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우리는 매트릭스 안에 살고 있나, 글렌 예페스(편)

지하련 2003. 11. 24.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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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트릭스 안에 살고 있나 Taking The Red Pill
글렌 예페스 엮음, 이수영/민병직 옮김, 굿모닝미디어



이 책은 영화 <매트릭스>에 대한 여러 에세이들을 모은 책이다. 하지만 전적으로 <매트릭스> 1 편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으므로 2편이나 최근 개봉한 3편에 대한 분석은 나와있지 않다는 점이 미흡한 점으로 지적될 수 있겠다.

최근 서점가에는 영화 <매트릭스>에 대한, 이런 류의 책들이 많이 나와있다는 점에서 영화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넘어서 여러 전문 분야에 있는 이들까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이 영화의 소재나 스토리는 흥미로운 것이며 이 책에 담긴 몇몇 편의 글 또한 흥미롭기도 하다.

그러나 <매트릭스>에 대해, 2편까지 밖에 보지 않은 상태이긴 하지만 이렇게 책까지 낼 정도인가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이 영화는 영화라는 장르가 여러 신화적, 대중문화적, 철학적 요소를 얼마나 잘 짜깁기하는가에 대한 또 다른 예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선 시사적이지만, 그 이상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책 또한 이런 짜깁기에 대한 각각 시선에서 분석하고 있으니 완결된 구성을 가지고 있다거나 우리에게 이 영화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을 미리 밝혀둘 필요가 있겠다.

하지만 몇몇 글들은 현대 과학에 대해 지극히 시사적이며 우리의 미래에 대한 염려와 걱정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읽을 만하다. 그러므로 각각의 글에 대한 짤막한 단평을 적는 방식으로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이어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듯 하다.

총 14편의 에세이가 있는데, 어느 글은 대학교수가 쓴 글이라고 보기에 형편없는 글도 포함되어 있다.


- 매트릭스란 무엇인가 (리드 머서 슈셔드)

"필사적으로 희망을 찾아 헤매지만, 구원을 위해서는 무언가 기적이 필요한 그런 시대에 <매트릭스>는 새 천년을 위한 새로운 성서, 또다시 인류를 찾아오는 메시아에 대한 종교적 우화가 되는 셈이다."라는 슈셔드의 언급은 타당해 보인다. 이 해석은 <매트릭스> 시리즈의 스토리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테마에 해당된다.

이 글은 영화 <매트릭스>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구하고 있으므로 한 번쯤 읽는 것도 나쁘지 않으나, 여러 영화 저널에서 언급한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 점을 미리 알아둘 필요는 있다.


- 사이퍼는 옳았나(1), 왜 우리는 매트릭스 안에 그대로 있나 (로빈 핸슨)
- 사이퍼가 옳았나(2), 현실의 본질, 그리고 그 문제점 (라일 진더)

라일 진더의 글은 그냥 읽기에는 조금 까다로운 글이긴 하지만 <매트릭스>가 어떤 철학적 함의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적절하게 지적해준다. 그에 비하면 로빈 핸슨의 글은 그 치밀함이나 문제 분석이 떨어진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과연 사이퍼가 옳았나? 라일 진더는 로버트 노직의 '경험기계'를 인용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경험기계'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어느 것이 현실일까에 대한 해답은 그 누구도 내릴 수 없다는 데에 있지 않을까.


- 인공지능, SF, 매트릭스 (로버트 소여)
- 매트릭스, 현실의 패러독스 (제임스 건)

이 두 편의 글은 SF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는 글이다. 특히 제임스 건의 글은 읽을만하다. 그는 여러 SF 소설가들와 소설을 인용하면서 영화 <매트릭스>가 SF 장르 속에서 과연 어느 지점에 위치해있는가에 대한 적절한 방향을 가르쳐준다.


