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공간의 종류들, 조르주 페렉

지하련 2022. 11. 19. 16:18

 

공간의 종류들 Especes d'espaces

조르주 페렉Georges Perec(지음), 김호영(옮김), 문학동네 

 

 

 

공간에 대한 산문집이다. 소설인가 싶기도 했다. 페렉의 스타일이 있다 보니. 하지만 이 책이 소설이든 에세이든 상관없다. 충분히 즐길 만하니까. 

 

공간은 이렇게 오직 단어들, 흰 종이에 적힌 기호들과 함께 시작된다. 공간을 묘사하기: 공간을 명명하기, 공간을 글로써 그리기, 해도 제작자처럼 해안을 항구의 이름들로, 곶의 이름들로, 작은 만의 이름들로 채워넣어, 마침내 육지와 바다가 오로지 연속되는 하나의 텍스트 띠로만 분리되게 만들기, 알레프, 전 세계가 동시에 보이는 이 보르헤스의 장소는 바로 알파벳이지 않을까? (27쪽) 

 

페렉은 공간들의 종류를 나열하고 그 공간들 하나하나 설명하며 자신의 생각을 적는다. 

 

침대는 그러므로 훌륭한 개인 공간이며 육체를 위한 최소한의 공간(침대 - 단자monade)이고, 빚 투성이의 인간조차도 간직할 권리가 있는 공간이다.(33쪽) 

 

그 공간을 지나치는 페렉 옆에 서서 주위를 두리번 거리고 내가 생각하는 그 공간에 대해서 덧붙일 수 있다.

 

나는 도시 사람이다. 도시에서 태어나 자랐고 도시에서 살아왔다. 나의 습관, 나의 리듬, 나의 어휘는 도시 사람의 습관이고 리듬이며 어휘다. 도시는 나의 것이다. 나는 도시에서 내 집에 있는 느낌을 받는다. 아스팔트, 콘크리트, 철책, 그물처럼 나있는 거리들, 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이어지는 회색빛 건물 외관들, 이런 것들이 나를 놀라게 할 수도 있고 내게 충격을 줄 수도 있는 것들이다. (114쪽) 

 

시골에 대한 챕터에서 가장 인상적인 문장은 역설적으로 도시 사람이라는 표현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시골사람인가 도시사람인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도시 사람이 되다만 시골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유년기 시절의 경험은 생애 전반을 물들이며 끊임없이 손짓한다. 

 

페렉의 서술은 참 좋았고 재미있었다. 그의 상상력과 아이디어가 돋보였다. 아주 오래 전에 페렉의 소설 한 권을 읽은 후론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데, 이 책을 계기로 다시 읽어봐야겠다. 추천할 만한 책이다. 책 마지막 부분에 아래 글이 나오는데, 마음에 들어 옮겨놓는다. 결국엔 공간을 이리저리 옮겨다니가 공간 속에서 사라질 운명일 테니, 끝은 우울한 걸까. 

 

 

공간(이어서 그리고 끝)

 

나는 안정되고, 고정되고, 범할 수 없고, 손대지 않았고 또 거의 손댈 수 없고, 변함없고, 뿌리깊은 장소들이 존재하기를 바란다. 기준이자 출발점이자 원천이 될 수 있는 장소들: 

 

나의 고향, 내 가족의 요람, 내가 태어났을지도 모르는 집, 내가 자라나는 것을 보았을지도 모르는(내가 태어난 날 아버지가 심었을 지도 모르는) 나무, 온전한 추억들로 채워져 있는 내 어린 시절의 다락방 ... 

 

이런 장소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곳들이 존재하지 않기에, 공간은 질문이 되고, 더는 명백한 것이 못 되며, 더는 통합되지 않고, 더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공간은 하나의 의심이다. 나는 끊임없이 그곳을 기록해야 하고 가리켜야 한다. 공간은 결코 내 것이 아니며, 한 번도 내게 주어진 적이 없지만, 나는 그 곳을 정복해야만 한다. 

 

나의 공간들은 부서지기 쉽다. 시간은 그것들을 마모시킬 것이며 그것들을 파괴할 것이다. 어떤 것도 그전에 있던 것과 유사하지 않을 것이고, 내 기억들은 나를 배반할 것이며, 망각이 내 기억 속에 침투할 것이고, 나는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채 가장자리가 다 해지고 색이 바랜 사진들을 쳐다볼 것이다. 코키예르거리의 작은 카페 유리창에 아치 형태로 붙어 있던, 흰색 자기 문자 글들도 더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전화번호부를 이용하세요" 그리고 "간단한 식사 항시 가능". 

 

공간은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듯 사라진다. 시간은 공간을 데려가 형태를 알 수 없는 조각들만 내게 남겨놓는다. 

 

글쓰기: 무언가를 붙잡기 위해, 무언가를 살아남게 하기 위해 세심하게 노력하기, 점점 깊어지는 공허로부터 몇몇 분명한 조각들을 끄집어내기, 어딘가에 하나의 홈, 하나의 흔적, 하나의 표시, 또는 몇 개의 기호들을 남기기. 

 

파리

1973~1974년 

 

조르주 페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