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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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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에 쓴 포스팅이라니. 벌써 12년이 흘렀구나. 함민복과 채호기의 시다. 


*** 2004년 1월 27일 *** 


강화도 어느 폐가에 들어가 산 지 꽤 지난 듯 하다. 세상의 물욕과 시의 마음은 틀리다는 생각에 인적 뜸한 곳으로 들어가버린 시인 함민복. 그의 초기 시들은 무척 유쾌하면서도 시니컬했었는데. 어느 순간 보니 연시들이 많아졌다. 외로워서 그런 걸까. 아니면...


광고를 위해 지은 그의 시 "설중매"는 세상의 술에 취한 영혼을 살며시 깨우고 저기 멀리 달아나는 그리움을 조용히 잡아 세운다.



설중매



당신 그리는 마음 그림자
아무 곳에나 내릴 수 없어
눈 위에 피었습니다.

꽃 피라고
마음 흔들어 주었으니
당신인가요

흔들리는 마음마저 보여주었으니
사랑인가요

보세요
내 향기도 당신 닮아
둥그렇게 휘었습니다.



이 시 때문에 설중매를 얼마나 사 마시려마는, 내 마음 외로운 탓에 차가운 겨울 오후부터 술 생각 동하게 만드는 건 함민복의 시가 가진 힘일 게다. 사랑하는 이가 옆에 있어 술을 마시면 좋을련만, 그 꿈 접은 지 오래. 하지만 꿈을 가지는 상상은 때로 좋을 때가 있다. 그런 상상 속에서 오래된 시 한 편 읽어본다.



몸 밖의 그대 1


1

그대와 마주앉아 그대의 술잔에 술을 따릅니다. 그대의 몸
을 조금씩 채워가는 술. 그대와 마주앉아 내 몸에 따르어지
는 그대를 봅니다. 내 몸 속에 채워지는 그대. 술은 그대 핏
속으로 스며 구멍마다 붉은 꽃송이 내질러 숨막히는 향기로
내 몸을 묶어놓습니다. 그대는 내 몸으로 들어와 영혼을 점
령하고 옴쭉달싹 못하게 합니다.


2

내 몸 속에는 그대가 들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죽
었다고 하지만 내 몸 속에는 그대가 온전히 살아있습니다.
내가 더 이상 나일 수 없는 슬픔과 절망의 사막에 홀로 버려
질 때 그대는 내 몸을 찢고 밖으로 나옵니다. 내가 그대를
그토록 사랑했듯 그때야 비로소 나는 없고 오로지 그대만이
있습니다.


********


어느새 십이년이 넘어버린 채호기의 시다. 술에 취해 이 시를 읽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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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고독했던 때는 없네 


- 고트프리트 벤 (Gottfried Benn, 1886 ~ 1956) 



8월처럼 고독했던 때는 없네

성숙의 계절 -, 땅에는

붉은, 황금빛 신열(身熱)

그런데 그대 정원의 즐거움은 어디에 있는가? 


맑은 호수, 부드러운 하늘,

깨끗한 밭들은 조용히 빛나는데

그대 군림하는 왕국의 개선(凱旋)은,

그리고 그 개선의 자국은 어디에 있는가?


모든 것이 행복을 통해 드러나는 곳,

술 냄새 속, 물건 소리 속에

시선을 나누고, 반지를 나누는 곳에서

그대는 행복의 적(敵)인 정신에 몸 두고 있네 






지독했던 8월이 가고, 여기저기 긁힌 마음의 가장자리는 찢어진 헝겊으로 잘 덮어두곤 가을 놀이를 시작했다. 하지만 갑작스런 변화는, 몸에 무리를 주기 마련. 노트 정리를 하다가 메모 해 두었던 벤의 시를 읽으며, 문득 고독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게, 고독한 건 아닌가. 


이번 가을 벤의 시집 읽으면서 보내야 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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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식사 대신 에이미 로월(Amy Lowell, 1874 - 1925)의 시를 한글로 옮겨보았다. 

며칠 전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에 로웰의 시가 실렸는데, 처음 듣는 시인이었고 처음 읽는 시였다. 

충분히 매력적이었고 흥미가 일었다. 하지만 시인의 이름만 제공하고 시 제목은 영어를 병기하지 않았다. 

'고착된'이라는 단어는 쉽게 fixed를 떠올릴 수 있었지만, 먼저 에이미 로웰로 검색해 로웰의 시 목록(http://www.poemhunter.com/amy-lowell/)을 훑었다. 

하지만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구글에서 Amy Lowell fixed idea를 추천 검색 키워드로 제시해주었다.

(원문 - https://www.poetryfoundation.org/poems-and-poets/poems/detail/42980


먼저 원문을 옮기고, 내가 번역한 것을, 마지막으로 중앙일보에 실린 번역시를 올린다. 

중앙일보에 실린 시는 너무 풀어서 번역했다는 느낌도 있고 (너무 의역한... 뭐, 내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방통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난 다음부터 영시 번역이 무척 재미있다. 

대학 시절 외국 문학을 좀 체계적으로 배웠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체계적으로 가르쳐줄 교수도 없었을 것이고, 그걸 체계적으로 배울 준비가 된 학생도 없었고, 나 또한 그런 학생이 아니었음을... 




A Fixed Idea  



What torture lurks within a single thought 

When grown too constant; and however kind 

However welcome still, the weary mind

Aches with its presence. Dull remembrance taught 

Remembers on unceasingly; unsought 

The old delight is with us but to find 

That all recurring joy is pain refined  

Become a habit, and we struggle, caught 

You lie upon my heart as on a nest 

Folded in peace, for you can never know 

How crushed I am with having you at rest

Heavy upon my life. I love you so 

You bind my freedom from its rightful quest. 

In mercy lift your drooping wings and go.

  


고착된 생각 



끝없이 거듭되어 자라나는 하나의 단일한 생각 안에 

고문같은 것이 숨겨져 있다는 것; 그리고 친절하긴 하지만

아직 반갑긴 하지만, 그 지친 마음은 

그 존재로 고통스럽지, 흐릿해진 추억은 길들여진 채 

쉼없이 기억되고; 찾지도 않는

그 오래된 기쁨은 우리와 함께 있으나, 결국 알게 된다네  

모든 회상되는 즐거움은 정제된 고통임을 

습관이 되네, 그리고 우리는 싸우지, 잡힌 상태로

당신은 어느 보금자리인 듯 내 마음에 누워 

평화로이 감싸여, 당신은 절대 알 수 없지 

내 삶 위에 무겁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 당신으로 인해

얼마나 나는 짓눌려졌는지. 나는 너무도 당신을 사랑하네 

당신은 내 자유를 그것의 정당한 탐색로부터 구속하고 

자비로이 당신의 축 늘어진 날개들로부터 풀어줘, 그리고 가. 





아래는 중앙일보에 번역되어 실린 에이미 로웰의 시다. 



고착된 생각




너무 계속 자라는 한 가지 생각안에는 

고문 같은 고통이 숨어있지,

아무리 다정하고 아무리 반가워도 

내 지친 마음은 그 생각 때문에 더 아픈 거야.

길들여진 둔한 기억은 끊임없이 계속 기억하지,

찾지도 않은 오래된 기쁨은 우리와 함께 있지만 알게 되지,

되풀이되는 모든 기쁨이 단지 습관이 된 정제된 고통일 뿐임을,

우리는 벗어나려 애쓰지만 다시 사로잡히지. 

당신은 마치 둥지 위에서처럼 내 가슴 위에 누워있지,

평화롭게 팔짱 낀채, 그러나 당신은 결코 알 수 없어,

내 삶 위에 당신이 무겁게 쉬고 있을 때,

내가 얼마나 큰 고통으로 바스러지는지.

난 당신을 너무 사랑해, 당신은 당연히 날 찾아 나의 자유를 구속하지

제발 날 불쌍히 여겨 처진 날개를 들고 떠나줘. 

(출처: http://news.joins.com/article/20453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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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곰팡이 

-산책시 1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 이문제, <<산책시편>> 중에서  




이문재의 <<산책시편>>(민음사)가 있는데, 서가를 찾아보니 없다. 정리되지 않는 서가, 정리할 시간도 없는 서가, 이젠 책 읽을 시간과 여유마저 사라지고, 이 시도 읽었으나 이젠 기억나지 않아, 신문에서 읽은 다음, 출처를 찾아본 다음에서야 시집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이문재를 읽던 시간도 이젠 드물어지고, 가을은 아직 저 멀리 있기만 하다. 끝나지 않을 것같은 여름밤, 책은 읽히지 않고 잠도 오지 않는데, 어찌 꿈을 꿀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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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

자끄 프레베르 Jacques Prevert 

안민재 역편, 태학당 






헌책방에서 구한 시집. 예전엔 외국 번역 시집들이 꽤 많았는데, 지금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하긴 시집 읽는 이도 드문 마당에... 


번역이 다소 형편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오늘 다시 보니 어느 것은 좋고 어느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형편없는 것이 아니라... 


1994년에 출판되었고 인터넷서점에선 검색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래 소개한 시를 읽는 것만으로도 닫혀있는 마음은 밖으로 무너지고 저녁 바람을 새삼 느끼고 저 하늘 달빛이 이 버릇없는 작은 도시의 사람들 위를 비추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될 것이다. 


