대체로 전문적인 역사서로 오해하게 만들지만, 실은 저자가 페이스북을 통해 이런저런 자신의 이야기를 쓴 연재글을 모아낸, 일종의 수필집 비슷하다고 할까. 


글을 대체로 평이하고 쉽고 재미있다. 가볍게 읽을 수 있다. (나는 출퇴근을 하며 이 책을 읽었다) 책 후반부의 자신의 연구에 대한 소개나 최근 한국의 고대 상고사 연구에 대한 저자의 의견을 피력하는 부분이 상대적으로 딱딱하게 여겨질 지 모르나, 이 부분도 일반적인 인문학 서적에 비한다면 평이하다. 하지만 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라든가, 식민지 시대에 대한 해석이나, 기자조선이나 낙랑군 위치 등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에 대해 어쩔 수 없이 시선이 집중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대해선 관련 서평이나 기사를 아래 붙여두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때 나도 학자이고 싶은 꿈을 꾸었지만, 가질 않길 잘했다는 위안과 함께, 학자가 되는 것에도 일종의 운이 따라주어야 한다는 걸 느꼈다. 심재훈 교수의 유학시절이 부럽기도 했으나, 그만큼 고생스러웠을 걸 생각하니, 마냥 부러운 것만은 아니었다. 요즘은 해외 유수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수상을 하고 강의 경력이 있어도 국내 대학 교수로 임용되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한다. 그러니 인문학자를 직업으로 한다는 건 무모하다고 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가끔 해외 대학에서 한국인 여교수가 많은 이유가 궁금했는데, 한국 대학 사회의 정치적 폐쇄성 탓임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인문학 분야에 좋은 학자들이 늘어나고 그들의 연구성과들에 대한 활발한 출판과 함께 대중들과의 호흡이 많아져야 된다고 여기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 어려워진다는 걸 이 책을 통해서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역사에 대해선 대중의 관심이 높지만, 대부분 대중 추수주의일 뿐이다. 이는 역사 뿐만 아니라 인문학 전반의 문제이기도 하다. 역사적 사료는 그대로이나, 이를 둘러싼 해석과 의미는 달라질 수 있다. 역사도 시대에 따라 다르게 읽히고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래서 어떤 사실을 익히기 보다는 어떤 태도를 갖추게 하는 것이 인문학 본연의 가치가 아닐까 생각하지만, 정말 어려운 일임을 아는 까닭에 쉽게 꺼내기도 어렵다. 


앞서 말했지만, 이 책은 저자가 페이스북에 연재한 글들을 모은 책이며, 역사학에 대한 과감한 주장을 하기 보다는 역사 연구란 어떤 것이며 고대사 연구의 어려움, 그리고 한국사 연구가 가지는 위험한 지점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를 소재로 한 일종의 산문집이라 할 수 있다. 


역사에 관심있는 모든 이들에게 권할 만 하다. 특히 한국사에 관심많은 이들에겐 심재훈 교수의 시각에서 많은 점들을 깨우칠 수 있을 듯 싶다. 

 


‘국뽕’ 역사야 물럿거라 - [리뷰] 심재훈 '고대 중국에 빠져 한국사를 바라보다'


심재훈 단국대 교수, “과장된 상고사서 한민족 자부심? 이젠 달라져야”


‘사이비 역사학’의 현황과 한국사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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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디컬 뮤지엄 - 동시대 미술관에서 무엇이 '동시대적'인가? 

클래어 비숍 Claire Bishop (지음), 구정연 외 (옮김), 현실문화 

(저자의  website: http://clairebishopresearch.blogspot.kr/)



지난 가을, 키아프(Korea International Art Fair)를 갔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달은, 차고, 이지러진다>> 전을 관람했다. 이 두 이벤트의 묘한 대비는 무척 흥미로웠고 나에게 고민거리를 던져주었지만, 그 뿐이었다. 키아프만 간 사람들과 국립현대미술관에만 간 사람들 사이의, 두 경향의 현대미술전시가 보여주는 간극이 메워지지 않을 듯 느껴졌다면, 심한 비약일까. 아트페어와 미술관의 전시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여기에서 같은 미술관 공간이라도 비엔날레같은 행사라면, 또 달라진다. 


이를테면 조르조 아감벤은 동시대를 시간적 파열temporal rupture에 근거한 상태로 상정하고, 이렇게 쓰고 있다. 동시대적임contemporariness은 "시차와 시대착오를 통해 시대에 들러붙음으로써 시대와 맺는 관계이다." 그리고 이같은 시기창조나 '시간의 차이'에 의해서만 자신이 사는 시대를 진정하게 응시할 수 있다. 그는 동시대적임을 "시대의 어둠에 시선을 고정하고" "펑크낼 수 밖에 없는 약속시간을 지키는 것"으로 묘사했다. 시대착오는 또한 이 문제와 씨름하는 몇 안 되는 미술사가 중의 한 명인 테리 스미스의 독해에도 스며들어 있다. 그는 동시대를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담론 모두의 반대편에 놓아야 한다고 설득력 있게 주장해 왔는데, 동시대가 이율배반과 비동시성의 특징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즉 전 지구적 통신 시스템의 확산과 소위 시장 논리의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동시적이고 양립할 수 없는 상이한 근대성의 공존, 여전히 진행 중인 사회적 불평등과 차이가 지속하고 있는 현상이 그것이라는 것이다.(30쪽 ~ 31쪽)



클레어 비숍은 동시대 미술이라는 단어에 주목하면서 '동시대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설명한다. 그리고 동시대 미술을 전시하는 공간으로서의 미술관을 이야기하고 그 역할에 주목한다. 


그들은 1퍼센트의 이름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현재 혹은 과거에) 주변화되고 열외로 취급되고 억압받은 구성원들의 관심사와 역사를 대변하고자 한다. [물론] 이 미술관들이 예술을 역사 일반에 예속시킨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보다는 시각생산물의 세계를 동원하여 예술이 역사의 바른 편에 서야 하는 필연성을 이끌어내고자 한다는 것이다. (11쪽) 


그리고 세 개의 미술관을 소개한다. 네덜란드 에이트호번의 반 아베 미술관, 마드리드의 레이나소피아 미술관, 슬로베니아 류블랴나의 메텔코바 동시대 미술관. 


이처럼 역사를 현재 지향적으로 접근하는 일은, 미래를 보는 시선으로 오늘을 이해하게 해주고, 국가적 자부심 또는 헤게모니가 아닌, 창조적인 질문과 문제 제기의 이름으로 말하는 능동적이고 역사적인 행위자로서 미술관을 다시 상상하게 한다. (...) 결과적으로 이 제안은 예술작품과 다큐멘터리 자료, 사본, 복원물을 끊임없이 병치함으로써 오브제를 탈물신화한다. 동시대적인 것은 시대구분이나 담론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역사 시기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 혹은 실천이 된다. (97쪽) 


미술이론 전문서적인 탓에 일반 독자에게 권할 성격의 책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우리는 미술관의 존재와 위상, 그리고 그 가치와 필요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대부분 공적 기금을 통해 운영되는 미술관들은 자주 논란에 휩싸인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이나 서울시립미술관이 그 예가 될 수 있겠다. 그리고 그 반대편의 리움미술관이나 일민미술관, 혹은 아트선재센터 등과 같이 기업들이 후원하는 미술관을 보면, 우리는 많은 것들을 고민해야만 할 것이다. 


실은 지방의 국공립미술관의 상황은 더 열악하다고 해야 한다. 이 점에서 열악하다는 말은 여러 뜻을 포함하고 있는데, 전시 기획도 어려울 뿐더러 막상 오픈하면 관람객들도 많지 않다. 아마 국공립미술관에 대한 예산 삭감 문제는 비단 우리나라 뿐 아니라 많은 서방 국가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점에서 클레어 비숍의 책은 동시대성이라는 관점에서 미술관에 대해 묻고 있지만, 이 질문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의 미술관에 대해 전반적으로 다시 묻게 된다. 


