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16세기 문화혁명 - 독서모임 '빡센'의 두 번째 책

지하련 2010. 8. 20. 00:48




16세기 문화혁명 - 10점
야마모토 요시타카 지음, 남윤호 옮김/동아시아


이런 두꺼운 책을 독서모임에서 읽기로 한 것은 우연이었다. 읽기에 다소 부담스러운 분량이었지만, 16세기는 나에게 무척 흥미로운 시기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16세기는 중세의 어둠이 유럽 전역에서 사라지기 시작하는 시대이며, 마지막 마녀사냥과 연금술의 시대였다. 절정기 르네상스에서 시작해 매너리즘을 지나 바로크 양식의 카라바지오가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끝나는 시기이기도 하다. 16세기 풍경 속에서 세르반테스의 근대 소설이 시작하고 세익스피어의 희곡들이 16세기에서 17세기로 향한다. 루터와 에라스무스가 있었던 시기였으며, 본격적 근대가 시작되지도, 그렇다고 중세도 아닌 시기였다. 종교혁명의 시기였으며, 교회 권력에서 세속 권력으로 정치적 지형이 바뀌는 시기였다. 근대 자본주의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 시기였으며, 도시가 세상의 본격적인 중심이 되었던 시기였다.



Parmigianino, 긴 목의 성모, 1533-40
16세기 매너리즘의 대표적인 화가인 파르미지아니노. 아마 방향이 정해지지 않은 과도기 미술 양식은 위와 같지 않을까. 과거에 대한 지독한 반감은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미술에 있어서는 도리어 과거란 찬란한 절정기 르네상스이므로), 과거의 양식은 현재의 나에겐 맞지 않고 그렇고 현재의 나에겐 나에게 딱 맞는 어떤 양식을 찾을 능력이 없고, ... 그저 정처없는 방황만 있었던 시기가 바로 16세기였다.   




이 책은 그 16세기에 대해서 설명한 책이다. 책은 예술가에서 시작해, 외과의, 외과학, 해부학, 식물학, 광산업, 야금술, 시금법, 상업수학과 수학혁명, 군사기술혁명과 기계학, 역학, 천문학, 지리학, 16세기 후반의 잉글랜드, 16세기 유럽의 언어혁명에 대해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 책의 서문, 1장, 9장, 10장은 역사에 관심 있는 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부분이며, 나머지는 각 분야에서 일어났던 사례들을 병렬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이 책의 핵심적인 테마는 아래와 같다.

1. 언어의 변화
라틴어에서 속어로의 변화는 이 책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내용이다. 저자는 라틴어의 정치적 위상을 강조하면서 라틴어가 반-근대적이었음을 실제 사실을 예로 들고 있다. 브로노프스키와 마즐리시의 '유럽의 지적 전통'을 언급하면서, 귀족적 르네상스와 민중적 르네상스로 나누고, 저자인 야마모토 요시타카는 17세기 근대 과학혁명은 민중적 르네상스에서 기인한 것이지, 귀족적 르네상스에 온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결국 우리가 익히 알고 있었던 르네상스란 라틴어에 기초해 있었으며, 귀족이나 소수의 성직자, 지식층을 위한 것이며, 우리의 일상을 변화시켰던 근대와는 무관하다고 이야기한다.

에라스무스와 마르틴 루터의 결정적 차이는 교회를 분열시키려고 결심했다는 점에 있다. 이는 루터가 속어를 사용해 민중에게 직접 호소했다는 데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638쪽)



결국 에라스무스는 보수주의자였으며, 서민적 삶에는 관심없는 '엘리트 지식인 공화국'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로 알려진 피코 델라 미란돌라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연설(De hominis dignitaate oratio'의 한 문장은 다음과 같다.