대학시절 불어로 시 읽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젠 불어 단어들이 머리 속에서 흔적으로 남았다. 시를 읽으며 술을 마시던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하고, 그 시절 탓에 지금 삶이 어려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 갈피 잡을 수 없는 중년의 봄날이 이어진다.  


 



공원 Le Jardin 




우주 속의 별

지구 속의 

파리

파리 몽수리 공원에서

어느 겨울 아침 햇빛

네가 내게 입 맞춘 

내가 네게 입 맞춘

그 영원의 한순간을

다 말하려면

모자라리라

백만 년 또 수백만 년도 






어느 새의 그림을 그릴려면 Pour faire le portratit d'un oiseau 





우선 문이 열린

새장을 하나 그릴 것

다음에는 새를 위해

뭔가 예쁜 것을 

뭔가 단순한 것을

뭔가 예쁜 것을

뭔가 쓸모 있는 것을 그릴 것

그 다음엔 그림을

정원이나

숲이나

혹은 밀림 속

나무에 걸어놓을 것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움직이지 말고 ... ...

때로는 새가 빨리 오기도 하지만 

여러 해가 걸려서

결심하기도 한다

실망하지 말 것

기다릴 것

필요하다면 여러 해를 기다릴 것

새가 빨리 오고 늦게 오는 것은

그림의 성공과는 관계 없는 것

새가 날아올 때

혹 새가 날아오거든

가장 깊은 침묵을 지킬 것

새가 새장에 들어가길 기다릴 것

그가 새장에 들어가거든

살며시 붓으로 새장을 닫을 것

그리고 

차례로 모든 창살을 만들되

새의 깃털을 다치지 않도록 조심할 것

그리고는 가장 아름다운 가지를 골라

나무의 초상을 그릴 것

푸른 잎새와 신선한 바람과

햇빛의 가루를 또한 그릴 것

그리고는 새가 결심하여 노래하기를 기다릴 것

혹 새가 노래 하지 않으면

그것은 나쁜 징조

그림이 잘못된 징조

그러나 새가 노래하면 좋은 징조

당신이 사인해도 좋다는 징조

그렇거든 당신은 살며시

새의 깃털 하나 뽑아서

그림 한구석에 당신 이름을 쓰라 





절망이 의자 위에 앉아 있다 Le de'sepoir est assis sur un banc 




광장의 의자 위에

어떤 사람이 앉아

지나가는 사람을 부른다

외안경에 낡은 회색 옷을 입은 그는

담배를 피우며 앉아 있다

그를 바라보면 안 된다

그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

그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냥 스쳐야 한다

그가 보이거든

그의 말이 들리거든

걸음을 빨리 하여 지나쳐야 한다

혹 그가 신호라도 한다면

당신은 그의 옆에 앉을 수 밖에 

그러면 그는 당신을 보고 미소 짓고 

당신은 참혹하게 고통 받고

계속 그 사람은 웃기만 하고

당신도 같은 웃음을 웃게 되고

웃을수록 당신의 고통은 더욱 참혹하고

고통이 더 할수록 더욱 어쩔 수 없이 웃게 되고

당신은 거기 의자 위에 

움직이지 못하고 미소 지으며 

주위에는 아이들이 놀고

사람들 조용히 지나가고 

새들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날아가고

당신은 의자 위에 

가만히 앉아 있다

당신은 안다 당신은 안다

이제 다시는 이 아이들처럼 

놀 수 없음을

이제 다시는 조용히 

이 행인들처럼 지나갈 수 없음을

당신은 안다

이 새들처럼

이 나무에서 다른 나무로 

날아갈 수 없음을 

당신은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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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 This Craft of Verse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거용 옮김, 르네상스 








우리는 시를 향해 나아가고, 삶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리고 삶이란, 제가 확신하건대 시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시는 낯설지 않으며, 앞으로 우리가 보겠지만 구석에 숨어 있습니다. 시는 어느 순간에 우리에게 튀어나올 것입니다. (11쪽) 



예술의 세계에서 '그것을 아는 것'과 '그것을 행하는 것'은 종종 전혀 다른 궤도를 돌기도 한다. 시를 쓰는 것과 시를 아는 것, 그림을 그리는 것과 그림을 아는 것, ... ... 이 둘은 서로 연관되어 있지만, 때로 다른 세계를 지칭한다. 그래서 어떤 예술가들은 자신이 위대한 작품을 쓰거나 그리고 있음을 알지 못한 채 죽기도 한다. 현대에 있어서는 아르튀르 랭보나 반 고흐가 대표적인 경우일 것이다. 


우리가 안다고 할 때는 그것을 행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여기지만, 예술의 세계에서는 안다는 것은 그것을 못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문학 전공자인 나에게는 작품을 내 기준으로 선별하기 시작했을 때, 거의 습작을 포기하게 되었다. 이런 사람들은 꽤 많아서, 이들의 공통점은 형편없는 작품이나 만들어내면서 작가라며 으스대는 이들을 역겨워하는 이름없는 아웃사이더가 되며 진정한 작가들의 충실한 지지자가 된다.  


루이스 호르헤 보르헤스. 이 이름 앞에 무슨 말을 더 덧붙일 것인가. 20세기 후반의 가장 위대한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그는,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1967년과 68년에 하버드대학교에서 여섯 차례의 문학 강의를 진행한다. 녹음테잎으로만 있던 이 강의자료가 십 여년 전 발견되고, 보르헤스의 육성 강의를 그대로 글로 옮겼고, 얼마 뒤 이 책이 나온다. 그 때 2000년이었다.


그 자신 스스로 위대한 작가였던 보르헤스는 문학의 전통(역사) 앞에서 한없이 고개 숙이며 그것의 참 의미에 대해 소곤거린다. 위대한 문학 작품들의 지지자가 되며, 그 작품이 어떻게 존재하고 읽히는가에 대해 설명한다. 어쩌면 어떤 것이 진정한 문학인가를 알아차리는 순간, 더 깊이 문학 속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그것이 무척 어렵고 힘겨운 일이라고 할 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보르헤스는 자신의 문학 너머 거대하기만 문학의 역사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보르헤스는 하버드대학에서의 그 여섯번 강의를 통해, '시라는 수수께끼', '은유', '이야기하기', '번역', '사고와 시', '한 시인의 신조'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이 때 이미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생각나는대로 기억하는대로 강연했다. 보이지 않는 청중들을 위해서. 그런데 이 책을 읽는 동안, 그는 이 원고를 어떻게 준비했을까, 이 강의를 들었던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하는 생각에 잠기고 만다. 보르헤스, 그는 작가이기 이전에 진정한 작가들의 지지자였으며, 성실한 독자였고, 호기심 가득찬 눈으로 도서관 서가 사이를 배회하던 소년이었다. 


보르헤스는 이 짧았던 강연을 통해 놀랍도록 우아하고 아름다운 시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소설이 아니라 서정시와 서사시의 세계로. 보르헤스는 정작 소설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이 강연에서 그는 시인의 면모를 드러냄과 동시에 문학의 저 세계로 우리를 이끌고 여행을 떠난다. 소설이 등장하지 않았다고 서운해하지 말기를. 그는 위대한 이야기꾼들과 저 서사시의 전통에 대해서 이야기하니까.  



With ships the sea was sprinkled far and nigh, 

Like stars in heaven 

- Wordsworth 


(바다에는 배들이 멀리 또 가까이 뿌려져 있네,

 하늘의 별처럼) 



대학 시절, 아니 이제까지 내가 들었던 그 어느 문학 수업도 보르헤스의 이 강연록보다 아름답지 못했다. 그 많던 작가들의 수업이나 강연을 들었으나, 그들 대부분 시들을 암송하여 들려주지 못했다(암송했던 이는 두 분 있었는데, 한 분은 시인이며, 한 분은 내 예술사선생님이셨다). 더구나 시 행간 사이에 숨겨진 의미를 고대에서부터 끄집어내어 지금으로 가지고 오는 이도 없었다. 이런 수업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는 학생의 비극이다.(하긴 이런 수업을 할 수 있는 이 보르헤스 말고 누가 있으랴)



She walks in beauty, like the night 


바이런 저 싯구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 번역하지 않아도. 보르헤스는 서로 다른 언어를 오가며, 시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어떤 시어들이 가지는 아름다움은 특정 언어에서 더욱 부각된다고. 


대학을 졸업한 후 듣게 된 수업에서 예술사 선생님께서 바이런의 싯구를 강의 중간에 암송하셨을 때, 그 아름다움을 미처 몰랐다. 실은 대학 시절 다양한 언어를 오가며 위대한 문학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배울 수 있어야만 했다. 그러기엔 내가 너무 지적으로 무능했고 내가 다녔던 대학과 그 대학 교수들 대부분은 위대한 문학을 가르치기에 적당하지 못했다. 


보르헤스의 이 책을 문학과 시에 대해 궁금한 모든 이들에게 추천한다. 그리고 철부지 비평가들과 문학을 사랑하지 않는 학자들에게 놀아난 '문학의 위기'가 보르헤스의 저 짧은 책 안에서 어떻게 무너지는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 사랑이 사라지지 않듯 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시는 사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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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소식 



파울 첼란 




이제는 아무도 밟지 않는, 

에둘러 가는 백리향(百里香) 양탄자 

종소리벌판을, 가로 

질러 놓인 빈 행(行).

