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2020.05.21. 드가와 함께 당구장에서

지하련 2020. 5. 22. 20:47


Billiard Room at Menil-Hubert, 

Edgar Degas, 1892, 오르세미술관 




사는 게 쉽지 않다. 하루 24시간 중 가장 좋은 시간은 잠을 잘 때. 나머지는 조금 힘들거나 많이 힘들거나, 아니면 힘들었던 것들에 대한 걱정, 두려움, 후회같은 것으로 얼룩져 있다. 아주 짧게 그렇지 않은 순간이 있기도 하는데, 그건 사랑에 빠졌거나 사랑을 꿈꾸거나, 사랑에 빠진 듯한 봄바람, 봄햇살, 봄날을 수놓는 나무 잎사귀 아래 있을 때다. 그러나 이런 순간은 극히 드물어서 기억되는 법이 없다, 없었다.


원근법적 세계에 대한 그리움. 인상주의자들에게 원근법은 고민거리였다. 르네상스 시기부터 이어져온 어떤 원근법을 벗어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원근법을 무시할 순 없었다. 그건 우리가 보는 방식 자체가 환영주의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는 것처럼 그림을 그린다는 것. 그것은 환영적 세계를 유지하면 어떤 원근법을 벗어난다는 걸 의미한다. 여기가 바로 인상주의자들이 고민했던 지점이다. 일종의 다시 보기, 다시 그리기 등이 이루어진다. 아마 원근법에 대한 현대적 접근의 정점은 데이비드 호크니가 될 것이다. 호크니의 평면 작품들은 원근법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지니고 있다. 드가도 자신의 작품을 통해 원근법에 대한 어떤 통찰을 담고 싶어했다. 살짝 가라앉는 톤으로 어두운 실내의 공간을, 그 깊이를, 그 거리감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의 안정적이고 편안한 느낌을... 


실은 우리의 삶도, 일상도 원근법적이길 원한다. 뭔가 구획되어져고 통제되며 예측가능한 구조로. 드가는 그런 공간 대신 그 공간 속의 어떤 대상(오브제)에 집중해, 흔들리는 공간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대상을 만들어낸다. 어쩌면 그는 근대 미술 최초의 고전주의자였을 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이미 원근법적 세계는 없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의 결론이며 우리 삶의 모습이다. 저 작품이 그려졌을 땐 파리 어느 저택에 놓여진 당구대 옆에서 일군의 남자들이 서서 한 손엔 술 한 잔, 다른 한 손엔 담배를 들고 당구 큐대를 들고 볼을 응시하는 한 남자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질서롭게 굴러다는 당구볼을 보면서 꿈을 꾸었을 것이다. 삶이 저렇게만 흘러간다면! 그래서 너무나도 쉽게 사랑에 빠질 수 있다면, 행복한 사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