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우주/음악

아르보 페르트 CD 박스 세트

지하련 2022. 12. 1. 16:26

 

책도, 음반도, 인터넷이 등장하고 오프라인 상점들에서 사라져가니, 그 신비감도 사라졌다.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부재란 언제나 신비한 법이다. 예전엔 신문, 잡지 등을 통해서 제한적으로 새 책이나 새 음반을 확인했고, 일부는 그런 경로로도 확인할 수 없어 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다가 지인에게 소개받거나 우연히 들른 상점에서 발견하는 보물들이 있었다. 그런 보물들은 대체로 소리 소문 없이 서점이나 음반 가게에 깔리곤 사람들 사이에서 소문이 떠돌 때쯤, 더 이상 살 수 없거나, 지방 도시 변두리나 시골 읍내 작은 가게를 뒤져야 겨우 나오는 진기한 존재가 되었다. 나는 레코드판이 사라지고 시디가 주류가 되어갈 때쯤 상당히 좋은 음반들은 문 닫기 직전의 가게들에서 구했다. 

 

그러나 지금은 검색하면 된다. 검색하면 원하는 책이나 음반을 구할 수 있는지 없는지 바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편리함은 결국 우리에게 이 세상의 아름다웠던 어떤 신비를 앗아갔다. 이젠 누가 언제 무엇을 냈는지 바로 알 수 있다. 심지어 어디에 몇 권이, 몇 장이 남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아예 전 세계 웹사이트를 돌아다니며 구하기도 한다. 내 경우에도 한동안 첼리비다케에 빠져, 그가 지휘한 모짜르트 레퀴엠을 구하고자 전세계를 뒤진 적이 있었다(하지만 막상 어렵게 구해 들어보니, 아, 레퀴엠은 극적인 비장미가 넘쳐야 되는데 그런 건 없고 너무 느릿느릿....). 

 

보이지도 않고 닿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원한다면 언젠가는 보게 될 것이며 닿게 될 것이다. 사랑했던 누군가와도 그렇게 만나고 헤어진다. 과거의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어떤 일부를 신비스럽게도 우리 안으로 품었다. 그리고 기다리고 염원하고 고대했다. 하지만 지금은 검색부터 한다. Social Media 계정을 확인하고 온라인에서 흔적을 더듬는다. 그런데 스트리밍 서비스는 최악이다(나 또한 그 편리함때문에 종종 이용하고 있지만). 좋지 않은 음질과 감상 환경은 음악 듣기는 가치 없게 만들었다. 제대로 들어야 하는 음악이 있다. 하이파이 시스템을 갖추어놓고 들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 음악은 다르다. 스트리밍 음원을 하이파이에 연결해 듣는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 애초에 레코드판으로 저장되어 흘러나오는 아날로그와 시디나 디지털파일로 저장되어 플레이되는 음원은 그 세세한 디테일에서부터 다른 존재다. 그러나 세상은 변했고 더이상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젠 스트리밍으로 인해 일부 음악인들은 음반을 내지 않는다. 또는 한 번만 내곤 더 이상 만들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음반이 잘 팔리지도 않을 뿐더라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수익은 만들어지고 있으니까. 

 

아르보 페르트는 정말 좋다. 그의 음악은 감미로운 선율에서부터 극적인 미니멀까지, 특히 현대에 보기 드물게 미사곡을 작곡하며 듣는 이를 매혹시킨다. 대중적인 작곡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대중적이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의 몇몇 작품들은 대중들에게 너무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스트리밍으로 찾아 듣기도 하지만, 제대로 듣기에는 음반을 사야 된다. 시디 데크에 시디를 넣고 한 장 한 장 집중해 듣는다. 이 경험은 종종 놀랍다(나는 그렇게 베토벤 교향곡 전체를 며칠에 걸쳐 듣기도 했다. 요즘엔 말러 교향곡 전체를 그렇게 듣고 있다).

 

브릴리언트 클래식은 모짜르트 박스 세트로 세간의 주목을 받은 레이블이다. 저작권이 끝난 음원들을 모아 박스세트로 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번 아르보 페르트 박스 세트도 좋다. 특히 아르보 페르트 음반을 고르기 어려운 이들에게 이 박스 세트는 추천할 만하다. 여기서 듣고 좋은 음반을 찾으러 가는 출발지가 될 수 있을 테니.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품절 상태였는데, 온라인몰에 다시 입고되었다. 조만간 다시 품절될 것이니 이번에 구해 두시길. 아르보 페르트 연주 음반은 ECM에서 상당히 많이 나왔는데, 최근에는 다양한 레이블에서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