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이상한 날씨, 올리비아 랭

지하련 2023. 1. 3. 19:24

 

 

이상한 날씨 (Funny Weather - Art in an Emergency)

올리비아 랭Olivia Laing(지음), 이동교(옮김), 어크로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전달하기 위해 이미지를 만든다. 이미지로 하여금 우리가 갈 수 없는 곳에 가고, 더는 할 수 없는 말을 하게 한다. (205쪽)

 

예술은 학문이 아니다. 그것은 즉흥적으로 도달한 비상구, 한때 사람이 살았던 섬뜩한 공간을 오가는 일이다. (209쪽)

 

 

오랜만에 예술 관련 책을 읽었다. 좋았다. 그건 예술 관련 책이라서기보다는 올리비아 랭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그녀의 글은 상당히 좋다. 예술에 대한 사랑이 있고 예술가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 그녀는 예술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사랑하는지 안다. 그래서 글은 깊이 있으면서도 따뜻한 진지함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한국의 많은 저자들이 예술에 대한 잡다한 지식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예술에 대한 사랑은 전혀 묻어나오지 않는 글이나 책을 내는 걸 보고, 그런 책들이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라가는 걸 보면서 불쾌함을 느끼던 나로선 올리비아 랭의 책들이 여러 권 번역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은 일이다.

 

예술이 지금 같은 위기의 시대에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조지 슈타이너George Steiner는 1967년에 발표한 유명한 에세이를 통해 아우슈비츠의 지휘관이 밤에는 괴테와 릴케의 작품을 읽고 아침에는 강제수용소 임무를 수행하더라며, 예술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장 숭고한 기능을 실패한 증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건 예술이 무슨 특효약이나 되는 양 인간의 분별력과 도덕적 능력을 재조직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동시에 인간의 자유의지는 간과한 평가다. 공감은 디킨스의 책을 읽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수고를 들여야 한다. 예술이 하는 일은 새로운 인물, 새로운 공간과 같은 생각거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친구여, 그대 하기에 달렸다. (14쪽)

 

하긴 조지 슈타이너의 생각에 공감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후로 서정시는 없다고 한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었을 테니. 그러나 예술의 실패까지 이야기한 건 과한 표현이기도 했다. 올리비아 랭의 이 책은 다양한 예술가와 작품들을 스쳐지나가며 현대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현대 예술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지금 예술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는가를 찬찬히 살피고 있다. 

 

1999년에 출간된 획기적인 에세이 <<섹스와 고립Sex and Isolation>>에서 평론가 브루스 벤더슨Bruce Benderson은 이렇게 평한다. “우리는 극도로 혼자다. 그 무엇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오늘날의 텍스트와 이미지는 진짜로 새겨진 듯 보이지만 결국엔 지워지는, 일시적으로 투과되지 못한 빛에 불과하다. 스크린 속 언어와 그림이 제 아무리 오래 머문다 한들 단단한 실체는 없다. 결국엔 환원될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54쪽)

 

그래서 어떤 문장은 참 아프다. 20세기 후반, 21세기 초반은 인류 문명이 가장 고도로 발달한 시대인 동시에 어쩌면 가장 외롭고 쓸쓸한 시대일 지도 모른다. 사람들 속에 둘러싸여 있지만, 반대로 그 만큼 더욱 혼자라는 생각을 가지는, 이율배반적인 시대인 셈이다. 지금 여기의 고통, 고난을 벗어나기 위해 길을 떠나던 헬레니즘 시대와 달리 현대는 오늘 떠나고 내일 떠나도 그 쓸쓸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과감하게 극단적 실험과 개념적인 추상을 불러들였는지도.  



우리는 종종 예술이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말을 듣곤 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예술은 우리의 도덕 풍경을 조성하고 타인의 삶 내부를 우리 앞에 펼친다. 예술은 가능성을 향한 훈련의 장이다. 그것은 변화의 가능성을 꾸밈없이 드러내고 우리에게 다른 삶의 방식을 제안한다. 온통 빛으로 벅차오르길 원하지 않는가? 만약 그렇게 된다면 어떤 일이 펼쳐질까? (21쪽)

 

이런 점에서 나는 데이비드 호크니의 제안은 너무 신선하고 때론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그는 다양한 장르의 이동과 실험들로 회화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몇 되지 않는 현대 예술가이다. 

 

1960년 여름에는 남성을 향한 사랑을 자유롭게 드러낸 월트 휘트먼Walt Whitman과 C.P.카바피 C.P. Cavafy의 시를 읽으며 자신의 성 정체성을 솔직하면서도 유익한 방향으로 수용하는 법을 찾게 되었다. (121쪽)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현대미술가 여럿을 새로 알게 되었다. 예술의 역사 상 20세기는 그야말로 예술가의 시대이기도 하다. 너무 많아서 이루 헤아릴 수 없지만, 그래서 우리는 정작 알아야 하는 작가를 놓치는 경우가 더 많다. 상자에 모든 걸 바친 조지프 코넬도, 그의 작품을 보지 못한 건 아니지만, 이 책을 통해 다시 바라보게 된 작가이다.