미술관계자에겐 일독을 권한다.  (그런데 현대미술이론 서적은 다 왜 이렇게 단어들을 어렵게 사용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철학책보다 더 어렵다고 느끼는 건 나만 그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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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The Sense of An Ending 

줄리언 반스(지음), 최세희(옮김), 다산책방



나는 우리 모두가 이러저러하게 상처받게 마련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80쪽) 



살아가면서 과거를 끄집어내는 일이 얼마나 될까. 삶은 고통스러워지고, 사랑은 이미 떠났으며, 매일매일 반복되는 무의미한 일상 속에서 이 세상은 한때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빛깔을 잃어버렸음을. 감미로운 허위만이 우리 곁에 남아 우리 겉을 향기롭게 감싸며 근사하게 보이게 만들지만, 그것은 언젠간 밝혀질 시한부 비밀같은 것. 그럴 때 그 과거는, 어쩌면 우리의 현재를 만들어낸 고통의 근원일까, 아니면 도망가고 싶은 이 세상 밖 어떤 곳일까. 


"토니, 이제 당신은 혼자야."라고 이혼한 아내 마거릿은 전화 속에서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아내의 목소리가 전화 속에서 사라져 버리지만, 토니는 별 반응이 없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 자신이나 아내 마거릿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마치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 듯, 자신의 인생도 그런 궤적을 그리며 평범하며, 이혼했으나 세상에서 가장 잘 자신을 알고 있는 마거릿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 믿는다, 혹은 착각한다, '우리 부부'라는 단어 속에서.  


늙어버린 토니 앞에 갑자기 등장한 과거는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다. 그저 과거일 뿐이며, 토니 밖에서, 사악한 질투심에 무너졌던 토니의 영향력 아래에서 어떤 우연이 만들어졌을 뿐, 토니는 토니이고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마치 다른 우주에 존재하는, 서로 만날 수 없는 행성들처럼. 


인간은 생의 종말을 향해 간다. 아니다, 생 자체가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 그 생에서 가능한 모든 변화의 닫힘을 향해, 우리는 기나긴 휴지기를 부여받게 된다. 질문을 던질 시간적 여유를. 그 밖에 내가 잘못한 것은 무엇이었나? (255쪽) 


과거 속에서 젊은 베로니카는 토니를 버렸고, 에이드리언은 그의 친구 토니를 버린 베로니카와 사랑을 나눈다. 그래서 뭘? 에이드리언은 질투심으로 눈이 먼 토니의 사악한 언어 앞에서 무너졌을까. 아니면 ... 


1부는 젊은 토니를, 2부는 늙은 토니가 화자로 나온다. 그리고 2부는 베로니카의 어머니 사라 포드 부인의 유언장과 자살한 에이드리언의 일기가 실마리가 되어, 토니의 기억을 새로 만들며, 인생의, 사소하지만 비극적인 우연에 대해 이야기한다.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이야기는 쉴새 없이 우리의 마음을 때리지만, 결말을 짐작하긴 쉽지 않다.  


1부의 토니와 2부의 토니는 서로 경쟁하며 결말을 향해간다. 결국 과거는 편집되고 윤색되고 변경된다. 과거는 현재에서만 해석 가능한 어떤 이야기일 뿐, 과거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존재한다면 그건 아무 의미도 없다. 서랍에 깊숙이 숨겨져 있는 어둠 속의 사진과 같은 것. 


의미는 해석되지 않는다. 이 소설은 갑자기 등장한 과거의 숨겨진 이야기를 끝에 가서 드러내지만, 그리고 그 이야기를 향해 모든 것들이 구성되어 있지만, 에이드리언의 자살을 설명하지 못한다. 실은 에이드리언의 자살이 도리어 살아남은 토니의 이기적인 평범함을 설명하게 되는 기묘한 이야기 구조는 도리어 악의적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지독히 냉소적이다. 


우리는 타인에게 관심없는 토니들이고 늘 혼자였고 앞으로도 혼자일 토니다. 사랑마저도 자기를 합리화해야 하는 것이고 그 사랑을 잃어버렸을 때조차 자신의 문제가 아닌 그/그녀의 문제로 환원시킨다. 이래저래 상처 받기 마련이라고 여기지만, 상처마저 자신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온 것이라 믿는다, 이러저러하게. 


마거릿마저 토니를 향해 '당신은 혼자야'라고 말했을 때,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늙은 베로니카가 '아직도 전혀 감을 못 잡는구나, 그렇지? 넌 늘 그랬어,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그러니 그냥 포기하고 살지그래'라며 토니를 질책했을 때조차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소설이 끝날 때까지. 


거기엔 축적이 있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 혼란이 있다. 거래한 혼란이 있다.(255쪽) 


소설은 이 마지막 문장으로 끝나지만, 책임은 혼란 속에서 사라져버리고 사람들은 저 마다의 상처를 가진 채 홀로 서 있을 것임을 예감하게 한다. 시간은 한 개인의 삶에 무신경하고 나는 사랑하는 너에게 관심이 있으나, 끝내 너를 알지 못할 것이다. 너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신비이니, 나는 너를 알려고 하지 않을 것이며 알려고 하는 모든 시도는 실패로 끝날 것이다. 에이드리언만이 과거 속에서 현재를 예감하고 미래에 절망했을 뿐이다. 토니의 내일에 대해 상상하지 말자. 그는 적당히 비관적으로 변할 테지만, 그렇다고 그의 삶이 급격한 변화를 겪거나 아픔을 겪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이 점에선 베로니카의 견해가 옳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고 혼자였던 어떤 이가 갑자기 우리가 되지 못한다. '우리 부부'라는 단어만큼 어색한 표현도 없을 텐데, 토니는 ... 그래서 나는 참 악의적이다라고 적는 것이다. 


할아버지 토니는 20대 토니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베로니카를 향해서도, 에이드리언을 향해서도, 마거릿을 향해서도. 결국 혼자인 토니는, 혼자 거리를 걸으면서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이었나' 스스로에게 묻겠지만, 금방 잊고 말 것이다. 





* 2017년 영화로도 만들어질 예정이다. 

The Sense of an Ending : http://www.imdb.com/title/tt4827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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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양음악순례

서경식(지음), 한승동(옮김), 창비 



한국과 일본은 참 멀리 있구나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서경식 교수의 유년시절과 내 유년시절을 비교해 보며, 문화적 토양이 이토록 차이 났을까 싶었다, 일본과 한국이. 


내가 살았던 시골, 혹은 지방 소도시의 유년은, 쓸쓸한 오후의 먼지 묻은 햇살과 수평선이 보이지 않는 바다 풍경이 전부였다. 책 속에서 이야기되었던 윤이상 선생의 통영에서의 유년 시절은 내가 겪었던 유년 시절과도 달랐다. 그가 통영에서 살았던 당시(20세기 중반) 보고 들었을 전통 문화라는 것도 없었고 그렇다고 서양 신식 문화랄 것도 내 유년시절에는 없었다. 전통 문화와 신식 문화 사이에서 길게 획일화된 공교육과 책을 읽으면 안 되는 자율학습과 텔레비전, 라디오, 팝송이 있었다(이것들이 신식문화일지도 모르겠으나). 어쩌면 우리 세대는 진짜 팝 문화를 제대로 경험하고 자라났지만, 그게 과연 좋을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끔 학교 음악 시간에 클래식음악을 듣기도 한 것같으나, 그건 제대로 된 감상이라기보다는 꿈을 잃어가던 음악 선생님의 목소리 끝에 묻은 허전함과 마주하는 것이었다.


