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 막스 갈로

지하련 2003. 8. 10. 11:15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 - 10점
막스 갈로 지음, 임헌 옮김/푸른숲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
막스 갈로 지음
임헌 옮김, 푸른숲





600페이지를 다 읽기 위해 독자가 부담해야할 몫은 적다. 그저 로자가 걸어갔던 길을 뒤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요즘에는 보기 힘든 길이라 낯설지만, 진실 되고 신념에 가득찬 길이라 힘들지 않을 것이다. 그 옆에서 막스 갈로는 친절하게 설명해 줄 것이다.

하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걸까. 세상은 변했고 앞으로도 계속 변할 것인데. 그러나 그러면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진실은 언제나 너무 늦게 대중들에게 도착하게 되고(때때로 영원히 도착하지 않게 되기도 하고. 그건 마치 진실을 적은 편지 한 통을 집어넣고 밀봉한 병을 대양의 한 가운데에 던져 누군가에게 발견되기 기다리는 것과 유사하게) 대중들이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이미 진실은 낡은 청동 거울이 되어있거나, 더욱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진실은 언제나 소수의 횃불, 그 이상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하지만! 낡고 오래된 그 청동 거울은 언제나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새로운 진실을 비추는 거울이 될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처럼.

그런데 로자 룩셈부르크의 평전을 읽는 나는 무엇인가. 그저 심심풀이로 읽는 것일까. 혁명의 시대는 갔고 차라리 혁신(이노베이션)의 시대가 적당한, 자본주의가 맹위를 떨치고 힘있는 노조들과 그들의 대변자들만 존재하는 시대에 말이다.

글쎄, 진실이 얼마만큼 힘을 가지는 것일까. 진실은 알고자 노력하는 자에게만 열리는 문이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인생이 편해진다거나 삶이 갑자기 윤택해지는 것이 아니다. 아니 반대로 진실을 알수록 인생은 불편해지고 삶은 고달픈 것이 되어버린다. 고작 영혼의 위안이 될 수는 있다. 고작 영혼의 위안? 그래, 고작 영혼의 위안 뿐이겠지. 돈을 벌 수만 있다면 영혼 따위는 아무렇게 내던질 수 있는 시대이니. 그러니 진실 따위를 이야기해대는 책은 이 시대에 아무런 영향력을 가지지 못한다. 그리고 늘 청동 거울이 되어 되돌아 올 것이다. 너무 늦게, 너무 천천히.

* 다 읽고 난 다음 에라스무스를 떠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늘 너무 늦게 오는 것이 있고 늘 소수로 남아 꺼지지 않는 불꽃같은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이며 그 신념을 버릴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쯔바이크가 이 전기를 썼다면 갈로보다 훨씬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서술했을 것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갈로의 서술은 분명하고 독자를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힘이 있지만, 극적이거나 감동적인 구석은 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