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스 레싱Doris Lessing 지음, <마사 퀘스트Martha Quest>, 나영균 옮김, 민음사, 1981년 초판
마사 퀘스트 - 도리스 레싱 지음, 나영균 옮김/민음사 |
1981년도에 출판된 책이라, 노랗게 변한 책만 펼치면 종이가 세월 먹는 향이 코 끝에 닿는다. 요즘에는 보기 드물게 책의 뒷 표지에는 레싱의 옆얼굴 사진이 크게 인쇄되어 있다. (나는 이 책을 어디에서 구한 것일까.) 지금은 구할 수 없는 민음사 이데아 총서의 세 번째 권. 오래 전에 번역된 소설들이 최근 번역되는 소설들, 가령 파올로 코엘류의 작품들이나 <다빈치 코드>같은 것보다 훨씬 낫다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소설의 시작은 꽤 흥미진진한 문장들로 시작한다. 가령 이런 문장들.
- 22쪽
- 24쪽
이런 문장들이 풍기는 분위기가 이 소설 1부 전체를 물들인다. 하지만 나머지는 이에 비하면 매우 맥 빠지고 1부에서 그토록 반항적이면서 당돌하고 매력적인 마사는 도회지에 나와 방탕한 생활을 시작하게 되고 몇 명의 남자를 거치고 난 다음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더글라스와 결혼을 해버린다. 그리고 이 결혼식에 대한 서술로 이 소설은 끝나버린다. 꽤 황당한 결말이다. 가령 1부에 읽을 수 있는 이런 대화.
‘물론이야’
‘물론이지’ 그는 비꼬듯이 말했다.
‘넌 반 유태주의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인종적 편견을 싫어하니?’
‘당연하지’ - 이 말엔 답답하다는 어조가 있었다.
‘넌 무신론자야?’
‘내가 그렇다는 건 네가 잘 알면서’
‘사회주의를 신봉해?’
‘말할 것도 없지 않어’ 그녀는 열내어 말하고 나서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심각한 인간으로서의 자기가 몰락을 했나보다 하는 우스꽝스런 의식에서였다. 조스는 마사의 웃음에 상을 찡그릴 뿐이었다. 그는 정통적 유태인 가족에서 태어난 열아홉살의 유태인 소년과 그보다 더 고루하게 키워진 사춘기의 영국 소녀가 이 대화의 한 마디 한 마디를 위험천만한 이단으로 받아들일 사람들로 꽉 찬 마을의 가게 뒷방에서 이런 자명한 이치에 서로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조금도 엉뚱하다는 의식이 없음이 분명했다.
- 86쪽에서 87쪽
이런 식의 대화는 이 책에 나오는 거의 유일한 경우이고 나머지는 마사의 자의식 강한 태도가 부딪히는 경우이거나 그 외의 영국 식민지 시절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흔하디 흔한 인종적 편견을 드러내는 경우이거나 시시콜콜한 연애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400페이지가 넘는 이 소설을 다 읽고 난 다음의 황당함이란, 굳이 이 소설을 읽지 않아도 추측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 소설은 5부작으로 씌어진 소설의 첫 번째 권에 해당되고 나머지 4권을 통해 마사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펼쳐진다는 사실을 역자의 해설을 읽고 난 다음에야 알 수 있었다.
- 461쪽
마사 퀘스트. 실은 이 책을 서점에서 구할 수 없고 도서관에서도 이 책을 빌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이 책이 새로 출판될 가능성도 적어 보인다. 나머지 네 권과 함께 여성문학을 전공하는 이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출판된다면 모를까.
여유가 된다면 마사 퀘스트가 나오는 나머지 네 권도 구해 읽어봐야겠다. 남아프리카 끄트머리에서 자라난 한 반항적이고 자의식 강한 사춘기 소녀가 공산당원이 되고 자신의 모험을 계속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아마 도리스 레싱도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페르시아 지방에서 태어나 아프리카의 로디지아라는 곳에서 자라났고 열네살 이후론 학교라는 곳을 다니지도 않은 한 여자아이가 20세기 후반 최고의 여성 소설가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종류의 일이니 말이다.
이 소설의 첫 장에 인쇄되어 있는 문장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말이다.
- 올리브 슈라이너
* 도리스 레싱의 자서전 표지다. '식민지 출신'이라는 단어가 사라진 요즘, 그녀의 삶은 어땠을까 조금은 궁금해진다. 위 리뷰는 꽤나 오래 전에 쓴 글인데, 이제서야 여기다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