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8월 2일 잡담

지하련 2010. 8. 3. 13:24

도통 글을 쓸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회사 업무가 갑자기 늘어나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고(프로젝트 예측 실패도 한 몫 했지만), 900페이지나 되는 책을 다음 독서모임 텍스트로 잡은 것도 화근이었다. 또한 두 세 권의 책을 번갈아 읽는 습관 탓에, ‘16세기 문화혁명을 읽는 동안 2권의 다른 책을 읽었다. 이번 주에 온라인서점에서 몇 권의 책을 주문하고 싶어 안달이 난 터라, 걱정이다. 안 그래도 안 읽은 책이 쌓여있는데
 

1.


그 동안 읽은 책/저널들 중에서 몇 문장 옮겨본다. 단연코 포이어바흐의 말이 기억에 남지만(오래 전에 어디선가 읽었을 것이 분명한), 더 이상의 설명을 하긴 싫다. 다시 포이어바흐를 읽어야겠다.

불완전한 인간일수록 완전한 신을 갖는다’ – 포이어바흐

 


정말 그런 것 같다.
 

2.


과학자들이 연구개발비를 따려면 미국에서는 세계 최초의 연구라고 말해야 돈을 줍니다. 일본은 미국을 이길 수 있다고 하면 주고, 한국은 무조건 돈 된다고 해야 주죠. 이 때문에 학술원이 과학 정책과 연구를 주도하는 선진국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관료들이 나서서 하게 되고, 자연히 과학자들이 공무원에게 아부하게 되는 거죠.

- 이상묵 교수(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휠체어에 타서 강의하는 이상묵 교수의 저 지적은 비단 자연과학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이젠 인문학도 돈이 되어야 한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기 시작했다(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최근에는 인문학 전공자들의 창의성이 기업이나 비즈니스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참 순진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돈 되는 창의성이지, 돈 안 되는 창의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돈 되는 창의성과 돈 안 되는 창의성의 구분법은 무엇일까? 창의성이란 돈과는 무관하거나, 도리어 돈 안 되는 종류에 가깝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기준에서 볼 때, IT 기업에서만 10년 가까이 경력을 쌓았고, 미술 비즈니스를 하였으며, 문학과 예술사를 공부하고, 비즈니스 컨설팅 업무까지 한 나 같은 종류의 인간은?


레기오몬타누스가 사망한 뒤 발터는 스승의 유지를 이어 천체관측을 계속했다. 그가 천체관측에서 이뤄낸 최대의 개혁은 장기간에 걸쳐 체계적인 관측을 계속했다는 점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보통 하지나 동지, 춘분이나 추분과 같은 특정 시점에 산발적인 관측만 했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변화였다. 이는 1세기 뒤에 나온 티코 브라헤의 업적에 앞서는 것이었다. 발터보다 43년 뒤에 태어난 코페르니스쿠스도 주의 깊게 제작된 장치를 사용해 몇 년에 걸쳐 행성을 추적하는 작업은 필수불가결한 일이며, 이를 통해서만 행성의 정확한 이론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
- '16세기 문화혁명', 508



티코 브라헤는 관측 정밀도의 극한적 향상이라는 근대 정밀 자연과학의 전제가 되는 과제를 처음으로 현실적 과제로 받아들였다. 그는 이를 위해 관측 기기를 부단히 개량하는 데 노력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매일매일 꾸준한 관측을 30여 년간 지속했다. 당시에는 베르나르트 발터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이는 직인의 수작업 및 노동의 가치와 중요성을 인정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했던 일이다.
-  '16세기 문화혁명', 545



16세기에 자신의 사재를 털어가며 티코 브라헤는 30여 년간 관측을 기록하였고 기존 관측 기록의 오차를 수정하였다. 한 마디로 돈 안 되는 짓을 지속했다. 그리고 이 기록으로 케플러와 뉴턴이 나올 수 있었다.

비즈니스 혁신도 마찬가지다. 스티브 잡스가 대학을 중퇴하고 빠진 것이 폰트font’라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진정 창의성을 원한다면, 돈 안 되는 짓을 자유스럽게 할 수 있도록 지원해줘야 된다는 것이다. 한 때 내가 다녔던 대학은 돈 되는 학과 중심으로 구조조정을 하고 있다던데, 얼마나 황당한 짓인지, 한국 사회의 근시안적 태도는 1,000년이 지나도 고쳐지지 않을 것 같다.

3.

각 정부는 골드만삭스(미국), 도이체방크(독일), BNP파리바(프랑스) 등 자국의 은행을 살리기 위해 도를 넘어서는 공적 자금을 쏟아부은 탓에 지금 그 후유증을 앓고 있다. 이제 은행들의 도산은 교묘하게 유보됐으나, 이번에는 예산 부족과 수익성이라는 이름 아래 각 정부의 공공 예산들이 대폭 축소되고 있다. , 경제 위기로 더욱 무거워진 부채 비중이 이번에도 사회복지와 공익 사업 폐기의 구실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세르주 알리미(프랑스 르몽드 디플로마크발행인), 2009 12월호.


지자체의 부채가 심각하다고 이야기하고, 중앙정부의 부채도 심각하다고 이야기들 한다. 하지만 국민들의 생각은? 더 큰 문제는 이런 심각함과 투표와는 아무런 연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세르주 알리미의 저 의견은 한국 국민들에게는 아무런 호소력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긴 정치와 일상이 매우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지만, 정치가 잘 되던, 잘 되지 않던 우리의 일상은 어제처럼 오늘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서서히 올라가는 냄비 속의 개구리처럼 말이다. 그리고 한참 지난 후에 사람들을 깨닫기 시작하겠지만, 이미 주위는 난장판이 된 이후가 될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차가운 물이 담긴 냄비 일 때부터 우리는 이 냄비 밖으로 나가야 된다!’고 떠드는 사람이 있다면, ‘선동가, ‘미친 놈이니, 혹은 그러면 돈 돼?’라고 물어보는 이들이 대다수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참 뒤 문제가 현실화되고 심각해졌을 때, 냄비 밖으로 나가야 된다고 말했던 이들을 비난하고 공격했던 그 대다수는 책임 지지 않는 선량하고 무지한 대다수로 변해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결국 문제를 아는 이들은 침묵을 선택하게 되고 우리들의 사이에는 비난과 의심, 그리고 무기력만 남게 될 것이 뻔하다.


몇 자 적는다는 것이 길어졌다. 말 많은 세상인데, 말 하는 사람만 말하고, 말 하지 않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 것 같다. 사회 구조적 갈등은 더욱 심해지고 보기 드물게 종교 간 갈등이 없던 나라에 심지어 종교 간 갈등의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 사람들의 눈에는 대수롭지 않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한국은 지금 보이지 않는 ,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는 터널을 지나고 있다. 기업에서는 글로벌을 강조하면서 진짜 글로벌이 뭔지 모르고, 사회 전반적으로 창의성을 이야기하지만, 창의성의 기본은 부단한 탐구와 관철, 장인적 수고, 그리고 수평적인 대화와 다양성에의 존중임을 알지 못하며, 정치권과 정부는 근시안적 태도에 사로잡혀 잘못 나아가는 국가를 바로 잡을 생각을 하지 않은 채, 대중적 인기와 멀어지지 않기 위해 자신들을 고쳐나가는 어처구니없는 짓들을 서로 번갈아가며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종종 암담해지고 실의에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