바람이 짓부수어 놓은 곳으로는 아무 것도 실려 오지 않는다. 


다시금 흩어진 

말들과의 만남, 가령 

낙석(落石), 딱딱한 풀들, 시간. 



- 전영애 옮김, <<죽음의 푸가>>(민음사) 중에서 





이렇게 다시 시집을 읽을 줄 알았다면, 그 많던 시집들을 버리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외국 시를 읽게 될 줄 알았다면, 지금 나오지 않는 번역 시집을 사두고 버리지 말 걸, 이렇게 외국 시의 아름다움을 즐기게 될 줄 알았다면 외국어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해 둘 것을... 


이번 주 내내 파울 첼란의 시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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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독 행성




 박정대

     

 


 콜 미, 가수는 밤 새 노래를 하고 나는 로즈제라늄 곁에 누워 있네

 여기는 12월의 입구를 떠도는 고독 행성


 방울토마토처럼 입 안 가득 깨물고 싶은 밤


 그 밤의 옆구리로 밤새도록 눈발들은 허공의 밀사처럼 소리 없이 내리는데, 눈발들이 내려와 고독고독 쌓이는 이곳은 하얀 침묵의 지붕을 모자처럼 쓰고 서 있는 고독 행성


 콜 미, 밤 새 가수는 저음으로 노래를 부르고 지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쌓이는 노래들


 고독 행성에 호롱불이 켜지는 점등의 시간이 오면 생의 비등점에선 주전자의 물이 끓어오르고 톱밥 난로의 내면을 가진 천사들은 따스하게 데워진 생의 안쪽에서 영혼의 국경선을 생각하네


 콜 미, 가수의 목소리도 가랑잎처럼 바람에 뒤척이는데 창문 밖 국경수비대들도 하얀 눈발을 뒤집어쓰고 곤하게 잠든 세계의 지붕 밑


 천사들의 숨결에 로즈제라늄만 사붓이 흔들리는 시간


 여기는 바람이 불 때마다 저 홀로 펄럭이며 아득하게 깊어가는 한 잎의 고독 행성





'고독고독'하다는 게 무얼까. 나도 참 '고독고독'한데, '고독고독'하다는 게 뭘까. 뒤늦게 박정대의 시집, '사랑과 열벙의 화학적 근원'을 찾으니, 절판되었다. 도서관에서 복사라도 할까. 


고독고독한 바람이 불고 고독고독한 가수가 '텔미'를 부르는 행성, 고독고독하게 밤 새 눈이 내리고, 아득하게 깊은 사랑에 빠지고 싶지만, 고독고독하기만 한 바람을 가진 고독고독한 이의 행성, 고독 행성. 


따스한 봄바람 부는 대도시 서울은 나이가 들수록 고독고독해지만 한다. 실은 그런 시대이고, 그런 행성인 게다. 


고독고독고독....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 박정대, 웅진, 2007 




고독고독한 일상을 견디기 위한 짧은 노래 하나. 


Sarabande - Ludovico Einaudi by Angèle Dubeau & La Piet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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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 



당신이 꼭 좋은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참회를 하며 무릎으로 기어 사막을 통과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당신 육체 안에 있는 그 연약한 동물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게 하라 

내게 당신의 상처에 대해 말하라, 그러면 

나의 상처에 대해 말하리라.

그러는 사이에도 세상은 돌아간다.

그러는 사이에도 태양과 비는 

풍경을 가로질러 지나간다. 풀밭과 우거진 나무들 위로

산과 강 위로

당신이 누구이든, 얼마나 외롭든

세상은 당신의 상상 앞에 스스로를 드러내며 

기러기처럼, 거칠고 들뜬 목소리로 소리치고 있다. 

다시, 또 다시 네 자리가 있다는 걸,

이 세상 모든 것들 속에. 



- 메리 올리버


 

장석주의 책, <<일요일의 인문학>>을 다 읽고 짧은 서평을 올렸다. 최근에 책도 못 읽고 글도 못 쓴 탓에, 그 짧은 서평 쓰는 것도 힘들었다. 메리 올리버의 책은 사놓고 읽다 말았는데, ... ... 메리 올리버의 '기러기'는 장석주의 책에서 다시 옮겨적었다가, 다시 수정한다. ㅡ_ㅡ;;  구글링을 해서 찾은 시 원문과 장석주의 책에 실린 번역과 다르다. 마지막 문장을 번역하여 덧붙인다. 




출처: http://tumblr.austinkleon.com/post/123746526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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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가 맨 




아 - 입 벌려요.


너는 마른 휘파람을 불기 위해 입술을 모았고,

나는 그게 지겨웠어.

슈가 맨, 벤츠를 사 줘.


너는 노래방에서 탬버린을 훔쳐 왔지.

꽃집에서 버린 시든 꽃을 주워 왔지.

아울렛에서 싸구려 팬티를 사 왔지.

나는 그것들을 쓰레기통에 넣었어. 


슈가 맨, 너한테 없는 것을 줘.

다이아몬드 - 

은빛 배 - 

파리로 날아가는 전용 비행기 - 

번뜩이는 빌라의 지붕 - 

금빛 넘실거리는 전자 오르간 - 


아 - 입 벌려요.


너는 녹아 사라지고,

깊게 썩은 입이 말하기 시작했어. 

가엾은 슈가 맨.

너는 노래방에서 ... ... 


- 장정일, <세계의 문학>, 2015년 여름호 



도서관에서 문학잡지를 읽는다. 밖은 낮아지는 구름, 어두워지는 대기, 사랑을 꿈꾸지 않는 젊음, 어긋나버린 시간들로 채워지고, 나는 흔들리며 가라앉는 마음 끝자락을 꽉 부여잡곤, 오래 전에 잃어버린 내 시간들의 흔적을 더듬거린다. 장정일. 그도 이젠 소년이 아니고 나도 이젠 문학 습작생이 아니다. 


구립 도서관을 채운 사람들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젊은이부터 은퇴한 후 책읽기로 시간을 보내는 늙은이까지, 책은 세계의 비밀을 담은 어떤 것이 아니고, 도서관은 숨소리까지 죽인 독서광들의 아지트도 아니다. 그저 형편없어져 가는 도시의 쓸쓸하고 슬픈 뒷골목같은 곳. 


계간지에 실린 시들을 읽으며, 아, 내가 모르는 시인들이 이렇게 많구나, ... 아, 이 시인은 아주 오래 전 술자리에서 만난 적이 있었지, ... 시인과 술을 마시지 못한 지도 꽤 많은 시간이 지났음을 깨닫는다. 하긴 술을 마시며 시에 대해, 문학에 대해, 예술에 대해 이야기해 본 게 몇 년 전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겨우겨우 루이지 피란델로의 소설, <<나는 고 마티아 파스칼이오>>을 다 읽으며, 마티아 파스칼의 철부지 같은 모험도 19세기에나 가능한 일임을, 세상의 우연과 신비, 슬픈 가능성마저도 사라졌음을, 식어버린 커피 속에서 첨벙거리며 탄식했다. 


다시 한 주일이 시작되고, 나는 야근에, 스트레스에, 쫓기듯 시간을 보낼 것이다. 빨리 이 가을도 가고, 이 겨울도 갔으면 좋겠다. 그래야 좀 쉴 수 있을 것같다. 그 전까진 최선을, 사력을 다해 끝을 내야 할 목표가 존재하니... 그 전까진 무너지지 말아야지. 십 수년 만에 장정일의 시 읽으며, 늙지 않는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구나 하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늙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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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랜만이네요 ㅎ

    전 제가 어렸을 때랑 똑같아서 지겨운데 ㅋㅋㅋ 어른처럼 생각하고싶어요.

    • 오랜만!이예요. ^^

      실은 어른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다만 어른처럼 생각한다는 건 주위를 좀 더 신경쓴다고 할까요. 이게 조금 달라질 뿐, 나머진 그대로인 것같아요. 하긴 그 사소한 변화가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 오는 것이긴 하지만요. ~...

    • 그 변화가 좋은 건가요 아님 나쁜건가요. 아님 경우에따라 다른 건가요? 제가 요즘 그게 궁금해서요.

      굳이 위 글의 맥락이랑 상관없이 그냥요...

    • 다들 겪는 변화이니,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니예요. 좋게 받아들이면서 젊은 시절의 열정이나 가치를 계속 지켜나가는 게 제일 좋겠죠. ~ 힘들긴 하지만요. ~ : )


사랑이라는 건 ... 






나는 너를 만나지 못했으니, 내 산 새며, 내 산 꽃이며, 내가 산 사슬도 보지 못했지. 그리고 너는 나를 영영 만나지 않았지. ...  


진짜는 어렵다. 그게 사랑이든, 문학이든, 삶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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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프랑시스 퐁주 




  나보다 더 낮게, 언제나 나보다 더 낮게 물이 있다. 언

제나 나는 눈을 내리깔아야 물을 본다. 땅바닥처럼, 땅

바닥의 한 부분처럼, 땅바닥의 변형처럼.

  물은 희고 반짝이며, 형태 없고 신선하며, 수동적이라 

못 버리는 한 가지 아집이라면 그것은 중력. 그 아집 못 

버려 온갖 비상수단 다 쓰니 감아 돌고 꿰뚫고 잠식하고 

침투한다.

