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어느 일요일의 이야기

지하련 2009. 12. 27. 15:26


 

1.

쓸쓸한 하늘 가까이 말라 휘어진 잔 가지들이 재치기를 하였다.

죽음 가까이 버티고 서서 안간힘을 다해 푸른 빛을 받아내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허공 가운데,

내 마음이 나부꼈다.

 


2.

익숙한 여행길의 낯선 파란 색이 건조한 물기에 젖어 떠올랐다

검은 빛깔의 지친 아스팔트가 습기로 물들었고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은 소녀의 실룩거리는 엉덩이 위로

한 다발 꽃들이 피어나 꽃가루를 뿌렸다

붉은 색에 멈춰선 도로 위의 자동차 속에서 사내들이 내려

소녀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소녀의 입가에 미소가 퍼졌고

아직 어린 나는 공포에 떨며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그렇게 울기 시작해 내 눈물은 강이 되어 내 육신을 싣고

아무도 없는 바다를 향해 떠났다.

 

  


3.

나에게 혼자냐고 물었다. 그녀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녀에게.

너는 혼자야 라고 그녀가 강력하게 입술을 갖다 대며 말했다.

나는 그렇지 않아, 나도 모르는 나들이 너무 많아 라고 말하며

입술을 돌렸다.

 

상처 난 바람이 콘크리트 벽을 스치며

스스로의 상처를 덧내며 나아가고 있었다.

 

그녀가 입술을 잘라, 그대 첫 눈에 뿌리겠다고 협박했다.

 

태어나, 처음 당해보는 협박에

나는 무조건 미안하다며 빌었다.

 

그렇게 내 첫 사랑은 시작되었다.

 


4.

 

주먹을 쥐었다. 손을 폈다. 못생긴 손이다. 버림받은 손이다. 작은 손이다. 큰 것이나, 무거운 것이나, 아름다운 것이나, 자극적인 것은 들지도 못하는 손이다.

 

그 손의 소유자인 나는 비극적인 손의 인생을 잘 알지 못했다.

 

내 코의 비극적인 이야기와 내 눈썹의 슬픈 사연을 뒤섞어

포스트모던한 비빔밥을 만들어 2005년산 보르도 와인에 넣어

못생긴 내 손으로 포장하기 시작했다.

 

노란색 꽃무늬 벽지로 포장된 내 코, 내 눈썹, 자주 빛깔 내 손

위로

12월의 눈이 쌓이고 있었다. 




 

5.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어둠이 오르락내리락 하며

 

어둠을 따라 마음도 오르락내리락 하며

그녀를 따라 내 몸도 오르락내리락 하며

 

 



6.

무수한 시간.. 앞에 서서 시간의 유형학에 대한 책을 쓰고 있었다.

기분 좋은 시간, 소중한 시간, 아팠던 시간, 증오스럽던 시간, 지랄 같았던 시간, 흥분되었던 시간, 고통스럽던 시간, … … 무수한 시간.. 앞에 서서

무수하게 조각난 나..을 찾고 있었다.

 

흰 눈처럼, 무한히 조각난 나..

거친 숨소리로 가득 찬 12월 도시의 허공을 떠돌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고 그도 나를 모른 척 스치고 지나갔다.

 

아무 곳에도 나는 없고 이 세상 어디에도 나는 있었다.

그런 이유로 내 손은 참 못생겼다. 내 코는 징그럽고 내 눈썹은 지랄 맞다.

 

그렇게 나는 이 세상 어디에도 숨 죽인 채, 처마 밑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