-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인가 지적 허세인가(1) (디노 펠러거)
-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인가 지적 허세인가(2) (앤드류 고든)

<"우리의 중요 목적은 지적인 액션 영화를 만드는 것이었다. 우리는 액션 영화, 총, 쿵푸를 좋아한다. 하지만 아무 지적인 내용도 없는,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액션 영화들은 지겹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화에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상들을 집어넣기로 했다" 워쇼스키 형제는 실제로 네오 역을 한 키아누 리버스에게 숙제를 주었다. 영화 준비를 위해 읽어야 하는 책 가운데는 케빈 캘리의 <<통제 불능 - 기계, 사회 시스템, 경제 세계의 새로운 생물학>>(1994)와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와 시뮬라시옹>이 있었다.>(앤드류 고든, p.120)

위 문장을 읽고 난 다음 지적인 영화 관객들이 너무 많은 것을 <매트릭스>에서 끌어내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서두에서 밝혔듯이 포스트모던적 짜깁기의 장르로서의 영화에 대한 또다른 예로서 <매트릭스>일 뿐이기 때문이다. 즉 본질적으로 어떤 완성된 구조를 이끌어낼 수 없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디노 펠러거의 글은 형편없기 때문에 읽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앤드류 고든은 글은 매우 시의적절하며 분석적으로 읽을만하다. 앤드류 고든은 깊이있는 분석을 통해 영화 <매트릭스>에 대해서 이렇게 결론 내린다.

<결론적으로 비록 <매트릭스>가 재미있는 영화이고, 특히 '현실'의 허위성에 대한 강력하고도 편집증적인 핵심 은유와 관련해서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긴 하지만, 영화에 제시된 사상이 스펙터클과 마찰을 일으키다 압도되어 버리는 상황을 볼 때 나는 이 영화가 '지적 액션 영화'가 되기에는 미흡하다고 주장해야겠다.>

- 매트릭의 결합들 … 고치는 방법 (피터 로이드)

시간날 때 읽어볼 만하다. 재미있기는 하지만 깊이있는 분석이 담긴 글은 아니다.

- 불교, 신화, 매트릭스 (제임스 포드)

이 글은 불교와 매트릭스 사이의 유사성을 지적하고자 기획된 글이다. 그러나 유사성만 언급할 뿐이다.

- 인간의 자유와 빨간 알약 (피터 베트키)

"그러나 최근 세계화에 대한 반대 운동을 논외로 하더라도, 비참함으로부터 가난한 이들을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가능성은 '실질적인' 자본주의의 확대라는 사실은 깨달아야만 한다"라는 언급은 이 글이 어떤 방향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하지만 깊이 있는 논의를 하지 못하는 글이다.

- 매트릭스에 신은 있는가 (폴 폰테너)

이 글은 <매트릭스>과 기독교와의 유사 관계를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만일 <매트릭스>가 종교적인 영화라는 주장을 하려면, 영화에서 신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라는 지적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면 <매트릭스>는 전적으로 종교적인 구성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2편과 3편에서는 이러한 특성은 더욱더 두드러진다.

- 인간과 기계의 병합 우리는 매트릭스를 향해 가고 있나 (레이 커즈윌)

"그래서 인류는 많은 다양한 종류의 깊이 있는 경험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상상력을 통해 "세계를 재창조할" 수 있게 될 것이고 <매트릭스>에 나오는 놀랄 만한 환경에 접속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창조적인 인간 표현과 경험에 더욱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세계가 되리라 희망해 본다."

그런 과연 그럴까. 레이 커즈윌은 기계에 대한 낙관주의를 고수하고 있지만, 내가 보기엔 터무니없이 위험한 태도라 생각된다.

- 왜 미래는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가 (빌 조이)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면 화가 난다기보다는 다소 우울해진다. 앞으로 나에게 진보라는 것은 씁쓸한 어떤 것으로 다가올 것 같다"라는 빌 조이의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Java로 유명한 썬마이크로시스템즈의 수석 과학자로 있는 빌 조이는 테크놀러지에 대한 조심스러운 태도를 고수하면서 우리 인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 속에서 유일하게 <매트릭스>를 언급하지 않으면 <매트릭스>의 세계가 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할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유일한 글이기도 하다. 다른 글은 읽지 않더라도 이 글은 읽기 바란다.

- 시뮬레이션 논쟁, 우리는 매트릭스 안에 살고 있나 (닉 보스트럼)

지금의 우리는 정말 매트릭스 안에 있을까? 닉 보스트럼은 여기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 있다. 그러나 책의 마지막에 놓인 이 글은 이미 언급되었던 내용에 대한 반복에 가깝기 때문에 건성으로 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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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매트릭스 : 레볼루션>을 보지 않았다. 조만간 보러갈 생각이지만, 글쎄다. 나는 이 영화를 본 관객이, 특히 자기 나름대로 지적이고 새로움을 추구한다는 젊은 관객이 이 영화에 너무 현혹되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