  그 내면에서도 그 아집은 또한 작용하여 물은 끊임없이 

무너지고, 순간순간 제 형상을 버리고, 오직 바라는 것은 

저자세, 오체투지의 수도사들처럼 시체가 다 되어 땅바

닥에 배를 깔고 넙죽이 엎드린다. 언제나 더 낮게, 이것이 

물의 좌우명. '향상(向上)'의 반대. 


(역: 김화영) 



서가에서 책을 꺼내 읽는다. 오랜만에 읽는 이름. 프랑시스 퐁주. 물에 대한 시다. 물은 정말 그렇다. 그렇구나. 



(6월 10일. 어딘가에서) 



하지만 물처럼 살지는 못하리라. 물은 물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별은 별대로. 그렇다면 나는, 나는 어떻게? 


다시 시집을 읽어야겠다. 나이가 들어 다시 시집을 읽게 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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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시몬느, 눈은 그대의 목처럼 희고,

시몬느, 눈은 그대의 무릎처럼 희다.


시몬느, 그대의 손은 눈처럼 차고,

시몬느, 그대의 가슴은 눈처럼 차갑다.


눈은 볼의 키스에만 녹는데,

그대 가슴은 이별의 키스에만 녹는가.


눈은 소나무 가지에서 슬픈데

그대 이마는 밤빛 머리칼 밑에서 슬프구나.


시몬느, 그대의 동생 눈은 정원 속에서 잠들고 있다.

시몬느, 그대는 나의 눈, 나의 사랑. 


- 레미 드 구르몽Remy de Gourmont (1838 ~1915)  

(오증자 옮김, 정우사, 1976년)  






퇴근길, 길가 헌책방엘 들렸다. 알라딘이 아니라 진짜 헌책방. 그리고 이 책을 들고 나왔다. 오증자 교수. 한때 성실했던 프랑스문학 번역가였지만, 지금은 그녀의 번역서는 거의 없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그녀의 번역작인데, 그녀 남편은 유명한 연극연출가 임영웅이다. 그래서 아직까지 출판되고 있는 걸까. 


정말 오랜만에 구르몽의 시를 소리 내어 읽었다. 소리 내어 읽으니, 술 생각이 났다. 나이가 들어도 좋은 시 읽을 때, 술 생각 나는 건 어쩌지 못하는 모양이다. 


요즘 사람들은 구르몽의 시를 알까. 쓸쓸하기만 한 6월 밤이다. 나라는 엉망이 되었고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로 변해간다. 이제 시인도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소문이 들린다. ... ... 나는 어쩌지. 이별의 키스에만 녹는 가슴을 가진 채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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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달력 





몇 번의 계절이 지나고

이제 우울한 벚꽃은 하얗게 썩어버렸다

마차는 덜컹덜컹 먼 곳을 달리고

바다도 시골도 고요한 공기 속에서 잠자고 있다

어쩌면 이다지도 게으른 날일까

운명은 연달아 어두워져 가고

쓸쓸한 우울증은 버드나무 잎 그늘에 흐려져 있다

이제 달력도 없다 기억도 없다

나는 제비처럼 홀로서기를 해, 그리하여 신기한 풍경 끝을 날아가겠다

옛날의 사랑이여 사랑하는 고양이여

나는 하나의 노래를 알고 있다

그리하여 먼 해초를 태우는 하늘에서 짓무르는 것 같은 키스를 던지겠다

아마 이 슬픈 정열 이외는 그 어떤 단어도 알지 못한다



- 하기와라 사쿠타로(지음), 서재곤(옮김), <우울한 고양이>, 지만지 

*   * 



하기와라 사쿠타로(萩原 朔太郎, 1886 ~ 1942)의 시를 읽는다. 사쿠타로도 오랜만이구나. '쓸쓸한 우울증'이라는 단어를 읽곤 아, 우울증은 쓸쓸했구나 라며 작은 소리로 되뇌었다. 젊은 시절의 사쿠타로도 꽤 쓸쓸했나 보다, 하는 생각도 잠시, 그의 말년은 일본주의자로 점철되어 있다. '일본 근대시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으나, 한국에 소개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하기와라 사쿠타로의 1923년 시집, <우울한 고양이>



1924년의 하기와라 사쿠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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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전원시 




지금 이 시간에 

내 안데스의 사랑하는 동심초와 앵두 같은 리타는 뭘 하고 있을까;

비잔티움은 날 질식시키고

내 몸속엔 풀어진 코냑 같은 피가 잠을 청하는데.


하얀 오후에 속죄의 자세로 옷을 다리던

그녀의 손들은 어디에 있을까;

지금 비가, 내 삶의 의욕을 앗아가는 비가,

가없이 내리는데.


그녀의 플란넬 치마랑 무슨 상관일까;

그녀의 열망; 그녀의 걸음새;

달콤한 사탕수수에 바친 노동.


문에 기대어 황혼 한 줄기를 바라보고 있겠지.

마침내 떨며: "이런 ...... 오늘은 정말 춥구나!"

한 마리 야생의 새도 울겠지, 기왓장 위에서. 


- 세자르 바예호 지음, 구광렬 옮김 



세자르 바예호César Vallejo의 시다.  20세기 남미 최고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국 독자에겐 생소하다. 나도 십수년 그의 이름을 르네 샤르를 사랑하는 소설가가 쓴 어느 프랑스 소설에서 '세자르 발레조'로 읽었다. 그 이후 잊고 지내다 노트 정리 중에 그를 발견하곤 번역된 시집을 찾았다. 


잠시 집에서 쉬는 어느 아침, 그의 시를 읽으며,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내 삶의 의욕을 앗아가는 비가 내리지도 않는데, ... 이미 사랑은 지나가 잊혀졌는데, ... 세상은 이미 어두워져 포기만이 남았는데, ... ... 그런데도 왜 울컥했던 걸까. 


그래, "이런 ... ... 오늘은 정말 춥구나!" 




세자르 바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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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원의 <가슴 붉은 딱새>(문학동네, 1996년 초판)을 꺼내 읽는다. 그리고 늘 생각나는 시 한 편을 옮긴다. 우리에게는 단종으로 알려진, 노산군이 17세 지은 시(詩)다. 



원통한 새가 되어서 제궁을 나오니

외로운 그림자 산중에 홀로 섰네

밤마다 잠들려 해도 잠 못 이루어

어느 때 되어야 이 한 다 할꼬

두견새 소리 그치고 조각달은 밝은데

피눈물 흘러서 봄꽃은 붉다

하늘도 저 애끓는 소리 듣지 못하는데

어찌하여 시름에 찬 내 귀에는 잘도 들리는고

- 노산군(魯山君), <자규시(子規詩)>, 1457년. 



17세의 사내가 지은 시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1996년 이 시를 읽고 한참 울었다. 문득 이 시를 읽으며, 그 때의 상념에 젖는다. 이 시를 짝사랑하던 여대생에게 보내주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참 무모한 짓이었구나. 시인 오규원 선생님이 작고한 지도 이제 꽤 되었구나....  



17세는, 서툰, 그러나 피가 붉고 가슴이 뜨거운 시인의 나이이다. 더욱 16세기의 17세는 지금과 달라서 자식이 하나쯤 있을 수 있는 나이이며, 과거에 급제할 수 있는 나이이기도 하다. 더구나 노산군은 한 나라의 왕이었다가 강봉되어 귀양온 사내다. (... ...) 아, "피눈물 흘러서 봄꽃은 붉다(血流春谷落花紅)"니! 정말 그가 시인이었을까, 아니면 비극이 그의 얼굴을 빌려서 참담하게 아름다운 한 시구를 역사 속에 편입시킨 것일까? 

- 오규원, <가슴 붉은 딱새>, 41쪽에서 





***



자규시 원문


一自寃禽出帝宮 

孤身隻影碧山中 

假眠夜夜眠無假 

窮恨年年恨不窮 

聲斷曉岑殘月白  

血流春谷落花紅 

天聾尙未聞哀訴 

何乃愁人耳獨聰 


출처: http://www.sungyoung.net/oldstory/jagyusi.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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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때 외우고 다녔는데, 지금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하긴 이 시집을 꺼내 뒤적인 것도 거의 십 년만인가. 아니면 더 되었나. 


이진명,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1992년. 


시집 첫 머리에 등장하는 짧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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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to-day the struggle." ...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시 구절이라는 생각에 한글로 옮겼다. 역시 영시는 한글로 옮길 수 없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뜻을 통하게 옮길 수 있지만, 영어 고유의 맛을 옮길 순 없었다. 옮긴다면 아예 새로 창작한다는 기분으로 옮겨야 하고, 이럴 땐 번역이 아니다. 


아는 지 모르겠지만, 스페인은 20세기 대부분은 프랑코 독재 정권의 시대였고, 20세기 초반 무수한 유럽 지식인들이 '국제 여단Brigadas Internacionales)'이라는 이름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게 된다. 소설가이자 프랑스 초대 문화부 장관인 앙드레 말로도 이 전쟁에 참여하였고, 오든(W.H.Auden)은 구구절절하게 스페인 내전 참전을 독려하는 시를 적었는데, 바로 아래 <스페인 1937>라는 시다. 