지고한 신성의 감춰진 의의를 민중에게 알리는 것은 성스러운 것을 개에게 던져 주는 것이나 다름 없고, 돼지 우리에 진주를 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는 '완성된 인간들'에게 전해져야만 하는 것으로 범속이 대중에게는 내밀하게 해 둬야 한다. 이는 사려 깊은 행동이라기 보다는 그 자체가 신이 정해 둔 규칙이다.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몰렸던 피코 델라 미란돌라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귀족적 르네상스와 민중적 르네상스 사이의 거리가 어느 정도 되었는지 가늠하게 해준다. 심지어 코페르니스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했으나, 교회나 성직자로부터 아무런 비난을 받지 않았던 것도 라틴어로 쓰여져 일반 민중에게 그러한 사실이 알려질 염려가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2. 무너지는 권위와 지식의 전파
성직자, 대학교수, 그 외 지식인들(라틴어가 가능했던)의 라틴어는 자신들의 세계를 지키는 암호와도 같았다. 12세기 르네상스로 인해 그리스, 로마의 많은 저서들이 라틴어로 번역, 소개되었으나, 그것은 책의 지식이었을 뿐, 실제적인 지식은 아니었다. 특히 의학이나 수학, 천문학 등의 과학의 영역에서 그 정도가 심했다. 전구 하나 갈아끼우지 못하는 대학 교수의 일처럼, 그 당시 지식인들은 실제적인 활동에서는 분리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실제 노동은 직인 계급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라틴어 책을 제 아무리 많이 읽고 여러번 읽었다고 한들, 전쟁터에서 무수한 부상자들을 치료했던 직인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16세기의 직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책을 쓰기 시작했다. 속어로. 그 결과 지식은 전파되기 시작했고 비밀은 사라졌다. 교회의 권위가 독일어 성경으로 인해 무너졌듯이, 과거의 지식이 사라지고 새로운 지식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3. 과거의 이론에서 현재의 경험으로
경험적 지식이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수학도 수 그 자체가 아니라, 무역과 거래를 하기 위한 상업 수학이 중요해졌으며, 이론적 지식도 실제 경험과 오랜 기간에 거쳐 수집된 측량과 정보를 통해 검증되어야 했다. 17세기 대륙의 합리론이 과거의 철학과 비교해 유연해질 수 있었던 것도, 영국 경험론이 경험 우위를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16세기를 거쳐 지나왔기 때문이다.

현재의 경험을 바탕으로 속어로 씌여진 책이 인쇄술로 인해 대량복제가 되기 시작하자, 세상은 급격하게 변화하기 시작한다. 이제 세상은 중세를 확실히 떠나 근대로 진입하게 된다. '문서 편중의 학문에서 경험 중시의 지식으로 전화되었'고, 이 과정에서 '예술가와 직인이 커다란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베살리우스의 '파브리카'(1543), 첫 번째 근육인 (266쪽)
세밀하게 표현된 판화는 지식의 전파에 큰 기여를 하였다. 16세기 몇몇 책들은 미술사적으로 높은 가치를 평가받는 도판을 가지고 있다.



4. 세속화
르네상스를 세속화의 진전이라고 볼 때, 르네상스의 실질적인 주역은 인문주의자들이 아니라 예술가와 직인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러한 직인들을 소개하는 데 책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잡다한 사례들로 구성된 책은 병렬적인 구성으로 인해 다소 지루한 감이 없진 않지만, 일본의 서양사 연구 수준을 알게 해주며, 르네상스에 대한 이해를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준다.

역사, 특히 과학사에 관심 있다면 이 책은 매우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16세기 자체에 대해 궁금하다면, 이 책은 문화/과학에 그 중심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읽게 되는 역사책과는 다르다. 또한 본문만 800페이지 가까이 된다는 점은 일반 독자에게 선뜻 이 책을 추천하기 어렵게 한다.



다음 독서 모임의 책은 호이징가의 '중세의 가을'이다. 이 책에 대해선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듯.


중세의 가을 - 10점
요한 호이징가 지음, 최홍숙 옮김/문학과지성사

8월 첫주 토요일에 독서모임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제서야 모임에서 읽었던 책에 대해 올린다. 다음 독서 모임은 9월 첫주 토요일이다. 그나마 독서모임이라도 하니, 이런 역사책을 읽는다. 요즘은 손에 잡히는 건 경제경영서가 태반이라서... 그것도 읽기 바쁘고 정리해서 짤막한 서평 조차 쓰지 못하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