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예술의 종말 이후, 아서 단토

지하련 2005. 10. 23.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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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종말 이후>>, 아서 단토(지음), 이성훈/김광우(옮김), 미술문화, 2004년
(Arthur C. Danto, After the end of Art – contemporary art and the pale of history)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 다 읽고 난 다음 돈이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면 말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그 책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더구나 꽤 저명한 사람의 책이라, 내심 기대를 했는데, 거참, 한심하지.

예술의 종말이란 낯선 주제가 아냐. 이건 헤겔 미학의 주제야. 여기에서 ‘종말(End)’는 곧잘 근대성에 반대하는 후기 근대주의자들의 어투이기도 해. 그런데 여기에서 약간 유머러스한 건 단토는 헤겔을 끔직하게 좋아하는데, 후기 근대주의자들 대부분이 지독하게 헤겔을 싫어한다는 점이지. 대체로 프랑스에서 발생한 것으로 여겨지는 후기 근대주의가 실은 코제브의 헤겔 해석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야.

이 책의 결론은 단순해. 바자리식의 미술 이해의 역사가 끝났고 그린버그식의 미술 이해도 끝났다, 그러니 이제 기존 방식으로 이해되던 예술은 끝났다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아무리 읽어도 수수께끼 같은 문장을 좋아하는 라캉이라면 ‘대문자 A의 예술의 종말’이라고 이야기했을 꺼야. 여기에 대해서 단토의 주장이 틀렸다고 보는 건 아냐.

애초부터 예술은 진보하는 게 아니었거든. 뭐라고 해야 할까. 그냥 변화한다고 할까. 우리 삶같이. 여하튼 단토는 이런 식으로 기존 방식으로 이해되던 예술은 종말을 고했고 이제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예술이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지.

문제는 이게 다라는 데 있어. 뒤라스의 마지막 책 제목을 흉내 내려고 한 건 아니야. 그런데 정말 C’est Tout야. 내가 보기엔 아서 단토는 그가 이야기하는 ‘탈역사적 미술’에 대해서 좀더 충실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그게 무엇인지 말이지. 왜 말레비치의 사각형과 워홀의 브릴로 박스가 어떻게 다른 것인지에 대해서 설명해주어야만 했어. 그런데 그런 설명은 없거든. 또는 이런 식의 질문에 대해서도 답변을 해줄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 그는 19세기 후반에 일어난 모방의 시대에서 모던의 시대로의 이행에서 일어난 단절이나 모던의 시대에서 포스트모던의 시대로의 이행에서 일어난 단절이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의 양식에서 후기 르네상스 시대의 양식의 이행에서 일어난 변화와 어떻게 틀린가에 대해서 설명해주었으면 좋을 텐데 말이야. 그가 전자의 두 이행을 ‘단절’이라고 파악한다면, 전성기 르네상스와 후기 르네상스도 ‘단절’이라고 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거든.

또한 종말은 너무 식상한 방식이야. 그리고 단토의 이해는 너무 표면적이고. 그는 그저 기존의 역사는 끝났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으며 그것은 예술이 철학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식인데, 뽈 발레리가 생각나는군. 뽈 발레리가 <<드가, 춤, 데생>>이라는 뛰어난 책에서 ‘회화만큼 지적인 예술을 나는 알지 못한다’라고 했던 거 말이야. 발레리가 보기에도 회화는 지적인 고민을 하고 있었고 지적인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했거든. 실은 오래 전부터 예술은 철학의 문제를 고민해왔다고 할 수 있어. 결국 단토의 생각은 시작부터 끝까지 다 식상한 것들의 반복인 셈이네. 그런데 이 사람이 왜 대단한지 난 잘 모르겠거든. 누가 나에게 설명해줄 사람 없을까. 단토의 다른 글이나 책을 읽어볼까, 하긴 단토가 여기저기 인용되고 인정을 받는 것에는 무슨 이유가 숨어있겠지. 아마. 다시 단토 이야기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이 책은 사지 말고 뒤에 실린 역자의 해설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아. 단토의 글보다 역자의 해설이 더 이해하기도 쉽고 단토의 생각을 좀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