2014년, 한국, 서울 속에서 살면서, 개인적으로도 참 많은 일들이 있었고 힘들었고 견디기 어려웠지만, 사회적으로는, 차마 내 개인적 삶이 엉망이 되었어요,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그런데 조용하기만 하다. 

이 기묘한 침묵은 무엇일까?


오든은 이야기한다. '오늘은 투쟁이라네(to-day the struggle)' 

내일은 2015년, 나에게, 혹은 우리에게 필요한 건 바로 struggle일 것이다. 

분명한 목적이 있고 가치가 있는, 그리고 그것을 향한 전력투구!  



** 




Spain 1937 



                   - W.H.Auden



Yesterday all the past. The language of size

Spreading to China along the trade-routes; the diffusion

Of the counting-frame and the cromlech;

Yesterday the shadow-reckoning in the sunny climates. 


모든 과거가 있었던 어제. 크기를 나타내는 언어는

무역로를 따라 중국으로 퍼져나가고; 확산되는

주판 계산기와 고인돌. 

어제 태양이 비치는 세월 속에 간접계산법이 있었네.



Yesterday the assessment of insurance by cards

The divination of water; yesterday the invention

Of cart-wheels and clocks, the taming of 

Horses. Yesterday the bustling world of the navigators.


어제 서류를 통한 보험이 있었고 

해로를 예측하고; 어제 발명되었네

수레바퀴들과 시계, 길들인

말들. 어제 항해자들로 북적거렸던 세계가 있었지.



Yesterday the abolition of fairies and giants,

The fortress like a motionless eagle eyeing the valley.

The chapel built in the forest; 

Yesterday the carving of angels and alarming gargoyles.


어제 요정들과 거인들이 사라졌고

그 요새는 마치 계곡을 향한 독수리의 움직이지 않는 눈짓 같았지. 

숲 속에 지어진 성당; 

어제 천사들의 조각들과 불안하게 만들던 괴물석상들이 있었네



The trial of heretics among the columns of stones;

Yesterday the theological feuds in the taverns 

And the miraculous cure at the fountain;

Yesterday the Sabbath of witches; but to-day the struggle. 


이단자들의 재판이 돌기둥 가운데서 열리고;

어제 선술집에서 신학에 대한 논쟁이 있었네.

그리고 수원지(水源地)에서의 기적적인 치료

어제 마녀들의 연회가 있었지; 그러나 오늘은 투쟁이라네. 



Yesterday the installation of dynmos and turbines,

The construction of railways in the colonial desert;

Yesterday the classic lecture 

On the origin of Mankind. But to-day the struggle. 


어제 발전기와 터빈의 설치가 있었고,

식민지의 사막에 철도 공사가 있었네; 

어제 그 최고의 강의에선

인류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했지; 그러나 오늘은 투쟁이라네.



Yesterday the belief in the absolute value of Greek,

The fall of the curtain upon the death of a hero;

Yesterday the prayer to the sunset,

And the adoration of madmen. But to-day the struggle.


어제 그리스의 고귀한 가치에 대한 믿음이 있었지.

영웅의 죽음 위로 내려오는 커튼. 

어제 일몰에 대한 기도가 있었네

그리고 미친 자들의 찬미. 그러나 오늘은 투쟁이라네. 



As the poet whispers, startled among the pines,

Or, where the loose waterfall sings, compact, or upright 

On the crag by the leaning tower; 

“Oh my vision. O send me the luck of the sailor.” 


시인이 속삭일 때, 소나무들 사이에서 깜짝 놀라,  

또는, 한가한 폭포가 노래하는 곳에서, 긴장해서, 또는 서서 

기울어지는 탑 옆 바위 위에

오 나의 비전이여, 오 나에게 선원의 운명을 다오 



And the investigator peers through his instruments

At the inhuman provinces, the virile bacillus

Or enormous Jupiter finished 

“But the lives of my friends. I inquire. I inquire.”


그리고 탐구자는 그의 기구를 들여다 보며

인간 밖의 영역에서, 강력한 세균, 

또는 이미 탐구가 끝난 거대한 목성 

“그러나 내 벗들의 삶들. 나는 묻는다, 나는 묻는다.”



And the poor in their fireless lodgings, dropping the sheets

Of the evening paper: “Our day is our loss, O show us 

History the operator, the 

Organiser, Time the refreshing river.” 


그리고 가난한 이들은 한 점 불도 없는 셋방에서, 종이 한 장을 떨어뜨리네

석간 신문 속에서: “우리의 날은 우리의 상실, 오, 우리에게 보여주시오 

역사라는 운행자여, 

조직자여, 강물을 끊임없이 정화시키는 시간이여.” 



And the nations combine each cry, invoking the life

That shapes the individual belly and orders

The private nocturnal terror; 

“Did you not found the city state of the sponge,


그리고 민중들은 그들 각자의 비명을 하나로 묶고, 그들의 생명을 불러일으키며 

각자의 배를 만들며 행하네.

한밤 중의 은밀한 테러를

“생명이여, 그대는 해면동물의 도시 국가를 찾았는가?  



Raise the vast military empires of the shark 

And the tiger, establish the robin’s plucky canton?

Intervene. O descend as a dove or 

A furious papa or a mild engineer, but descend.” 


거대한 군사 제국을 성장시켰는가? 상어와 

호랑이의. 세웠는가? 울새의 용기 있는 작은 지역을 

개입하라. 오 비둘기 한 마리처럼 내려가라, 또는

화가 난 교황, 또는 온화한 기술자처럼, 그러나 내려가라.”



And the life, if it answers at all, replies from the heart

And the eyes and the lungs, from the shops and the squares of the city:

"O no, I am not the Mover;

Not to-day; not to you. To you, I'm the


그리고 생명이여, 만약 대답한다면, 대답하거라, 심장으로부터

그리고 눈동자와 허파로부터, 가게들과 그 도시의 광장으로부터: 

“오, 아니구나. 나는 원동력이 아니다;

오늘도 아니고, 네겐 아니다. 너에게, 나는 그저 



Yes-man, the bar-companion, the easily-duped;

I am whatever you do. I am your vow to be

Good, your humorous story.

I am your business voice. I am your marriage.


예스맨이고, 술집 친구이고 쉽게 속는 사람이라네. 

나는 그대가 무엇을 하던지, 나는 당신의 맹세입니다,

좋게 되기 위한. 당신의 유머러스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당신의 사업 목소리이며 당신의 배우자입니다.  



What's your proposal? To build the Just City? I will.

I agree. Or is it the suicide pact, the romantic

Death? Very well, I accept, for

I am your choice, your decision. Yes, I am Spain." 

 

당신의 제안은 무엇인가요? 정의로운 도시를 세우는 것인가요? 나는 할 것입니다.

나는 동의합니다. 또는 동반자살을 하실 건가요? 그 낭만적인

죽음? 정말 그럼, 저는 동의 합니다. 왜냐면

나는 당신의 선택이며, 당신의 결정입니다. 그래요. 저는 스페인입니다.” 



Many have heard it on remote peninsulas,

On sleepy plains, in the aberrant fisherman's islands,

Or the corrupt heart of the city,

Have heard and migrated like gulls or the seeds of a flower.


많은 이들이 머나먼 반도에서 그것을 들었네. 

나른한 평원 위에서, 비정상적인 선원들의 섬나라에서, 

또는 도시의 타락한 심장부에서

갈매기떼나 꽃씨들과 같이 듣고 이주해오는구나. 



They clung like burr to the long expresses that lurch

Through the unjust lands, through the night, through the alpine tunnel;

They floated over the oceans;

They walked the passes. They came to present their lives.


그들은 가시 달린 열매들처럼 달라붙어 있구나, 기나긴 급행열차에 달라붙어 휘청거리며,

정의롭지 못한 땅을 지나며, 밤을 통과하며, 알프스 산맥의 터널을 지나며; 

그들은 대양들을 떠다녔다

그들은 산길을 걸어갔다. 그들은 그들의 생명을 보여주며 갔다. 



On that arid square, that fragment nipped off from hot

Africa, soldered so crudely to inventive Europe,

On that tableland scored by rivers,

Our fever’s menacing shapes are precise and alive.


그 불모의 사각형 위에, 뜨거운 아프리카에서 떼어낸 조각, 

납땜질된, 창의적인 유럽에 대강 납땜질되어 붙은

강줄기에 의해 금이 그인 대지 위에 

우리들의 열병의 위협적인 형체들은 명확하고 생생하다.



To-morrow, perhaps, the future; the research on fatigue

And the movements of packers; the gradual exploring of all the

Octaves of radiation;

To-morrow the enlarging of consciousness by diet and breathing.


내일은, 아마도, 미래가 있겠지; 피곤에 대한 연구가 있고 

짐 꾸린 사람들의 움직임들이 있고; 

빛의 모든 옥타브에 대한 점증적인 탐험이 있고 

내일은 식이요법과 호흡작용에 의한 의식의 확장이 있을 것이네. 



To-morrow the rediscovery of romantic love,

The photographing of ravens; all the fun under

Liberty's masterful shadow;

To-morrow the hour of the pageant-master and the musician,


내일은 낭만적 사랑의 재발견이 있고 

까마귀 떼의 사진촬영이 있고; 모든 즐거운 것들이 

자유의 거대한 그림자 아래 있을 것이라네 

내일은 화려한 무대의 연출자와 음악가의 시간이 있을 것이네. 