나에게 클래식 음악에 대해서 묻는다면, 내가 답할 수 있는 건 얼마 되지 않는다. 대학 시절 재즈 음악을 즐겨 듣다가, 클래식 음악을 듣기 시작한 건 서른 초반이었으니, 시간 상으로 불과 십년 남짓이고 이것도 그저 일년에 몇 장의 음반을 사는 것이 전부였으니, 믿을 수 없다. 지금은 몇몇 작곡가를 알고 그 중 몇몇은 아주 선호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클래식음악은 나와 꽤 멀리 있었던 존재였다. 그러니 뒤늦게 빠져든 이 취미를, 유년 시절부터 접해온 서경식 교수의 유년 시절은 너무 부러웠다. 그리고 지금도 유럽으로 연주회에 갈 수 있다는 여유는, 아마 그들 세대만이 가지는 어떤 것이 아닐까. '시간이 지날수록 나아진다'는 건 그저 과거의 통념일 뿐, 21세기 초에 어울리는 문구는 아니다. 문화의 빈곤과 그 격차는 더 심해지고 있다. 이제 원하는 음악을 유튜브와 같은 온라인 채널을 통해 들을 수 있지만, 접근의 편리함은 그 음악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책을 통해 나는, 무엇보다 윤이상 선생에 대해 알게 되었다. 서경식 교수의 개인적 삶 - 그는 한국 현대 정치로 인한 비극을 고스란히 안고 살아왔다 - 속에서 묻어나오는 고통과 회한, 그리고 그것을 이겨내기 위한 분투가 글 사이로 묻어나왔고 동시에 미래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으면서 세상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는 모습을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두 형, 서승서준식을 구하기 위해 그는 윤이상 선생을 여러 차례 만났지만, 윤이상 선생도 민주화된 고국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먼 타국에서 생을 마감했으니, ... 


<<나의 서양음악순례>>는 서양 음악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순례길일지도 모르겠다. 모차르트, 슈베르트, 말러를 지나 윤이상으로 이어지고 일본인 아내와 한국이 서로 만난다. 아픔은 음악이 되고 어느 새 아픔이 아문 자리만으로도 닥쳐올 불안에 대한 작은 위안이 된다. 책은 가볍지 않지만, 음악은 봄바람처럼 가볍게 날아와 우리 주위를 따뜻하게 비출 것이다. 


내년에는 루이제 린저가 쓴 <<상처입은 용>>을 구해 읽어야겠다. 윤이상 선생의 음악들도 챙겨 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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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의 녹색노트

구광렬 엮고 옮김, 문학동네 



음유시인 


             니콜라스 기옌 




알갱이가 빽빽한 옥수수

피델 카스트로와 그의 부하들이 

그란마에서 내릴 때,

격정의 바다는

그들이 난폭한 걸음으로 출발하는 걸 본다 

턱수염 없는 근엄한 얼굴,

이마엔 나비들을,

구두엔 수렁, 늪을,

죽음, 군인처럼 노란 유니폼에 미제 총을 한 

죽음은 그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몇몇은 상처를 입고 쓰러졌으며 

몇몇은 목숨을 잃었다 

손가락 수보다 조금 더 많은 수가 

희망과 피로로 다시 영광을 향해 출발했다 

깨어난 길에선 주먹을 움켜쥐고 

양귀비를 따 노래를 불렀다 

칼날은 빛났으며 총은 번쩍거렸다 

마침내 산속으로 먼저 들어간 

피델 카스트로는 병영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산맥에서 내려간다.

평원은 총들의 바다가 될 것이다." 



1967년 10월 9일, 체 게바라 사망 당시 그가 메고 다녔던 홀쭉한 배낭 속에는 색연필로 덧칠이 된 지도 외에 두 권의 비망록과 녹색 노트 한 권이 들어 있었다. 두 권의 비망록은 사후 '체 게바라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돼 호사가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었는데, 나머지 노트 한 권은 시가 빼곡히 적혀 있다는 소문만 무성했을 뿐 40년 간 베일에 싸여 있었다. 하지만 몇 년 전 노트 속의 시 69편이 밝혀졌다. 바로 체 게바라가 좋아했던 네 명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세사르 바예호Cesar Vallejo, 니콜라스 기옌Nicolas Guillen, 레온 펠리페Leon Felipe의 시들이었다. - 6쪽 


번역자인 구광렬 교수는 체 게바라의 노트에 빠졌겠지만, 나는 세사르 바예호 때문에 이 책을 샀다. 


예전, 어느 프랑스 소설에서 '세자르 발레조'로 옮겨진 그를 읽었고 그 페루 시인의 시를 읽고 싶었다. 시간은 흘렀고 기억은 흐릿해지고 시집은 일상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시집을 읽기 시작한 건 몇 년 전부터다. 시의 아름다움을 다시 느끼기 시작했다고 할까. 특히 영미시의 아름다움에 빠졌다. 그리고 잊고 있던 세사르 바예호를 떠올렸다. 혹시 싶어 찾아보았으나, 한 권은 절판되었고 구할 수 있는 건 이 책이 유일했다. 



XV

-<<트릴세>>에서 



세사르 바예호 


그 많은 밤을 함께 보낸 저 모퉁이,

하지만 지금 나, 걷기 위해 앉아 있네.

죽은 연인들의 침대는 누가 빼버렸을까?

아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넌 조금 전 다른 일로 여기 도착했지.

지금은 없구나. 네 곁에서,

네 허벅지 사이에서 밤을 읽고 

알퐁스 도데의 이야기를 읽었건만.

혼동하지 마, 

이 사랑하는 모퉁에서였잖아.


지난 여름날을 생각해,

작고 창백한 얼굴로

이 방 저 방 드나들던 너를.


비 내리는 이 밤, 

우리 둘,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열렸다 닫히는 두 개의 문,

그 사이로 넘나드는 바람,

그리고 그림자 둘. 


혁명가 체 게바라의 안목으로 선택된 네 명의 시인을 우리는 새로, 다시 만난다. 쿠바를 떠나 다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던 남미의 숲 속에서 노트를 꺼내 이 시들을 읽었을 체 게바라를 떠올리면, ... 어떤 시들은 가끔 어두운 하늘의 별빛 같다고 할까.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듯한 지금, 무참하게 내려누르는 일상의 공포, 책임, 무모함 속에서 시집은 작지만 강한 위로가 된다. 특히 파블로 네루다의 시는 너무 아름다워, 소리 내어 읽기도 한다. 


이 겨울의 아침, 언어가 가진 슬픈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쓸쓸한 마음을 잠시 스스로를 잊을 수 있지 않을까. 아무에게나 추천해도 좋을 시집이다. 


** 


2015/03/04 - [책들의 우주/문학] - 죽은 전원시, 세자르 바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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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이란 무엇인가

한스 위르겐 괴르츠(Hans-Jurgen Goertz) 지음, 최대희 옮김, 뿌리와이파리, 2003 



사실 자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반드시 의미를 부여해야만 하며,
사실이란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다. 

- 롤랑 바르트 



미술과 예술의 역사를 공부하긴 했지만, 제대로 배웠다고 여기고 있었다. 미술사든, 예술사든, 그것은 역사학의 한 분과 학문이라는 건 알았지만,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과 역사학 자체에 대한 것과는 다르다는 것, 그리고 역사학, 또는 역사이론에 지식이 없었다는 걸 깨닫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가끔 사람들에게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가 감동적인가'라고 묻곤 한다. 왜냐면 그 작품의 명성과 감동, 혹은 안다는 것과 이해한다는 것, 그리고 공감한다는 건 전적으로 다르다는 걸 알게 하고 싶어서다. 그리고 그런 다음 반 고흐의 <해바라기>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그 작품은 어떤가라고 묻는다. 감동적인가, 다 빈치의 <모나리자>와는 어떤가 하고. 실은 반 고흐의 아무 작품이나 상관없다. 어떻게 하든 확실하게 다 빈치의 <모나리자>보다 반 고흐의 <해바라기>, 아니 그의 다른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 훨씬 감동적일 테니 말이다. 


그리곤 옛날 작품을 보고 감상하기 위해선 '공감적 이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반 고흐는 이런 측면에서 아직 현대적이며, 우리 시대는 반 고흐의 시대에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공감적 이해'란 무얼까? 나는 여기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지만, 이것이 슐라이어마허가 말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해 역사를 공부하긴 했으나, 역사를 공부하는 방식, 사료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식,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 등등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몰랐던 것이다. 


Sunflowers, repetition of the 4th version (yellow background), August 1889.

