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아르세니예프의 생', 이반 알렉세예비치 부닌

지하련 2011. 12. 19. 09:07

아르세니예프의 생 
이반 알렉세예비치 부닌(지음), 이희원(옮김), 작가정신, 2006년



아르세니예프의 생 - 10점
이반 알렉세예비치 부닌 지음, 이희원 옮김/작가정신
 

 
1.
‘그래, 그랬지. 나는 지금 이 순간 늙어가고 있고, 지나간 일 따윈 돌이킬 수 없지. 하지만 밀려드는 슬픔은 왜일까’라는 말을 하기 위해 나는 이 소설을 6개월 동안 가슴 조이며 읽었다. 6년에 걸쳐 번역한 소설을 나는 6개월에 걸쳐 읽으며, 한 장 한 장마다 러시아의 차가운 서정(敍情)을 느꼈고 거친 대지의 순수 속으로 빨려 들어갔으며, 한 영혼이 어떻게 서글픔에 잠긴 채 과거를 되새길 수 있는가를 보았다. 

나는 목격자이며, 방관자였고, 공범이 되었다. 지금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대해, 지나쳐 버린 세월에 대해, 무채색으로 흐려져만 가는 추억에 대해, 그리고 시들지 않는 사랑의 기억에 대해. 그 때 나는 최선을 다했으나, 어쩌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밀려드는 건 그나 나나 똑 같은 것이리라. 

2. 
이반 알렉세예비치 부닌, 러시아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하지만 그는 사랑하는 러시아로 돌아가지 못한 채, 1953년 파리에서 죽었다. 몰락한 귀족 집안 출신의 시인이자, 소설가. 이 두꺼운 소설은 그의 자전적 성격이 강하게 묻어난다. 

이 소설은 한 젊은이가 태어나 성장하면서 겪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질풍노도와 같은 방황도, 자신의 생을 파멸로 이끄는 사랑도,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열정도 없다. 소설은 마치 순백의 눈이 쌓인 러시아 중부 평원 가운데를 지나는 강물을 담아 있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쬐는 햇살의 각도에 따라, 계절마다 방향을 바꾸며 부는 바람, 혹은 시시때때로 자신의 모양을 바꾸는 구름들로 인해 끊임없이 변모하는 말 없는 강물처럼, 소설은 잔잔하게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며, 러시아적 삶과 자연을 노래한다. 

우리의 삶이 시간 위에서 유한함의 비극을 가지고 있듯이, 소설 전체를 물들이는 것은 바로 지나간 추억에 대한 쓸쓸한 반추다. 그 위로 러시아의 건조하고 차가운 풍경이 겹친다. 

3.
 

내 삶의 첫 기억은 미심쩍은 정도로 무언가 좀 하찮은 구석이 있다. 초가을 햇살이 비쳐 드는 커다란 방, 그리고 그 방의 창을 통해 남쪽으로 보이는 산비탈 위로 빛나는 가을 태양의 건조한 섬광 …… . 오로지 그 단 한순간! 왜 하필이면 그날, 그 시간, 그 순간이 아무런 이유 없이, 기억이 가능해진 후의 내 삶에 있어 첫 기억으로 그토록 선명하게 나의 의식을 사로잡은 것일까? 그리고 그 순간 이후로는 왜 또다시 오랜 기억의 공백이 있는 것일까?
나의 유년기는 슬프게 기억된다. 모든 유년기는 서글픈 것이다. 아직 온전한 삶으로 깨어나지 못한 무료한 생활과,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한 여리고 겁먹은 영혼이 고요한 세상 속에 흐릿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 11쪽 



문장은 유려하고 아름답고, 정처 없는 젊은 영혼이 머무는 곳은 가족이거나 문학, 또는 소녀에 대한 사랑이다. 그리고 사랑으로 향하는 젊은이는 자신의 이해할 수 없는, 이해할 수 없었던 갈망으로 그 사랑을 놓친다. 이 소설이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그저 노년이 된 어떤 사람의 고백처럼 읽히는 건, 지나간 추억에 대한 표현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소설 전반을 물들이기 때문이다. 

4.
 

육지의 가장자리, 칠흑 같은 어둠, 짙은 안개와 차가운 파도는 거세게 몰아쳤고, 파도소리는 잦아들다가 커지면서 야생침엽수가 내는 소리처럼 솟구쳐 오르기도 했다 …… . 밤의 심연은 앞을 볼 수 없이 캄캄하고 불안했고, 요람에서부터 시작된 고통스럽고 적대적이고 무의미한 삶을 말하는 것 같았다. 
- 302쪽



청춘은 캄캄하고 불안하고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바닥까지 떨어졌다가 구원처럼 나타나는 것은 문학이 아니라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방해하는 것은 알 수 없는 어떤 것. 삶의 비극은 그 비극의 원인을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우리 영혼의 병은 심해져만 가고, 그 사이 우리 사랑도 우리 곁을 떠나버린다. 그리고, 

그 해 봄에 나는 그녀가 폐렴에 걸려 집으로 돌아갔고, 그리고 일주일도 되지 않아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또 가능한 한 오랫동안 내게 그 사실을 숨기게 한 것도 그녀의 뜻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495쪽 



이 소설을 통틀어 가장 멋없는 몇 개의 문장들로 수놓아진 이 작품의 끝은,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것, 그리고 아름다운 추억은 끊임없이 되새겨지지만, 그 밑에 흐르는 슬픔은 어쩌지 못한다는 것뿐이다. 



6. 
소설은 구성은 아래와 같다. 

1부 카멘카, 삶의 시작 
2부 나의 조국 러시아
3부 숭고한 사명, 문학
4부 청춘, 그 찬란한 이름
5부 사랑, 시들지 않는 기억 

번역된 것으로는 작가정신(출판사)를 통해 이희원 번역으로 나온 것과 나남출판사를 통해 이항재 번역으로 나온 것이 있다. 후자의 책은 읽지 않았지만, 지금 구할 수 있는 것은 이 책뿐이다. 


7. 
6년에 걸쳐 이 소설을 번역한 이희원 선생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출판사에서도 이 책의 재발간을 검토해보았으면 좋겠다. 이번 겨울, 이 소설은 지친 우리들에게 충분한 위안이 될 수 있으리라.
 

이반 알렉세예비치 부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