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지나간 미래, 라인하르트 코젤렉

지하련 2003. 12. 1. 19:01


지나간 미래 - 10점
라인하르트 코젤렉 지음, 한철 옮김/문학동네


지나간 미래 Vergangene Zukunft
라인하르트 코젤렉 Reinhart Koselleck 지음, 한철 옮김, 문학동네



겨우 이 책을 다 읽었다. 대중 교양서라고 하기엔 너무 전문적이고 그렇다고 손을 놓기에는 너무 흥미진진했다. 라인하르트 코젤렉은 <<역사적 기본개념들, 정치적-사회적 언어에 대한 역사사전>>이라는 방대한 사전의 편집자로 유명하다고 한다. 하지만 국내 인문학 연구자들에게 라인하르트 코젤렉은 그리 유명해 보이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직장 생활을 하면서 몇 달 동안 이 책을 잡고 있었는데, 읽고 난 다음 느낀 바를 크게 아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다.

1. 역사 서술에 대한 새로운 인식: 실제 경험한 사실, 목격자의 증언, 또는 사료들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역사 서술은 ‘서사’와 ‘묘사’를 바탕으로 하면서 과연 ‘허구’와 얼마나 많은 거리를 두고 있는가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또한 역사 서술에 사용되는 개념 분석은 매우 인상 깊었다.

2. 근대Neuzeit에 대한 깊은 이해: Modern으로 옮겨지는 근대에 대한 논의는 국내에서도 많았지만, 라인하르트 코젤렉의 분석은 그간 읽어온 그 어떤 글보다 설득력이 있었다. “근대에 경험과 기대 사이의 차이가 점점 커진다는 것이고, 더 정확히 말해서 기대들이 그 때까지 경험들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근대가 새로운 시대로 파악된다는 것이다”(p.399) 즉 미래에 대한 기대가 대중에까지 미치게 된 시기는 18세기이며 이 이후 본격적으로 ‘근대’, ‘새로운 시대’가 대중적인 단어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3. 근대적 삶에 대한 이해: 미래에 대한 기대가 가지게 된다는 것은 경험된 것들 이상의 의미를 미래에 부여하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즉 예측 가능한 형태로서의 미래가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형태로서의 미래가 더 큰 영역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18세기에는 이러한 예측 불가능한 형태로서의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높게 보았으며 인간 이성에 대한 강력한 신뢰와 지지를 바탕으로 하였지만 20세기 후반부터는 이러한 신뢰와 지지를 부분적으로 상실하기 시작했으며 예측 불가능함, 즉 ‘우연적 요소’에 더 큰 무게 중심을 두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최근의 물질만능주의(소외와 자본주의의 심화)는 이러한 예측 불가능한 삶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즉 예측불가능하기 때문에 최소한의 예측가능성을 잡아두려는 심리에 기인하고 있는 셈이다. 근대는 이미 그 시작에서부터 그 붕괴를 이미 예고하고 있었다.

인문학 전공자에게 강력하게 추천하는 책이지만, 비전공자에게는 선뜻 추천하기 어렵다. 하지만 기회가 닿는다면 같이 읽어도 좋을 책이라 생각된다. 역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게 되었으며 근대에 대해, 근대적 삶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지나간 미래>>에 대한 보충 설명

개인적으로 무척 재미있게 읽은 책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일독을 권할 만큼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밑줄을 엄청 그었다) 그리고 리뷰를 올렸는데, 몇몇 분들께서 리뷰가 어렵다는 견해를 밝혀 아래와 같이 간략하게(?) 보충 설명을 하고자 한다.

1. 이 책의 목차의 아래와 같다. 목차에 적힌 단어들부터 만만치 않다.


I. 근대사에 있어서의 과거와 미래의 관계
- 근대초기의 지나간 미래
- 역사는 삶의 스승인가
- 근대 혁명개념의 사적 기준
- 로젠츠 폰 슈타인의 역사예측

II. 사적 시간규정의 이론과 방법
- 개념사와 사회사
- 역사, 역사들, 시간의 형식구조
- 서술, 사건, 구조
- 우연: 역사서술에서의 계기화의 불가능성
- 입장연관성과 시간성

III. 역사적 경험변화의 의미론
- 비대칭적 대응개념의 사적-정치적 의미론
- 역사의 생산가능성
- 공포와 꿈: 제3제국에서의 시간경험
- ‘근대’: 현대적 운동개념의 의미론
- 경험공간과 기대지평

2. 각각의 챕터는 각기 다른 내용을 서술하고 있지만, 크게 ‘역사서술 방법론’과 ‘근대의 시간 경험’이라는 두 부분으로 모여질 수 있겠다.