Van Gogh Museum, Amsterdam


슐라이어마허에 따르면 우리는 문법적 방법과 심리적 방법의 도움을 받아 이해에 도달한다. (...) 심리적 방법이란 이해하는 사람이 이해의 대상인 사고나 산물을 창출해낸 사람의 입장에 서 보고, 스스로 그 사람이 되어 보는 것을 의미한다. 타인에 대한 파악, 다시 말하면 타인이 그 자신의 사고, 행동, 그 자신에 대해 부여한 의미를 직관, 예감, 추측을 기반으로 파악하는 것이 이해하는 행위의 본래적 의미를 구성한다. 이를 의미에 대한 공감적(sympathetisch) 이해하고 일컫는다. 

- 203쪽 


내가 한창 공부하던 시설, 예술사 선생님께서 '공감적 이해'의 중요성을 자주 강조하셨는데, 굳이 해석학에 대해선 설명하지 않으셨거나 슐라이어마허에 대해선 간단하게 언급하고 지나간 탓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역사학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는 건 사실이니. 


이 책은 역사(책)을 이해하고 이를 글로 풀어내며 당대에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여러 학자들의 이론들을 소개하고 정리한다. 그러면서 역사란 '대상없는 과학'이며 그래서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 해석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야기식 서술의 위험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도 동시에 이야기식 서술을 할 수 밖에 없는 역사책의 한계를 드러낸다. 


"역사가 대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대싱 대상과는 완전히 다른 것, 즉 문제들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만이 역사가의 연구 작업에 방향과 의미를 부여하며 현실과 완성을 제공한다. "

- 포슬러 Otto Vossler, <<의미로서의 역사>> (170쪽에서 재인용) 


이야기식 서술이라는 측면에서, 역사책들 대부분은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율을 따른다(따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저자는 폴 발레리(Paul Valery)의 "아무런 내용도 없고 쓸모도 없는 개념인 '원인'은 성공적인 서술을 망쳐놓는다"라는 글을 인용하면서 역사학에서의 인과율이 가지는 위험성을 말하기도 한다. 왜냐면 하나의 사건은 원인이 보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예 역사는 일종의 예술이며 문학작품이라는 견해를 인용하기도 한다. 역사 서술은 객관성이 아니라 당파성을 가져야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는 의견을 소개하기도 하고. 아마 역사학이 어떤 것인가 알기 위해 이 책만큼 좋은 책도 없을 듯 싶다. 


책의 목차는 아래와 같다. 


역사적 사고의 기원

역사 속의 이성 - 계몽주의

이성 속의 역사 - 역사주의 

역사의 '형태변화' 

계몽주의와 역사주의를 넘어서

대상 없는 과학

사실과 허구 

역사적 해석학

원인과 결과 

객관성과 당파성 

언어, 이야기식 서술, 메타포, 개념

역사적 시간의 문제 


내가 역사에 대해 공부한 것이 뤼시엥 페브르나 페르낭 브로델의 영향 아래에서 이루어 진 것인지 몰라도, 역사에 대한 이해나 고찰에 대해선 페르낭 브로델의 <<필리프 2세 시대의 지중해 연안세계>>(1946)의 인용문이 가장 와 닿았다. 적어도 우리들의 일상은 조각나고 파편화되고 우연적인 사건들의 연속이지만, 길게 보면 하나의 흐름으로 묶을 수 있으며 이런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격심한 열정으로 가득 찬 세계는 우리의 세계와 같은 모든 생동하는 세계처럼 확신에 차 있으며 맹목적이며 역사적 심연에 개의치 않는다. 이러한 세계는 우리가 타고 있는 보트 저 깊숙한 아래에서 도도히 흐르는 물결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우리가 거대한 아무 소리없이 흐르는 물결의 깊이를 알 수 있게 된 이래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물결의 방향을 가늠하는 것은 오로지 긴 시간대를 고찰하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시끌벅적한 사건들도 흔히 순간적인 것, 거대한 운명의 밖으로 드러난 현상에 불과하며, 결국 이러한 운명에 의해서만 설명 가능하다." 

- 페르낭 브로델, <<필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325쪽에서 재인용) 


한동안 나는 왜 사람들이 형편없는 대통령과 정부 여당을 지지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봐도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가 씌여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지했는지, 황당하지만, 그것은 서구 학계에서 말하는 바 정치의 서비스화, 고객중심주의, 탈물질주의와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심정적으로는 알고 있었으나, 이를 설명하긴 어려웠다. 그런데 이 때 아날학파의 시각을 받아들이면 흥미롭게도 어느 정도 설명된다. 아직 한국 사회와 한국인들의 의식, 태도는 후기 조선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불행한 일이지만, 이렇게 스스로 생각하자, 너무 많은 것들이 이해되고 공감되었다. 장기지속이란 이런 것이다. 여기에 대해선 따로 공부해서 한 번 적어볼까 하는데, 잘 될 진 모르겠다. 주말마다 촛불 들고 나가야 되고, 돈벌이도 팍팍하고 힘든 요즘에, 여유롭게 글 쓸 생각이라니 말이다. 


이 책, <<역사학이란 무엇인가>>는 역사책 읽기를 즐기거나 역사를 공부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하게 추천한다. 그만큼 좋은 책이다. 

다시 출간되기를 희망해본다. 




독일 원서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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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적 문학이론의 전개 

(개정판: 맑스주의와 형식, 원제: Marxism and Form)

프레드릭 제임슨 Fredric Jameson (지음),  여홍상, 김영희(옮김), 창작과비평사 



책 뒷 장을 펼쳐보니, 1997년 5쇄라고 적혀있다. 지금 읽어도 쉽지 않은 이 책을 나는 1997년이나 98년 쯤 구입했을 것이다. 아마 인적이 뜸했던 그 대학 도서관 서가에서 꺼내 읽은 아래 문장으로. 


이처럼 벤야민(Walter Benjamin)의 평론들의 한 장마다에서 풍겨나오는 우울 - 사사로운 의기소침, 직업상의 낙담, 국외자의 실의, 정치적 역사적 악몽 앞에서 느끼는 비감 등 - 은 적합한 대상, 즉 종교적 명상에서처럼 거기에서 정신이 자신을 끝까지 응시할 수 있고 그 속에서 심미적인 것에 불과할지라도 순간적인 구원을 발견할 수 있는 어떤 표상이나 이미지를 찾아 과거를 더듬는다. 그리고 발견해낸다 - 30년 전쟁의 독일에서, '19세기의 수도' 빠리에서. 왜냐면 바로끄와 근대의 이 둘 모두가 그 본질상 우의적(allegorical)이어서 우의이론가의 사고과정에 걸맞기 때문인데, 자신을 형상화해줄 외부의 대상을 찾는 비구상화된 의도인 이 사고과정을 그 자체가 이미 '언어 이전'의 우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 73쪽 ~ 74쪽 


그 때, 1990년 후반 문학전공자들의 일부는 발터 벤야민에 빠져 있었다. 아마도 이십 대 후반 이 책에서 유일하게 읽을 수 있었던 챕터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십년 가까이 지난 후인 올 8월부터 읽기 시작해 겨우 다 읽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벤야민은 죽은 채로 우리 옆에 앉아 속삭이고, 나에게 이제 독서란 1시간 이상 지속되기 어려운 일상이 되었고, 회사에서의 시간 이외에 나머지 시간들은 다 조각나 있었다. 길고 조용하게 이어지는 양질의 시간이 나에게 구하기 어려운 일이 되었고, 이 책의 독서 경험은, 최근 내가 읽는 다른 책처럼 조각나 있고 형편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대한 뒤늦은 독서는, 나에게 깊은 후회와 함께 이제서야 읽을 수 있다는 안도감을 갖게 하였다. 종종 어떤 책들은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마치 프루스트의 소설들처럼.  이 책은 나에게 헤겔-마르크스의 이론이 어떻게 문학 이론에 영향을 끼쳤는가를, 다소 얕게 알고 있었던 에른스트 블로흐와 루카치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었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아도르노부터 시작해 마르크스주의적 해석학의 몇 가지 형태라는 2장에선 발터 벤야민, 마르쿠제와 쉴러, 에른스트 블로흐를 다룬 후, 게오르그 루카치, 사르트르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시 말하자면 저자는 헤겔과 마르크스에 영향을 받은, 20세기 전반기 중요하게 여기지는 문예이론가들의 대표적인 저서들을 중심으로 비판적 서술을 전개한 후, 마지막 챕터에서 '변증법적 비평'에 대해 논의하며 책을 끝낸다. 종종 프레드릭 제임슨을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로 오해하기도 하지만, 헤겔-마르크스의 영향 아래서에서  현대 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과 비판을 전개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제임슨의 태도가 잘 드러나는 책들 중의 한 권이며, 앞으로 그가 나아가게 될 어떤 이론적 지향점을 이해하게 해준다. 그 현대문화를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단어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 이 책의 모든 부분들이 중요했지만, 아마 가장 중요한 부분은 마지막 챕터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술작품에 대한 그의 시각을 확실하게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아래 문장처럼. (프레드릭 제임슨을 읽다 보면, 종종 아도르노에 대한 편애같은 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가 연구한 싸르트르가 아니라... )


