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존 버거

지하련 2004. 9. 19.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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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지음), 김우룡(옮김),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열화당, 2004년 초판.



신분증을 보여주기 위해
돈을 지불하려고,
혹은 열차 시간표를 확인하느라고
지갑을 열 때마다,
나는 당신 얼굴을 본다.

(중략)

가슴속 지갑 안에
들어 있는 꽃 한 송이,
우리로 하여금 산맥보다
더 오래 살게 하는 힘.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 11쪽

저녁이 올 때마다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은 거울 속의 저 라일락 가지처럼 자리한다.
- 70쪽

* *


지도와 나침반을 가지지 않고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자는 과연 몇 명쯤 될까. 매번 마주하게 되는 마을이며 사람들이 낯설더라도 움츠리지 않고 이방인으로서의 자부심을 잃어버리지 않는 이는 몇 명이나 있을까.

존 버거의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은 정해진 방향을 가지지 않는 작은 글 모음이다. 정해진 것이 있다면 ‘1부는 시간, 2부는 공간에 대한 것’일 뿐. 짧은 글들을 통해 우리는 예상하지 못하는 여행을 떠난다. 어쩌면 모든 것이 낯설 수도 있는 책 속으로의 여행을. 그러나 책을 들출 때마다 설레는 건 이 책만이 가진 중독성을 지닌 향기 때문일 게다.

이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사랑에 빠진 한 남자가 우주와 예술에 대한 짤막짤막한 시와 산문을 엮어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각각의 시와 산문은 존 버거의, 세상에 대한 깊은 시선을 느낄 수 있고 몇몇 글들은 노트에 적어두고 자주 들추어보게 할 것이다.

‘떠남은 작은 죽음이다(Partir est mourir un peu).’ 이 짧은 문장이 지닌 여운이란. 어쩌면 덧없음에 저항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존 버거는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gt; 속에서. 그러면 존 버거는 ‘덧없으므로 난 당신을 사랑하노라’라고 말하는 듯 하다.


* Partir est mourir un peu : ‘떠나는 것은 죽는 것이다’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나, 이 책의 역자는 ‘떠남은 작은 죽음이다’라고 번역하였음. un peu는 ‘작은’으로 쓰였다기 보다는 mourir를 강조하는 부사의 역할을 하고 있음. 이 문장은 프랑스 속담임.(* 불문학을 전공한 아는 분의 의견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