 

‘상자’는 조지프 코넬Joseph Cornell의 인생을 대표하는 메타포이자 꿈의 공장이라 할 만한 그의 아름답고도 불편한 작품의 특징적인 요소다. (129쪽)

 

Untitled (Celestial Navigation), 1956-58. Courtesy of Quicksilver/The Joseph and Robert Cornell Memorial Foundation/Vaga, NY/Dacs




마지막 대작은 1960년대 중반에 나온다. <구름 위 하늘 Sky Above Clouds>. 비행기 창문 너머로 발견한 짜릿한 전망. 그녀의 작품 가운데 가장 독특한 연작으로, 파란 색과 분홍 색이 뒤섞인 하늘 위로 흰 구름이 마치 수련 꽃잎처럼 둥둥 떠 있는 작품은 가히 어린 아이가 그린 듯한 단순한 화법과 부드러운 색감이 돋보인다. (165쪽)

 

Georgia O&rsquo;Keeffe, Sky above Clouds IV, 1965

 

스미스는 이타주의나 관용처럼 이기적이지 않은 공공의 가치를 신봉하고 새로운 사상이나 타인을 향한 환대를 널리 전파해야 한다고 믿는다. (286쪽)

 

그 역시 셰익스피어의 희곡 속 토머스 모어 경이 부르짖는 “태산 같은 비인간성”을 지적하고 저항하는 힘으로서의 예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connection을 만들어내는 힘으로서의 예술에 확고한 믿음을 지닌 작가다. (291쪽)

 

“예술은 마음의 문을 열고 ‘나’라는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다. 예술은 바로 그런 것이다. 세상을 사는 사람이 만든 것이고 그들의 상상력도 함께 따라온다. 시대와 역사와 개인의 인생사를 막론하고 다가올 인생은 제압할 수 없다. 마치 세상에 빛과 어둠이 깔리는 것처럼. 그러나 때가 되면 우리는 활기찬 상상력과 함께 그 빛과 어둠을 넘나들 수 있을 것이다." - 앨리 스미스 (293쪽)

 

Ali Smith

 

설마 알리 스미스를 모르는 이는 없겠지. 

 

그 외에도 많은 예술가들이 등장한다. 글들은 대부분 짧지만, 긴 여운을 가지고 있다. 내가 더가디언(theGuardian)에서 스크랩해 놓은 데릭 저먼의 <<Modern Nature>>에 대한 글도 올리비아 랭의 것이었다. 

 

하나의 운동으로서 개념 미술을 독특하게도 비존재성에 집착을 보였고, 소멸이나 모든 종류의 사라지는 행위에 사로 잡혀 있었다. 특히나 이를 몸소 실현한 사람이 바로 위대한 개념미술가로 손꼽히는 사진작가 키스 아넷Keith Arnatt이다. 호기심을 자아내는 위트 있는 그의 예술은 철회와 삭제에 집중한다.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던 아넷은 상자를 땅에 묻고 구덩이 안을 잔디와 거울로 둘러서 길게 드리운 그의 그림자가 아니었으면 알아볼 수 없었을 감쪽같은 착시 작품을 만든다. 
가장 잊지 못할 작품은 아홉 장의 순차적인 사진을 격자 무늬로 정렬한 1969년 작 <나의 매장(텔레비전 방해 프로젝트)Self-Burial (Television Interference Project)>이다.(321쪽)

 

Keith Arnatt, Self-Burial (Television Interference Project), 1969

 

Keith Arnatt, The Absence of the Artist, 1968

 

Keith Arnatt, I&rsquo;m a Real Artist, 1969-72

 

애커는 스스로 지어내고 신화화한 정점의 반문화 슈퍼스타이자 입이 거친 비트 세대 바이커이고, 꼼데가르송을 차려입은 보디 빌더이며, 사드 후작과 윌리엄 버로스의 문학적 사생아다. (357쪽)


 

캐시 애커의 책은 아직 번역되지 않았지만, 아마 조만간 소개될 것이다. 아니면 내가 번역해 볼까. 

 

올리비아 랭의 다른 책들도 읽고 소개해볼까 한다. 의외로 많이 번역 소개되었더라. 좋은 예술가들을 많이 소개해준 올리비아에 감사를 전하며. (아참, 이 책에는 도판이 없다. 그러니 손수 검색해보면 더 좋을 것이다. 그녀가 더가디언이나 프리즈에 기고한 칼럼을 보면 도판이 들어가 있긴 하지만)

 

 

 

올리비아 랭