To-morrow for the young the poets exploding like bombs,

The walks by the lake, the winter of perfect communion;

To-morrow the bicycle races

Through the suburbs on summer evenings: But to-day the struggle.


내일은 젊은 시인들이 폭탄처럼 터져 시를 쓸 것이라네.

호수를 따라 걸으며, 완전한 결합을 이룬 겨울, 

내일은 자전거 경주가 

여름 저녁 교외를 따라 있을 것이네; 그러나 오늘은 투쟁이라네. 



To-day the inevitable increase in the chances of death;

The conscious acceptance of guilt in the necessary murder;

To-day the expending of powers

On the flat ephemeral pamphlet and the boring meeting.


오늘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의 확률이 증가하고 있다네.

살인의 필요함, 그 범죄를 알면서 받아들여야 하지.

오늘, 우리의 힘은 빠지고 있지.

맥없고 덧없는 팜플렛과 지루한 회합 위에서



To-day the makeshift consolations: the shared cigarette;

The cards in the candle-lit barn, and the scraping concert,

The masculine jokes; today the

Fumbled and unsatisfactory embrace before hurting.


오늘 일시적인 위안들이 있지; 나누어 피는 담배;

촛불로 밝힌 곳간에서의 카드놀이, 그리고 삐걱대는 음악회,

사내들의 걸쭉한 농담; 오늘은 

전투 앞의 서투르고 불만족스러운 포옹이 있네



The stars are dead; the animals will not look:

We are left alone with our day, and the time is short and

History to the defeated

May say Alas but cannot help nor pardon.


별들은 죽었네; 동물들은 쳐다보지 않겠지.

우리들은 우리들의 시대에 홀로 남겨졌지, 시간은 짧고

역사는 패배한 자들에게 

유감이라곤 하진 않겠지만, 도움도 용서도 없을 테지. 




** 




W. H. Auden(1907~1973)의 시 <Spain 1937>의 번역으로 원문은 아래와 같다. 원시는 1937년 <Spain>으로 발표하였으나, 1940년 Auden이 출판한 <<Another Time>>에서 <Spain 1937>로 제목을 바꾸고 일부 내용을 삭제하고 수정하여 실었다. 위키피디아의 <Spain(Auden)> 항목에 따르면, 후에 그는 작품 선집(his collected editions)에서는 이 작품을, 결코 믿지 않았던(never believed) 정치적 견해가, 그의 생각에는 수사적으로 효과적으로 표현된 “정직하지 못한”(dishonest) 시로 여겨 거부했다고 한다. 


이 시의 원문은 한국방송통신대학(Korea National Open University) 영어영문학과 4학년 전공수업교재인 <<영미시 British and American poetry>>(김문수, 이두진, 이철 공저)에서 옮겼으며, 번역은 교재의 주석, 김문수 교수님의 수업 내용을 참고하여 번역하였다. 



W.H. Auden

by Cecil Beaton

vintage bromide print on white card mount, 1930

9 1/2 in. x 7 5/8 in. (240 mm x 195 mm)

Given by Cecil Beaton, 1968

http://www.npg.org.uk/collections/search/portrait/mw18383/WH-Au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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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열기

보르헤스(지음), 우석균(옮김), 민음사 




그의 소설들을 떠올린다면, 보르헤스의 시도 딱딱하고 건조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너무 지적이고 형이상학적이며 수수께끼처럼 펼쳐지지 않을까 추측한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도리어 소설가 보르헤스는 잊고 시인 보르헤스만 기억에 담아두게 될 터이다. 


그렇게 몇 주 보르헤스의 시집을 읽었고 몇몇 시 구절들을 기억하게 된다. 


시집 읽는 사람이 드문 어느 여름날, 세상은 저주스럽고 슬픔은 가시질 않는다. 행동이 필요한 지금, 어쩔 수 없이 반성부터 하게 되는 현실을, 미래보다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탓하게 되는 상황 앞에서 보르헤스가 아르헨티나 사람이라는 것이 새삼스럽기만 하다. (...)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거리들은

어느덧 내 영혼의 고갱이라네.

분주함과 황망함에 넌덜머리 나는

격정의 거리들이 아니라

나무와 석양으로 온화해진

아라발의 감미로운 거리,

불후의 광대무변에 질려

대평원 그리고 참으로 광활한 하늘이 자아내는

가없는 경관으로 감히 치닫지 못하는

소박한 집들이 있는,

자애로운 나무들마저 무심한 한층 외곽의 거리들.

이런 모든 거리들은 영혼을 탐하는 이들에겐

행복의 약속이라네.

숱한 삶이 집안에만 은거하길 거부하며

거리의 보호 아래 형제애를 나누고 

우리네 희망이 부풀려진 영웅적 의지로

거리를 떠다니기에

깃발처럼 거리가 

사방으로 펼쳐지네

우뚝 솟은 내 시에서

그 깃발이 하늘을 펄럭이기를.

- <거리> 전문 







본질은 언제나 상실되는 것.

영감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법칙이지.

달과의 내 오랜 실랑이에 대한

다음 요약은 피할 수 없을.


나는 달은 어디서 처음 봤는지 모르네.

앞서의 그리스인이 말한 하늘에서였는지,

우물과 무화과나무의

정원으로 기우는 오후에서였는지


유전하는 이 삶은

어찌 되었든 무척 아름다울 수도 있지.

그런 순간에 우리 모두 너를 바라보던

오후가 있었네. 아, 모든 이의 달이여. 

- <달> 중에서.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열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저 | 우석균역 | 민음사 | 2014.03.20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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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고양이(靑猫)




이 아름다운 도시를 사랑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이 아름다운 도시의 건축을 사랑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모든 상냥한 여성을 찾기 위해

모든 고귀한 생활을 찾기 위해

이 도시에 와서 번화한 거리를 지나가는 것은 좋은 것이다.

거리를 따라 서 있는 벚나무 가로수

거기에도 무수한 참새들이 지저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아 이 거대한 도시의 밤에 잠들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마리의 우울한 고양이 그림자다

슬픈 인류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고양이 그림자다

우리가 찾기를 그치지 않는 행복의 우울한 그림자다.

어떤 그림자를 찾기에

진눈깨비 내리는 날에도 우리는 도쿄(東京)를 그립다고 생각해

그곳 뒷골목 벽에 차갑게 기대어 있는

이 사람과 같은 거지는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 하기와라 사쿠타로(1886 ~ 1942) (서재곤 역) 






점심 식사 대신 우울한 고양이를 만난다. 아, 어느 새 나는 술 취하고 싶은 한 마리 고양이 꿈을 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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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기억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지음), 황병하(옮김), 민음사 





나이가 든다는 것, 그건 보이지 않는 것, 가려진 것, 지금 없지만 다가오는 공포에 신경쓰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지상에서의 시간을 쌓아갈수록 갑작스레 부는 바람에서 계절의 수상함을 알고, 사랑하는 여인의 뜬금 없는 키스의 따스함 속에 깃든 슬픈 이별의 메세지를 읽으며, 길을 지나는 이름없는 행인의 무표정한 얼굴 아래로 차마 말할 수 없는 인생의 고단함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나도 나이를 먹고 있었다. 


민음사에서 나온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전집 중 마지막 권인 <셰익스피어의 기억>을 읽었다. <모래의 책El Libro de arena>(1975)<셰익스피어의 기억La memoria de Shakespeare>(1983)을 묶어 번역한 이 책은 짧지만 보르헤스의 세계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소설집이다. 


나에게 보르헤스는, 내가 그를 알고 지낸 지난 20여년간 포스트모더니즘, 현대 소설가의 최고봉, 알레고리, 무수한 현대소설가에게 영향을 준 이, 백과사전, 자기반영성 등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나이가 드는 것, 죽는 것, 의미 없음의 공포를, 그리고 사랑의 위대함과 버려야만 완성되는 어떤 예술을 알고 있는 소설가였다. 


그의 문장은 짧고 딱딱했지만, 그 딱딱함은 거친 세월의 때가 묻은 낡은 나무 문짝의 것이었다. 알레고리와 은유로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도, 결국에는 우리가 잃어버린 사랑, 추억, 자기 자신을, 그리고 우리가 시작했던 문명의 시작을 되새기고 있었다.


대학 시절 읽었던 보르헤스는 없었고, 이제서야 보르헤스를 제대로 읽게 된 것이다. 며칠 전 번역되었으나, 아직 읽지 못한 보르헤스의 책 수 권을 주문해 읽기 시작했다. 





 







셰익스피어의 기억 - 보르헤스 전집 5

보르헤스저 | 민음사 | 2007.05.15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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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김경주 (지음), 문학과 지성사 







시인 김경주의 소문을 듣고 이 시집을 산 지도 꽤 시간이 흘렀고, 이제서야 끝 페이지까지 읽었다. 실은 무수히 이 시집을 읽었고 그 때마다 첫 몇 페이지를 읽곤 숨이 턱턱 막혀와 더 이상 읽지 못했다. 그의 시적 상상력와 언어 구사는 탁월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런 이유로 다 읽지 않았지만, 그 동안 많은 이들에게 이 시집을 추천했다. 젊은 시인들 중에서(최근에 시집을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가장 뛰어난 시적 재능을 가진 것으로 평가받았고, 내가 읽은 바 그의 첫 시집은 독창적인 시적 세계와 울림을 보여주고 있으니. 


