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화양연화와 겹쳐지는 내 일상

지하련 2013. 9. 6. 08:27





눈 앞에 펼쳐지는 색들이 변했다. 조금 투명해지고, 조금 분명해지고, 다소 차갑고 냉정해졌으며, 약간 쓸쓸해졌고, 그리고, 그리고, 지난 더위에 지친 표정으로 흔들거리며 색채가 퍼지며 사라졌다. 


온도가 내려갔고 바람이 불었고 사람들은 숨길 수 없는 불안을 숨기며 웃었다. 아니, 울었다. 실은 그게 웃음인지 울음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말을 하고 싶었으나,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고 문장이 만들어지지 않았고 내 존재의 집은 나에게 아무 말도 없고 내 곁을 떠났다. 


화양연화를 떠올리며 십 수년 전, 화양연화를 혼자, 극장에서 보고 난 다음 월간지 기자와 술자리에 티격태격했던 걸 추억했다. 그 땐 '사랑의 현실에 타협한 왕가위'를 비난했으나, 내가 그 나이가 되어보니 왕가위가 옳았음을 알게 된다, 되었다. 


간밤 잠을 설쳤다. 아내는 불을 켜서 모기를 네 마리나 잡았다. 전기 콘센트에 꽂아둔 모기약은 아무런 효과도 없었고 나는 여섯 군데 이상 물렸다. 출근길, 무거운 표정을 한 사람들 사이로 걸으며, 문득 내 나이를 떠올리자, 인류의 문명은 인간의 무지한 아집 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갈수록 인생은 미궁이고 외부 세계는 나와 무관한 것임을, 그런데도 불구하고 무수한 지성들은 자신의 터무니없는 자신감 위에 뭔가 한 마디씩 남겼고 그것으로 인류의 문명이 이루어졌으니 말이다. 


토마스 쿤은 그걸 '패러다임'이라고 불렀으니, 어차피 사라지고 폐기될 것임을 직감하고 살아있는 동안에는 인정받으며 살자는 것이었을까.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 중이니 말이다. 


그나저나 화양연화의 장만옥은 참 매력적이었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