이제 우리는 상품사회에서 예술작품이 지니는 심원한 소명이 무엇인지 깨닫기 시작한다. 그것은 상품이 되지 않는 것이며 소비되지 않는 것이며 상품적 의미에서 불쾌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원리를 가장 충분히 전개하여 적용한 아도르노의 음악 분석으로 되돌아가도 무방할 터인데, 이 분석은 실제로 그의 여타의 비교적 헤겔적인 실천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저서 가운데 가장 진실로 마르크스주의적인 부분을 이룬다. - 383쪽 


이 책 <<변증법적 문학 이론의 전개>>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책으로 일찍 번역되어 국내 소개되었지만, 제대로 읽히지 못한 책들 중의 한 권이다. 문학이론 서적들이 드물던 시절, 나 또한 이 책에 대한 추천사를 읽지도, 듣지도 못했으니. 더구나 1장 아도르노에 대해 읽기 위해선 현대 음악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하고 그러면서 근현대의 여러 학설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어야 하니, 제대로 읽히지 못했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 일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아도르노의 저서들 중 <<신음악의 철학>>을 선택하여 아도로노의 고급문화주의자적 면모를 드러내면서 동시에서 문화산업에 대한 부정과 함께 그 속에서 작품이 상품이 되지 않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은 이제 열정의 모방이 아니라 음악적 매체를 통하여 무의식에서 나온 신체적 충동들을 위장되지 않은 상태로 기록하는 것이며, 형식의 금기들이란 그러한 충동들을 검열하려 하고 그것들을 합리화하여 이미지로 전환시키려 하는 것이므로, 이런 형식의 금기들에 공격을 가하는 충격들 및 정신적 외상(trauma)들을 위장 없이 기록하는 것이다. 이처럼 쇤베르크의 형식적인 혁신들은 표현된 사물의 변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후자의 새로운 리얼리티가 의식으로 뚫고 나오도록 도와주었다. 최초의 무조 작품들은 정신분석학의 꿈의 기록(transcript)이라는 의미에서 기록이다. ...... 그러나 이러한 표현상 혁명의 상처들은 그림과 음악 모두에서 원본능(id)의 밀사로서 예술가의 의식적인 의지에 저항하는 얼룩과 반점이며, 이들은 표면을 훼손시키고 옛날 이야기의 핏자욱처럼 추후의 의식적인 수정으로 씻어낼 수 없는 것이다. 참된 수난은 그것이 더 이상 예술작품의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표시로서 이것들을 작품 속에 남겨놓았다. 

- 아도르노, <<신음악의 철학 Philosophie der neuen Musik>> 42~43쪽 (40쪽에서 재인용)


문학(이론) 전공자에게 추천하지만, 만만치 않는 책이다. 이 책을 제대로 읽으려면 헤겔의 <<법철학>> 서문이나 <<정신현상학>>, 또는 마르크스의 <<독일이데올로기>> 정도는 읽거나 개론 수준의 이해를 가져야 할 터이고 소개된 여러 문학이론가들에 대해서도 기본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긴 그래도 쉽지 않을 것인데, 끊임없이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아나톨 프랑스도 나오고 페르난도 페소아도 등장한다. 작가 이름 뿐이긴 하지만 말이다. 가끔 이런 문장 - '무조성이란 말하자면 음악의 유명론(唯名論) 같은 것이다' - 이 등장할 때면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책은 흥미진진하고 많은 것들을 새로 읽고 되새길 수 있을 것이다. 


아놀드 쇤베르크, <<구레의 노래>>



기억해둘 만한 인용문들을 옮긴다. 시간이 나면 다시 읽어볼만한 책인데, 그럴 수 있을 지 모르겠구나. 


"따라서 역사가 우리로부터 시간적으로 점차 멀어지거나 우리가 사고 속에서 역사로부터 거리를 두게 되기만 하면 역사는 더이상 내면화될 수 없고 이해가능성을 상실하게 된다. 역사의 이해가능성이란 애당초 잠정적인 내면성에 부속된 단순한 환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 끌로드 레비-스트로스, <<슬픈 열대>> 중에서 (265쪽 재인용) 


"역사란 내가 깨어나려 애쓰는 악몽이다."

- 제임스 조이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 중에서 (302쪽 재인용) 


"문체와 관계를 맺는 것은 역사보다는 생물학이나 과거의 차원이다. 문체는 작가의 '대상'이며 영광이자 감옥이며 고독이다... ... 그 비밀은 작가의 육체에 파묻힌 기억이다. 문체의 암시적인 힘은 말해지지 않은 것이 일종의 언어적 간격으로 남아 있는 회화에서처럼 속도의 현상이 아니라 밀도의 현상이다. 왜냐하면 문체의 비유 속에 거칠거나 부드럽게 조합되어 문체 밑에서 견고하고 깊이있게 지속되는 것은 언어와는 전적으로 다른 한 현실의 단편들이기 때문이다."

- 롤랑 바르트, <<Le Degre zero de l'ecriture>>, 58~59쪽(331쪽 재인용)


"유력한 개개인이 그들의 정신과 성격의 특수한 자질로 인해 사태의 개별적 양상과 일부 특정한 결과를 변화시킬 수는 있지만 사태의 전반적인 추세를 바꿀 수는 없고, 이 추세는 다른 힘들에 의해 결정된다."

- 쁠레하노프, <<역사 속에서의 개인의 역할 The Role of the Individual in History>> (352쪽 재인용)


"세계가 어떻게 되어야 한다고 설교하는 데 대해 한 마디 하자. 이 문제에 대해 철학은 항상 지각생이다. 세계에 대한 사고로서 철학은 현실이 그 전개과정을 다 마친 이후에야 나타난다. 개념이 가르치는 것은 역사가 이미 필연적인 것으로 보여준 것이다. 현실이 성숙했을 때에야 이상은 현실적인 것과 대치되는 것으로 등장한다. 이때 이상은 이 세계의 본질을 포괄하는 지적 영역의 형태 속에서 이 세계를 스스로 재구성한다. 철학이 그 백발을 은빛으로 칠할 때 삶의 형식은 이미 노쇠했으며 이 은빛으로 칠한 백발은 삶을 회춘시킬 수 없으며 단지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날기 시작한다."

- 헤겔, <<법철학>> 서문에서. (356쪽 재인용) 


"변증법이 헤겔의 손에서 신비화되었다 하더라도 그가 변증법의 일반적 작용형태를 포괄적, 의식적으로 제시한 최초의 사람임에 변함이 없다. 그에게 있어서는 변증법이 거꾸로 서 있다. 신비화의 껍질 내부에서 합리적 핵을 찾아내려면 이를 다시 바로 세워야 한다."

- 칼 마르크스, <<자본론>> 제 2판 서문에서 (361쪽 재인용)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 193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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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고독했던 때는 없네 


- 고트프리트 벤 (Gottfried Benn, 1886 ~ 1956) 



8월처럼 고독했던 때는 없네

성숙의 계절 -, 땅에는

붉은, 황금빛 신열(身熱)

그런데 그대 정원의 즐거움은 어디에 있는가? 


