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슬픔이 없는 십오초>를 꿈꾸며, 삭히며... - 심보선의 시집

지하련 2011. 8. 23. 16:49



나이가 들자, 철이 들자, 결혼 생각을 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시집은 내 일상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 먼 바다로 흘러들었다. 한동안 육지 생활만 했다. 거친 흙바람 사이로, 붕붕 거리는 검은 자동차들 사이로, 수직성의 공학적 규율로 세워진 빌딩들 사이로, 거대한 거짓말로 세워진 정치적 일상 속에서 시는 없었고 시집은 죽은 것으로 취급되었다.

여름이 왔다, 갔다.

외로움이 낙엽이 되고 흙이 되고, 몇 해의 시간이 지나자 사랑이 되어 꽃이 피고 나무가 자랐다. 먼 바다로 나갔던 시집은 지친 기색도 없이 이름 모를 바다 해변가로 밀려들었고 그제서야 나는 육지 생활에서 한 숨 돌릴 수 있는 무모함을 가지게 되었다.

시집을 샀다, 놓았다, 펼쳤다.

심보선은 2011년의 대세다. 몇 년이 지난 그의 시집을 서가에서 꺼내 읽는다. 읽는 내내 이름 모를 바닷가 내음이 밀려들었다. 공상의 냄새이자, 상상의 향기였다. 그렇게 내 거친 일상이 무너졌다.

어느 여름날 나는 시집을 읽었다. 마흔을 갓 넘은 어느 사내의 시집을 마흔이 될 사내가 읽었다. 시집은 그저 시집일 뿐이다.


슬픔이 없는 십오 초 - 10점
심보선 지음/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