그래서 그런 걸까. 그의 시는 친절하지 않다. 그는 여러 겹의 은유들로 자신의 세계를 꾸미고 있었다. 한 쪽에서는 음악으로, 한 쪽에서는 이국적인 풍경으로, 한 쪽에서는 성적이고 육체적인 내밀함으로. 이 세 방향은 서로 어우러져 서로를 떼어낼 수 없다. 딱딱하기도 했고 물렁하기도 했다. 슬프고 우울하기도 했지만, 그 슬픔과 우울은 정상적인 형태가 아니어서 눈물을 흘리고 울어도 풀리지 않는 마음의 오래된 상처같았다. 


그렇게 시는 얇은 꽃잎같은 성벽에 둘러싸인 채,  때이르게 찾아온 초여름 더위 속에서 만발한 꽃들의 향기 속으로 독자를 초대하고, 금세 내 오감은 시에 취해 흔들거렸지만, 때로(혹은 자주) 시를 읽는 내 마음과는 만나지 못했다. 어쩌면 그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고 계절의 향기만 가득한 것일지도. 


그래도 이 시집은 참 좋다. 세상과 참 멀리 있는 듯한 풍경을 언어로 수놓고 있는 탓에, 여행가는 듯한 기분을 우리에게 전해주며, 서가에 꽂아두고 오래 읽을 수 있는 몇 되지 않는 시집이다.  


시집을 읽으면서 메모 해둔 몇몇 구절을 옮긴다. 




외로움이라는 인간의 표정 하나를 배우기 위해 산양은 그토록 많은 별자리를 기억하고 있는지 모른다 바바게스트 하우스 창턱에 걸터앉은 젊은 붓다가 비린 손가락을 물고 검은 물 안을 내려다 보는 밤, 내 몸의 이역(異域)들은 울음들이었다고 쓰고 싶어지는 생이 있다 눈물은 눈 속에서 가늘게 떨고 있는 한 점 열이었다 

- <내 워크맨 속 갠지스> 중에서



무명(無名)의 별에서 별 한 채가 날아옵니다 그 빛의 세월이 내 눈까지 날아오는 데 걸리는 음악의 생은 또한 얼마나 고독해야 하는가요 외로운 사람은 눈을 감고 걷고, 눈이 외로운 사람은 강심(江心)에 그 눈의 음(音)을 숨겨야 하는 밤입니다

- <아우라지> 중에서



속으로 뜨겁게 뒤집었던 시간을 열어보이며

몸의 열을 다 비우고 나서야

말라가는 생이 있다

봄날은 방에서 혼자 끓고 있는

밥물의 희미한 쪽이다

- <눈 내리는 내재율> 중에서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김경주저 | 문학과지성사 | 2012.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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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여관

이병률저 | 문학과지성사 | 2013.09.22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눈사람 여관

이병률 시집, 문학과 지성 시인선 434 




최근에는 일 년에 시집 한 권 읽는 듯 싶다. 그리고 시집 리뷰는 건성, 건성으로 쓰는 듯하고. 일상의 대부분이 사무실에서 산더미와 같은 업무와 스트레스로 시달리는 지금, 시집은 ... 참 멀리 있기만 하다. 이병률. 그의 글은 시보다 산문으로 먼저 알게 되었다. 그것도 여행기. 하지만 이것도 건성, 건성 읽었으니, 이번에 읽은 그의 시집, <눈사람 여관>이 처음 읽는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시집을 다 읽고 노트에 짧게 감상을 적었는데, 그가 읽는다면, 불편해 하거나 불쾌해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했다. 시는 소설과 달라, 드물지 않게 시를 읽으며 시 속의 시인을 만난다. 그리고 독자는 그것이 맞든 틀리든 지레짐작으로 어떤 이겠구나 여긴다. 이 시집에 대한 내 감상은 그렇게 시작해 끝난다. 


* * 


그는 손을 내밀지 않는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견디고 걸어간다. 그 걸음걸이는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다. 바람따라 걸어갈 뿐이다. 가끔 가슴 설레기도 하고 사랑에 빠지기도 하며 수줍은 고백을 할 터이지만, 세상 풍경은 어제나 오늘이나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이병률은 그것을 안다.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이기적이다. 혼자 있기 위해서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동시에 비겁한 일이기도 하다. 이기적이지만, 종종 아름답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다. 그건 스스로를 늘 들여다보기 때문이고, 들여다보면서도 아무 것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바람따라 걸어가며 글을 쓸 뿐이다. 다행인 것은 그는 스스로를 내려놓거나 자책하거나 도망가진 않는다. 그저 스스로를 훔쳐볼 뿐. 





낙화



                                                    이병률



그대가 일하는 곳 멀리 자전거를 세우고

그대를 훔쳐보는 일처럼


반쪽의 반쪽밖에 안 되는 나는

비겁이라는 꽃 이파리 머리에 꽂고

시시덕 시시덕 오늘도 얼마나 비겁했던가요


당신이 자전거 쪽으로 다가와

우산을 버리고 돌아설 때에도

나는 비겁을 뒤집어쓰고 몸을 돌려 서 있습니다

그 자리에 당신 그늘이 생깁니다


천 년에 한 번 사랑을 해서 그런 거라고

그게 아니라면 머릿속에 그토록 많은 꽃술이 매달릴 수가

천 년에 한 번 죽게 될 테니 그렇게 된 거라고 

아니면 그토록 한 사람의 독으로 서서히 죽어갈 수야 


혼자인 것은 비겁하지 않은데

당신을 훔쳐보는 일은

당신 하는 일 앞에서 비겁한 일이어서


십 년을 백 년처럼 

당신을 보러 이곳에 오고

당신은 어느 바다로 흘러가지도 않으며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도 주차할 수 없는 구역에

단독 주차하는 나를 위해

마냥 봄처럼 십 년을 당신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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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식당 



                                                                  이영주 




헝가리 식당에 앉아 있다. 내 목을 만져보면서. 침묵에는 아무 맛도 나지 않는다는 것을 ... ... 이런 기후는 맛없이 천천히 간다. 


아무런 이상 징후가 없는. 아름다운 철창 밑에 있다. 원래의 언어로 돌아가는 것인가. 조용히 있다 보면 감각은 끔찍해진다.


수염까지 붉게 물든 남자는 접시에 혀를 대고 있다. 오도카니 앉아서. 철창을 두드리며 바람이 들어온다. 


동쪽에 있는 식당. 맛없는 내가 앉아서 오래된 폐허를 헤집으며 속을 파고 있을 때.


무섭고 겁이 날 때. 수염 달린 남자는 창문을 연다. 향수병에 걸린 감각은 바람 따라 흐른다. 웅웅웅 울림소리를 낸다. 동쪽은 은신처가 아니지. 수염 사이로 붉은 침이 뚝뚝 떨어진다. 우리는 혼자서 밥을 먹는다. 


많이 다쳤을 때는 밥을 먹어야지, 그래야 기운을 내지, 이 식당에 오면 죽은 할머니의 목소리가 가득하다. 그럴 때면 세상이 맛없게 천천히 간다고 생각했다. 


침묵을 먹으면 알 수 있다. 어떤 슬픈 이야기도 죽지 않고 그릇 안에 담겨 있다. 




<<문학과 사회>> 2013년 가을호. 



도서관 열람실에 앉아 잠시 계간지에 시를 읽는다. 왜 '헝가리 식당'일까, 잠시 생각해본다. 창 밖은 이미 짙은 어둠으로 채워져 있고 사람들은 말 없이 책을 읽고 있다. 그리고 말 없이 작은 도서관 건물을 나갔다. 


말 없이 있어도 용서되는 도서관이 나는 좋다. 말 없어도 이야기로 가득 차는 공간. 말 없어도 말들로 넘쳐나는 공간. 말 없지만 책장 넘기는 소리, 책을 향해 걸어가는 소리, ... 그리고 그녀가 하얀 손으로 긴 머리칼을 귀 위로 넘기며 가는 목으로 가 닿는 소리,들이 내 살갗에 닿을 때의 느낌이 좋다. 


몇 년만에 도서관에 그렇게 길게 앉아 시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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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강변 



                                           이병률 




나는 가을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길을 잃고 

청춘으로 돌아가자고 하려다 그만두었습니다 


한밤중의 이 나비 떼는

남쪽에서 온 무리겠지만 

서둘러 수면으로 내려앉은 모습을 보면서

무조건 이해하자 하였습니다


당신 마당에서 자꾸 감이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팔월의 비를 맞느라 할 말이 많은 감이었을 겁니다.

할 수 있는 대로 감을 따서 한쪽에 쌓아두었더니

나무의 키가 훌쩍 높아졌다며 

팽팽하게 당신이 웃었습니다


길은 막히고 

당신을 사랑한 지 이틀째입니다. 



- <<눈사람 여관>> 중에서 

*** 



선릉역 지하 개찰구를 나와 지상으로 올라오는 계단 중간 즈음, 하얀 보푸라기가 날리듯 흩어지는 눈송이들을 보았다. 잠깐. 지하 전철역에서 인근한 빌딩 3층으로 가는 동안. 그리고 세 시간이 걸린 지리하고 불편하기만 했던 회의가 끝나자, 어둠이 왔고 눈은 사라졌다. 앞으로 눈은 계속 내릴테지만, 나에겐 시간은 없고, 없는 시간은 새로 만들어지는 법 없이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기만 한다. 