맑은 호수, 부드러운 하늘,

깨끗한 밭들은 조용히 빛나는데

그대 군림하는 왕국의 개선(凱旋)은,

그리고 그 개선의 자국은 어디에 있는가?


모든 것이 행복을 통해 드러나는 곳,

술 냄새 속, 물건 소리 속에

시선을 나누고, 반지를 나누는 곳에서

그대는 행복의 적(敵)인 정신에 몸 두고 있네 






지독했던 8월이 가고, 여기저기 긁힌 마음의 가장자리는 찢어진 헝겊으로 잘 덮어두곤 가을 놀이를 시작했다. 하지만 갑작스런 변화는, 몸에 무리를 주기 마련. 노트 정리를 하다가 메모 해 두었던 벤의 시를 읽으며, 문득 고독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게, 고독한 건 아닌가. 


이번 가을 벤의 시집 읽으면서 보내야 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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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클래식 Dear Classic 

김순배(지음), 책읽는수요일




저자는 피아니스트다. 그런데 내가 부끄러웠다. 나는 그녀처럼 쉽고 재미있게 글 쓰는 재주는 없는 것같다. 책을 펼치자마자 금세 빨려들어가, 책 중반을 읽고 있는 나를 보며, 클래식 음악을 이렇게 재미있게 풀어내는 저자가 부러웠다(그녀의 아버지는 김현승 시인이다. 시인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건 아닌지..)


내가 모르는 작곡가들과 그들의 음악, 그리고 내가 알고 있으나, 잘 알지 못했던 이들의 음악에 대해 저자는 부드러운 어조로, 깊이 있는 내용까지 언급하며 독자를 안내한다. (내가 얼마 전에 올린 '모차르트와 살리에르'도 이 책에서 읽은 바를 옮긴 것이다)



1966년 초연된 이 작품은 펜데레츠키 특유의 극단적인 실험기법으로 채워져 있었지만 청중은 강렬한 묘사와 극적인 표현이 주는 크나큰 충격을 체험합니다. 이 수난곡에는 무조성, 톤 클러스터, 음렬주의는 물론 소리 내지르기, 대사처럼 말하기, 중엉대기, 킥킥대기, 쉬쉬하기 등 다소 불온하고 이례적인 지시로 가득합니다. 

- 121쪽 


폴란드 출신의 작곡가인 펜데레츠키의 <성 누가 수난곡>에 대한 설명은, 마치 직접 듣는 것처럼 생생한다. 예전 펜데레츠키의 <히로시마 희생자에게 바치는 애가>는 들었으나, 그 땐 무심코 지나쳤는데 이 책에서 다시 펜데레츠키에 듣게 된다. 


아마 이 책의 좋은 점은 현대 작곡가들에게 인색하지 않다는 점이며, 저자의 편애가 들어가 있긴 하나, 몇몇 작품들에 대한 찬사일 것이다. 이런 찬사는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긴 하나, 비전문가인 나에겐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해준다. 


참고: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 '과거와 미래는 공존한다', 객석 2014년 1월 


베토벤 소나타는 일종의 통합 음악입니다. 그 안에는 목소리, 드라마, 심포니, 앙상블 등 모든 조합 가능한 음악적 요소가 진을 치고 있습니다. 

- 173쪽


저자는 베토벤 소나타에 높이 평가하며, 백건우의 연주를 최고로 쳤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베토벤 소나타를 들어야 하는 의무감같은 걸 느꼈다. 아, 그러나 백건우의 베토벤 소나타 전곡 연주집은 이미 품절이고, 중고가격이 어마어마하구나. 



'음악가 자신을 구원하고 마침내 음악 듣는 이들도 구원하는 클래식의 역사는 위로의 역사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라는 책 표지에 실린 메시지는 저자의 의견이겠지만, 나 또한 저 의견에 강력하게 동감한다. 자주 주위 사람들에게 책 읽기가 아닌 음악 듣기를 취미로 추천하는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음악만 집중해서 들었을 때의 위안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잘 알고 있다.  


예전엔 듣고 싶은 클래식 음악이 있어도 바로 듣지 못했다. 클래식 라디오 방송에 신청하거나, 음반 자료실이 있는 도서관에 가 헤드폰을 끼고 듣거나, 아니면 대형 레코드점에서 구입하는 것 밖에.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유튜브만 뒤지면, 웬만한 클래식 음악들은 다 있다. 얼마나 좋은가. 손쉽게 궁금한 음악을 찾아 들을 수 있으니. 그리고 마음만 먹는다면 작은 오디오 하나 사서 PC나 스마트폰에 연결해 보다 좋은 음질로 편하게 클래식 음악을 들을 수도 있으니. 만만치 않은 돈을 지불하며 미니 오디오를 구입해 듣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경제적인 가격의 오디오도 쉽게 구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은 읽기 위한 책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듣기 위한 책이다. 그리고 독자가 적극적으로 찾아 들으려고 할 때, 이 책은 더욱 가치를 발할 것이다. 


나는 지금 이 책에서 언급된 이삭 알베니즈의 <이베리아>를 듣고 있다.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알베니즈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음을 고백하면서. 그리고 메시앙도 이어 들을 것이다. 메시앙에 대해 나는 너무 소홀했다.  


"내 음악은 알 수 없는 향기, 쉴 새 없이 노래하는 새들, 교회 창문 스테인드 글라스의 음악, 다시 말하면 다채롭게 조용하고 보완하는 여러 빛깔, 즉 종교적 무지개"

- 올리비에 메시앙 (57쪽에서 재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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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책덕후 화영 2016.09.06 22:29 신고

    저도 이런 클래식에 대한 음악책도 한번쯤 읽어보고 싶은데 말이죠~ ^^ 막상 또 클래식을 들으면 잠오고 지겨워저셔... ㅋㅋ;;;

    • 지하련 2016.09.07 10:57 신고

      피아노 소나타나 현악 협주곡 같은 음악부터 먼저 시작하시면 도움이 됩니다. 어느 정도 귀가 익숙해진 다음(들어도 졸리지 않은 상태 ^^)에는 좋아하는 작곡가가 생길 지도 몰라요. 클래식 음악 책을 읽는 것보다 음악에 익숙해지는 것이 더 좋아요. 실은 더 오래 걸리는 일이긴 하네요. 음악도, 미술도, ... 경험 쌓아 익숙해져야 하는 노고가 있어야 하니. 하지만 그게 익숙해지면 정말 많은 것들을 느끼며 즐겨워할 수 있을 겁니다. ~


강상중과 함께 읽는 나쓰메 소세키 

강상중(지음), 김수희(옮김), AK 



강상중 교수의 책이 계속 번역되어 소개된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그의 책은 그 존재만으로도 한국과 일본을 잇는 가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한국이름을 쓰는 재일한국인으로, 그리고 일본지식인으로 살아가는 그는, 한국과 일본 너머 어떤 곳을 지향하는 듯하다. 적어도 강상중을 읽는 일본인 독자나 한국인 독자는 서로 대화를 나눌 정도의 식견을 가졌을 것이다. (손정의도 이와 비슷하고 그는 이미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을 넘어 세계인이 되었으니까)


이 책은 강상중 교수가 읽은 나쓰메 소세키에 대한 안내서이다. 나쓰메 소세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본 소설가다. 무라카미 하루키, 마루야마 겐지, 오에 겐자부로를 지나 나쓰메 소세키로. 그 중에서도 나쓰메 소세키는 단연코 최고다. 이는 그가 일본소설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20세기 초반에 이미 20세기 전체를 물들이게 될 어떤 근대성을 포착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강상중 교수는 <<살아야하는 이유>>(송태욱 옮김, 사계절출판사)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강상중 교수는 이 책에서 가볍고 부드럽게 그가 읽은 나쓰메 소세키를, 그리고 소세키의 소설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게 소세키의 생애와 주요 소설들에 대해 스케치를 하며 소개하고 있다.


