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로마인이야기 14 - 그리스도의 승리, 시오노 나나미

지하련 2006. 3. 12. 11:36


시오노 나나미(지음), 김석희(옮김), <<로마인이야기 14 - 그리스도의 승리>>, 한길사, 2006





자신의 시대를 알고 있다는 것, 자신의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지 예견하고 있다는 것, 아니 관대하고 넓게 세상을 바라보며 과거와 현재를 견주어 문제를 진단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에게 후대의 사람들은 주저 없이 ‘배교자’, ‘시대착오’라는 표현을 서슴없이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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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에서는 세속인도 성직자도 마찬가지다. 이 로마에서 주교를 맡고 있는 사람의 호사스러운 생활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한번은 로마에서 제일가는 부자로 알려진 사람이 로마 주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를 로마 주교로 삼아주면, 내일이라도 당장 기독교로 개종하겠습니다.”
- 330쪽

율리아누스 황제가 이런 사실을 몰랐을 리 없었고 그가 시행한 일련의 개혁조치들은 기독교의 반발을 사게 된다. 이 전투적인 종교의 신봉자들에게 율리아누스 황제는 ‘배신자’였던 셈이다. 그들은 그들이 가진 불합리나 전투성, 배타성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는 대단한 흥행 속에 읽는 이로 하여금 흥미진진한 로마 세계로 독자를 끌고 들어간다. 하지만 그녀는 전문 역사학자가 아닌 소설가의 입장에 가깝기 때문에 일부 역사학자들은 그녀의 이 시리즈에 대해 탐탁치 않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정도로 재미있는 역사책도 드물다.

로마 후기는 여러 가지 문제가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가 바로 기독교의 확장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공표했을 때 확실히 엎질러진 물이 되었고 율리아누스 황제가 그 엎질러진 물을 없애고 제국을 바로 잡기에는 너무 일찍 죽었다.

종교가 ‘관용’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은 그 종교에 있어서도 불행한 일이고 그 종교를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도 불행한 일이었다. 성직자들은 귀족처럼 행세하기 시작했고 암브로시우스 주교는 황제 위에 군림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이루어진다’고 해버리자, 모든 것은 분명하게 명확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로마는 사라지고 르네상스 인들이 그렇게 경멸했던 중세의 천 년 암흑은 이렇게 시작된다. 왜 율리아누스 황제는 이를 막으려고 했던 것일까. 그는 불행한 유년을 보내고 혼자 적지에서 죽는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읽고 좋아했던 이 황제의 곁에 친구는 없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를 자처했던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아닌 다른 일을 할 수 있을까. 나에게 맡겨진 불행한 사람들을 버릴 수 있을까? 그들에게 행복한 일상을 보장하는 것이 이제 나의 책무일세. 내가 여기 있는 것은 그 일을 하기 위해서야.’

페허로 변해버린 로마의 변방에서 학창 시절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리고 황제로 즉위한 후 동방의 도시에서 그는,

‘나는 갈릴리 사람들(기독교도)이 믿는 것이 이 지상에서도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황제로서 실증해보고 싶네. 그들이 말하는 칭찬할 만한 가르침, 그들은 그것을 가난한 사람한테만 허용하고 게다가 천국에서만 달성할 수 있다고 단언하지만, 그 미덕과 행복은 현세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내가 제위에 있는 동안 정착시키고자 하는 공정한 통치를 통해, 그리고 종교와 관계없는 복지 사업을 통해 달성하고 싶다고 굳게 결심하고 있네.’

라고 적는다. 하지만 율리아누스 황제의 제위 기간은 서기 361년부터 363년, 고작 3년이었다. 너무 젊었으며 또한 불행했다.

기독교의 승리가 확실해졌을 때, 수도장관이었으며 암브로시우스 주교와 논쟁을 벌였던 퀸투스 아우렐리우스 심마쿠스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버린다. 하긴 더 이상 막기 힘들 정도로 거대해졌으니. 그리고 천 년 후 심마쿠스가 살았던 그 로마에서 신의 시대인 중세를 ‘암흑’이라고 부르며 경멸하게 되는 이유는 무얼까. 똑같은 종교를 믿는 후대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로마제국에는 율리아누스 황제와 심마쿠스만 있었던 걸까. 종종 ‘시대 착오’라는 경멸을 받는 이들이 있다. 하긴 시대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어디로 가는 지로 모른 채 앞만 향해 내달리고 있을 때, 그 앞을 가로 막고는 ‘이 길이 아니야’라고 한다면, 그건 시대에 분명 역행하는 일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비난 받아 마땅한 일이다. 현대에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와 세계화의 거대한 물결 속에서.

그런데 왜 나는 ‘시대착오’라는 단어에 더 끌리는 것일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율리아누스황제는 철학 공부를 하고 사색에 잠겨있었으면 좋았을 사람이었다. 하지만 시대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전투라고는 해보지 않은 그가 전투에서 승리했을 때 누가 그 사실을 믿었을까. 그리고 그가 일련의 개혁 조치를 시행했을 때, 그것이 왜 시행되었는지에 대해선 아무런 고려도 없이 오직 기독교를 박해했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배교자 율리아누스’라고 부른 이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걸까.



로마인 이야기 14 - 10점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한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