지난 주말, 스산한 마음과 안타까움에 책을 읽었다. 오래만에 든 시집이었다. 그리고 '시집을 좋아하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모든 일이 잘 돌아가지 않을 때는 가장 좋은 것은 누군가를 핑계거리 삼는 것이다. 그리고 핑계거리가 사라지면, 자기 자신이 핑계거리가 되거나 새로운 핑계를 찾기 위해서 방랑할 것이다. 스스로 핑계거리를 내세우지 않으려고, 그리고 스스로가 핑계거리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어느 늦가을, 불편한 눈송이들은 쌓이지 않고 거리 위로 물기로 스며들었다. 그렇게 내 마음도 스며들고 얼어붙는다. 


마음 막히는 밤이 왔고 술 생각이 간절해지는 추위가 사무실을 에워싼다. 피부는 건조해지고 손가락 끄트머리에 이름 모를 풀 한 포기 자라나다가 금방 마른다. 길을 잃고 청춘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어느 11월, ... 길도 막히고 마음도 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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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리에 들기 전 서가에서 낡은 시집 한 권을 꺼내 소리내어 읽는다. 




어떤 영혼들은 ...... 

1920년 2월 8일 



     어떤 영혼들은 

푸른 별들을 갖고 있다.

시간의 갈피에 

끼워놓은 아침들을,

그리고 꿈과

노스탤지어의 옛 도란거림

이 있는

정결한 구석들을.


      또 다른 영혼들은

열정의 환영(幻影)들

로 괴로워한다. 벌레 먹은

과일들. 그림자의

흐름과도 같이

멀리서

오는 

타버린 목소리의

메아리. 슬픔이 없는 

기억들.

키스의 부스러기들.


       내 영혼은

오래 익어왔다; 그건 시든다,

불가사의로 어두운 채.

환각에 침식당한

어린 돌들은

내 생각의 

물 위에 떨어진다.

모든 돌은 말한다: 

"신(神)은 멀리 계시다!" 


- 로르카, <강의 백일몽>, 정현종 옮김, 민음사, 2003년. 





이 밤, 로르카 시집이 있다는 건 정말 큰 위안이다. 





강의백일몽 [개정]

로르카저 | 정현종역 | 민음사 | 2003.03.20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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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1년 만에 시집을 샀다. 실은 1년이 더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한참동안 글을 썼고 아주 가끔 신춘문예에 응모하기도 했으나, 


이것도 십 수년 전 일이니, 시집은 나로부터 참 멀리있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 사무실에서 이병률의 시집을 펼친다. ... 참 어울리지 않는 짓이다. 





나도 건달이고 싶다, 철없이 로맨틱하기만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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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게,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 비가 내리고 우리들의 일상은, 놀랍도록 조용히 흘러간다. 지하철에서 내려 걸어가는 동안, 나는 간밤 바람에 떨어진 나뭇잎들을 밟았다. 사무실로 걸어가는 동안, 지나치게 되는 어느 중학교 뒷편은 고요했고 무채색 아파트 벽에는 정적만이 흘렀다. 


어제 어쩌다가 보니, 시를 읽게 되었다. 알지 못하는 시인이었지만, 오래, 어떤 손이 가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비가 그치고, 바람이 그치고, 우리 삶도 그치테지만, 어떤 시들의 여운은 문명의 끝까지 가면 좋으리라. 





손의 의미 

 

  

박서영 

 


 

기타를 잘 치는 긴 손가락을 갖기 위해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 갈퀴를 찢어버린 사람,

그러고 보면 호미를 쥐는 손은 호미에 맞게

펜을 쥐는 손은 펜에 맞게 점점 변해가는 것 같다

그건 자신의 울음에 알맞은 손을 가지려는 것

자신이 만져야 할 색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

음악의 육체에서 고양이가 울고, 음악은 점점 자란다

시간과 공기의 색을 찢으며 

사자의 음악과 치타의 음악과 표범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악기들은 때때로

코끼리, 하마, 기린의 울음을 연주하게 될 것이다

아프리카 초원에는 겁에 질린 소녀의 색이 있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주문을 흥얼거린다

기타를 잘 치는 손가락을 갖기 위해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 갈퀴를 찢어버린 사람이 있다

그가 오늘은 어린 사자새끼를 연주하고 있다

울음이 길어지면 손가락도 점점 자랄 것이다

 

 

계간 [시에] 2011,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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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를 사랑한다. 네가 즐겨 마시는 커피의 종류를 알고, 네가 하루에 몇 시간을 자야 개운함을 느끼는지 알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와 그의 디스코그래피를 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인가? 나는 네가 커피 향을 맡을 때 너를 천천히 물들이는 그 느낌을 모르고, 네가 일곱 시간을 자고 눈을 떴을 때 네 몸을 감싸는 그 느낌을 모르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의 목소리가 네 귀에 가닿을 때의 그 느낌을 모른다. 일시적이고 희미한, 그러나 어쩌면 너의 가장 깊은 곳에서의 울림일 그것을 내가 모른다면 나는 너의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느낌이라는 층위에서 나와 너는 대체로 타자다. 나는 그저 '나'라는 느낌, 너는 그냥 '너'라는 느낌.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느낌의 세계 안에서 드물게 발생하는 사건일 것이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명확히 표명될 수 없는 느낌들의 기적적인 교류, 그러니까 어떤 느낌 안에서 두 존재가 만나는 짧은 순간.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너를 사로잡고 있는 느낌을 알 수 있고 그 느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그렇게 느낌의 세계 안에서 우리는 만난다. 서로 사랑하는 이들만이 느낌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 사랑은 능력이다. 




아직도 문학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를 펼치면서 마치 비밀스러운 과거 - 문학이 모든 것이었던 시절을 다시 만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참 애매하기도 하지. 어떤 시선(視線)들은 문장이 풍기는 향기에 숨겨져 모호해지기만 하니 말이다. 


시선 - 바라본다는 것, 그것은 원근법이다. 데카르트적이거나 반-데카르트적이고, 무언가(어떤 대상)를 궁금해하거나 원한다는 점에서 플라톤적이거나 반-플라톤적이 될 것이다. 그런데 참 애매하기도 하지. 어떤 글들은 원근법을 아름다운 안개 - 결국은 모호할 뿐인! -로 숨기고 우리를 이끈다. 


종종 아름다운 글들은 우리들은 아프게 한다. 그건 아름답기만 할 뿐이기에. 


문학 비평은 문학 작품에 기생하고 결국 작품 속에 묻힌다. 내가 안타까운 것은 비평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그 비평이 기생하는 작품에 따라 생사고락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내가 문학에서 시작했지만 문학에 가 닿지 못한 이유도 이 탓일까. 


오늘 신형철의 책을 펼치면서 그가 소개하는 여러 작가와 작품들, 나에게 대부분 생소하기만 한 이들 - 몇 명은 술자리에서 만나기도 했고 몇 명은 같이 학교를 다니고 했지만 - 속에서 그는 어떤 글을 쓰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 <<느낌의 공동체>>, 신형철 산문집,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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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가 목장은 … 




                           프란시스 잠 





개울가 목장은 풀이 무성하다.

퍼부은 비에 밀이 젖어 포기 포기 쓰러졌고

연회색 빛인 버드나무 말고는

둑마다 잎새들이 진초록이다.

베어 놓은 꼴은 벌통처럼 쌓여 있다.

언덕들은 너무 완곡하여서 애무를 받고 있는 듯하다.

시인인 친구여, 우리에게서 마음 속 기쁨을 빼앗아 가는

괴로움만 없다면 모든 게 달콤하리.

하지만 괴로움을 벗어나려 함도 쓸데없는 일,

말벌이 풀밭을 떠나는 적이 좀처럼 없듯이.

그러니 ‘삶’을 가는 대로 흐르게 내버려두고,

검은 소떼에게 마실 물이 있는 데서 풀 뜯게 하자.

서서히 괴로움에 시달리는 사람을,

우리와 같은 모든 사람을 측은히 여기자.

그들 모두가 재능이 있는 건 아닌 것 말고, 우리와 같은 그들.

그것이 유일한 차이이면서 중요한 사실이 되기도 하지만

오래 퍼붓는 급류가의 맺혀 있는 싱그러운 딸기처럼,

매혹적인 사랑만이 훌륭한 위안. 



(* 번역: 김기봉, 혜원출판사, 1994년) 




번역이 좋지 않지만, 프란시스 잠 특유의 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특유의 세계라고 옮기긴 했지만, 서정적 프랑스라고 하기엔 그가 살았던 시기는 너무 격동의 세계였다. 서정적인 시가 씌여지기 어려운 시대에 잠은 서정적이었으니, ... 그는 현실에서 잠시 뒤로 물러나 어떤 서정성에서 위안을 얻으려고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일요일 오후도 모두 지나가고, 문득, 방에 앉아 정처없이 메모를 하다, 책을 읽다, 잡지를 보다, 쓸쓸하다는 생각에 스치고 프란시스 잠의 시를 읽었다. 


오래된 프랑스 시인의 시를 읽는 일요일 오후. 그럭저럭 견딜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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