사회는 어쩌면 미치광이들이 모여 있는 곳인지도 모르겠다. 미치광이들이 모여 맹렬히 싸우고 서로 으르렁거리고 욕을 퍼붓고 빼앗고, 그 전체가 집단적으로 세포처럼 무너졌다가 다시 솟아나고 솟아났다가 다시 무너지며 살아가는 곳을 사회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 중에서 다소 이치를 알고 분별이 있는 놈은 오히려 방해가 되니 정신병원을 만들어 가둬둔 채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자는 보통 시민이고 병원 밖에서 날뛰고 있는 자가 오히려 미치광이다. 미치광이도 고립되어 있으면 미치광이 취급을 받지만 단체가 되어 세력이 생기면 정상적인 인간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심한 미치광이가 돈과 권력을 남용하여 대다수 경미한 미치광이들에게 난동을 부리게 하고, 자신은 사람들로부터 훌륭한 사내라는 말을 듣는 예가 적지 않다. 

- <<나는 고양이로서이다>> 중에서 


어쩌면 반-시대적이며 지식인 중심적인 소세키의 소설을 부담스러워할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 좋을 것이다. 나 또한, 아직 <<나는 고양이로서이다>>를 읽지 않았지만, 소세키 소설이 가진 태도를 이 책을 통해 보다 명확하게 알게 되었고 할까. 


그리고 몰랐던 사실 하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에 대해 나쓰메 소세키는 소설 속에서 매우 냉정하고 객관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동시대와의 거리 두기가 소세키 소설이 시대를 넘어 감동과 울림을 가지게 된 계기가 아닐까. (1,000엔 지폐에 원래 이토 히로부미가 인쇄되었는데, 주변국의 반발로 나쓰메 소세키로 바뀌었다는 사실은 이에 비추어 무척 흥미로운 일이기도 하다) 


솔직히 나야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에 대해 열광하지만, 일부 독자들에게 소세키는 다소 어렵게 느껴진다는 사실을 역자 후기를 통해 처음 알았다. 어쩌면 일종의 교과서 소설에 대한 반감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점에서도 이 책은 나쓰메 소세키에 대한 재미있고 유용한 지침서가 될 것이다. 그리고 강상중 교수는 더 깊이 들어가지 않고 딱 그 수준에 맞추어 서술해내간다. 



* 최근 현암사에서 나쓰메 소세키 전집이 나오고 있다. 아래와 같은 장정으로. 강력하게 추천한다. 나는 이 시리즈가 나오기 전에 번역된 소설들 다수를 구입한 상태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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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 깔랭 - 내 생의 동반자 이야기.

에밀 아자르 지음. 지정숙 옮김.

동문선.

 

 

 

외롭지 않아? 그냥 고백하는 게 어때. 외롭고 쓸쓸하다고. 늘 누군가를 원하고 있다고. 실은 난 뱀을 키우고 있지 않았어. 그건 나야. 나의 다른 모습. 길고 매끈하지만,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내 모습이었어.

 

드레퓌스양을 사랑하고 있지만, 드레퓌스양에겐 말하지 않았어. 난 그녀의 눈빛만 봐도 그녀가 날 사랑하고 있다는 걸 느껴. 그래, 그녀와 난 엘리베이터에서만 이야기를 했을 뿐이지. 한 두 마디. 그 뿐이긴 하지만, 난 알 수 있어. 그리고 창녀로 만나긴 했지만, 우리는 서로에 대해 많은 부분을 공유할 수 있었지.

 

그로 깔랭을 동물원으로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삶이 바뀐 건 아니야. 외롭고 쓸쓸하다는 걸 숨기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을 뿐. 그리고 보면 그로 깔랭을 키우면서 난 날 숨기고 있었던 셈이군. 내 외로움을, 내 사랑을, 내 의도를, 내 진심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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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슬픈 소설이다. 말을 하지 못하는 뱀 - 그로 깔랭을 키우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지만, 실은 뱀이 이 소설의 중심 주제는 아니다. 에밀 아자르가 이야기하고 싶은 바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교감을 나누는 삶이 파리라는 도시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선택하는 곳은 창녀집이다. 그 곳에서 이 주인공은 그가 사랑하는 드레퓌스양과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이 하룻밤 이후 그는 그로 깔랭과 떨어질 수 있게 된다.

 

그 정도로 거대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건 힘든 일일까. 그 정도로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얻지 못하는 것일까. 에밀 아자르, 로맹 가리가 왜 권총 자살로 자신의 인생을 끝내었는지 알 수 있을 것같다. 이 책 가득한 유머는 실은 '나 너무 외롭고 쓸쓸해'의 동어반복이며 주인공이 키우는 그로 깔랭이라는 이름의 뱀 또한 실은 주인공의 숨겨진 '반영물'이다. 즉 '꾸쟁(주인공이름) = 그로 깔랭', '인간 = 뱀'의 등식이 성립한다.

 

유쾌한 유머를 가장하고는 소설은 나에게 결정타를 날리며 끝을 맺는다. 

 

"빠리 같은 커다란 도시 속에서 사람들은 결코 허전함을 느낄 걱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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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도 마찬가지지. 결코 허전함을 느낄 걱정이 없어. 이미 온 몸 가득 허전함 속에 파묻혀 있으니, 허전함을 알기나 하겠어. 로맹 가리... 나도 권총 자살로 마감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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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리뷰를 쓴 지도 10년이 넘었다. 다시 읽으니, 에밀 아자르, 혹은 로맹 가리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그가 사랑했던 진 세버그가 떠오른다. 그의 소설은 유머 속에서도 숨길 수 없는 비극을 담아낸다. 벗어날 수 없는 어떤 비극성을 포착한다. 서울에서도 사람들은 결코 허전함을 느낄 걱정이 없다. 늘 무언가를 해야 하고 쫓김을 당하고 불안해한다. 대도시에서의 일상인 걸까, 아니면 현대인의 운명일까. 그런데 이 책은 다시 나오지 않나? 로맹 가리의 책들이 다시 출판되던데 말이다. 


- 로맹 가리, 혹은 에밀 아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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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식사 대신 에이미 로월(Amy Lowell, 1874 - 1925)의 시를 한글로 옮겨보았다. 

며칠 전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에 로웰의 시가 실렸는데, 처음 듣는 시인이었고 처음 읽는 시였다. 

충분히 매력적이었고 흥미가 일었다. 하지만 시인의 이름만 제공하고 시 제목은 영어를 병기하지 않았다. 

'고착된'이라는 단어는 쉽게 fixed를 떠올릴 수 있었지만, 먼저 에이미 로웰로 검색해 로웰의 시 목록(http://www.poemhunter.com/amy-lowell/)을 훑었다. 

하지만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구글에서 Amy Lowell fixed idea를 추천 검색 키워드로 제시해주었다.

(원문 - https://www.poetryfoundation.org/poems-and-poets/poems/detail/42980


먼저 원문을 옮기고, 내가 번역한 것을, 마지막으로 중앙일보에 실린 번역시를 올린다. 

중앙일보에 실린 시는 너무 풀어서 번역했다는 느낌도 있고 (너무 의역한... 뭐, 내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방통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난 다음부터 영시 번역이 무척 재미있다. 

대학 시절 외국 문학을 좀 체계적으로 배웠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체계적으로 가르쳐줄 교수도 없었을 것이고, 그걸 체계적으로 배울 준비가 된 학생도 없었고, 나 또한 그런 학생이 아니었음을... 




A Fixed Idea  



What torture lurks within a single thought 

When grown too constant; and however kind 

However welcome still, the weary mind

Aches with its presence. Dull remembrance taught 

Remembers on unceasingly; unsought 

The old delight is with us but to find 

That all recurring joy is pain refined  

Become a habit, and we struggle, caught 

You lie upon my heart as on a nest 

Folded in peace, for you can never know 

How crushed I am with having you at rest

Heavy upon my life. I love you so 

You bind my freedom from its rightful quest. 

In mercy lift your drooping wings and go.