3. ‘역사서술 방법론’에 대하여
과연 '역사의 완벽하고 정확한 전달'이란 가능할까?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역사의 완벽하고 정확한 전달'이란 불가능하다. 이 부분에서 역사 서술의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서술 방법(론)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서술가들은 나름대로 정확한 사실 전달을 위해 여러 역사적 사료들을 바탕으로 하기도 하고 고고학적인 탐사를 벌이기도 하며 목격자의 증언들을 토대로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들이 다 모였다고 해서(* 대부분 다 모을 수도 없지만) 완벽하고 정확한 전달이 가능해질까. 또한 여기에 또 개입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역사서술가의 시각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당파성’. 이렇게 어려운 일이니,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시가 역사보더 더 낫다고 한 것이 일견 수긍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라인하르트 코젤렉이 주목하는 부분은 여러 개념을 담고 있는 단어들의 변천사이다. 이를 그는 ‘개념사’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단어들의 의미 변화를 통시적으로 분석하여 그 당시의 의식 구조를 예리하게 분석해 낸다. 하나의 단어가 시대 마다 다른 의미로 통용되었고 같은 시대라 하더라도 역사 서술가의 시각에 따라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이 책의 대부분은 이런 역사서술과 관련된 논의를 담고 있다.

4. ‘근대의 시간 경험’
아마 이런 생각을 낯설게 여기는 경우는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란, 바로 ‘내일은 좋아질꺼야’ 따위의 생각을 말한다. 그런데 우습게도 코젤렉에 따르면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불과 몇 세기 되지 않는다. 아마 르네상스 무렵부터 이런 생각의 단초가 보여졌을 텐데, 이런 생각이 일반 대중 속으로까지 확대된 것은 그보다 한참 후인 18세기이며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프랑스 혁명을 전후로 한 시기였다고 한다.

앞선 글에서 내가 인용한 “근대는 경험과 기대 사이의 차이가 점점 커진다는 것이고, 더 정확히 말해서 기대들이 그 때까지 경험들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근대가 새로운 시대로 파악된다는 것이다”라는 문장의 의미는 여기에 있다.

쉽게 설명해서 평생을 시골에서 산 사람에게 (시골이라는 공간 속에서의) 내일에 대한 예상은 자신이 살아왔던 경험의 범위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고대적 삶이나 중세적 삶은 이런 환경 속에 속해있었다. 즉 하나의 행위 결과는 경험의 범위 안에 있었고 그것에 대한 기대는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근대로 오면 상황은 급격하게 바뀐다. 시간이 갈수록 이 상황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즉 이때까지 살아온 경험의 범위 안에서 내일에 대한 예측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맨 처음 등장했을 때, 그러니깐 18세기 무렵에는 미래에 대한 열광으로 표현되었다. (* 이 열광이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는 점이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리고 이러한 열광은 예술적 반영은 바로크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 대해선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하자.)

내일이 되면 새로운 과학 법칙이 생겨나고 새로운 기계가 생기며 카페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 새로운 사상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근대가 새로운 시대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요즘은 더 심해졌다. 블로그를 보라.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하루에도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는가)

이러한 상황은 내일, 즉 미래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 전의 삶 속에서 미래란 과거와 똑같은 그 무엇이었지만, 18세기에 오면 미래는 과거에도 오늘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그 무엇으로 변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몇 세기가 지나기도 전에 사람들은 ‘내일 일을 누가 알아’라고 말해버리기 시작했다. 내일 일을 모르기 때문에 ‘내 인생이 내일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즉 경험과 기대의 간격이 벌어짐으로 인해 나는 온전하게 내 삶을 제어하지 못할 수 있음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즉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셈이다. 이는 인생에 드리워진 생의 불확실성에도 기인하지만, 최근의 인문학적 성찰은 이 인식(*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에 더 큰 무게 중심을 두게 만든다.

최근의 자본주의 심화(* 돈 중심주의)는 이러한 불확실성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의 초조하고 불안한 심리에 기인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왜냐면 내 영혼의 삶은 아니더라도 내 육체의 삶의 안정성을 그나마 확실하게 담보할 수 있는 것은 ‘돈’이기 때문이다.

근대는 내일에 대한 기대로 시작되었지만, 그 기대 속에는 이미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나는 내일 펼쳐질 내 삶의 운동을 알지 못한다’는 인식을 숨기고 시작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