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아비정전, 혹은 그 해의 슬픔

지하련 2012. 5. 23. 21:58




오전 회의를 끝내고 내 스타일, 즉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 듣고 난 다음 판단하려는 이들은 단단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5월의, 낯선 여름 같은 대기 속에 느꼈다, 강남 차병원 사거리에서 교보생명 사거리로 걸어가면서. 


하루 종일 전화 통화를 했고 읍소를 했다. 상대방이 잘못하지 않은 상황에서, 강압적으로 대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어떤 일은 급하게 처리되어야만 하고,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이니, 읍소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다수의 외주사를 끼고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내가.


5시 반, 외주 업체 담당자, '내가 IT 개발자 출신인가'하고 묻는다. 차라리 '작업하는가'라는 물음이 나에게 더 어울린다고 여기는 터인데. (* 여기에서 '작업'이란 '예술 창작'을 의미함)


그리고 오늘 '멘탈붕괴'라는 책이 번역되어, 인터넷서점 메인에 걸린 모양이다. 


아버지께서 '갑상선암'으로 내일 수술을 하시고, 아이는 걸렸던 감기에서 어느 정도 회복된 것같다고 한다. 현재 몸담고 있는 프로젝트는 갖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새로운 이슈들을 발굴해내고 있다.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해결해야 될 과제들을 찾아내는 프로젝트가 되고  있다. (변명 같긴 하지만, 다른 이들을 중간에 그만둔 것을 수습하러 들어간 프로젝트이니, 상황이 나쁜 건 애초에 짐작했다.)


그리고 오래 전에 적은 메모를 읽는다. 이런 날, 혼자 앉아 아비정전을 보며 여러 병의 맥주를 마시면 참 좋을 것이다. 젊음은 지지 않는 태양이며, 우리 마음 한 켠의 쓸쓸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태양은 너무 뜨거워 우리는 결코 소유할 수 없는 것이고 쓸쓸함은 끝내 떨쳐낼 수 없으니, ... 어찌해야 되는 것일까. 











2004년 5월 7일 - 낡은, 낡은, 너무나도 낡은 



날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더워지면 누가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하늘에서 비가 떨어졌다. 24살 여름, 견디기 힘든 무료함을 오래된 비디오로 견디고 있었다. 새벽 세시, 네시가 되도록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비디오샵에서 나오지 않고 영화를 봤다. 그 때 날 매혹시켰던 이름들, 아비정전, 레올로, 비포더레인, 희생, 아이다호, 천국보다낯선, 현기증... ... 그 때만 해도 내겐 꿈이 있었다.

 

그 시절, 그 꿈은 너무 견고해서 깨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 때 날 아프게 하던 여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눈(雪)에 취해, 술에 취해, 내게 마지막 목소리를 들려주고는 떠나갔다. 그녀들이 떠나가고 난 다음 난 아프지 않았다. 그 땐 아무렇지 않았는데, 가끔 생각나면 서글픈 생각이 앞을 가린다.

 

사연 많은 여자들이었고 그 사연에 못 이겨 사연과 함께 거리 속에 묻혀가는 여자들이었다. 내겐 그녀들에게 내밀 손이 없었고 내 얼굴은 착하게 생긴(실제로는 음흉하고 어두운) 가면으로 씌어져 있었다.

 

그 때 아비정전을 봤다. 몇 번을 봤는지 모르겠다. 유덕화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미 죽어버린 장국영도. 비가 많이 오는 영화였고 무더운 영화였고 이미 지쳐버린 젊음들이 나오는 영화였다. 내가 젊었을 때, 나에겐 이미 젊음이 없었다.

 







"I finally arrived at my mother's house, but she didn't want to see me. The maids told me she no longer lived there.

As I was leaving, I could feel a pair of eyes watching me from behind,

but I was determined not to turn around. I just wanted to find out what she? looked like. Since she wouldn't give me that chance, I wouldn't give it to her eit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