  


고착된 생각 



끝없이 거듭되어 자라나는 하나의 단일한 생각 안에 

고문같은 것이 숨겨져 있다는 것; 그리고 친절하긴 하지만

아직 반갑긴 하지만, 그 지친 마음은 

그 존재로 고통스럽지, 흐릿해진 추억은 길들여진 채 

쉼없이 기억되고; 찾지도 않는

그 오래된 기쁨은 우리와 함께 있으나, 결국 알게 된다네  

모든 회상되는 즐거움은 정제된 고통임을 

습관이 되네, 그리고 우리는 싸우지, 잡힌 상태로

당신은 어느 보금자리인 듯 내 마음에 누워 

평화로이 감싸여, 당신은 절대 알 수 없지 

내 삶 위에 무겁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 당신으로 인해

얼마나 나는 짓눌려졌는지. 나는 너무도 당신을 사랑하네 

당신은 내 자유를 그것의 정당한 탐색로부터 구속하고 

자비로이 당신의 축 늘어진 날개들로부터 풀어줘, 그리고 가. 





아래는 중앙일보에 번역되어 실린 에이미 로웰의 시다. 



고착된 생각




너무 계속 자라는 한 가지 생각안에는 

고문 같은 고통이 숨어있지,

아무리 다정하고 아무리 반가워도 

내 지친 마음은 그 생각 때문에 더 아픈 거야.

길들여진 둔한 기억은 끊임없이 계속 기억하지,

찾지도 않은 오래된 기쁨은 우리와 함께 있지만 알게 되지,

되풀이되는 모든 기쁨이 단지 습관이 된 정제된 고통일 뿐임을,

우리는 벗어나려 애쓰지만 다시 사로잡히지. 

당신은 마치 둥지 위에서처럼 내 가슴 위에 누워있지,

평화롭게 팔짱 낀채, 그러나 당신은 결코 알 수 없어,

내 삶 위에 당신이 무겁게 쉬고 있을 때,

내가 얼마나 큰 고통으로 바스러지는지.

난 당신을 너무 사랑해, 당신은 당연히 날 찾아 나의 자유를 구속하지

제발 날 불쌍히 여겨 처진 날개를 들고 떠나줘. 

(출처: http://news.joins.com/article/20453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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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증. 감정들 Schwindel. Gefühle

W.G.제발트(Sebald) 지음, 배수아 옮김, 문학동네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 우연히 일어난 피부 접촉은 늘 그랬듯이 무게도 중력도 없는 어떤 것, 실제라기보다는 허상과도 같은, 그래서 한없이 투명한 사물처럼 나를 관통해가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95쪽) 



'벨, 또는 사랑에 대한 기묘한 사실', '외국에서', 'K박사의 리바 온천 여행', '귀향'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단편소설집일까, 아니면 장편소설일까. 아니면 이 구분이 그냥 무의미한 걸까. 장편소설이 아니라 단편소설집이라고 하기엔 4개의 이야기는 하나의 주제의식을 공유하는데, 그건 여행(에의 기록/기억)이다. 서로 다른 인물들의, 서로 다른 도시로의, 서로 다른 시기 속에서의, 하지만 동일한 테마를 가진 여행의 기록(기억), 이 소설이 장편소설이 되는 이유이면서 제발트가 가지는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떠나는 것, 낯선 곳(혹은 잊혀졌던 곳)에서 머무는 것, 그 곳에서 자고 걷고 만나고 이야기하며 얇고 사소한 감정의 변화를 깊숙하게 느끼는 것, 그리고 기억해내는 것, 기록하는 것, ... 소설은 이렇게 구성되어 흘러간다. 하지만 우리가 익히 아는 그런 여행(의 기록)이 아니다. 


밖으로 나오는 길에 흰 염주비둘기 한 쌍을 지켜보았다. 비둘기들은 여러 번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날개짓 몇 번으로 나무 꼭대기 높은 가지로 위로 급격하게 떠올랐다가, 짧고도 영원하게 느껴지는 순간 동안 고요히 창공에 머문 다음 다시 앞으로 쏟아질 듯한 자세로 하강하며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나지막한 구르륵 소리를 냈고, 그 중 몇 그루는 이 백 년 이상 그 자리에 서 있었을 것이 분명한 키프로스 나무들 주변에서 날개를 고정시킨 채 커다란 원을 그리며 빙빙 돌았다. (70쪽) 


나로선 이 여행들(의 기록)을 따라가기엔 참 힘들었다. 서술은 빽빽하고 무거우며, 한 번 표현된 감정은 곧바로 사물이 되어 아래로 가라앉는다. 독자의 시선은 무거워진 분위기를 따라 아주 느리고 천천히 움직인다. 한참을 읽었다 싶지만, 고작 몇 페이지를 지났을 뿐이고 그와는 반대로 시간은 참 빨리 흐른다. 


감정을 서정적으로 이야기하는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도리어 딱딱하고 즉물적이다. 독자는 제발트의 서술을 따라가지만, 그 곳으로 감정이입되어 들어가지 않는다, 못한다.  


어쩌면 이것도 늙어간다는 징표일까,  아니면 제발트식 여행(의 기록)이란 그런 걸까. 낯선 나와 마주하거나 잊고 있던 나를, 혹은 내가 무심코 흘려보냈던 기억들을 새삼스레 되새기면서, 끊임없이 뒷걸음질치면서 타자화, 사물화하는 걸까. 여행을 하면서 나를 찾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나를 지워나가는 걸까, 그리고 스스로 수수께끼가 되는 걸까. 


그는 특히,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일이 내 안에서 저절로 설명되고, 그럼에도 그 일들이 더욱 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수수께끼처럼 변해간다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199쪽)


우리는 외부를 끝내 알 수 없다. 실은 내부도 알 수 없다. 내 마음은 텅 비었고 영혼의 존재를 알 수 없기에 믿을 수도 없다. 신념은 조각났고 소설은 의미 찾기를 그만 두었다. 고작 보여줄 뿐이다. 그것도 자세하고 정확하게. 감정마저도 객관적으로. 


제발트의 문장이 갖는 독일어의 밀도는, 역자로서의 경험이 참으로 빈약하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생각하기에, 문학 텍스트 중에서도 가장 치밀한 종류이며 그것이 갖고 있는 텍스처texture의 성질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252쪽) 


배수아의 의견대로, 너무 빽빽하고 무거워서 따라가기 버거울 정도다. 하지만 그녀의 '제발디언'은, 글쎄다. '제발디언'이라는 단어는 매우 사적인 호감을 드러내는 표현일 뿐, 일반 독자가 읽기엔 어렵고 재미없고 문장에 너무 많은 힘을 쓰고 있다고 할까. 마치 야니스 크세나키스(iannis xenakis)의 음악을 듣는 기분이랄까. 하긴 나도 크세나키스의 음악을 좋아하지만... 


소설 중간에 등장하는 피사넬로 작품은 아래와 같다. 고딕 양식의 성 아나스타시아 성당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다. 15세기 초반에 그려진 초기 르네상스 작품이다. 그나저나 이 작품의 일부를 소설에 등장시킬 생각을 하다니... 


St. George Liberating the Princess of Trebizond

Pisanello (1395 - 1455), fresco, 223 × 620 cm (87.8 × 244.1 in)

from 1436 until 1438

Church of Saint Anastasia (독일어 - Pellegrini-Kapelle)  


과감하게 읽으라는 권유는 하지 못하겠다. 다만 제발트가 살아있었다면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올라갔을 것이며, 노벨문학상을 받았거나 그만한 명성을 누렸을 것이라는 것이다. 


사족이긴 하지만 가끔 한국 문학판에 대해 아쉬운 건 번역된(혹은 번역되지 않더라도) 동시대 외국 문학이 어떻게 한국 작가들과 작품 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에 대해서 너무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설가 배수아의 초기 작품들을 읽고 나는 얼마나 실망했던가. 그 이후 그녀의 작품을 읽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오에 겐자부로가 십 수년 전 하루키를 비난했지만, 지금은 인정한다고 말했듯이, 그녀의 최근 작들이 궁금해진다. 적어도 제발트를 읽고 흔들렸다면 말이다. 



영어 번역판 표지



* 제발트의 다른 소설. 

2016/05/07 - [책들의 우주/문학] - 아우스터리츠Austerlitz, W.G.제발트Seba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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