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F.스콧 피츠제럴드

지하련 2020. 9. 20. 15:28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F. 스콧 피츠제럴드(지음), 박찬원(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두 번째로 읽은 피츠제럴드의 소설이다. <<위대한 개츠비>>는 그 명성에 비해 내 감상은 다소 실망스러웠고 내 취향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당시 미국을 잘 알 수 있는 소설이라는 점에서 풍속소설의 최고봉이라고 할 만하달까. 


이 책은 단편집이다. 다들 익히 알다시피, 피츠제럴드는 생계를 위해 단편을 엄청 쓴 소설가였다. 하지만 탁월한 문학성을 가진 단편은 몇 편 되지 않고 그의 명성에 비해 단편집에 대한 평가는 높지 않다. 현대의 단편작가들, 가령 레이몬드 카버나 엘리스 먼로 등과 비교해서도 피츠제럴드의 단편들은 뛰어나지 않다. 아마 이 점은 피츠제럴드는 잡지에 실리는 단편이 가져야 하는 흥미로움에 집중된 상상력, 그리고 20세기 초반 미국의 풍속을 드러내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일종의 한계로 작용한 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단편들이 그렇다는 건 아니다. 몇 단편들은 상당한 문학성을 지니고 있으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아마 이 책에 실린 몇 편의 작품들이 그럴 것이다. 상당히 재미있고 흥미롭다. <리츠칼튼 호텔만큼 커다란 다이아몬드>, <오 빨간 머리 마녀!>, <행복이 남은 자리> 등은 살짝 여운이 감돌기도 했다. 단편소설을 좋아하는 이들에겐 권할 만한 소설집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단편집보다 좋은 소설집이 많다는 걸 염두에 두자. 


가게들이 문을 닫고 있고 마지막으로 물건을 산 사람들이 집을 향해 어슬렁거리며 돌아가고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꿈꾸듯 천천히 돌아가는 회전목마 위에 올라앉아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젤리빈>, 27쪽) 


초록빛 달의 하늘에 특별히 등장한 구름들, 친칠라의 단편들, 구름조각들이 점점이, 어느 타타르 왕의 시찰을 위해 행렬을 이루는 동양의 값진 물건들처럼 그렇게 초록빛 달을 지나가고 있었다. 존이 느끼기에 지금은 낮이었고, 그는 머리 위 하늘에서 날아가는 어떤 젊은이들을 보는 것만 같았다. (<리츠칼튼 호텔만큼 커다란 다이아몬드>, 198쪽) 


어두운 오후였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지고 세상의 종말이 올 것만 같았다. 오직 뉴욕의 오후만이 빠져들 수 있는 그런 특별한 우울한 잿빛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바람 한 줄기가 울부짖으며 거리를 휩쓸고 내려와 낡은 신문지들과 이런저런 조각들을 휘젖고 있었고, 창문마다 작은 불빛들이 깜박이고 있었다. 너무나도 황량하여 시커먼 녹색 잿빛 하늘 속으로 사라져버린 초고층 빌딩 꼭대기가 안쓰러울 지경이었고, 그래서 이제 확실히 저런 어리석은 짓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곧 모든 빌딩들이 카드를 쌓아 만든 집처럼 무너져 내릴 것이며, 그것이 그 빌딩들을 드나들었을 수백만 위로 먼지를 날리며 냉소적인 산더미로 쌓일 것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오 빨간 머리 마녀!>, 305쪽) 


서른 다섯과 예순다섯 사이의 세월은 수동적인 정신 앞에서는 설명되지 않는, 당황케 하는 회전목마처럼 돌아간다. 사실이다. 그 세월들을 불편하게 걷는, 숨 가빠하는 말들이 돌아가는 회전목마다. 처음에는 파스텔 색깔로 칠해졌다가 희미한 회색과 갈색으로 바랜, 당황스럽고 참을 수 없이 어지러운 그런 회전목마다. 중요한 것은, 어린 시절이나 사춘기 때 타던 그 즐거운 회전목마가 아니라는 것, 젊은 시절의 가는 길이 확실하고 역동적인 롤러코스터가 분명히, 절대로 아니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남자와 여자들에게 이 삼십년 세월은 서서히 삶에서 물러나는 시간이다. (<오 빨간 머리 마녀!>, 333쪽)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은 영화화되었다. 영화를 보진 않았고 생각했던 것만큼 흥미롭진 않았던 단편이었다.  



몇 해전에 읽었던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감상평

2017/09/03 - [책들의 우주/문학] - 위대한 개츠비, 스콧 피츠제럴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8점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박찬원 옮김/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