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작은 것들의 신, 아룬다티 로이

지하련 2020. 5. 1. 10:20





작은 것들의 신 The God of Small Things

아룬다티 로이Arundhati Roy(지음), 박찬원(옮김), 문학동네 


 



잔인하기만 하다. 몇 명의 죽음 앞에서도 그 잔인성은 사라지지 않고 우리의 마음 한 켠을 어둡게 물들이지만, 그 잔인한 마을의 풍경을 묘사하는 문장은 더 없이 아름답기만 하구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6월의 비'는.

하늘이 열리고 물이 퍼붓듯 쏟아져내리면, 오래된 우물이 마지못해 되살아났고, 돼지 없는 돼지우리에 녹색 이끼가 끼었으며, 기억의 폭탄이 잔잔한 홍찻빛 마음에 폭격을 가하듯 홍찻빛 고요한 물웅덩이에 세찬 비가 융단폭격을 퍼부었다. 풀들은 젖은 초록빛을 띠었고 기쁜 듯 보였다. 신이 난 지렁이들이 진창 속에서 자줏빛으로 노닐고 있었다. 초록 쐐기풀들이 흔들렸다. 나무들이 몸을 숙였다. 

(23쪽) 



독자는 자연스레 섬세하고 서정적이며 감미로운 세계 속에 빨려 들어가지만, 그 곳에서 만나게 되는 풍경은 끔찍한 상처로 얼룩져 있다. 그리고 소설을 다 읽은 다음에서야 왜 아룬다티 로이는 이 대단한 데뷔작을 쓴 이후 인도의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는가를 알게 된다. 



이제 더 이상 창문에서 강이 보이지 않았다. 

(49쪽)  



소설은 라헬을 중심으로 서술되지만, 라헬의 시선은 건조하기만 하다. 공격적인 건조함. 마치 삶에 대한 그 어떤 애정도 거부하는 듯한 태도. 라헬은 그저 주위만 바라볼 뿐이며, 인도에서의 삶은 비루함의 연속이다. 라헬은 그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 한 때 라헬의 주위를 감싸던 따뜻하고 밝은 빛들은 사라졌고 이젠 이란성 쌍둥이 오빠 에스타만 있다. 


우리는 과거의 관습이라든가 전통이라는 명목으로 얼마나 현세의 삶을, 인생을, 심지어 사소한 행복마저도 파괴하는가를 알지 못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단순하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족을 이루며 사는 것. 하지만 관습과 제도는 그것을 막는다. 시대는 변하지만, 인도의 어떤 제도와 문화, 관습은 변하지 않는다. 관습과 제도는 탐욕스러운 인간 역사의 결과물이 아닐까. 그리고 그 탐욕에 익숙해진 이들이, 혹은 그 탐욕의 제도가 전부라고 믿는 대중들로 인해, 라헬과 에스타의 사소한 소망은 조각나 버렸다. 암무의 사랑은 끝장났다. 그 속에서 남겨진 두 아이, 라헬과 에스타는 무엇을 해야만 할까, 아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아는 인도는 겉모습 뿐이다. 소설을 읽고 난 다음 우리는 인도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탐욕스러운 제도와 관습이 전부라고, 그것이 전통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사회로 다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불가촉민의 사회, 카스트제도가 아직도 통용되는 나라로 명확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제임스 서로위키는 '대중의 지혜'를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전문가들과의 대비를 통해서이지, 우리들의 진짜 지혜는 아니었다. 실은 대중의  그런 지혜가 있었다면, 이 세상이 이토록 최악으로 흘러가진 않았을 것이다. 


슬프고 아픈 소설이다. 어째서 요즘 나는 딱딱한 인문학 서적을 읽는 것보다 이 소설을 읽는 것이 더 오래 걸렸는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만큼 가치있는 독서였다. 하나하나 꼼꼼하게 파악해야 했다. 인도식 이름이 낯설었고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아룬다티 로이는 이 소설을 휘감고 있는 사건의 실체를 공개하기 주저했다. 라헬과 에스타의 현재를 만들게 된 그 사건. 그리고 이 소설 속에서 '신'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를. 소설 마지막에서야 등장하는 그 사건의 실체는, 현대 인도의 희망이자 절망이다. 


이 소설을 통해 우리 스스로가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저 사람들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알게 될 것이다. 




*   * 



부연설명) 

1. 케랄라주는 인도에서 잘 사는 주로 유명하다. 공산당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곳이며 상대적으로 여성의 사회 참여 비율도 인도의 다른 지역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높은 지역이다. 평균 수명이 75세이며, 문맹률이 6% 정도이며,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해 공산당이 집권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곳을 배경으로 소설은 씌여졌다. 아마 아룬다티 로이는 케랄라주에서도 이런데, 인도의 나머지 지역은 말할 필요도 없다는 의도일 것이다.


  



2. 카스트제도는 아래와 같이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불가촉민으로 이루어진 계급제도이다. 이게 법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관습적으로 내려온 것이다. 소설에서는 불가촉민(Paraiyar)와의 구분이 매우 명확하게 서술된다. 실제 인도에서의 카스트제도는 명확하게 나누어져 있기 보다는 집안이나 직업 등으로 느슨하게 구분되어 있다고 한다. 브라만 계급이라고 해서 종교인이나 학자만 한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직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있고 피부색으로도 나누어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외부인의 시선에서 볼 때지, 내부인의 시선으로 본다면 카스트제도는 느슨하긴 하지만 제대로 지켜지고 있으며, 이에 명예 살인(honor killing)도 가능한 것이다. 년간 약 5,000명의 사람이 이 명예 살인으로 목숨을 잃는다고 한다. 특히 불가촉민과의 경계는 잘 지켜지고 있는 듯하다.





3. 아룬다티 로이 (1961 ~ ). 데뷔작인 <작은 것들의 신>으로 맨부커상을 수상했으며,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작은 것들의 신>을 발표한 후 사회운동을 했으며 그와 관련된 저술 활동을 지속했다. 소설보다는 인도 사회 운동이 더 가치있는 일이라 여겼을 것이다. 거의 이십년 가까이 소설은 발표하지 않다가 최근에서야 신작 소설이 나왔다. 


1997년 부커상을 받았을 때 언론에 나왔던 사진이었다. 하지만 작년 가디언지에는 아래의 사진이 나왔다. 








작은 것들의 신 (무선) - 10점
아룬다티 로이 지음, 박찬원 옮김/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