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태의 삶 Vie des Formes
앙리 포시용 Henri Focillon (지음), 강영주(옮김), 학고재, 2001
앙리 포시용의 <<형태의 삶>>
책은 책을 따라간다. 프랭크 커모드(Frank Kermode)의 <<종말 의식과 인간적 시간>>(문학과지성사, 1993)을 읽는 내내, 가장 궁금했던 책이 바로 앙리 포시용의 <<형태의 삶>>이었다. 프랭크 커모드는 앙리 포시용을 인용하면서 종말에 대한 논의를 이어나갔다. 그 때, 90년대 초중반만 해도 외국 서적을 구하기 쉽지 않았고, 더구나 앙리 포시용을 읽기는 커녕, 앙리 포시용을 아는 이조차 없었다(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미술작품은 시간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면서도 영원에 속해있다. 미술작품은 특별하고 지엽적이고 개인적인 동시에 보편성의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술작품은 이 다양한 의미에서 군림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역사와 인간과 세계 그 자체를 예증하는 데 이바지하지만, 인간의 창조자요 세상의 창조자이며, 역사 속의 다른 그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질서를 확립한다. (12쪽)
앙리 포시용의 명성은 미술사학 뿐만 아니라 그의 유려한 문장에서도 나온다. 종종 그의 문체로 인해 그의 미술사학이 묻힌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이니. 십수년 전 김화영 교수도 몇 번에 걸쳐 앙리 포시옹의 이책 일부를 월간 <<현대문학>>에 번역하여 싣기도 했다. 1999년 경에 이 책의 초반 일부가 그렇게 번역되었으나, 몇 번 연재 이후 나오지 않았다. 아마 그 때쯤 이 번역서가 마무리되고 있었던 시점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미술작품은 유일무이한 것을 지향하는 하나의 시도이며, 하나의 전체, 하나의 절대로 입증되는 동시에 복합적인 관계들로 이루어진 체계에 속한다. 미술작품은 독립적인 활동에서 나오며 탁월하고 자유로운 몽상을 표현하지만, 또한 여러 가지 문명의 에너지가 그 속에 수렴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요컨대 (아주 분명히 대립되는 용어들을 잠정적으로 존중한다면) 미술작품은 물질이자 정신이고, 형식이자 내용이다.(12쪽)
분명하고 확신에 찬 어조가 책 전반을 가득 메운다. 그러면서 예술작품에 대한 논의는 놀랍고 우아한 통찰로 이어지며, 실제 작품과 작가들을 오가며 전개된다.
왜냐하면 미술작품은 무엇보다도 시각을 위하여 고안된 것이고 공간은 시각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공간은 평범한 활동의 공간, 전략가의 공간, 관광객의 공간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물질이자 어떤 움직임인 기법으로 처리된 공간이다. 미술작품은 공간의 척도이자 형태(forme)이다. (13쪽)
1장 <형태의 세계>에서는 미술작품의 형태에 대한 개론적 성격의 글이라면, 2장 <공간 속의 형태>부터는 실제 형태가 어떤 삶, 어떤 변천을 겪는가를 상세히 기술한다.
공간은 미술작품의 거처이다. 그러나 미술작품이 공간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미술작품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공간을 다루며 규정하며 자신이 필요한 대로 공간을 창조하기도 한다. 생명이 움직이고 있는 공간은 그것을 따를 수 밖에 없는 주어진 여건이지만, 미술의 공간은 가변적인 재료이다. 알베르티 원근법의 지배를 받게 된 이래 우리는 이 사실을 인정하기가 상당히 힘들게 된 것같다. (42쪽)
하지만 포시용은 원근법에 대한 논의를 이어나가면서 원근법 속에서 미술작품이 어떻게 변화하고 확장해나가는가를 이야기한다. 즉 원근법을 지나 다시 공간을 변화시키고 만들고 있음을 예증한다. 그 한 예가 보티첼리다.
Sandro Botticelli, The Birth of Venus (c. 1484-86). Tempera on canvas. 172.5 cm × 278.9 cm (67.9 in × 109.6 in). Uffizi, Florence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는 선원근법과 공기원근법을 그럴듯하게 구성할 수 있는 기교란 기교는 전부 알고 있었으며, 때로는 거장답게 그것들을 실제로 사용했다. 그러나 그런 공간에서도 움직이는 존재가 공간으로 인해 완전히 규정되지는 않는다. 이 움직이는 것들은 구불구불한 장식적 선을 간직하고 있는데, 이 선은 물론 어떤 목록 안에서 분류된 기존의 장식적 선이 아니다. 그것은 이러한 형상들을 구성하기 위해 육체의 생리적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는 무용간의 굽이치는 동작이 그려낼 수 있는 선이다. 이러한 특권은 오랫동안 이탈리아 미술의 속성으로 남아 있는다.(62쪽)
The Hora of Spring
이후 3장 <물질 속의 형태>, 4장 <정신 속의 형태>, 5장 <시간 속의 형태>를 통해 형태가 어떻게 존재하고 영향을 주며 변화하는가를 설명한다. 그리고 그 뒤에는 <<손의 예찬함>>이라는 짧은 글이 부록처럼 실려있다.
앙리 포시용의 문장들 대부분이 밀도가 높고 함축적이기 때문에 읽는데 상당한 집중력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 힘든 독서로 우리는 미술사가 어떤 무늬를 가지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왜 미술사가 인문학의 꽃으로 불리는지도.
앙리 포시용의 형태의 삶 - 앙리 포시용 지음, 강영주 옮김/학고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