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자유 또는 사랑!, 로베르 데스노스

지하련 2020. 5. 16. 17:41



자유 또는 사랑! 

로베르 데스노스Robert Desnos(지음), 이주환(옮김), 읻다, 2016



미끈한 뱀의 움직임을 흉내 내면서 
사랑이 우리 수중에 들어올 때, 우리는 절망하여, 
이어질 것도 생각 않고 다음날들을 남겨두었네 
멍청하게도, 성당 앞자리에서 훌쩍거리는 교구 재산관리인처럼


아, 픽션이여, 위안을 주는 네 몸을 꼭 껴안을 만한 
제 남성적 정력을 의심하며, 역겨움 느껴가며, 
편집증적으로, 확신도 없이, 우리는 녹색 마법 물약을 
동물적인 행복감에 젖어들 때까지 들이켰네 


지나고 보면 슬픔이란 더욱 좋은 강장제 
나무에 피는 접시꽃보다도, 따스한 키니네보다도 
우리 모두는 벌거벗은 채, 각자의 플라톤적 지옥에 이르렀다네 
기묘한 호랑이에게 살해당한 심장까지를 드러낸 채 


괴혈병을 이겨내고, 루이 금화를 씹어 삼키던 
우리의 강철 이빨과, 돌출한 아래턱은 
끝도 없는 승천을 꿈꾸느라 퇴화해버렸고  
그렇게 흘러나온 피는 우리 사악한 입술을 적시었네. 

- << 아르튀르 랭보 작, <밤새우는 사람들> >> 일부 


- 만 레이Man Ray가 찍은 로베르 데스노스 



사랑하면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니면 자유로우면서 사랑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사랑일까. 어쩌면 이 시집은, 아니 이 책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걸까, 아니면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걸까. 아니면 랭보에 빙의한 데스노스인가. 


고백하자.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다시 사랑하고 싶어졌다. 사랑은 자유이면서 죄악이며 모험이면서 고통인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단도(短刀)이며 치명적인 독약이다. 


초현실주의는 현실을 넘어서 현실을 부정하며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고 노력하지만, 우리 두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법이 없듯, 초현실주의자들의 언어나 표현 양식도, 그들이 부정하며 뛰어넘으려 하던 이들에게서 유래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빌려오는 것은 꿈이거나 현실의 재구성, 또는 파괴. 


이 책 앞에서 우리는 파괴된 사랑을 보고 있다. 자유 앞에서 무너지고 사랑하면서 자유를 갈구하는. 하지만 다시 강조하건대 현실 속의 사랑은 구속이며, 자유는 사랑의 부정이다. 그러니 이 책의 제목 뒤에 !(느낌표)가 붙은 것이다


사랑과 죽음만이, 사랑과 죽음이 마주쳤을 때만이 어느 존중할 만한 영혼 안에 싹을 틔울 수 있는, 그러한 기이한 감정 

- 84쪽 


그래서 죽음만이 사랑과 자유를 동시에 누리게 만들 것이다. 




번역된 시집이지만, 읽기를 권한다. 로베르 데스노스는 한국에 너무 늦게 소개되었다. 한국어로는 이 책 말고 한 권이 더 번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