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97년, 날 사랑한 두 명의 여자

지하련 2013. 9. 3. 19:46



나도 말랑말랑하던 감수성을 가졌던 때도 있었다. 얼마 전에 만났던 선배는 나에게 '10년 전 나는 참 4차원이면서 똘똘했다'고 평했는데, ... 내 스스로 그랬나 싶어할 정도로, 나는 나 자신을 알지 못했음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우물 안에 있으면 내가 있는 곳이 우물인지 모르고, 우물 밖에 나와야만 내가 우물 안에 있었다는 걸 안다. 즉 자신 스스로 돌이켜보지 못한다면, 타인에게 물어서 자신을 되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사랑도 마찬가지. 2004년 6월에 쓴 메모를 다시 읽으며, 잠시 휴식을 취한다. 이게 휴식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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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6월 6일 05:04


전화를 하지만, 전화는 되지 않고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빙빙 돌다가

어디 막다른 벽에 부딪히면

내 영혼은 심한 균열을 일으키면서 염려가 되고 두려움이 된다.

 

쓸데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다스려보지만, 되지 않는다.

역시 난 현대의 병을 앓고 있다.

프루스트가 그랬고 바흐만이 그랬던 그 병

한 번 앓기 시작하면 좀처럼 멈추지 않는 에고이스트들의 병.

 

하드디스크를 뒤적뒤적 거린다. 그리고 오래된 글 하나를 발견하다.

97년. 참 힘든 해였다고 생각했는데 ...

 

 

 

 


 제  목:97년, 날 사랑한 두 명의 여자.                               

 올린이:지하련  (김용섭  )    97/12/31 22:13    읽음:106 관련자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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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밤 좀 틔각거린 일도 있고  해서 그랬든지 아무튼 일부러  달게 

       자는 새벽잠을 깨울 멋도 없어 남편은 그냥 새벽차로  일직암치 관평을 

       나가기로 했던 것이다. 

          -『訣別』(지하련의 소설. 1940)의 첫 문장

          

          Hazel Motes sat  at a forward  angle on  the green plush  train 

       seat, looking one minute at the window as if he might  to jump out 

       of it, and the next down the aisle at the other end of car.

          -『Wise Blood』(Flannery O'Conner의 소설. 1952)의 첫문장

          

                 *                   * 

          

          두 명의 여자 소설가. 한 명은 남편의, 총살당한 시체도  보지 못한 

       채 미쳐 죽어간 여자. 한 명은 홍반성 낭창(루시퍼)으로 육체가 엉망이 

       되어가는 가운데, "나에게 인생의 의미는 그리스도교에  의한 구제라는 

       한 점에 귀결된다"라고 절규하며 소설을 쓴 여자.

          

          97년 12월 31일 수요일. <<O'Conner - Collected  Works>>을 마지막

       으로 책을 샀다. 35달러나 하는 그녀의 소설을 오늘 기준 환율 1달러당 

       1600원을 적용해, 은행까지 오가며 사고 말았다. 살아있는 여자들은 내 

       곁을 떠나는데, 죽은 여자들은 내 곁으로 온다. 

          池河連과 Flannery O'Conner. 

          97년 날 사랑한 두 명의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